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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1,13-24
형제 여러분, 13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14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15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16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17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18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글은 하느님 앞에서 말합니다만
거짓이 아닙니다.
21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22 그래서 나는 유다에 있는 그리스도의 여러 교회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3 그들은 “한때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자기가 한때 그렇게 없애 버리려고 하던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습니다.
24 그리고 그들은 나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8-42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신 그리스도, 베르메르의 작품.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자신 안에 계시해 주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에게,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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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제1독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이고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가 예수님께 동생인 마리아더러 언니를 도우라고 일러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식은 서로 달랐습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그들의 위치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보다 ‘위’에 있습니다. 이는 ‘다가갔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말 ‘에피스테미’를 번역한 것인데, 본디 그 뜻이 ‘위에 서다.’입니다. 곧 이 말은 예수님께서 바닥에 앉아 계실 때 마르타는 그 옆에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신보다 위에 계신 분이 아니라, 아래에 계신 분으로 여긴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다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보다 ‘아래’에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발치에 앉았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위치에서 알 수 있는 그들의 사랑법은 무엇일까요? 마르타는 자신이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 예수님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시선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 결과 염려와 걱정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다그치기에 이릅니다.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행동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마르타와 달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모든 일을 내버려 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은 그가 무엇을 하였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해 주셨느냐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발치에서 그분 마음을 헤아리며 그분께서 일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 그분 사랑에 맞갖은 사랑법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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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자신을 선택하신 하느님의 섭리를 간파하고 있습니다. 불철주야 소아시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한 사도의 활동은 하느님께서 주신 부활의 은총에서 그 원동력을 얻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대접하느라 분주하였습니다. 그녀는 손이 모자라자 동생 마리아의 도움을 예수님께 요청하였습니다. 의외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가지고 있는 좋은 몫을 존중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르타에게 너무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지 않도록 당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봉사한다는 명목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를 주십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활동에 정신을 쏟다 보면 외면적인 업적에 매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의 분주한 일과 걱정에 마음을 빼앗겨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의 말씀을 모시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우리의 마음은 메말라 가고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알아듣지 못하게 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참되게 하느님을 섬기는 길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마르타는 자신의 봉사를 자랑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잘 모시고 섬기는 길을 알려 주는 모범이 됩니다. 그녀는 사랑의 봉사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참된 힘을 발휘하는 길을 보여 주는 표징이 되고 있습니다. 마르타가 하는 봉사와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는 행위는 모두 귀중한 것이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두 가지 방식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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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적 삶의 목표에는 ‘깨달음’이란 것이 있습니다. 깨달음은 무명(無明)한 인간이 참된 진리에 눈을 뜨는 ‘회심’의 사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깨달음을 얻고 회심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열정적인 바리사이로서 교회를 박해하며 유다교의 전통을 지켰지만, 참된 진리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된 보편적인 하느님의 구원의 계시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따로 뽑으셨다는 그의 고백은, 자신의 잘못된 과거까지도 당신 섭리의 도구로 쓰시는 하느님을 향한 찬양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도 비슷했습니다. 세속적인 부와 명예에 매달리던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순간, 헛된 욕망을 버리고 완전한 가난과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의 삶에로의 부르심을 깨닫고, 무너져 가던 교회를 청빈의 정신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주님을 집에 모신 마르타의 분주한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푹 빠져 있던 마리아가 찾은 참된 기쁨의 몫을 자신의 기준으로만 평가하려던 마르타의 편견을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셨을 뿐입니다. 마르타나 마리아 둘 다 주님을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심’의 본질이고, 이 회심은 ‘멈추어 듣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마리아가 먼저 깨달았을 뿐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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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은 ‘묵주 기도 성월’입니다. 가을이 무르익는 이 아름다운 계절의 저녁나절에 성모님과 함께 묵주 기도의 ‘장미 꽃다발’을 주님께 찬찬히 올리면, 마치 종이에 물이 배어들 듯 마음을 감싸는 평화와 위로를 느낄 것입니다.
묵주 기도는 교회의 삶에서 마치 공기와도 같습니다. 할머니들이 기도하며 끊임없이 돌리는 묵주의 마디마디가 교회를 지탱하고, 자식과 손자들의 삶이 엇나가는 것을 막아 주며, 사제와 수도자들이 비틀거리더라도 다시 일어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도록 힘과 용기를 주고 있음을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실감합니다.
또한 묵주 기도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늘 간직해야 하는 삶의 지지대이자 나침반과도 같습니다. ‘나가사키의 성자’라 불리는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책 『로사리오의 기도』를 보면, 그가 원자 폭탄으로 죽은 부인을 뒤늦게 발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읽을 때마다 부부의 깊은 사랑과 전쟁의 비극, 인생의 무상함 등을 떠올리게 하는 숙연한 장면이지만, 또한 묵주 기도가 한 신앙인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온통 잿더미였다. 나는 금방 발견했다, 부엌이 있던 자리에 남아 있는 검은 덩어리를. 그것은 탈 대로 타 버리고 남은 골반과 요추였다. 곁에 십자가가 달린 로사리오의 사슬이 남아 있었다. 불에 탄 양동이에 아내를 주워 담았다. 아직 따뜻했다. 나는 그걸 가슴에 안고 묘지로 갔다.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죽어 버려 저녁 해가 비치는 잿더미 위에 같은 모양의 까만 뼈가 여기저기 점점이 보였다.”
묵주 기도는 우리의 삶을 은총으로 수놓으며 지상의 마지막 순간까지 동반할 것입니다. 묵주를 손에 쥐고 ‘성모님과 함께’ 산책하며 기도를 올리는 것만큼 이 아름다운 계절에 잘 어울리는 일도 드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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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호스피스 전문의인 오츠 슈이치는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에게서 들은 얘기를 모아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그들이 후회한 내용은 대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할걸.’, ‘좀 더 친절하게 대할걸.’, ‘그때 좀 참을걸.’ 등입니다. 이에 비해 ‘돈을 더 많이 벌걸.’,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학위를 딸걸.’, ‘사업에 좀 더 많은 시간을 쏟을걸.’ 하며 후회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일을 보고 접하며 분주하게 살다 보니 정작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마르타를 비판하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르타 역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 커서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모르실 리 없습니다. 다만 마르타에게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인지 구분하기를 원하십니다.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본당의 발전을 바라는 마음 때문에, 이 사회의 더 나은 내일을 희망하기 때문에 우리는 돈을 더 많이 벌려고 애쓰고, 자녀들에게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고 채근하며, 다른 이와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중요한 일이기는 합니다. 다만 그 일에 너무나 치중한 나머지 정작 더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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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저마다 세상을 보는 방법이 다릅니다. 특히 자연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어떤 이는 자연을 살려야 우리도 살 수 있다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연을 개발해야만 인간도 살고 자연도 깨끗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크게는 세상을 보는 것도 환경 보존과 자연 개발이라는 두 가지 방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주신 바로 그 환경을 훼손시키지 않고 잘 보존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주님을 모시는 방법은 저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말씀을 듣는 것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분께 온몸을 바쳐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받아들일 수 있으며, 받아들여야 실천할 수 있지요. 실천할 수 있다면 이는 곧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언하는 일이 되니, 바로 선교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는 자기 집에 주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온몸으로 시중을 들고, 마리아는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문제는 어느 것이 중요하냐가 아니라, 서로 상대방의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선적으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주님을 섬기는 것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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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바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바쁜 것은 그저 ‘바쁜 것’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바빠야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치원 아이들조차 바쁘다는 말을 예사로 합니다. 모두가 착각입니다.
우리 민족은 본래 바쁜 민족이 아닙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라는 노래를 만든 민족입니다. 팔자걸음을 걷지 못하면 양반 자격이 없다고 했던 민족입니다. 그만큼 ‘삶의 여유’를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는 것에 떠밀려 ‘여유’를 잃고 말았습니다. 한 번쯤 멈춰 서서 원인을 찾아봐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없는 마리아를 두둔하십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주님의 뜻을 알고 이끄심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끄심을 따라야 평화가 함께합니다. 아무리 바쁘게 살고 분주하게 움직여도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기쁨은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쁩니다. 마르타처럼 ‘사는 일’에 너무 바쁩니다. 하지만 때로는 마리아처럼 그분의 말씀을 조용히 들어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고 있는지요? 성당 안에서만은 ‘세상 걱정’에서 자유로워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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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홍수처럼 쏟아지는 차량 속에서, 날만 새면 생겨나는 빌딩 속에서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인간은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육체가 성장하면 영혼도 성숙해져야 합니다. 몸의 요구는 채우면서 영의 목마름을 외면한다면 영적 갈증은 당연합니다.
불안과 초조가 그것입니다. 때로는 허무감이요 때로는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심으로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갈증을 채우려 본능에 탐닉하고 재물에 젖어 듭니다. 세상이 폭력과 환락으로 얼룩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갈증은 여전히 남습니다. 몸의 갈증이 아니라 영혼의 갈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끔은 조용히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조용히 있을 줄만 알아도 ‘갈증의 늪’은 힘을 잃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해도 ‘영적 목마름’은 멀리 느껴집니다. 누구나 주님으로부터 귀한 삶을 받았습니다. 조용히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때때로 ‘마리아의 모습’이 되어 주님의 은총을 묵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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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서 냉면한철(冷面寒鐵)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넌센스 문제로 생각했는지 한 방송인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냉면집 장사가 여름 한 철이다.”
물론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있던 방송인들이 이 대답이 맞을 것으로 예측하는 것입니다. 한글만 보면 당연히 그렇게 예측할 수도 있는 ‘냉면한철’입니다.
그러나 이는 ‘낯빛이 싸늘하기가 차가운 쇠붙이 같다’라는 뜻으로, ‘사사롭고 편벽됨이 없어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이르는 말입니다. 한자를 보지 않고서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삶도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를 잘 알면서도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따라서 그 안에 담긴 뜻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뜻은 그냥 눈으로만 쉽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마르타는 너그러운 손님 접대의 덕을 보여 줍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분과 그분의 성도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한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마르타의 동생인 마리아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그녀는 마르타처럼 손님 접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 발치에 앉아서 정의와 진리를 즐겼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시중을 드느라 분주한 자신과 달리 주님 발치에 편하게 앉아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에 관한 판단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청을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칭찬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은 마르타가 잘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느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영원에 속하는 일이지만 육신을 섬기는 일은 지나가 버리는 일일 뿐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결국, 겉으로는 보이는 모습을 보고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그 안에 담긴 뜻을 볼 수 있어야 함을 마르타에게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어떤 모습도 주님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주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는 것을 부족한 인간의 눈으로 부정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인간의 영혼을 더욱 위대한 것으로 만든다(프리드리히 실러).
취미와 특기
어느 단체에 가입하기 위해 가입 신청서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항목 중에 취미와 특기가 있는 것입니다. 학창시절에는 이 항목에 쓸 것이 참 많았습니다. 우표 수집, 기타 연주, 독서, 탁구…. 너무 많아서 글씨를 쓸 칸이 부족한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 취미와 특기가 뭐지?’라고 자신에게 반문할 정도로 특별한 취미도 또 나름의 특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는 너무 각박하게 살아왔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그래서 어제는 오랜만에 기타를 꺼내서 옛날 가요를 힘차게 불러봤습니다. 더군다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미사 때 성가도 부를 수 없지 않습니까?
힘이 불끈 솟는 것만 같습니다. 옛날 취미가 지금에도 힘을 제게 전해주는 취미였습니다.
취미 생활을 하지 않다 보면 삶의 기쁨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취미와 특기를 다시금 찾아보십시오. 사는데 바빠서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지만, 지금을 잘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주님의 크신 은총으로 인해, 이 큰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갑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유다교 열성 신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신 바오로 사도께서 겪으셨던 고초가 얼마나 컸었던가 하는 것은, 그가 집필한 여러 서한들을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유다교 입장에서 보면 바오로 사도는 배교자요 배신자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저 그런 신자 중 한 사람이었다면 그리 큰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바오로는 앞길이 창창하던 유다교 청년 지도자였습니다. 원로들과 지도층 인사들은 율법에 대한 사랑과 유다교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쳐진 인재 바오로를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오로가 하루 아침에 그리스도교로 돌아선 것은 유다교 입장에서 큰 충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오로가 유다교에 끼친 손실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개종 이후 깊은 광야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발길 닿는 곳마다 다니면서 끊임없이 외쳤습니다. 수많은 유다인들이 줄줄이 바오로 사도를 따라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으니, 유다 지도층 입장에서 바오로 사도는 눈엣가시같은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바오로 사도가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서 큰 환영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찾아내고 체포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다니던 바오로였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가 하루 아침에 개종을 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 근처를 기웃거리니, 신자들 입장에서는 불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러다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는 의구심도 떨칠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배신자라는 낙인과 의심으로 가득찬 눈초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의 강렬한 주님 체험 이후 바오로 사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알아주던 말던, 누가 험담을 하던 뒷담화를 하던 상관하지 않고 묵묵하고 충실하게 복음 선포를 향한 여행길을 계속 걸어갔습니다.
놀라운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기회 닿을 때 마다 회개 이전의 부끄러웠던 모습을 공개석상에서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세기 교회를 이끈 쌍두마차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 중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 정도 되었으면, 충분히 회개의 과정도 거쳤겠다,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에 대해서 굳이 스스로 들춰내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게도 바오로 사도는 틈만 나면 지난 시절 자신이 저절렀던 과오와 어두웠던 시절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갈라티아서 1장 13절)
부끄러운 지난 날을 고백할 때 마다 바오로 사도는 늘 이런 식으로 말씀을 마무리짓습니다.
“이토록 부당하고 부족한 저를 당신의 사도로 선택해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사도로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크신 은총으로 인해, 이 큰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갑니다.”
필요한 한 가지는 자기관리뿐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마르타는 보통 예수님을 위해 봉사와 활동을 위주로 하는 이들을 대표하고, 마리아는 기도와 관상을 위주로 사는 사람을 대표합니다.
마르타는 활동을 통한 성과로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사람이고, 마리아는 그저 예수님 곁에서 더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보고 불평하는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마르타를 따르면 예수님께 식모가 되고, 마리아를 따르면 신부가 됩니다. 예수님은 식모와 같은 여인을 원하시지 않고 순결한 신부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집에서 밥도 청소도 하지 않는 아내를 원하시는 것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사랑하는 순결한 신부가 신랑이 원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순결한 신부가 식모보다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식모는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지쳐 쓰러지지만, 신부는 신랑을 위해 목숨을 다할 때까지 충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더 사랑하는 것이지, 더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식모가 될 것인지 신부가 될 것인지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순결한 신부가 되려고 하다 보면 끝까지 좋은 결과를 내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일에 집중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첫째로 자기관리에 집중합니다.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운동이 유일한 취미라는 유재석씨도 자기관리에 충실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그가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끊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는 일을 통해 자기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자기관리가 잘 된 모습이 일을 통해 입증되도록 합니다.
정준하 씨는 말합니다.
“재석아, 너 너무 재미없게 산다. 몸이 재미가 없잖아.”
정형돈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 그렇게 재미없게 사는 거 주위 사람들이 스트레스야.”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점점 재석이 형이 무섭다고 느껴진다. 그러니까 너무 좋은데, 슈퍼맨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운동도 진짜 열심히 하고 담배도 끊고 점점 이형,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이랄까!”
무한도전이 끝나고 다른 멤버들은 활동이 약해져도 유재석씨는 언제나 건재합니다. 유재석씨가 집중하는 것이 일이 아닌 자기관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의 결과는 자기관리에서 나옵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유재석씨도 놀란 자기관리 장인이 있는데 바로 박진영씨입니다. 박진영씨의 자기관리 방법을 들으며 유재석씨도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박진영씨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배고파!”, “죽겠다!”입니다. 조금만 먹으면 바로 살이 찌는 박진영씨는 일주일의 반 이상 하루 20시간 공복을 유지합니다. 1일 1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엔 운동하며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자기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성공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런 사람이 배 두드리며 먹고 놀아도 되는데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자기관리를 하는 것일까요? 그는 매년 한 곡씩 노래를 발표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올해도 ‘When We Disco’라는 곡으로 복귀를 했습니다. 그의 음원 수입이 국내 1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이렇듯 꾸준한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타는 일로써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의 전형이고, 마리아는 먼저 자기관리부터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봉사와 기도 중 하나만 끊으라고 하면 어떤 것을 끊으시겠습니까? 활동을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활동을 끝까지 이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관리를 하는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여 분명 무언가 이루어내고 싶은 열망으로 들끓습니다. 그래서 일에 지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 중심인 사람은 그 일이 잘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지치고 그래서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일보다 자기관리가 우선입니다.
박찬호 선수도 첫 메이저리그 성공신화를 이루어내고 후배들에게 미국에서 성공하기 위한 적합한 조언을 달라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치지 않는 것입니다.”
잘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관리를 우선시하라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은 하나뿐입니다. 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해지면 주위 사람들도 거룩해집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다가는 자신도 거룩함을 잃습니다.
제가 살을 조금 빼니까 저절로 주위 사람들도 다이어트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로 나를 증명하려 하지 말고, 내가 일을 통해 증명되도록 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요한데, 신앙인 처지에서는 그것이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기도로 여기고 기도시간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마련할 줄 알 때 다른 하는 모든 일도 잘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는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한 직장에서 정년퇴임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요즘은 정년퇴임까지 5번 정도 직장을 옮긴다고 합니다. 직책은 19번 정도 바뀐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회가 다양해지고, 직업을 구할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그런가하면 대학교에서 배운 것으로는 새로운 직업을 구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소홀해서는 안 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민 사회도 다양한 직업을 갖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증권회사에 다녔는데 이민 와서는 한의사가 되신 분도 있습니다. 언어의 소통 문제로 직업을 바꾸기도 하고, 회사의 구조조정 때문에 직업을 바꾸기도 합니다. 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신문사 직원이 되신 분도 있습니다. 여행을 다니다가 여행사를 운영하는 분도 있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다가 여행사를 다니는 분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 직업을 바꾸는 것이 당연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율법학자였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율법학자로서의 신념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신비한 체험을 했던 바오로 사도는 율법학자라는 직업을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이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자였던 바오로 사도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찾아가는 선교를 하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선교여행을 통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율법학자로 대접을 받으며 편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바오로 사도는 박해와 시련이 눈앞에 보이는 사도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방법은 2000년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전해졌습니다. 선교사들은 중국과 일본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와 남미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박해가 심했던 한국으로도 왔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박해도, 시련도, 죽음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30년째 사제로 지내면서 다양한 직책을 경험했습니다. 본당 사제로 16년 지냈습니다. 보좌신부 8년, 본당 신부 8년을 지냈습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는 본당 사제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사제가 하는 일은 본당 사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구의 인사이동을 통해서 다양한 사목을 체험하였습니다. 사목국에서는 3년 동안 교육 담당 업무를 하였습니다. 소공동체를 위한 교육을 하였고, 구역장과 반장을 위한 월례교육을 준비하였습니다. 해외연수와 중견사제 연수를 통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연수의 기회를 주신 교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청소년국에서는 6개월 동안 청소년 수련원에서 지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생들과 함께한 유익한 경험이었습니다. 성소국에서는 5년 동안 사제양성을 위한 업무를 하였습니다. 교황방한 준비위원회 업무를 한 것도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작년부터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신문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주님께서는 제게 참 다양한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많은 결실을 맺지는 못했지만 큰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마리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마르타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활동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도 좋은 몫입니다. 영성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도 좋은 몫입니다. 중요한 것은 활동과 영성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모두가 좋은 몫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이 있습니다. 직업에 따른 다양한 직책이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그 일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좋은 몫을 선택한 것입니다. 비록 그 일 때문에 시련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좋은 몫을 선택한 것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가 주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기에 마르타는 예수님께 마리아가 같이 도와주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예전부터 이 복음의 대목은 신학적으로도 많은 논란이 있었던 대목이었습니다. 그 주된 논란의 주제는 실천하는 영성과 관상의 영성 중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한 지에 대한 논란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실천의 영성과 관상의 영성의 중요성을 따지기 이전에 이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예수님께서 함께 머무셨다는 엄청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집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머무셨다고 했을 때 그 사실이 정말 영광이자 기가 막힌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보다 교황님 오셨을 때 어떤 행사를 기획했고, 어떤 음식을 제공했는가, 그리고 그분의 말씀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에 머물러 버리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봉사를 하면서도 주님께서 자신을 당신의 도구로 써 주시고 늘 함께 해주신다는 것이 정말 영광이자 행복인데 그것보다 자신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또 하나의 교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불러주시고 늘 함께해주시는 주님께 진정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크신 주님의 자비 안에서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감사와 기쁨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 감사와 기쁨이 진정 주님께서 바라시는 우리의 좋은 몫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늘진리 들으며 살아봐요.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 만나면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제일 잘 모시는 거 아닌가요?
가정방문 갔었는데 가구 벽지 테이블 창문 커튼 자랑만 잔뜩 하더군요.
이야기만 듣다가 시간 없어 가정축복 얼른하고 나오는데 아쉽더라고요.
속으로 별 사람이군! 아마 성체 모시고도 세상일 부탁만 하고 끝내겠군.
기도는 인격적대화인데 자기말만 냅다하고 예수님께는 기회 안 드려요.
사람들은 하늘 봐도 세상말만 하고 하늘얘기엔 귀 막고 안 듣나봅니다.
하늘말 하늘노래 하늘계명 평생 배워도 모를 텐데 세상말만 하자니 참.
우리는 지난 얘기 과장 꾸밈 자랑 그만하고 하늘진리 들으며 살아봐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시중을 들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들었다.
마르타는 시중들기에 정신이 빼앗겨 예수님께 불평하며 협박에 가깝게 회유하며 자기 뜻대로 명령해달라고 부탁했다.그 일로 초대받은 예수님께서 입장이 난처해 지셨다. 마르타의 일로 예수님의 Quality에 손상을 입혔다.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10,40)
초대받으신 예수님께 관계를 좋게 하는행동에서 말씀을 경청하고 이를 수용하고 존중하고 지지하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마르타는 관계의 경고상황을 야기했자만 마리아는 관계 중심으로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것을 선택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2)
내가 귀한 손님을 자리 중심에 모셨다면 우리는 좋은 관계를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가를 관심있게 살펴야 한다.
추석연휴가 끝났다. 자녀들은 모처럼 부모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가족들이 함께 만났다. 마르타 역인가? 마리아 역인가? 행복한 만남으로 헤여졌나? 아니면 .....? 빨간 경고음만 남기고 떠났는가? 마르타처럼 만일 빨간 경고음만 남겼다면 그것은 부모 보다 자기를 뽀족히 드러내며 우쭐대다 생긴 일이라 여기면 틀림없다. 마리아처럼 다소곳이 부모님의 의중을 헤아려 경청하고 들어주고 지지하고 돌아갔다면 지금쯤 그 자녀는 마음 속에 행복한 추석으로 길게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좋은 몫’을 택해야 한다. 내가 하는 행동이 예수님도 좋고 나도 좋을 때 나의 Quality는 한없이 높아진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7주간 화요일>(2020. 10. 6. 화)(루카 10,38-42)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신 분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8-51).”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시는 목자’이신 분입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28).”
양들이 목자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들을 먹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잘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2-13).”
<루카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라고 물으시고, 제자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 그것을 잡수셨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루카 24,41-42), 그 이야기는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신 이야기이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들의 배고픔을 걱정하셨고(마태 15,32),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마태 15,37).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잘 받아먹는 것이 예수님을 잘 따르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38-42)”
지금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마르타가 바라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 음식 대접을 잘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코헬렛’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코헬 3,1).”
지금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식사는 그 다음에 하면 됩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먼저 ‘가르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주심으로써 사람들을 영적으로 배불리 먹이시는 일을 먼저 하셨고, ‘기적의 빵’을 주셔서 육적으로 배불리 먹이시는 일은 그 다음에 하셨습니다. (항상 꼭 그런 순서로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에는 그것을 잘 들어야 하고, ‘빵’을 주실 때에는 그것을 잘 받아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르타의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마르타와 마리아의 갈등이 이야기의 핵심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이 핵심입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라는 말씀에서 ‘많은 일’은 ‘다른 사람의 일’을 뜻할 수도 있고, ‘너무 많은 음식’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지금 마르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라는 말씀은, “너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마라.”(“왜 그 일을 하는지 잊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가 하고 있는 일을 막지는 않으셨지만, ‘많은 일’ 때문에 ‘필요한 것 한 가지’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타이르셨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잘 대접하기 위해서 애를 썼고, 그 마음은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일’을 신경 쓰다가 예수님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면서도, ‘일’만 신경 쓰다가 누구를 위한 일인지 잊어버리고, 왜 하는지도 잊어버리고, ‘일’만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예수님을 잊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말씀에는 “너는 나쁜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뜻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마리아는 자신에게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뜻인데, 그 ‘좋은 몫’은 사실은 마르타에게도 ‘좋은 몫’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시니까, 마르타는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그 다음에 해야 합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음식을 먼저 준비하더라도 필요한 양만 준비하고 바로 와서 말씀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너도 여기 와서 앉아라.” 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마르타가 하는 일도 ‘좋은 일’이지만, ‘말씀을 듣는 일’이 ‘더 좋은 일’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양들이 목자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들을 먹인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마리아가 선택한 몫을 빼앗지 마라.” 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개인 소명의 고유성을 이야기하십니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루카 10,39)
이 유명한 복음 내용을 '활동'에 대한 '관상'의 우위성 차원에서만 바라보면 마르타 성녀가 평가절하되어 버리는 당혹스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당신이 각별히 사랑하는 두 사람을 차별하거나 경쟁 구도로 세우실 분이 아니지요. 누군가를 들어높여 다른 이를 낮추실 리도 없습니다. 이 일화를 통해 들려주고 싶으신 예수님 마음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였다."(루카 10,38)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셔 들인 여인입니다.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세 남매와 예수님 사이의 애틋한 우정이 바로 마르타의 환대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마르타는 적극적이고 부지런하며 헌신적이고 용기 있는 멋진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 39)
손님 대접에 분주한 마르타에 비해 마리아는 고요히 예수님 앞에서 그분을 응시합니다. 말씀하시는 분 앞에서 듣는 것. 이 또한 최대의 접대 행위입니다. 이는 주인이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지요. 객들을 자기들끼리 있게 두고 주인은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는 것만큼 무례한 일도 없으니까요.
