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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몸은 조상이 빚고, 얼은 우리말이 엮는다"
'광주문화방송' 한글 표기 사건 통해 알게 돼
시대 건넌 '한글 인연'…서재필 한창기 김낙곤
사투리를 '지방 표준어'로 본 '한글 중심주의자'
10월은 '문화의 달'입니다. 1년 중 문화 활동에 가장 좋은 계절이라서, 나라에서 그렇게 정했을 겁니다. 하지만 10월에 한글날(9일)이 들어 있지 않았다면 '문화의 달'이란 말이 꽤 허전하고 공허하게 들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업에서 석유와 반도체가 피와 살 노릇을 하듯이, 한글은 한국 문화의 피와 살이요 고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석유와 반도체 없는 산업을 생각할 수 없듯이, 한글 없는 한국 문화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문화의 달을 맞아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위업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까닭입니다.
1976년 순한글 가로쓰기 잡지 를 창간한 한창기 선생 (1936~1997년). 광주문화방송 제공
<광주문화방송> 한글 표기 사건 통해 알게 돼
한글이 아무리 훌륭해도 이를 갈고 닦아온 사람들이 없었다면 한국 문화는 중국, 일본, 미국에서 들어온 외래문화에 치여 추풍낙엽처럼 추락했을지 모릅니다. 한글과 한국 문화의 추락을 막아낸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1976년 순한글 가로쓰기 잡지 <뿌리 깊은 나무>를 창간한 한창기(1936년~1997) 선생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책깨나 읽고 글깨나 쓴다는 지식인 중에서 잡지 <뿌리 깊은 나무>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그 잡지의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던 한창기 선생을 아는 사람은 매우 적은 것 같습니다. 저도 재작년까지는 그런 축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한창기'라는 이름 석 자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어슴푸레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우연한 사건'을 통해 한 선생을 좀 더 알게 됐고,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습니다. 바로 그 우연한 사건이, 2022년 10월부터 시작한 <광주문화방송>의 회사 이름 '한글 표기' 사건입니다.
<광주문화방송>이 그때부터 '광주엠비시(MBC)'가 아니라 '광주문화방송'이라고 쓰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일개 지방 방송사인 <광주문화방송>이 한국의 방송 역사, 더 나아가 한글 운동 역사에 길이 남을, 역사를 쓰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방송> 등 일부 방송사들이 한글날을 기념한답시고 그날 하루만 영어 회사 이름 대신 한글 회사 이름을 화면에 표시해 왔습니다. 그런데 <광주문화방송>이 이를 상시화한 것입니다. 물론 회사 직원들이 전부 찬성하는 것은 아니어서, 사장이 바뀌면 이런 일도 없어질지 모릅니다. 부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1976년 창간된 순한글 가로쓰기 잡지인 뿌리 깊은 나무 창간호 표지
시대 건넌 '한글 인연'…서재필 한창기 김낙곤
<광주문화방송>의 한글 회사 이름 사용에 대한 평가는 내부보다 외부, 지역보다 중앙에서 더욱 컸습니다. 매년 한글날쯤에, 한 해 동안 한글을 잘 지키거나 가꿔온 사람이나 단체를 뽑아 상을 주는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대표 이대로)이라는 단체가 2023년 '우리말 으뜸 지킴이상' 수상자로 <광주문화방송>을 선정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앞서 1월에는 이 방송의 김낙곤 사장이 서재필언론상을 받았습니다. 서재필언론상 선정위원회는 농민 문제와 지역 균형발전, 호남 소외 극복이라는 일관된 저널리즘 정신을 실천해 온 점을 수상 이유로 꼽았습니다마는 저는 한글 사명의 사용 결단도 수상자 선정에 크게 작용했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보도와 입소문을 통해 중앙뿐 아니라 지역사회에도 서서히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이 역사와 인물의 얽힘입니다. 한창기 선생은 보성 출신입니다. 서재필 선생도, 김낙곤 사장도 보성 출신입니다. 같은 지역 출신이지만 서로 전혀 다른 시기를 산 세 사람이 '한글'이라는 것을 매개로 만나는 것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손'이 역사를 주무르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재필 선생은 잘 아시다시피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펴낸이입니다.
