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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檀古記 -47
7) 太一神을 모신 東北亞
일찍이 동북아시아에서는 우주의 최고 통치자인 三神上帝님께 天祭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天地의 근원이 되는
太一神에게도 祭를 올렸다.
1993년 中國의 湖北省 荊門市 郭店村에서 道家와 儒家에 관련된 여러 竹簡(죽간)이 한데 묶인 ‘郭店楚墓 죽간’이
발견되었다. 이 죽간에서 그간 세상에 알려진 바 없었던 ‘太一生水’라는 글이 나왔다.
‘태일이 물을 생한다.’는 이 글은 태일에서 나온 물이 천지만물을 생겨나게 하는 원동력임을 말해주고 있다.
‘太一生水’란 조물주 三神의 조화수를 뜻한다.
太一은 만물의 生命을 창조하는 우주조화의 근원임을 일컫는 말이다.
이때의 太一은 인간을 가리키는 太一과는 구별된다. 인간 太一은 삼신의 세 가지 신성이 발현하여 생긴 三才 中
의 하나로, 天地와 하나 된 성숙한 우주적 人間이고, 太一生水가 말하는 太一은 만물의 모습을 창조하는 ‘우주
조화의 근원자리’이다.
동북아에서는 이 太一을 신격화하여 오랜 옛날부터 太一神으로 숭배하여 왔다. 이 땅이 신교의 본향이면서도
上古 역사서가 대부분 소실된 까닭에 고대 한국인의 太一神 신앙에 대한 기록이 우리 사서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中國의『後漢書』,『史記』등에 太一神에게 제사를 지낸 기록이 나온다. 漢 무제가 太一神에게 제사를 지낸 일
을 기록한『史書』「封禪書」에 따르면, 무제는 太一神을 국가적 제천행사의 주신으로 받들어 수도 長安의
동남방에 太一壇을 쌓고 春秋로 제사를 올렸다. 太一神은 중국사에서 至高神으로 추앙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史料에 太一神에 대한 제사기록이 나온다.『高麗史』28곳에서 太一醮禮(태일초례)
거행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의 소격전과 지방의 태일전에서 太一神을 모셨다. 고려 때는 궁궐 안에
太一殿이 따로 있었으나 조선 태조 때에 이르러 太一殿을 파하고 소격전에 合祀했다.
조선시대 소격전의 醮祭는 태일신에게 예를 바치는 제사라기보다는 계절의 조화를 빌고 왕실의 건강과 治病을
기원하는 예식에 그쳤다. 이것마저도 中宗13년(1518)에 조광조의 상소로 소격전을 철폐.
8년 뒤 중종21년에 모후의 병을 낮게 하기 위해서 소격전을 다시 설치. 임진왜란 후에 완전히 페지했다.
이 땅에서 太一 신앙 명맥은 단절된 것.
전남 함평의 道人 김경수가 18세기 초에 한민족의 太一文化를 복원시키는 太一天(태일문화의 완성작) 소식을
전했다. 50년 수행 끝에 삼신상제님으로부터 太乙呪(태을주)를 내려 받아 세상에 전파.
8) 天子文化의 상징 용봉(龍鳳)
용봉은 吉祥物로서 천자음양 기운을 상징하는 영물이다. 龍은 음(蔭)을 상징하는 神獸(신수)이고, 鳳은 양(陽)을
상징하는 神獸(신수)이다.
龍은 天地만물의 조화를 다스리고, 봉은 불의 조화를 다스린다.
용은 달의 광명을, 봉은 태양의 광명를 상징한다.
용봉은 음양, 水火, 일월을 나타내는 상징적 神物이기 때문에 용봉은 인간세상에서 天子文化의 상징이 되었다.
봉황(鳳凰)은 五德을 갖추고 있다. 푸른 머리는 仁, 흰 목은 義, 붉은 등은 禮, 검은 가슴은 智, 노란 다리는 信 상징.
五德은 帝王이 갖춰야할 덕목이기에 봉황은 天子의 권위와 위격을 상징한다.
용왕 totem 연구 대가인 중국의 王大有는『龍王文化源流』에서 (고전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용봉文化의
원류를 태호복희(太皞伏犧)와 炎帝神農에서 찾는다. 태호복희는 성이 風(풍)씨이다. 風과 鳳은 글자 유사. 풍의
본래 글자가 鳳이다. 갑골문에서는 풍을 봉으로, 鳳을 風으로 썼다.
태호의 昊(호)자는 하늘 호로서 태양의 광명을 나타낸다. 태호라는 글자 자체가 태양의 광명을 상징하는 봉황의
특성을 보여준다.
태호복희는 그물을 처음으로 만들어 고기를 잡았고, 天河에서 河圖를 받았으며 용으로 관직명을 삼았다.
이는 물을 다스리고 치수를 담당하는 지배자의 성격을 보여준다. 태호복희는 용봉토템의 원류이다.
염제신농에게서도 용봉文化의 성격이 나타난다. 仰韶文化(앙소문화. 중국 黃河 중류지역에서 BC4,500- BC3,000
년경에 존속했던 新石器문화)는 신농씨 중심의 文化인데 앙소文化 토기에서 鳳 토템의 원류적인 三足烏가 최초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신농의 탄생 설화에 용이 등장한다. 신농씨의 母(女登)는 신비로운 용을 본 후 임신, 신농을 낳았다고 한다.
王大有의 주장은 태호복희, 염제신농은 용봉文化의 원류라는 것(이다.) 王大有는 용봉문화가 동이족 문화라는 것
을 인정하면서도 용봉文化 발견지역이 中國땅이고 중국 역사에 기록되었기에 용봉文化를 中國文化라고 주장한다.
배달시대의 유적인 紅山의 유적지에서 BC5,600년경의 석소룡을 비롯,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용과 봉황 유물이
발굴되었다. 중국학자들은 용봉文化의 시원을 태호복희 시절로 추정하지만, 배달의 근거지에서 발굴된 유물은
용봉文化가 태호복희 이전부터 동이족의 文化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王大有는 용 totem이 북미대륙으로 건너가서 Maya 文明에까지 전해졌다고 주장. Olmeca Maya 文化속에 나타
나는 용의 현상이 동방문화의 용과 흡사. Aztek 文明의 대표적 神인 케찰코아틀도 용신이다.
용봉문화는 인도의 간다라 文化를 위시한 서양文化의 모태인 그리스에까지 전해졌다.
지중해 문명 발상지인 Creta섬의 Xnosos 궁전 왕의 옥좌 뒷벽 벽화에 그려진 griffin 이라는 새는 머리 부분이
완연한 봉황 형상을 띠고 있다.
봉황이 서양으로 넘어가 griffin이라는 신비의 새가 된 것(?).
griffin은 역사적으로 BC2,000년경에 중앙아시아에 처음으로 나타났고, 서아시아 전역에 퍼져 BC 1,400년경에
Greece로 흘러들어갔다. Greece에 전파된 봉황文化는 Creta섬이 아닌 곳에서도 발견된다.
필자가 Pythagoras(BC580?-BC500?) 고향인 Samos 섬의 발시 박물관에 갔을 때도 발견.
9) 봉황 文化의 원형 三足烏
※수콧 鳳, 암컷 凰
봉 토템의 원형 三足烏는 三神文化를 나타내는 신령스런 상징물로서 몸통은 하나이지만 발이 세 개 달린 玄鳥이다.
日烏라고도 불리우며 太陽속에 산다고도 알려져 있다. 태양 안에 삼족오가 세 발로 서 있는 모습을 日中三足烏라
하고, 태양 안에서 날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을 金烏(금오)라 한다.
三足烏는 三神上帝님을 숭배하는 사상을 담고 있다. 전설에는 三足烏가 태양에 살면서 태양의 불을 먹고 사는
태양의 전령으로 나타나는데, 태양은 하늘을 상징하고, 태양 빛은 삼신상제님의 지혜와 권능을 나타낸다.
태양의 전령인 三足烏는 곧 삼신상제님의 使者이다. 삼족오는 하늘, 땅. 인간세계를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신과
人間 세계를 서로 연결해주는 삼신상제님의 심부름꾼인 것.
(三足烏는 발해연안 古代 동이족의 태양숭배 신앙 + 조류 숭배신앙이 숨겨진 우주 사상)
삼족오 文化는 위진남북조 시대를 지나 隨, 唐 시대가 되면 산동과 遼寧 지역을 제외하고는 점차 소멸.
이는 삼족오 文化를 일시적으로 夏족이 수용은 했지만, 원래 하족의 文化가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이처럼 삼족오 문화는 원래 중국 文化가 아닌 것. 한민족 문화권에서 먼저 생겨나 中, 日 등으로 전파된 것.
