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 콤모두스가 암살되면서 2세기를 지배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끝나고 페르티낙스가 즉위한 뒤 근위대에게 암살 당한 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돈으로 황제의 자리를 사는 등 극심한 혼란기였다. 이때 세베루스는 상판노니아 총독이자 판노니아(도나우) 방면군 사령관으로 지냈는데 콤모두스 사후 합법적 절차로 즉위한 페르티낙스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야망을 드러냈다. 시리아 총독 페르켄니우스 니게르와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각각 황제로 칭하고 들고 일어났다.
세베루스는 최정예 군단인 10 게미나 군단과 제14 마르티아 빅토릭스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세베루스에게 공동 황제를 건의했지만 세베루스는 묵살한다. 원로원은 서기 193년 6월1일 디디우스 율리누스를 폐위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세베루스를 새 황제로 인정하였다. 디디우스 율리누스는 모두에게 버림받은 채 폐위된 뒤 비참하게 처형되었다. 세베루스는 페르티낙스 암살에 관여한 근위대원들을 관용없이 모조리 처형했다. 암살당한 선대 황제 페르티낙스를 복권시키고 그에 걸맞는 예우로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정적인 니게로와 알바누스를 모두 제압하고 황제에 등극한지 4년만인 197년 마침내 로마 제국 전역을 장악했다. 단독 황제 등극 이후 로마에 평화와 경제적 안정을 가져왔으며 부정부패 척결과 이탈리아 경제 재건 등으로 대중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그는 군대의 지지로 제위에 올라 스스로 '군인 황제'라 칭했으며, 원로원 의원들을 갈아치우며 자문기관화 하였다. 또한 병사들의 처우를 상당 부분 개선해 줬다. 따라서 군대 역시 세베루스를 열정적으로 지지했다.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바탕으로 여러 원정을 성공시키면서 군인들로부터 호감을 얻었다.
선군정치를 했고 적극적인 영토확장을 시도하기도 한 황제였던 그는 197년 말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속주화하고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하여 약탈했다. 남자들은 모조리 살해당했고 약 10만명의 여자와 아이들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었으며 파르티아 황실 국고에 들어있던 보석과 귀중품들이 모조리 약탈당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방은 트라야누스 재위 후기 이후 다시금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세베루스는 5년간 동방에 머물렀는데 처음 2년간은 새로운 식민지를 편성하고 중요한 무역 도시인 하트라를 점령하는 방법을 모색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로마는 하트라 끝내 정령하지 못했다. 이후 세베루스는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돌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미라를 보고 나일강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피라미드와 테베의 신전들을 방문했다. 208년 세베루스는 브리타니아에서 문제가 발생하자 두 아들을 데리고 원정에 나섰다. 세베루스는 브리타니아섬 전체를 공략함으로써 끊임없는 국경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세베루스는 제국의 내정을 차남 게타에게 맡겨 그를 브리타니아 후방에 남겨뒀다. 그리고 장남 카라칼라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지나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로 들어갔다.
칼레도니안인들의 끈질긴 게릴라 공격에도 불구하고 2년 뒤인 210년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국경선을 넓히며 칼레도니아인들과 협정을 맺는 조건으로 중부 저지대의 권리를 넘겨받았다. 이 원정 당시 세베루스는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된 두 아들이 서로 피와 땀을 흘리며 화해하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카라칼라와 게타는 이런 아버지의 소망에도 강제로 추운 브리타니아까지 온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둘의 관계는 그 어떤 원수보다 더 나빠진 상태였다. 동복 친형제는 막사를 함께 공유하지도 않았다. 둘은 식사자리 조차도 따로 가졌고 전황보고도 따로 받았다.
세베루스 두 아들의 반목은 사그라들지않은 상황에서 211년 2월4일 65세로 영국 군사기지 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로마 황제 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 두번째로 속주내 군사기지에서 세상을 떠난 두번째 사례였다. 두 아들은 군사작전을 중단하고. 아버지의 유골을 가지고 로마로 돌아갔고 하드리아누스 영묘 앞에 안치되었다. 세베루스 사후 그의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 형제가 공동 황제 신분으로 뒤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카라칼라(198-217)는 정적 관계였던 친동생 게타를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암살한다.
카라칼라는 군사적으로 상당한 공을 세웠지만 동생과 그 지지자, 옛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출신 인물들을 재판없이 학살했으며 이집트의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의 대학살 등 연이은 실책을 저질렀다. 그러다가 파르티아 원정 때 암살당했다. 마크리누스(217-218)는 카라칼라를 죽이고 황제에 올랐으나 세베루스의 아내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의 구테타로 마크리누스 살해하고 자신의 외손자인 엘라가발루스가 황제를 잇는다. 엘라가발루스(218-222)는 로마 황제로서의 자질이 제로에 가까웠고 로마 문화에 대한 이해 역시 제로였다.
그래서 첫 등장부터 로마인들은 충격에 빠뜨렸고 매일같이 정상인의 범주에서도 이해못할 행동을 선보였다. 따라서 엘라가발루스를 '희대의 돌아이'로 공인되고 있다. 통치체제는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배후에서 처리했기 때문에 콤모두스 시대와 같은 개판이 벌어지지 않았다. 4년여년간 재위에 있는 동안 말 그대로 모든 계층의 로마인들에게 인기가 최악이었다. 할머니 마이사가 동생 알렉산데르를 후계자로 결정하자 근위대장을 시켜 마이사와 알렉산데르를 죽이려고 하다가 222년 3월11일 어머니와 함께 엘라가발루스는 근위대장과 군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사촌 동생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222-235)가 뒤를 이었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는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로 엘라가발루스의 이종사촌 동생이다. 알렉산데르는 내치에 있어서는 안정적으로 운영했던 황제였지만 재위 내내 군권을 장악하지 못했고 어머니에게 휘둘렸다. 지나치게 어머니 의견만 따른 마마보이 황제였다. 그 결과 재위 후반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 불안감을 노출하더니 라인 방어선 일대를 침범한 게르만족과의 전쟁 중 초기 승기를 잡았음에도 어머니 조언대로 보조금을 지불하고 평화교섭을 맺으려했다.
따라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와 함께 독일 마인츠에 위치한 병영에서 암살됐다. 알렉산데르 모자가 암살된 후 세베루스 왕조는 끝이났고 이후 로마 제국은 50년 가까운 군인황제 시대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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