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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2,1-2.7-14
형제 여러분, 1 십사 년 뒤에 나는 바르나바와 함께
티토도 데리고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갔습니다.
2 나는 계시를 받고 그리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민족들에게 선포하는 복음을
그곳 주요 인사들에게 따로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전에 한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7 그들은 오히려 베드로가 할례 받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8 할례 받은 이들을 위하여 베드로에게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신 분께서,
나에게도 다른 민족들을 위한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9 그리고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10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
11 그런데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12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13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14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사도들을 만나고,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하여 몸을 사린 케파의 위선을 꾸짖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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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다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오로 사도는, 케파가 다른 민족들과 음식을 먹다가 유다인들이 두려워 거리를 두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자 그를 꾸짖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주님의 기도가 지닌 독특한 점은 예수님 시대 즈음에 유다교 회당에서 바치던 열여덟 청원 기도문(쉐모네 에스레)이나 고대 근동의 아카드인들이 바치던 양팔 기도문과 비교할 때 잘 드러납니다. 이 두 기도문에는 무엇보다도 신적 존재에 대한 호칭이 다양하게 열거되어 나옵니다. 마치 여러 호칭을 계속 반복하지 않으면 그 신적 존재가 그 기도를 듣지 않을 것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다양한 호칭을 사용하는 배경에는 궁정 문화가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임금에게 무엇인가를 청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전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문들을 지나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어전에서 멀리 떨어져 무릎을 꿇게 되는데, 이때에도 고위 신하가 눈짓으로 허락을 해야 겨우 자기가 청하고자 하는 바를 임금에게 아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에는 이렇게 엄숙하고 격조 높은 궁정 문화가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한 번만 부르는데, 이마저도 가족 안에서 사용하는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다시 말하여 주님의 기도는 가족과 나누는 친밀하고 편안한 대화를 배경으로 합니다. 보통 가족끼리는 에두르거나 거창한 말로 꾸미지 않고 자기가 바라는 것을 편안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우리를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녀입니다. 그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며 그분을 붙잡고 마음 편히 우리의 바람을 아뢸 수 있는 응석받이인 셈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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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앵무새처럼 수없이 반복하는 ‘주님의 기도’가 “우리 신앙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고 진심으로 기도하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주님의 기도를 입술만 움직이며 공허하게 바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위선적 행위를 비판하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은 우리의 기도와 삶이 진심을 담아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이어야 함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 모습을 육안으로 보려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을 어서 용서하도록 성급히 의지를 움직이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언제 이루어질지 계산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자녀가 하느님께 드리는 단순한 기도이기에, 끊임없이 그 기도를 반복하는 어느 순간에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속에 오게 되며 원수를 사랑하게 됩니다. 어느 때 갑작스럽게 우리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를 악에서 지켜 주시는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가 우리의 숨결이 될 때까지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생각과 의지는 마음속에 자리 잡습니다. 1만 번, 2만 번 끊임없이 반복할수록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우리가 어린이와 같이 신뢰하는 마음으로 “우리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그분께서는 우리 곁에 다가오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 삶 속에, 우리 활동 안에 언제나 살아 움직이는 주님의 현존이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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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숨결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기도가 숨 쉬는 것처럼 쉽다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별도의 장소와 시간이 필요하다거나, 기도는 특별한 방식을 알아야 할 수 있는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느끼는 신자들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당대의 여러 예언자들이나 율법 교사처럼 예수님께 멋진 기도 방법을 배우고 싶어 했나 봅니다. 명색이 메시아로 추앙받던 예수님의 제자인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여 줄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참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용기,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고, 그분이 이끄시는 나라를 희망하는 일이 기도의 시작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 다음에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용할 양식과 늘 우리 삶을 괴롭히는 죄의 용서와 회개를 청하는 일, 그리고 피하기 힘든 유혹을 이길 수 있게 해 달라는 청을 하는 것이 우리가 바쳐야 하는 기도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는 단순히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도구이거나, 신자로서의 의무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베드로의 위선적 행위를 공박하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 속에서, 베드로 역시 선택된 사람이지만, 인간적인 약점으로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깨닫지 못할 때 기도의 결실이 얻어지지 않는다는 예언자적 가르침을 받습니다.
기도는 결코 선택된 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단순한 말로 바쳐질 때 결실을 맺습니다. 나는 지금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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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단순하면서도 완전한 기도를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그러나 공허하게 입으로만 바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마태오 복음의 병행 구절(6,9-13)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보배로운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 전에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말라.’고 타이르십니다(6,7 참조). 그러니 마음가짐이 단순하고 한데 모아질 때 비로소 그 기도가 곧바로 하느님 아버지를 향할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필요한 단순함과 진실함에 대하여 성찰하다가 문득 한국 서양화의 거장 장욱진 화백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양주에 그의 미술관이 개관했다는 소식에 반가운 마음으로 찾았던 것이 바로 지난여름입니다.
숲을 배경 삼아 소박하고 단순하게 세워진 미술관 건물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개관 특별전에는 귀한 작품이 많았는데, 서울 한복판의 전시 때와는 달리 넉넉한 공간에 잘 전시된 데다가 사람도 적어 차분하게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그림들을 오래 감상하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며 단순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장욱진 화백은 주로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소재들을 그리면서 이상적인 내면세계를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작품 세계처럼 그의 검소한 일상을 보여 주는 사진과 화구, 생활용품은 제 삶의 모습을 깊이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가장 진지한 고백, 솔직한 자기의 고백이라는 진실을 사람들은 일생을 통해 부단히 쌓아 나가고 있나 보다. (중략) 나는 이제껏 그림이라는 방법을 통해 내 자신의 고백을 가식 없는 손놀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장 화백의 ‘덕소 시대’의 삶을 잘 드러내는 수필집 『강가의 아틀리에』 머리말의 한 부분입니다.
‘단순하면서도 대담했던’ 그의 삶과 예술은 진실하게 기도하는 사람의 내면과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림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와 함께 일생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매일 반복해서 바치는 이 기도가, 허세와 안달이 아니라 진지하고 단순한 고백이자 주님에 대한 투명하고 조건 없는 의탁일 수 있도록 늘 마음가짐을 새로이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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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홀로, 또는 제자들과 함께 자주 기도하셨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때로는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기도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라고, 끊임없이 그리고 끈질기게 기도하라고,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의심을 품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세리처럼 겸손하게 기도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짧은 기도문 안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평화가 담겨 있습니다. 죄의 용서와 일용할 양식이 담겨 있습니다. 온갖 질병과 소외 등의 악과 유혹에서 보호해 달라는 청도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하느님 나라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아니, 무엇보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행복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서로 형제자매가 되는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짧지만 참으로 소중한 기도입니다.
제 컴퓨터는 그 어떤 컴퓨터보다 좋은 컴퓨터라고 자부합니다. 물론 더 높은 사양의 컴퓨터도 많겠지만, 제가 쓰기에 약간 과분할 정도의 사양으로 조립했고 그래서 이 컴퓨터를 현재 4년 넘게 아무 문제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조금씩 문제가 보입니다. 느린 것도 아니고, 그래픽 작업이나 동영상 작업을 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워드 작업을 할 때 자판기 입력이 잘 안 되고, 마우스 클릭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키보드와 마우스가 문제인가 싶어서 다른 것으로 교체해보았지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4년 넘게 써서 이제 수명이 다 된 것일까요?
