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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임에게
* 일제강점기 1939년의 경성(서울) 배경.
*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에 대한 날조 有
Entre yeso y jazmines, tu mirada
era un pálido ramo de simientes.
Yo busqué, para darte, por mi pecho
las letras de marfil que dicen siempre,
횟가루와 자스민 사이에서 ,
네 시선은 창백한 씨앗의 꽃다발
나는 나의 가슴 언저리에서 찾았다.
너에게 줄 '영원히' 라는 상아빛 글자를.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El Divan Del Tamarit>의 '가셀라 1: 뜻 밖의 사랑' 中
1.
차라리 시간이 멎었으면 좋겠다. 멈춘 시간의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이 겨울에만 하염없이 머무르도록. 그러나 창백한 연청의 그림자가 지는 이 영원같은 겨울도 사 월이 되면 녹기 시작하여, 봄이 오고야 말 것이다. 그 길, 당신과 맞은 이화우(梨花雨)와, 우리가 밟았던 앵화 꽃. 그 과거의 익숙한 봄에 나만은 남지 않게 될 것이다.
2.
1939년 겨울, 경성.
뚜우- 뚜우-, 전차소리, 거기엔 이따금씩 덜커덩, 덜커덩, 하는 소음이 섞여있다. 이는 전차 선로와 차체 아래의 마찰음이다, 동 트기 전 이른 새벽부터 얕은 잠을 깨우던. 어떤 이는 전차오는 소리가 곧 나라 밝는 소리요, 그러니 나라의 안녕과 발전이 직접 귀에 들리는 것 같지 않느냐고 했다만, 글쎄, 그는 필시 전차역 주변 여관에서 잠을 자 본일이 없는 샌님이다. 왜 옛날 어른들이 전차더러 붙인 '검은 악마'라는 칭호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여명은 이제야 말끔이 가시고, 비로소 둥근 해가 뜬 겨울 아침이 하얗다. 일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어두컴컴한 조국의 땅에도, 태양은 예외없이 자신의 밝은 빛을 고루 나누어 주었다.
전차가 이 쯤 이르러서 속력이 준다. 전차가 완전히 서기도 전에, 성질 급한 사내가 첫 번째로 전차문을 박차고 튕겨져 나간다.
전차가 요 앞 전차역에 잠깐 멈춘다. 전차 문에서는 맥 없는 사람들이 줄줄 딸려나왔다. 찌들리고 지친 표정들이 초라하고 갈 곳 없는 방랑자의 얼굴이다. 아, 이것은 나의 은유이다, 그들이 전부 갈 곳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개중에는 양장 차림을 한 멀쑥한 사내나, 낡은 겉옷 차림의 남자 노동자, 단발머리 여학생이 종종 섞여 뵈었다. 그들은 제각기 갈 곳이 있어 전차를 탄 사람들의 집합으로, 곧 있으면 별 볼일 없는 목적지-남루한 일터나, 학당 같은…,-에 도착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감정은 갈 곳 없는 사람들 처럼 황폐하다. 그 근본없는 황폐함이 아마 '조국도, 미래도 잃어버렸음'에서 오는 것이리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러나 이 담긴 것 없는 표정들도, 초겨울 찬바람에는 별 수 없이 아주 일그러진다. 끌로슈1)를 눌러 쓴 아가씨가 깡총 뛰어내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전차는 꾸역꾸역 다시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한다. 진저리나는 전차소리도 함께 멀어져간다. 나는 그 일련의 장면들을 여지껏 지켜보다가 유리창에 이마를 누른다. 날씨가 몹시 춥다.
"라스 레뜨라스, 데 마르필 께… 디쎈 씨엠 쁘레."
겨울보다 더 차갑고, 가을보다 더 메마른 목소리를 타고 흩어지는 단어들은 이국의 언어이다. 서반아(西班牙)2) 시인의 타마리트 시집, 한참 예전에 구주(歐洲)3)에 다녀온 친구가 선물로 준 시집이다. 이제는 넘기는 책장마다 시간의 손때가 타서 노리끼리한 물이 들었다.
"씨엠 쁘레, 씨엠 쁘레. 하르딘 데 미, 아고니아."
시집을 선물해 준 친구, 그 애를 떠올려본다. 일찍이 나이 차 많은 늙은 일본인 남자와 혼인했었다. 남자는 무척 돈이 많았고, 그 때 우리는 열 여섯이었다.