세상 모든 좋은 일이 다 그렇듯이, 마르타의 입장이나 마리아의 입장이나 함정은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마르타가 삐끗한 지점에 머무릅니다. 사실 손님을 접대하다보면 좀 더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커집니다. 손님에 대한 최대의 존경과 예의를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좋은 지향이 내면의 건강하지 못한 욕구, 이를테면 사랑받고 인정받으려는 욕구와 엉켜버리면 적정선을 넘기기 쉽습니다. 만족을 모르게 되어 버리지요. 그러면 시간이 더 필요하고 일손이 더 필요하며 물질도 더 필요합니다. 내 안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더, 더 원하게 됩니다. 더 잘 하려고 그러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저 깊은 곳에서 더 사랑받고 더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활활 불타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과도하고 방만한 열정에는 얼마간 자신의 책임이 따릅니다.
마르타는 "당연히" 마리아의 노동력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접대를 위해서는 마리아의 손이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그건 마르타의 만족을 위한 것이지 예수님의 바람은 아니었지요.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예수님의 이 말씀에 마르타가 서운해졌을 수는 있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그렇지 않으셨을 겁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 마리아의 경청을 콕 짚어서 하시는 말씀이라기보다, 누구나 자기의 고유한 소명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한 가지씩 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러니 마르타도 본인에게 필요한 것 한 가지에 본인이 몰두하면 되는 것이지요.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는 말씀 역시, "너도 그렇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예수님께는 마리아의 소명이 귀한 것처럼 마르타의 소명도 귀합니다. 훗날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기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한 라자로의 소명 또한 귀하고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마리아가 자기 소명을 빼앗기지 않는 것처럼, 마르타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에게 가장 잘 맞는 모습으로 창조된 만큼, 우리는 자기 존재의 본질, 정수를 빼앗길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마르타가 자기 자신의 욕구에 집중하기보다 예수님께 필요한 것을 바라본다면 과도한 열기가 제 온도를 찾아 마르타 다움이 질서를 잡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소명에 대해 솔직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6)
사도는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이, 본래 창조 때부터 "새로운 길"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소명이 제 궤도를 찾기까지 그는 사도들을 찾아가거나 해서 성급히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여러 해 동안 침묵과 고독 중에 숙고와 성찰의 시간을 보냅니다. 바오로에게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했을 뿐, 당장 제자단에 합류하여 제도권의 확인을 받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은 나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갈라 1,24)
바오로의 과거를 아는 이들이 바오로의 회심 소문을 듣고 그를 조롱하거나 소외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섭리를 미리 준비하신 하느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사도로써 이만한 열매가 또 있을까 싶도록 보람찬 결실이지요.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체험 이후, 이해할 수 없이 펼쳐지는 길 위에 자신을 온전히 내던졌습니다. 인간적인 계획이나 수를 내려놓고, 인내하며 머물렀지요.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의 소명에 빛과 색과 온도를 입혀 쓰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만의 고유한 소명이 이렇게 완성되어 가게 되지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교회의 보편 소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 각자에게 주님께서 창조 때부터 심어 주신 고유한 개인 소명을 꽃피우고 완성해가는 중입니다. 마르타에게는 마르타만의 아름다움이, 마리아에게는 마리아만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벗님 여러분 각자에게도 마찬가지지요.
사랑하는 벗님! 각자 주님께서 주신 고유한 소명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시고, 우리가 선택한 좋은 몫을 주님께 올라가는 동앗줄이라 여기면, 단단히 부여잡고 절대 빼앗기지 않겠지요. 우리 모두는 주님과 하나 되는 데 "필요한 한 가지"를 저마다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좋은 몫을 택하셨으니, 벗님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자녀처럼 미리미리 여러분에게 권고하고 싶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의 ‘트랄리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시작 (Inscriptio; nn. 1,1-3,2; 4,1-2; 6,1; 7,1-8,1: Funk 1,203-209)
테오포로스(하느님을 모신 자)라고도 하는 나 이냐시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거룩한 교회 곧 우리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말미암아 영혼과 육신의 평화를 누리고 그분 안에서 부활할 것을 희망하고 있는 하느님께서 택하시고 또 그 마음에 드시는 아시아의 트랄래 교회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사도적 양식으로 하느님의 온갖 충만함 가운데 이 인사를 보내면서 갖가지 축복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의 정신 자세는 책할 바 없고 확고 부동하며 또 그것은 일시적이 아닌 타고난 성품이라고 여러분의 주교 폴리비오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뜻으로 이곳 스미르나의 나에게 왔을 때 들려 주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슬에 묶인 나를 볼 때 같이 기뻐하고 나는 그를 통해서 여러분 전 공동체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의 편으로 나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의 희사품을 받았을 때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여러분은 하느님을 참되게 닮는 자라는 사실을 알아 주님을 찬미했습니다.
여러분은 흡사 예수 그리스도인 듯 여러분의 주교에게 복종하고 있으며, 따라서 세속의 생활 자세로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죽음을 믿고 그 믿음으로 인해 죽음을 피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처럼 여러분은 주교 없이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하고, 그리스도와의 일치 가운데 남아 있도록 우리 희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듯 원로들에게도 복종해야 합니다. 부제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들의 봉사자로서 만사에 있어 만인의 마음에 들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은 음식과 음료를 나누어 주는 사람이기보다도 하느님 교회의 봉사자들입니다. 그래서 죄악을 불인 양 피해야 합니다.
모든 이도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인 듯 부제들을 공경하고 특히 아버지의 모상이신 주교를 받들어 모시며 또한 하느님의 원로원이요 사도들의 집회인 듯 원로들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이분들 없이는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고 있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나에게 와 아직 내게 머물러 있는 주교의 인격에서 여러분이 지닌 애정의 본보기를 보았습니다. 그의 온유함은 바로 그의 힘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영혼을 여러 가지 체험들로 채워 주셨지만 오만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는 그것들을 내게만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다른 어느 때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순간이기 때문에 나를 추켜 주는 말에다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를 칭송하는 이들은 나를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고난 당하고 싶지만 그런 자격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이 열망은 일반 사람들이 알아차리지는 못하지만 못 견디도록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으로 이 세상의 으뜸을 쳐 이길 수 있는 그 겸손을 지극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내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권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그리스도인의 양식으로만 먹이고 이단이라는 이질의 풀을 멀리하십시오.
그런데 이 일은 오만으로 부풀지 않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주교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사람은 순결한 사람이지만 그밖에 있는 자는 불결한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주교와 원로들과 부제들의 권위 밖에서 행동하는 사람들은 순수한 양심으로 일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쓰는 것은 여러분 가운데 그런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사랑하는 자녀처럼 미리미리 권고해 주고 싶어서입니다.
<내 눈길 당신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을 바라보다
당신 곁의 누군가
내 눈길에 들어온다면
당신이 아닌
당신 곁의 그에게
내 눈길 빼앗기기 전에
내 눈길
오롯이 당신께만
건네야 해요
내 눈길 좁아서
두 사람 함께
담을 수 없으니까요
빼앗길 수 없는 한 가지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에게 “좋은 몫을 선택하였고,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루카 10,4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루카 복음 10장 25절부터 오늘 복음까지 연속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첫 번째는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25-28), 두 번째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29-37), 그리고 세 번째가 오늘 복음인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38-42)입니다. 아마도 루카 복음사가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먼저 강조하고, 이어서 두 사랑의 예를 제시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를 밝혀주고 북돋워줍니다. 평화운동가였던 도로시 데이는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참으로 무신론자”라고 이야기했다지요. 그러니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만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마더 데레사 성녀는 “빵의 형상 안에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다면, 가난한 이들 안에서도 그분을 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한 마리아는 사람들 안에 계신 그분을 또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일치를 이루는 행위는 행복의 원천입니다. <루카 10, 38-42> 10월 6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인간의 행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우리나라가 바라는 것은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처럼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주님과 함께 하나가 되는 것은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어떤 위험이 일어나면 흩어지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위험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 발치에 앉아 다소곳이 주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행동을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하시며 너와 나의 관계,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에 일치는 가장 소중하고 하느님과 함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고, 듣고, 질문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다운 행위입니다. 어제는 재미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대구에 경북광유라는 기업주의 창립자에게 20여 년 전에 대세를 주고 기일이면 산에서 미사를 드리는데 회사의 임원들이 매년 함께 미사를 드리지만, 신자가 3분의 1 정도이며 다른 사람은 신자가 아닌데 미사 때 만나지만 말을 주고받고 하지 않다가 어제는 식사를 함께하는 장소에서 제가 선교적 차원에서 말을 했습니다. “언제 시간 내서 회사에서 신앙 간담회 같은 것도 하고 서로 만남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긍정적 반응이 나왔습니다. 기도 부탁합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라도 하느님을 알게 하면 제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KK”라는 그룹 단계로 성장하여 사장이 5명, 그 아래 임원단이 있고, 전 직원은 200명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 말씀 전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렙니다.
상담할 때 저는 반드시 미사 해설을 하면서 미사의 은혜 중 일치의 은혜를 받는 시간은 말씀의 전례라고 하면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려면 기도 때 말만 하는 것으로 부족하고 말씀을 듣고 응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많은 신자가 미사 때 일치의 은총을 받는 것도 모르기도 하지만 귀담아듣지 않고 말씀을 흘려보냅니다. 미사 때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도 못 하고, 기억을 못 하니 실천도 못 합니다. 저는 그래서 카톡으로 그날 복음을 묵상하여 매일 전해주고 있습니다. 말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복음의 하느님 말씀을 음식을 반추하듯 말씀 안에 깊은 하느님의 뜻을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과 함께 현존하는 것입니다.
오늘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서 주님 말씀 듣고, 주님과 하나 되는 일을 선택해서 가장 필요한 일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기도의 본질은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 깊이 새기고 머리는 거듭 생각하며 실천의 의지를 키우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면서 빈 머리 빈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거짓이며 진실과 사랑이 없는 신자 생활입니다. “아멘. 아멘. 아멘.” 하는 것은 헛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 듣고 의미를 알고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 중, 침묵 중에 하느님 말씀 듣고 실천하는 일을 선택 시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대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마음가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주(主)가 되어 예수님 보다 우위에 서려고 하는 마르타의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객(客)이 되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는데에 집중하는 마리아의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은 각자의 행동 안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먼저 마르타는 예수님을 최대한 편안하게 모시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드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요. 자신이 계획한 바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혼자 힘으로는 어렵고 동생인 마리아의 도움이 필요한데, 동생은 자신을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만 있으니, 이에 답답해진 마리아가 예수님께 ‘다가가’ 동생에게 놀지만 말고 언니의 일을 좀 도우라고 명령해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가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에피스테미’는 원래 “위에 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거실 의자에 앉아 쉬고 계셨을테니 그분 곁으로 다가간 마르타가 선 채로 예수님을 ‘내려다보는’ 상황이었겠지요. 결국 마르타는 물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예수님 ‘위에 서려고’ 한 셈입니다. 예수님을 잘 대접해드리는 것은 곧 예수님 당신께도 좋은 일이니 자신의 계획과 뜻을 따르라고 예수님께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맞이한 순간부터 계속하여 주님의 발 옆, 즉 바닥에 앉은채로 예수님을 올려다보며 귀 기울여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즉 그녀는 언니와는 달리,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철저하게 예수님 ‘아래’에서 그분께 순명하며 그분의 말씀과 뜻을 받아들이는데에 집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일’이라며 자신의 생각대로 계획을 세워 그 일을 하는 것보다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경청하고 따르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그런 마리아가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르타를 나무라시고 마리아를 편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움직이는 봉사보다 조용히 앉아 바치는 기도가 더 중요하다는 ‘비교우위’를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참된 행복과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느라 바쁘게 살아가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시간을 보내다보면, 정작 중요한 주님의 뜻에 소홀해지기 때문이지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원하시는 뜻을 실천에 옮기는 그 ‘한 가지’뿐입니다. 내가 계획한 것들은 이런저런 ‘변수’나 ‘시간’에 따라 변하거나 사라지기도 하지만, 주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은 그분 뜻에 따라 온전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절대 빼앗기지 않을’, 영원불변의 몫을 선택한 마리아는 참으로 현명한 사람입니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저는 사실 고등학교 때 이과였습니다. 지금은 안된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저 때는 교차지원이 가능했습니다. 아무래도 신학교는 철학, 신학 이러한 것들을 배우니 당연히 문과이겠지요. 사실 많은 이과생들은 대학을 공대에 가고 싶어합니다. 그 중 우리나라는 한양대 공대가 가장 좋겠지요? 그런데 이러한 것을 생각해봅니다. 어떤 고등학생이 한양대 공대생이 멋져보인다고 그냥 입학하려 하면 될까요? 아마 성적부터 여러 가지 신경 많이 써야겠지요. 그 중에서 공대인데 가장 중요하게 준비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네. 바로 수학입니다. 수학은 공대에 있어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기본바탕입니다. 이 기본바탕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수업 자체를 따라갈 수 없으니 말이지요.
오늘 주님 말씀도 사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 마르타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시고, 마리아만 높이높이 비행기 태우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에 있어 중요한 한 가지를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신앙생활에 있어 기본바탕은 바로 기도라는 것이지요.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고, 수 많은 봉사를 하고, 정말 많은 재물을 봉헌하고 그 어떤 일을 한다해도, 기도없이는 의미가 없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인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기도는 우리의 신분증과 같은 것이고, 우리를 우리로써 존재하게끔 만들어주는, 그리고 지켜주는 하느님의 방패입니다.
보좌신부 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성지에서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나고 성사도 드리고 했습니다. 긴 시간 교회 안에서 봉사하시는 분들 많으십니다. 또한 교회 안이 아니더라도, 좋은 일을 하시는 분들 많으십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이 일로 다가오고, 의미가 없어지고, 내 마음의 짐처럼 느껴진다면 우리는 그 순간 잠시 멈추고 점검해야 합니다. 나의 기도생활은 어떠한지 말이지요. 내가 점점 누군지도 모르게 존재가 옅어지는데, 어떻게 주님의 자녀라는, 제자라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기도 안에서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교우여러분들, 기도는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것의 기본입니다. 더 이상 설명하는 것이 불필요할 정도로 기도는 중요하고, 기본바탕입니다. 오늘 하루 봉헌하며, 지금 우리 각자의 기도를 점검해봅시다.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한 번 환우를 방문하여, “오랜만에 누워 계시니 기도도 많이 하시겠네요?”라고 여쭈었더니, 그분이 “너무 아파서 기도할 생각도 안 납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프면 뒹굴면서 ‘주님, 살려주십시오!’라고 외치기라도 할 법도 한 데 그분은 아닌가 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르타와 마리아라는 자매의 일상을 엿보게 해줍니다. 마르타는 여러 사람을 초대하고 그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마리아는 여러 손님에게 다가가 그와 함게 대화하며 그와 대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하고 힐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1-42절) 라고 역성을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문득 주님 앞에 다가와 주님과 대면하고자 하는 마리아를 반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어쩌면 정반대의 모습도 칭찬하실 듯합니다. 그러니까 만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마르타보고 ‘제는 손님을 불러 놓고 손님과 이야기 할 생각은 안 하고 저렇게 손님을 위한 일을 한다고 손님 곁을 비워두고 있으니 일을 그만하고 여기 와서 손님과 함께하라고 해주십시오.’라고 마르타를 힐난하면,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똑같이 마르타의 몫을 중히 여겨달라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평소에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 연습을 하면서 기도를 습관화시켜 두지 않으면, 나중에 시간이 나도 어떻게 주님과 함께할 줄 모르고 자신의 몸과 마음이 그렇게 주님께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가 봅니다. 운동도 습관화시켜야 하듯이 기도도 습관화시켜야 몸과 마음이 자연스레 주님을 찾게 되는가 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마르타처럼 열심히 일을 해야 하지만, 마리아처럼 주님과 함께함으로써 오는 생명의 양식과 기쁨을 오늘 여기서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 4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삶의 중심은
한 가지뿐이다.
삶의 중심이
되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염려와 걱정을
맡겨드린다.
하느님께
멀어질 때
염려와 걱정은
더욱 커진다.
걱정하고
염려하는
시간은 많아도
하느님께
머무르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다.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믿음의 몫이다.
믿음은
함께하는
기쁨이다.
믿음의 방향은
일이 아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선택은 마음을
표현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보다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우리의
마음을 기꺼이
하느님께
나누는 마음이다.
마음 안에
일이 있고
마음 안에
기쁨이 있다.
필요한 것은
삶의 첫자리에
계시는 하느님께
먼저 우리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마음을
드리는 것이
말씀을 듣는
머무름의
첫시작이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두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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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싸움을 합니다. 그런데 누구와 싸우는 것이 가장 힘들까요? 또 누구와 가장 많이 싸우고 있을까요? 배우자, 자녀, 부모, 친구, 직장 동료? 그런데 가장 많이 싸우고 있는 대상은 바로 ‘나’입니다. 그리고 싸우는데 있어서 가장 힘든 대상 역시 바로 ‘나’입니다.
공부를 해야 하는 나와 놀고 싶어 하는 나와 싸웁니다. 일해야 하는 나와 쉬고 싶은 나와 싸웁니다. 기도해야 하는 나와 기도하기 싫어하는 나와 싸웁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는 나와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려는 나와 싸웁니다. 사랑해야 하는 나와 미워하려는 나와 싸웁니다. 그밖에도 ‘나’라는 존재와 끊임없이 진영을 나눠서 싸우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제일 많이 싸우고 있고, 이기기가 가장 힘든 대상 역시 ‘나’라는 것이 하지 않을까요? 사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기지도 않습니다. 이번에는 이겼는지 몰라도 조금만 환경이 바뀌면 다른 진영이 이깁니다.
이 세상의 적은 ‘남’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남’이라는 적을 만들어서 ‘누구 때문이야.’, ‘용서할 수 없어.’, ‘복수할거야.’ 등등의 말을 퍼붓고 있습니다.
좋은 마음, 나를 더욱더 성장시킬 수 있는 마음이 계속 이겨나갈 수 있도록 늘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죄가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경계를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자그마한 죄의 뿌리가 우리 삶 전체를 뒤흔들어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예수님을 집 안으로 모실 때의 마음은 분명히 좋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시중들다가 미움의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분주하게 시중들고 있는데 동생 마리아는 그저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편안하게 말씀만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동생 마리아가 도와준다면 자기 역시 예수님과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즉, 마리아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마리아 때문일까요?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마리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많은 일에 염려하고 걱정했던 마르타 본인의 마음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시중든다는 것 역시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여기에 집중하다면 그녀 역시 기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 안의 부정적인 마음이 이기도록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중을 들고 있어도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내 마음 안의 싸움에서 좋은 마음, 사랑의 마음이 이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기쁨이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신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한다(라틴어 속담).
72 어농성지
어농성지에는 한국 교회에 최초로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중국을 세 번이나 왕래한 윤유일 바오로와 그 일가족의 묘가 있습니다.
1795년의 을묘박해 때에 최초의 밀사 윤유일 바오로,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 복자가 순교했습니다. 그리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윤유일의 가족 대부분이 순교해서 후손을 찾지 못하던 중 1987년에 한 후손이 나타나 그의 증언에 의해 이곳 선산에서 윤유일 바오로의 부친 윤장과 동생 윤유오 야고보의 묘를 확인했습니다. 이에 따라 윤유일과 숙부 윤현과 윤관수, 그의 사촌 누이동생 윤점혜와 윤운혜 그리고 한국에 처음 들어온 주문모 신부 등의 의묘를 만들었고 그해 6월 28일 김남수 안젤로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어농성지에서는 윤유일 바오로,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 복자를 현양하고,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비롯하여 윤유일의 아우 윤유오 야고보, 사촌 여동생 윤점혜 아가타 동정 순교자, 윤운혜 루치아, 정광수 바르나바 부부 순교자, 이들과 함께 주문모 신부를 도왔던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와 경기도 동부 출신으로 신유박해 때 순교한 조용삼 베드로,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심아기 바르바라, 정순매 바르바라, 한덕운 토마스 그리고 강완숙의 아들 홍필주 필립보 등 총 열일곱 분의 순교 복자를 현양하고 있습니다.
어농 성지는 2007년에 청소년 성지로 선포되었고,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한 피정과 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사는 매일 오전 11시(월요일에는 예약 신청 시에 가능합니다)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주소는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로 62번길 148이고, 전화는 031-636-4061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게도 미래지향적인 종교, 희망의 종교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는 요즘 우리 소중한 한민족의 위대함을 새삼 실감합니다. 사실 오랜 인류 역사 안에서 우리 나라처럼 갖은 고초와 우여곡절을 겪은 나라도 드믑니다. 호전적인 주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셀수도 없이 겪어온 침략, 굴욕, 수탈, 징용, 식민지화, 분단, 전쟁, 극한 대립, 갈등을 겪어왔습니다.
그 모든 난관을 하나 하나 다 극복하고 오늘 우리 나라가 전 세계로부터의 갈채와 주목을 받는 나라로 우뚝 서있다는 것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그런데 아주 조금 역사를 공부해보니 가슴 아픈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우리 나라가 풍전등화 앞에 설 때, 사람들은 자신의 깊은 마음 속에 감춰져 있던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더군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청춘과 목숨을 바친 애국자들,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을 전전하면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독립투사들, 의인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 한 몸 건사하기 위해, 나라와 민족을 배신한 매국노들, 변절자들, 기회주의자들도 여지없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또 한가지 참으로 마음 불편한 일들이 생겨났습니다. 매국노들, 변절자들, 기회주의자들은 격동의 세월 앞에 어떻게든 살아남았더군요. 철저하게 자신의 수치스런 과거를 감추고, 언제 그랬냐는듯이 깔끔히 세탁하고 말짱한 얼굴로 새역사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그런 후안무치한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닙니다. 상부에서 시켜서 한 일입니다. 기억이 안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애국자들, 의인들, 독립투사들이 보이는 공통된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그 큰 공로와 헌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철저하게 감춥니다. 그리고 더 열심히 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오히려 자신의 가슴을 치며 부끄러워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이라는 시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보십시오.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무죄한 이들, 의인들이 지닌 특징 한 가지는 틈만 나면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합니다. 자신의 민낯을 가감없이 드러냅니다. 좀더 헌신하지 못한 것을 가슴치고 참회합니다.
그러나 악인들과 기회주의자들은 완전 반대입니다. 기가 막히게 자신의 약점을 감춥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과대 포장합니다.
이런 면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참 멋집니다. 자신의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이렇게 참회하셨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 자비의 시선 아래 놓여있는 죄인입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자신의 인생사 안에 감추고 싶었던 일, ‘수제자 배반 사건’이라는 큰 흑역사를 절대 감추지 않았습니다. 평생 기억하며 참회하셨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순교하시기 전까지 평생토록 매일 새벽 닭이 울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배반을 떠올리며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 늘 울고 다니셨기에 그분이 눈가는 짓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자신의 인생사 안에서 치명적인 과오, 예수님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흑역사가 있었는데, 그 역시 이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기회 닿는대로 자신의 흑역사를 가감없이 공개했습니다. 그 내용이 갈라티아서에도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버리려고 하였습니다.”(갈라티아서 1장 13절)
바오로 사도의 이런 흑역사로 인해 회심 초기 그는 유다인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이에 끼어 큰 곤혹을 치렀습니다. 회심 이후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에게는 한 마디로 배신자, 변절자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로부터도 환대를 받지 못했습니다. 다들 색안경을 끼고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강렬한 예수 그리스도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면서 더 큰 사랑으로 난관을 극복해나갔습니다.
우리 역시 돌아보면 감추고 싶은 흑역사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치명적인 과오, 수치스런 죄, 큰 실수...그런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결핍 투성이의 인간으로서 너무나 자연스런 것입니다.
물론 가슴치며 참회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죄책감과 짙은 어둠 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흑역사를 디딤돌 삼아 한 걸음 더 빛이신 주님께로 나아가는 노력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게도 미래지향적인 종교, 희망의 종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생각을 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데일 카네기의 ‘자기 관리론’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윌리스 캐리어(Carrier)란 사람은 미국 유명 에어컨 회사, Carrier의 설립자입니다. 그런데 그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수백만 달러가 드는 일을 수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이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 그 회사는 그 기술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캐리어는 수천 만 달러의 손해를 보게 되었고 회사에서도 퇴사 위기에 처해졌습니다.
그는 몇 날 며칠을 엄청나게 걱정을 합니다. 막연한 걱정이 그를 집어삼켜 잠도 잘 수 없었고 먹고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걱정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걱정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도대체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게 뭘까?’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분석해 보았습니다. 현실을 분석해본 것입니다. 종이 위에 이 실패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써보았습니다.
‘그래, 어쩌면 내가 직업을 잃을 수도 있어. 길거리에 나 앉겠지.’
최악의 상황을 쓰다 보니 긍정적인 생각도 올라왔습니다.
‘물론 회사는 2000만 달러의 손해를 보았지만 좋은 실험을 한 거야.’
‘근데... 어떻게 하겠어... 현실을 받아들이자.’