隨, 唐 시대까지 계속 삼족오 文化가 남아있었던 산둥, 요동지역이 동이족 강역이었다는 사실은 三足烏가 한민족의
고유 文化라는 것을 명백히 한다. 삼족오 문화는 고구려 시대에 화려하게 등장.
고구려 고분과 유물에 삼족오 문양 새기고, 절풍이라는 모자에 새 깃을 꽂았다.
백제에서도 삼족오 文化. 1971년에 발굴된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環頭大刀의 손잡이에 삼족오 모습이 보인다.
백제 예술의 정수인 金銅大香爐에서도 삼족오가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는 三神閣의 七星圖, 비석의 碑頭, 기와 와당, 무당 무구, 민화 등 일상생활 곳곳에서 다양하게 삼족오
문양. 三頭三足鷹, 三頭一足鷹 등의 모습으로 三足烏가 표현되기도.
三足烏를 통한 한민족의 三數文化는 고대로부터 조선시대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일본으로 전파된 三足烏는『삼국유사』에 기록된 燕烏郞(연오랑) 細烏女(세오녀) 설화에서 확인된다.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남녀가 日本으로 건너가자 신라에서는 太陽이 빛을 잃었다고 한다. 그들 이름에 烏자가
나타나는 것은 연오랑과 세오녀가 태양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日本에 현재 남아있는 삼족오 유물은 쿠마노 나치(那智大社) 神社의 기둥에서 찾을 수 있지만 미국의 Boston
박물관에서는 日本 인덕왕릉에서 발굴된 청동거울과 環頭大刀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 거울, 검에 三足烏가 새겨져
있다. 현재 日本 축구협회는 상징물로 三足烏 사용. 삼족오의 본향인 한국에서는 삼족오가 잊혀 졌으나 日本文化
속에서는 지금도 살아있다.
三足烏의 역할
1. 영혼의 운반자와 不死의 상징
2. 天子와 天命의 使者
3. 삼족오는 東夷文化
삼족오는 동이족의 南下와 더불어 음양오행설의 영향으로 불을 상징하는 남방의 수호신인 朱雀과 鳳凰으로 변천.
대한민국 대통령 紋章에도 삼족오 형상이 새겨져 있다.
桓檀古記 -49
2) Indian 文化속의 神敎
북미 인디언의 피라미드
Mexico의 Toltek 문명, Aztec 문명, Maya 文明 유적 등에서 Pyramid 발견.
북미 최대 인디언 유적지인 일리노이즈 州의 Cahokia 유적지에는 120여 개에 달하는 거대한 人工 언덕이 있다.
(북미 땅의 Pyramid).
유적지 한 가운데에 위치한 언덕인 Monk's Mound는 현재 흙을 쌓은 지반시설만 남아있다.
그 규모는 Egypt에서 가장 큰 Giza Pyramid보다 더 크다.
고대 톨텍文明 中心地인 Mexico의 촐룰라(Cholula)에는 한 변 길이가 400m에 부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Tepanapa(떼빠나빠) 피라미드가 있다.
얼핏 보면 언덕 같지만 내부 터널과 외부 계단을 갖춘 피라미드가 분명하다.
16세기에 멕시코를 정복한 Spain은 이 피라미드 위에 성당을 지었다.
원주민의 성소, 즉 신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성당을 지은 것이다.
인디언의 三數文化와 놀이文化
중남미 인디언에게서도 고수레(삼신文化 자취) 풍습이 있다. 인디언들은 옥수수나 과일로 만든 발효주인 Chicha
(치차)를 마시기 전에 손으로 세 번 찍어 大地에 뿌린다.
밥을 먹기 전에 음식을 손으로 떼어 던지는 풍습은 Spain 정복자들이 남긴 기록에도 있다.
Mexico city의 국립 인류학 박물관에 소장된 삼발이 그릇도 중남미의 三神文化를 말해준다.
美 LA Southwest 박물관에는 여러 형태의 윷이 전시되어 있다.
현지 연구자들은 윷놀이를 즐긴 130여 부족이 이를 대륙 전체에 퍼뜨렸다고 해석.
Oklahoma주 카이오와 족의 윷은 우리 윷과 같다. 짝이 4개이고 반달꼴이다. 진행방법도 똑같다.
북아메리카뿐만 아니라 남아메리카 사람들도 윷놀이를 즐겼다.
파라과이, 볼리비아에 사는 차코족의 윷은 우리 윷과 모양이 똑같고 이름도 윷이다.
팽이놀이, 투호, 자치기, 고누, 실뜨기, 그림자놀이, 공기놀이, 굴렁쇠 굴리기도 했다.
우리 민족처럼 불이나 연기가 잡귀를 물리친다는 귀신관념도 있었다.
인디언의 영성문화
“북미 Indian에 관한 가장 놀라운 사실은 神政을 받으며 산 옛 Israel인들의 종교에 버금갈 정도로 인디언들은
종교 안에서, 종교에 의해 관습적으로 살아왔다.”(E.T. Seton,『인디언의 복음』, p,28).
인디언은 神의 세계에 대한 철저한 인식 속에서 살아온 것.
(초창기 선교사들은 북미 원주민의 고유 종교를 인정치 않거나 악마적인 것이라 생각...神의 차별화)
Seton(시튼)은 Indian의 삶과 철학을 평생 연구. 그는 인디언이 ‘한 위대한 神’(Great Oversoul)을 믿었다고
말했다. O
versoul은 大神靈을 말한다.
Emerson(Ralph Waldo Emerson. 1803-82.al 사싱기,시인)은 만물을 生成시키는 靈을 대신령이라 칭했다.
Indian의 한 부족(Pony 族)은 그 위대한 神(The Great Oversoul)이 ‘온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최고 통치자이고
그 분 뜻에 따라 모든 일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Pony族은 pipe 담배 첫 모금, 음식의 첫 숟가락을 언제나 The Great Oversoul에게 바쳤다.
Indian도 동북아의 신교文化처럼 절대자 神을 ‘우주의 통치자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받들었다.
ghost dance(천지 성령의 춤)
Nevada주 파트유族 인디언인 Wovoka(1856~?)에 의해 시작됨.
1889.1.1 Wovoka가 하늘에 올라가 神으로부터 받은 이 춤은 사람들이 특정 장소에 모여 중앙의 生命나무를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만들어서 추는 춤이다.
춤을 추면서 조상의 영혼을 만나고 죽음, 질병, 노화가 없는 신세계를 준비하는 것.
ghost dance는 북미 각지의 인디언에게 순식간에 퍼져 인디언의 영적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1890.12.29 수백 명의 인디언을 무차별 참시, 이후 G.D는 사라졌다.
비록 2년 만에 중단되었지만 G.D 운동은 현대의 인디언 사회에서 일어난 신교의 부흥운동이다.
G,D에 등장하는 生命나무는 동북아 신교문화권에서 소도로 심었던 神檀樹와 같다.
生命의 나무는 神이 감응하는 나무로서 天上의 하느님과 소통하는 매개체이다.
上古시대 동북아인들이 소도에서 천제를 거행한 후 신단수 주위를 빙빙 돌며 다 같이 춤, 노래를 즐겼던 모습과
흡사하다.
인디언 文化엔 상투, 머리 또아리, 등에 아이를 업은 모습, 온돌(알류산 열도. America와 Asia 연결路의 아마낙
섬에서 발굴한 세계 최고 온돌), 아기 낳은 뒤 금줄(외부인 出入금지), 고수레 풍습 등이 녹아 있다.(동방 한민족
文化의 흔적으로서 인디언 文化)
3) 日本왕실의 제천행사
일본의 현존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은『古事記』와『日本書紀』다.『古事記』는 712년 나라(奈良)시대 초기
에 오노야스마로(太安萬侶)에 의해 편찬되었다. 오노야스마로는 백제계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日本書紀』는 720년 아스카시대 텐무(天武)왕의 명령으로 도네리(舍人) 親王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일본
최초의 官撰 正史이다. 이 책에는『백제기』『백지본기』『백제신찬』등의 기록이 인용되어 있다.
역사서를 편찬할 自國의 史料가 부실했기 때문에 자기네 뿌리인 백제 역사서를 참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古事記』에는 일본의 창세신화가 造化三神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데, 이 조화삼신은 곧 神敎의 三神을 말
한다. 예로부터 日本人의 정신적 구심점이 된 신사를 중심으로 한 神道는 바로 동북아 신교문화의 원형이다.
일본의 11세 스이닌(垂人)왕 (BC29-AD70) 때 신라에서 王子 天日槍(아메노히보코)이 7개의 神物을 가지고
무리들과 함께 큐슈 북부 이토지역으로 갔다.
그 7대 神物중 하나가 곰의 신단으로 알려진 히모로기(神籬)이다.
이 히모로기는 신단, 곧 천신을 모시는 제단이자 그 신단에 있는 큰 나무인 神檀樹다.