열 여섯이니 기껏해야 경성 내의 여학교를 다니던 나이였다. 여자로의 태가 안 나는 어린 얼굴에, 하얀 저고리와 검은 통치마가 그리도 잘 어울렸던 그 애는 여름방학 직전에 돌연 어린 신부가 되어버렸고, 우리가 무한히 여학생의 나이에 머물러 있을거라는-그 나이대 여자애들이 갖는 흔한 착각으로, 저들이 영원히 어릴거라 생각한다.- 착각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전 세기의 갑오(甲午)년 개혁 때 이뤄놓은 '조혼 금지' 법의 무쓸모함에, 나는 조금 분노했던 것도 같다. 그 해 여름방학 전에, 그 애가 성대한 서양식 혼례를 치뤘던 것도 기억 난다. 그 자리에는 나도 초대되었고, 난생 처음보는 서양식의 하얀 혼례복 차림의 친구를 평생 잊지 못한다.
'글쎄, 구주는 굉장했어. 색색깔 건물들이 어찌나 대단히 멋들어지던지! 그리구 거긴 이목인들이 무척 많단다. 거리가 온통 코쟁이들 뿐야.'
혼례식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서 멀리 떠났던 그네들 부부는, 두 달후에야 경성으로 돌아왔다.그 애는 경성에 돌아오자마자 나부터 찾았단다. 그리하여 주말 낮의 찻집에서 만난 그 애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항상 길게 늘어뜨렸던 댕기머리는 하나로 쪽을 졌고, 얼굴은 잘 먹어 반드르르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얼굴에 서린 묘한 성숙감, 이미 우리는 같은 나이가 아닌 동갑내기였다. 그 애는 왼손 약지의 보석 반지를 만지작거리면서, 내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구주에 대하여 줄줄이 설명해주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그 애의 모습을 보며 나는 쓴 입만 다셨다. 열 여섯의 나는 평생토록 그 애 것 같은 보석 반지는 끼어볼 일이 없음을 직감했다.
그 애는 구주 얘기를 하다가, 자연스레 제 늙은 남편네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더 이상 처녀가 아니게 된 그 애의 입담은 시장통의 아낙들 처럼 거침없었다. 걸쭉한 음담패설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나는 신물이 올라오는 것을 꾹 참고 검은 가배차4)를 삼켰다. 역겨운 것은 그렇게 변한 친구의 모습이 아닌, 친구의 말 속에 등장하는 남성의 모습이었다. 급기야 '넌 언제 시집 갈 거니? 너 같은 애가 남자 맛을 보면 눈이 뒤집어 진단다.' 하는 저질스런 주책에도 내가 웃기만 하고 말이 없자, 그 애가 대뜸 내민 것이 이 타마리트 시집이었다. 자, 이건 선물이야. 엄청 유명한 시인 시집이래서 샀어. 참, 읽을래도 너는 못 읽겠구나. 줘 봐. 내가 읽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곱게 살진 손가락으로 시집의 책장을 파르륵 넘기던 너는,
첫사랑이었다. 이제는 여섯 살 배기 남자애의 어머니가 된 네가.
"어디 언어지? 무척 묘한데."
"서반아."
"서반아어를 배웠어?"
"아니, 그냥 음독만 외웠구, 그래서 이것 밖엔 못 읽어."
이제 시집을 덮어 무릎 옆에 바르게 내려놓는다. 그 애의 기억들도 책장을 따라 덮힌다. 창틀 서린 냉기가 시리다. 나는 한기가 들어 몸서리친다. 그러자 D가 나의 몸을 더욱 안아준다. 이마를 뗀 유리창에 하얗게 숨결이 피어있다.
"그러믄 방금 읽었던 것 해석해봐."
"첨부터? 뜻은 아직 완전히 외우질 못 했는데,"
"기억나는 구절만."
"음, 횟가루와 쟈스민 사이에서, 너의 시선은 창백한 씨앗의 화속5)."
나는 운을 떼고, 문득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어 D의 손등을 쥔다. 그리고 그 손바닥을 내 가슴에 가져다 댄다. D는 숨을 죽인다.
"나는 내 가슴 언저리에서 찾았으니,"
"……."
"네게 줄 '영원히'라는 상아빛 글자를."
D는 가만히 나의 오른가슴을 쥐어본다. 보드랍고 따뜻하다. 흐트러진 옷 매무새 사이로 뵈는 가슴에는 '영원히' 라는 글자 대신, 상아색 살결이 투명하다. 그 아래에는 푸른 정맥이 엷게 비친다. '너의 존재가 다가오면 한 편의 시가 된다. 그렇게 수 백편을 썼다.' 고 했던 D의 시구가 떠오른다. 그러면 머릿속의 단어들이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한다. 그게 꼭 오므렸다 펴는 새벽녘의 꽃잎 같다.
"영원히?"
D가 묻는다.
"응, 영원히."
영원히. 그것 밖에 내가 답할 말은 없다. 영원이란 시간을 운운하기에 우리가 얼마나 작고 나약한 존재인가를 안다. 그럼에도 나는 네게 영원을 기약한다. 그러니 나는 내 삶이 끝나고, 내 영혼과 육체가 잠들 때 까지, 내 삶의 시계추가 진자 운동을 서서히 멈추어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너를 가슴에 묻어두겠노라고 지금 여기서 맹세한다. 그 맹세의 엄숙함이 우리를 무겁게 짓누른다. 그래서 우리는 한참을 말이 없다. 그런 정적을 먼저 깨는 것은 D이다.
