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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24강
역경 속에서의 형통
말씀/창39:1-23
요절/창39: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오늘 말씀에 '형통'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형통이라는 단어를 영어성경에 보니까 ‘success’로 번역했습니다.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성공한 인생이 되고 싶어 합니다. 스티븐 코비 박사가 쓴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습관』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말하는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습관은 이렇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도적이 되라. 목표를 정하고 행동하라. 중요한 것부터 먼저 하라. 상호이익을 추구하라. 경청한 다음에 이해를 시켜라. 시너지효과를 활용하라. 끊임없이 자신을 쇄신하라.” 물론 다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세상의 관점에서의 성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셉의 인생을 살펴보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성공은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과는 차원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요셉은 어떻게 형통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까?
첫째,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요셉이 형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지금 어떤 처지입니까? 애굽에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그는 아마도 두 손에 쇠고랑이 채워져 노예시장에 팔려졌을 것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흥정하고 어떤 사람은 일을 잘할 수 있게 팔다리가 실한지 만져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을 지나가던 애굽의 바로의 경호실장 보디발의 눈에 띄어 그 집에 팔려왔습니다. 색동옷 입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살던 귀공자가 하루아침에 짐승 같은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아버지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았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에게 신경써주지 않습니다. 새벽에 눈을 떠 밤에 눈을 부칠 때까지 쉴 새 없이 일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실수하면 가차 없이 욕설과 채찍이 날라 옵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슬픈 생각을 이겨냈습니다. 힘든 노동과 온갖 무시와 욕설들을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성실히 일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실하게 주인집 일을 감당하든지 보디발을 비롯해 온 집 사람들이 감탄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무슨 일을 시키든 책임감 있게 척척 해놓았습니다. 농사를 맡겨 놓으면 수확이 열 배 스무 배요, 양들도 금방 새끼들이 10마리 20마리요, 자녀교육을 맡겨 놓아도 성적이 쑥쑥입니다. 모든 일은 다 요셉으로 통했습니다. 이제 그는 보디발의 집에 없어서는 안 될 복덩이가 되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주인 보디발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눈에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 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요셉이 하는 일마다 성공하게 해주심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셉을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는 부하로 삼습니다. 그는 젊은 요셉을 깊이 인정하고 집안일을 총괄하는 총지배인으로 임명합니다. 보디발은 자기가 먹는 음식 말고는 요셉이 하는 일에 전혀 참견하지 않습니다. 같은 민족도 아닌 이방인이요, 나이도 어리고, 노예출신의 소년이 바로의 경호실장 집의 가정총무가 된다는 것,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께서 택하신 자들과 함께 하사 당신의 능력과 지혜를 만 배로 부어주시기 때문에 그가 세상 가운데서 탁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2,3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하나님은 요셉으로 인해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자를 축복하시고 그가 어디를 가든지 복덩이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상황이든 슬프고 운명적인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인생의 형통은 꼭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나의 환경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나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나의 만나는 사람들을 미리 정해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주신 환경들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내가 있는 곳,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성실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인생을 형통하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 요셉 또한 늘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보았습니다. 형통으로 가는 인생길에 반드시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유혹입니다. 6b절을 보십시오. 요셉은 일만 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엄마 라헬을 닮았는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습니다. 신앙 되지, 얼굴 되지, 키 크지, 성실하지, 능력 있지, 이런 그를 여성들이 가만 두지를 않습니다. 특히 젊은 사모님이 요셉에게 수시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와 윙크를 날렸습니다. 노골적으로 동침을 요구해옵니다. “이 집에 지금 너하고 나하고 둘 뿐이야, 아무도 모를 거야, 요셉!” 죄의 유혹은 집요하고도 끈질깁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보디발의 아내가 얼마나 미인이었겠습니까? 바로의 경호실장의 아내이니 미스 애굽 출신에 날마다 헬스클럽, 피부마사지 코너를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더구나 요셉은 그 신분이 노예입니다. 당시에는 돈 많고 지체 높은 여인들이 젊은 종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고 즐기는 것을 하나의 고품격 문화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요셉은 말 그대로 노예로서 사모님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요셉도 20대 중반의 피 끓는 젊은이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이억만리 남의 나라에 팔려와 온갖 고생을 다하며 외로움에 지친 총각입니다. 이런 요셉에게 있어 사모님의 유혹은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도 같습니다. 정욕의 유혹은 그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어떻습니까? 요셉은 정욕의 유혹을 온전히 물리쳤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요셉은 주인을 배반하지 않고자 했고 또한 하나님의 눈을 의식했습니다. 9절에서 요셉은 말합니다. “주인이 금한 것은 당신뿐입니다.” 또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짓겠습니까?” 