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유의손(柳義孫, 1398~1450)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효숙(孝叔), 호는 회헌(檜軒) 또는 농암(聾巖). 습(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극서(克恕)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빈(濱)이며, 어머니는 윤방익(尹邦益)의 딸이다. 1419년(세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였다. 그 뒤 검열을 거쳐, 감찰·수찬을 역임하였다. 1436년에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곧 직제학에 올랐다. 동부승지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으나 그는 학문에도 능하였다. 1447년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에 동반직(東班職)에 있던 우부승지 김유양(金有讓)의 아들을 잘못 서반직(西班職)에 옮겨놓은 죄로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예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그때 상을 당함으로써 몸이 쇠약해져 관직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세종이 고기를 하사하여 보신을 시켰으나 끝내 병으로 사직하고 말았다. 그는 문장에 능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회헌일고≫가 있다.
2)유복기(柳復起, 1555~1617)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서(聖瑞), 호는 기봉(岐峯). 안동출신. 할아버지는 인의(引儀) 윤선(潤善)이다. 외숙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정구(鄭逑)와 더불어 교유하였다. 임진왜란 때 김해(金垓)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예천 등지에서 싸웠으며, 특히 아들 5명과 함게 전투에 참가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곽재우(郭再祐)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켰다. 전란이 끝난 뒤에는 굶주려 방랑하는 백성들을 진휼하는 데 힘썼다. 벼슬이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이르렀다. 세고(世稿)가 전하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
| 기양서원 창건사실 (岐陽書院創建事實)
<순조 6년(1806) 영남 제서원 씀>
1) 함창 임호서원 통문(咸昌 臨湖書院 通文)
선현을 숭봉하는 길은 조두(俎豆)보다 더함이 없고 후학이 경모하는 길은 다만 사원(祠院)에 있습니다. 우리 정효공 이선생은 왕실의 의친(懿親)으로서 자취를 선가에 의탁, 산수에 방랑하셨습니다. 우중(虞仲)이 문신(文身)해서 월(越)나라로 간 뜻으로 보오면 우리 공자께서 이르신바 「처신한 것은 청도에 맞았고 스스로 폐한 것은 권도에 맞았다.」하신 것을 이제 우리 선생에게서 다시 보는 것입니다. 또, 하물며 선생은 온아문명한 자질과 효제충신한 행실로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아니하시며 검박(儉朴)하고 약례(約禮)함을 스스로가 지켰음이겠습니까. 숭고한 환경 속에서 계시되 화려함을 싫어하고 지덕이 있으사, 열성조의 포양(褒揚)한 전례로서도 아름다운 시호(諡號) 대군묘제의 치제문 사당편액의 하사 등 다시없을 만큼 극진하였습니다마는 마침내 사림(士林)에서 높이 받들 곳이 없음은 어찌 심히 개탄할 일이 아니리요. 이제 사손은 타향으로 이사해서 사당만 우뚝 서 있으니, 전일에 왕손을 모시던 사당을 오늘날 제향하는 곳으로 삼는 것은 실로 그 의리에 당연함일새, 이를 인하여 모두 모여서 감히 전의(前議)를 펴오니 엎드려 비옵건대 여러 군자께서는 바삐 대사를 이룩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2) 함창 청암서원 통문(咸昌 淸巖書院 通文) 엎드려 생각건대 정효공 이선생의 백중(伯仲)은 곧 주나라 태백과 우중이십니다. 태백묘(泰伯廟)는 고소(姑蘇)에 세워졌고, 우중사(虞仲祠)는 진릉(晋陵)에 세워졌습니다. 우리 함창은 이미 선생의 타령(妥靈: 신주를 모심)의 땅이온즉, 태백의 고소(姑蘇)와 우중의 진릉(晋陵)이 다 다를 것이 없습니다. 병진년(丙辰 영조11) 연석(筵席)에서의 교지(敎旨)를 보오니 명확하기가 해와 별 같은즉, 여기를 버리고 딴 곳으로 갈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하물며 선생의 도덕의 탁월하심과 문장의 뛰어나심이 국사에 실려 있음에랴 여러 어른은 정중히 일을 처리하시어 선생이 고죽(孤竹)의 청절(淸節)로 하여금 빛나 천추 아래에 사라지지 않도록 하시오면 사문(斯文: 학읍)이 행심(幸甚)이로소이다.