이때 바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걱정이 생각인줄 알았는데, 걱정은 자신을 사로잡아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을 하게 되니 구체적인 방안이 떠올랐고 그 결과 2000만 달러 손해를 단지 2만 달러 손해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걱정의 가장 큰 문제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참조: ‘쓸데없는 걱정을 떨쳐버리는 법’, 데일 카네기, 5분만에 책 한 권 읽기 – 유튜브]
걱정만 하면 걱정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걱정은 자아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자아가 너무 강해 자아의 생각이 나까지 잡아먹게 되는 것입니다. 뱀에 사로잡히는 것이 걱정이고 고통입니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아와의 대화를 멈추어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에 귀를 막아야합니다. 그러려면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됩니다. 그러면 자아의 부정적 생각이 자신을 사로잡아 버립니다. 걱정하지 않기 위해 다른 일에 집중하는 상태를 ‘몰입’이라 합니다. 몰입을 하면 걱정이 사라지기 때문에 자아로부터 벗어난 행복감을 맛봅니다.
칙센트 미하이 박사는 몰입에 대해 “그 상태가 지나고 나면 사람은 자신이 진정한 행복감에 젖어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들러는 “다른 누군가를 한 사람 정해놓고 매일 아침 눈뜨자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을지를 연구해보라. 2주 만에 우울증이 나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부정적이 되고 우울하게 되는 이유는 자아에 사로잡혀 살기 때문이고, 자아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어떤 일이 몰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에 몰입하면 그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왜냐하면 몰입이란 것 자체가 무아(無我)의 상태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집중하는 무엇이 세상 것이라면 항상 한계가 있습니다. 계속 영화를 보고 있을 수도 없고 계속 일을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고 그러면 다시 걱정이 일어날 것입니다. 쾌락이나 일의 중독자가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멈추지 않을 몰입의 대상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 대상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원자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무엇이 아닌 우리 자아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구원하시는 방식은 당신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하와가 하느님을 바라보았다면 뱀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마르타와 마리아가 나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어떻게 봉사할까 걱정이 많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서 예수님 말씀만 듣고 있습니다. 이 두 자매의 상태가 바로 걱정을 하는 사람과 생각을 하는 사람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하는 행위가 바로 ‘신앙의 몰입’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지 않기 위해 예수님의 발치에서 계속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마르타는 여러 염려를 껴안고 살게 되고 마리아는 아무 걱정 없이 살게 됩니다. 마르타는 걱정을 하고 마리아는 생각을 하며 삽니다.
걱정을 몰아내려면 예수님께 몰입해야합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몰입하지 않았을 때 두려움이 생겼고 물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신앙의 고수는 그리스도께서 나와 항상 함께 계시고 나에게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심을 잊지 않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단 한 순간도 주님의 현존을 잊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고수는 생각을 끊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결정됩니다. 하루 열 번 주님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면 그 숫자를 백 번으로 늘려보십시오. 그만큼 걱정이 아닌 생각을 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타에서 마리아가 되는 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날씨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기후는 예측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삶을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문화는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집안의 가구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주택의 유형은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매일 변하는 날씨는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온대기후인지, 열대기후인지, 사막기후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알기 어렵지만 그 사람이 동양인인지, 서양인인지, 아메리카 원주민인지, 아프리카인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집안의 가구는 여러 가지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이 한옥인지, 양옥인지, 아파트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 각자의 삶이 어떠한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분들이 어떻게 순교했는지, 어디에서 사목을 했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모릅니다. 자료가 풍부하지 않기도 하고,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도들은 예수님의 길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것처럼 자기들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마르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마리아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마르타도 예수님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마르타는 마르타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마리아도 예수님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도, 마리아도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중을 들던 마르타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마리아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루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는 늘 곁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일을 도왔던 큰 아들도 사랑했고, 멀리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둘째 아들도 사랑한 것과 같습니다.
연수원에 함께 있는 신부님들은 18명입니다. 교구도 다르고, 서품 연도도 다릅니다. 각자가 살아온 삶의 자리도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못자리에서 함께 공부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복음을 선포한 사제들입니다. 우리는 시대의 아픔을 함께 고민한 신앙인입니다. 각자가 제시한 사목의 방향은 다를 수 있습니다. 각자가 살아온 사목의 길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마르타와 같은 삶이었는지, 마리아와 같은 삶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모두가 걸어온 사목의 길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배우자도 나와 성격이 다를 수 있고, 직장에서, 이웃에서도 그렇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배격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없고, 직장에서도 즐겁게 지내기 어렵습니다. 본당에도 그렇습니다. 많은 단체들이 있고, 단체들은 서로 하는 일이 다르기도 합니다. 나와 다른 단체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배격한다면 본당 공동체는 분열되고 말 것입니다. 서로 다른 단체들을 받아들이고, 서로 협조할 때 본당 공동체는 발전 할 수 있습니다.
장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커다란 기둥은 성문을 열기에는 유용하지만 구멍을 막기에는 부족하다고 하였습니다. 쓰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지만 쥐를 잡는 데는 고양이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재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엉이는 밤에 벼룩의 털까지도 보지만 낮에는 큰 산도 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본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돌아온 동생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버지께 투정을 부린 큰 아들처럼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동생의 역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투정을 부린 마르타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다양한 꽃들이 아름다운 정원을 이루듯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잠심
김기현 요한 신부님
아침 성무일도를 바치고 나서 보통 1시간 정도 성체조배를 합니다.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나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하는데요. 잘 듣기 위해서는 내 안의 많은 소음들을 잠재워야 하는 거 같습니다.
잠재울 수 없다면 떠오르는 것들을 붙들거나 씨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텐데요. 기도하다보면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기분 상하는 일과 씨름하기도 하고, 바쁠 때는 그 기도 시간을 이용해서 오늘 해야 될 일을 계획하기도 합니다.
또 문득 떠오른 좋은 생각들을 다듬거나 잊지 않기 위해서 붙잡고 있을 때도 있죠. 나도 모르게 한참 동안 사로잡혀 있곤 하는데요. 마르타도 그러한 모습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뭔가에 사로잡혀 있던 마르타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 말씀이 저에게는 아침마다 이런 뉘앙스로 들립니다.
‘왜 그렇게 많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냐? 네 힘으로 뭔가 해보려는 것이냐? 지금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시간이 아니냐?’
그 말씀이 한 번에 들리는 건 아니지만, 그런 비슷한 말 마디가 마음속에 울려오면 다시 정신을 차리곤 합니다.
‘그 생각을 놓자.. 흘러가게 두자..’ 하는 말을 반복하면서 다시 비우고 놓으려고 노력하죠. 그게 아마도 오늘 예수회 신부님이 강의하셨던 잠심의 과정이 아닌가.. 하는데요.
그렇게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거 같습니다. 오늘 예수회 신부님이 예로 든 내용들이 그 구체적인 모습들을 보여주는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브뤼겔이라는 화가가 있는데 그 사람의 그림을 보면 주제가 있을 법한 장소가 예상과 다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을 거 같은데요. 실제로는 그 사람들 뒤편에 ‘예수님을 낳을 방을 찾아 돌아다니는 요셉과 마리아’가 그림의 중심 주제입니다. 거기 있는 사람 모두가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보고 있는 겁니다. 그걸 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뭔가 중요한 일이 있겠지.. 하는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겠죠.
또 다른 예는 삼차원 안에 있는 원뿔인데요.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삼차원에 가로 세로 높이가 있잖아요. 그런데 가로 세로만 가지고 원뿔을 보면 어떨까요? 아마 원뿔을 원이라고 이야기 할 겁니다.
그럼 가로와 높이만 가지고 원뿔은 보면요? 아마 원뿔을 세모라고 이야기 하겠죠. 원뿔을 온전히 보려면 이차원적인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알아갈 수 있겠죠.
그러한 과정이 잠심의 과정 가운데 일어나는 거 같습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비우고 붙들지 않을 때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의 실재가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거 같습니다.
오늘 하루, 내 생각들을 내려놓고 그분이 보여주시는 것들을 바라보고, 그분이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93세 되신 할머님이 저를 보고 이야기 하신다.
“신부님, 저 좀 하느님이 빨리 데려가게 기도해 주세요~”
우리 본당 할머님이 아니라 이런 얘기를 해 봤다.
“본당 신부님한테 기도해 달라고 하세요~^^”
그러자 할머니가 이런 대답을 하셨다.
“안 돼요~ 본당 신부님은 어려워서 안 돼~” ^^;
하느님의 일을 따르는 것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27주 화요일
복음: 루카 10,38-42: 마르타와 마리아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마르타는 깊은 애정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분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있다. 그래서 몹시 분주하였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39절) 이것은 무엇을 하였다는 것인가?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6) 주님의 발치에서 시장한 마리아는 바로 이 샘에서 정의의 곳간에서 먹고 마시고 있다.
즉 자기가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그분의 진리를 먹고 있었다. 주님은 “나는 진리다.”(요한 14,6)라고 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생명의 빵인 당신을 마리아에게 먹이고 계셨다. 그분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41)라고 하셨다. 그 빵은 사람을 먹여 기르되 결코 줄어들지 않는 빵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에서 보듯이 덕은 한 가지의 모습이 아니다. 한 쪽에는 분주한 섬김이 있고, 다른 쪽에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이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분주하게 일하는 것보다 우선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라고 하신다. 그러니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하는 것을 얻도록 노력하자.
시중드는 일로 바빠서 거룩한 말씀에 관한 지식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마르타가 열심히 시중을 들어 책망을 들은 것이 아니다. 다만 더 좋은 몫을 택한 마리아가 인정을 받은 것이다. 복음에서 보면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뜨겁게 사랑했다. 주님께서 도착하시기 전부터 시중들 준비를 했고, 라자로를 살리시려고 주님께서 오셨을 때도 먼저 달려 나가 그분을 맞이하였다.
언제나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에 따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되어야 하고, 갈림 없는 마음으로 쫒는 길이어야 한다. 다른 것은 아무리 중요해 보이더라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야 한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이런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성경의 아름다운 예라고 할 수 있다.
마르타는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시중드는 매우 거룩한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영적 가르침에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다고 마르타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비판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마리아가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하심으로써 마르타의 몫은 남에게 빼앗길 수 있는 것이라고 하신다.
육신을 시중드는 일은 섬김을 받는 사람이 그곳에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마리아의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는 모습은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참 관상가, 참 신앙인. -회개, 환대, 경청-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는 전형적인 가을날씨에 배수확에도 참 좋은 날이었습니다. 불암산을 배경한 수도원 배밭과 그 안에서 일하는 분들이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습니다. 말그대로 관상의 분위기였고 모두가 꽃같은 환한 얼굴로 일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새벽 인터넷에서 읽은 어느 호주 이민자의 인터뷰 한 대목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가서 사는 것도 고려하고 있으세요?
"아니요. 지금은 없어요. 없는데 저도 할아버지가 되면 모르죠. 다른 건 모르겠는데, 한국 산이 참 그리워요. 한국 산이 참 예쁜데..."-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리워하는 것은 부드러운 산능선의 한국산이라 합니다. 불세출의 건축가 가우디는 ‘곡선은 하느님의 선이고 직선은 인간의 선’이라 했습니다. 부드러운 산능선을 닮은 선물받은 둥근 성반과 성작이 참 맘에 듭니다. 미사를 봉헌하는 제단의 사제는 이런 성반과 성작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새삼 언제나 그 자리의 정주의 표상인 불암산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의 정주의 불암산과 배나무들, 늘 봐도 늘 새롭고 좋기가 참 관상가의 전형같습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가을철의 수확을 통해 새삼 ‘거룩한 반복’, ‘새로운 반복’중에 날로 내적으로 깊어지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탐스런 배열매들을 가득 단 배나무들이 흡사 참 관상가, 신앙인을 연상케 합니다. 침묵과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뎌내어 열매들을 가득 단 충만한 가을 인생이라면 참으로 성공적 관상가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흡사 탐스런 배열매들이 관상의 열매를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무겁게 매달린 배열매들을 수확한 후 홀가분해 보이는 배나무들이 흡사 텅 빈 충만의 기쁨과 행복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이런 가을 인생의 노년이라면 얼마나 행복하고 보람있겠는지요. 흉작으로 인한 ‘텅빈 허무’의 배밭이 아니라 풍성한 열매들을 거둔 후 ‘텅빈 충만’의 배밭같은 인생입니다.
역시 요행이나 우연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하느님 은총 안에서 충실히 노력해 왔기에 참 관상가로서 이런 풍성한 수확의 가을인생이겠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깨달아 노력하면 늦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또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바로 파스카의 삶이요 정주생활의 핵심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일어나 곧장 새롭게 시작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참 관상가요 신앙인이겠습니다.
누가 참 관상가요 신앙인이겠습니까? 회개와 환대, 경청의 사람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주인공 마리아와 제1독서 갈라디아서의 주인공 바오로 사도입니다. 복음의 마리아는 바로 참 관상가, 신앙인의 모범이자 참 좋은 회개의 표징, 환대의 표징, 경청의 표징이 됩니다.
환대란 무엇입니까? 끊임없는 회개로 갈린 마음을 하나로 모아 깨어 주님께 온통 집중하는 것입니다. 내 중심의 환대가 아니라 주님 마음에 드는 환대입니다. 이런 주님 환대에 익숙해야 사람 환대도 잘 할 수 있습니다. 경청이란 무엇입니까? 주님 발치에 앉아 마리아처럼 침묵중에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세로 미사에 참여하여 주님을 환대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할 때는 마리아처럼, 일할 때는 마르타처럼해야 관상과 활동이 조화된 이상적인 관상가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둘은 우열관계가 아니라 보완관계로 이해해야 할 것이며 분명한 우선순위는 말씀경청의 환대입니다.
그러니 주님 말씀의 경청의 환대가 환대의 핵심임을 깨닫습니다. 겸손한 경청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사랑의 순종입니다. 이 모두에 전제되는 바 주님 향한 열렬하고 항구한 사랑입니다. 그러니 마리아 안에는 ‘사랑-회개-침묵-겸손-환대-경청-순종’이 하나로 연결되어있음을 봅니다.
시중 드는 일로 분주하던 마르타가 주님께 마리아 동생이 자기를 도와 주라 청했을 때 주님의 답변이 마르타는 물론 우리 모두에겐 참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꾸중이 아니라 사랑어린 충고입니다. 주님 환대에 무엇이 본질적인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상황을 바로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분도회의 모토가 ‘기도하고 일하고’의 순서이듯, ‘말씀경청의 환대후 식사환대’라는 것입니다. 하여 미사구조도 말씀전례에 이어 성찬전례입니다.
누구보다도 참 관상가의 전형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선교활동가로서 바오로 사도를 능가할 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활동에 앞서 바오로 사도의 그리스도께 대한 관상적 사랑을 능가할 자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관상에서 샘솟는 선교활동입니다. 이에 전제되는 바 바오로의 회개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회개의 깨달음 또한 하느님의 은총임을 다음 바오로의 고백이 입증합니다.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은총의 회개로 마음 활짝 열어 주님을 환대한 관상가 바오로이고 이어 선교활동가로서 맹활약을 펼치는 바오로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말씀의 경청으로 당신을 환대하는 우리 모두를 환대해 주시며, 필요한 모든 은총을 내려 주시어 텅빈 충만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10, 38-42(연중 27주 화)
오늘 <복음>은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 마르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있었던 일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말씀>의 핵심은 마지막 구절의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마르타 마르타야!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 41-42)
그렇습니다. 결코, 빼앗겨지지 않는 그 무엇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는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을 지니고 있다’는 이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죽으시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베타니아에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얼마 후,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빼앗지 못할 기쁨”(요한 16,23)에 대해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결코 ‘빼앗기지 않을 그 무엇’, ‘아무도 빼앗지 못할 기쁨’인 그 무엇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실상 필요한 한 가지’입니다.
사실 이 “한 가지”는 ‘전부’인 하나입니다. 이것 하나만 지니고 있으면, 다른 모든 것을 얻게 되는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그분께로부터 주어진 것이요, 선사받은 것입니다. 결코 나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요, 내가 만든 것, 내가 획득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그것을 ‘이미’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한 가지’, 결코 ‘빼앗기지 않을 그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세 번 반복되고 있는 “주님”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이 사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실상 필요한 한 가지’요, ‘전부인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결코 빼앗겨지지 않으며, 그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거부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진정 그러기에,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이 “한 가지”로 하여, 우리는 행복합니다. 이 “한 가지”로 이미 더할 수 없는 충만한 행복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이 행복을 대신할 수 없는 행복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이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마치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경청으로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렸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자신을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공간으로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승복하는 일이요, 동시에 당신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허용하는 일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섬기도록 자신을 허용해드리는 이 일이야말로 바로 진정 당신을 섬기는 일이요, 당신이 주님 되게 해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이 우리에게 ‘실상 필요한 꼭 한 가지’요, 그것은 주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저는 그것을 이미 가졌고
그것을 당신이 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근심 걱정할 일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주님이라는 이 사실!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진정한 한 가지입니다.
오로지
이 “한 가지”로 하여
저는 행복합니다! 아멘.
주님은 좋은 중재자도 편들어주시는 분도 아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주님은 좋은 중재자이신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르타는 주님의 말씀에 수긍을 하였고 마리아에 대한 불만도 사라졌을까? 뭔가 억울하지 않았을까?
오늘 마르타와 마리아의 얘기는 우리 살아가는 가운데서 아주 많이 일어나는 얘기이고 그래서 우리 얘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자주 나만 일하고 다른 사람 특히 어떤 사람은 일하지 않고 누리고 즐기기만 하는데 미안한 마음도 없이 당연한 듯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얄밉고 심할 경우 그에 대해 화도 나고 나만 괜히 수고한 것 같아 억울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괜히” 수고한 것 같을 때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괜히 수고한 것이 어떤 것입니까?
“괜히”란 아무 이유나 이득이 없는 경우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화를 낼 경우 괜히 화를 낸다고 하고, 무지 애를 썼는데 아무 소득이 없을 경우 괜히 했다고 합니다.
마르타는 마리아가 얄밉고 그에 대해 화가 난 것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에 무척 억울했고 어쩌면 심하게 삐졌을 겁니다.
사실 일이 너무 많아서 일손이 부족하였다면 마리아를 불러내어 조용히 같이 일하자고 했으면 되고, 마리아에 대해서만 화가 났다면 마리아를 불러내어 역시 조용히 화를 내거나 꾸짖었으면 됐을 겁니다.
그런데 굳이 주님께서 마리아를 나무라달라고 마르타는 요구합니다.
자기가 더 수고하고 있음을 알아주시고 편들어주시기를 바랐고 마리아는 얌체임을 주님께서 아시기를 바랐던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나무라시는 것 같아 마르타는 너무도 억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볼 때 마르타가 억울한 것은 분명하고 인간적으로는 공감이 가며 백 번 이해를 할 만 합니다만 마르타도 그렇고 우리도 주님의 처사가 문제 있다고 생각된다면 주님을 크게 잘못 안 겁니다.
왜냐면 주님은 편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론 위로해주시기는 하시지만 편들어주시는 분은 아니며 위로는 해주셔도 그른 것을 옳다는 듯 옹호해주시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마리아편도 들어주신 것이 아닙니까?
마르타는 그런 것 같아 억울한데 마리아편 들어주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마리아편도 마르타편도 아니 드시는 분이시고, 안 드신 겁니다.
주님은 모두 사랑하시니 불편부당하시고 누구에게 쏠리시는 분이 아니지요.
다만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실 뿐이며 더군다나 없는 사람 놓고 뒤에서 같이 흉보는 인간들처럼 남 얘기 하시지 않고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 얘기를 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주님께 와서 마르타를 흉보며 편들어달라고 했다면 역시 마찬가지셨을 겁니다.
‘괜히 남 시비치 말고 너는 네 할 거나 잘 해라!’ 뭐 이런 식이였을 겁니다.
주님은 마르타가 수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살림이나 봉사활동 같은 것이 중요치 않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살림이나 봉사활동을 사랑으로 하지 않고 인정을 받으려고 하거나 자기처럼 하지 않으면 화내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며 뭘 하건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이며 기도라는 것을 오늘 말씀하시는 겁니다.
살림이나 봉사도 사랑으로 하고 기도도 사랑으로 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참 하느님의 일 <루카 10, 38-4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펴니 어찌 주님의 사랑 많은 말씀이 나의 마음을 두드립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이 구절을 보면서 피정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수도원에 있으면 이것저것 신경 쓰고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해도 조용히 주님 앞에 앉아 무릎 꿇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이런 시간이 나에게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명상의 집 성당 제단에 걸려있는 “돌아온 아들”의 그림은 내게 매번 감사한 생각이 들게 합니다. 세상일에 분주하게 살던 삶을 고요함 속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내가 아무리 주님을 떠나 살았다고 해도 기다리고 받아주십니다. 자비롭고 사랑하는 분이 어디서나 기다려주시고 내가 길을 잃고 방황해도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다니며 저를 이끌고 오십니다.
어제는 여기 오는데 장애물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수동 수녀님 성사 드리고 아빠스님 차 기다리다 늦게 도착했습니다. 첫 시작 강의는 듣지 못했지만 아빠스님의 주님 말씀, 적절하고 요기한 경고의 말은 세상 안에 사는 우리가 얼마나 조심하고 자기반성이 있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세상에 살려면 어떻게 지혜롭게 살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나는 이번 피정에서 두 가지 일을 하려고 합니다
1)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더 깊은 침묵시간을 가지고, 주님과의 친교를 나누고, 하느님의 현존 안에 들리는 소리에 마음을 두고 지내며
2)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세상에서 갈 바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카톡 친구들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어제 동생 수녀와 이야기하면서 80세 생일을 지내는 수녀가 수도 생활의 불편을 하소연하는 걸 들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길은 모든 것을 끌어안거나, 피하는 길이 최고의 방어입니다. 쓰나미가 올 때 맞서 싸우면 쓰나미에 휩쓸려 죽고 말지만 높은 곳으로 피해가고, 강력한 바람이 불어 쓰러지려고 하면 강한 기둥을 잡아 피하고, 물결이 몰아치면 안전한 곳을 찾아 피해야 하지 어떤 것이나 맞서면 죽게 됩니다.
우리가 피할 곳은 주님께 달려가 주님의 품에 숨어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저는 많은 것을 뒤로하고 고요한 시간에 주님의 품 안에서 더 깊고, 높고, 넓은 둥근 원 안에 들어가 자유, 평화, 기쁨을 누리렵니다. 기도해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하고 여러분의 고통에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80세 되는 생일 맞는 동생 수녀님 행복하세요. 비록 잔치에 참여 못 해도 기도 중에 기억합니다.
어두운 부엌
이종훈 신부님
살다 보면 짙은 어둠 속에 빠질 때가 있다. 나름 충실히 살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봉사 헌신했는데 자신의 본심을 몰라주거나 심지어 비난까지 들을 때도 있다. 보람과 칭송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면 충분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맞이하느라고 정말 분주했다. 얼마나 바빴으면 손님인 예수님께 놀고 있는 동생을 나무라 달라고 청했다(루카 10,40).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수고가 많다, 고맙다, 동생더러 도우라고 하마’가 아니었다. ‘너는 왜 그렇게 쓸데없이 분주하냐?’라는 꾸지람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그 이후 마르타의 반응이 궁금하지만 루카 복음사가는 전해주지 않는다. 어떤 신부님은 이렇게 상상하며 묵상했다. 마르타는 그 차가운 대답을 듣고 곧장 부엌으로 돌아가 부엌문을 걸어 잠그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두운 그곳에 혼자 있다. 분노, 서러움, 슬픔으로 받은 충격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자신의 지난 생활들, 특히 왜 그렇게 분주하고 열심히 살았는지 뒤돌아보게 된다. 마음 안에서는 여전히 분노 서러움 슬픔이 되살아나 혼란과 고요가 자주 교차된다.
그 시간은 참 괴로운 시간이다. 마르타가 아무도 없는 어두운 부엌에 홀로 있었듯이 그 시간은 아무도 함께 해줄 수 없다.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온 우주에 홀로 버려졌거나 온 세상을 상대로 전쟁준비를 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 시간은 벌거벗은 자신 그리고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그 시간을 회개의 때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시간이라고 칭하고 싶다. 누구나 한두 번은 이런 지독히 어두운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도 그럴 것 같다. 곁에 아무도 있을 수 없어 지독히 고독한 시간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하느님이 온전히 그 옆자리를 차지하실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럴 때 이것을 기억해내야 할 텐데.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 4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필요한 것은
우리 삶에
가까이 오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마음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텅 빈 마음을
채워주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모든 시간은
의미 있는
시간이 됩니다.
살 맛은 주님 안에
머무르는 머무름의
맛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비교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의 탈렌트로
행복해야 할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행복은 어떤 장소도
시간도 아닌
우리 마음이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픔도 분노도
위로받고 치유받을 수
있는 주님 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기중심에 갇혀
놓쳐버리고 있는
우리의 행복을
깨어나게 하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나누는
머무르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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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운전할 때가 있습니다. 약속시간이 촉박하거나, 급하게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 초조해지는 마음을 안고 운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신호등의 시간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늘 이렇게 시간에 쫓기며 살았던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승강기를 탔을 때에는 가려는 층 숫자를 누른 뒤에는 닫힘 버튼을 연달아 누릅니다. 자판기에서 커피 버튼을 누르고는 커피가 다 나오지도 않았는데 입구에 손을 미리 집어넣고서 뽑을 준비를 합니다. 컴퓨터의 부팅 속도가 느리다면서 투덜거릴 때도 많았습니다. 비행기 탈 때에도 맨 먼저 타려는 것인지 일찍부터 힘들게 줄을 섭니다.