한창기의 문제 제기가 실현되기까지 46년
저는 우연히 <광주문화방송>의 한글 회사이름 사용 소식을 광주 출신 선배 언론인한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일을 돕고 지원할 수 없을까 고민했습니다. 가진 재주가 글 쓰는 것이니까, 당시 제가 시민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오마이뉴스>에 그와 관련한 기사를 썼습니다. 나름의 파장이 있었습니다. 그때 기사를 준비하면서 한국 방송사들의 영어 이름표기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처음 지적한 사람이 한창기 선생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처음 알게 됐습니다. 돌아보면 <광주문화방송>의 한글 회사이름 표기는, 한창기 선생이 1976년에 제기한 문제의식을 46년 만에 실현한 문화적 대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이 한창기 선생의 그와 관련한 글입니다.
"우리의 귀에 익은 미국의 '엔비시'나 '시비에스'의 방송국들도 이 호출부호가 따로 있고, '엔비시'나 '시비에스'라는 이름들은 제 나라말로 된 제 이름의 머릿글자들을 따서 만든 제 나라말 약칭이다. 이것을 보고 서양 시늉하기를 좋아하기로 세계에 이름을 떨친 일본 방송국이, 굳이 약칭이 필요하거든 제 나라 글자로 할 것을 잊고 '스타일'을 한 번 내보려고, 비록 제 나라말로 된 이름의 소리를 로마자로 음역한 것을 머릿글자로나마 '엔에이치케이'라 했다."(<뿌리 깊은 나무>의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라는 글 중에서)
저는 이 글을 보면서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지적입니까? 한창기 선생은 이렇듯 우리 사회에서 쓰고 있는 말과 글의 문제를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고, 바로잡으려는 문화운동가였습니다.
2022년 10월부터 화면에 한글 이름 사용하는 광주문화방송
문화운동가 한창기 "말과 글은 같아야 한다"
제가 볼 때 한 선생은, 세상을 한 반세기 정도 앞서 살다 가신 선구자입니다. 브리태니커 한국 지사장을 할 정도로, 당대에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가장 잘 구사했으면서도 한글을 가장 중시하고 사랑했습니다. 세계 문화의 흐름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우리 민속과 토속 문화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발굴해 알리는 데 힘썼습니다. 정기 판소리 감상회 100회 개최 및 판소리 악보화, 종합인문지리지 <한국의 발견> 11권, <민중자서전> 20권 발간 등의 활동만 봐도 한국 문화와 얼을 찾아내고 닦고 알리는 데 얼마나 힘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한 선생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지금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케이(K) 문화의 원조', '한류의 원조'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생전에 쓴 글을 거의 전부 모아 펴낸 <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 <샘이 깊은 물의 생각>, <배움 나무의 생각>(휴머니스트, 한창기 지음, 윤구병 김형윤 설호정 엮음, 2007년 10월) 3권의 책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은 그의 언어에 관한 생각을 중심으로 엮은 책이어서 그의 한글관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한창기 선생은 말과 글의 일치, 즉 언문일치를 중시했습니다. 한 선생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는 말과 글이 따로 노는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일상의 말과 글을 구분하는 것은 지식인이 서민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저도 한 선생의 이런 언어관을 본받자는 생각으로, 제가 칼럼니스트로서 <시민언론 민들레>에 쓰는 칼럼을, 2022년 12월부터 모두 '했습니다' 체, 즉 구어체로 바꿔쓰고 있습니다. 그의 생각을 들어보시죠.
