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구의 `관촌수필'
“모닥불은 계속 지펴지는 데다 달빛은 또 그렇게 고와 동네는 밤새껏 매양 황혼녘이었고, 뒷산 등성이 솔수펑 속에서는 어른들 코골음 같은 부엉이 울음이 마루 밑에서 강아지 꿈꾸는 소리처럼 정겹게 들려오고 있었다. 쇄쇗 쇄쇗…. 머리 위에서는 이따금 기러기떼 지나가는 소리가 유독 컸으며, 낄룩― 하는 기러기 울음 소리가 들릴 즈음이면 마당 가장자리에는 가지런한 기러기떼 그림자가 달빛을 한 옴큼씩 훔치며 달아나고 있었다.”
이문구(55)씨의 연작소설 <관촌수필>은 우리네 마음자리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한국적 유토피아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그것은 사실 유토피아니 무릉도원이니 하는 외국에서 들어온 언어로는 감당할 수 없는, 한민족의 정서로써만 표현과 이해가 가능한 정복(淨福)의 두레공동체일 터이다. 그 공동체 안에서는 어른의 코골음과 부엉이의 울음과 강아지의 꿈꾸기가 서로 넘나들며 뒤섞인다. 자연과 동물과 인간이 구분되지 않고 어우러지는 원융과 합일의 시공간이 그곳이다.
<관촌수필>이 추억하는 풍요와 화평의 세계는 작가의 토속적인 문체에 얹혀 광휘와 윤기를 더한다. 멸종 위기의 동식물을 보호하고 번식시키는 환경운동가처럼 작가는 겨레의 말글살이에서 잊히고 묻히게 된 순우리말과 한자어를 적극 살려내고 있다. 게다가 토종 된장국과 같은 능청과 해학, 그리고 씀바귀나물처럼 싸름한 비애와 아픔은 한국적 감성의 현을 섬 세하게 건드린다.
<관촌수필>이 그리고 있는 한국적 유토피아의 원형은 그러나 6·25라는 미증유의 비극으로 처참하게 찢긴다. 특히 작가의 분신인 민구 일가는 아마도 전쟁의 발톱에 가장 혹독하게 할퀴인 집안일 것이다. 남로당 충남 보령군 책임자일 뿐만 아니라 인근 청양과 서천의 지하당을 조직, 관할하던 민구의 아버지는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며, 겹의 참척을 본 조부마저 자식들의 뒤를 따르자 집안은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작가는 그러나 사태난 죽음들의 구체적 사연을 시시콜콜 주워섬기지는 않는다. 소설의 초점은 그것들을 보듬고 흐르는 일상에 맞추어져 있다.
“숭헌… 뉘라 양력슬두 슬이라 이른다더냐, 상것들이나 왜놈 세력(歲歷)을 아는 벱여….” 혀를 끌끌 차는 마지막 이조인(李朝人) 할아버지에게서 아침마다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우고, 낮이면 펄밭을 뒤져 꽃게를 잡고 고둥을 주우며, 아이다운 장난기와 심술로 장에 온 촌사람들을 놀려 먹기도 하고, 밤이면 개펄 위를 몰려다니는 도깨비불에 마음 졸이다가도, 잠결에 어렴풋이 들리는 여우울음에 홀린 듯 어슴새벽 바닷가로 나가 보는 것이 그 일상이었거니와, 전쟁은 그 가난하지만 평온한 일상을 근본부터 뒤흔들어놓고 만다.
가령, 읍내 여관의 종업원으로 취직한 월남 피난민 솔이엄마는 장돌뱅이 서울 사내와 눈이 맞아 핏덩이를 데리고 밤도망을 놓는다. 그 충격으로 솔이아버지가 목 매달아 자살하고, 두 노인네는 며느리보다는 집안의 대를 이을 손주를 찾을 겸하여 떠돌이 장수로 나선 것은 전쟁이 부린 도깨비 심술의 전형적인 사례로 된다.
전쟁이 바꾸어버린 팔자의 주인으로 민구네 집 부엌데기 옹점이를 빼놓을 수 없다. 덜렁대기는 하지만 당차고 속이 깊은 데다 인정 많고 쾌활했던 옹점이는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에 나간 남편이 죽자 시집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장터의 약장수 패거리를 따라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신세로 영락한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다….” 결혼하기 전 아궁이 앞에 주저앉아 부지깽이로 장단을 맞추며 노래부를 때 옹점이는 자신의 운명이 노랫말이 가리키는 길을 따르게 되리라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내 살과 뼈가 여문 마을이었건만, 옛모습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던 것이다. 옛모습으로 남아난 것이 저토록 귀할 수 있을까.” 1972년에서 77년까지 발표된 <관촌수필> 연작의 첫편인 `일락서산(日落西山)'의 한 대목에서 작가는 이렇게 탄식한다. 소설의 배경인 작가의 유년기에서 20년이 지나서의 일이다. 거기서 다시 20여 성상이 흘러가버린 90년대 중반의 관촌마을은 앞서의 탄식조차도 사치가 아니면 엄살로 들릴 정도로 변화의 거센 바람에 하릴없이 노출된 모습이다.
95년부터 보령군과 합쳐져 보령시로 불리는 옛 대천시 중심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관촌부락은 이름마저 대관동으로 바뀌어 있다. 작가의 생가 터에는 오래 전에 2층 양옥이 올라갔고, 주변의 논과 밭 자리에도 다닥다닥 집들이 들어서 있다. 돌과 흙을 이겨 쌓은 생가 터의 축담 일부, 그 너머의 낮게 휘어진 소나무와 문전옥답 옆의 은행나무가 유년기의 기억을 그나마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북두칠성을 닮았다 해서 이름붙은 집 뒤의 칠성바위는 소설이 쓰여질 당시만 해도 “한결같이 옛날 그대로 제자리들을 지키고 있었”지만, 근처에 집들이 마구잡이로 지어지던 어느땐가 사라져 없어졌다. 작가는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바위들은 고인돌이었던 듯하다”며 “아마도 깨뜨려져 건축 자재로 쓰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작가가 무엇보다 안타까워하는 것은 마을의 수호신과도 같았던 수령 4백년 된 팽나무가 베어진 것이다. 작가의 유년기에 동네 처녀들이 그네를 매달아 구르곤 했던 팽나무는 그 자리에 한창 지어지고 있는 아파트에 밀려 쓰러졌다. 95년 가을 마을 입구에 세워진 <관촌수필> 안내비의“서쪽 언덕 위의 마을 처녀들이 그네를 뛰던 팽나무는 아직 남아 있다”는 명문이 무색하게 된 것이다. 마을 뒷편의 부엉재와 그 아래의 솔수펑은 여전하지만, 마을과 바다 사이에 자리잡은 드넓은 개펄은 바둑판 모양의 농토로 바뀌었고 그중 일부는 다시 운전연습장이니 식당이니로 야금야금 변신하는 중이다.
유신의 서슬이 시퍼렇던 70년대 초·중반에 남로당 아버지의 얘기를 소설로 쓴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세월은 변함없이 흘러 지난 93년에는 <관촌수필>이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 방송되기도 했다. 아직도 적지 않은 수의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아 있는 대천·보령 지역에서 드라마가 일대 화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화제와 소란 속에서 작가 역 시 소박하지만 간절한 꿈 하나를 품어보았다. 소설 속 민구의 첫사랑이었던 옹점이가 드라마를 보고 혹 연락을 해 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숱한 방랑과 고생 끝에 일찍 죽은거나 아닌지…”라며 말끝을 흐리는 작가의 눈에 얼핏 물기가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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