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숙 시 모음 2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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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홍윤숙
보리 이삭 누렇게 탄 밭둑을
콩밭에 김매고 돌아오는 저녁
청포묵 쑤는 함실 아궁이에선
청솔가지 튀는 소리 청청했다
후득후득 수수알 흩뿌리듯
지나가는 저녁비, 서둘러
호박잎 따서 머리에 쓰고
뜀박질로 달려가던 텃밭의 빗방울은
베적삼 등골까지 서늘했다
뒷산 마가목나무 숲은 제철 만나
푸르게 무성한데
울타리 상사초 지친 잎들은
누렇게 병들어 시들었고
상추밭은 하마 쇠어서 장다리가 섰다
아래 윗방 낮은 보꾹에
파아란 모기장이
고깃배 그물처럼 내 걸릴 무렵
여름은 성큼 등성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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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홍윤숙
한 시대 지나간 계절은
모두 안개와 바람
한 발의 총성처럼 사라져간
생애의 다리 건너
지금은 일년 중 가장 어두운 저녁
추억과 북풍으로 빗장 찌르고
안으로 못을 박는 결별의 시간
이따금 하늘엔
성자의 유언 같은 눈발 날리고
늦은 날 눈발 속을
걸어와 후득후득 문 두드리는
두드리며 사시나무 가지 끝에 바람 윙윙 우는
서럽도록 아름다운
영혼 돌아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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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홍윤숙
이 가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내 의자에 앉아 있는 일이다
바람 소리 귀 세워
두어 번 우편함을 들여다보고
텅 빈 병원의 복도를 돌아가듯
잠잠히 내 안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누군가
나날이 지구를 떡잎으로 말리고
곳곳에 크고 작은 방화를 지르고
하얗게 삭는 해의 뼈들을
공지마다 가득히 실어다 버리건만
나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한다
나뭇잎 한 장도 머무르게 할 수 없다
내가
이 가을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내 의자에 앉아
정오의 태양을 작별하고
조용히 下午를 기다리는 일이다
정중히 겨울의 예방을 맞이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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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포플러
홍윤숙
나는 몰라
한 겨울 얼어붙은 눈밭에 서서
내가 왜 한 그루 포플러로 변신하는지
내 나이 스무 살 적 여린 가지에
분노처럼 돋아나던 푸른 잎사귀
바람에 귀앓던 수만 개 잎사귀로 피어나는지
흥건히 아랫도리 눈밭에 빠뜨린 채
침몰하는 도시의 겨울 일각(一角)
가슴 목 등어리 난타하고
난타하고 등 돌리고 철수하는 바람
바람의 완강한 목덜미 보며
내가 왜 끝내 한 그루 포플러로
떨고 섰는지
모든 집들의 창은 닫히고
닫힌 창안으로 숨들 죽이고
눈물도 마른 잠에 혼불 끄는데
나는 왜 끝내 겨울 눈밭에
허벅지를 빠뜨리고 돌아가지 못하는
한 그루 포플러로 떨고 섰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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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안 풍경(風景)
홍윤숙
그 골목엔
사철 유리문 덜컹거리는
야채가게와
신기료 할아버지의
노점(露店)이 있었다
테레지아 성당에선
주일(主日)마다 울리는 맑은 미사소리
목소리 우악하신 장신(長身)의 신부님이
이따금 거목(巨木)처럼 골목 밖을
내다보셨다.
세상은 완벽한 신(神)의 풍차(風車)
아침이면 삐걱대는 생활의 문소리
골목을 열고
한낮이면 셀로판지에 싼
한 포기 꽃으로 잠드는 골목
그 골목에
20년 뿌리내린
나도 변함없이 생활을 쪼아온
빛의 석수(石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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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행열차로1
홍윤숙
급행열차로 서둘러 달려온
서쪽 베타니아 마을에선
때마침 짧은 겨울해가 지고 있었다
낯선 술집과 어둠이 줄지어 선 땅엔
올리브나무도 작은 나귀도 보이지 않고
무수히 지나온 간이역
내릴 수 없었던 미지의 땅에
점점이 피어 있던 해바라기 달리아
그 원색의 빛깔들만 등뒤에 선연했다
급행열차로 서둘러 달려와도
그 마을의 일몰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천천히 걸어온 이보다
쓸쓸한 일몰의 시간이 좀 길 뿐이었다
급행열차로2
홍윤숙
멀리서 바라보는 불빛은
이상하게 아름다웠다
이따금 몇 개의 별들이
남몰래 그곳에서 밀송되어오고
가보지 못한 어린날의 보물섬도
그 속에 있을 것 같아
깜박 사는(生) 일도 잊어버리지만
언제나 밀봉된 마지막 밀서는
내 것이 아니었다
지도에도 없는 길을
등 떠밀리며 떠밀리며 흘러가는 밤
한 꺼풀 얇은 미농지에 싸인
세상의 저편에선 밤새 비 내리고
사십 년 떠돈 마음의 방주도
잠길 듯 잠길 듯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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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끝의 집
홍윤숙
놀이
날이 새면 우리들은 다시 떠났다
길은 끝없이 멀고 끝은 보이지 않았다
날마다 도보로 걷는 일에 지친 날들을
힘겨워 무수히 쓰러지던 길
어느덧 그 먼 길 다 끝나가고
손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끝이 보인다