3) 상주 근암서원 통문(尙州 近巖書院 通文)
대저 비상한 덕이 있으면 반드시 비상한 보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고소산(姑蘇山)에 태백묘(泰伯廟)가 있고 진릉현(晋陵縣)에 우중사(虞仲祠)가 있는 까닭입니다. 당세에 있어서의 그 자취는 사라졌어도 후세에 있어서의 그 행실은 사라지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아! 우리 양녕․효령의 지덕과 청권이라고하는 편액에 관해서 임금의 교지에 이미 「영남은 이에 추로(鄒魯: 공자․맹자)의 고장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삼가 임금님의 뜻을 생각하오면 책임이 영남의 사림에게 있을새 이에 감히 소리를 같이하여 앙고합니다. 원컨대 여러 어른은 능히 대례를 돈독히 하사 고소․진릉으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독차지함이 없도록 하시오면 국사의 빛이 되옵고 향당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4) 상주 봉산서원 통문(尙州 鳳山書院 通文) 그윽히 생각건대, 청권사는 다름아닌 효령대군의 신주를 섬겨 모시던 곳입니다. 선조(先朝: 정조대왕)께서 내려주신 묘호(廟號)는 다만 성은(聖恩)의 추감(追感)에서 나온 것 만이 아니요, 무릇 또한 공자가 칭찬해 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옛날에 지덕사는 매리(梅里)에 있을 때 오중(吳中)의 사람이 창시해서 아울러 제사 지냈음인즉 이 호상(湖上)에 있는 청권사(淸權祠)도 영남 사람이 또한 마땅히 예전대로 같이 제사 지내야합니다. 거룩하시다, 그 선양(禪讓)하신 의리와 퇴양(退讓)하신 절조는 만세에 큰 기쁨을 돕고 백대의 풍교(風敎)를 심으며, 그윽한 빛과 잠긴 덕은 격탁양청(激濁揚淸)인즉 자손으 사묘(私廟)만으로 그칠 수가 없습니다. 감히 분수에 넘침을 무릅쓰고 말을 합해서 아뢰오니 양찰하시오면 행심이로소이다.
5) 상주 옥동서원 통문(尙州 玉洞書院 通文)
우리 양녕․효령 두 대군은 태백․우중(泰伯․虞仲)의 덕으로써 지덕․청권(至德․淸權)이라는 이름이 있고, 선액(宣額)의 빛남이 천지사이에 있음이로되 지금토록 유림에서 높이 받드는 절차가 없었으니 어찌 성대(聖代)에서 빠뜨린 전례(典禮)가 아니겠습니까. 전날에 관천(灌薦)하던 곳이 우뚝이 비어 있으니, 이곳을 선비들의 정성에 맡겨서 아울러「지덕(至德)의 위(位)와 함께 향사(享祀)하면 신리(神理)와 인정에 비추어 지극히 윤협(允協:성실히 화합함)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여러 어른은 바삐 대례에 힘쓰시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6) 상주 흥암서원 통문(尙州 興巖書院 通文)
자취를 형만(荊蠻)으로 달아나서 주나라 8백년의 기업(基業)을 이룩하였으며, 왕위를 바탕으로 양보해서 성조 억만년의 큰 기쁨을 열었습니다. 전과 후의 지극한 덕이 아름다움은 나란히 하였고 아름다움을 짝하였습니다. 거룩하실사, 우리 두 대군의 성덕과 지행을 어느 누가 비난함이 있겠습니까. 그 상덕(尙德)하고 숭봉하는 것을 어찌 한갓 후손만이 제사하고 부조(不祧)하는 곳으로만 하겠습니까. 또한, 모든 선비들이 신주를 모셔 고축할 곳이 있도록 함이 옳겠습니다. 호상(湖上)의 옛집에 청권사가 우뚝 섰으니 옛일을 흠모해서 감회를 일으킴이 다른 곳보다 배나됨이 있습니다. 어찌 다행히도 공의가 사라지지 않고 통문이 가지런히 나왔겠습니까. 바라건대 여러 군자께서는 모름지기 대의를 돈정(敦定)하셔야 함이 행심이로소이다.
7) 안동 삼계․백록리사 서원 통문(安東 三溪․栢麓里社 書院 通文)
우리 양녕․효령 두 대군에게 해마다 변변치 못하나마 제사드림은 있었사오나 서원에서 신주에게 고축하는 예(禮)는 미처 겨를하지 못하였사옵니다. 이제 본손의 구택을 얻어서 백년의 정중한 의논을 차례로 거행하오니 지덕의 사당을 금세에 다시 보는 듯합니다. 화악(花萼)이 봄과 같고 강산이 빛을 내니, 신의 이치와 사람의 일에는 반드시 그 기다린 바가 있어서 그런 것같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여러 어른께서는 대례를 이룩하셔서 두 대군의 절의와 문장으로 하여금 왕실의 어진 공자로 되는 데에만 그치게 하지 마시고, 우리 영남의 백세 스승으로 섬기는 곳으로 만드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8) 순흥 소수서원․향교, 단계서원 통문(順興 紹修書院․鄕校, 丹溪書院 通文)
고소(姑蘇)와 진릉(晋)의 사당은 태백과 우중의 영광만이 아니요, 주가(周家)의 성함입니다. 지덕(至德)과 청권(淸權)의 사당은 양녕과 효령의 미덕만이 아니요. 국조(國朝)의 빛이옵니다. 우리 성조(聖祖 세종대왕)께서 덕을 쌓으시고 어짐을 쌓으심은 기주(岐周) 8백년의 기업(基業)과 전후가 같은 경로요, 당시에 두 공자(公子)께서 덕있는 아우에게 손위(遜位)하신 것도 태백․우중과 이처럼 서로 같사온데, 지덕과 청권의 받듬을 어찌 홀로 봉사손에게만 맡겨두고 고소․진릉(姑蘇․晋陵)과 같은 예(禮)를 오늘날에 다시 가다듬지 못하겠습니까. 또, 하물며 병진연교(丙辰筵敎 영조12년(1736))에 효령대군 사당을 영남에 세우도록 권면하셨으니 이것은 자못 공검호반(恭儉湖畔)과 한굽이를 우리 공자(公子)에게 주신 조칙(詔勅)으로서, 이제 이 도구(菟裘:노나라의 읍명))는 터를 옮겼으나 영묘(靈妙)한 빛은 홀로 남아 있습니다. 인하여 그 옛사당에다가 다시 새 의전(儀典)을 베풀어서 바로 고소․진릉(姑蘇․晋陵)과 같이 아름다움을 갖게 하고 빛을 가지런하게 하시면 행심이로소이다.