어떤 프로그램에서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을, 하나하나 프로그램 점검을 하던 중에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을 지우고 나니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상의 작은 문제가 컴퓨터 전체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만약 프로그램 하나의 문제로 컴퓨터를 바꿨다면 얼마나 큰 낭비입니까?
자기 자신 전체를 부정하는 분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자신을 실패작이라고 표현하면서, 아무런 능력이 없다며 절망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십니다. 프로그램 하나만 고치면 충분할 것을 컴퓨터 전체를 바꾸겠다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따라서 전체를 바꿀 것이 아니라, 어느 한 부분의 문제만 바꾸면 충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우리를 완벽하게 만드셨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힘을 내어 지금의 작은 문제들을 극복해 보면 어떨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특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심으로써 제자들이 기도를 통해 당신과 하느님의 관계와 똑같은 관계에 들게 해주셨습니다. 이는 특권이자 책임입니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아버지께 드리는 모든 기도는 언제나 아들을 통해서 바쳐짐을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더 가까운 분으로, 하느님의 힘을 받아서 지금 삶을 더욱 힘차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기도의 말미는 용서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탕감해 주시는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일하셨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힘들게 하는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갈 수 있으며, 이 안에서 더 큰 기쁨과 행복의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 있다. 단, 우리가 자신에게 귀 기울이고 나아지는 경우에(엘링 카게).
글이 잘 써질 때.
어제는 글을 쓰는데 도무지 써지질 않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언제 글이 잘 써지지 않는 것이지?’라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언제 글이 잘 안 써질까요?
생각이 너무 많은 날, 할 말이 너무 많은 날,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은 날, 바쁜 날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꼽은 날들을 생각해보니 모든 날을 글이 잘 써지지 않는 날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생각해보았습니다. 즉, 글이 잘 써지지 않는 날이 아니라, 잘 써지는 날이 언제인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위에 말했던 날이 또 글이 잘 써지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날이 글이 잘 써지는 날인 것입니다.
내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필요했습니다.
묵주기도와 함께 또 다른 나자렛의 마리아가 되어 정성껏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 누구보다도 성모님을 사랑했던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제2차바티칸공의회가 폐막한지 10년만인, 1974년 2월 2일자로 성모님 관련 교황 권고를 발표하시는데, 제목이 ‘마리알리스 꿀투스’(Marialis Cultus)입니다. 라틴어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마리아 공경에 대한 교황 권고’입니다.
제2차바티칸공의회 교회 헌장 제8장, 다시 말해서 마리아 헌장의 내용을 좀 더 구체화시킨 교황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마리알리스 꿀투스 마지막 제3부에서 묵주기도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황님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① 묵주기도는 복음서에서 영감을 받은 묵상기도이며, 복음적 성격이 강한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철저하게도 복음에 근거하고 복음에서 출발하며, 복음을 요약하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의 신비들과 기본 형태가 복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묵주기도를 아주 간단히 ‘요약된 복음’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묵주기도는 철저하게도 복음적인 기도입니다.
② 묵주기도는 성모송의 조화로운 연속으로 복음의 근본적인 신비를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③ 묵주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시어 구속사업을 이루신 과정을 순차적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에는 동정녀의 잉태와 예수님 유년기 시절의 신비로부터, 파스카 신비의 절정, 곧 수난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구원사 안의 중요한 사건들이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④ 묵주기도는 교회 공식 전례는 아니지만, 교회 전례에서 비롯되며, 우리를 교회 전례로 이끌어줍니다.
결국 묵주기도는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일생, 그분께서 행하신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는 묵상기도입니다. 하느님 구원사업 전체를 관상하며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묵주기도를 바칠 때 복음의 마음으로 바쳐야 합니다. 복음에서 출발해서, 복음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복음을 실제 삶 안에서 실천하고, 다시금 복음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는 기도가 묵주기도인 것입니다.
묵주기도의 수준을 떨어트리고 올리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묵주기도를 바치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빨리 빨리 해치워야 할 숙제로 여긴다면, 묵주기도의 수준을 확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다양한 잡념 속에 설렁설렁, 대충대충 가볍게 바친다면 묵주기도의 수준을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기적의 요술방망이나 자동판매기처럼 여기고 바친다면 묵주기도 수준을 대폭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바칠 때,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 생애의 신비를 기쁜 마음으로 정성껏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잡다한 이기적인 바람들을 한데 모아 계속해서 성모님을 졸라댄다면, 묵주기도 수준을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묵주기도를 바칠 때 마다, 다른 무엇보다도 성모님의 마음으로 기도를 바쳐야 할 것입니다. 한단 한단 넘어갈 때 마다 각단이 지향하는 예수님의 일생을 곰곰히 묵상하면서 기도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묵주기도를 그냥 생각없이 바치기 보다 지극히 겸손했던 예수님의 마구간 탄생, 정겨웠던 나자렛 성가정에서의 생활, 희망에 찬 출가, 활기찼던 공생활, 연민과 사랑이 가득했던 착한 목자로서의 삶을 묵상하면서 바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묵주기도를 바칠 때, 처절했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영광스런 부활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칠 때, 결국 염경기도를 넘어 묵상과 관상과 더불어 묵주기도를 바칠때, 거기에서 오는 은총과 축복은 놀라울 것입니다.
묵주기도 안에서 또 다른 나자렛의 마리아가 되어 정성껏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하다보면, 하느님의 따뜻한 위로의 손길이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나침반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기도하고 계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청합니다. 이 말은 스승마다 기도가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기도를 바치는 것이 스승과 하나 되는 어쩌면 유일한 길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스승이 주는 기도는 그 스승을 향할 수 있게 만드는 나침반과 같습니다.
기도가 나침반이 되는 이유는 기도 안에는 청하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청하느냐가 나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사람이 먹다 버린 음식만을 원한다면 개일 가능성이 큽니다. 썩은 고기만 원한다면 그것은 하이에나일 가능성이 큽니다. 피만 원한다면 그것은 모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듯 내가 원하는 것이 나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내가 장차 무엇이 되는지 알려주는 척도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 자녀의 기도입니다. 다시 말해 이 기도 안에서 청하는 것을 나도 청하면 내 존재가 하느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에 전해준 십계명과 같습니다. 주님의 기도 안에 하느님의 계명이 다 들어있고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청하면 하느님의 자녀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자아를 따라 사탄이 되게 만들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합니다.
만약 이 기도를 모르고 무조건 잘 살려고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진리를 잃은 사람처럼 되어 완전한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갈 때 나침반을 가져가야 하는 것처럼, 인생을 살 때 주님의 기도를 가져가야 길을 잃는 일이 없습니다.