노을 묻은 회양목 덤불 넘어 햇살 바른 들길
남은 두어 굽이 돌아가면
바로 내가 당도할 나의 마지막 집 한 채
마른 풀밭에 화강암 깎아세운 문패가 보인다
그 먼 길 끝에 서 있는 희망
어느덧 함께 가던 사람 먼저 가서
돌문 세우고 울타리 쳐놓고 기다리는 집
길 끝에 내 희망 남아 있으니
마른 살 훈훈히 춥지 않으리
무서리 하얗게 옥양목 휘장치고
삭신 마디마다 뼈 삭는 소리 들리는 밤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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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길로 오라
홍윤숙
눈 내리는 길로 오라
눈을 맞으며 오라
눈 속에 눈처럼 하얗게 얼어서 오라
얼어서 오는 너를 먼 길에 맞으면
어쩔까 나는 향기로이 타오르는 눈 속의 청솔가지
스무살 적 미열로 물드는 귀를
한자쯤 눈 쌓이고
아름드리 해뜨는 진솔길로 오라
눈 위에 눈 같이 쌓인 해를 밟고 오라
해 속에 박힌 까만 꽃씨 처럼
오는 너를 맞으면
어쩔까 나는 아질아질 붉어오는 눈밭의 진달래
석달 열흘 숨겨온 말도 울컥 터지고
오다가다 어디선가 만날 것 같은
설레는 눈길 위에 자라온 꿈
삼십년 그 거리에
바람은 청청히 젊기만 하고
눈발은 따뜻이 쌓이기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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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땅
홍윤숙
그 집에선 늘
육모초 달이는 냄새가 났다
삽작문 밖 가시 울타리는
내 키를 넘고
바다는 어디만큼 열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뒷산 밤나무숲은 사철을 울창하여 침울했고
바람이 미로에 빠진 듯 헤매다녔다
그 시절 내 가슴은 남모르는 미열에 떠 있었고
아듯히 먼 령 너머 초록의 녹지가
꿈속까지 따라와 나를 불렀지만
그리로 가는 길을 알지는 못하였다
가슴 한 켠이 늘 유리에 벤 것처럼 쓰라렸다
미지의 땅은 그처럼 넘치고 푸르른 것인가
나의 뒤에 오는 그 누가 또 오늘은 그 날의 나처럼
저 영 너머 초록의 녹지를 꿈꾸고 있을까
갈 수 없는 나라를 꿈꾸며 앓고 있을까
이쯤 서서 보니
만물이 공허 속에 하얗게 드러나
세계가 무한한 허무임을 알겠는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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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홍윤숙
먼 후일 ...... 내가
유리병의 물처럼 맑아질 때
눈부신 소복으로
찾아가리다.
문은
조금만
열어 놓아 주십시오
잘 아는 노래의
첫 구절처럼
가벼운 망설임의
문을 밀면
당신은 그때 어디쯤에서
환 - 희 눈 시린
은백의 머리를
들어 주실까......
알듯 모를듯
아슴한 눈길
비가 서리고
난로엔
곱게 세월 묻은
주전자 하나
숭숭 물이 끓게 하십시오
손수 차 한잔
따라 주시고
가만한 웃음
흘려주십시오
창 밖에 흰 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그런 날 오후에
찾아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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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항아리
홍윤숙
비어 있는 항아리를 보면
무엇이든 그 속에 담아 두고 싶어진다.
꽃이 아니더라도
두루마리 종이든, 막대기든,
긴 항아리는 긴 모습의
둥근 항아리는 둥근 모습의
모없이 부드럽고 향기로운 생각 하나씩
담아 두고 싶어진다.
바람 불고 가랑잎 지는 가을이 오니
빈 항아리는 비어있는 속이 더욱 출렁거려
담아 둘 꽃 한송이 그리다가
스스로 한 묶음의 꽃이 된다.
누군가 저처럼 비어서 출렁거리는
이 세상 어둡고 깊은 가슴을 찾아
그 가슴의 심장이 되고 싶어진다.
빈 항아리는 비어서 충만한 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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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찾기
홍윤숙
사람을 찾습니다
나이는 스무살 키는 중키
아직 태어난 그대로의
분홍빛 무릎과 사슴의 눈
둥근 가슴 한 아름 진달래 빛 사랑
해 한 소쿠리 머리에 이고
어느 날 말없이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삼십년 안개 묘연
누구 보신 적 없습니까?
이런 철부지
어쩌면 지금쯤 빈 소쿠리에
백발과 회한이고
낯설은 거리 어스름 장터께를
헤매다 지쳐 잠들었을지도
연락 바랍니다 다음 주소로
사서함 추억국 미아보호소
현상금은
남은 생애 전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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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아
홍윤숙
사랑아
늙지 않아 죽어도 늙지 않아
서러운 사랑아
이천년을 살아도
검은머리 청청한
머리 풀어 산발하고
벌판을 달리는 젊은 사랑아
이따금
내 가슴 깊은 곳에
몰래 문 열고 들어와
여름바다의 파도로 몰려와
무성영화 시대의
활동사진 틀어 놓고
에덴 동산의
보라 빛 도라지꽃
도라지꽃도 피워 놓고
이슬비에 젖은 사월의 새벽길을
수만 번 넘어지며 무릎 깨는
사랑아
철없이 늙지 않아
늙지 않아 서러운 사랑아
이천년도 더 산
방부제에 절인 사랑아
나는 죽고
너는 살아
고향의 사과밭
사과나무 가지에
칭얼대는 한 주름 바람으로나
가서 살아라
잉잉대며 날으는 꿀벌로나 살아라
가끔 가끔
돌아보며 생각하는
나는 시방 눈도 없이 캄캄한 타관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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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가 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