"입말과 글말의 일치-이것은 모든 언어학자들이 바라는 바다. (…) 학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이 글로 쓰는 말보다 훨씬 더 시원적이고 인간에게 중요함을 일러 준다. 따라서 나는 서술어의 활용에서 입으로는 이렇게 말라고 글로는 저렇게 쓰고 함을 역겨워한다. 우리가 말할 때에 상대방에게 '해요' 하거나 '해' 하면 글로 적을 때에도 상대방을 그 상대방으로 삼고 '해요' 하거나 '해' 하는 걸 보고 싶다."(1975년 <배움나무>의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글로는 저렇게 쓰고'라는 글 중에서)
실제로 제가 언문일치체로 칼럼을 써보니, 많은 변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선 내 앞에 있는 상대방(독자)과 마주 앉아 대화하고, 상대를 존중한다는 생각이 글을 쓰면서 저절로 생겨났습니다. 자연스럽게 문장에서 권위적인 모습이 없어지고 문장도 쉬워졌습니다. 이런 게 바로 한 선생이 '말과 글의 일치'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민중 사랑' '한글 사랑'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우리 몸은 조상이 빚고, 얼은 우리말이 엮는다"
둘째, 한 선생은 우리말을 우리의 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얼을 중국말, 일본말, 영어말이 갉아 먹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지녔습니다. 우리 얼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말을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이런 사상은 <뿌리 깊은 나무>의 창간사인 "도랑을 파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하고'라는 글에 잘 담겨 있습니다.
"조상의 핏줄이 우리 몸을 빚는다면, 그 몸을 다스리는 우리 얼은 우리말이 엮습니다. <중략> 따라서 <뿌리 깊은 나무>는 그 안에 실리는 글들을 되도록 우리말과 그 짜임새에 맞추어서 지식 전달의 수단이 지식 전달 자체를 가로막는 일이 없도록 힘쓰려 합니다. 또 우리말과 그 짜임새를 되살려 새로운 시대에 알맞은 말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분들의 일에 보탬이 되려고 합니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외래어 범람으로 사라지는 한글을 지키려고 힘썼습니다. 특히,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일본어의 범람, 일본어 투의 부활을 가장 경계했습니다. 한 선생은 "외래어 하나가 들어오면 우리말에 새로운 어휘 하나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 하나를 소멸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 문장 구조를 왜곡시킨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혼이 무너지고 사라진다고 본 것이죠.
지금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친일매국 행위자를 지지하며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자들이 한국의 역사와 이념을 다루는 기관장에 속속 들어앉고 있는데, 아마 한 선생이 살아계신다면 가장 큰 불호령을 내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한겨레신문 창간호 1면. 일간지로는 최초로 1988년 5월 창간 때부터 순한글 가로쓰기 형식을 채택했다.
사투리를 '지방 표준어'로 본 '한글 중심주의자'
그렇다고 한 선생이 외래어 사용을 무조건 반대한 국수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외래어 유입에 따른 우리말의 소멸과 문장 구조의 왜곡, 궁극적으로는 우리 얼의 파괴를 걱정한 애국, 애민주의자였습니다. 그가 토속어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민중 자서전' 편찬과 판소리 살리기 작업에 힘쓴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한글만을 쓰자는 한글 전용주의자라기보다는 한글과 우리 문장을 먼저 튼튼하게 다지는 게 중요하다고 본, '한글 중심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한 선생의 사투리 사랑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한 선생은 표준어의 강요로 지역 특유의 우리말이 사라지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사투리를 표준어에서 배제해야 할 변방의 말이 아니라 '지방 표준어'로 생각했습니다. 한 선생은 1978년 <국제신보>에 쓴 "경상도 사투리'라는 글에서 표준어와 사투리의 관계에 관한 생각을 밝혔습니다.
"국어는 더 통일되어야 한다. 그러나 획일화보다는 융합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 그러나 '자기'라는 뜻의 '이녁' 같은 어휘를 사투리라고 해서 무턱대고 내팽개치고, '했습니다' 대신의 '했심더' 와 같이 더 발전된 언어 형식일지도 모를 서술어의 활용을 얕잡아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지방말의 어휘나 표현이나 형식을 과감하게 양성화하여 자랑스런 한국말의 일부분으로 등록해야 할 날이 올 성싶다."
표준어로 획일화할 것이 아니라 표준어와 사투리의 공존을 주장했습니다. 획일화보다는 다양성을 강조했습니다. 모든 것이 획일화하여 다양성이 없어지는 요즘 시대에 더욱 필요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배기 토속말 가득한 판소리 복원도 힘써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토박이말에 대한 애정으로 나타났습니다.