일본 어느 영화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남편의 제자가 남편을 보겠다고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비가 너무 와서 길이 침수되어 남편에게 그날은 집에 돌아올 수 없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제자도 집에 돌아갈 수 없어서 그 집에서 하룻밤 묵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밤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둘은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자 이 모든 것을 털어놓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남편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모든 것을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아내는 아침에 가방을 싸고 있었습니다. 놀란 남편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떠나 친정집으로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는 이유를 묻자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용서했어요. 그런데 잠잘 때 내 살이 닿자 당신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괴로워했어요. 당신은 나를 용서하느라 너무 고통을 받고 있어요. 그 고통을 덜어주려면 내가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은 정말 아내를 용서한 것일까요? 용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에는 어떤 청원이 나옵니까?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남편은 자신은 죄인이라 여기지 않는 상태에서 아내를 용서하려 하니 잘 안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오십보백보입니다. 크나 작으나 다 죄인입니다. 남편이 주님의 기도를 알고 꾸준히 바칠 수 있었다면, 아내만 그렇게 죄인으로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는 우리의 방향을 명확히 잡아줄 나침반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영화 ‘사도’(2015)에서 영조는 사도세자만 잘못하고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에게도 아버지의 무덤에 오랫동안 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세자를 그렇게 만든 것은 자신의 탓도 있습니다.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했다면 모든 인간이 주님께서 악에서 구해주어야 하는 상태임을 알고 더 자비로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파라오는 우리를 지배하는 하나의 욕구를 대변합니다. 파라오는 우리가 그 욕구를 채워줄 때마다 웃어줍니다. 그러나 그다음 날이면 다시 그 욕구를 채우라고 채찍을 듭니다. 자아의 지배하에 사는 사람은 모두 이런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우리를 위해 나침반을 가져오셨습니다. 이 나침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십계명과 같습니다. 십계명을 따르면 파라오의 욕구를 따라줄 필요가 없게 됩니다. 두 법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모세로서 주신 계명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따르면 예수님에게로 향할 수 있고 결국 아버지께로 향하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길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길은 동과 서를 이어주는 아베뉴(Av)와 남과 북을 이어주는 스트리트(St)로 이루어집니다. 바둑판처럼 길이 되어 있어서 주소만 알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작년에 처음 미국에 왔을 때도 주소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성당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비용을 지불하지만 빨리 갈 수 있는 고속도로가 있습니다. 트럭은 다닐 수 없는 길이 있습니다. 2인 이상이 탑승해야만 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여유가 있으면 강과 경치를 볼 수 있는 길도 있습니다. 길의 종류와 용도를 알면 편하게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성소국에 있을 때입니다. 매년 서품식 장소로 사용하던 올림픽 체조경기장이 내부 수리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장소를 알아보아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장소와 주차장이 확보된 곳이어야 했습니다. 서울시 시설관리 공단에서 운영하는 고척 돔구장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공단 이사장님을 만나서 방법을 물어보았고, 이사장님은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태풍의 영향으로 본당 뒷산을 깎아 내려야 했습니다. 피해 상황을 보러왔던 서울 시장님과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실무적인 일은 구청장님과 해결해야 했습니다. 구청장님을 만나서 방법을 물어보았고, 구청장님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매달 구청 직원을 위한 미사를 하였고, 구청장님과도 몇 번 인사를 나누웠기에 말하기가 수월했습니다.
오늘은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상대방의 전력이 훨씬 강했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던 군인들은 성모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비록 약한 전력이었지만 군인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성모님께서 함께 해 주셨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은 1571년 10월 7일이었습니다. 비오 5세 교황은 성모님의 도움으로 교회를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고, 10월 7일을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훗날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당시의 군인들은 성모님의 도움으로 길을 찾았고, 성모님께서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교회는 10월은 ‘로사리오(묵주기도) 성월’로 지내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사도신경, 성모송, 주님의기도, 영광송을 바치는 염경기도입니다. 그러나 묵주기도는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할 수 있는 관상기도이기도 합니다. 환희의 신비에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빛의 신비에서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볼 수 있습니다. 고통의 신비에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영광의 신비에서는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시면 묵주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주기도는 우리를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묵주기도에 대한 작은 체험이 있습니다. 차를 운전하면서 묵주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잠시 차를 세우고 묵주를 꺼내려는데 바로 앞으로 큰 트럭이 지나갔습니다. 자칫 큰 사고가 날 뻔 했습니다. 뉴욕에 와서는 매일 아침 산보를 하면서 묵주기도를 합니다. 제게는 감사하고 고마운 하루의 시작입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사의 아룀으로 성자께서 사람이 되심을 알았으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 주소서.”
<단 한마디의 기도>
상지종 베르나르도 긴부님
한없이 기쁠 때에
더없이 슬플 때에
마냥 들뜰 때에
끝없이 가라앉을 때에
사랑이 넘쳐날 때에
증오가 끓어오를 때에
날듯이 뿌듯할 때에
피눈물 나게 서러울 때에
모두가 벗으로 느껴질 때에
미칠 듯이 외로울 때에
마구 떠벌리고 싶을 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때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에
온전히 스미어 들 때에
도저히 느낄 수 없을 때에
그저 감사하고 싶을 때에
까닭 없는 원망 가득할 때에
기도하고 싶을 때에
기도할 수 없을 때에
때로는 거친 헐떡임으로
때로는 긴 들숨날숨으로
때로는 울부짖듯이
때로는 속삭이듯이
때로는 흘깃 스치듯이
때로는 정성스레 보듬어
아빠! 아버지!
엄마! 어머니!
하느님!
주님!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들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말씀드리자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말하길 주님의 기도는 기도 중에 가장 완전한 기도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기도는 기도의 그 정석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면서 전반부에는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고 후반부에는 우리의 소망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를 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전한다고 하지만 이미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할 때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어떤 식사 자리에 함께했었는데 그 식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대표로 식사 전 기도를 하시면서 기도를 거의 10분이 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그분의 기도를 들으면서 처음엔 기도를 너무 잘하신다고 생각이 들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자 배가 고파오면서 약간은 원망의 마음이 생겨났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기도는 말로 표현을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내 마음의 문을 열어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내 방에 햇살이 비치도록 창의 커튼을 여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빛이 내 마음을 비추게 될 때 내 안에 성령이 함께하시면서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께서 함께하시면서 내 마음에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나에게서 이루어질 때 나는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저녁 잠자기 전 오늘 만났던 사람을 떠올린다. 그리고 만남에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내일 기억해야할 사람을 떠올린다. 아침 미사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산책길에서 그들을 지향으로 묵주기도를 바치기 위해서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하루 일과로 자리를 잡았다. 묵주기도에서 환희, 고통, 빛, 영광의 신비를 묵상하다가 나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함께 만난다, 생의 한 서클을 돌면 나는 주님을 만나며, 나는 기억할 사람과 만난다. 하루의 기도가 완성됨을 본다. 감사드린다.
오늘은 교회의 원로, 교구 역대 회장 교우들을 만나 교육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행복을 살아야지요. 사랑의 교육공동체를 만들어요.” 어른께 풍성한 자산을 지녔으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나누며 봉사하자고 부탁드렸다. 빛과 영광을 노래하기 위해서다.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의 어른들 만남을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내일 아침미사에서 그분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기로 했다. 또 산책길에서 그분들 위해 묵주기도를 드려야겠다. 나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고, 내가 기억할 사람과 내일 기도에서 다시 만나야겠다. 아름다운 기도, 주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묵주알을 돌리며 위로는 하느님과 친교를 맺고, 이웃과 수평으로는 친교하며 만나야겠다. 묵주의 기도는 승리를 위한 중요한 기도가 되리라!
<주님의 기도>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7주간 수요일>(2020. 10. 7. 수)(루카 11,1-4)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2-4).”