사모님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조용히 즐기자고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주인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었고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에 안된다고 거절했습니다. 자신을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생각할 때 도저히 그 은혜를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잘 감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몰래 잠깐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초리는 피할 수 있어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또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은혜고, 내 삶은 제멋대로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셉처럼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기억하고 감당할 때 우리는 죄에 빠질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또 요셉은 사모님의 유혹을 적극적으로 피했습니다. 10절을 보면 유혹하는 여인의 말을 듣지 않았을 뿐더러 그 여자와 함께 있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정욕의 유혹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음란한 요소가 있는 곳에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면 남자나 여자나 마음속에는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무서운 욕정의 용암이 꿈틀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6장 27절에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느냐?”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성적인 문제만큼은 오직 부부사이에서만 누리도록 비밀의 성에 가두어두셨습니다. 이것을 잘못 꺼내 오용하게 되면 무서운 폭탄이 터져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상처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욕의 유혹이 나를 접근해오면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 여인이 옷을 잡고 늘어지자 요셉은 옷을 다 벗어버리고 런닝셔츠 바람으로 도망갔습니다. 사모님의 신분은 바로의 경호실장의 아내요, 온몸에 금은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내면은 죄의 포로가 된 노예였습니다. 반면 요셉은 비록 신분은 노예였지만 그 내면은 정결한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고자 했던 요셉은 하나님께 큰 상을 받았습니까? 요셉이 죄의 유혹을 이기고 승리했지만 요셉에게 다가온 것은 차가운 감옥이었습니다. 요셉에게 자존심이 뭉개진 사모님은 가만있지 않습니다. 요사스런 사모님은 요셉이 자신을 강간하려 달려들었다며 요셉에게 누명을 씌웠습니다. 요셉이 아무리 정당성을 호소해도 누구하나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상 이치가 요셉이라고 해서 피해가지 않습니다. 결국 요셉은 강간 미수라는 지저분한 죄목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노예로서 고된 삶에서 벗어나 좀 살만해지고 승승장구했었는데 이러던 그가 갑자기 곤두박질치고 맙니다. 요셉의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이는 것입니까? 그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했기 때문인가요? 오히려 그는 하나님 앞에 의롭고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도 단호하게 죄를 짓지 않고자 하였습니다. 자신은 잘 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형들에게 도시락을 전해주기 위해 물어 물어서 도단까지 100킬로미터 이상을 걸어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깊은 구덩이요 노예로 팔려가는 시련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보디발을 위해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기 위해 죄의 유혹을 힘써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감옥행이었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을 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러실 수 있습니까? 도대체 지도자가 되는 꿈을 주실 때는 언제고 왜 내 인생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시는 것입니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꿈과 현실이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나보고 뭘 하란 말인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등 돌리고 의로운 삶에 대한 회의를 품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망가진 삶 막 살자는 극단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묵묵히 맡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주변의 눈초리가 따갑고 더러운 짐승 취급당했지만 요셉은 잘 참고 견뎠습니다.
하나님은 그 순간에 뭐하고 계셨습니까? 21-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오늘 본문에서 참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몇 개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함께’입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은 감옥이라는 캄캄한 낭떠러지로 추락한 요셉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단어가 반복됩니까? 또 하나 반복되는 단어는 “‘인자’를 더하사 ‘은혜’를 받게 하셨더라”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반복됩니까? “‘형통’하였더라”입니다. “여호와께서 범사에 그를 형통하게 하셨더라” 하나님은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간수장에게 인정을 받게 하사 감옥의 제반 사무를 다 맡아 감당하는 감옥총무가 되게 하셨습니다. 간수장은 요셉을 깊이 인정하고 신뢰합니다.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기고 살펴보지도 않습니다. 요셉은 가는 곳마다 총무입니다. 가정총무, 감옥총무, 나중에는 나라총무(국무총리). 결국 요셉은 감옥에서도 형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사실 요셉의 삶은 거듭된 굴곡의 인생이었습니다. 아무도 그의 억울함이나 형편을 돌봐줄 사람이 없는 캄캄한 감옥에 갇혔지만 그의 인생에 서광이 비칩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형통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요셉의 거듭된 굴곡의 인생을 말하면서 ‘함께’, ‘은혜’, ‘형통’이라는 세 단어를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뭘 알 수 있을까요? 성경이 말하는 형통이 뭔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의 인생길에 어떤 어려움도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유혹도 당하지 않고 모함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감옥에 갇힐 위기가 와도 곧바로 감옥에서 풀려나든지, 억울함을 풀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셉을 볼 때 신자에게 있어 진짜 형통은 그가 어디에서든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통의 비결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셉 또한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요셉의 삶이 거듭된 굴곡의 인생이 되게 하시는가하는 점입니다. 좀 막아주시면 안됩니까? 왜 신자가 의롭게 사는데도 그 삶에 시련이 있고 역경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거듭된 굴곡의 인생이 되게 하시는 것일까요? 요셉의 인생을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고난과 역경을 통해 그의 성품을 연단하기 위함입니다. 