곰의 히모로기는 곧 웅족의 신단을 의미. 이것이 일본열도에 전해지면서 일본 神社가 된 것.
그렇다면 日本 신사의 실체는 무엇? 동경대학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 교수는 “신도는 제천행사의
옛 풍습”이라 했다. ‘신사=소도’를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日 우익단체는 구메 교수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위협했고, 교수는 동경대 사학과 교수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교수는 1891년『史學會雜誌』제 23-25권에 ‘신도는 제천의 古俗’이라는 제목의 논문 게재.
이 논문은 일본 왕실의 신앙은 ‘하늘의 천신을 그들의 조상으로 받드는 것’이고, 이 신앙은 고조선인들이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던 양식이 日本으로 넘어온 것‘이라고 했다.
이 논문은 일본 천황가의 소위 황국신도를 송두리째 뒤엎어버린 엄청난 학술적 고증이었다.
(홍윤기.『일본문화사 신론』, p.6)
초기의 일왕들의 제위 연대는 사실보다 120년 정도 올라가 설정되었다. 일제 식민사학자인 소우키치(津田左右吉)
조차 “긴메이(欽明.29세.539-571) 조에 기록된 曆(역) 박사가 백제에서 도래했다(554)는 것을 사실로 인정한다
면, 그 이전의 年代記는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日 역사가 조선보다 짧기에 열등감 극복 노력 일환으로 초기 王들의 재위시기를 거의 2주갑(120년=60x2)
상향 조정했다고 지적. 따라서 스이닌王 재위기간은 91-190년 정도로 보아야 한다.
최남선은 ‘일본의 신도가 천제의 옛 풍속’ 이라는 데 同意(동의). 日本의 神道(신도) = 古神道라는 것.
(일본 대마도에는 이러한 祭儀와 관련, 신성 구역을 솟도(そっど)라 하는데, 이는 소도가 일본으로 건너감에 있어서
대마도를 거쳤다는 의미.)
天祭文化뿐 아니라 三神의 使者인 三足烏(삼족오)문화도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神武는 萬世一系라는 일본 왕가의
초대 왕으로 등극하여 일본열도 최초의 古代국가인 야마토(大和) 정권의 틀을 갖추어 나아갔다.
이때부터 삼족오는 하늘의 사자요 진무(神武)왕의 수호신으로서 일본국을 상징하는 하나의 형상이 되었다.
日王 즉위식 때 사용하는 기구에 삼족오를 형상한 봉황이 보이고, 즉위식에서 입는 붉은 옷에도 삼족오와 용봉
그리고 북두칠성의 문양이 보인다.
일본의 문화적 상징인 이세신궁에서 마쯔리(祭)가 열릴 때는 龍鳳紋樣으로 장식된 북을 치고 천상의 지존한 神인
太一神을 모시는 행사를 갖는다.
이 태일신을 모신 이세신궁을 중심으로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여 정신문화의 기틀을 형성한 것이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도 일본에선 내각이 바뀌면 수상 이하 전 각료가 이세신궁에 직행, 배례를 올린다.
(이세신궁)
이세 신궁(일본어: 伊勢神宮, いせじんぐう)은 일본의 신사(神社) 중 하나이다. 미에 현 이세 시에 자리하고 있으며,
신사의 이름은 미에 현의 옛 이름 중 하나인 이세 국에서 따 온 것이다.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신사로, 일본 내 신사들의 중심 시설이다. 때문에 이세라는 지명을 붙이지 않고 신궁 (神宮)
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세 님’, ‘대신궁 님’ 등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히쿠마 신궁, 구니카카스 신궁과 더불어 ‘신계’ (神階)가 내려지지 않은 신궁으로, 우사 신궁, 이와시미즈 하치만구
와 더불어 일본의 종묘로 추앙받아 왔다.
태양을 상징하는 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시는 황대신궁과 의식주를 상징하는 신인 도요우케노 오미카미
를 모시는 도요우케 대신궁이 있다.
황대신궁을 내궁, 도요우케 대신궁을 외궁이라 부르기도 한다.
특히 아마테라스는 천황 가문의 조상신이었기 때문에,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이세 신궁은 일본 천황 가문과 조정
에서 매우 중시했던 곳이다.
그래서 본래 이세신궁은 국가 제일의 종묘로서 천황만이 공물을 바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중세 이후 이세신궁의 온시(御師, 신사에 소속된 기도사)들의 활동에 의해 아마테라스가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일본의 수호신으로 신앙되어 광범위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일생에 한 번쯤 이세신궁에 참배해야 한다는 관념이
국가적으로 형성되었다.
두 정궁 주변에 별궁, 섭사, 말사, 소관사 등 123개의 크고 작은 사궁 (社宮)들도 있다. 20년에 한번씩 신궁을 새
로 짓는데, 이를 ‘식년천궁’ (일본어: 式年遷宮 시키넨센구)이라 한다.
가장 마지막으로 식년천궁을 거행한 해는 1993년이다.
관련된 시설로는 신궁 미술관, 신궁 농업관, 신궁 문서 등이 있다.
일본 학계에서는 神武王부터 9대 가이카(開化) 왕까지를 一系의 황통을 만들어 내기 위한 가공의 천황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환단고기』는 진무가 실존 인물이라 밝히고 있다.
『단군세기』 3세 가륵 단군 조와 36세 매륵(買勒) 단군 조의 기록 그리고『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에 따
르면 매륵단군 재위 38년(BC667)에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裴幋命)이 일본으로 가 열도를 평정하고 그곳 왕이
되었다.
그런데『일본서기』에는 이 해를 진무가 일본의 초대왕으로 등극한 때로 기록.
두 나라의 역사서를 종합하면 조선인 배반명이 곧 일본 왕 진무왕임을 알 수 있다.
『태백일사』「대진국본기」에 따르면, 서부여의 의려국 왕자 의라가 日本으로 건너가 15대 오진(應神)왕이
되었는데 三神의 符命에 응한다 하여 응신(應神)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2001.12 일본 천황(아키히토)이 “나의 선조인 칸무(桓武)왕의 어머니는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다.”고 고백,
자신도 백제계의 피라는 것을 시인했다.
일본 최초의 통일왕조인 야마토(大和) 왜 정권(320-645)이 기내(畿內) 지방에 들어서면서 4-5세기에 백제 등
에서 많은 기술자, 학자 등이 건너갔다.
『일본서기』에는 오진왕 때부터 渡來人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나는데 아직기(阿直岐)와 王人 등이 일본 열도에
와서 문물을 전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8세기 중반엔 야마토 지역에 백제인이 80-90%를 차지했다.
이렇듯 6세기 중반~7세기 초에는 고도의 문화, 기술 집단이 일본으로 건너가 고대 日本文化의 정수라 일컫는 아스카
(飛鳥)문화(645-710)를 건설하는 주역이 되었다. 한민족은 日왕가 뿌리이고 日本민족문화 전반의 바탕이었다.
日本人들의 역사 왜곡(자신들의 역사 연대를 엿가락 늘이듯이..)
일본에서의 까마귀(八咫鳥. 야마 가라타)는 日 초대왕 진무(神武. BC600 )왕이 야마토(大和)로 갈 때 길을 인도
했다고 해서 길조라 함.
한국의 동해 반대편에는 ‘독도는 우리 땅’이라 주장하는 시마네현(島根縣) 이즈모(出雲 )市가 있다.
이 市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이즈모 대사(出雲大社)가 있다. 약 2,000년 전에 지어진 이 神社는 원래 조선에서
유래된 元神(三神上帝님)을 모신 사당이었다.
그러던 것이 현재는 스사노오의 후손인 오오쿠니누시노가미(大國主神)를 모시고 있다.
※일본은 어찌하여 제 시원인 한국에 대해 악행을 계속할까?
이즈모 대사엔 고대 한국의 풍습에 따라 대형금줄(시메나와)이 걸려있다.
禁忌(삼가)와 神聖의 상징이다.
이즈모 대사는 일본 내 10만 여개 신사의 원조로서 매년 음력10월10일이면 일본 전역의 神들이 일제히 이즈모
대사로 모여 7일 간의 회합을 갖는다.
하지만 오늘날 신사의 중심은 동경에서 가까운 이세신궁이다.
19세기 메이지 정부가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까이 있는 이즈모 대사의 위상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고 수도에
가까운 이세신궁을 격상시켰기 때문이다.
이즈모 대사는 일본의 10만 神社의 원조이고, 이세신궁은 일본 근대화의 힘의 원천으로서 이들 신사는 일본의 2대
신사이다.
이즈모 大社는 높이 48m의 기둥위에 세워진 고층 신전이었다.