"인제 이런 것 마지막이네."
D가 나지막이 말했다. 무척 가라앉은 목소리는 한참이나 열리지 않았던 녹슨 쇠문이 이제야 열리는 소리같다. 그 서늘한 음성에 나는 전율한다.
"마지막이라는 말 하지 말아."
미약한 숨결이 목덜미에 닿는다. 하아, D는 나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는다. 이따금씩 깜빡이는 속눈썹과 따뜻한 숨이 목 뒤를 간질인다. 나는 괜히 설워 아랫입술을 꾹 깨문다. 같이 떠나자, 아니, 이럴 게 아니라 같이 콱 죽어버리자. 그런 말이 울대까지 찼다가, 썰물처럼 빠르게 빠진다. 그것들은 너무나 터무니없다. 나는 목구멍을 간질이다 없어져버린 말을 대신해 다른 말을 힘겹게 전한다. 다소 쌀쌀맞게,
"떠나는 건 너 아니니? 네가 슬픈 것 처럼 굴지 마."
"미안해."
순순히 미안하다는 말에 휙 뒤돌아 봤을 때, 마주친 것은 붉게 충혈된 눈이다. 나보다도 슬픈 눈을 하고있는 꼴이 우습다. 너의 슬픔은 위선이다. 밉지만 눈을 마주하고 있어도 그립다. 얽힌 감정의 끈, 더 이상 풀리지가 않아 끙끙 앓다가, 차마 무어라 더 할 수가 없어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미안하다고도 하지마…,"
"……."
"왜 이런 기분이 되는 지 모르겠어."
사 년전의 악몽은 그대로 되풀이 되었다. 우연이라기에 완전히 겹쳐지는 두 비극의 유사함은 나를 절망케 한다. 한달 전, 갑작스런 D의 혼례 소식은 내게 사형 선고와 다름 없었다. 가슴 속에 꽉, 박혀버린 붉은 선고가 시도때도 없이 내 영혼의 목을 졸랐다. 또 다시 한 번 나의 사랑은 혼인이란 굴레로 꽁꽁 싸인 채, 내게서 달음박질 치려 하고 있었다. 이듬해 이월, D는 혼례식이 있을 예정이며, 제 신랑 될 사람의 얼굴은 아직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집안에서 갑자기 결정된 사항이라, 저도 손 쓸 도리가 없었다는 D의 어투는 변명조였다. 나는 쓰게 웃었다. 왜 네가 변명을 하니…, 네 잘못이 아닌데두. 그리고 나선 더 할 말이 없었다. D도, 나도.
사실은 언젠가 한 번은 우리가 갈라서게 될 줄은 알았다. 그러나 헤어짐이 생각보다 빠르게 우리를 찾아왔다. D는 결국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나도 같은 결말을 맞이하리라는 걸 안다. 솔직히 실감은 안 난다. 차라리 넷째 손가락은 비워두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니까 그런 울 것 같은 얼굴 하지 마."
나의 사랑이 이루어 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사실 겪기도 전 부터 알 수 있던 것이다. 여인된 몸으로 같은 여인을 사랑했으니 처음부터 어긋난 이야기였다. 나는 어릴 적 아버지께 들었던 태초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태초에 양과 음이 있었다. 하늘님이 나눠 둔 것이다. 그 두 기운은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가 존재할 수 없는 공생의 관계이다. 그래서 둘은 두개가 합쳐져야 완벽한 원이되는, 각각의 흑과 백의 곡옥이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은 양이거나 음이고, 양과 음이 만나 붙는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이자,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으로 지는 숙명이다. 태양과 달이 밤낮을 조화롭게 하고, 남자와 여자가 가정을 이룸은 너무나 당연해 새삼스럽지도 않다. 내 조상들도 그렇게 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순환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내 대에 이르러서는 이런 사단이 났다. 나는 음양의 거대한 조화안에 섞여들지 못하고, 낱알 속 쭉정이나, 짧은 이불 아래 못난 발처럼 자꾸 세상의 틀 밖으로 보기 밉게 삐져나왔다. 한 사람의 절망, 그래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세상은 틀림없는 '커다란 톱니바퀴들의 집합'이다. 하나도 빠지는 톱니가 없이 얽혀있는, 나 하나쯤 반대로 돌고 싶다고 해도, 집단은 나를 허락하지 않을. 나의 타인과 맞물리고, 맞물린 이가 돌아가다 보면, 좋든 싫든, 나는 제 자리를 찾아 남들 돌아가는 장단에 맞춰 돌아가게 될 것이다.