요셉을 쓰실만한 사람으로 빚으려는 것입니다. 요셉은 지도자로서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는 직책보다는 성품과 내면성으로 일합니다. 성품과 내면성이 되지 않은 지도자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에게는 “그것 만지지 마라” “뛰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대학생들에게는 뭐라고 가르칩니까? “대학생답게 살라”고 말합니다. 성품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성품이 안 되면 대학생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소위 나이를 먹고 키가 커도 ‘성인아이’가 되고 맙니다. 이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거듭된 굴곡의 인생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성품을 하나님의 사람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키우고 계십니다. 우리는 일시적으로 내 삶이 잘 풀릴 때가 있습니다. 하는 일마다 은혜가 임하고 잘 나가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요셉처럼 잘 안 풀리고 꼬이는 문제 때문에 힘들 때가 있습니다. 왜 믿음으로 사는데도 일이 잘 안풀리고 나락으로 떨어지는가?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예민한 사람은 인생이 다 끝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도 합니다. 특히 나름 하나님 앞에서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결과가 좋지 않을 때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생각으로 절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탄한 길만 주지 않고 고난과 역경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고 키우시는 분이십니다. 헬라어로 환난, 시련이라는 단어에는 ‘압력’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환난은 압력인데 압력을 받으면 속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드러납니다. 내 안의 잘 드러나지 않았던 추하고 저속한 본성, 온갖 죄성들이 환난 속에서 압력을 받아 밖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이 속에서 진실하고 진지하게 몸부림칠 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조각됩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적인 성장은 대개 고통, 상처, 몸부림, 혼란과 실망을 통해 얻게 됩니다.” 인생의 역경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키우시고 빚어가시되 역경도 사용하십니다. 역경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역경은 힘들고 아픈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미소와 뜻이 숨겨져 있는 위장된 축복입니다. 고난과 역경의 시절이 지나고 나면 우리도 요셉처럼 하나님이 쓰실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숙해질 줄 믿습니다.
그러면 이런 소망을 어떻게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이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가장 소망스러운 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가실 때 제자들에게 남긴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비록 우리의 삶이 꼬일지라도 정말 힘든 지경일지라도 하나님은 바로 그 순간에 그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내면의 성숙함입니다. 믿음의 연단이고 성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능력 있는 사람보다도 성품 있는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보통 내 인생이 잘 풀리고 좋은 학점이 나오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역사가 잘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일이 잘 안 풀리고 학점이 잘 안 나오고 양들이 떠나가고 아이들 시험점수가 잘 안 나오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23편 4절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하나님은 내가 인생의 축복의 때의 양지를 다닐 때도 함께 하시지만 인생의 실패와 고난 중의 음지를 다닐 때도 함께 하십니다. 우리 인생은 항상 양지만 있지 않고 항상 음지만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양지와 음지의 쌍곡선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과 계획하심에 따라 때로는 우리를 축복의 때의 양지로도 인도하시고 때로는 고난 중의 음지로도 인도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양지인가, 음지인가가 아닙니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는 축복의 때의 양지가 최선의 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고난 중의 음지가 정상에 이르는 지름길일 수도 있습니다. 요셉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자꾸만 밑으로, 고난 중의 음지로, 구덩이 아래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십시오. 그 길이 바로 바로 궁으로 가는 직통라인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려고 섭리 가운데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계획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주어진 환경 속에서 너무나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어디로 어떻게 인도하든지 그것이 좋다 그르다, 타당하다 부당하다 섣불리 결론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지금이 좀 불편해보일지라도 그 상황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져가는 과정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을 통 크게 노예와 감옥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 형통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예와 감옥에서 해방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노예와 감옥 상황 속에서 일이 잘 풀리게 하는 ‘형통’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기 쉬운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나타내주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은 택한 자녀들을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인도하고 계시고 함께 하고 계심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셉처럼 한결같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주어진 곳에서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의 뜻은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 삶을 바라보는 ‘렌즈’부터 바꿔야겠습니다. 내 삶을 너무 근시안적으로 봐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의 주어진 현실과 상황 앞에서 울고 웃기보다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내 인생을 멀리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 사건과 역경들을 통해 나를 쓰실만한 사람으로 빚어가시고 나의 인격과 내면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나의 상황과 형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에 있음을 깊이 인식해야겠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나타나는 형통이 있기를 원하며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