지난 2,000년에 고대 이즈모 대사의 본전을 받치고 있었던 9개의 기둥 자리가 발견되었는데 각 기둥은 직경1.3m
의 통나무 3개를 묶어 하나로 만든 것이었다.
이는 계시문화의 근원이며 신교 삼신사상의 진리적 정수를 담고 있는『天符經』의 3수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2,000년 전 신전 앞에 제관이 오를 수 있도록 세운 계단의 높이는 이집트나 그리스의 웅장한 신전을 능가하는
일면이 있다.
일본에서 政治(せい-じ )는 다른 말로 마쯔리고토(祭事.まつりごと )라고 불린다.
마쯔리(祭り)는 일본 각지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행하는 ‘신을 신사에 모시는 행사’이다.
그래서 본래 일본의 정치란 곧 神을 맞이하여 받드는 행위이다.
이세신궁은 원래 고황산령존(高皇産靈尊)을 모셨다.
고황산령존은 신의 아들 니니기를 地上으로 내려 보낸 천신(『일본서기』)으로, 일본 왕실이 지금도 궁중의
수호신으로 모시며 왕이 즉위할 때 거행하는 대상제(大嘗祭)에서도 모시는 신이다.
그런데 2세기에 이세신궁의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11세 스이닌(垂人)왕이 고황산령존 대신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오미가미)이라는 女神을 신궁의 새 주인
으로 모셨다(116년). 이 여신은 본래 신사(神祀)에 봉사하며 천신에게 제를 올리던 무녀(巫女)였다.
그 후 천조대신은 헤이안 시대(平安시대.794-1185) 중기에 이르러 일본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교토(京都)로 수도를 옮긴 50세 칸무(桓武 )왕이 천조대신을 왕가의 위대한 황조신으로 내세운다.
메이지 유신시대에 이르러 천조대신의 위력은 더욱 높아졌다.
정부가 이세신궁을 중심으로 전국 모든 신사의 위계질서를 정리하고 일본의 근대화를 도모하였다.
그래서 일본 근대화의 성장의 원동력을 알려면 무엇보다도 이세신궁과 일본 신사의 백미인 이즈모 대사를 가
보아야 한다.
이세신궁은 20년마다 원래의 본전 인근 터에 새로운 본전을 지어 옮겨간다. 이를 式年遷宮이라 한다.
1993년(제61회 식년천궁)에 본전이 새로 건립되었으니 2013년에 또 천궁을 한다.
오늘날 내각이 바뀌면 수상 이하 전 각료가 이세신궁을 찾아 천조대신에게 절을 올린다.
이세신궁은 오늘날 일본의 역사, 종교, 문화의 정통성을 대변하는 상징물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세신궁은 천신(삼신상제)를 모시던 무녀가 천신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대신 앉아 있는 신사에 지나지
않는다.
桓檀古記 -50
5. 神敎에서 뻗어 나간 儒·佛·仙
『삼국사기』에 따르면, 최치원은「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이 땅의 신령스런 道인 始原文化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힌 다음 '신교는 유불선 삼교의 사상을 그 자체 내에 지니고 있다'(內包三敎)고 했다.
이는 유교를 통달하여 후일 고려의 통치이념 확립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까지 섭렵한
신라의 대학자가 인류의 시원종교인 神敎가 유불선의 뿌리임을 밝힌 역사적 선언이라 할 수 있다.
1)神敎에서 나온 유교
공자는 27세에 동이족의 天子제도를 위시한 여러 官制와 문헌을 공부하였다. 그 배움을 열어 준 스승이 담국
(郯國)의 군주 郯子인데 담자는 동이족 출신이다.
공자는 또 장홍(萇弘)이라는 인물로부터 음악을 배우고, 사양(師囊)이라는 魯나라 악관으로부터 거문고를,
노담(老聃 )으로부터 예(禮)를 배웠다.
周나라 大夫 장홍 외의 두 사람은 山東人이다. 산동은 동이족의 주된 근거지로서 중국 땅에서 신교문화가 가장
번성하던 곳이었다.
2,500년 전 동이족 출신인 宋나라 微子의 후손인 孔子는 동이족 출신이거나 최소한 동이족 문화권에 살고 있던
인물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자신의 사상을 확립했던 것이다. 공자가 이상사회의 모델로 삼은 周는 정치, 문화
적으로 고조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夏, 商(또는 殷), 周 3대 왕조는 고조선의 신교문화권에 속했고, 하, 상, 주 사람들은 고조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삼신상제를 신앙했다,
商나라 때의 骨文은 거북의 배, 동물의 어깨뼈를 불로 지쳐 그 뒷면이 터지는 모양으로 상제님의 뜻을 물어 점을
친 내용을 담고 있다.
商나라 초기에는 이미 갑골 占을 통해 상제님의 뜻을 헤아려 그것을 왕에게 전달하는 전문가 집단인 貞人(점을
보는 사람)이 있었고, 후기에는 왕이 직접 정인노릇을 하기도 했다. 점복활동과 관련된 내용을 적은 갑골문에는
조상신과 상제님께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周나라 때의 상제(上帝) 신앙은 孔子가 편찬한 儒家經典인『詩經』,『書經』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周나라 왕들은 인간에게 天命을 내리고 (하늘이 내린 명령 = 生命), 인간이 덕을 잃으면 언제라도 그 천명을
거두고 재앙을 내리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하늘(天)을 대하였다.
푸른 하늘은 곧 상제님을 대변하는 上帝天으로 인식을 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사람들이 동서남북의
天地 4방위를 천지의 주인인 상제님의 의지의 표상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周나라를 이상으로 삼은 孔子가 신교의 영향을 받은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공자는 "옛것을 서술했으나 창작하지 않았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했다."(述而不作 信而好古)고 술회하
였다. 孔子가 말한 옛것이란 무엇인가?
『중용』의 저자인 子思는 자신의 조부인 孔子가 "요순의 도를 따르고 문왕과 무왕의 법을 지켰다."고 했다.
단군왕검과 동시대 인물이자 고조선의 제후였던 堯, 舜 임금은 동이족의 혈통으로서 고조선의 신교문화권에
예속되어 상제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일례로 4,300년 전 순 임금이 태산에서 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올린 기록이『書經』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유교에서는 정통 상제신앙을 찾기 어렵다. 왜 일까?
공자는 자신이 지은『周易』「설괘전」(說卦傳)에서 "상제님이 동방에서 출세하신다(帝出乎震)"는 말을 할 만큼
『주역』공부를 통해 천리(天理)를 꿰뚫어 삼신상제님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공자는 세상이 갈수록 더 어지
러워지자 차라리 바다건너 九夷에서 살고 싶다(欲居九夷)는 심경을 토로했다.
이를 보면 공자가 죽을 때까지 동방의 군자문화, 상제문화에 대한 동경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공자 사후에 제자들이 스승의 언행을 기록한『논어』에는 하늘을 인격적 상제천(上帝天)보다 자연천
(自然天) 도덕천(道德天) 개념으로 많이 이야기 했다.
공자 이후에 상제님에 대한 인식이 급속히 약화되면서 유교의 하늘은 점점 이법천(理法天)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漢 武帝 때 유학자 동중서(董仲舒)는 도지대원 출호삼신(道之大原 出乎三神.『태백일사』「삼환관경본기」)
이라는 신교의 가르침을 도지대원 출어천(道之大原 出於天.『한서』「동중서전」)으로 바꾸어 버렸다.
이것은 도의 근원을 근본적으로 왜곡, 삼신문화를 단절시키는 큰 폐악을 저지른 것. 이로 말미암아 삼신상제님의
천명을 받아 탄생한 유교는 삼신사상에서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神的 신앙에서 이성적 신앙으로?)
『춘추번로』(春秋繁露)를 쓴 동중서는 獨尊儒術 罷黜百家(독존유술 파출백가. 오로지 유가의 학술을 높이고,
다른 백가의 사상을 축출하라)를 건의하여 유학을 한 나라의 국교로 삼도록 한 인물이다.
道之大原 出乎三神이란 말은 고조선 11세 道奚(도해)단군 때의 국사(國師) 유위자(有爲子)가 한 말이다.
商나라의 건국공신인 이윤(伊尹)은 유위자로부터 신교의 대도문명을 배워 상나라의 제도와 질서를 정립했다.
공자의 손자 공빈(孔斌)의『동이열전』은 "하늘이 낳은 성인인 유위자의 훌륭한 이름이 중국에도 넘쳐 흐르니,
이윤이 그에게 수학한 후 殷나라 湯王의 어진 재상이 되었다.
(有爲子, 以天生聖人, 英名洋溢乎中國, 伊尹受業於門, 而爲殷湯之賢相)
남송(南松) 때에 이르러 제2의 공자라 불리는 朱子(1130-1200)는 '우주의 시원이자 주재인 理가 바로 太極‘이라
는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주장했다.
