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일치라는 슬로건은 어쩌면 예수님이 가장 바라는 바가 아니던가? 주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이별의 시간에 바로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던가?
(요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랬다. 하나가 되는 것은 주님의 뜻이다. 그렇다면 왜 기독교 안에는 이런 주님의 간절함 바램을 거부하고 하나가 된다는 데 열을 올리며 반대할까?
“교회일치운동, 성경책을 덮고 진솔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라”라는 칼럼을 읽었다. 교회 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총무역을 맡았던 송용민 신부가 쓴 글이었다. 가톨릭의 변화와 수용성 그리고 세상에서의 기독교의 바른 역할을 위하여 이제는 서로 성경이 아닌 대화로 먼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아주 좋은 접근 방법이지만 그래서 결코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성경을 덮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덮지 않을 때는 하나가 될 수 없다면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세상의 펼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견해를 다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왜 그런 일에 교회가 함께 해야 하는가? 이것이 소위 종교 다원주의가 아닌가?
우리는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저들의 신앙과 신념을 비판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가진 소중한 신앙과 원칙을 허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은 변질을 가져오는 일치라면 우리는 과감히 대오에서 이탈하여 외로운 길을 가야 한다. 기독교는 절대적인 신,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이지 아스다롯과 바알과 다곤 신을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하다거나 결국에는 다 하나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 일치는 자기 파멸이며 기만이요 속임수다.
(신 29:24) 여러 나라 사람들도 묻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냐 이같이 크고 맹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신 29:25) 그 때에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신 29:26)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한 까닭이라
가장 부드러운 말로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라고 미혹할지라도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될 것은 바로 성경을 덮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거대한 세상의 조류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하나님을 떠남이요 인간의 종교를 따라가는 외도의 길이다.
2024년 세계교회 일치운동에 함께 하는 교단을 찾기보다는 이제 거기에 동참하지 않는 교회는 찾는 게 더 어렵게 되었다. 그만큼 KNCC나 WCC 가입이 대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머지않아 성경을 성경대로 가르치거나 진리를 말하는 것이 불법이 되는 세상이 올 것이다. 초기 교회도 당시 바리새인들과 지도자들의 협박을 받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이야기를 듣자 이렇게 대답했다.
(행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빠르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따르는 사람들과 세상의 대세를 따르는 사람들이 극명하게 갈리는 시대에 삽니다. 대중이라는 거대한 이름이 진리를 겁박하고 자신들이 누리는 자유를 불편하게 하는 진리를 “독선과 배타”라는 이름을 붙여서 입을 열지 못하게 합니다. 양심의 자유가 오히려 유린당하고 바른말을 하는 것이 이제는 법에 저촉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동성애, 양성애가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는 이름으로 공교육에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고 부끄러운 일들이 이제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가 바른 것을 선택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게 지혜를 주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