"…울지 않아."
너로써는 드물게 구슬픈 목소리다. 보고싶을 것이다. 네 목소리도 듣고싶어질 날이 올 것이다. D가 혼례복을 입은 모습. 양 볼에 연지, 붉게 물들인 입술과 선녀같은 색색깔 옷차림을. 그런 모습의 D를 이제껏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실은 상상해 본 적이 없는 게 아닌,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나는 D의 혼례식에 갈 자격도 없는 죄인이다. 무슨 낯으로 그 혼례식에 참석할까, 그랬다가는 천지신명이든, 천주교의 하나님이든, 동학의 한울님이든. 절대자 중 누구 하나는 내 서있는 자리에 벼락을 내릴지도. 그러니 하이얀 한삼으로 얼굴을 드리웠다가, 천천히 내릴 때 비출 네 얼굴. 그걸 정면으로 마주보는 이가 나였으면, 하다가 관둔다. 그것은 결코 내가 가질 수 없는 행복이다. 남들은 너무도 쉽게 손에 쥐는 것들, 내게는 주어지지 않은 기쁨. 나도 이제는 길게 땋아내린 댕기머리가 부끄러울 정도의 나이가 찼다. 혼인의 굴레는 과연 나조차도 얽맬 것인가.
지금껏 도망쳐왔던 시간들을 회상한다. 선이니, 중매니, 주위에서 자꾸 눈칫밥을 주기에, 그림 공부를 좀 더 하려구요. 대학은 마치고 결혼을 해야지요. 하는 핑계로 피일 차일 미뤄 보았으나, 그것도 이제 끝이 날 것 같다. 그걸 가능하게 했던 것은 D이다. 어른들의 잔소리, 주변의 등쌀에 시달려 지칠 때면, 그 때 마다 D가 있었다. D는 나의 아름다운 낙원이었다. 그 천주교의 성서 속에 나오는 에덴. 아담과 이브 대신 나와 D가 있는 낙원이고, D는 에덴 그 자체였다. 그러니 세상의 아우성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 줄 알았다. 아무도 없는 D의 방 안에서 두 손을 깍지 껴 잡고, 우리만의 세상을 누리면 그만일 줄 알았다. 그게 내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아름드리 나무는 얼마 못 가 쉽게 스러져 버렸다.
D가 풀어내린 내 머리칼에 손가락 힘 없는 빗질을 한다. 그 손길에 담긴, 토라진 어린아이를 달래는 따스함이 원망스럽다. 달래져야 할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우리 서로가 위로가 필요한 시점에서, 어르고 달래는 것은 D 하나뿐이다. 내 그릇의 작은 크기를 원망한다. 나는 내 박살나버린 마음으로 D의 마음까지 추스러 줄 여유가 없다. 하늘거리는 손가락의 감촉에 마음이 조금은 풀어진다. 생각해보면 이 긴 머리칼도 D의 취향이었다. 언젠가 너는 내 흑단같은 긴 머리가 참 좋다고 했었다. 흩어진 내 머리칼을 세는 것은, 시인인 너에게 시를 쓰는 것에 비견되는 최상위의 기쁨이었다고 말했다. D가 나를 안아온다. 나는 그 힘에 따라서 쓰러져준다. D가 내 머리칼을 쥐어 입을 맞춘다. 너는 간신히 떨리는 입을 열어, 겨우 꽃 핀 것 보았는데 또 꽃이 지는구나.(纔見開花又落花)6)한다. 그 꽃은 중의적으로 나를 말하는 것임을 안다. 이화야, 배꽃의 이름을 가진 나를….
날씨가 몹시 춥다. 이따금씩 찬 바람이 언 땅의 흙먼지를 헤집는다. 전차 선로의 전선도 추위에 오그라들어 팽팽하다. 잎도 없는 가지가 바람에 무척 흔들린다.
우리는 이화우가 내리는 사 월에 처음으로 만났었다.
3.
1939년 봄, 경성 서대문로.
그 당시의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는 데 무척 심취해있었다. 중등학교의 졸업식을 끝마친 직후 였는데, 국내에는 예술대학이 없어 전문학교로의 진학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남는 것이 시간이었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한 장, 두 장,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을 그리던 것이 제법 발전하여 곧잘 번화가로도 나가고 그랬다. 번화가 사람들은 다들 바삐 스쳐지나 사라져버렸고, 나는 그들의 찰나를 영원토록 종이에 담았다. 그것은 속사화(速寫畵), 라고 하는 방식의 그림법으로, 간결하게 그어내린 선 몇개가 전부인 표현의 -심심하다면 심심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유난스럽지도 않은 담담함이 매력적인 것이었다. 나는 나날이 전차를 타고 제법 멀리까지 나갔다. 어느날은 경성 끝자락의 거지동네의 부락을 가보기도 했고, 시장통에도 가 본적이 있다. 길을 잘못 들어 몸 파는 창녀들의 유곽으로 가 본일도 있었다. 꾀죄죄한 몰골이나, 화려하고 천박한 옷차림들은 그리기에 확실히 재미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하나같이 시끌벅적하고, 역동적이었다. 끝내 몇 주를 떠돌다 정착한 곳은 이화전문학교의 대학로였다. 더도덜도 말고 딱 좋았다.