신호등의 시간이 길면 또 얼마나 길까요? 승강기 탔을 때 닫힘 버튼을 눌렀다고 얼마나 이득을 볼까요? 커피 나오는 입구에 손을 넣고 있으면 커피가 더 빨리 나올까요? 컴퓨터 부팅 속도의 차이를 운운하는 사람이 정작 타자를 독수리 타법으로 치고 있다면 어떨까요? 비행기를 가장 빨리 타든, 늦게 타든 상관없이 비행기는 똑같은 시간에 출발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서두르는 마음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요? 좀 더 뒤의 시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앞에 있는 시간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늘 이렇게 급하게 매달리다보니 마음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삶이 후회투성이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코앞에 있는 시간에만 매달리는 삶이 아니라, 조금 더 멀리를 바라볼 수 있는 넓은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내 삶 안의 후회들도 하나씩 줄여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마르타와 그의 동생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초대했기에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만 있을 뿐이었지요. 이 모습이 밉고 얄미웠나 봅니다. 그래서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마리아를 칭찬하십니다. 마르타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눈앞의 일에만 매달려서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눈앞의 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일에 집중하고 그 말씀을 듣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눈앞의 일에만 매달려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보다는 좀더 넓은 안목을 키워서 하느님 나라의 일을 바라보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들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 재능이 아무리 평범하게 보일지라도. 그의 특성인 재능을 올바로 사용하면 전 인류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다(존 러스킨).
에픽테토스의 글을 통해....
“동시에 자기 마음과 세상의 행복에 대해 신경 쓸 수 없다. 세상의 행복을 원하면 마음을 버리고, 마음을 지키고 싶으면 세상의 행복을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항상 둘로 쪼개질 것이며, 둘 중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네가 세상의 어떤 일로 불안하거나 혼란스러울 때, 언젠가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러면 전에 아주 큰 불행처럼 보이고 너를 불안케 했던 일이 걱정할 가치가 없는 그저 그런 불쾌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 철학가라고 할 수 있는 에픽테토스의 글입니다. 2000년 전의 글이지만,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철학가의 글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불행이 늘 함께 했다고 합니다. 평생을 노예로 살았고, 류머티즘으로 인해 큰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이 불행을 신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견뎌내면서 일상적 삶의 문제들을 철학적으로 가르쳤던 것이지요.
고통과 시련 속에서 우리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오히려 내 마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가난의 역설을 통한 사랑의 순례자, 프란치스코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계시에 감사드리며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11,25-26)
예수님께서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전도가 실패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무렵 이 기도를 바치신 것입니다. 아빠께서 계시하시고 구원의지를 드러내신 덕분에(11,25ㄴ-26), 극소수 못난 제자들만이라도 당신의 정체와(11,27) 하늘나라의 신비들을(13,11) 이해하고 따라준 데 감격해서 이 감사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람의 살을 취하시어 ‘절대 가난’이 되어 오신 주님께서 가난한 처지에 내몰리시어 감사를 드리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역설’이요 사랑의 역설입니다.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강생의 겸손과 주님 수난의 사랑에 매료되어 전 생애에 걸쳐 가난의 역설을 살았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을 항상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을 항상 갈망함으로써 넋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지향을 당신께 두고, 모든 것에서 당신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정신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주님의 기도’ 묵상, 5)
주님께서 우리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낮추고, 비우고, 작아짐으로써’, 가난하게 되셨음을 알아차린 프란치스코는 바로 그 가난을 통해 사랑의 순례를 떠났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 두지 마십시오.”(형제회 편지 29).
사랑하는 분을 위해 모든 것을 되돌려드리기 위해 그는 가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가난은 목적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통로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가난해지는 것이지, 가난해지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걸었던 가난의 길, 사랑의 길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되돌리는 되돌림의 길이었습니다.
성인이 살았던 가난의 역설은 그래서 아래로의 발걸음이요 비움의 길이요,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심지어 피조물과의 관계에서도 작아지는 사랑의 순례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형제로서 “서로 간에 어떤 권한이나 지배권도 가져서는 안 되며, 서로 봉사자와 종이 되어야 하며, 영의 사랑으로 자진해서 봉사하라.”(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 5,9-14)고 권고합니다.
프란치스코는 권고합니다. "천한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 때 기뻐해야 합니다.”(인준받은 수도규칙 9,2) 그는 이렇게 가난의 역설을 통하여 가난하신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었으며, 피조물을 사랑하는 보편적 형제애를 온 몸으로 실행했습니다.
우리도 가난한 자 되어 주님의 편한 멍에를 메고(마태 11,30) 행복한 사랑의 순례를 했던 아씨시의 빈자(貧者)를 본받아, 모두가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적 풍요 안에 머물러 '모든 이의 형제'가 될 수 있도록, 낮추고 비우고 작아지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에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친구들이 가져다 달라는 물을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입니다. 제가 늘 가까지 지니고 다니던 것들이 결국은 필요 없어서 버리는 꿈이었습니다. 보통 꿈은 일어나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꿈은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입니다. 꿈을 생각하니, 좀 더 비우고,겸손하게 살라는 의미인 것 같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세상에서는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이끌어 주던 율법과 계명을 버렸습니다. 사회적인 지위와 권한도 깨끗하게 포기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 후에 비로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프란치스코 성인도 자신이 추구하던 것들에서는 참된 행복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재물, 명예, 권력을 모두 놓아버릴 때, 성인은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었습니다. 들에 핀 꽃에서, 가지에 앉은 새에서, 하늘에 떠 있는 구름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가난과 비움에서 참된 자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님께서는 꿈속에서 쓰러져가는 교회를 온 몸으로 지탱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이 프란치스코 성인이었습니다. 교황님은 가난과 비움이 교회의 쇄신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프란치스코 성인이 세운 수도회의 규칙을 인준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과 비움은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습니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생각이 바뀐 사람은 ‘행동’이 바뀌어야 합니다. 행동이 바뀌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회개를 한 것이 아닙니다. 자캐오는 자신이 가진 것의 절반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빌린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사람과 가족들은 구원 받았습니다.’ ‘행동’이 바뀐 사람은 이제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배우자도 나와 성격이 다를 수 있고,직장에서, 이웃에서도 그렇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배격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없고, 직장에서도 즐겁게 지내기 어렵습니다. 본당에도 그렇습니다. 많은 단체들이 있고, 단체들은 서로 하는 일이 다르기도 합니다. 나와 다른 단체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배격한다면 공동체는 분열되고 말 것입니다. 서로 다른 단체들을 받아들이고, 서로 협조할 때 공동체는 발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을 택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 선택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회개의 여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 축일이자 제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어제 저녁식사때는 수도원에 머물고 있는 안동교구 정영훈 프란치스코 부제와 함께 수도형제들의 따뜻한 축하도 받았습니다. 형제애를 실감나게 확인하는 것이 축일맞이 저녁식사때요 식사후 형제들 각자와의 진한(?) 축하 포옹입니다. 한 형제는 가을의 들꽃들 가득 담긴 꽃꽂이도 선물 해줬습니다.
매년 영명축일을 맞이할 때 마다 떠오르는 말마디는 ‘하느님을 찾는 여정’입니다. 하느님을 찾아온, 또 찾게 될 여정을 저절로 성찰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찾는 여정은 동시에 회개의 여정이자 하느님께 점차 가까워지는 여정을 뜻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종파를 초월하여 가장 사랑과 존경을 받는 분이요 성인의 삶 역시 하느님을 찾는 여정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가톨릭으로 오기전 개신교에 다닐 때 알았던 가톨릭의 성인은 프란치스코 한 분이었고, 처음으로 안 수도회도 베네딕도 수도회 하나뿐이었습니다. 가톨릭에 온 후 세례명은 물론 수도명은 지체없이 프란치스코로 정했고, 이어 1982년 왜관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했습니다. 세월 지나고 나니 새삼 하느님을 찾는 회개의 여정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밖으로는 山/안으로는 江
천년만년千年萬年 임 기다리는 산/천년만년 임 향해 흐르는 강”
자주 되뇌는 제 자작 애송시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을 찾는 여정을 상징하는 시입니다. 정주定住의 산은 성 베네딕도를 닮았고 끊임없이 흐르는 강은 성 프란치스코를 닮았습니다. 하여 위 시를 다음과 같이 읽으며 베네딕도 수도회 안에서 프란치스코 수도사제로 살고 있는 제 신원을 확인하곤 합니다.
“밖으로는 베네딕도/안으로는 프란치스코
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베네딕도/천년만녀 임 향해 흐르는 프란치스코”
마침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과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절묘한 보완관계를 연상시키는 시입니다. 두분 다 색깔은 다르지만 똑같이 하느님을 찾는 여정의 모범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성인같은 교황님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와 독서의 바오로도 하느님을 찾는 회개의 여정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우리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을 찾는 회개의 여정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의 바오로의 하느님 찾는 삶의 여정은 참 극적이며 비상합니다. 다음 고백이 그의 흔들림 없이 여정에 항구할 수 있었던 내적체험의 비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 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보십시오. 문장의 주어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삶의 문장의 주어 역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주도하시어 바오로의 여정을 인도해주셨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오늘 지금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내가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 친히 부르셨고 보내셨음을 깨닫습니다. 축일을 맞이하여 언젠가 강론에서 밝혔던 제 세가지 소원을 다시 확인합니다.
1.죽는 날까지 요셉수도원에 정주하는 것.
2.죽는 날까지 매일 강론을 쓰고 미사를 봉헌하는 것.
3.죽는 날까지 메테세콰이어 가로수길, 수도원길, 하늘길을 걸으며 기도하는 것.
저뿐만 아니라 우리 수도형제들에게 하느님은 모두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평생 끊임없이 ‘하느님의 일’인 성무일도를 바치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에게 하느님은 우리 삶의 존재이유이자 모두일 수뿐이 없습니다. 문득 산악계의 전설인 이탈리아인 라인홀트 메스너가 첫 방한한 후 인터뷰 한 대목도 화두처럼 잊혀지지 않습니다.
“산이라는 현실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요.
그 산은 ‘불확실’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신은 인간이 만든 창조물이며 환상입니다.
불변의 진리는 자연에 있고, 행복은 산의 정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발명이 아니라 하느님의 발견입니다. 아직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의 반응입니다. 새삼 발견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불변의 진리는 하느님께 있고, 행복 역시 하느님께 있다는 우리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을 찾는 회개의 여정은 평범합니다. 바로 마리아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섬기는 모범을, 환대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우선적인 것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회개의 시스템 같은 일과표에 충실하여 성전에서의 주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회개의 여정에, ‘회개의 일상화日常化’에 이보다 더 좋은 평범한 수행은 없습니다. 주님은 마르타의 불평에 마리아가 옳았음을 판정해 주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마르타의 수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의 우선순위를 바로 잡아 주십니다. 필요한 것 한가지 좋은 몫은 하느님을 찾는 일이요, 주님이 바라시는 대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주님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저절로 염려와 걱정은 줄어들고 삶은 단순해지며 깊은 내적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평범하나 가장 좋은 회개의 수행이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마리아와 함께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복된 시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온갖 좋은 것을 다 베풀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루카11,28).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아멘.
교회가 개별 은사자들을 대하는 자세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잔 다르크(프랑스어: Jeanne d’Arc, 1412년 1월 6일 ~ 1431년 5월 30일)는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이다. 오를레앙의 성녀(la Pucelle d’Orleans)라고도 불립니다.
프랑스 북동부 지방 동레미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잔 다르크는 그녀의 나이 12세 때인 1424년에 환시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는 들판에 혼자 있었는데 성 미카엘과 성녀 카타리나 그리고 성녀 마르가리타가 그녀 앞에 나타나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고 도팽 샤를을 대관식을 위해 랭스로 데려가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백년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왕세자였던 샤를 7세가 프랑스의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부르고뉴 시민들에게 사로잡혀 현상금과 맞바꾸어 잉글랜드 측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잉글랜드는 잔 다르크를 재판장에 세워 반역과 이단의 혐의를 씌운 후에 말뚝에 묶어 화형에 처하였습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9세였습니다.
교회는 오랜 기간 그녀가 진정 주님께로부터 계시를 받고 전쟁에 참여했던 것인지 사탄에 속았던 것인지를 고민해왔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500년가량이나 됩니다. 결국 잔 다르크는 1909년 복자로 시복되었으며, 1920년 성인으로 시성되었습니다.
프랑스 아비뇽으로 교황님이 유배 가 있을 때도 하느님은 성녀 카나리나와 성녀 비르짓다 등에게 사적 계시를 내리시어 교황님이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교회에 충만히 주시기는 하셨지만 여전히 개별적인 은사에 도움을 받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잔 다르크만 보더라도 교회는 그에게 오는 개별적 은사가 진정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구별하는데 수백 년이나 걸렸습니다. 왜 주님은 교회에 직접적으로 계시를 내리시어 이끄시지 않고 저런 개별적인 성인들의 도움을 받게 하실까요?
주님께서 그런 개별적인 계시로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만든 인물이 바로 바오로 사도입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 입장에서는 말썽쟁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 베드로를 기반으로 사도들을 기둥으로 교회를 세우셨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개인적으로 나타나시고 개인적으로 진리를 깨우치게 하셨습니다. 워낙 바오로가 훌륭한 신학자여서 할례 논쟁에서 교회는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지만 바오로는 명확히 그런 법은 더 이상 따를 필요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 세례를 받고도 바로 사도들에게 인준을 받으러오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와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뒤에서야 베드로를 만나려 예루살렘에 갔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은 베드로가 할례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계 그리스도교인들을 어려워하는 것을 보고는 그를 사람들 앞에서 나무라했습니다. 첫 교황님의 권위를 사람들 앞에서 깎아내린 것입니다. 이 정도면 교회의 말썽쟁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구든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면 교회와 상관없이 복음을 전해도 되는 것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 복음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뒤, 예루살렘에 올라가 다시 사도들을 만나려 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십사 년 뒤에 나는 바르나바와 함께 티토도 데리고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갔습니다. 나는 ‘계시’를 받고 그리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민족들에게 선포하는 복음을 그곳 주요 인사들에게 따로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전에 한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2,1-2)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자신이 하는 복음 선포가 헛된 일이 되지 않도록 예루살렘 교회 인사들을 만나 설명하고 허락을 받아야 할 필요를 ‘계시’로 받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바오로 사도도 교회의 권위를 존중할 수 있도록 직접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지만 바오로 사도가 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신약성경 절반이 바오로가 쓴 편지의 내용입니다. 그만큼 초대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기는 하셨지만 주님은 바오로와 같은 인물을 직접 뽑으셔서 성령을 충만하게 해 주심으로써 교회가 자신들의 능력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성령님의 힘으로 살아가지만 성령님은 교회 밖에서도 활동하시며 교회가 도움을 받게 하십니다. 이는 교회 전체 이익을 위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으나, 그런 것을 통해 교회가 교만해지지 않게 하시기 위한 뜻도 분명히 있으실 것입니다. 성령의 활동을 누가 제한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여기저기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교회에 도움이 될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성령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교회에 불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의 활동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제한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은사를 받은 자들로 인해 더욱 풍요해집니다. 어쩌면 교회에 대해 쓴 소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교회는 아직 성장해가고 있는 이상 겸손해져 자꾸 더 배우려고 노력해야합니다. 바오로가 없는 교회를 상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개별적인 은사자들이 없는 교회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이런 긴장과 서로간의 도움 안에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책도 소위 사적계시에 의해 쓰여진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라는 열권의 책입니다. 초대교회는 겸손하여 바오로의 개인적 파견을 인정할 수 있는 눈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교회는 성령의 눈으로 분별합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영성가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거나 제한하지 말아야합니다. 물론 사탄에게 속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교회에 순종하지 못할 것이고 그것으로 분별이 될 것입니다. 교회에 순종하는 개별 은사자들은 그 성령의 불을 자칫 끄지 않도록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에게, 또 많은 성인 성녀에게 교회가 도움을 받으며 지금까지 성장해 왔던 것처럼 개별적은 인사들도 그것이 사적계시라는 이유만으로 무시하고 묻어버리려고 해서만은 안 될 것입니다.
형제를 악으로 보는 악에서 구하소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올해 저는 성 프란치스코 대축일 강론의 주제로 <성 프란치스코와 평화>를 잡았는데 생각해보니 그간 저는 한 번도 이 주제로 축일 강론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평화의 사도라 불리고 아시시에서 세계종교 지도자들이 평화회의를 여러 차례 했고 올해에도 했음에도 그간 평화를 주제로 축일에 강론치 않았는데 왜 지금 와서 평화를 주제로 강론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제가 지금 제주 강정마을 평화 센터의 개원 1주년 세미나 강의를 위해 와 있기 때이기도 하지만 작금의 우리나라 상황이 평화가 위협받는 상황이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평화란 것이 본래 세상이 평화로울 때는 얘기되지 않다가 평화가 위협받거나 전쟁이 일어나고 나서야 얘기되는 거지요.
그러니 지금 평화가 많이 논의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국내적으로도 북한의 핵위협과 사드나 강정마을 등의 문제로 평화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피부로 느끼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란 평화의 의지가 없으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위협받고 너무도 쉽게 깨지기 쉬운 것입니다.
평화의 의지가 없으면 우리 안에 전쟁의 의지가 늘 차있기에 아주 사소한 이유로도 평화는 위협받고 전쟁은 일어나게끔 되어있습니다.
프란치스코 당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은 성지를 가지고 전쟁을 했습니다.
이슬람이 성지를 점령하자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교 나라들이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것인데 주님의 성지를 탈환하고 보호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주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뜻이었겠습니까?
사랑과 평화의 가르침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그리스도교가 거룩한 이유를 내걸고 전쟁을 벌인 것이고, 지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도 지하드라는 명분하에 성전을 벌입니다.
그런데 십자군 전쟁이 한창일 때 프란치스코는 이슬람 술탄을 찾아갑니다.
그는 자신이 ‘높으신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 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절’로 여기에 왔다고 하며 아주 열정적으로 하느님에 대해서 얘기를 하였고 술탄을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술탄은 순교를 각오한 프란치스코를 돌려보내며 선물을 주었고, 프란치스코는 돌아오면서 매일 동쪽을 보며 다섯 번 기도하도록 초대하는 무에진이라는 이슬람의 좋은 기도전통을 배워옵니다.
이것은 후일 프란치스칸들에 의해 삼종기도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런 프란치스코에게서 우리는 십자군의 전쟁의지에 반하는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의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위해 모든 사람을 형제로 보는 법을 프란치스코로부터 배워야 할 것입니다.
모든 다툼과 전쟁은 상대를 악으로 보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너는 악이고 나는 선이라고 하는 것이며 악이기에 너는 제거되어야 하며 제거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인다는 것입니다.
너는 악이고 나는 선이라는 이런 이분법적인 생각은 모든 근본주의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10여 년 전 미국 대통령 부시가 북한과 이란을 ‘악의 축’이며 그래서 이 두 나라를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과 정책을 폈는데 이 부시라는 사람이 바로 개신교 근본주의자였지요.
지금 우리나라 대통령과 이 정권을 지탱하는 사람들도 근본주의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자기들을 반대하는 사람과 주장은 다 빨갱이로 몰아 북한의 김정은 정권과 함께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당시의 십자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우리 교회는 이슬람을 ‘악의 화신’이요 ‘짐승’, ‘적그리스도’라고 여겼고 십자군 전쟁은 이런 적에게 뺏긴 성지를 순례하는 거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래서 원수가 아니라 형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보면 나와 다르면 악이고 나를 반대하면 더더욱 악이고 원수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중심으로 보면 나와 다름은 <다른 선>이고, 나를 반대한다 하여 그가 악일 수는 없고 여전히 형제입니다.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지은 주의 기도문에서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형제를 악으로 보는 악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선을 반대하는 것이 악이지 나와 다르거나 나를 반대하는 것이 악은 아니지요.
하느님의 선들을 악으로 보는 내가 오히려 악인 거지요.
프란치스코 축일을 맞은 오늘 우리는 평화의지가 없으면 언제든지 전쟁의지가 설치게 됨을 경계하고, 우리 안에는 선을 악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음을 직시하며 프란치스코의 평화의지와 형제애로 이것들을 극복해야겠습니다.
자기 몫에 기뻐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기의 몫을 행하고 또 그 몫에 기쁨과 감사함을 지닙니다.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알고 확신이 서 있다면 그 몫을 행하는 것에 배 아플 것도 없고 기쁨이 클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그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정작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고,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르타가 마음이 상했는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 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루가10,40).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가10,41-42).
마르타의 몫도, 마리아의 몫도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마리아의 몫입니다. 왜냐하면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로마10,17)'. 말씀을 기초삼지 않은 행동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 깨닫게 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 해야 할 일을 하게 됩니다. 내 뜻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찾게 됩니다.
마르타는 다소 불평어린 어조로 예수님께 말씀 드렸는데 그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역할을 다 했으면 그것으로 족해야지 생색은 왜냅니까? 열심히 일해 놓고는 마음에는 화를 잔뜩 담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이 내 몫이었으면 그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스스로 주님을 위해 시중을 들었으면 그 자체를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마르타는 활동적인 여인인 듯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에만 집착하면 그 활동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다시 말하면 활동은 기도 안에서 나온 활동이라야 참된 활동이 됩니다. 또한 기도를 하면 할수록 활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 없는 활동은 무의미합니다. 활동이 없는 기도는 또한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 안에서 좋은 몫을 택할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몫이 주어졌든 최선을 다했으면 그 자체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가12,31).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뒤로 미루고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기억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은 참으로 좋은 몫을 택하신 분입니다.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 는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모든 세상의 부를 포기할 수 있었고, 세속적 욕망으로 무너져 가던 교회를 청빈의 정신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성인은 예수님의 오상을 받았으며 주님을 온전히 차지하셨습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삶을 통해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은총 안에서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루카 10,42)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저를 비롯한 모든 프란치스칸들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축일 맞이하신 모든 이들에게 축하드리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실제로 내가 가진 몫이 더 좋고 나에게 딱 맞는 것인데 남의 것이 더 좋아 보이는 착시현상을 참인 양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리아는 마르타의 몫이 더 좋아 보이고 마르타는 마리아의 몫이 더 좋아 보였을까요?
여러분은 마리아의 몫이 마르타의 몫보다 더 좋은 것이라 여기고 있나요?
아니면 마르타의 몫이 더 좋아 보이나요?
마르타의 몫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고 마리아의 몫도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타가 마리아의 몫을 차지하였다면 과연 행복했을까요?
마리아가 마르타처럼 산다면 과연 행복할까요?
아닐 겁니다.
우리 각자가 받은 몫이 나를 위해 가장 좋은 몫이랍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생애 만년에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형제들이여, 잘 계십시오.
나는 나의 몫을 다 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몫을 다하십시오!"
오늘 나의 몫이 가장 귀하고 좋은 것임을 깨닫고 그 몫에 충실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필요한 것 하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었지요
무엇을 하든 어떻게 하든
마음을 당신께 두는 것 말이예요
당신께서 편히 쉴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당신께 드릴 음식을 정성껏 마련하려
분주히 손발을 움직이면서도
마음의 시선은 당신을 향하는 것 말이지요
바삐 움직이면서도 얼핏 들리는
당신의 한 말씀 한 말씀
가슴에 차곡차곡 담으며
마음의 시선을 당신께 두고 싶었답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애틋한 사랑을
내 작은 몸짓에 곱게 담아
당신을 기쁘게 모시고 싶었답니다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었습니다
나를 대신하여 내 몫까지
당신 발치에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동생이 참으로 예뻤답니다
당신의 말벗이 되어 준
동생이 참으로 고마웠지요
동생도 나도
당신께 마음을 두고 있으니
당신은 또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우리 자매가 얼마나 이쁘셨을까요
그런데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시선은 당신을 향하고 있는데
몸의 시선은 흘깃흘깃 동생을 향했답니다
나는 바쁘기 그지없는데
그저 편히 앉아 있는 듯한
동생이 아쉽고 얄미웠지요
이내
몸의 시선뿐만 아니라 마음의 시선도
동생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답니다
비교하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못난 시선을 말이지요
당신을 향한 사랑의 시선의 자리에
동생을 향한 미움의 시선이
어느덧 똬리를 틀었답니다
당신을 향한 고운 시선은 사라지고
동생을 향한 고까운 시선만 남았답니다
이건 아니지요
이건 정말로 아니었지요
필요한 것은 하나뿐이랍니다
마음을 당신께 두는 것 말이지요
마음의 시선을 당신께 향하는 것 말이지요
사랑만이 가능한 것<루카, 10/38-4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내 안에 참 사랑이 있다면 불가능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 위하여 목숨까지 기쁜 미음으로 내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는 자존심도 없고 자기 욕망을 포기할 수도 있고 네가 원하는 것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깊이 살펴보면 사람이 어떤 일을 통한 업적을 보고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지만 주님은 얼마나 사랑을 하는지를 통하여 업적 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함을 들어내십니다.
우리는 마음에도 없는 일을 남을 따라 하거나 습관적으로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과 괸계를 맺으려 할 때 그의 업적이나 겉 모양만 보면 알맹이 없는 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는 사람이 자기 공적을 앞세워 인간관계를 가지려면 서운하고 배신감도 느끼지만 사랑으로 한 일은 남아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공적은 살아지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위해 무엇을 하였는데 너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구나 하며 시시비비를 따지는 한 모든 것은 물거품 차럼 사라집니다.
누가 무엇을 사랑으로 하는 일은 행한 일 안에 숨어들어가 사라지고 내것이아니라 네 것이 되지만 무엇을 공적을 생각하어 행하는 일은 자기 안에 머물러 자라면서 자기 공적을 계산 하고 손익 계산서 생각하면서 허무한 삶을 살아갑니다.
저는 내가 한일을 사랑으로만 하려고 하니 나머지는 없으며 뒤에 따라오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길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여 당신의 사랑으로 하느님 전체가 우리 안에 녹아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될 뿐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신비나 하느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이나 부활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순교자가 순교할 수 있는 것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에 사랑의 응답입니다. 사랑은 불가능이 없습니다. 오늘축일을 지내는 프란치스코 성인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좋은 환경에서 가정을 떠나 탁발 수도자로 일생을 살아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의 응답을 하신 분입니다.