우주의 理法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한 주희(朱熹=朱子)는 "옥황대제(玉皇大帝) 그 분은 학자가 말 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고 하며 상제님의 존재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다.
주자의 성리학이 조선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면서 조선의 사대부들도 순전히 논리적(이성적)인 사고로만상제님의
세계를 얘기했다(가슴은 놓아두고 머리로만).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함)의 태도로 고전을 재해석하여
유교의 잃어버린 상제신앙을 되살리려는 하자들이 나왔다.
송시열(宋時烈)을 주축으로 한 老論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던 시기에『사변록』(思辨錄)을 저술, 주자학을 비판하
고 독자적인 견해를 밝힌 朴世堂(1629-1703)은 '天은 곧 神이다'면서 도덕적 의지가 있는 인격적인 하늘을 참
되게 믿어야 한다고 주장.
박세당과 마찬가지로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 궁중의례를 두고 일어난 禮訟論爭을 이끌었던 윤휴(尹鑴.남인의
대두.1617~1680)는 '상제님을 숭배하고 공경하니 온 천지에 상제님이 계신듯하다'는 자신의 체험을 문집
(『白湖全書』「庚眞日錄」)에 남겼다.
조선 후기 新儒學者들의 上帝신앙은 丁若鏞에 이르러 더욱 구체화 되었다. "하늘의 주재자는 상제이다.
천은 상제이다. 상제님이란 누구신가? 천지와 신과 사람의 밖에서 이들을 조화시키고, 이들을 거느려 다스리고,
이들이 편하게 쉬며 심신을 기르도록 하는 분이다."
성리학자들과 달리 상제님을 우주의 주재자로 인식한 茶山 정약용은 당시의 양반 지배층에 만연한 도덕불감증,
관료들의 비도덕적 행위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처방으로서 '신교의 삼신상제신앙을 계승한 원시 유교의 상제신앙
을 복원한 것'을 주장했다.
'성리학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理를 버리고, 고대 유교의 상제신앙으로 되돌아가자(原始返本)는 것-
이것이 다산이 병든 조선 사회를 향한 일성이었지만, 그러나 다산 사상은 이단시 되었고, 그 후 이 땅의 유교에
서는 상제신앙의 자취를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다산은 “세상이 썩은 지 이미 오래다.”(天下腐已久矣.『다산시문집』「중씨께 올림 上中氏」) “대개 털 오라기
하나만큼 조그마한 것이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한 다음에야
고칠 것이다.”(蓋一毛一髮 無非病耳 及今不改 其必亡國而後已.『茶山文集』「邦禮艸本序」)
桓檀古記 -51
2)신교에서 나온 불교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의 출신과 성에 대한 연구결과는 불교가 신교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석가족의 이름인 샤카(Sakya)가 스키타이(Scythian)와 유사하고 석가족이 왕족(계급)이었다는 점을 들어 석가
모니를 흰 얼굴을 한 Arian이라 한 것이 서구 학자들의 통설이었다.
그러나 1912년에 영국의 저명한 印度사학자 Vincent Smith는 "Mongolian 또는 산악인은 인도 북부 인구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석가족의 성인이자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붓다는 태생적으로 Mongolian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
한다."고 했다.(『The Oxford History of India』, 1921)
이후 저명한 인도 사학자인 Percival Spear와 Rai-Zimmdar 등도 석가 몽골인설을 주장하였다.
태국 불교학자 잠농 통프라스트(Chamnong Tongprasert)는「락카나 수따」(Lakkhana Sutta, 三十二相經)에
묘사된 "그들(석가족)의 안색은 청동 빛과 같고, 눈과 머리칼은 흑색"이라는 신체적인 특성을 들어 오늘날에도
히말라야 산맥 기슭을 따라서 분포된 민족의 대부분은 몽골계 인종에 속하기 때문에 석가족은 틀림없이 몽골계
인종이었을 것"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했다.
석가 탄생과 출가를 묘사한 그림, 조각은 석가나 석가족 사람들의 머리 모양이 상투 (형태)였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 상투와 그 형태가 다르지만 상투가 변형된 형태임이 틀림없다.
우리와 형태는 다르지만 상투는 현재까지도 묘족에서 확인할 수 있고 20세기 초 America Indian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상투는 전형적인 동이족 문화이다. 현재는 학계에서 석가를 Arian이 아니라 Mongolian으로 보고 있다.
당나라 도선(道宣)의『釋迦氏譜』, 梁나라 僧祐의『釋迦譜』에 따르면, 석가모니는 석가라는 성 외에 구담(懼曇),
사이(舍夷), 감자(甘蔗), 일종(日種)등의 성을 가졌다고 한다.
사이는 ‘외국의 귀한 성’이란 뜻으로 석가모니가 이족(夷族), 즉 동이족의 한 계열임을 암시한다.
감자는 몽골계의 묘족 후손들이 썼던 성(姓)이다.
석가족은 자신이 태양족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생각. 초기 경전인『suttanupata』(숫따니빠따. 經集)에는 석가
가 자신의 가문에 대해 "정직하고 부와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가계는 아딧짜(Adicca. 태양)이고" 라며 직접
언급한 내용이 나온다. 또한 붓다는 종종 태양의 후예(Adiccabandhu.日種族)로 불렸다.
이는 석가가 태양을 숭상하는 光明族에 속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광명을 숭상한 인류 시원 종족인 桓族과의
연관성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석가모니와 동방족의 관련성, 나아가 불교와 신교의 인연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치원도 일찍이 "석가불은 해 돋는 우이(夷)의 빛나는 태양이다.
서토에서 드러났으나 동방에서 나왔다."고 하여 석가를 동이족의 일원으로 기술.
불교문화에는 신교문화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동물, 地母神, 龍神숭배 등은 Arian의 문화가 아니라 신교문화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또 불교의 法身佛, 應神佛, 報身佛 등 삼불사상은 그보다 더 오래된 신교의 造化神, 敎化神, 治化神 삼신사상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신교의 삼신일체 사상이 불교에서 삼신일체 사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석가의 혈통, 불교 풍습과 사상은 동방신교
와 불교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3) 신교에서 나온 東仙, 도교
도교는 대체로 황제 헌원(軒轅)과 노자(老子)를 그 시조로 받든다. 北宋(979-1026)초기에 지어진 도교의 대장경
『운급칠첨』(雲笈七籤)에 따르면, 황제 헌원은 두 차례나 신농씨의 후손인 광성자(BC2,691년에 紫府仙人 光成子)
를 찾아가 道를 구했다. 이때 광성자는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깨우침을 주었다.
"지극한 도의 정수는 오묘하고 그윽하다.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라. 고요함으로 정신을 감싸 안으면 形體가 장차
저절로 바르게 될 것이다. 반드시 고요하고 반드시 맑게 하라. 너의 형체를 수고롭게 하지 말고 너의 정기를 어
지럽히지 않으면 곧 장수할 것이다."
(至道之精 無視無聽 杳杳冥冥 抱神以靜 形將自正 必靜必淸 無勞爾形 無搖爾精 乃可長生)
중국 도교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한『포박자』에는 황제 헌원이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박달국의 수도인 청구
(靑丘)에 들러 동방의 큰 스승인 자부선사(紫府仙師)로부터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전수받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자부선사는 배달시대 치우천황(고조선 14세)의 국사(國師)였다.
황제는 동북아 배달의 노인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바탕으로 도교의 시조가 된 것이다.
『抱朴子』는 중국 동진(東晋, 317∼419) 시대 학자인 갈홍(葛洪)이 한ㆍ위시대의 위백양(魏伯陽)이란 사람이
BC 220년쯤에 저술한 '주역 삼동계'에서 전개한 역(易)의 이론에 신선도(神仙道)의 이론과 방법을 확립시켜
저술한 내용으로 도교에서 춘추전국시대 이후 전해 내려오는 신선에 관한 이론을 집대성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抱朴子』중국 진나라 건무(建武) 원년(317)에 갈홍이 지은 도가서(道家書). 총 70편으로 내편(內篇)에는 도교
사상이 체계적으로 논술되어 있고, 외편(外篇)에는 유교적 정치론으로 시정(時政)의 이해득실ㆍ인사(人事)의
선악 따위가 논술되어 있다.
도교의 또 다른 시조인 老子는 산동성 지역의 동이족 사람이다.
노자는 자신의 성인 한(韓)씨를 동방을 상징하는 나무 목(木)자가 들어 있는 이(李)씨로 바꾸었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신교총화』) 이것은 노자가 본래 동방신교 문명의 정도를 계승한 자랑스러운 동방인임을
암시한다.
공자에게 예(禮)를 가르쳐 주었다는 노담(老聃)이 바로 노자(老子)이다. 그는 동방 天子文化의 종주가 동방 고조선
임을 천명한 '자기동래'(紫氣東來)를 전한 인물이다.
