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12] 윌리엄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 1867-1951)②
1892년 5월 팻시 볼링(Patsy Bolling)과 결혼을 하고 그해 11월에 조선 제물포에 입국한 레이놀즈는 서대문에 숙소를 정하고 2년 동안 머물면서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1894년이 되자 동학농민운동, 청군과 일본군의 조선 주둔, 갑오왜란,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과 같은 큰 사건들이 이어졌는데,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전 레이놀즈는 일행과 함께 전주, 목포, 순천 등 전라도 지역 여러 곳을 탐방했습니다. 언어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레이놀즈조차도 조선말을 익히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점점 조선어 실력이 늘었고, 1895년에는 성경번역위원회 남장로교 대표로 선임되었으며 입국 후 몇 년이 지나자 선교사들 중 가장 조선어를 유창하게 하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름을 이눌서라 짓고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전주 이씨, 이눌서요.”라고 했습니다. 정치적 격동기를 겪고 있었던 조선 말기였지만 선교 역사적으로 볼 때는 오히려 복음의 씨앗이 본격적으로 뿌려지기 시작한 때라고 볼 수 있는데, 기존에 존재했던 존 로스(John Ross, 1842-1915)의 『예슈성교젼셔』(1887), 이수정의 『현토 한한 신약성서』(1887)보다 훨씬 잘 반역된 신약성경(1906년)과 성경전서(1911년)가 차례로 한글로 번역되어 출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1895년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여했을 때 언더우드(Underwood), 아펜젤러(Appenzeller), 스크랜튼(Scranton), 그리고 헤론(Heron)이 먼저 일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번역 책임자로 있었지만 뒤늦게 참여한 레이놀즈가 가장 우수한 번역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