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일에서 벗어난 그녀가 ‘글쓰기’를 시작했다. 세상사든 연애사든 속속들이 꿰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소설 쓰기는 가당찮았다. 언감생심 은은한 문향을 꿈꾸며 감성에 맞는 수필에 엎드렸다. 수필을 쓴다는 건 결국 자신을 쓰는 것, 내밀한 제 속을 들여다보면서 눈으로 마음으로 세상을 읽고 깊이 사유하며 자연과도 교감하는 길이다.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가 일상이 되고 글 동네에서 보낸 세월도 어언 20년을 훌쩍 넘겼다. 어쩌자고 갈수록 앞이 막막하여 애가 마른다. 스스로 짊어진 글 짐에 눌려 절뚝거리고 허우적대기 일쑤이니 속이 타들어 간다.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지만 과감히 튀어 볼 주제 또한 못 되기에, 몸이 받아 내는 스트레스가 오죽하랴. 비명을 삼킨 몸이라도 우선 달래 줘야 글줄도 나아갈 텐데 생각만 얽히고설킨다.
운동 겸 취미로 배우는 한국무용 수업을 마치고 단골 맛집에 들렸다. 오후 4시 반을 넘어가는 시점, 깨끗이 정돈된 식당 안엔 중노인 남자 3명이 밥상 겸 술상을 벌려 놓고 이야기 한 상도 곁들인 판이다. 근처 상가의 점주들로 짐작이 갔다. 그들을 등지고 몇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그녀는 이 식당의 주메뉴인 황태구이를 시켰고, 매콤하면서 고소한 맛과 향긋한 쌈 채소에 정신이 팔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여자와 10년째다.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는데, 일주일에 한 번이라는 그 여자의 남편보다 나하고 더 많은 밤을 보냈다.”
파란 잎채소에 노릇한 황태구이 한 토막을 올려 싼 쌈밥이 그녀의 손바닥에서 미끄러진다. 정신이 어질어질 하다.
“다 좋은데 돈을 너무 밝히는 게 탈이야.”
캑캑, 급하게 넘긴 쌈밥에서 매운 양념이 목구멍을 공략하는 통에 숨길이 따갑다. 찬물 한 컵을 들이킨 그녀, 오늘따라 입천장을 찌르는 황태 잔가시를 애써 발라내고 물김치 국물을 후루룩 넘긴다. 고개를 숙여 다시 구이 한 쌈을 얌전히 싸며 갈등한다. 그만 나가 버려? 아니, 쟁여 온 세월이 얼마인데 이 정도를 못 참아?
취기 오를 남자들의 육담은 의외로 당당하다. 책이건 사람이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는 있는 법이거늘, 아무 쪽이나 펼쳐 함부로 본능적이고 노골적으로 독자를 우롱하는 황당한 소설을 보았나. 우연히 집어 들었다가도 첫 줄을 읽다가 홱 던져 버릴 책, 애당초 살내 품은 글 향은 고사하고 뜨거운 숨결의 애틋한 구절 하나 없이 단도직입인 저 통속 애정 소설, 저작자는 기승전결을 어떻게 끌고 갈 참인지. 행간에 빛나는 반전이라도 숨겨 놓았는지, 그건 알 수 없지만, 그녀는 한 가닥 희미하게 남아 있던 소설 쓰기에 대한 미련은 그만 내려놓는다.
20여 년 전에도 그녀가 자의적으로 놓쳤던 소설 쓰기, 지금은 아쉬움 없이 놓치기로 한다. 사실이나 허구의 이야기를 작가의 상상력과 구성력을 가미해 다양한 세계를 제시하는 그 어떤 다른 장르의 소설이지라도….
무엇이 문제인고,
세상은 변화무쌍한데 그녀의 독서는 아직도 ‘느리다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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