‘주님의 기도’ 전반부는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후반부는 ‘신앙생활의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는 것’과 ‘아버지의 나라가 오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뜻하는데,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고난들과 시련들을 극복하는 일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보다 더 급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그 힘든 일들 때문에 기도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궁극적인 목적지를 잊으면 안 됩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힘든 일들’ 때문에 바치는 기도는 ‘끝까지’ 갈 수 있는 힘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와 용서를 청하는 기도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는,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를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기도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이 기도도 ‘끝까지’ 잘 갈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마르 8,2-3).”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육신의 굶주림’을 염려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영적인 굶주림’에 대한 걱정이 아닙니다.)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 날마다 굶주리는 상황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먹을 것을 구하는 일을 먼저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당연히 도와주어야 합니다. 신앙생활부터 먼저 하라고 강요하면 안 되고, 먹을 것을 먼저 주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는 ‘내가’ 먹을 양식을 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가’ 먹을 양식을 청하는 기도이고, 따라서 이 기도는 ‘사랑 실천’과 직결되는 기도입니다. 굶주리는 사람을 외면하고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사람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자격이 없습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의 경우에는 ‘끝까지’ 잘 갈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가 되지만, 지금 배부른 사람의 경우에는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는 기도가 됩니다. 만일에 ‘실천 없이’ 말로만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면, 그것은 ‘빈말’이 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기도한다고 먹을 것이 생기나?” 라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생긴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기적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놀라운 방식으로 일어날 수도 있고, 우리의 나눔과 사랑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기적을 만들어내는 힘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는 용서를 실천하겠다고 약속하는 기도이고,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는 구원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이 말씀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싶으면 형제를 용서하여라.”인데,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를 하느님께서 죽 지켜보시다가, 우리를 용서하실지 안 하실지 마지막 심판 때에 결정하신다는 뜻은 아니고, 실제 뜻은 “하느님께서 너희를 이미 용서하셨으니 너희도 서로 용서하여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를 안 하면 하느님께서 용서를 취소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는데, 그 ‘용서의 은총’을 받아서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원하면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용서의 은총’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일이 됩니다.)
여기서 ‘모든 이’ 라는 말은 중요합니다.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고,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처럼 용서도 모든 사람을 향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자기가 용서하고 싶은 사람만 용서하고, 용서하기 싫은 사람은 외면한다면, 그것은 용서를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루카 6,33).”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라는 말씀은, “그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즉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용서하고 싶은 사람만 용서하는 것은 용서를 실천하는 일이 되기는커녕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는 ‘악의 세력’의 위협과 박해와 유혹에서 우리를 지켜달라고 청하는 기도인데, 이 기도도 역시 ‘끝까지’ 잘 갈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단식기도를 하셨을 때 악마가 다가와서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루카 4,1-12).
그 이야기 끝에는,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4,13).” 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악마가 ‘다음 기회’를 노린다는 말은, ‘끊임없이’ 기회를 노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복음서 전체 내용을 보면, 악마는 예수님을 직접 유혹하는 것은 포기하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신자들을 유혹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악마의 유혹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고, 종말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악마는 기도로써 물리칠 수 있다.”입니다.
그렇지만 기도만 하면 그만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유혹을 물리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는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우리를 도와달라고 청하는 기도가 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청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루카 11,2)
먼저 우리는 무엇보다 이 땅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모든 것에 앞서 영광 받으실 아버지의 이름이 이 세상에 거룩히 드러나기를, 그리하여 사랑이신 아버지의 주권이 다스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오길 간절히 바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사랑과 정의, 공정과 평화는 참으로 미소합니다. 몹시 불완전하기까지 하지요.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권능과 자비가 주도할 때에야 비로소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결핍과 편중성, 불완전함을 끌어안아 충만하게 하시는 완전함이십니다.
"일용할 양식, 용서, 유혹에서 지킴"(루카 11,3-4)
이어서 청해야 하는 바는 인간 사이의 관계성에 기반합니다. 하루를 지탱할 양식과 용서, 유혹의 문제는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일상의 삶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과 예루살렘 초대교회와의 관계 형성 과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갈라 2,9)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계시 체험 이후 3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케파를 만나 예루살렘에서 보름을 지냈다고 했지요.(갈라 1,18 참조) 그리고 나서 14년 뒤 바르나바, 티토를 대동해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가 핵심 역할을 하는 사도들과 일치의 시간을 가집니다. 교회는 이렇게 긴 시간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고 삶으로 실천한 이들을 통해 보이게, 보이지 않게 형성되어 자라나다가 일치를 이루고, 또 서로를 통해 확장되는 것이지요.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갈라 2,10)
예루살렘 교회와 바오로 사도 일행은 서로가 받은 소명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서로를 격려합니다. 그러면서도 유다인 선교사든 이방인 선교사든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보편 소명에 대해서 언급하지요. 바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야말로 그가 어떤 신분이건 어떤 사도직에 임하고 있건 간에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모든 사람의 공동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갈라 2,11)
오늘 독서 대목의 후반부는 전반부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게 흘러갑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면서도 여전히 율법과 관습의 그늘에서 온전히 자유롭기 어려운 일부 사도들의 위선적 행동에 바오로가 작심하고 직언을 던진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 교회의 일치 현장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냉랭한 분위기에 머쓱해지고 말았네요.
하지만 바오로는 물론 교회도 이러한 공동체 안의 갈등과 분쟁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불완전한 인간들의 모임이기도 한 교회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니까요. 진리는 초대교회의 형성 과정과 사도의 과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걸 실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전시용 박제품이 아니라 살아계신 그리스도시기에, 이 모두를 포용해 결국은 하늘 나라를 완성하실 수 있으시니 자신 있으신 겁니다.
유다교 제도권 밖에서 고군분투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험은 널려 있고, 그래서 더 안전에 대한 유혹도 강했을 겁니다. 자칫 유혹에 무너지면 외부로부터의 비난을 감수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용서하기도 어려웠겠지요. 이제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용서의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살다 보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내용 하나 하나가 삶의 구석구석에서 힘을 발휘함을 느낄 겁니다. 이 기도가 우리에게 청하라고 가르치는 바가 얼마나 통합적이면서도 구체적인지요!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그 안에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러니 우리, 과정을 너무 두려워하지 맙시다. 갈등하고 일그러지고 넘어지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 나라는 자라고 있으니까요. 아버지의 이름과 뜻이 이 땅에 새겨져 사랑과 정의, 자비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가 되기를, 영육의 양식을 얻고 유혹을 이겨내며 용서에 지치지 않는 하느님 자녀이기를 바라고 또 바라다보면 어느새 이 아름다운 기도의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은 더욱 정성껏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묵주 기도의 성모님'께 화해와 용서와 일치를 위해 전구해 주시도록 부탁드립시다.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우리는 구원의 신비를 묵상해야 합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강론에서 (Sermo de Aquaeductu: Opera omnia., Edit., Cisterc., 5[1968], 282-283)
“당신에게서 태어나실 거룩한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 지혜의 원천, “하늘 가장 높은 데에 계신 아버지의 말씀이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동정녀시여, 말씀께서는 당신을 통해서 사람이 되시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 또한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그분은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의 말에 의하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즉 이미 샘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아직 자신 안에서만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말합니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즉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태초로부터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내 생각은 평화의 생각이지 고난을 줄 생각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획은 주님의 심중에 숨겨져 있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생각을 잘 안 사람이 어디 있었으며 주님의 의논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또 어디 있었습니까?”