춘추전국 시대(770-221. 春秋時代=770-484, 戰國시대=484-221)에 공자, 노자라는 두 위대한 사상가가
나왔다. (공자=BC551-BC479, 노자=BC6세기경?, 장자=BC289?, 부처=BC563-BC483?)
孔子는 仁義의 도리로써 무법천지가 된 세상을 바로 잡는 儒敎를 창시하였고, 老子는 人爲를 초월한 무위자연을
주장한 道敎를 창시했다. 魯나라와 楚나라는 중국의 동쪽 땅에 있어 신교문화가 다른 지역보다 강성했는데,
유교와 도교는 이 신교의 토양에서 자라난 것이다.
도교의 신앙체계와 교리에도 신교의 정수가 들어 있다. 도교의 三淸은 곧 신교의 삼신사상에서 유래한다.
삼청은 옥청, 상청, 태청을 묶어 말하는 것으로 三元의 신이 머무르는 곳이다. 無에서 시작된 우주가 妙一을 거쳐
三元이 되고 이 三元에서 三才가 나와 마침내 만물이 갖추어진다는 道敎의 우주론에서 연유하였다.
삼청은 옥청(玉清元始天尊), 상청(上清靈寶道君), 태청(太清太上老君)으로, 도교에서 말하는 최고신인 원시천존
이 셋으로 나뉜 분신이라고도 한다.
어떤 뜻이 삼청이든, 한 분의 신이 조화, 교화, 치화의 세 신성을 발휘한다는 신교의 삼신사상과 상통한다.
주희는『주자어류』(『朱子語類』는 주희와 그 門人들의 학문상 문답을 기록한 책)에서 도가의 학문은 노자에서
나왔다. "그 이른 바 삼청은 대개 석가모니의 삼신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고 하여 도교의 삼청사상이 불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동북아 文化의 원류인 신교를 알았더라면 주희는 달리 말했을 것이다. 도교는 또 신교의 七星思想도 내포한다.
桓檀古記 -52
4)신교에서 나온 서선(西仙) 기독교
유대족의 첫 조상 아브라함
기독교는 히브리 文化, 즉 유대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고, 유대문화는 한국의 신교문화권이 약 6,000년 전 지금의
이라크 남부지방(Eden= 딜문=바레인)으로 남하하여 개척한 Sumer 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4,000여 년 전 Sumer 문명권의 갈데아 우르에 살던 Abraham이 아버지 테라(Tehra)와 함께 수메르의 생활풍습
과 신관, 자연관, 영원불멸의 선(仙)사상 등 Sumer 문명의 진수를 모두 뽑아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길을
떠난 것이 유대문화 탄생의 출발점이다.
다시 말해서 Adam에서 Noah까지, 그리고 Noah에서 테라(Tehra)까지의 역사는 수메르 땅에 살았던 Sumerian
으로서의 역사였다.
동방의 고조선 초기에 해당했던 Abraham 때부터 비로소 유대족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Abraham은 Adam과 Eve로부터 20대째, 대홍수 때 방주를 만든 Noah로부터는 10대째다.
족장 아브라함의 지도 아래 우르에서 위로 올라간 유대족은 하란에 잠시 살다가 다시 서남방으로 내려와 지중해
연안의 가나안 땅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유대족의 신 야훼로부터 자손을 약속 받은 지 25년 만인 100세에 이삭(Isaac)을 낳고 175
세의 천수를 누렸다. 이삭도 천수를 누려 180세까지 살았다.
그런데 이삭의 아들 야곱 때에 이르러 유대의 역사는 Israel의 역사로 바뀐다.
야곱이 얍복(Jabbok)강에서 당시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최고신으로 받들던 El(엘)과의 씨름에서 이겨(창세기
32장) 엘을 이긴 자, 즉 이스라엘(Israel)이 되었기 때문이다.
야곱은 아들 12명을 두었고, 그 12명이 Israel 12부족이 되어 12지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나중에 출애굽 사건을 통해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도 Israel 역사는 12부족의 동맹체였다.
Adam + Eve ⟶10대 째 Noah의 방주 ⟶ 이후 또 10대째 ⟶ Tehra(테라)의 아들 Abraham(아담과 이브로부터
는 20대 째) ⟶ 아브라함이 100세 때 Isaac 낳다 ⟶ Jacob(이삭의 아들), 12 자녀 출생(12지파). 야곱 때부터
이스라엘 역사 시작. 야곱이 얍복(Jabbok) 江에서 당시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최고신으로 받들던 El(엘)과의
씨름에서 이겨(창세기32장) 엘을 이긴 자, 즉 이스라엘(Israel)이 되었기 때문이다.
수메르의 다신숭배 전통에서 태어난 유대교
원래 Abraham 부족은 Sumer 지역 풍습대로 多神숭배. Abraham이 옮겨간 가나안의 토착민도 EL神을 비롯,
여러 신을 받들고 있었다.
El은 에블라(Ebla. BC3,000년 中末期 시리아 지배 도시왕국. 시리아의 고대 도시. 현재의 텔 마르딕. 에블라
고문서가 1975년에 발견됨) 유적지에서 나온 BC 2,300년경의 점토판에 적힌 신의 명부(名簿)에 최고의 신으로
기록되어 있듯이 신의 우두머리였다.
El신의 구체적인 모습은 우가리트(Ugarit. BC14-15세기 지중해 연안. 시리아 변방 국가)에서 발견된 점토판
문서에 묘사되어있다.
El신은 지혜를 상징하는 수염 난 늙은 모습이고, 신의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Mark Smith,『The Early History of God』)
가나안으로 이주한 초기 시절, Abraham 부족은 El과 야훼를 함께 받들었다.
이때 야훼는 El이 거느린 신 가운데 하나였다. "지존하신 이께서 만방에 땅을 나누어주시고, 인류를 갈라 흩으실
때, 신들의 수효만큼 경계를 그으시고 민족들을 내셨지만, 야곱이 야훼의 몫이 되고 이스라엘이 그가 차지한
유산이 되었다."(신명기 32:8-9)
여기서 '지존하신 이'는 원문 엘뤼온의 번역이다.
'주권을 지닌'을 뜻하는 엘뤼온은 바로 최고신 엘의 별칭이다.(엘뤼온=EL)
하나님을 뜻하는 엘로힘(엘의 가족. lhm)이란 말이 신들이라는 복수명사라는 것에서도 다신 신앙흔적이 보인다.
요컨대 유대교와 기독교는 El을 최고신으로 모신 Sumer의 다신 신앙에서 생겨난 것이다.
Abraham의 손자 Jacob이 El과 씨름하여 이긴 후로 히브리인은 El을 최고신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El뿐만이 아니라, 그 지역의 다른 신도 하나하나 야훼의 영역 안으로 동화되었고,
야훼가 히브리인의 최고신이 되었다. 대략 3,900년 전에 있었던 이 사건을 계기로 유대족은 야훼 중심의 유일신
신앙을 갖게 된 것.
오직 야훼 신만을 받들다.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은 이후 더욱 확고해지는데, 이는 Hebrew인의 수난역사와 맞물려있다.
Abraham의 손자 Jacob은 12아들 중 11번 째 아들 Joseph을 각별히 총애, 다른 아들들의 반감을 샀다.
형제들의 시기 때문에 Joseph은 결국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으나 꿈을 해석하는 특별한 재능 덕분에 파라오의
신임을 얻어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다.
그 후 그는 형제들을 용서하고 그들이 나일강 유역의 고센(카이로 동북 50km 지점 벨레스 부근. 나일강 하류
삼각주 지대 동북의 한 지역. The Land of Goshen) 지방에 살게 했다.
※ Joseph이 이집트의 재상이었던 때는 힉소스(Hyksos. BC1,785년 무렵부터 BC1,580년 무렵까지 이집트를
지배하던 동방에서 온 유목 민족)라 불리던 셈계 아시아인이 이집트 전역과 팔레스타인, 시리아까지 통치하던
때였다.(BC1,730-BC1,567로 추정).
힉소스王이 자기네 종족이 쓰는 셈語를 구사하는 민족을 특별 우대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Joseph이라는
역사적인 인물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분석.(고야마 시케키,『지도로 보는 중동이야기』, pp.52-53)
Joseph의 부름을 받고 이집트로 옮겨간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에서 점차 노예로 전락하여 벽돌을 만들고 온갖
공사에 동원되었다. 그러면서도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가득 찰만큼 무섭게 불어났다.'(「출애굽
기」1:7) 이에 경계심을 갖게 된 이집트의 파라오는 급기야 이스라엘 남자 아이를 나일강에 던지도록 명령을
내린다.