오늘도 믿는 이들이 사랑으로 아무런 보상을 바리지 말고 주님 앞에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 4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필요한 것은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가장 좋으신
예수님과
함께하기위해
복음적 가난과 겸손이
더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육화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기위해
우리를 회개로
이끌고 계십니다.
회개의 삶이란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모든 것안에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형제가 될 때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조화로운 평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참된 평화란
작아질 수 밖에 없는
겸손한 기쁨입니다.
작아질수록
서로를
더 존중하고
더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께만
희망을 두기에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중심이 될 때
우리들또한
생명 중심으로
공동체 중심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내적 기쁨이란
생명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때
주어지는
참된 기쁨입니다.
기쁨안에서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통까지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참된 가난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소박하고
단순한 삶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가난하였기에
충만할 수 있었음을
벌거벗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작아지는
성프란치스코를 통해
다시 배우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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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년 6월 10일 일본 동경에서 파자마를 입고 숨진 채 발견된 한 남자로 인해서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파자마를 입고 돌아가셨다는 것은 자신의 침실에서 잠든 사이에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상상하게 되고, 이것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더군다나 사인 역시 심장마비로 잠정적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글쎄 돌아가신 분은 파자마만 걸친 해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옆에는 1984년 2월 20일자 신문이 펼쳐져 있었고, 그 옆 탁자에는 같은 날짜의 달력이 놓여 있었던 것이지요. 즉, 고인은 이십 년 동안 이 장소에 계속해서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습니다. 20년 동안 세상의 그 누구도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슬픔일까요?
50대 초반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이 분은 비록 이혼은 했지만 전처가 있었고, 직장생활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장 동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찾지 않았습니다. 전처는 이혼했기 때문에 다시는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연락하지 않았고, 직장 동료들은 마침 그때 회사가 부도나서 잠적한 것이라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20년 동안 아무도 찾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지금은 더욱 더 외로운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울증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과거와 달리 문명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도구들은 훨씬 많아졌습니다. E-Mail이나 전화 등, 내가 원하기만 하면 상대방에게 연락하고 대화할 수 있는 방법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더욱 더 ‘외롭다’를 외칩니다. 철저히 자신만이 우선이라는 개인주의와 이기심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지내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강생과 고통,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도이지요. 이 기도를 바치면서 10월 한 달을 거룩하게 보내자는 것입니다. 이 묵주기도 성월을 보내면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나를 외면하고 관심을 두지 않더라도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주님과 성모님이 계시기에 언제나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모님께서는 여성이며, 어머니이이시며, 과부셨지요. 즉, 성모님께서는 우리 가정의 삶에 대해 잘 알고 계시기에, 지금의 어려움을 어떻게 가장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지를 아시고 전구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묵주기도 성월인 10월. 더군다나 오늘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을 보내면서, 내 안에 간직하고 있는 외로움과 두려움 모두를 성모님 안에서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데 필요한 것이라곤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었다(니코스 카잔차키스).
우울증
사실 우울증은 너무나 흔하고 보편적인 것이어서 오늘날에는 거의 정신의 감기쯤으로 인식됩니다. 그럼에도 우울증의 근원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지요. 우울증에 대해 밝혀진 것이란 그것이 자살에 이르는 위험한 증상이며,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해결책이 없으며, 암과 비만과 함께 21세기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질병으로 꼽힌다는 점입니다.
내 이웃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됩니다. 그 관심이 가장 위험한 질병으로 꼽히는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데 큰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 주변에 외로운 사람이 더 이상 없도록 기도하고, 그들의 소중한 벗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 모습이 주님의 창조 활동에 동참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입니다.
경청의 달인이 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감곡매괴성모성당 설립일입니다. 묵주기도의 동정마리아는 감곡성당의 주보성인이십니다. 초대 신부이신 임 가밀로 사제께서는 매사에‘성모님께 의탁하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성당의 부지를 얻게 된 것도, 대성전을 지어 봉헌하면서도 성모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신사’를 지으려는 터에 ‘성모님 패’를 땅에 묻고 기도할 정도로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남달랐습니다. 신부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성모님이셨고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결실이 지방에서 처음으로 거행한 성체거동 이었습니다. 1894년에 시작한 성체거동은 100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성체께 대한 사랑과 흠숭의 마음이 더욱 커지기를 희망합니다.
묵주기도의 어머니기념일을 맞아 묵주기도를 봉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묵주기도는 “지옥의 공격을 물리치는 구원의 보루이며, 모든 난파선이 찾는 항구이다.” 묵주는 “우리를 하느님께 묶어주는 아름다운 사슬이며 우리를 천사들과 결합시켜주는 사랑의 끈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주기도는 성경에 바탕을 둔 기도이며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하는 기도이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묵상 성격을 띠는 기도이며 전례와 긴밀한 연관성이 있는 기도입니다(교황바오로6세). 묵주기도는 복음 전체의 요약이고, 주님 구원사업의 총합입니다. 묵주기도의 각 신비는 복음서에서 영감을 받아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주기도는 각 신비의 말씀을 곰곰이 되새기며 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외워야 합니다. 묵주기도를 즐겨하시기 바랍니다.
마르타의 집에 예수님을 모셨는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에 열심히 귀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음식을 준비 하는 등 갖가지 시중을 드는 일에 분주했습니다. 그러다가 동생이 시중드는 일을 거들어 주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몫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알았으면 그것을 차지해야 합니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모습이 서로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두 역할이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귀한 말씀을 듣는 것이 먼저 입니다. 훌륭한 분에게는 어떻게 하든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받기보다 하나라도 더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마르타는 자기 일에 몰두하다가 그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기회를 잃었습니다. 거기에다 마르타는 마리아를 보고 다소 불편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사실 주님께 음식을 대접해 드리려 했으면 마리아가 도와주든 그렇지 않든 기쁘게 했어야 옳습니다. 자기가 정성으로 준비한 음식을 주님께서 잡수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좋은 일을 열심히 해 놓고 마음 안에 화를 쌓아놓는 다면 그만큼 보람도 없습니다. 차라리 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낫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이 내 몫이었으면 그것으로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아마도 마르타는 활동적인 여인인 듯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에만 집착하면 그 활동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경청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말씀을 경청하면 삶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6장 1절 이하를 보면 사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전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던 일을 그만하고 그 일을 부제들에게 맡겼습니다. 말씀의 선포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음식이 아니라 구원의 말씀을 먼저 귀담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곧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시중을 드는 일은 활동입니다. 그리고 활동은 기도 안에서 나온 활동이 아니라면 마음 안에 화를 담을 수밖에 없고 바른 활동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기도하고 활동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경청의 달인이 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식사할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활동하셨지만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활동할 힘을 기도를 통하여 얻었습니다. 기도 없는 활동은 무의미합니다. 또한 활동 없는 기도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활동, 활동과 기도의 조화를 이루되 먼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활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합니다.
가장 큰 기적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나라는 선교사 없이 평신도 학자들이 서학을 연구하다 그리스도가 참 진리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아 신앙이 뿌리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성체성사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박해 100년 동안 사제가 없었던 기간이 50년이나 됩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 모진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양반들이 천민이 되고 부자들이 밥을 굶으며 혼인을 하고도 동정을 지키고 뼈가 부러지고 살이 썩어가면서도 신앙을 지키고 자기 옆에서 자신의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신앙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교회에서 공경해야 할 대상으로 정해지면 ‘가경자’라는 명칭이 붙습니다. 그리고 기적이 발생하면 ‘복자’가 되고 그러고도 모든 과학자들이 인정할 수 있는 기적이 계속 발생하면 ‘성인’ 품에 올립니다. 그러나 가경자가 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단점이라도 보이면 결코 교회가 공식적으로 가경자의 지위를 주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만 명이 넘는 순교자들이 있지만 103위만 성인이 되셨고 새로이 복자 124위가 탄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에게 성인이나 복자가 될 만한 기적이 있었을까요? 그 기적은 모든 이가 인정해야 할 만한 것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루르드에서 한 달에 3~4건의 기적이 일어나지만 실제로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기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몇 개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그 이전에 엑스레이를 찍었을 때 한 다리 길이가 10센티 이상 짧았는데 루르드 물에 담그고 났더니 다리가 길어져 더 이상 절뚝거리지 않게 되는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의사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어야 교회도 기적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성인들이나 복자들은 그럴만한 공식적인 기적을 지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적이 없어도 복자품이나 성인품에 오를 수 있는 경우는 교황의 특별한 허락이 있어야만 합니다. 103위 시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황님은 선교사 없이 모진 박해 속에서도 중국이나 몽고, 일본의 경우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더욱 신앙이 증가했던 것이 곧 기적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성인들이 공식적인 기적 없이도 복자와 성인품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큰 기적은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이 변하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자신이 교회를 박해하는 인물이었다가 지금은 그 교회의 신앙을 전하고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서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큰 기적을 일으켜서가 아니라 사람이 바뀌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기적이고 하느님을 증거하는 방법입니다. 기적을 하고 예언을 하고 감동적인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그런 뜨거움은 금방 식어버려 사그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참다운 기적은 나의 변화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아들을 죽여 살라 바치라고 명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을 죽이는데 쓸 칼을 갑니다. 그리고 모리아 산에 올라가 아들을 가차 없이 죽이려고 합니다. 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이 죽는 편이 차라리 아들을 아프게 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아들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며 또 세상이 미친 인간이라고 욕하는 것을 참아 견디며 살아야 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은 차라리 지금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대로 했고 그렇게 한 모습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복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만난 증거가 그런 삶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힘으로 변화될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어 변화된 삶을 살게 해 주실 힘을 주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변화되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살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증인들이 많이 있는 교회가 건강하고 강한 교회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을 겁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저를 집으로 꼭 초대하겠다고 부탁하시기에 집들이로 알고 갔습니다.
집들이가 아니고 그냥 아파트며 사신지 오래됐고 소파를 바꿨다는 겁니다.
조금 있더니 벨이 울리며 식사가 배달되고 가구 자랑 들으며 식사했습니다.
왜 초대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가족사진을 보여 달라했고,
가정의 행복을 위해 어떻게 사는가를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인성문제나 신앙문제라면 신 났을 텐데 아마 예수님도 그러셨을 겁니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카 10,41~4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 꿈을 꾸었습니다. 아버님의 생신을 준비하면서 아버님께 선물을 드리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버님께 양복을 사드리고, 한복도 사드리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이니 집안 청소도 하자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집안 청소도 하였고, 아버님을 위해서 가지고 있는 돈을 어머님께 드렸습니다. 현실의 저는 그렇게 효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현실의 저는 집에 가면 청소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님께서는 3년 전에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꿈속에서 아버님께서는 이제 혼자되신 어머님께 잘 하라고 말씀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일에는 소중한 것, 중요한 것, 긴급한 것,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하루 24시간 우리는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요? 먹고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서 우리는 일을 합니다. 본인의 성공을 위해서 우리는 일을 합니다. 저도 맡겨진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비 신학생들을 위해서 미사를 드리고, 면담을 합니다. 성소 후원회를 위해서 미사를 드리고, 모임을 함께 합니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합니다. 복음화 학교 공동체를 위해서 미사를 드립니다.
교구장님께서 지시하는 일은 긴급한 일입니다. 교황님 방한 준비를 위해서 했던 일들은 긴급한 일이었습니다. 그것들은 정해진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은 힘들기는 하지만 보람이 있습니다. 로마에서 진행되는 세계 주교 시노드에 추기경님께서 참가하시고 있습니다. 교구장님께서는 신학생과 관련된 통계 자료를 원하셨습니다. 그런 일들은 서둘러서 처리해야 합니다.
중요하지 않은 일도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보고, 라디오를 듣고, 친구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게임을 하고, 영화를 보고, 노는 일입니다. 물론 그런 일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하루 중 너무 많은 시간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면서 보내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책을 읽으려고 하지만 다른 것들에 시간을 빼앗겨서 아직도 읽지 못하는 책들이 많습니다.
소중한 일이 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하루의 삶을 성찰하는 시간입니다. 공동선을 위해서 함께 연대하는 시간입니다. 책을 읽는 시간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입니다. 나의 것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시간입니다.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도시에는 많은 차들이 있습니다. 차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서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오래된 차도, 이제 막 나온 새 차도, 서민들이 타는 경차도, 고급차도 차의 목적은 정해진 장소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길에도 원칙과 규칙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고 해도, 아무리 급한 차라고 해도 꼭 지켜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신호등’입니다. 파란 불에서는 가도 되지만, 황색 불에서는 속도를 줄이고 빨간 불에서는 무조건 서야합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차가, 빨간 불에 그냥 달려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다행히 별일이 없을 수도 있지만, 빨간 불에서 달리면 엄청난 사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사제들이 1년에 한 번씩 피정을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까지 왔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빨간 불에서는 서야 하듯이 아무리 급해도 신앙인에게 기도의 시간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바로 이런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했고, 복음 선포의 사명에 불타올랐지만 바오로 사도는 3년간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만나기위해서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타를 만나십니다. 마르타가 하는 일도 중요한 일입니다. 파란 불에서는 분명히 차가 움직여야 하듯이, 우리의 몸은 움직이고 행동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그 만남 속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당연한 사명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때로 마리아처럼 조용히 내면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침묵 중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파란 불이 길고, 빨간 불은 짧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짧아도 빨간 불은 소중한 규칙입니다. 우리가 하루 중에 대부분은 파란 불처럼 움직이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라도 기도의 시간을 잊어 먹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방향을 잃어버린 차는, 목적지를 알지 못하는 차는 아무리 달려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소중한 일을 먼저 하십시오. 그리고 중요한 일을 하십시오. 이기적으로 살기에 우리의 하루는 너무나 짧기 때문입니다.’
환대의 주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순례49일차입니다. 순례중 곳곳에서 참 많은 한국인들을 만납니다. 좁은 땅에 답답한 일도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오늘 아침 7:30분 '정겨운 민박집'에서 식사를 하면 곧장 마드리드 공항에 나가 10:50분 대한항공기에 몸을 싣고 이륙한 후, 한국시간 2014.10.8일 05:50분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할 것입니다. 하여 10.8일 순례50일차 강론은 기내에서 쓰고, 10.8일 미사는 10시에 박용대 이냐시오 형제 집에서 감사미사로 봉헌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다시 '환대'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환대란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고 마음이 따뜻해 집니다. 또 환대 받은 잊지 못할 고마운 추억들이 많이도 떠오릅니다. 산티아고 순례는 참으로 환대의 선물로 가득한 순례였습니다. 스페인 나라도, 사람들도, 순례자들도, 50일간의 좋았던 날씨도, 순례중 무수히 머물렀던 바(bar)들도, 알베르게 순례자 숙소와 한국인 민박집들도 모두 마음 활짝 열고 우리를 환대해 줬습니다.
어제 마드리드에서 가장 큰 주교좌 아물데나 성당을 방문했을 때, 주님의 환대도 잊지 못합니다. 제 로만 칼라 복장을 보고 매표원이 물었습니다.
"Are you priest?" 그렇다고 대답하자 "Where are from?"묻기에 "Korea" 대답하지 6유로의 입장료를 면제해 줬습니다. 주님의 환대로 오전 내내 공짜로 성당내 모든 것을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 나라는 역사상 죄도 많이 지었지만 거대한 유산을 많이 남겨 인류에 공헌함으로써 보속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좌우간 90%가 관광수입이라 하니, 이들의 환대는 생존에 필수적 요소임을 깨닫게 됩니다.
산티아고에서의 '우리민박집'과 마드리드에서의 '정겨운민박집'의 환대를 잊지 못합니다. 흡사 순례자들에겐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습니다. 묵을수록 우리집 같았고 정겨운 민박집들이었습니다. 문앞에 걸린 또렷한 태극기가 마치 대한민국이 우리를 환대해 주는듯 감격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입에 맞는 한식은 한국인의 정체성 형성에 절대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모 든 환대가 상징하는바, 하느님의 환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은 모두 나에게 오라'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환대하시는 자비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산티아고 순례시 이런 다양한 환대를 통해 우리를 환대하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런 환대에 응답하여 밥먹듯이, 숨쉬듯이 걸으면서 참 많이도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구원의 지팡이처럼, 어머니의 손을 쥐듯이 묵주를 잡고 걸었습니다. 삶은 기도임을, 평생 인생순례여정에 묵주기도의 진가를 충분히 깨달았습니다. 공 교롭게도 오늘은 '묵주기도의 동정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절체절명의 레판토 대전에서 유럽연합군이 이슬람 대군을 물리침으로써 그리스도교 유럽을 지킨 역사적인 날로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전구가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환대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자비로운 환대를 통해 회개한 바오로 사도임은 다음 고백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환대에 감격한 바오로 사도의 주님께 대한 절대적 순종과 충성심입니다. 주님의 따뜻한 구원의 환대를 체험했기에 마르타와 마리아의 정성 지극한 주님 환대입니다. 오늘 복음은 결코 관상과 활동의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환대의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우선적으로 할 일은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다음 마르타를 향한 주님 말씀은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매일 아침 미사 중, 주님을 환대하여 당신 발치에 앉아 당신 말씀을 경청하고, 당신 성체를 모시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아멘.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홀로 깨어 기도하시는
어머니를 만납니다.
묵주기도는
간절한 어머니의
눈물입니다.
매순간마다 기도로
바쳐진 어머니의 삶은
기도하는 법을 다시
우리들에게 일깨워줍니다.
삶이란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삶을
껴안을 수 있는
묵주기도가 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기도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함께 하기에
행복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만나게 될
환희, 고통, 빛, 영광의
신비는 모든 시간에
함께 하시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기도로 시작되고
기도로 마쳐지는
우리네 삶입니다.
우리의 가장 좋은 몫은
언제나 어머니의 기도처럼
기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희망을
묵주기도로 다시 찾는
은총의 로사리오성월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확실한
하느님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기도일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과
하느님 뜻에
귀 기울이게 될 때
우리는 묵주기도의 순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묵묵히 순리대로
주님의 어머니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환희, 고통, 빛, 영광을
따르는 겸손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겸손의 이치와
사랑의 순리로
벼 이삭처럼
우리의 삶을 영글게 합니다.
묵주기도처럼
순리대로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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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고 있는 곳에 멀지 않은 곳에는 높은 빌딩과 아파트들의 숲이 있습니다. 국제도시라는 이름을 걸고서 외국인 유치에 많은 힘을 쏟아 부었으며, 또 그에 걸맞게 최신식 건물들로 가득한 도시입니다. 불과 30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높은 건물들입니다.
사실 제가 초등학교 때에 우리 동네에 처음으로 고층 아파트가 세워졌습니다. 물론 지금과 비교하면 그렇게 높지도 않은 아파트입니다. 15층까지 있는 아파트니까요. 하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나도 높은 아파트였고, 이렇게 높은 곳에 살면 혹시 산소가 부족하지는 않을까 라는 엉뚱한 상상도 한 적도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승강기가 있는 아파트였기에, 저와 제 친구들은 이 아파트에 아는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지만, 마치 아는 누가 있는 것처럼 찾아가 승강기를 타고서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발전을 가져왔지만, 우리의 마음도 커지고 넓어졌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건물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점점 작아지는 것은 아닐까요? 소비는 더 많아지고 있지만 기쁨은 줄어들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 것들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지만, 사람들의 입에서는 시간 없다는 소리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많아졌지만 문제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의학 역시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지만, 우리의 주변에는 아픈 사람이 가득합니다.
가진 것은 그 전보다 몇 십 배가 되었지만, 그 가치는 훨씬 더 줄어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들이 발전을 위해서 애썼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요? 발전 지상주의를 가지고 힘차게 살아왔지만 그리고 그 목적이 우리 삶의 행복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주님을 시중드는 마르타와 주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동생 마리아의 모습이 나옵니다. 힘들어 하는 마르타는 보다 못해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세상의 관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세상의 관점을 따를 수 있도록 말해주셔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르게 말씀하시지요. 세상의 관점보다도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딱 한 가지뿐이라고 하십니다. 바로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치에서 그분의 말씀을 잘 경청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발전했다고 행복도 발전하지 않는 것처럼, 세상의 관점을 계속 채워나가도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 즉 주님의 관점을 따르는 것만이 참 행복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역경은 축복이었다. 가난했기에 ‘성냥팔이 소녀’를, 못생겼기에 ‘미운 오리 새끼’를 쓸 수 있었다(안데르센).
하워드의 선물(에릭 시노웨이,메릴 미도우 공저) 중에서
“미국에서 결핵 사망률이 가장 높은 주가 어디인지 아니? 바로 우리가 사는 애리조나 주야.”
나는 내심 깜짝 놀랐습니다.
“애리조나 주는 온난 건조해서 결핵 환자의 요양에 가장 적합한 기후를 갖고 있어. 그래서 미국 각지에서 결핵 환자들이 찾아오지. 치료율이 높기는 하지만 누구나 완치되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죽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어쨌든 다른 주에 비해 결핵 사망률이 높은 거야. 비유를 들자면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서 벤츠를 타는 사람은 엄청 부자일 수 있겠지만, 독일에서는 벤츠를 탄다고 해서 부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야. 애리조나 주가 결핵 사망률이 가장 높다는 통계만 봤을 때는 보건 상황이 가장 나쁘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 무엇이든 그 속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진실은 늘 가려지게 마련이야.”
얼마 전에 읽은 책에 있는 내용입니다.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어서 이렇게 새벽 묵상 글에 적어 보았습니다. 정말로 그런 것 같거든요. 눈에 훤히 보이는 것이 반드시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쩌면 감춰진 진실을 보기 위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또 다른 시선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 시선이 바로 주님께 연결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시고 또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의 길을 향해 우리의 시선이 맞춰질수록 행복도 그리 멀리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다 이루려고 합니다.
욕심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한가지는
주님과 함께 하는 믿음과 행복입니다.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필요한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서로 협력하며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마르타에게 시중들 힘을 주시고
마리아에게 말씀으로 생기를 되찾아 주시는
주님과 함께 행복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나누어야 할 것은
시기와 질투가 아니라
상대를 서로 존중하는
기쁨과 사랑입니다.
나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은
상대의 가치또한 인정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나눔의 관계입니다.
건강한 관계는 회개를 통해
성장됩니다.
회개는 관계의 성장입니다.
회개는 하느님과의 살아있는 대화처럼
서로를 환영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의 존재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일과 기도가
내향성과 외향성이
함께하는 기쁨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필요한 한가지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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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때만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은 정말로 힘이 드십니다. 음식을 장만하고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도 맞이해야 하기 때문에 부엌 밖을 나오시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손아래 동서가 집에 와서는 부엌에 들어와 함께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편찮으셔서 방에 누워 계신 시어머니와 이야기만 나누고 있다면 어떨까요? 편찮으신 시어머니와 함께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화가 날 것입니다. 더군다나 손아래 동서가 같이 일 좀 하자는 자신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남편에게 또는 시어머니에게 자기를 좀 도우라고 말 좀 해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시어머니는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랜만에 집에 와서 나랑 이야기하는 것이 어떠냐? 너희들 모두 일하느라 바쁘지 않니? 네 동서는 나랑 같이 있게 그냥 놔둬라.”
환장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시어머니가 이런 식으로 말씀하실 수 있을까 싶을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가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손님맞이와 제사 준비를 하는 일이 어머니가 심심하지 않게 말벗이 되어 드리는 것보다 훨씬 큰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프신 시어머니의 말벗을 해드린다는 것 역시 큰일인데 그보다는 육체적인 자신의 일이 더 어렵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손아래 동서를 시기하고 미워하며 분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하는 일에 대해 보람을 느끼고, 사랑하는 가족과 존경하는 조상님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일에 정성을 다한다면 그 사실 자체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이기 때문에 비슷한 구성을 한 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일하는 마르타와는 달리,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그가 하시는 말씀에 푹 빠져 있었던 마리아의 모습이 대조됩니다. 그래서 마르타가 예수님께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편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은근히 동생 마리아의 편을 들어주십니다.
집안일을 돕지 않는 동생이 칭찬을 받고 부지런한 언니가 칭찬은커녕 핀잔을 듣는 이 이야기는 참으로 부당하게 들립니다. 특히 부엌일과 관련해 신경이 예민해지기 쉬운 명절 때라면 더욱 그렇게 들리겠지요.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교회는 이야기합니다. 즉, 세상의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기도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에 만족하고 기쁨을 얻기보다, 비교판단하면서 시기하고 미워하며 분노한다는 것입니다.
비교를 하는 순간 행복은 내게서 떠난다고 합니다.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묵묵하게 최선을 다하는 삶이 필요한 오늘이 아닐까요
사람이 생을 마감한 뒤 남는 것은 쌓아 온 공적이 아니라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미우라 아야코).
우리가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네 가지.
이 세상 안에 사랑의 힘을 무기력하게 네 가지 도구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비판하기, 경멸하기, 변명하기, 발뺌하기’라고 하네요. 여러분은 자주 사용하는 도구는 이것 중에서 어떤 것입니까? 이 네 가지가 분명 사랑의 힘을 무력하게 만든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것을 버리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는 내가 남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도구인 동시에, 남 역시 나를 사랑하지 않게 만드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비판하고 경멸하고 변명하고 발뺌만 하는 사람을 누가 사랑하겠습니까?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기를 바라는 분은 이 네 가지 도구를 더욱 더 자주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나 역시 사랑을 받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내가 사용하고 있는 그 네 가지 도구를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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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카네기 공대 졸업생들을 추적해서 조사한 결과 아주 재미있는 말을 들을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하는데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15퍼센트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나머지 85퍼센트가 인간관계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관계에서 맺어지는 끈끈한 정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우리 주위의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들은 하찮다고 생각할 만한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잘 챙겨서, 여러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에 반해서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기 일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들 주위에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물론, 본인 스스로도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며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일 중심의 사람보다는 정 중심의 사람을 더욱 더 좋아하셨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살짝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분주하게 일을 합니다. 이것도 해야 할 것 같고, 저것도 해야 할 것 같고, 아무튼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모습이 언니인 마르타에게 좋게 보일 리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자기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말해달라고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지요.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일보다도 더 중요한 한 가지가 예수님의 말씀을 잘 경청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어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세상일을 먼저 끝내고 듣겠다며 뒤로 미룰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이제는 일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잘 경청하면서 주님과의 정을 더욱 더 쌓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일에는 두 가지 자루가 있다. 불안의 자루와 믿음의 자루.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잡아야 한다(헨리 워드 비처).