9) 용궁향교․삼강서원 통문(龍宮鄕校․三江書院 通文)
우리 양녕․효령 두 대군은 국가의 휴명(休明: 크게 밝음)한 때를 당하여 왕실의 선양(禪讓)할 즈음에 처신하심이 자취를 강호에 버리시고 한가롭게 몸소 숨으셨으니, 그 지극한 덕과 위대한 행실은 바로 태백과 우중이옵니다. 하오나, 고소․진릉(姑蘇․晋陵)의 사당세운 전례를 두 선생에게 미처 겨를 내지 못했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청권 옛 사당이 우뚝히 오래 비어서 오히려 길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손가락질하고 슬픔을 일으키게 함이거든 하물며 한 도의 장보(章甫 선비)이겠습니까. 엎드려 비옵건대 여러 어른을 큰 일을 빨리 바로 잡으시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0) 영주향교, 이산․오계․운곡․삼봉서원 통문(榮州鄕校, 伊山․汚溪․雲谷․三峰書院 通文)
우리 양녕․효령 두 대군은 곧 태백․우중입니다. 공검호반의 타령(妥靈)의 옛터로 인하여, 특히 사문(斯文 유학)에서 신주를 모시고 고축하는 성례(盛禮)를 거행함은 실상 우리 영남의 책임입니다. 혹은 일이 왕실에 관계돼서 사림(士林)의 논의가 용납될 바 아니라 하오나 이것은 크게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태백과 우중은 주(周)나라 왕실의 지친이온데, 우리 부자(夫子)께서 지덕(至德)이라 칭찬하시고 일민(逸民: 숨은사람)이라 칭하신 것이 여러 번이시고 한번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전기(傳記)에 기재된 것을 보더라도 오(吳)나라의 태백(泰伯)과 연릉(延陵)의 계찰(季札)의 사당이 당(唐)나라와 송(宋)나라에 이르도록 여전히 남아 있으니 이것은 어찌 영원히 사림(士林)의 공존한 바가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원컨대 여러 어른은 바삐 대론을 받들어 임금에게 아뢰시면 행심이로소이다.
11) 예천 정산서원 통문(醴泉 鼎山書院 通文)
엎드려 생각건대 청권사는 종손이 이사하여 사판(祠板)도 따라 갔사오니, 아아! 우리 동방 수백년 태백의 높은 풍도가 하루 아침에 이땅을 버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듣자오니 여러 군자께서 그 옛 대군사당을 그대로 숭봉할 곳으로의 계책을 도모하는 바라고 하오니 이것은 참으로 만사람의 같은 생각을 여러 군자께서 먼저 계발(啓發)하신 것입니다. 아 아! 우리 영남에 서원이 아주 없으면 그만이거니와 있을진댄 정효공(靖孝公)의 서원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정효공의 서원이 없으면 그만이거니와 있을 진데 그 어느 것이 청권사의 구기와 같겠습니까. 엎드려 원컨대 여러 어른은 바삐 갖춘 예식을 거행하시면 매우 다행이겠나이다.
12) 봉화교원 통문(奉化校院 通文)
엎드려 생각컨대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것은 떳떳한 천성(天性)에 근본하는 것이요, 인심을 솟구치게 하는 것은 절행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 양녕․효령 두 대군은 실로 주(周)나라의 지덕이 있음과 같아서 세대는 달라도 도리는 같은 것이며,아름다움을 아우르고 방명(芳名)을 나란히 하셨습니다. 그 거룩하신 풍도(風度)와 뛰어나신 절조는 국사에 실려 있아오며 상소문에 환히 게시되어 있아오나, 지금까지 숭봉하는 예가 없아오니 어찌 이것이 사문(斯文:유학자/유교문화)에서 빠뜨린 전례가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원컨대 여러 군자께서는 바삐 성례(盛禮)를 거행하시오면 행심이로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