그래서 평화의 계획은 평화의 작업에로 내려왔습니다. “말씀은 사람이 되시어 지금 우리 가운데 거처하십니다.” 그분은 특히 신앙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거처하시고 우리의 기억 속에 거처하시고 우리 생각 속에 거처하시며 우리의 상상력에까지 내려오십니다. 그분이 이미 우리들 가운데 오지 않으셨다면 사람은 환상이 만들어낸 하나의 우상밖에는 하느님에 대해 무슨 관념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다? 하느님은 파악할 수 없고 다다를 수 없고 보이지 않으시며 결코 인식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은 사람들이 당신을 이해하기를 원하시고 당신을 보기를 원하시며 당신에 대한 관념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디에서 그리고 언제 당신 자신을 보여 주셨습니까? 말구유에 누워 계실 때, 동정녀의 품에 안겨 게실 때, 산에서 설교하실 때, 기도 중에 밤을 지새우실 때, 또는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죽음이 다가오자 얼굴이 창백해지셨을 때, 죽은 이들 가운데서 해방되시어 명부에서 다스리실 때, 또는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승리의 표지인 못 자국을 사도들에게 보여 주실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보는 데서 하늘의 은밀한 곳에로 승천하실 때입니다.
누가 이 모든 신비들을 참되게 경건하게 또 거룩하게 묵상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 신비들을 생각할 때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이 모든 신비들 안에서 나는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나는 이런 신비들에 대해 묵상하는 것을 지혜라고 일컫습니다. 아론의 지팡이가 이들 새싹들에다 그렇게도 풍성히 발생시키고 마리아께서 위에서 가져다가 우리에게 풍부히 부어 주신 그 향기를 되맡아 보는 일을 나는 슬기라고 생각합니다.
새 에덴동산 시대의 재현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하느님께 영광 드리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의 기도문은 뜻 깊습니다.
임금 왕 황제 따위의 권력시대를 되돌려서 아버지시대로 가란 겁니다.
만물의 창조주하느님을 아버지로 불러 인류를 한 가족 되게 말입니다.
하느님을 아빠로 모시며 가족처럼 살던 새 에덴동산 시대의 재현이죠.
인류가 번성하며 일군 인류사에 이 새 조직은 엄청난 혁명이었습니다.
태어난 연도에 따라 서로가 형님 오빠 누님 동생 관계로 사는 겁니다.
하느님아버지 뜻대로 살면 천국가족 아니면 지옥가족이란 사후입니다.
인간이 꾸민 상하조직 관련법 권력 등으로 세상완성시점 갈수 있나요?
삶으로 하는 기도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사회학자 알버트 메러비안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대화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할 때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7% 정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한편, 억양이나 소리의 크기, 음색과 같이 목소리의 느낌으로 전달되는 부분이 38%, 그리고 표정, 자세, 태도와 같은 몸짓으로 전달되는 메시지가 무려 55%에 이른다고 합니다. 흔히 기도를 일컬어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라 하지요. 그런데 이 대화에서도 언어보다 더 많은 메시지를 담는 비언어적인 요소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벅찬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기도,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청원기도, 사랑의 마음으로 전하는 찬미기도는 마음 없이 빈말로 되풀이하는 기도와는 전혀 다른 울림을 만든다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말하는 바에 걸맞은 자세와 노력도 중요합니다. 예컨대 주님의 기도를 하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도록 노력하고, 아버지 나라의 완성을 위해 일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힘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양식을 얻기 위해 일하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인내하며, 악을 피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헤아려보면 하루에도 주님의 기도를 여러 차례 하는 것 같습니다. 그 기도를 7%에 불과한 언어로만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마음과 행동을 담아 삶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기도 -참된 삶의 안내서-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살기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삶은 은총이자 신비이자 기적입니다. 이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기도요 우리를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탈선하지 않고 각자 고유의 길을 찾아 가게 하는 기도입니다. 정말 죄는 탈선으로 인해 제 길을 벗어나는 것이요 이 때 큰 사고도 일어납니다.
기도할 때 기도대로 됩니다. 기도는 항구해야하고 간절해야 합니다. 그러면 기도대로 됩니다. 참으로 깨어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살면 나머지는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해주십니다. 얼마전 9.29일 대천사 축일에 있었던 고속도로에서의 대형교통사고에도 기적적으로 무탈할 수 있었음은 순전히 기도의 은총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어제 상처부분 꿰맨 실밥도 다 풀었고 이제 병원은 그만 가도 됩니다. 다시 여러분에게 꼭 당부할 말씀은 운전하기 전, 또 차에 탔을 때 반드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어제는 마침 수도원을 사랑하는 코이노니아 자매회 모임도 있었습니다. 다섯 자매들이 참석했고 오랜만에 참석한 어느 자매도 감사의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오늘 8개월만에 수도원에 다녀오니 새삼 모든 것이 주님 은총이었음을 깨닫습니다. 큰 사고였음에도 기적적으로 무탈하신 신부님을 뵈오니 저절로 감사가 나왔습니다. 수확을 앞둔 배밭이 풍요롭고 아름답습니다. 쉬지않고 기도하며 일하신 수도원의 배즙으로 원기를 회복합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1571년 10월7일, 참으로 유럽 그리스도교 국가들엔 명운이 걸린 절체절명의 날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이날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바다에서 5시간에 걸친 참으로 치열했던 레판토 해전에서 세계 최강의 이슬람 제국에 대승을 거둠으로 유럽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날은 마침 주일이었는데 로마 시민들은 하루 종일 한마음으로 그리스도교 연합군의 승리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쳤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그대로 기도의 힘이, 하느님의 힘이 여실히 드러난 날입니다. 저절로 주님이 하신 일 놀랍기만 하다는 고백이 나올만 합니다.
마침 10월은 묵주기도 성월이기도 하며 9월은 순교자 성월, 11월은 위령성월, 그러니 가을은 그대로 기도의 계절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수확의 계절인 가을에 참으로 인생사계중 가을 나이에 접어든 분들 참으로 기도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늘 가까이 언제나 끊임없이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도 감각이 있을 때까지 손에 잡고 할 수 있는 아주 단순하고 정다운 기도가 묵주기도입니다. 하여 묵주는 천국에 가는 패스포드라 하여 수도자들이 선종했을 때 시신은 수의 대신 평상시의 수도복 입은 그대로에다 오른 손에는 묵주를 쥐어 줍니다.
가톨릭 교회의 대표적 두 신심기도인 ‘성로신공’의 십자가의 길 기도와 ‘묵주신공’과 더불어 기도중의 기도라 할 수 있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루가 복음의 다섯 청원에 둘이 추가된 7개 청원이 담긴 마태복음의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핵심은 고스란히 루가복음의 주님의 기도에 담겨 있습니다.
루카복음은 기도의 복음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기도하는 예수님에 대한 많은 정보를 줍니다. 오늘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간청에 예수님은 당신 기도의 노하우를 완전히 공개하십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중심의 가난하고 단순한 평소 삶을 그대로 요약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삶이 절실하고 간절할수록 본질적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성서의 요약과 같은 기도입니다. 인간 무지의 어둠을 환히 밝혀 주는 기도로 참으로 지혜롭게 겸손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과의 소통, 너와 나의 소통, 나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기도대로 됩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평생 숨쉬듯 밥먹듯 바쳐야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습관입니다. 제2의 영적 천성이 되어야 할 기도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도전적인 주님의 기도입니다. 다 각각 고유의 인생길을 가도 획일화의 일치가 아닌 다양성의 일치를 이뤄주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다양성의 일치가 참된 자유와 행복을 보장합니다. 한 하느님 아버지를 삶의 중심에 모심으로 우리 모두는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서로간에는 형제가 되니 비로소 인류가정이 이뤄집니다.