이에 한 어머니가 아기를 담은 바구니를 나일강에 흘려보냈고, 때마침 목욕을 나온 파라오의 딸이 아기를 건져
올렸다. 멀리서 이를 지켜본 아기의 누나 미리암(Miriam. 구약성경에 등장. 모세 누이)이 공주에게 유모를 천거
하겠다고 하여 아이의 생모를 불러왔다.
공주는 아기를 'Mose'라 했고, 모세는 40년간 생모와 함께 생활했다.
그 기간 중 Mose는 아마도 생모로부터 아담과 이브의 Eden동산 추방에서부터 노아의 홍수, Abraham의 가나안
(Canaan. 구약은 욜단강 서쪽 지방) 이주, 요셉의 이집트 생활,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이주, 이집트인으로부터
받은 핍박까지의 유대역사 전모를 들어서 알았을 것. 뿐만 아니라 유대족의 뿌리인 Sumer의 역사, 文化도 알았
을 것.
그러던 어느 날, 이스라엘 일꾼이 채찍질 당하는 모습을 보고 격분한 Mose는 이집트 감독관을 죽이고 시나이
(지중해와 홍해 사이의 삼각형 모양 반도. Sinai)의 광야로 숨어들어 그곳에서 미디안族(Midianite. 이즈마엘의
자손. Ishmaelilte이라고도 함. 유목민)의 사위가 된다.
양을 치며 나날을 보내던 Mose는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내라'(「출애굽기」3:10)는 야훼의
명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Mose가 'Abraham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즉 이스라엘의 수호신인
야훼를 처음으로 영접한 사건이다.
3번째 거절 끝에 명을 받아들인 Mose는 6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형제들을 이끌고 출애굽을 시작했다.
430년간의 이집트 생활(「출애굽기」12:40)이 청산되는 순간이었다.
Mose는 이집트를 떠나 시나이 산에 이르러 야훼로부터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로 시작되는 10계명을
받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10계명을 지키며 오직 야훼만을 받들고 그 대가로 야훼는 그들이 이집트로 오기 전에 살았던
가나안 땅을 되돌려 주기로 계약을 맺은 것이다.
※Mose의 출애굽을 인정한 파라오는 신왕국 제19 왕조의 람세스 2세(재위 BC1,290-BC1,224. Ramses II.
재위 BC1,314경-BC1,224 혹은 BC1,302-BC1,212 때. 고대 이집트 제19왕조 제3대 파라오)이거나 그 다음
왕위에 오른 아들 메르텝타王(재위BC1,224-BC1,214)이었을 가능성이 크다.(소야마 시게키,『지도로 보는 중동
이야기』, p.67)
※이스라엘과 야훼神 간의 계약은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풍습 속에 계승되었다. 할례(割禮)도 그 한 보기다.
아브라함이 99세, 그 아들 이즈마일이 13세 때, 그 일족의 남성이 할례를 했고, 그로부터 유대의 남자 아이는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게 되었다.(「창세기」17:12) 기독교에서는 이 할례를 정신적인 의미로만 받아
들이자는 바울의 주장에 따라 폐지했다.
Jacob이 El을 이긴 것이 Hebrew인이 유일신 신앙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면, Mose가 10계명을 받은 것은
그들의 유일신 신앙이 유대교라는 종교로 굳혀지는 계기가 되었다. Abraham은 Hebrew인이라는 민족의 첫
조상이고(Abraham은 Adam-Eve의 20대손이자 Noah의 10대손이다.)
Mose는 유대교라는 이스라엘 신앙의 창시자인 것이다.
수메르로부터 전수된 제사 풍습
유대족은 120세로 임종한 Mose를 여리고(Jericho) 마즌편 모압 땅에 묻고 여호수아의 지휘아래 40년간의 방황
을 끝내고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이스라엘인들은 오직 야훼神만을 받들기로 약속하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돌아왔지만, 자신들의 조상들이 Sumer
시대부터 행해 오던 다신신앙의 풍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단적인 예가 가나안인이 섬기던 바알神과
아세라 여신을 그들도 숭배한 것이다.(「사사기」2:13)
이스라엘인은 신을 모시는 사당을 높은 곳에 지었다. 이는 지구라트(Ziggurat)라는 人工山을 세우고 그 꼭대기
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낸 Sumer인의 관습과 일치한다.
레위기에 따르면, 구약시대에 유대인이 행한 제사는 크게 5가지(燔祭번제, 素祭, 和睦祭화목제, 贖罪祭,
贖愆祭속건제). 번제는 가장 중요한 제사. 가축, 새 같은 희생 제물을 태워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게 함.
Sumer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동부 지중해 연안 일대에서 족속 구분 없이 올린 지배적 제사 형식
소제는 곡물 가루로 드리는 제사. 유일하게 피가 없는 제사. 곡물 가루 + 유향 + 기름 얹어 제단 위에서 태우면서
제사지냄. 화목제는 신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제사. 즐거운 마음으로 제를 올리기에 재물을 태우지 않고 제사장에
게 선물로 주거나 가족, 이웃과 나눠 먹을 수 있다.
속죄제는 야훼의 금령을 범한 경우, 그 죄를 용서 받기 위한 것. 죄를 범한 사람 지위에 따라 바치는 동물의 등급이
달랐다.
제물 머리에 안수하고 그 피를 제단에 바르거나 제단 밑에 뿌렸다.
속건제는 야훼의 성물을 파손, 이웃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 올리는 제사. 제물로 숫양을 바쳤다.
모세5경 중 레위기는 상당부분이 제사형식, 절차에 관한 기록이다. 모세의 위대함은 유대교의 제사 예법을 정립한
점이지만, 유대교의 원형인 Sumer의 신앙전통, 특히 다신신앙을 전적으로 은폐한 잘못을 범했다.
※유대교에서는 Mose 5경을 모세가 지은 것으로 알지만, 성서학자들은 대부분 야훼 일신론이 확립된 뒤에 지어
진 것으로 본다.
※본래 유대인들은 망자의 무덤 속에 음식, 음료 넣어주는 관을 따로 만들었다. Sumer 문화 영향 보여주는 관습.
死後觀을 바탕으로 돌아가신 부모, 조상에게 예를 갖추었던 것.(망자도 무덤 속에서 먹고 마신다고 믿음.)
※고대 이스라엘인이 영혼을 믿고 조상을 숭배했다는 것은, 가나안에 들어간 후 마침내 통일왕국을 세운 이스라엘
의 첫 왕인 Saul의 일화에서도 나타난다. 사울王이 블레셋人과의 전쟁을 앞두고 불안한 심리를 못 이겨 무당 찾아
가 점을 본다. 사울왕의 이 같은 행위는 동방 신교문화에서 조상을 따르고 의지하는 모습과 같다.
고고학자 David Rohl이 밝혔듯이, Sumer 서사시와『구약전서』의 강한 연관성에서도 유대교가 Sumer문화의
절대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Mose가 이집트를 벗어나 Hebrew인 이끌고 시나이 반도를 유랑한 때는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의 암미사두
王 때다. 그 때는 수메르 서사시가 아카드어로 번역되어 널리 보급되던 시기였다.
Mose가「창세기」의 원저자라면, 그는 바빌론人들이 자신들의 조상인 메소포타미아人(Sumer인)의 전설을 널리
알리던 시기에 이스라엘 조상의 역사를 쓰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그 때 Mose는 「엔메르카르와 아라타의 지배자(엔메르카르의 무용담)」와 같은 Sumer 서사시를 읽었
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 서사시에 "온 우주와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의 말로 엔릴을 찬양했다."는 구절이
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엔릴을 믿었다.'는 뜻으로, 대홍수 이전에는 종교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다
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모세는 야훼를 절대자로 모시는 새로운 신앙을 유대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 '사용된 언어가 하나였다'는
원래의 뜻과 다른 의미를 채택했다. 그 결과가 바로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창세기」11:1)
라는 구절이다.
모세는 또한 야훼가 '인간을 흩어지게 만들려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Babel이란 도시 건설이 중단되게 하였다'
고 서술했다. 따라서「창세기」의 언어 혼란 에피소드는 모세가 고대 Sumer전설을 잘못 해석한데서 기인한 것.
(David Rohl저 김석희 역,『문명의 창세기』, pp.342~345)
왜 유대교와 기독교가 서양의 선(仙)인가? (『구약전서』기록에서 신교의 삼신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1. 삼신사상(神敎) 계승
야훼 신은 99세의 Abraham이 본처인 사라의 몸을 통해 이삭이라는 아들을 내려줄 것이라는 언약을 했다.
그 후 어느 날 불현듯 야훼가 아브라함을 찾아왔다. Abraham이 고개를 들어보니 사람 셋이 서 있었다.