가로수가 쭉 늘어선 거기에는 멋쟁이 여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대학로 길가에 세워진 나무 아래서 앉아있자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수업이 끝나여 무리지어 가는 수십의 단발머리들, 꽃무늬 저고리나, 흰색 브라우스, 종아리가 언뜻언뜻 보이는 남색 주름치마, 통치마. 간간히 양장차림의 여학생들도 보였다. 분을 바르고 퍼머를 한 멋쟁이들은 검은 양산을 들고, 한 손으로 자신의 전공 서적을 들고 있었다. 처음 삼 일은 그 거리를 걷는 여학생들을 전부 그리려고 하느라,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딱 사흘 째, 내 건너편 거리에 한참이나 서 있다 가는 내 또래의 여자가 눈에 밟히기 시작하였다. 여자는 늘씬하니 키도 좀 컸다. 늘 하는일이라곤 내 반대편 가로수에 비스듬히 앉아, 책을 읽고, 담뱃불을 붙이고, 간간히 무엇을 메모하고, 다시 만년필의 뚜껑을 닫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돌아가는, 정체불명의 여자에게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하루, 이틀, 지나가던 사람들을 그려내느라 모자랐던 도화지 묶음에는, 정성들여 오랫동안 그린 너의 옆 모습만 늘어갔다. 나는 그 쯤에서 속사화를 그만두었다. 나의 도화지에는 웬 여자의 옆모습을 정밀하게 그린 인물화만이 가득하게 되었다.
너는 매일같이, 오전 수업이 끝나는 시각이면 이 거리로 왔다. 그리고 늘 같은 나무 아래에 앉았다. 이 근처에 꽃나무가 그토록 많은데, 왜 굳이 그 아래여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 그래, 그 나무만은 조금 특별한 것도 같았다. 다른 나무에 비해 품이 낮고, 가지의 겉 형태가 둥글었으니까. 새 잎도 나지 않은 나무는 이제야 꽃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너는 이름이 무어니, 몇 살이니. 묻고 싶은 말은 점점 많아만 갔는데, 너와, 너를 담는 도화지만 번갈아 보면서 금붕어 소리로 뻐끔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봄바람은 때때로 너의 이마위에, 샤쓰 깃 위에, 오래도록 머물다가 갔다. 그러면 짧게 친 단발머리가 일렁이고, 샤쓰 깃이 흔들려 유려한 목선이 드러났다. 힐끔 본 옆모습은 무심하리만치 내게 관심이 없었다. 그 쪽이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로 오는 것 처럼, 나도 한참은 이 곳에 앉아있던 셈인데. 정말로 너는 나의 존재를 모르느냐, 그렇게 멎어있던 우리들의 시간은, 꽃이 만개하면서부터 흐르기 시작하였다.
그 날도 평소처럼 그 옆모습을 그리다, 네가 아까부터 계속 같은 페이지의 책장에 머물러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람이 네 머리를 헝클어놓으면, 다시 원래대로 정리해 놓던 손짓이 없었다. 그래, 너는 곤히 잠들어있었다. 책장이 바람결에 살랑거렸다. 만개한 꽃나무의 손톱만한 하얀 꽃잎들이 너에게로 조금씩 떨어졌었다.
인연은 생각지도 못한 모험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모험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시작이 그랬다. 나는 왜 갑자기 그 때 자리를 벌떡 일어났는 지 아직도 알 수 없다. 나는 그리던 그림그리던 도화지 묶음을 한 손으로 가슴에 안고, 가로수와 가로수 사이를 건넜다. 겨우 열 두척 길이의 흙 길이 매우 멀게 느껴졌었다. 처음으로 네 앞에 섰을 때, 처음으로 보던 너의 앞 얼굴. 무척 길고 숱이 적은 속눈썹이 드리워 있었던, 피부는 곱지만 희지가 않았다. 즉 분을 바른 것은 아니었다. 입술도 은은한 선홍빛으로, 뜯어보니 무척 수수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 앞에 이끌리듯 주저앉았다. 눈을 뜬 모습은 어떨까, 눈동자는 어떤 빛일까. 아주 검을까, 아님 연한 밤색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때에도 꽃잎사이로 조각난 햇빛들이 네 얼굴을 비춰주었다. 나는 네 이마에 올라 떨고 있는 꽃잎을 하나 떼 주려고 했다. 그 때 네가 눈을 떴다. 재빨리 떼려던 손의 손목을 붙잡혔다. 화들짝 놀라 그만 도화지 묶음을 다 떨어뜨리고 말았다. 네가 말했다.