"토박이말이란 우리가 어머니 품에서부터 배워 온 어미말(모국어)을 말합니다. 이 어미말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서 우리 피와 살처럼 되어 있는 말입니다. 이 어미말은 그것이 없이는 한순간이라도 지내기 어려울 만큼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 자기의 정신이나 몸을 순수하게 지켜나가려는 본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순수한 어미말이 남의 말이나 글로 인해서 조금이라도 더럽혀지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더구나 말이 우리의 정신과 의식구조 형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이나 크기 때문에 언어의 더럽힘은 바로 우리 정신문화의 더럽힘이 되는 것입니다."(1974년 <수도여자사대 학보>의 '토박이말과 기업' 글 중에서)
한 선생이 <민중 자서전>(전 20권) 발간에 힘을 쏟고 판소리의 복원과 보급을 위해 노력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바로 거기에 진짜배기 토박이말이 가득하다고 생각했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 밖에도 한 선생은 우리 글에서 '있어서'와 '있어서의'의 사용, '때문'과 '까닭'의 혼동, 영어의 영향으로 '아뇨'의 뜻이 바뀌는 문제 등 일상생활의 말글 사용에 관한 문제에도 자나 깨나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이렇듯 사람들이 평소에 잘 거들떠보지 않는 작고 가느다란 것들을 늘 머릿속에서 궁굴리고 있었고, 그것들로 밥 먹는 동안만큼은 먹는 일에 몰두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욕구를 방해했다."(<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의 '엮은이의 말-한창기의 생각, 그 작고 가느다란 것들의 아름다움' 중에서)
<독립신문>에서 <뿌리 깊은 나무>, 다시 <한겨레>로
한 선생의 한글에 끼친 영향은 이에 그치지 않습니다. 1896년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의 정신을 이어받아, 1976년에 해방 뒤 최초의 순한글 가로쓰기 잡지인 <뿌리 깊은 나무>를 발간했습니다. 이것은 이후 한국의 언론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시 <뿌리 깊은 나무>의 발간은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형식에서 매우 혁명적이었습니다. 우선 한글의 흐름에 맞는 가로쓰기를 언론출판 사상 처음으로 도입했습니다. 읽기에 편한 가로쓰기에 그치지 않고 언론출판계에 보기 좋은 편집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불어넣었습니다. 한글의 아름다움을 살린 '뿌리 깊은 나무' 서체의 개발·사용, 최초의 아트 디렉팅 편집 도입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국의 언론계는 최초의 순한글 가로쓰기 잡지 <뿌리 깊은 나무>가 없었다면, 지금도 일본이 남긴 관행에 따라 한문 혼용의 세로쓰기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뿌리 깊은 나무>의 선구적이고 도전적인 실험이 있었기에, 1988년 5월 최초의 순한글 가로쓰기 신문인 <한겨레>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5년 <중앙일보>의 동참과 함께 지금처럼 거의 대다수의 종합일간지가 순한글 가로쓰기를 택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언론사의 관점에서 보면, 최초의 한글 신문 <독립신문>과 1988년 이후 자리 잡은 순한글 가로쓰기 일간지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 선생의 <뿌리 깊은 나무>가 해줬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의 업적만으로도 한 선생은 한국 언론의 최대 기여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순천 시립 '뿌리 깊은 나무 박물관'
한 선생은 반세기를 앞서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잊힌 감이 있습니다. 또 언론계 주류가 아닌 변방의 출판계 인사이기 때문에, 출판 활동을 하면서도 무슨무슨 '사단' 같은 그룹을 만들지 않고 활동했기 때문에 그런 면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화와 창조의 힘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지금이야말로 한 선생을 다시 불러와 조명하고 재평가하고 기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수년 전 낙안읍성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낙안읍성을 둘러보고 귀가하는 중에 바로 앞에 '뿌리 깊은 나무 박물관'이 서 있는 것을 봤습니다. 하지만 들어가 보지 않았습니다. 아니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지나쳤습니다. 아마 지금이라면 낙안읍성은 들리지 않더라고 박물관은 들렸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 사이에 그만큼 제 마음속에 한 선생이 차지하는 몫이 커진 것입니다.
(편집자 주 : 이 글은 9월 28일 순천대 박물관에서 열린 한창기 선생을 기리는 <뿌리깊은나무 학예제>에서 필자가 발표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