Abraham이 그들의 발을 씻기고 빵, 송아지 고기를 대접하였으며 야훼 하느님은 사라가 반드시 아들을 낳을 것
이라고 두 번씩이나 말해 Abraham에게 자신의 약속을 확신시켰다.
(「창세기」 18:1 ~15) 이는 Abraham이 삼신을 체험했음을 나타낸다.(기독교 성경에서는 사람 셋을 3명의
천사로 해석한다.)
Israel 성지 헤브론(히브리어= 친구) 유적지에서도 삼신문화 확인 가능. 헤브론의 막벨라(이중 동굴을 의미) 동굴
에 아브라함 부부, 이삭, 야곱 3대가 나란히 묻혀 있다. 야곱은 이집트서 죽었으나 조상들의 땅인 헤브론으로
운구되어 묻혔다. 야훼도 스스로 유대백성을 향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애굽기」3:6)라고 말해 3대를 늘 강조.
2.신교의 소도문화도 유대교에 전수되었다.
동북아의 소도(蘇途)가 도피성(逃避城)이란 이름으로『구약전서』에 기록되어 있다.
도피성에 대해「출애굽기」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출애굽기」21:12~13.)
도피성은 고의가 아닌 실수, 신의 뜻에 따라 살인한 자가 도피하여 재판을 받기까지 보호받을 수 있게 특별히
설치한 城邑이다.
모세가 처음 설치했고, 모세 승계자로서 이스라엘인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간 여호수아도 요르단 강 따라 6개
의 도피성을 설치했다. 이는 고조선이 각지에 설치, 죄인이라도 그곳에 들어온 자는 추궁하지 않았던 소도와 동일
하다.
3. 유대교 기독교에는 선교의 仙 사상이 강렬하게 배여 있다.
신교 선사상은 Sumer 문화에 나타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Sumer의 영웅이자 王인 길가메시의 모험담을 담은
「길가메시 서사시」이다. (D.Rohl,『문명의 창세기』,p.240)
영생의 비밀을 찾아 여행을 떠난 길가메시가 엔릴에게 기도한 후 일곱 산맥 너머에 있는 생명의 땅에서 무트나피
쉬팀을 찾아낸다.
길가메시의 여행목적인 영생은 바로 신교의 불로장생 仙사상을 가리킨다. 일곱 산맥은 신교의 仙사상 언어인 칠성
(七星)을 지리학적으로 표현한 말. 이러한 Sumer의 칠성사상은 유대교, 기독교에서 7수 사상으로 다양하게 나타
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유대교, 기독교는 신교의 토양에서 태어난 종교이다.
특히 신교의 仙사상을 계승, 불멸과 영생을 추구한 서양의 선(西仙)인 것이다.
※Gilgamesh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왕조 초기 시대인 우르 제1왕조의 전설적인 왕(재위 기원전 2600년
경?)으로 수많은 신화나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이다.
이 왕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무훈담을 기록한 길가메시 서사시는 기원전 2000년
대에 점토판에 적혀 있다. 오늘날에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영웅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이름으로 수많은 픽션
작품에서 그의 이름을 차용하고 있다.
새 사료(史料)가 발견되어 실제 존재했던 지배자로서 역사성을 인정받았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서사시. 수메르,
바빌로니아 등 고대 동양 여러 민족 사이에 널리 알려진 신화적 영웅 길가메시의 모험담을 모두 12편의 사시
(史詩)로 엮은 것으로 기원전 24세기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엔릴(Enlil, Ellil)은 메소포타미아 신 중 운명을 제정하는 신이며, 그의 명령은 바꿀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왕위를 승인하는 신이기도 했다. 그의 사원은 이쿠르(é-kur)로 산의 집이란 뜻을 지니며 기원전 2천
년 전까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 중심인 니푸르(Nippur)에 위치한다.
엔릴의 뜻은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엔은 신, 주인 + 릴은 바람, 신의 바람이란 식의 해석으로 존재한다.
수메리아인들의 릴의 의미는 유령, 혼, 귀신이기에 신들의 주인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위에서 확인하듯 릴의 또 다른 해석은 바람이다. 이로 인해 엔릴의 이름은 바람의 주인 혹은 공기의 주인이란
해석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엔릴은 '아카드의 저주'(The Cursing of Agade)라는 고서에 으르렁거리는 태풍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인간의 소음에 지친 엔릴은 '대홍수'를 일으켜 사람들을 죽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로 인해 아누(An. 천상의 신), 키(ki. 지상의 신), 엔키(Enki. 물의 신)과 함께 엔릴(Enlil. 대기의 신)은 메소포
타미아 4대 주신으로 여겨진다.
또한 엔릴은 곡괭이(mattock)를 발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식물의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
엔릴은 아누와 키의 관계 후 내뱉은 숨에 의해 탄생하였다. 엔릴은 신들의 집인 딜문(Dilmun)에서 추방당해 죽음
의 세계 쿠르(kur)로 가게 된다. 지하 세계에서 그의 부인 닌릴(Ninlil) 혹은 수드(Sud)를 강간해서 태양의 부분적
인 신이며 지하 세계를 주도하는 신 네르갈(Nergal)과 달의 신인 난나(Nanna) 혹은 수엔(Suen. 아카드에서는 씬.
Sin이라고 함)을 낳는다. 또한 곡식의 여신인 니사바(Nisaba)의 아버지이며 니누르타라고도 불리는 파빌사그의
아버지이며 지옥의 여신 에레쉬키갈과 결합해 낳은 죽음의 신(질병, 흑사병) 혹은 에레쉬키갈의 전령 남타르
(Namtar)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한 신화에서 엔릴은 그의 아들이자 닌릴에게서 태어난 전쟁과 추적의 신 닌우르타(Ninurta)에게 악마 아사그
(Asag)를 죽일 전략을 알려준다. 이 책략은 샤루르(Sharur)를 거쳐 닌우르타에게 전달되고 닌우르타에 의해
신들의 왕국에 전해져 조언을 찾게 되었다.
동방신교 대제사장의 모델 멜기세덱
멜기세덱(히브리어: מלכי-צדק)은 구약성서의 등장인물로 살렘(예루살렘의 옛 이름)의 왕이나, 매우 단편적으로
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에는 '정의의 왕'이라는 뜻도 있다.
또 성체의 기도에서도 멜기세덱이 언급되는 경우가 있다. 살렘(Salem)의 왕이며,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는
구약 성경의 인물. 이상적인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이르는 말.
유대교, 기독교는 신교의 제사장 문화도 전수했다. Israel인의 역사가 시작되던 Abraham 시절의 제사장을『구약
전서』는 멜기세덱이라 전한다. (멜기=왕, 세덱=의(義)로서 멜기세덱은 정의의 왕이다.)
멜기세덱은 살렘지역의 왕이었는데 정의의 왕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는 제사장, 즉 지고한 하나님의 대리인이면서 동시에 백성을 거느린 통치자였을 것이다.
멜기세덱은 桓國(환국)의 환인천제(桓因天帝), 배달(倍達)의 환웅천황(桓雄天皇)처럼 祭와 政을 모두 주관한 최고
지도자라 할 수 있을 것.
멜기세덱은 유대인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대제사장이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최고신 야훼(하나님)에게 수많은 제사를 올린 것을 생각했을 때, 멜기세덱은 이스라엘 제천
문화의 주관자였을 것으로 측정된다.
그런데『신약전서』의 기록자들은 멜기세덱을 조상과 부모도 알 수 없고, 生沒年代도 알 수 없는 신화의 인물로
만들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브리서」7:3)
이렇게 멜기세덱을 신화적 인물로 만든 것은 그를 신성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수메르를 통해 유대 사회에
전수된 동방의 환국과 배달의 제천문화 자취를 없애기 위한 것이다. 제사장의 생애를 기록치 않음으로써 유대의
제천문화의 역사적 연원을 알지 못하게 했다. 그에 따라 유대문화와 그 뿌리인 Sumer 문명 사이의 연관성을
부정했다.
이처럼 사실을 감추는 수법은 일본이 초대 왕 진무(神武)의 실체를 감춤으로써 일본과 고조선을 단절시킨 것과
같다.
왕과 제사장을 겸한 멜기세덱은 후대 이스라엘인에게 이상적은 군주 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신약시대를 연 예수를 멜기세덱의 반차(班次.반열)를 좆은 者라 했다.
("너(예수)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좆아 영원히 제사장이라."(『시편』110:4)
예수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전수받아 그리스도,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되었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곧 제사장이 되었음을 뜻한다. 이것은 동방환국의 신교 제천문화가 유대사회에서
신약시대까지 꾸준히 전승되었음을 시사한다. 구약시대의 멜기세덱과 그를 계승한 신약시대의 예수, 이 두
제사장의 행적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모두 동방신교의 제천문화와 불멸의 仙사상을 계승했음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