"너, 이 앞에서 계속 그림하던 애 맞지?"
나는 아무말도 못 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잡힌 손목을 빼내려하자, 너는 더욱 세게 비틀어 잡았다. 앗, 아파! 신경질적인 짜증에 아랑곳 않고, 잡힌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름이 뭐야? 너는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해 왔다.
"이 마당에 대답해줄리가, 이것 놔."
"그럼 몇 살이지?"
"…칫, 올해로 스물."
그렇구나, 네가 수긍하는 틈을 타 나는 손목을 빼냈다. 그리고 재빨리 흩어진 종이들을 쓸어모았으나, 손과 마음이 무척이나 떨렸다. 너는 나와 비슷한 궁금증을 앓고 있었나보다. 네가 처음으로 묻는 말들은, 내가 되려 묻고 싶던 것들이다. 혹시 우리의 마음 어딘가 관통하는 것이 있을까, 마음이 서둔다. 네가 흩어진 도화지들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스물? 하도 대학로 근처에서 어물쩡거리기에 풋내기 여학생인줄만 알았는데. 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거 돌려줘, 내 그림이야."
"보지 않고도 뻔한 것을… 너, 나를 그리고 있었잖아?"
너, 나를 그리고 있었잖아? 나는 도화지를 빼앗으려다 별 수 없이 멈춰섰다. 내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는 그 시선에, 나는 내 나체를 드러내는 것 같은 부끄럼을 느꼈다. 심히 쑥쓰러웠다. 내 그림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았던 네가, 너를 보고있었다. 너의 눈동자는 깊은 잿빛이었다.
"부끄러움을 타는거야?"
"이리 주어."
그제서야 너는 보던 것을 건네주었다.
"우리, 이럴 게 아니라 통성명(通姓名)을 하자. 내 이름은…, D 정도면 충분하겠지?"
"……."
나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러서지 아니 했다. D, 라면 영어(英語)의 네 번째 문자였다. 겨우 그런 것으로 자신의 성명을 밝힌 사람이 탐탁치 않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것 처럼 굴자, 너는 나를 회유했다.
"그렇게 굴 것 없어. 나도 너를 상대로 시를 몇 편 썼으니까."
너는 그렇게 말하고 옆에 놓인 고급 수첩을 폈다. 가죽으로 양장 제본이 된 것이었다. 그 수첩의 장을 채우고 있는 것은 대개 지저분한 낙서로, 루주를 곱게 바른 홍순(紅脣), 트레머리의 여인… 따위의 조각난 낱말과 문장들이 아무렇게나 배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오롯이 완성된 시구들이 있었다. 어떤것은 길고, 어떤 것은 무척 짧았다. 너는 그 중의 하나를 읽었다. 삼 장 육 구의 평시조였다.
저 규수, 분 발라 백설(白雪)같은 얼굴
은근한 곁눈으로 흘겨보메 얼없는데7),
엇디타8) 아닌 체 할까, 일견종정(一見鍾情)9) 나뿐인가.
나는 얼굴을 화악 붉혔다. 시구 종장의 일견종정, 거기서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너는 단조로운 어투로 태연히 낭송하였으나, 내용은 활짝 핀 작약보다 강렬했다. 나는 네 목소리에서 검은색의 양과자를 연상했다. 무척 달고, 진한, 너의 목소리는 그것을 닮았다. 네 목소리는 열띈 내 가슴안에서 빠르게 녹아들었다. 보통의 여자애들 같은 짹짹거리는 고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머슴애 같은 저음은 또 아니었다. 듣기 좋고, 묵직하고, 부드러운. 굳이 비유하자면 우단(羽緞)10) 천의 질감이라고 해야할까. 차분한 중저음의 여자목소리는, 네 담담한 말투와도 잘 어울렸다. 너는 아무것도 아닌 평이한 일상말을 한 사람처럼 무심하게 코트 주머니를 뒤져 양담배를 꺼냈다. 지포라이타의 뚜껑을 열고 불을 칙, 붙이면서 자, 이제 우리는 똑같지? 너무 열없이 굴지 말아. 했다.
네 고급 수첩은 덮였다. 뒤이어 자신은 이화전문학교의 문과(文科)에 이제 입학하여 재학중이라고 말해주었다. 나와는 동갑내기, 시를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간략한 자기소개를 끝으로 너는 다시 아까와 같은 질문을 해 왔다.
"이름이 뭐야?"
"…이화."