우리는 ‘획일화uniformity’와 ‘일치unity’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일치는 다른 요소들간의 조화를 전제로 합니다. 우리 교회는 정통과 전통과 일관성의 보존자로서 ‘기구적institutional’일 필요가 있고 동시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속에서 적응하고 변화해야 하는 면에서 ‘예언적prophetic’일 필요가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는, ‘생존survival’과 ‘예언prophecy’은, 기구적임과 예언적임은 교회 공동체의 양날개와 같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갈라티아 서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 내용이 나오며 후반부는 바오로가 베드로를 나무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두분 사도는 교회내에서 절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전자를 대표하는 베드로 사도요, 후자를 대표하는 바오로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으로 다양성의 일치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보수의 베드로요 진보의 바오로입니다.
다양성의 일치를 이뤄주는 기도의 힘, ‘주님의 기도’의 힘입니다. 일방적인 기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의 협력을 요구하는 도전적 기도입니다. 주님이 아쉬워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가 아쉬워서 살기위해 하는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도록 기도하며 살 때 우리도 성화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기도하며 우리 또한 노력하게 됩니다.
날마다 일용한 양식을 청하는 동시에 우리 또한 최선을 다해 투신하게 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잘못한 이들을 용서할 때 우리 또한 용서 받으며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깨어 잘 관리하려는 노력을 하게 합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도전이자 분발케 하는 기도요 하여 우리 삶의 꼴을 형성해 주는 날로 예수님을 닮게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결국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기도중의 기도인 주님의 기도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 넷이 1.성서, 2.예수님, 3.미사. 4.주님의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기도하는 대로 삽니다. 기도하는 대로 됩니다. 이렇게 깨어 한결같이 간절히 기도하면 나머지는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십니다. 마르지 않는 기도의 샘같은 평생 배워야 할 주님의 기도입니다. 바로 매일 이 거룩한 미사중 바치는 ‘주님의 기도’ 때마다 잘 배우고 깨닫기 바랍니다.
“티없는 동정이시며, 세상의 여왕이신 복된 어머니시여, 당신의 거룩한 축일을 경축하는 이들이 당신 전구의 힘을 입게 하소서." 아멘.
로사리오 기도의 유래와 본질 <루카 11, 1-4> 10월 7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 신자들 기도의 삶에서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도는 로사리오 기도입니다. 그 짜임새와 편리한 기도문과 묵주는 기도의 절정에 이릅니다. 손에 묵주를 들고 사랑하는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로 알고 있지만, 유래를 알고 본질을 알면서 드리면 더 효과적이고 기도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일반적 정의는 성모님과 함께 주님의 구원 역사를 묵상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성모님께 은혜를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성모님과 함께 주님께 은혜를 청하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유래는 도미니코 회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에 수도자와 성직자는 성무일도를 드리고 신자들은 일정한 기도 형식이 없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몰라 “우리도 그런 기도 형식을 만들어 달라”고 하니 인쇄술이 없는 상태에서 수도자는 필사하여 기도문을 사용하지만, 신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 없어 로사리오기도 형식을 따라 사도신경, 주모경, 영광송, 모두 외우는 기도문과 간주에 구원의 역사를 알아듣는 내용을 묵상하게 했습니다. 성무일도는 우리 입술로 찬미 드린다는 말로 시작하는 기도입니다. 입술에 십자가를 긋는 것처럼 묵주기도 전에 십자가에 친구하고 시작한 기도는 시편을 대신하여 성모송을,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 삼단을 드리면 시편 150편과 같이 150번 합니다. 성무일도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성무일도를 못하는 경우 묵주 기도로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축일은 1571년 이슬람제국과의 전쟁에 승리를 위하여 묵주기도를 드려 승리했다는 것을 기념하면서 묵주기도의 성모님 축일이 되었지만, 묵주기도는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묵주 기도는 성모님을 섬기는 기도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성모님과 함께 주님의 구원 신비를 묵상하는 기도여서 미사 다음으로 중요한 기도입니다.
요사이 빛의 신비를 더하여 주님의 세례, 가나에서 기적, 하느님 나라 선포, 거룩한 변모, 성체성사 세움을 묵상하게 됨은 참으로 묵주기도가 구원의 묵상 기도인 것을 증명해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례 받으신 주님의 역사가 있는 루카 3, 2-16. 4, 1-2과 마태복음 3, 16-17을 알아야 깊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매번 이 부분의 성경을 읽고 빛의 신비 일단에서 성모송을 하면서 묵상한다면 참 묵상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생각과 마음이 없는 형식적 기도, 습관적 기도보다 생각과 마음이 일치한 기도를 드리려면 각 단에서 제시한 신비를 성경의 내용과 함께해야 합니다.
오늘 로사리오 성모 축일을 바로 지내는 의미는 성무일도를 평생의 의무로 알고 시간마다 드리는 성직자, 수도자같이 묵상의 의미를 알고 드려야 합니다.
이 사실을 잘못 알고 있는 개신교 형제들은 우리를 마리아 교회라고 합니다. 묵주기도는 성경의 깊은 내용을 매일 묵상하는 기도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더 가까이 살기 위한 기도입니다
오늘은 제가 준비가 안 되어 단마다 연결되는 성경 구절을 다 전하지 못하지만, 어느 날 필요에 따라 준비해서 별도 기재하겠습니다.
한 단 안에 열 번 하는 성모송 전에 읽고 묵상하시려면 저에게 원본이 있는데 성함과 주소를 보내시면 선착순으로 보내겠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입만 성모송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을 합하여 구원의 역사를 묵상하며 기도합시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함승수 신부님
<‘학사’와 ‘석사’와 ‘박사’와 ‘교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어떤 대학에 파리에 대해 연구하는 ‘파리학과’가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면 처음 배우는 것이 ‘개론’입니다. 개론은 파리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가르칩니다. 정말 재미없습니다. 파리학과 학생들이 파리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인 ‘파리학 개론’을 배운 다음에는 ‘각론’을 배우게 됩니다. 파리의 부분 부분에 대해 더 자세하게 배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파리 앞다리론’, ‘파리 몸통론’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파리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마치면 ‘학사’학위가 주어집니다. 이때가 되면 파리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현장에 나가보면 지금까지 배운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더 배워야합니다. 석사과정에 들어가면 한 부분을 깊이 배웁니다. ‘파리 뒷다리’에 대해서만 깊이 파는 것입니다. 이 연구를 ‘파리 뒷다리 관절상태가 파리 움직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결과를 맺습니다. 이때가 되면 파리 뒷다리에 대해서는 자신이 가장 많이 아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파리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학사들보다는 겸손해집니다. 이제 무엇을 모르는지 알 것 같으면 ‘석사’가 된 것입니다.