사하라사막 건너는 법(‘행복한 동행’ 중에서)
사하라사막 한가운데에 비셀이라는 마을이 있다. 1926년 켄 레먼이라는 사람이 이곳을 발견하기 전까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 척박한 땅을 떠나고 싶어하면서도 아무도 사막을 건너지 못했다. 레먼은 이상하게 여기며 그 이유를 물었지만 사람들의 답은 똑같았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 결국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레먼은 비셀 사람 하나를 고용해 그가 어떻게 사막을 건너는지 지켜보았다. 그는 열하루째 되던 날 아침에 거짓말처럼 비셀로 돌아왔다. 아무런 표지도 없는 사막에서 단순히 감각에만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원을 그리며 걷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비셀 사람들이 사막을 건너지 못한 이유였다.
레먼은 비셀 청년 엑터에게 낮에는 쉬고 밤에는 북쪽의 별을 따라 걷다 보면 사막을 건널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엑터는 그의 말을 따라 사막을 걸었고 3일 뒤 넓은 사막의 끝자락에 서게 됐다. 그때부터 엑터는 비셀 마을의 개척자가 되었고 마을 중앙에 세워진 그의 동상 밑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졌다.
“새로운 생활은 방향을 잡는 데서 시작한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단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아름다운 무지개 하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수도원에서 릴레이 성체조배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기도생활에 아주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한 수사가 자신의 차례가 되어 힘차게 솟아오르는 기도에 대한 열정을 겨우 억누르며 경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경당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기분이 갑자기 확 상했습니다. 자기보다 앞 당번인 수사가 평소에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성체조배에 전념하기는커녕 의자에 앉은 채로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 수사는 자고 있는 동료 수사가 들으라고 일부러 큰 소리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감히 주님 면전에서 곯아떨어져 있는 이 형제, 운동시간에는 절대로 졸지 않지만 묵상시간마다 조는 이 형제, 당신과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있지 못하는 이 형제를 용서하소서.”
그러자 감실로부터 이런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조용! 네가 나까지 깨우는구나. 나도 피곤해서 저 형제와 함께 곤히 자고 있었는데.”
저도 기도시간에 졸고 있는 형제들보면 가만있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갑자기 적개심이 불타오르면서 도대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면서 분개를 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요즘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다는 것. 신체적 조건도 다르다는 것, 영성의 단계도 각자 다르다는 것.
어떤 사람은 체질상 몸으로 때우는 일이 적격입니다. 적극적인 투신과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봉사활동이 더 어울립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습니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여기 저기 다니면서 몸을 움직여야 하루가 행복합니다. 전형적인 마르타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깊이 있는 관상생활이 어울립니다. 하느님과의 통교가 너무 감미로워 묵상시간이 끝나면 일상적인 활동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싫을 정도로 영성생활에 심취합니다. 성체 앞에 앉아있으면 그저 만사 오케이입니다. 기도하고 있으면 그게 가장 큰 기쁨이요 보람입니다. 전형적인 마리아 스타일입니다.
교회를 위해,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복음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 둘은 항상 같이 다녀야 합니다. 서로 적대관계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 상승작용을 해야 합니다. 한 신앙인 안에서도 관상과 이웃 사랑의 실천은 마치 두 개의 톱니바퀴같이 어울려야 하여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해와 비가 하늘에서 서로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둘 다 같은 시간에 하늘을 독차지하고 싶었습니다. 서로 끝까지 양보하지 않았기에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동시에 햇볕 또한 쨍쨍 내리쬐었습니다.
그 덕분에 하늘 이편에서 저편까지 아름다운 무지개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때로는 불화나 대립이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기도 한답니다.(앤드루 마리아, 지혜의 발자취, 성 바오로 참조)
빵이 아닌 말씀으로
김희준 신부님
당시 관습에 따르면, 집에 손님이 방문했을 때 여인들이 해야 할 일들은 너무 많았습니다. 주방에서 손님에게 대접할 음식을 준비해야 했을 뿐 아니라, 하인이 없다면 손님들을 위한 발 씻을 물도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관습에 따라 마르타는 분주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여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은 하지 않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때문에 마르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마리아를 보고 예수님께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라고 당당히 청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마르타를 책망하시듯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하루를 살아가면서 마땅히 해야 할 수많은 일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주님 앞에 머물면서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즉 마땅히 해야 할 많은 일들 때문에 근심하고, 그 근심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듣지 않는다면 우리도 예수님께 마르타와 마찬가지의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살아갈 힘조차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빵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만남은 듣는 것부터
나영훈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만나고 있는 두 자매의 태도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그들과 예수님과의 만남,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만남이 어떤 만남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선 언니 마르타의 모습을 봅시다. 예수님을 자신들의 집으로 맞아들이는 일에 앞장섭니다. 그리고 줄곧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다고 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만난 후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 불평입니다. 자신의 일을 돕지 않는 마리아를 꾸짖어 달라는 내용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만났지만, 결국 불평만 남게 됩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줄곧 침묵합니다. 그녀에게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은 말씀에 대한 경청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참으로 만났다고 할 수 있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우리는 매일 기도와 활동을 통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분의 말씀에 대한 경청이 첫 번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고 행동만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닌 내 욕구를 채우는 활동만 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선 듣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야쿠르트 하나 정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주님의 대부분의 말씀이 그러하지만 이 말씀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지당하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전에는 아무리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라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래서 기도 못지않게 마르타처럼 주님을 위한 일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주님 사업에 소극적인 형제들에 대해 열성이 없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하느님 사업에 열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이 소극적이면 열성을 더 내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요즘 와서는 할 수 있으면 열심히 하자는 것이지 꼭 그래야 하고 누구든지 그래야 된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실상 많은 일들이 꼭 해야 할 일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해야 한다는 그 강박적 생각이 만들어낸 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는 동안 하느님이 소외되고 사람이 소외됩니다.
일이 많을수록 더 그러 합니다.
사람들은 일의 협력자이거나 도구입니다.
며칠 전, 지난 토요일 갑자기 장례 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웃 본당 신부님이 안 계신데 갑자기 장례가 난 것입니다.
한우리 젊은이들과 임진각과 땅굴 순례가 잡혀 있었지만 이 미사를 주례하고 합류하였습니다.
저의 어머니 나이에 돌아가셨는데 40년 이상을 홀로 사셨습니다.
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분이셨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된 것은 야쿠르트입니다.
당신 집에 온 사람들을 절대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한 결 같이 야쿠르트를 꼭 대접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할머니에게 야쿠르트는 가히 성체와 성혈의 성사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진실하게 만나게 한 것이어서일 것입니다.
저를 반성했습니다.
저는 참으로 많은 일을 도모하고 따라서 많은 사람을 만나며 많은 사람과 함께 일을 합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회의를 같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일이 아니고 사람 대 사람으로만 만나는 것은 드뭅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이 농담 삼아 가끔 얘기하듯 회의(會議)에 회의적(懷疑的)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과 사람을 위한 일이 되게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사람을 위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과 사람을 아무 것 없어도 만나는 것입니다.
굳이 뭐가 필요하다면 야쿠르트 하나 정도만 있어도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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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얼마 전 새벽을 열며 묵상 글에 자전거 분실 이야기를 썼던 것 기억나십니까? 따라서 아쉬워도 자전거를 사야 할 것 같아서 서울로 자전거를 사러 갔지요. 어차피 사야 할 자전거라면 잃어버린 자전거에 대한 미련을 갖기 보다는 얼른 사는 것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두 군데 매장을 다녀오기로 결정했습니다. 먼저 목동에 있는 매장으로 이동했습니다. 그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주인이 친절하게 맞이해주십니다. 자기가 하고 있었던 일도 있었는데, 바로 옆에 서서 자전거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더군요. 친절한 주인 덕분에 자전거를 많이 둘러보았고, 또 많이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곧바로 이 매장에서 자전거를 구입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 매장은 그냥 구경만 하기 위해서 잠시 들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겠다는 말씀을 드리고는 원래 구입하려고 마음먹었던 강남의 압구정동에 있는 매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을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자전거가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가격이 꽤 적당했거든요. 사은품도 많고…….
그런데 사람 일이란 잘 모른다고, 결국 자전거를 구입한 곳은 두 번째 매장이 아니라 첫 번째 매장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전거를 사겠다는 마음으로 두 번째 매장에 들렸지만, 종업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아는 체도 하지 않더군요. 그렇다고 이 종업원이 노느라 바빠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매장 안에서 열심히 일하고는 있었지만, 찾아온 손님에게 별 관심을 갖지 않으니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르기가 싫어졌습니다.
결국 자전거는 구경만 하기로 했던 첫 번째 매장에서 구입했습니다. 자기가 하고 있던 일보다도 먼저 손님을 맞이했던 모습 때문이었지요.
사실 자전거 매장의 주목적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전거를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손님이 와도 자기 바쁘다고 맞이하지 않는다면 원래의 목적을 충족시킬 수가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우리들이 잘 아는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마르타는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열심히 시중을 듭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만을 듣고 있지요. 이 모습을 떠올리면 마르타는 부지런히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고, 마리아는 언니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예수님을 독차지 하려는 게으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예수님을 만나는 주목적은 함께 하고 이야기를 듣기 위한 것이지요. 단순히 음식을 드리고 시중을 들기 위한 것이 예수님 만나는 주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치 자전거 매장에서 주목적이자전거 판매인 것처럼 예수님 만나는 주목적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주목적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가장 좋은 몫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친절합시다.
당신의 가격은?(박성철, ‘희망도토리’ 중에서)
젊고 유망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직할 회사를 찾아다녔습니다.
얼마 후 적당한 회사를 발견하고 입사 원서를 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입사 원서를 작성할 때가 되자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과연 내가 합격할 수 있을까? 얼마나 쟁쟁한 인재들이 모이는 곳인데, 아마 난 안될 거야!'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자신이 원하고, 자신의 적성에 꼭 맞는 회사였지만 그는 '안 될 거야'라는 생각으로 마지못해 그 회사에 입사 원서를 넣었습니다.
입사 시험을 치르는 날, 전부 50문제 중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당신 스스로를 상품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산은 당신의 가격을 얼마로 매기겠습니까?'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충 답안을 적고 시험장을 나왔습니다. 회사를 나온 젊은이는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그 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49문제를 모두 완벽하게 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발표 날, 하지만 합격자 명단에 그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는 화가 나 시험 채점자를 찾아갔습니다.
"도대체 내가 떨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문제를 완벽하게 맞혔다고요."
"네. 그렇군요. 그런데 제일 중요한 문제에서 당신은 최하의 점수를 받았군요. 당신은 당신의 가격을 너무도 낮게 매겨 두었습니다. 당신 자신이 당신을 하찮은 가격으로 생각하는데 우리 회사가 당신을 어떻게 비싸게 값을 매길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것. 그것은 당신에게 가장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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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한 주일 중에서 유일하게 쉬는 월요일입니다. 사실 9월이 워낙 바빴었기 때문에, 10월의 첫째 주 월요일인 어제는 저를 위해서 쓰겠다고 다짐하면서 좋아하는 여행을 좀 다녀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9월에 이어서 10월에도 역시 바쁜 일정이 저에게 다가왔네요. 강의도 몇 군데 있고, 써야 할 원고도 몇 개 있습니다. 또한 본당의 행사 준비도 만만치가 않네요. 그러다보니 저를 위해 쓰겠다고 생각했던 어제, 저는 역시 집에 있으면서 열심히 강의 준비와 원고 작성에 몰입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니 조금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이번 주도 쉬지 못하고 또 바쁘게 지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억울하기까지 하네요.
사실 일이 적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히 줄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제가 일을 만들었고 제가 스스로 바쁜 일정 속에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쁘다보니 여유 있는 삶도 살지 못하고, 때로는 기도 속에서도 해야 할 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바쁜 것이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내가 이 세상에서 필요하다는 증거가 되니까요. 그러나 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일의 노예가 됨으로 인해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어떠한 것이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예수님의 방문으로 인해서 시중드는 일로 무척이나 분주한 마르타, 그러나 동생인 마리아는 그저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만을 듣고 있을 뿐이지요. 자기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반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마리아가 무척이나 얄미웠을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마리아는 해도 해도 너무해. 자기만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듣고 싶나? 나도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듣고 싶다고……. 그러나 저렇게 훌륭하신 분을 불편하게 할 수 없지 않아? 당연히 시중들어야지. 그런데 마리아가 조금만 도와주면,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래서 참다 참다 못한 마르타가 결국은 예수님께 다가가 말하지요.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사는 바쁜 생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며 사는 것이 가장 필요하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있나요?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야 말로 가장 좋은 몫임을 잊지 마십시오.
계획을 위해 쏟은 한 시간은 실행에 옮겼을 때 서너 시간을 절약시켜 준다.(크로포드 그린왈트)
빈민가로 돌아간 인기 가수
필리핀의 국민 가수 프레디 아길라. 그는 ‘아낙(아들)’이라는 노래로 인기를 끌면서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아길라는 미국으로 진출해 마이클 잭슨 같은 내로라하는 가수들 사이에서 빌보드 차트 5위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필리핀으로 되돌아와 한 빈민가에 정착한 뒤 주민들과 어울려 살기 시작했다. 그가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곳은 문밖에 나서면 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사는 곳에서는 문밖에 나와도 어찌 된 일인지 사람 구경을 할 수가 없어요.”
아길라는 빈민가에는 사람 사는 맛이 있고 그로부터 생생한 음악적 영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화재로 동네 학교가 불타 없어지자 아길라는 자신의 집을 학교로 사용하게 했으며, 2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학교 운영을 돕고 있다. 교육을 못 받는 아이들이 빈민층이 되어 사회문제를 일으키면 지금보다 많은 돈을 들여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길라는 한창 인기를 누릴 때, 필리핀에서는 독재자 마르코스의 횡포가 극에 달했다. 결국 필리핀 민주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아길라 역시 자신의 노래를 무기 삼아 적극 참여했다. 이후 아길라는 필리핀 민중의 삶을 대변하는 국민 가수로 자리매김했다. 갈등의 시간은 지났지만 아길라의 노래는 여전히 필리핀 사람들의 삶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있다.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손님접대로 분주한 언니 마르타(활동가)보다 예수님 말씀에 더 관심이 많은 마리아(관상가)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관상한다는 것, 무엇이겠습니까?
관상이란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내 존재 전체를 맡기는 일입니다. 관상이란 내 영혼의 닻을 가장 안전한 포구인 예수님께로 내려놓는 일입니다. 관상이란 내 안에 숨겨져 있는 가장 값진 보물인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삶 전체를 관상기도에 매진하기 위해 높고 높은 봉쇄수도원 담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은둔은 단순한 은둔이 아닙니다. 그들이 은둔은 칩거나 고립, 사회와의 단절을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자신을 찾으려면 네 자신을 모두 버려라-는 하느님의 음성에 따라 스스로를 가둔 은둔, 세상과의 더욱 충만한 친교 속에 살기 위한 은둔입니다.
그들은 보다 관상에 충실하기 위해 삶을 극도로 단순화시킵니다. 끊임없는 가지치기로 단순화된 삶을 또 다시 단순화시킵니다. 결국 그들 앞에 남는 것은 침묵과 고요와 하느님, 그리고 나입니다.
이런 그들 앞에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그 한 가지만이 나를 충만케 합니다. 그 한 가지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 한 가지만이 나를 하느님의 모상대로 재창조합니다. 결국 그 한 가지만이 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들은 참 좋은 몫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관상은 결코 봉쇄수도자들만의 전유물이 절대로 아니지요. 관상생활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물론 제대로 된 관상기도를 위해서는 분위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 대 침묵 속에 관상기도는 더욱 효과를 발휘하겠지요.
그러나 관상기도를 위해 환경이 꼭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란스런 시장 한 가운데서도, 분주한 직장생활 속에서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삶의 현장 속에서도 관상기도는 가능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장소를 불문하고 하느님 말씀에 대해 진지하게 몰입할 때, 어디에 서 있든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찬미할 때,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고 기뻐할 때 우리는 진정 관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끄러운 세상 한 가운데서 살아가면서 자주 관상하는 습관을 들여야겠습니다. 삐걱거리는 세상 한 가운데를 살아가면서도 침묵과 고요를 사랑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내가 고요함 가운데 살도록, 내가 관상생활에 맛들이도록 부름 받은 것은 어쩌면 다른 이들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을 더욱 분명하게 식별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관상과 친교는 맞물려 돌아가는 두 개의 톱니바퀴와 같습니다. 관상생활을 잘 하면 할수록 그 결과 이웃들과의 친교가 원활합니다.이웃과의 친교가 원활한 사람은 관상기도에 더욱 충실합니다.
관상생활에 충실한 사람들은 나와 남의 경계를 쉽게 허물어트립니다. 관상생활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있어 이웃들의 고통이 곧 내 고통이요, 이웃들의 멍에가 곧 내 멍에입니다.
선택 속의 우리
이요한 신부님
사랑의 실천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자선과 봉사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일치 없이 이루어지는 이런 행위는 자칫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 한 가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지랖이 넓다는 말이 있습니다. ‘쓸데없이 지나치게 아무 일에나 참견하는 면이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관용구이지요. 교회 일이나 각종 봉사나 자선에 열심히 부지런히 나서지만 그것이 오지랖이 넓은 일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열심히 행한 각종 자선과 봉사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한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투정에 대해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선택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택 속에서 한 가지를 고르는 기준은 하느님의 뜻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가지길 바라십니다.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지요. 따라서 우리는 순명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자유 의지로 선택하는 ‘하느님 뜻에 순명’?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완전한 자유로 이끌어 주는 선택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많은 선택 속에서 올바른 선택, 하느님 뜻에 일치하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꼭 필요한 단 한 가지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리를 깨우친 사람단순해집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계명 중에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는 단 한 가지의 계명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우리가 닦아야 할 수많은 덕들 중 가장 중요한 덕 세 가지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며 셋째도 겸손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어떤 분야든 전문가들이 배우는 초짜들에게 가장 많이 쓰는 말은 아마도, “이것만 잘하면 돼.”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엇을 하든, 가장 중요한 단 한 가지를 찾아내고 그것만은 양보하지 않고 해내려고 노력합니다.
신학교 들어오면서 사제가 되어 주님의 괜찮은 일꾼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단 한 가지가 무엇일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지만 붙어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는 성경 구절이 깊이 다가와, ‘아! 결국 예수님 곁에 붙어있기만 하면, 즉 기도하기만 하면 저절로 많은 열매가 맺어지게 되는구나!’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기도에 목숨 걸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기도만 하면 모든 일이 다 잘 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도만 하면 다 잘 돼.’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제가 되니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주었던 가장 많은 처방은 매일 한 시간씩의 성체조배였습니다. 사실 이것으로 해결된 일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한 자매님은 남편이 바람을 펴서 여자와 함께 다른 나라로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자살을 하고 싶었지만 자녀들 때문에 자살도 못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런 분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함께 기도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자매님께 남편이 돌아오면 용서할 마음부터 갖고 매일 성체조배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자매님은 정말 저의 말을 잘 따랐고 신기하게도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사람이 일주일 뒤에 돌아와서 용서를 청했다고 합니다. 자매는 그 남편을 용서하였고 둘은 다시 예전처럼 성당에 함께 열심히 다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떤 일을 하려하는 것보다 주님께 의탁하는 것이 더 큰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가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위해서 외적인 일을 하는 마르타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그분과 그분 말씀에 머무는 기도의 삶을 사는 마리아와의 대비를 보여줍니다.
수도회도 활동을 위주로 하는 활동 수도회와 활동보다는 기도를 위주로 하는 관상수도회가 있습니다. 활동 수도회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는 수녀님들이고 관상 수도회는 일반적으로 봉쇄수도원을 일컫습니다. 그러나 사실 기도 안 하는 활동 수도회도 없고 일 안 하는 관상 수도회도 없습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관상과 활동이 적절하게 조화되는 삶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더라도 예수님은 일보다는 기도에 손을 들어주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활동 없는 기도는 있을 수 있어도 기도 없는 활동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 때에 하느님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낸 열매들을 가지고 가게 됩니다. 그런데 포도열매가 열리기 위해서 가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겠습니까? 다만 포도나무에 머물러있기만 하면 열매는 저절로 열립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기를 지나치게 원하다보면 나무에서 떨어져나가 결국 자신마저 말라버리게 됩니다.
마리아도 성녀이고 마르타도 성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 외에는 신경 쓸 것이 따로 없다고 마르타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라고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필요한 단 한 가지는 예수님 발치에서 그 분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단 한 가지라 말씀해 주신 이 ‘말씀의 묵상’을 절대 잊지 않도록 합시다. 그러면 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가 밥 먹여 주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기도가 밥 먹여 주냐?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서 많이 듣는 말입니다.
또 어떤 때는 우리가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신세 편하게 기도만 하는 형제들을 보면 우리가 속으로 꿍시렁 대는 말이고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가 하는 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도가 밥 먹여 주냐고 말 하는데 그러면 기도 안 하면 밥이 생길까요?
저는 기도 안 하면 밥이 안 생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의 무전 순례 경험에서 밥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여러 번 체험하였습니다.
무전 순례를 떠나면 먹고 자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자는 것은 어떻게 노력을 하면 자리를 찾을 수 있는데 먹는 것은 훔쳐 먹지 않는 한 누가 주어야 먹을 수 있고 따라서 어떻게 해야 얻어먹을 수 있는지 연구를 해야 합니다.
하여 많은 망설임과 연구 끝에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지만 대부분 보기 좋게 실패를 합니다.
그러다 ‘오늘은 굶었군!’ 하고 포기를 하는 순간 뜻하지 않게 얻어먹게 됩니다.
북한 일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적인 노력과 설득으로 안 되던 것들이 뜻하지 않게 그리고 전혀 예상치도 않은 방식으로 해결이 되고, 기대하던 도움은 받지 못하는 대신 전혀 알지도 못하던 도움의 손길이 답지하는 것이 비일비재합니다.
제가 무얼 하려고 아등바등하기보다 기도에 매달리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정말 아무 노력도 안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아는 까마귀가 먹을 것을 날아다 주었다지만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 은총을 제쳐놓고 하는 것이 아닐 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청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고 꼭 필요한 것은 한 가지라고 하셨을 때의 그 기도는 주님 발치에 머무는 것입니다.
기도는 busyness가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거래 상담이 아니라 사랑에 머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요구하면 이미 사랑이 아니고 요구인 것처럼 기도도 무엇을 요구하여 얻는 것이면 기도가 아니라 요구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요구를 들어주시지만......
기도가 Busyness가 아니고 사랑도 Busyness가 아니지만 사랑은 단지 곁에 머물음만도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 사랑 때문에 무엇을 할 때는 반드시 순서가 있습니다.
기도하고 일해야 합니다.
베네딕도 성인께서 Ora et Labora라고 말씀하셨는데 기도도 하고 일도 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기도 먼저 하고 일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십니다.
왜냐하면
기도하지 않고 일하면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자기 일을 하기 때문이고,
기도하지 않고 일하면 세상일은 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아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고 하느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아 일을 하는 사람들이며 하느님께로부터 능력을 받아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마르타의 불평, 마리아의 침묵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986년 여름, 대학교 3학년 때 경상북도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열리는 '마오로 축제'라는 성소 피정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교구 사제 성소에 대해서는 생각을 했었지만, 수도 성소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던 제가 본당 수녀님의 추천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죠.
피정 일정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성소 담당 신부님과의 개별 면담, 수도원 일과 시간에 맞춰 새벽부터 밤까지 같이 기도하는 것, 수도원 곳곳(농장, 목공실, 출판사...)을 견학하는 것 등이었죠.
2박 3일의 일정 중에서 둘째 날 밤에 수사님들과 피정자들 간의 다과회를 겸해서 만남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수사님들의 생활에 대해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자리가 무르익어 갈 무렵, 수사님들께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물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제가 참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대충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천국 같았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가 지닌 사귐과 섬김과 나눔의 아름다운 전통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내 것 네 것 없이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모습이 너무나도 인상적입니다. 특별히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사회에 찌든 제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물음이 생깁니다. 지금 밖에서는 독재 정권에 맞서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데,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려고 온 몸을 바쳐 투쟁하고 있는데, 과연 수사님들께서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수사님들 자신은 아름다운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 계시지만, 밖에 있는 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조금은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이었죠.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지는 듯 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수사님 한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는 기도를 합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함께 합니다. 기도로써 함께 합니다..."
당시 대학생으로서, 교회 청년으로서 나름대로 현실 참여를 하고 있던 저는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곱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더 이상 말을 이어가면 분위기가 영 엉망이 되겠다싶어 입을 다물었지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래요. 수사님들은 이곳에서 편안게 지내면서 기도 열심히 하십시오. 그런다고 뭐가 됩니까? 지금은 함께 어깨 걸고 싸워야 할 때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주님의 일입니다. 저는 열심히 싸울 것입니다....."
몇 마디의 말이 더 오고 갔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가 삼가하면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습니다.
15년이 지난 지금, 수사님의 말씀을 이해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 수사님의 몫이 있고, 제 몫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각기 고유하게 주어진 주님의 달란트를 가지고 살아가면서 자신의 몫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몫이 최고인양 저에게 강요할 수 없듯이 저 역시 저의 몫만을 최고로 여기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각기 자신의 몫을 가지고 주님 섬기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배고픈 주님을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하는 마르타의 모습에서, 주님 발치에 않아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주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믿는 이들의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하나의 아쉬움이 있다면, 마르타가 자신의 몫을 동생 마리아에게 강요하지 않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일을 결코 하찮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의 시중을 들지 않았다면 누가 그 일을 대신할 수 있었겠습니까?