내가 왜 이 아래에만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니? 타들어가는 담배를 입으로 문 채, 담배연기를 흩뜨리며 너는 물었다. 실로 그것은 예전부터 무척 궁금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끄덕였다. 그러자 너는 나무를 올려다 보았다. 나도 따라 올려다보았다. 잘 봐, 이 나무의 꽃은 다른 나무들과 달라. 나는 자세히 관찰하였다. 이 거리에 늘어선 앵화의 은홍빛 꽃잎과 다를 게 없는 순백의 꽃잎, 순백? 이 꽃나무만은 어떠한 붉은 기가 없이 오롯이 흰 빛이었다. 동그란 눈을 하고 너를 바라보자, 네가 살풋 웃어주었다. 이 길의 유일한 배나무야. 계랑의 이화우가 내리는11) 맞은 편에는 진실로 이화가 있었구나. 했다.
4.
그리고 다시 현재, 잠든 D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아침부터 이른 거사를 치루고 잠깐 잠이 든 얼굴은, 약 일년 전의 그 얼굴과 별다를 게 없다. 그 단발머리도 늘 같은 길이를 유지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 변하는 것은, 너나 내가 아니고 우리를 둘러싼 배경이다. 우리의 사랑은 잠깐의 행복이었다. 이제 우리가 서로 다른 길, 서로 다른 풍경 속에서 살아가야 함이 믿겨지질 않는다. 나는 D의 옆에 웅크려 눕는다. 달큰하게 살갗 냄새가 난다. 혹여나 추운 겨울 실내 공기에 감기가 들까, 벗은 몸을 덮는 변변찮은 솜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아직도 그 이마에 손을 가져다대면, 그 때 처럼 내 손목을 낚아챌 것 같다. 길게 드리운 빈약한 속눈썹은 푸른 그림자를 드리웠다. D의 눈 밑이 푸르다.
또 다시 전차역에 한 대의 전차가 도착했나보다. 그 소리가 소란하다. 나는 전차문에서 사람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공상을 한다. 그러다 이 여관 앞이 사람들로 가득차서 미어 터지면 어쩌나, 쓰잘데기 없는 걱정도 한다. 전차가 다시 떠나며 뚜우-뚜우- 하는 소리를 낼 때, 비로소 나는 바보같은 망상에서 스스로 깨어난다. 도무지 누워 있어도 잠은 오지 않고, 노곤노곤한 기분이 계속 될 뿐이라, 나는 뒹굴어 D의 옆에서 벗어난다. 다다미 바닥의 까슬한 표면이 맨 몸을 긁는다. 가려워진 등을 긁으려고 든 팔꿈치에 D의 수첩이 채인다.
D가 지금껏 자신의 시를 읽어준 적은 있어도, 그 수첩을 편하게 내어준 적은 없었다. 나는 강한 호기심과 함께, 금기를 범하는 듯한 짜릿함을 느끼면서 그 수첩을 펼쳐본다. 첫 장부터 천천히 넘기어 보자. 가다보면 우리의 흔적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첫 장에는 의미없는 단어의 나열, 멋진 문장. 우리가 처음 보았던 날의 평시조도 여기에 있다. 그 때 너머로 보았던 루주를 곱게 바른 홍순(紅脣), 트레머리의 여인은 나를 칭한 것이었구나. 새삼 그 때로 돌아간 듯 하여 감상이 색다르다. 너는 내게 줄 그럴듯한 시를 만들기 위해, 이 수첩의 쪽을 수백번도 더 넘겼겠지. 수첩을 넘기는 내 손 위에 네 손의 잔상을 덧그린다. 중간중간 접힌 부분이 다시 펼쳐지지 않도록, 나는 유의하여 장을 넘겼다. 어쩔 때 너는 절망하고, 어쩔 때 너는 기뻐한다. 대부분 나에 관한 것이다. 긴 머리 처녀, 울지 마라. 네가 울었을 때, 이 세상 꽃이 다 져버렸단다. 하고 봄 비 내리는 날, 내가 서러워 운 일도 여기에 고스란히 기록되어있다. 너의 언어들은 나와 함께 숨을 고르고, 정서를 교감한다. 그렇게 한 장, 또 한 장. 이 수첩의 네 글귀들 마저 우리의 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제 나는 마지막 장 만을 남겨 둔 채다. 이 뒤로는 온통 백지이다. 시인이 임에게. 끝끝내 임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이 장의 시를, 어젯 밤을 꼬박 새워 어렵게 썼던 네가 기억난다. 나는 숨을 잠깐 멈춘다. 네가 쓰는 만년필의 역청빛 잉크가 파르라니 빛난다.
내 마음을 다 바쳐 사랑한 임아,
살아있는 죽음아, 부질 없이 네가 쓴 말을 기다리며,
시들어가는 꽃을 들고 생각한다.
내가 너 없이 산다면 너를 잃어도 좋다.