박사과정은 더욱 좁고 깊은 영역을 탐구합니다. ‘파리 뒷다리 발톱’정도가 될 것입니다. 좁은 영역에서 많은 이야기를 끌어내자니 머리가 희거나 빠지거나 시력이 안 좋아지는 부작용을 유발합니다. 그래도 고생 끝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만의 자랑스러운 자식이 탄생합니다. 박사논문입니다. 논문 제목이 예를 들면 ‘1년생 파리 뒷다리 발톱의 성장 패턴이 파리 먹이 취득 방식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와 같습니다. 그리고 열정에 불타 파리 뒷다리 발톱에 낀 때에 관해 책을 씁니다. 그러면서 그 때의 색깔이 노랑인지, 검정인지, 푸른색인지에 따라 같은 주장을 하는 지식인들과 연대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대학에 와서 강의할 때 다시 ‘파리학 개론’을 가르칩니다. 개론은 너무 단순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공부한 것을 드러내기 위해 조금은 어렵게 설명을 해야 합니다. 물론 가끔 파리 뒷다리 발톱의 때에 관해서도 살짝 언급을 해 줍니다. 쉬운 것을 어렵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이런 수업을 듣고 ‘교수’님의 학식에 놀라 감탄합니다. 어렵고 재미없게 파리에 대한 개론을 배운 학생들은 또 개론을 배우고 파리에 대해 다 아는 사람처럼 학사학위를 받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생각지도]라는 책에 실린 내용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이 되려면 그 분야에 대해 남들보다 더 많이, 더 복잡하고 자세한 것들까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그 분야에서 일반인들은 갖지 못한 ‘전문성’을 갖게 되고, 그렇게 해야 그 분야의 일을 잘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그들은 아마 요한의 제자들이 놀라운 언변과 화려한 수사법을 동원하여 ‘멋지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부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 보다 자세하고 심오한 부분까지 배움으로써, 그들 앞에서 보란듯이 멋지게 기도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기도의 방법은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심오하지도 않습니다.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소박하며, 그러면서도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 파악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기도를 바치는 이유는 현란한 수사법을 동원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고,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살면서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되새기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 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가치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 즉 우리 삶 속에서 그분의 섭리인 정의와 자비가 실현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일용할 양식’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비단 먹을 것에 국한되는 청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소유하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을 ‘필요한 것’ 이상으로 욕심내고 집착함으로써 다른 이를 궁핍한 삶에 빠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필요한 것 이상을 소유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재물’에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 굳이 하느님을, 그분의 도우심과 은총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니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용서’를 청하되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지니라고 하십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조건도 없이 ‘먼저’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지만, 그 ‘용서의 은총’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실현되려면, 그리하여 다시금 같은 잘못에 빠지지 않는 영적인 힘을 기르려면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머리로만 ‘기억’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나 또한 용서를 꾸준히 실천함으로서 그것을 내 삶으로 만들어야만 하느님께서 심으신 용서의 씨앗이 자라나,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복잡하고 심오한 ‘지식’이 아니라,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꾸준히 반복되는 ‘실천’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기도’를 눈이나 입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바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내 삶에서 실현되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주님의 기도’에 담긴 참된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현재의 터키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제국)은 세력 확장을 위하여 유럽을 침공하였습니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제국의 대군을 무찔렀습니다. 이 전투의 대승은 묵주 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비오 5세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훗날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젊을 때는 주님 대전에 앉아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과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성모님 앞에서 묵주기도를 하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습관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2절) 라고 이르십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2-4절)
우리는 이 기도문을 주님께서 몸소 제자들에게 이르신 기도라고 하여 ‘주님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주님의 기도 중심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는 아버지의 나라’가 등장합니다. 우리가 사는 나라는 인간이 서로를 위한답시고 하면서 결과적으로 서로를 괴롭히기까지 하는 이기적이고 진영의 논리로 지배하려는 아귀다툼의 어지러운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와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와 우리 다음 세대에까지도 다 좋은 결정을 내리시고 그 결정을 현실로 이루어내시는 거룩하신 분이시라고 일러주십니다. 그러기에 그 거룩하신 아버지의 뜻대로 돌아가는 나라가 되면 우리가 구원의 나라에 들어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 거룩한 나라에 잘 먹고 살아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하고, 마음속에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원망을 간직하고는 사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에 서로 용서하도록 해주십사 청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죄와 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인간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주 하느님의 힘으로 우리를 죄와 악의 유혹에서 건져주십사고 청합니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은 주님의 기도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르침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교황님께서 일반 알현 때 16번에 걸쳐 주님의 기도를 나누신 적이 있습니다. 그 중 작년 2월 13일 수요일에 나누신 내용 중 일부를 나눕니다.
“주님의 기도” 본문 안에는, 매우 인상적으로 빠진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 텍스트 안에서, 매우 인상적으로 빠진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에게 제가 물어본다면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아마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 본문에)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두 함께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의 기도” 안에 없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빠져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한 가지 단어가 없습니다. 우리 시대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단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매일 기도하는 “주님의 기도”에 누락된 단어는 무엇일까?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나”라는 단어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나”를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입술에 “당신”이라는 말을 두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나’의 이름, ‘나’의 나라, ‘나’의 뜻이 아닙니다. ‘나’가 아닙니다. ‘나’를 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바로 “우리”로 넘어 갑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주님의 기도”의 두 번째 부분 전체는 1인칭 복수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굶주림을 채우기 위한 일용할 음식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청원마저도 모두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기도는 결코 아무도 ‘나’를 위한 빵을 달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라고 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주시라고 기도하면서, 모두를 위해, 세상의 모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청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 안에) “나”라는 단어가 빠져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이신) ‘당신’과 ‘우리’가 함께 기도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아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 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청원과 감사
빛사이에
기도가 있다.
삶 안에
기도가 있고
기도 안에
삶이 있다.
삶 자체가
신비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신비는 삶을
껴안는
힘이 된다.
은총의
묵주기도는
모든 시간에
함께하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사랑은 기도로
우리를 이끈다.
사랑은
신비의
현존이다.
하느님의
현존으로
충실함과
진실함이
관계의 바탕이
된다.
관계의 여정이
묵주기도의
참된 여정이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여정이
되게한다.
신뢰는
봉헌으로
이끈다.
봉헌으로
예수님과
성모님의 삶을
다시 만난다.
삶의 자리가
기도의 자리이다.
삶의 시간은
기도의 시간이
된다.
기도는
묵주처럼
나와 너를 이어주고
나와 너를 지켜준다.
묵주기도는
날마다 바치는
사랑의
실천이다.
날마다 신비에
참여한다.
날마다
하느님 사랑에
참여한다.
이발을 할 때, 저는 주로 미장원을 이용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가는 단골집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사람이 없는 곳을 갑니다. 그래야 빨리 이발을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손님 없는 곳이라 그 실력에 의심이 생깁니다. 너무 형편없는 곳이라서 손님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름 기준을 세웠습니다. 첫 번째는 손님이 없어서 곧바로 이발을 할 수 있는 곳이고, 두 번째는 매장 안을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꾸몄는지를 봅니다. 자신의 일터를 소중하게 여기는 미용사라면 그만큼 머리손질도 정성껏 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강의를 하러 갔다가 시간이 남아서 이발을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이번에도 비어있는 미장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사는 지역이 아니라서 어디가 이발을 잘 해줄지 알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어느 미용실에 손님은 하나도 없는데 상장이 벽면에 가득 붙어 있는 것입니다. 대단한 실력자가 있는 곳이라 생각하면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글쎄 벽면에 붙어 있는 상장은 미용에 관련된 상장이 아니라, 이분 자녀의 상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착각 속에서 오해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옳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제대로 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 중의 하나가 주님께 대한 기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즉, 자신이 기도를 하면 무조건 주님께서 들어주셔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에게 필요 없는 분으로, 때로는 아예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서 신앙을 저버리기도 합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들의 착각이고 오해입니다. 물론 청원기도가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만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도는 결코 올바른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이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나의 고민을 풀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기도는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더 이상의 착각과 오해에서 벗어난 참된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세상의 어떤 고통과 시련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큰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제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는 기도를 바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안에서의 만족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의 만족을 구하는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수록 밖에서 나는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다(다그 함마르셀드).