마르타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리아야! 내가 지금 예수님의 시중을 들기 때문에 말씀을 들을 여유가 없구나. 잘 들어 놓았다가 나중에 나에게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이야기 해주겠니.나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구나."라고 말입니다.
활동과 관상!
믿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두가지 몫입니다. 어느 것에도 소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를 모두 완전히 수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개인의 달란트, 소질, 관심 등 여러가지 이유로 어느 하나에 좀 더 비중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따르는 길에서 자신의 몫일 것입니다. 이 몫에 충실하면 됩니다. 자신과 다른 입장에 서있는 사람을 자신에 맞출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맞추어서 안됩니다.
저에게 주어진 몫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제 자신을 볼 때 시중드는 마르타의 몫이 저의 몫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동생을 곱지 않는 눈으로 보는 마르타의 불평보다, 언니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몫에 최선을 다하는 마리아의 침묵을 배우고 싶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일의 기도화, 삶의 기도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매일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사제나 수도자들의 삶 역시 격무에 시달려 고달플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새벽미사를 드리고 있는 중에 진동이 옵니다. 그 순간 "아차!"합니다. 제의방에서 음성 메시지를 확인해보면 아니나 다를까 미사를 빵구낸 것입니다. "앞으로는 메모를 잘해야지" 하면서 부랴부랴 차를 몰고 다른 곳으로 갑니다. 백배 사죄하는 마음으로 또 한번의 미사를 드립니다.
출근하는 차량이 많아지기 전에 바로 돌아와야지요. 또 하루를 열심히 뛰려면 아침은 빼먹지 말아야 됩니다. 주어진 공동 기도 시간 빼먹지 않는 것만 해도 정말 다행입니다. 별로 영양가 없어 보이는 회의들이나 스케줄들이 줄지어 서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신문은 꼭 봐야되고, 아홉 시 뉴스도 봐야 합니다. 축구시합 빅매치는 보지 않고는 밤잠을 못 이루니 또 봐야지요. 그뿐인가 하면 축구 뛰어야지 정말 바쁩니다.
솔직히 말해서 기도할 시간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가끔씩 피정강의라도 하러 갈 때면 눈을 반짝이며 앉아 계시는 신자들 앞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괜히 바쁜 척 하며 돌아다니며 제대로 성체 앞에 앉아보지도 못하는 제가 속보이게도 신자들에게 "이런 기도가 진짜다. 기도는 이렇게 해야된다"고 외쳐대니 참으로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활동과 기도의 조화, 그것은 제게 있어 하나의 숙제입니다. 저희 살레시오회를 비롯한 모든 활동 수도자들이 안고 있는 과제이기도 하지요.
여기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결책을 제시한 분이 바로 저희 사부이신 돈보스코였습니다. 돈보스코 역시 수많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또 수많은 남녀 살레시오회 수도자들을 양성시키기 위해서 정신없이 바빴던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자신이 창립한 남녀 수도회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분초를 나누어 써야 할만큼 바쁜 분주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돈보스코는 아이들과의 만남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식사시간에 아이들을 자신의 식탁 옆에 앉혔습니다.
그토록 바빴던 사람, 돈보스코가 그럼 과연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물론 돈보스코는 최대한 기도할 시간을 찾았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돈보스코는 틈만 나면 성체 앞에 앉으셨습니다. 틈만 나면 하느님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매일 산더미처럼 밀려드는 일들로 인해 돈보스코에게 기도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돈보스코의 노력이 바로 "일의 기도화", "삶의 기도화"였습니다. 돈보스코를 직접 목격하고 대화를 나누었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진술을 했습니다. "돈보스코에게 있어 일은 곧 기도였습니다. 돈보스코의 삶 전체는 곧 기도였습니다."
돈보스코가 아이들 가운데 있을 때나, 후원자들을 만날 때나, 자신의 사업을 계승할 수도자들에게 강의를 할 때나, 뭔가에 몰두해서 열심히 일할 때에나 언제고 기도와 함께 그 모든 것을 행하고 있음을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기도는 참으로 광범위한 그 무엇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것 좀 잘 되도록 해주십시오"하고 청하는 청원기도만이 기도의 전부가 아닙니다.
기도는 한 인간이 자신이 처한 지금의 상황을 하느님 앞에 자유롭고 정직하게 털어놓는 것입니다. 가슴 깊숙이 자리한 갖가지 분노,근심, 고통, 기쁨, 환희와 같은 모든 감정들을 가감 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애써 그럴듯한 언어로 포장하거나 겉꾸미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기도, 삶의 모든 국면들을 하느님께로 연결시키려는 기도가 참된 기도입니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숨기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때로 울부짖고 때로 환희에 찬 감사를 드리는 자세가 곧 기도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실제적인 삶의 체험입니다. 기꺼이 삶의 모든 문제들과 투쟁합니다. 때로 하느님에게 불평하고 대듭니다. 때로 "내가 하느님 당신 때문에 얼마나 힘겹게 싸우고 있는가"를 말씀드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나와 하느님을 항상 연결시키고 싶은 욕구의 분출입니다. 우리 삶의 매 순간 모든 국면들을 하느님과 관련지으려는 열망이 곧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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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음악에 관련된 것 같지요? 저 역시 ‘하이든’이라고 해서 오스트리아의 음악가 요제프 하이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 하이든이 아니라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에릭 하이든을 가리키는 용어라고 합니다. 에릭 하이든은 한 대회에서 무려 다섯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입니다.
내가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라고 생각해보세요. 금메달을 독식하는 에릭 하이든과의 경기를 피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자신보다 실력이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과는 경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 ‘하이든 효과’인가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반대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1980년을 전후해서 국제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은 오히려 모두 다 하이든과 함께 경기를 하겠다고 신청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와 함께 경기를 치러 자신의 최고 기록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이든 효과입니다. 닮고 싶은 사람, 존경하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다보면 자기도 그처럼 최고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이 하이든 효과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닮고 싶은 분, 정말로 존경하는 분이 있어야 할 텐데요. 누구를 내 삶에 있어서 가장 닮고 싶은 분,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삼겠습니까? 바로 주님을 그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도 고통의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지신 분. 우리가 어떤 죄를 짓더라도 다시금 기회를 주시면서 끊임없이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 따라서 세상의 것들을 나의 첫 번째 자리에 위치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신 주님을 나의 첫 번째 자리에 모셔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따르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닮으려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앞선 하이든 효과를 본 선수들이 과연 하이든과 단순히 경기를 했다고 해서 좋은 성적을 얻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이든을 존경하고 그를 조금이라도 더 닮으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입으로만 주님을 닮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것들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나의 시선을 끊어버리고, 이제는 주님께 모든 시선을 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접대 때문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르타를 칭찬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기만 하는 마리아를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필요한 것은 딱 한 가지뿐이라고 하십니다. 그 한 가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 말씀을 듣고 주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내 자신을 발전시키는 하이든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분주하게 살지 맙시다.
자신의 눈으로 보라('좋은생각' 중에서)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다. 핫산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남부럽지 않은 재산과 권력을 지녔지만 삶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현자 랍비를 찾아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런데 스승이 보기에는 아직도 그가 속세의 오만함을 그대로 갖고 있는 듯했다.
"핫산아, 시장에 가서 양 내장을 사서 등에 메고 오너라."
그는 즉시 마을에 있는 시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내장을 사서 어깨에 둘러멘 순간 옷이 온통 얼룩 범벅이 되었다. 그런 꼴로 마을을 가로질러 사원에 가자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한 모욕감이 들었다. 힘겹게 사원에 도착한 그를 보고 스승은 또 다른 주문을 했다.
"당장 정육점에 가서 큰 냄비를 빌려 오너라."
그는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키는 스승이 못마땅했다. 무엇보다 그런 차림으로 마을에 또 내려가기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는 꾹 참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을 정육점에 가서 냄비를 빌려 왔다.
"핫산아, 한 번 더 시장에 내려가 사람들에게 물어봐라. 혹시 등에 내장을 지고 가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 큰 냄비를 든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 말이다."
그가 시장에 가서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니 사람들은 잘 모르겠다거나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이제 알겠느냐? 너는 사람들이 네 모습을 보고 비웃을까 봐 염려하지만 사람들은 정작 너를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오로지 남의 시선을 대신하여 네가 스스로를 비웃었을 뿐이다. 앞으로는 남의 시선으로 보지 말고 너 자신의 눈으로 보도록 해라."
저녁이 되자 스승은 큰 잔치를 열고 제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말했다.
"자, 맘껏 먹어라. 이것은 핫산의 자존심과 명예로 만든 수프다."
영성생활의 기초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의 영성생활은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베네딕도회 규칙서도 ‘들어라’(obsculta)로 시작되며 예언자들이 수없이 반복하는 말씀도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우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면 활동은 자연스레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저희 베네딕도회의 모토 역시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듣고 있는 마리아는 영성생활의 모범이 됩니다.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음에서 시작되며 서로간의 대화도 상대방의 말을 잘 들음에서 이뤄질 수 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 역시 들음에 이어 묵상이, 묵상에 이어 기도가, 기도에 이어 관상의 순서로 전개됩니다.
과연 얼마나 마음의 귀를 기울여 잘 듣는지요? 잘 듣기 위해 전제되는 게 침묵입니다. 잘 들어야 순종과 겸손의 덕도 뒤따릅니다.
그러니 평생 삶의 배움터에서 끊임없이 배워가는 학인들인 우리의 기본 자세는 매사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김경숙 수녀님
“성령이 충만한 마리아는 기도의 몫을 택했습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랑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묵상을 통하여 자신의 정신을 예수께 봉헌하고 관상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기도를 필요한 것이라 하시고 좋은 몫이라 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루카 복음사가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와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를 나란히 연결시킵니다. 우리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남에게 봉사하려면 먼저 마리아의 기도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창설자 신부님의 훈시 말씀이다. 봉사 활동에 너무 분주한 나머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 위에서 유유히 떠다니며 먹이를 찾는 물오리는 참 평화롭고 고요하게 보이지요? 그러나 물속에서 얼마나 바쁘고 정신없이 다리를 움직이는지 모릅니다. 기도할 때 우리 마음이 오리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인 마리아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언젠가 소풍 갔을 때 물오리를 보면서 하신 창설자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표중관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언니인 마르타는 예수님의 식사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동생인 마리아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으니 조금은 화가 나서 예수님께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여인, 마르타와 마리아는 활동가와 관상가의 모범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예수님께 식사 대접은 당연하고 지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손님으로 모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예수님 홀로 방 안에 계시고, 두 자매가 식사 준비에만 정신이 없다면 얼마나 예수님께서 쓸쓸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집에 오신 이유는 두 자매와 정담을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장4절]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 존재의 의미이며, 목표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마음과 마음, 혼과 혼이 통해야 살 수 있듯이,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소통이 없다면 무슨 의미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에게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장4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시중드는 일을 나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의 몫을 빼앗으려고 하는 마르타에게 마리아의 몫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생전에 ‘살아있는 성녀’라는 칭송을 들었던 고 마더 데레사 수녀는 ‘관상에서 넘쳐 흘러나온 것이 활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기도하고 활동하였습니다. 그녀에겐 기도와 일이 하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활동하는 사제, 수도자, 평신도는 많은데 기도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느님과의 만남이며 대화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호흡하는 숨결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없는 삶은 생기 없는 삶이며, 메마른 삶에 불과합니다. 기도를 잃어버린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그곳은 생명력이 없는 곳이며, 삭막한 사막과 같은 곳입니다.
오늘날 냉담자가 많은 이유도 교회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도 활동에만 치우치고 기도의 삶이 부족한 때문이 아닐까요? ‘활동이 기도를 삼켜 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칫 활동에만 열중하다보면 기도는 점점 하기 싫고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한다면서 하느님은 잊어버린 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때로는 자신이 이룰 수없는 일까지도 설계하고 밀고 나가면서 한없이 쫓기게 되고, 설계한 것을 이루지 못해서 초조해하고 실망하고 좌절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 속엔 허무함과 공허함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 없는 나는 누구입니까? 기도가 없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그것은 마치 노래를 잃은 카나리아 새와 흡사한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10장4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하나 필요한 것은 하느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느님을 사랑할 때, 우리 마음속엔 기쁨과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넘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에 다시 한 번 귀기우려 봅시다. ‘ 마리아 너는 오직 하나 필요한 것, 하느님의 일이 아닌 하느님’ 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몫을 택했으니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결코 그 몫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아멘.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특별한 여인, 마르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음서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다들 특별한데, 그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인물이 한 사람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르타입니다.
마르타는 죽었다 살아난 라자로의 누이동생이며, 마리아의 언니입니다(요한 11장 1절). 예수님께서는 이 가족 구성원들과 각별한 우정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 배고플 때 가끔씩 그들의 집에 들르시곤 하였는데, 그들도 예수님을 흠모하며 따랐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향해 보여준 언행은 눈여겨볼만 합니다. 오빠 라자로가 중병에 걸렸을 때, 제발 좀 살려달라고 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늑장을 부리셨지요. 결국 오빠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장례식까지 다 치루고 난 뒤 나타나신 예수님을 향한 마르타의 질책은 아주 매섭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사가는 마르타의 비난을 아주 고상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당시 실제상황은 훨씬 신랄했을 것입니다. 마르타의 급한 성격을 참작했을 때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이제 나타나서 뭘 어쩌겠다는 거예요? 오빠 친구가 되가지고, 이래도 되는 겁니까? 다른 사람들 다 살리면서, 그래 그렇게 절친했던 우리 오빠를 그냥 죽게 놔둬요? 그동안 아귀 같은 일행들 식사 대접한다고 뼈 빠지게 일했는데, 이래도 되는 거예요?”
오늘 복음에서도 마르타는 동생 마리아 때문에 심기가 많이 불편했습니다. 다녀간 지가 몇 일 안됐는데, 또 다시 예수님과 제자 일행이 나타났습니다. 마르타는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입니다.
시간이 흘러 이제 막 식사를 대령해야할 순간이었습니다.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한 순간, 동생 마리아 생각이 났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예수님과 단둘이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르타는 소매를 단단히 걷어붙이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주님, 이거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닙니까? 저는 아침부터 쌔빠지게 고생하고 있는데, 재는 도대체 뭡니까? 이래도 되는 겁니까?”
마리아를 보고는 아마 이랬을 것입니다.
“이, 여시 같은 ☓, 너 여기서 도대체 뭐하고 있어? 좋은 말 할 때 당장 부엌으로 안 나와?”
예수님을 향해 겁도 없이 질책을 서슴지 않는 여인 마르타,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가족 같은 관계, 오빠 동생 같은 관계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마음껏 분노를 표출할 줄 아는 마르타를 보면서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느님을 너무나 큰 대상, 그래서 감히 범접하기 힘든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싫을 때는 있는 그대로 싫다고 소리칠 줄 아는 마르타, 힘들 때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그분께 털어놓을 수 용기를 지닌 마르타였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과 절친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친한 오빠에게 하듯이 졸라대기도 많이 했습니다. 예수님을 각별히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마르타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청하십니다. 성실한 봉사활동도 좋지만 영성생활,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그를 통한 영혼의 구원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부탁하십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
교회를 위해, 주님을 위해 열렬한 봉사활동도 좋지만 그 봉사의 목적, 정신을 먼저 생각해보라는 말씀입니다. 눈앞의 일도 중요하겠지만, 더 멀리 내다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보다 궁극적인 일, 영혼을 위한 일에 더 우선적 투자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제2차적인 일, 주변적인 일, 부수적인 일,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에 기를 쓰고 몰두하느라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장 신경 써야 할 중요한 일, 정말 좋은 몫인 하느님, 영적생활은 뒷전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활동지상주의는 신앙인으로서 경계해야할 대상입니다. 봉사활동에 앞서 짧게나마 기도로 시작하려는 노력, 봉사활동이 끝나는 동시에 주모경이라도 한번 바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묵상이라는 토대 위에,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라는 배경 위에 봉사활동이 이루어져야 그게 바람직한 것입니다.
좋은 파트너
이정희
오늘 복음 말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언제나 친절하고 극진해서 즐겨 그의 집을 찾곤 했다. 친구들과 그 집에 가면 작은 텃밭에서 가꾼 야채와 맛있는 된장찌개 등 늘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었고, 가진 것을 모두 내놓고 우리를 대접해 주었다. 그러나 주인인 친구는 몹시 분주했고, 그런 친구에게 자리에 앉기를 청하면서 오늘 복음 말씀을 이야기하곤 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우선 구해야 할 ‘필요한 것 한 가지’를 놓쳐서 예수께서 꾸중을 듣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복음을 같이 보면 마리아와 마르타 모두 ‘참 좋은 몫’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알다시피 마리아와 마르타는 죽은 라자로의 동생들이다. 그들의 집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인 베다니아에 있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 자주 들러 쉬어가던 곳이었다. 전도여행과 많은 사람들의 요청으로 지친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 편히 쉬도록 한 마르타의 배려에 대해 예수님은 고마워하셨을 것이다. 마르타는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를 믿는냐?”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요한 11,27)라고 놀라운 신앙고백을 한다. 또 마리아는 예수님의 머리에 값진 나르드 향유를 부어드린 적이 있었다. 이를 본 제자들이 가난한 사람 운운하면서 쓸데없는 데 돈을 낭비한다고 볼멘소리를 하자 예수께서는 “나의 장례식을 위한 것이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의 여정을 알고 고난의 시간을 준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사랑했던 마르타와 마리아는 아주 좋은 파트너였다. 마르타는 마음이 급해서 뛰어나와 우리를 맞으시던 내 외할머니처럼 쫓아나와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한 반면 마리아는 집안에서 맞이했다. 마리아에게 마르타는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좋은 안내자였을 것이다.
나는 매일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관심사를 쫓아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곤 한다. 내가 왜 이렇게 정신없이 하루를 사는지 생각해 보지만 ‘더 중요한 몫’을 위해 중심을 잡는 게 쉽지 않다. 내 안에는 마르타와 마리아가 공존한다. 그래서 주어진 일을 다 하면서도 주님의 발치에서 말씀에 귀기울이던 마리아가 내 안에서 힘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하루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한다.
김기홍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우리는 너무나 잘 알려진 예수님과 두 자매와의 만남, 즉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를 들여줍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형성은 만남의 형태에 따라 자우됩니다. 예를 들어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운동을 통해서 서로 만남의 관계를 형성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영화관에서,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가가 좋아하는 음식점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해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음식상을 맞대고 예수님과 만남의 시간을 갖고자 부지런히 음식을 장만합니다. 한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들으면서, 즉 말씀의 식탁에서 그분과의 만남의 시간을 보냅니다. 두장면 모두 아름다운 장면이다고 봅니다. 그런데 마르타가 불평을 하자. 다시말해서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루카 10, 40)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루카 10, 41-42)
「실상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 말씀은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핵심 질문니며 메시지라고 봅니다. 신앙생활에서 그분과의 관계를 잘 형성하기 위해 어떤 만남을 만들 것인가? 그 만남을 위해 나는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주님과의 만남과 일치를 위해 교회의 사목활동과 신심생활을 합니다. 이런 생활에서 우리는 어디에, 무엇에 더 비중을 두고 하는지? 다시말해서 진정 주님과의 만남, 일치에 초점을 두는지?를 반성하고 정검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분은 마르타의 행동을 활동적인 봉사생활이라 하고, 마리아의 행동은 관상적인 신심생활이라고 말하면서, 서로 비교하여 말하기를 예수님은 활동보다 명상과 기도를 좋아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관상생활이든 활동적인 봉사생활이든 간에 그 안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주인이 되시어 자리잡고 계신가? 그분을 그 안에서 만나는가?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주님의 발치에 앉아 있듯이 감실 앞에서 기도와 묵상을 하드라도 내 기도와 내 생각에 사로 잡혀 있다면 예수님을 모르는 비신자들이 자기의 소원만을 비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예를 들어 “하느님! 우리 집 아이를 축복하시여 금년 수능시험을 잘 치르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저의 장부도 축복하시여 이번에 회사에서 과장으로 진급하게 해주소서. 진급만 시켜주시면 교무금 잘 내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과 이와는 달리 “하느님, 오늘 하루 저에게 허락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특히 제 딸을 보살펴 주십시요. 자기만 아는 천방지축입니다. 보다 남을 생각할줄 아는 당신의 딸이 되게 하시고 어떤 행동을 하든지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오늘 하루카 저와 제 딸에게는 기쁨이 되고 당신께는 찬미와 영광이 되게하소서. 아멘.”
앞의 기도는 자기와 자기안에 있는 사람과 자기 소원만 기원했지,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는 주님을 배제한 나만의 독백인것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기도는 감사와 봉헌의 기도와 함께 하루를 주님의 뜻안에 살려고 기원하고 주님의 도움을 청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역시 본당에서 하는 사목활동, 신심활동, 사도직 활동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다만 활동에만 몰입한다면 자짓하면 세속적인 것에 치우쳐 하나의 출세 방편으로, 어떤경우는 나를 들어내는 간판으로, 어떤 경우는 나의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환으로 전락시킬것입니다. 더나아가 이웃사랑의 실천마져 하나의 일로 전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봉사활동을 통해 주님을 만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만나지 못하는 불행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분들은 오래동안 본당에서 사목위원이나 신심단체의 간부급으로 일하다가도 그 직책을 그만 둔 후, 본당에서 열심한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기 힘들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관상생활이든 활동적인 사도직 생활이든간에 하느님의 말씀에 먼저 귀 기울이는 것이 우리가 먼저 해야할 일이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마르타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라고 하신 그 의미가 여기에 있지 않나? 봅시다. 활동도 중요하지만 하느님 말씀이 참 신앙의 삶에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뿌리 깊게 자리를 잡을때, 우리의 모든 행위가 마치 반석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것과 같아, 홍수나 큰물이 들이치더라도 조금도 흔들이지 않을 것이요.(루카 6, 46-48) 우리의 모든 신앙의 삶에 참된 가치가 드러나리라 생각합니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루카 10, 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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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다. 그러나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이 말을 계속 곱씹어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행복의 이유는 거의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하지만 불행의 이유는 너무나도 다양하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별 것도 아닌 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위기처럼 생각되는 불행의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성지를 방문하신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고민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분께서는 본당에서 아주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이셨는데, 활동 중에 어떤 한 형제님과의 충돌이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이 한 분과의 충돌 때문에 본당 활동을 그만 두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고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분에게 “혹시 다른 분들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니라고 하더군요. 다른 분하고는 너무나도 사이가 좋고, 자신의 활동에 대해서 적극적인 지지를 해준다고 합니다. 저는 이분에게 이런 말을 해드렸습니다.
“왜 형제님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보지 않고, 싫어하는 한 사람만을 생각하면서 괴로워하십니까? 자기를 이해해주는 한 사람의 친구로 인해서도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는데, 형제님을 믿고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서 활동을 그만둘 정도로 힘들어 하십니까? 활동 그만두는 것은 형제님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신이 아닐까요?”
어떤 사람은 딱 한 개가 부족한 것을 가지고서 ‘나는 그 한 개가 없어.’라면서 불행해 하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한 개만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도 ‘너무나 다행이야’라면서 행복해 합니다. 사실 부정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되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가 부정적인 생각으로 상대방을 본다고 해서 상대방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르타는 바로 이렇게 부정적인 것에 초점을 맞췄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하는 동생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 곁에 있는 동생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으로 예수님께 동생을 좀 나무라달라는 청까지 하고 있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런 말씀으로 마르타에게 깨우침을 주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앞서 부정적인 이유는 너무나 많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한 가지, 즉 하느님 말씀을 듣는데 모든 것을 맞춘다면 그 많은 부정적인 이유들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 자체이기에, 이 말씀으로 내 마음의 부정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비로소 우리들이 모두 원하는 행복의 마음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과연 가장 필요한 한 가지를 선택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나요? 혹시 온갖 것에 대한 걱정으로 하느님 말씀 듣는 것을 맨 뒷전에 놓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시간을 내어서 성서를 읽어봅시다.
기본에서 결정된다('좋은 생각' 중에서)
프랑스 작가 루이 페레스트는 어느 날 한 대회의 심사위원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장소가 휴양지였기 때문에 미인대회일 거라는 짐작을 하고 기대에 부풀어 대회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루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미인들이 아니라 자동차였다. 아름다운 자동차를 뽑는 대회였던 것이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근사한 자동차들이 가득했고, 루이는 마땅한 심사 기준이 없어서 고심했다.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이렇게 말했다.
"겉모습은 모두 훌륭하군요. 자, 이제 내부를 볼까요? 모두 자동차 보닛을 열어 주십시오"
느닷없는 요청에 자동차 주인들은 당황했다. 역시나 모두 근사한 외관과는 달리 내부가 지저분한 차가 대부분이었다. 루이는 순위를 아주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곧 심사에 불만을 가진 자동차 주인들이 몰려왔다.