…
이 나의 미친 마음을 말들로 채워다오,
아니면 영원히 어두운 내 영혼의
고요한 밤 속에 내가 살아가리니.12)
…나는 떨리는 손으로 수첩을 덮는다. 이 다음은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르겠다. 감정의 극한은 죽음이고, 나는 콱 죽고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세상엔 절절한 미사여구보다, 담담한 한 문장이 가슴을 울리는 일도 있다. 그 치명적인 시구의 칼날은 나를 찔렸다. 감히 직설적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솔직한 표현들로, 너는 나를 떠나보낼 준비를 했다. 나는 수첩을 품에 안은 채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무너져내린다.
이제는 이유도 없이 흐느낀다. 무척 섧게 운다. 네가 가진 일련의 단어들은 저마다의 총을 품고 있었다. 단어 하나에 한 개의 방아쇠, 너의 시안에서 수 천, 수 만의 방아쇠가 당겨진다. 그것들은 모두 총성이 되어 내 머릿속을 울리고, 총성의 소리가 옅어지면 잔류하는 것은 네 목소리다. 내 머릿속에서 네가 읽어주는 너의 시구들은, 모두 지나치게 아팠다. 나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씻는다.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신음같은 흐느낌이 손 끝에서 뭉개진다. 지금껏, 애써 붙잡고 외면했던 마음들은 시인이 쓴 최후의 장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나의 어두운 영혼 속 영원토록 살아가는 것은 내가 아니라 D이다. 네가 아주 멀리 떠난다고 해서 내 마음 속의 너까지 아주 떠나버린다면 좋겠다. 네가 가슴 속 수면 아래서 떠오르고, 떠오르고 하면 그 때마다 나는 무너지겠지. 이 부질없는 삶에 켜켜이 쌓인 것도 모조리 당신이다. 왜 나는 몰랐을까, 이별은 두 사람을 떼어놓기만 해서, 이제부터 헤어지자고 선고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것을. 나는 아마 평생을 너와 이별하기 위한 시간으로 소모하고 말 것이다.
나는 잠든 네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 볼에 눈물방울들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이번에는 퀭한 눈가의 네가 깨어날 기색이 없다. 네 볼 위의 눈물이 물 맺혀 반짝였다 흐른다. 우리는 평행선이었다. 같은 쪽으로 향해 가지만, 결코 닿지는 못할…….
그러니 이제는 다 끝이다, 그리고 끝은 시작이기도 하지…. 네게는 구태여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이듬해 봄이 오면, 동경으로의 미대진학을 위해 아주 유학을 가기로 했다. 내 스스로의 도피이고, 너를 잊기 위해서기도 하다. 나는 이 결정의 순간 앞에서 백 번도 더 죽었다 깨어났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가야할 길이 어디인 줄을 안다, 결국은…
나는 네게 비겁한 위선자라 비난했지만, 사실 도망가는 쪽은 나였구나. 나의 연인으로서의 네가 없는 이 땅에서 현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 내가 떠난다. 배꽃같은 이름은 인제 잊자. 타국에 이르기 위하여 배에 오를 이름은 카네다 나시하나이다. 이미 그렇게 결심한 일이다. 두렵지는 않다. 실은 타국의 첫 땅을 밟을 순간이 무척이나 기대된다. 설레이지 않느냐, 동경에서 맞이할 새로운 시작과 봄! …그렇게 애써 나를 보채보아도 전혀 기쁘지 않다. 차라리 시간이 멎었으면 좋겠다. 멈춘 시간의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이 겨울에만 하염없이 머무르도록. 그러나 창백한 연청의 그림자가 지는 이 영원같은 겨울도 사 월이 되면 녹기 시작하여, 봄이 오고야 말 것이다. 그 길, 당신과 맞은 이화우(梨花雨)와, 우리가 밟았던 앵화 꽃. 그 과거의 익숙한 봄에 나만은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듬해 봄, 과연 배꽃은 다시 피고 지고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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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끌로슈 :클로슈, 클로셰, =종모양의 여성 모자, 1920~30년대 유행,
2) 서반아(西班牙) :스페인의 한자 표기식 국가명.
3) 구주(歐洲) :구로파(유럽의 옛 한자 표기식 국가명)의 준말.
4) 가배차 :커피차 =커피
5) 화속 :꽃으로 만든 다발, 꽃다발.
6) 한시 낙화도(落花渡)의 구절 中 재견개화우낙화(纔見開花又落花) 부분.
7) 얼없다 :조금도 틀림이 없다. /얼없는데 =틀림 없는데
8) 엇디타 :'어찌하여'의 옛 말. 감탄사.
9) 일견종정(一見鍾情) :첫 눈에 반하다.
10) 우단(羽緞) :벨벳
11) 조선 선조 때의 명기 계량의 '이화우 흩뿌릴 제…'로 시작하는 시조의 표현을 언급하는 것.
12) 스페인 시인 로르카가 죽던 해에 쓴 시, 시인이 임에게. 작품 내에서는 D가 쓴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