"자동차 모터까지 심사 대상에 포함된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루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미인 대회를 열면서 참가자들에게 목욕하고 오라고 합니까? 기본적인 것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지요"
타인과 외부활동에 대한 관심, 주님 말씀의 경청, 기도와 활동
이성우
마르타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들어 있는 가르침입니다.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 다른 사람의 행동에도 관심이 쏠려 있는 마르타입니다. 마르타는 많은 일에 신경이 다 가 있습니다. 집으로 모시기 위해 청소를 하고 음식을 장만하고 마리아를 채근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르타에게 예수님은 이제는 필요한 한 가지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분주한 외부의 행동에 가 있는 마르타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라고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마르타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고 초대하십니다. 꼭 필요한 것은 무수히 많은 외부의 행동들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즉 이제는 조용히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은 몫이라고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하게 되고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주님 말씀을 충분히 들은 뒤에는 손님맞이를 하느라 분주하더라도 마음은 고요히 주님께로 향할 수 있습니다. 활동 속에서도 기도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충분히 들은 뒤에야 가능합니다. 조용히 듣는 그 시간이 없이 활동을 할 때에는 주님을 만나지 못해서 마음의 평화가 깨지고 애꿎은 마리아만 탓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어긋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마르타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느껴봅시다.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기도를 한 뒤 활동을 하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야 활동 속에서도 기도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삶이 부른 기도
홍선미
답사할 일이 있어서 강화에 있는 수도원에 다녀왔다. 봉쇄수도원과 활동수도원이 한 곳에 있었다. 수도원 경당에서 기도하는 도중에 양쪽으로 다른 세계를 체험할 수 있었다. 칸막이가 처진 오른쪽 옆에서는 봉쇄수도원 수녀님들의 낮기도 소리가 마음을 적시고, 저쪽 마당에서는 활동수도원 수녀님들이 그날 오후 피정 올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기도하면서 활동하시고, 활동 안에서 기도하시고. 마음이 평화롭고 따뜻해졌다.
내 안에도 기도하는 내가 있고, 활동하는 나의 삶이 있다. 20년 전 결혼하면서 남편의 권유로 세례를 받았다. 우선 몇 년은 미사전례에 익숙해지느라 애를 먹었고,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구역반장이 되어 본당일을 하게 되었다. 구역 식구들과 함께 시간을 나누면서 신앙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배우게 되었고 조금씩 익어갔다.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순간 자신을 돌아보니 복사단 자모회·부부독서단원·레지오마리애·성물방 봉사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뭔지 모를 목마름을 느꼈고, 다 좋은 일인데도 자꾸만 지쳐갔고 힘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 힘들었던가 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기도하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되었고 그런 기회를 만나서 내 삶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되었다. 그 의미를 깊이 모르고 했던 교회 안의 여러 활동이 나를 기도하게 만들었고 그 기도가 나 스스로를 이해하게 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포기와 나눔의 활동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기도를 불렀다. “비아야, 너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전동기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성향의 두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마르타는 아주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반면, 마리아는 상대적으로 침착하고, 오늘 복음에서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편이다. 대개 활동적인 사람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한다. 가만히 있는 것을 불안해한다. 반대로 조용한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무엇을 잘 한다. 정적인 게 마음이 편하다. 이것은 어떤 편이 좋고, 어떤 편이 나쁘다고 이야기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둘 다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사정이 좀 다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시고는, 심각하고도 찹찹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이 두 자매의 집을 들르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을 대하는 두 자매의 태도가 서로 다른 것이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이고,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셨다는 기쁨에,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대접하느라고 여념이 없고, 그래서 그의 마음과 행동은 외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동생 마리아는 그렇지 않다. 지금 이 순간, 예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고통과 죽음을 눈앞에 두신 예수님의 마음에 함께 하고자,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응답하면서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 누구의 발치에 앉는다는 말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여성인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있다는 말은, 당시로서는 상상이 안 가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당시 유다인의 풍습으로는 랍비들이 여성을 가르칠 수 없었다. 여성들은 법정에서 증언할 수도 없었고, 율법을 공부할 의무조차 없었다. 그들은 아버지나 남편에게 종속된 존재로서, 시중들고 접대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마르타가 마리아에 대해 투정내지는 비난한 것이 설득력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차별하고 굴레를 씌우고 하는 그런 관습에는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고 하시며, 음식대접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르타와 마리아를 모두 다 사랑하셨다. 그렇지만 오늘은 마르타가 그 마음이 참으로 갸륵하고 좋기는 하지만, 예수님께 보탬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되고 부담이 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기에,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비슷한 예로, 가정 방문을 할 때, 서로 이야기를 좀 나누려고 하는데, 가자마자, 사람만 혼자 앉혀 놓고, 이야기할 상대는 부엌에 들어가서 무엇을 준비한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그 정성은 대단히 고맙지만, 어떤 때는 마음이 그렇게 편치 않다는 것이다.
혼자 내버려 두지 말고, 그냥 말씀을 들어주기만 하면 좋다는 것이다.
아마, 예수께서도 수난 당하시기 전에, 평소에 사랑하시던 마르타와 마리아와 다소곳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마르타가 바깥으로 나가서 음식을 장만한다고 하니까, 그 정성은 고맙지만, 별로 기분이 나지 않으셨던 것이다.
더군다나 마르타가 혼자 준비하느라고 바쁘다고, 마리아마저 자신의 일에 투입시켜 달라고, 한마디로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홀로 있게 해달라고 하는데, 만일 그러면 예수님은 혼자서 무엇을 하시겠는가?
듣는다는 것
최영균 신부님
종종 우리는 다른 사람을 고유한 그 사람 자체로 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우리 자신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고정시켜서 바라보려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진실한 만남을 방해합니다. 예수님이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왔을 때 마르타는 즉시 시중을 들기 시작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은 먹고 편히 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반면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들으려고 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두 가지 모습입니다.
우리는 가끔 마르타처럼 다른 사람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눈을 감고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경청하지 않고 행동에 들어가곤 합니다.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실행할 수 있습니다. 들음 없는 실행은 마르타처럼 본질을 잊어버린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나의 방식이 아니라 그의 방식으로 맞아들일 때 거기에 성공적인 만남이 가능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바로 마리아가 우리에게 보여준 모범입니다.
실상 필요한 것 한 가지
강영구 신부님
+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그대에게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싸늘합니다.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체온을 따뜻하게 유지하는 것이 감기에 걸리지 않는 비결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지금’뿐이고 우리가 머물 수 있는 자리는 ‘여기’뿐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대한 회한(悔恨)과 미래에 대한 망상(妄想)으로
‘지금’을 소홀히 한다면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우리는 같은 시간에 여기 저기 머물 수 없고,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걱정과 염려, 지나친 욕심 때문에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려고 덤비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많지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여기’서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실상 우리에게 필요한 것 한 가지는 ‘지금, 여기’의 일에 충실하고 ‘지금, 여기’서 만난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여기’서 예수님과 담소하는 일에 전념합니다.
마르타는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잘 대접하기 위해서 일념으로 음식을 장만합니다.
마리아도 마르타도 다 사랑스러운 여인입니다.
당신도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一明)
관상과 활동의 적극적인 조화
박상대 신부님
어제는 우리가 루가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다. 그 가르침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고 질문하는 어떤 율법교사 스스로가 뱉어낸 대답이었다. 바로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이었던 것이다. 누가 이웃이냐는 반문에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 주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손님으로 모신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예수님에 대한 행동양식을 통하여 삶에 있어서 ‘실상 필요한 단 한 가지’를 가르쳐주는 대목이다.
요한복음에는 마리아와 마르타가 오빠인 라자로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동편 요르단강 쪽으로 3Km 지점에 위치한 베다니아에 살았다고 한다.(요한 11,1) 그런데 루가가 말하는 ‘어떤 마을’이 베다니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예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중이긴 하지만, 복음의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아직 예리고 근처에도 이르지 못하셨기 때문이다.(루가 18,35) 루가에게 있어서 지리적 위치는 그리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는다. 루가는 그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이 예수님을 손님으로 맞이한 가족에게 실상 필요한 단 한 가지를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손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면 처음에는 주인이 손님에게 ‘베푸는 자’가 된다. 그러나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 위치가 바뀌어 손님이 주인에게 ‘베푸는 자’가 된다. 주인이 손님으로부터 ‘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야훼의 천사 셋을 보고 손님으로 맞아들인 경우와 같다. 아브라함은 낯선 사람 셋을 뛰어나가 맞으면서 손님으로 들어와 줄 것을 청한다.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극진한 정성으로 손님들을 대접한다. 그러나 곧 야훼의 손님들은 그에게 이사악의 출생소식을 선물로 준다.(창세 18,1-10) 주인이 오히려 손님으로부터 ‘받는 자’가 된 셈이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를 통하여 더욱 명확해진다.
통상 집에 손님이 오면 음식으로 손님을 접대하는데 바쁜 가족도 있을 것이고, 와중에 손님 곁에서 대화를 꾸려나가는 가족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흔히 있는 일로서 같은 자매끼리 마르타처럼 누구는 일하고 마리아처럼 누구는 일하지 않고 손님 곁에서 노닥거린다면 자매지간에 꼴사나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마르타도 자신의 불평을 주님께 말씀드린 것이다. 예수께서 처음에는 마르타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하시지만, 당신 발치에 앉아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의 태도를 통하여 자신을 ‘베푸는 자’로 부각시키신다.
예수께서 베풀어주시는 것은 ‘실상 필요한 단 한 가지’로서 바로 말씀이신 당신 자신이시다. 예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다.(마태 20,28) 그렇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삶 전체를 통하여 인간을 섬기러 오신 것이다. 따라서 말씀이신 예수님을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 이외에 더 필요한 것은 사실상 없다. 그렇다고 마르타의 가정적이며 활동적인 태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성서가 전해주는 마리아의 태도에서 ‘관상적 모범’을, 마르타의 태도에서 ‘활동적 모범’을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관상(觀想)과 활동(活動), 이 둘은 동시에 행할 수 없는 덕목(德目)이다. 그렇다고 이 둘이 별개의 것이 될 수는 없다. 관상이 없는 행동은 생각이 없는 행동과도 같기 때문에 임의(任意)나 무작위(無作爲)가 될 수도 있으며, 행동을 동행하지 않는 관상은 공상(空想)이나 허상(虛像)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관상과 활동은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소극적인 조화보다는 적극적인 조화가 필요하다. 누구든지 인생에서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이 더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먼저 관상하는 것이며 먼저 기도하는 것이다. 이는 먼저 행동(行動)하고 사고(思考)하는 것보다 먼저 사고하고 그 다음에 행동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먼저 관상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좋은 것을 소유하고 계신 하느님 말씀(요한 1,3-4)에 먼저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는 곧 하느님을 ‘베푸는 자’로 맞이하는 것이다.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죄
권혁주 주교님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님은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고 하는 성경의 말씀을 일깨워 주십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매우 자주 죄가 말씀을 듣지 않는 것으로, 계약의 파기로, 다시 말하면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부르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닫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은 인간의 죄가 본질적으로 불순종이고 ‘듣지 않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주님의 말씀」 26항)
성모 마리아께서는 말씀을 듣는 이들의 모델이요, 말씀을 잉태하고 낳고 기르신 분으로 자신 안에서 말씀이 자라고 열매 맺도록 전적으로 자신을 내놓으신 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태중에 받아들이시어 그 말씀을 이 세상에 전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처럼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과 함께하신 분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말씀의 어머니’라 부릅니다.
“듣는 여인인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일치되어 살아가시고, 자신의 마음 안에 그 아드님의 사건들을 간직하시며 그것들을 마치 단 하나의 모자이크처럼 이해해 가십니다.(루카 2,19.51 참조) … 마리아는, 자신 안에서 사람이 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교회의 표상입니다. 또한 마리아는 하느님과 다른 이들을 향한 개방성의 상징입니다. 마리아는 내면화하고 동화하는 능동적 들음의 상징이며, 그 안에서 말씀은 삶의 형태가 됩니다.”(27항)
우리는 지금 하느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장애로 방해받고 있는 세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 자유와 평화를 살지 못하는 악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바로 죄가 되기에, 예수님은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선택을 특별히 칭찬한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42절)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르타가 예수님을 위해서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만 있습니다(루카 10,38-39).
이 이야기에 대해서, 마르타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에 대해서만 생각할 때가 많은데, 예수님께서 두 사람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마리아부터 생각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드러냈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리아에게 말씀을 들려주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함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려고 노력했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 음식을 맛있게 잡수심으로써 마르타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 10,38)." 라는 말은, 마르타가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하려고 초대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집으로 가신 것은 그 초대를 받아들이셨다는 뜻입니다.
정성스럽게 음식을 차리는 것도 사랑이고,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정성이 지나쳐서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왜 동생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을까?
동생보다 예수님에게 더 불만이 많았던 것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자기 자신의 상황을 예수님께 호소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마르타가 하는 말은 "저는 정말로 주님을 잘 모시고 싶어서 애를 쓰고 있는데 일손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저를 도우라고 마리아에게 일러 주십시오." 라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이 말씀에는 "일을 중단하고 너도 여기 와서 앉아라." 라는 뜻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많은 일'이라는 말을 '너무 많은 음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마리아의 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두 가지 뜻을 합해서 생각하면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리아를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만(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일을 하여라."입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라는 말씀은 목적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르타가 음식을 준비하는 것도,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도 모두 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은 음식이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말씀' 자체가 주인공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아무나 와서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라는 말씀을 "필요한 것은(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는 일 한 가지뿐이다."
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지금 마르타는 쓸데없는 일(또는 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일에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먼저 마르타에게 그 일을 중단하라고 하셨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음식 준비 같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하셨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초대를 거절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르타가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말씀은, "마리아는 너보다 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가 아니라, "마리아는 자기에게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이고, 이 말씀의 뜻은 "마리아는 지금 자기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 (또는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고 있다.')입니다.
마리아가 음식을 만드는 일에 소질이 없었는지, 관심이 없었는지, 그런 것은 알 수 없지만, 하여간에 마리아는 주방 일보다는 말씀을 듣는 일을 더 잘했던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것을 빼앗지 마라."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추구하든지 간에 나를 사랑함으로써 얻는 행복은 (또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것이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정리하면, 각자의 방식을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신앙인의 두 가지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두 모습은 대립과 갈등 관계가 아닙니다.
신앙인 공동체는 방식이 좀 다르더라도 같은 목적지를 향해서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가는 한 몸입니다.
마음의 나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그립습니다.
따뜻한 마음이 그립습니다.
서로를 받아들이며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지요.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 마음을 기쁨과 사랑으로 키워 나감을 의미합니다.
지친 우리가 쉴 수 있는 곳은 바로 예수님이 계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지닌 자만이 진정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마음은 하느님과 함께할 때 늘 살아 있는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마음의 나라입니다.
따뜻함을 만날 때 행복합니다.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만나면 살아 있음이 더없이 기쁩니다.
우리를 찾아오셨던 주님의 마음처럼 행복은 그 마음을 찾을 때 비로소 만나게 됩니다.
비록 작은 행복이라도 마음을 나눌 때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행복은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말은 좀 더 적게 하고 마음을 더 많이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서로의 소중함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서로를 소중하게 일깨우는 신앙의 텃밭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서로의 짐을 덜어 주고 내가 먼저 소중한 마음을 베푸는 하루 되십시오.
온 마음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말씀을 마음에 담는다면…
김대한 신부님
로마 유학시절에 친구들이 찾아오면 언제나 아시시를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마을이기도 했고,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시시를 여행한 친구들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주위의 예쁜 경관을 사진에 담기에 정신이 없는 관광객 형과 그곳에서 기도하며 성인의 삶을 느끼는 순례객 형입니다. 관광객의 눈으로 아시시를 본 이들에게 그곳은 그저 아름다운 마을일 뿐이지만, 순례객의 눈으로 아시시를 본 이들에겐 담벼락에 써 있는 작은 글씨 하나 그림 하나까지 성인의 삶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후에 또다시 아시시에 가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순례객으로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입니다. 스치듯 보고 카메라에 담는 사람과 귀담아듣고 마음에 담는 사람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독서에서 니네베 사람들은 흘려들을 수 있는 요나의 말을 흘려듣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향한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에 새겨 회개하려고 노력합니다. 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차이도 바로 이것입니다. 마르타는 주님을 뵙고 나서 그분의 시중을 드는 데 정신을 쏟지만,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기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몫임을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시시를 마음에 담은 이들이 그곳에 다시 가고 싶어하듯이,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이들은 언제나 그분께 가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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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필요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필요하고 소중한 것을 하나만 골라내라고 한다면, 우리는 도리 없이 덜 필요하고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잘라나갈 수밖에 없음이다.
그리고 잘라나가는 결단과 과정은 만만치가 않다.
모두가 필요하고 모두가 소중한 것처럼 갑자기 느껴지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산수이자 계산법이고 우리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복음적 진리는 늘 역설적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 안에 가장 중요한 것만을 놓아두고 나머지는 모두 잘라내라는 말씀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고, 모든 것에 대한 기준으로 살 수 있다면, 소중하고 필요한 것들을 하나도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 지킬 수 있는 길이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계산법은 늘 특이하셨다.
덜 중요한 것을 잘라나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남기는 계산법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한 확신과 지키려는 노력이 내 안에 존재한다면, 자연스럽게 허무한 욕망으로 만들어진 거짓 가치들이 자연스럽게 잘려나간다는 계산법이다.
즉, 우리 앞에 있는 가치들의 크기와 무게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여길 정도로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이 한낱 쓰레기로 여겨지게 된다.
정말로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장 중요한 것이란 무엇일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리고 그 영원한 생명은 아름다운 복음적 가치들에 의해서 성취된다.
그것이 복음의 가르침이다.
결론은 또 하나로 모아진다.
선(善), 옳음(正義), 사랑(愛)이라는 가치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진정 아름답다면 모두 연결될 수 밖에 없고,
한 방향, 즉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어 줄 것을 확신한다.
기도시간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학교에서 담력이 좋기로 유명한 선배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빨간 동자’라는 아기 귀신을 보고 성소를 포기 한 사람도 있을 정도였는데 그 선배는 빨간 동자가 나온다는 지하 체육관에 밤에 내려가 혼자 운동을 하고 올라오는 겁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도 지하에 내려가 운동을 하고 올라오다가 예전처럼 반 지하 성체조배실에 잠깐 들렀습니다. 혼자 성체조배를 하고 있자니 갑자기 뒤에서 거친 사람의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렇게 겁이 없던 선배도 무척 겁이 났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방엔 자신 혼자밖에 없었는데 뒤에서 남자의 거친 호흡소리가 계속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 선배의 말에 의하면 뒤를 돌아보는데 한 3분 정도가 걸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선배는 겁에 질려 빨리 그 자리를 떴고 나중에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부터 밑에 내려가 운동을 하거나 혼자 성체조배하기가 겁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며칠 뒤 제가 혼자 성체조배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제 뒤에서도 그 거친 남자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과 혼동할 수 없는 틀림없는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바로 귀 뒤에서 들렸습니다. 온 신경이 곤두서고 소름이 돋았습니다.
저는 선배가 전에 한 말이 생각났고 아마도 마귀의 짓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역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앞을 보며 묵상을 하려니 이번엔 더 가까이에서 호흡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의 장난이란 생각이 점점 더 확실해지자 오히려 겁이 없어지고 나중에는 이렇게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네 놈이 마귀이면, 나를 무섭게 해서 기도를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겠구나! 네 뜻대로는 안 될 거다.’
그래서 계속 숨소리가 뒤에서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해놓은 기도시간을 채웠습니다. 그 시간 동안 그 거칠고 기분 나쁜 숨소리는 귓가에 계속 들렸습니다.
당시 공동 침실을 쓰고 있었는데, 저는 먼저 혼자 방으로 내려가 자리에 누웠습니다. 자리에 누워도 역시 귀 옆에서 계속 그런 숨소리가 났습니다. 방까지 마귀가 따라왔다는 생각에 겁도 났지만, 마귀가 주님께서 지켜주시는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고, 다만 겁을 주려고 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그냥 무시하고 자버렸습니다. 그 날 이후로 그 소리는 들린 적이 없습니다.
마귀와 세상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온갖 무기, 즉 두려움, 일, 돈, 쾌락, 명예 등으로 우리가 기도하는 대신 다른 무언가를 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 가족의 수술비를 간신히 구해 길을 가고 있는데 누군가 그 가방을 가로채려 한다면 그 사람은 그 가방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칠 것입니다. 그만큼 그것을 지킬 마음이 부족하다면 그것을 아주 사랑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도와달라고 마리아에게 말해달라는 마르타에게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타는 실천을 상징하고, 마리아는 기도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즉 기도가 실천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만큼 사랑하지 않으면 쉽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소성당에 성체조배하고 앉아있으면 학생아이들이 와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떠들기도 합니다. 저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떠드는 것보다는 기도의 맛을 모르는 아이들이 안쓰럽습니다. 이런 경우 기도를 하지 않는 이유는 기도의 맛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맛없는 것만 먹다가 아주 맛난 음식이 차려져 있는 것을 보면 어찌 참아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신학교 들어갈 때,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우습지만, ‘난 기도시간이 여자 만나는 시간보다 행복하지 않으면 신학교 나간다.’라는 결심을 하고 기도에 목숨을 걸었습니다.그런데 그전까지는 몰랐던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도에서 얻어지는 그 평화는 세상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행복이었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집니다. 그러나 맛을 들이기 위해서는 먹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는 음식의 맛을 배우고, 술의 맛도 배워갑니다.그리고 그것을 익히게 되면 그 맛을 다시 끊는 것은 매우 힘들게 됩니다.
그러나 음식이 항상 맛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입맛이 없어도 약을 먹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술이라도 떠야 할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의 맛만을 바라고 기도하면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음식을 왜 먹어야 하고, 잠을 왜 자야 하고, 차에 기름을 왜 넣어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처럼,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에 빠져 죄를 짓고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배고프고, 졸리고, 차를 움직일 수 없는 상황처럼 자신이 뼈저리게 느껴봐야 절대 기도시간을 다른 것들에게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고 잠은 자지 않습니까? 기도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직은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피부로 느껴보지 못한 것입니다.
사도단은 교회가 커지자 음식을 나누고 재정을 관리하는 일 때문에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자 자신들의 일을 대신 해 줄 일곱 부제들을 뽑았습니다.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봉사에 전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도의 맛과 필요성을 알았기에, 다른 무엇에게도 절대 빼앗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듣다보면 여러 핑계로 기도를 게을리 했다는 고백을 많이 합니다. 기도를 못한 것 때문에 고해를 하지 말고, 내가 기도의 맛을 진정 아는지, 또 기도를 해야 하는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지부터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에게 꼭 붙어있었던 마리아처럼, 언니의 잔소리에도 꿈쩍하지 않았던 마리아처럼, 유일하게 필요한 한 가지, 즉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기도하는 것을, 우리도 절대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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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방송 녹음을 위해서 방송국에 가서 체험한 일 하나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서울의 막히는 교통 사정을 생각하면서, 저는 방송 녹음 시간보다 일찍 방송국에 들어섭니다. 그리고 방송국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방송할 내용들을 살펴보곤 하지요. 그 날도 저는 방송 원고를 바라보면서 내용을 수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남자가 제 테이블 바로 옆에 앉았고, 저는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꽃미남’이라고 하나요? 선하게 생긴 얼굴, 그리고 깨끗한 피부를 갖추었더군요. 그리고 이런 사람이 바로 인터넷에서 말하는 소위 ‘얼짱’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또한 남자인 저도 쳐다보게 되는 얼굴인데, 여자들은 얼마나 이 남자를 좋아할까 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아무튼 너무나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바로 그 남자가 있는 자리에서 화내는 고음의 소리와 함께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다른 사람이 왔나 하면서 쳐다보는데, 그 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꽃미남’ 같은 그 남자였습니다. 그렇게 호감 가는 얼굴에서, 그렇게 선해 보이는 얼굴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저는 큰 실망을 했지요. 그리고 동시에 그 남자의 모습이 그렇게 선해 보이지도 않고, 호감이 가지도 않는 것입니다. 마치 동화 속에 등장하는 추악한 괴물 같다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사람의 겉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호감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속마음이 깨끗하지 않다면, 호감이 가던 그 겉모습까지도 추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요. 그리고 반대로 깨끗하고 착한 마음으로 겉모습까지 아름답게 보이는 경우도 참으로 많다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 많이 체험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바로 어떤 마음을 갖느냐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따라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맞이하는 두 자매의 태도가 완전히 정 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마르타는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예수님의 시중을 드는 반면, 마리아는 언니와는 달리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그저 예수님 말씀만 들을 뿐이었지요. 어쩌면 이 두 모습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나, 그리고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모습이나 모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마르타는 마리아에 대한 판단을 하면서 부정적인 마음을 갖게 됩니다. 즉, 자신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마리아는 빈둥빈둥 놀고만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 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르타 편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세요.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실상 필요한 한 가지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겉모습만을 바라보면서 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방식을 통해서든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즉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마르타의 모습보다는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주님께 나아가는 마리아의 모습이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모습은 누구의 모습을 따라야 할까요?
욕하지 맙시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박목월)
아침마다 눈을 뜨면 환한 얼굴로 착한 일을 해야지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하느님은 날마다 금빛 수실로 찬란한 새벽을 수놓으시고
어둠에서 밝아오는 빛의 대문을 열어 젖혀 우리의 하루를 마련해 주시는데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불쌍한 사람을 돕고 괴로운 이가 있으면 괴로움을 함께 나누고
앓는 이가 있으면 찾아가 간호해 주는,
아침마다 눈을 뜨면 밝은 하루를 하나님께 감사하고 착한 일을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빛같이 신선하고 빛과 같이 밝은 마음으로 누구에게나 다정한,
누구에게나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고 내가 있음으로 주위가 좀 더 환해지는,
살며시 친구 손을 꼭 쥐어주는, 세상에 어려움이 한 두 가지랴. 사는 것이 온통 어려움인데.
세상에 괴로움이 좀 많으랴. 사는 것이 온통 괴로움인데.
그럴수록 아침마다 눈을 뜨면 착한 일을 해야지,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서로 서로가 돕고 산다면 보살피고 위로하고 의지하고 산다면
오늘 하루가 왜 괴로우랴.
웃는 얼굴이 웃는 얼굴과 정다운 눈이 정다운 눈과 건너보고 마주보고 바라보고 산다면,
아침마다 동트는 새벽은 또 얼마나 아름다우랴.
아침마다 눈을 뜨면 환한 얼굴로 어려운 일 돕고 살자,
마음으로 다짐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