73 미리내
미리내 성지는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때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어 옹기를 굽고 화전을 일구어 살았던 곳입니다. 밤이면 불빛이 은하수처럼 보여 미리내라고 불리게 되었지요. 병오박해(1846) 때 순교하신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가 미래에 안장되면서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곳입니다.
성지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 그리고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이자 김대건 신부님께 사제품을 준 페레올 주교님의 묘가 있습니다. 또한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을 새남터에서부터 이곳으로 옮겨 와 안장하고 선산을 교회에 봉헌한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1976년, 수원교구에서 용인 지방에 산재해 있던 무명 순교자 17위의 유해를 미래내 성지 내 수원교구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하였는데, 그중 1위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입니다.
미사는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오전 11시 30분, 그리고 주일에는 오전 11시와 오후 2시에 봉헌됩니다. 주소는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로 420이고, 전화는 031-674-1256입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이자 탁월한 기도, 주님의 기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임종을 준비하고 계시던 한 형제를 찾아뵈었을 때였습니다. 평소 열심한 신앙생활을 해온 형제였지만, 이제 기력도 쇠하고, 정신도 혼미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기도를 하고 계셨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바로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아마도 고인께서 평소 자주 바치셨던 기도였던가 봅니다.
우리도 언젠가 때가 되어 요르단 강을 건너갈듯 말듯 한 순간, 모든 육체적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고, 정신력도 가물가물 사라져갈 무렵,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바치게 될 기도는 바로 주님의 기도일 것입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초대 교회 신자들은 사자떼들이 달려드는 순교 현장에서 하늘을 향해 눈을 들고 두팔을 벌리고 큰 목소리로 주님의 기도를 합송했다고 합니다.
주님이 기도는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 바치는 여러 기도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기도이자, 가장 먼저 바치는 기도이며, 가장 중요한 기도입니다.
세례성사 이후 그리스도교 신자로 살아오시면서 다들 셀수도 없이 이 기도를 바쳐오셨을 것입니다. 미사 중에, 아침저녁기도 중에, 묵주기도 중에, 다양한 기도의 마무리 기도로. 너무 자주 바치다보니 조금은 식상하고, 때로 습관적으로 바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바치다보니 주님의 기도의 중요성을 간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의 기도는 기도 중의 기도입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인 동시에 가장 탁월한 기도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의 기도는 기도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중요한 기도입니다.
또한 주님의 기도 안에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요소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며,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가, 주님의 기도 속에 모두 축약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앞서 사셨던 성인성녀들께서 힘주어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복음서 전체의 요약입니다.” (테르툴리아노 교부) “주님의 기도는 복음서 전체의 종합입니다.” (마르티니 추기경)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그 어떤 책보다도 훌륭한 주님의 기도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묵상한다면, 다른 책이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에게 단순히 ‘이렇게 기도하라!’고만 가르쳐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는 동시에 ‘이렇게 살아라!’고 구체적인 행동강령까지 제시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바치는 주님의 기도가 입술에서만 머무는 기도가 되어서는 곤란하겠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내용이 우리 매일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적용되고 실현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삶과 결부되고 병행되는 것이어야겠습니다.
밤늦은 시간 주님 앞에 앉아 천천히 주님의 기도를 드리다보니, 참으로 큰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돌아보니 많은 경우 아버지의 이름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내 이름, 내 얼굴, 내 명함이 드러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자주 아버지의 나라 건설보다는 내 왕국을 건설하고자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내 침실, 내 사무실, 내 영역 안에 아버지의 나라보다는 내 나라를 건설하고, 두터운 장막을 치고, 이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철벽방어를 해왔습니다. 그 결론은 언제나 꼴불견이요 상처투성이였습니다.
<기도의 방법이 변하지 않는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삼형제 중 막내로 자랐기 때문에 통 여자와는 대화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여자와 이야기하면 놀림을 받았고 중학교 올라가니 스스로 창피한 마음이 들어 말을 걸 수조차 없었습니다. 만약 누가 말을 걸어와도 오래 대화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여자들이 말을 걸어줄 때 나름 노력하며 대화를 해보려했지만 겉도는 대화만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남자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더 따분했습니다. 더 두려웠던 것은 둘이 있는데 서로 할 말이 없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대화의 기술에 대한 책들을 여러 권 읽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대화 방법을 열 개 추려서 적어놓고 그 종이를 지갑에 항상 넣고 다니며 되새기곤 했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상대가 관심 있어 하는 것을 질문하라.”
지금 보아도 대화에서 이것이 가장 핵심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어색한 순간들이 없지는 않지만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크게 두렵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바뀌었습니다. 어떤 때는 침묵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혼자 이야기도 하며, 어떤 때는 들어주고, 어떤 때는 가르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상대의 말도 끊어버립니다. 그렇지만 이전보다 소통을 못한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말을 많이 하고 안하고가 소통의 깊이와 정비례하지는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대화의 기술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소통하고 싶다면 소통의 방법을 배워야합니다. 그리고 그 소통의 방법은 시간이 지나고 성장하면서 조금씩 바뀝니다. 그렇다고 이전 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소통을 하고 싶다면 그 방법을 찾아내려 하고 계속 새롭게 더 알맞은 것을 찾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웃과 소통하고 싶지 않다면 소통의 방법도 새로 찾거나 적용해보는 노력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냥 남이 물어보는 것만을 단답형으로 대답하고 침묵을 금으로 여기고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관계에 발전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기도하고 계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와서 자신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청하기 전에는 기도도 가르쳐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분명 요한이 가르쳐 준 기도는 알고 있습니다. 요한과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엔 예수님의 기도법을 알려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방법은 하나일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이 하나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을 만나는 방법이 만나서 얼굴만 쳐다보는 것 하나뿐일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 때는 아이와 만나는 방식이 있고 어른이 되면 어른의 방식이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 영성이 성장하고 있다면 당연히 기도하는 방법도 변하고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지금 수준에 맞는 기도법을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신 것처럼 언제나 수준에 맞는 기도법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미국과 유럽등지에서 BTS 콘서트가 있는 콘서트 장에서는 일주일 전부터 밖에 텐트촌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콘서트를 앞에서 보기 위해 며칠 전부터 텐트를 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더 가까이서 만나기를 원한다면 그 방법은 다른 사람들과 차별되어야 합니다. 더 앞에서 보고 싶은데 당일에 시간 맞춰 온다면 실제로는 더 앞에서 보고 싶었다는 마음은 거짓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오래 한다고 해도 기도하는 방법에 발전이 없다면 그 신앙인은 실제로는 그런 정도에 만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더 가까이 가고 싶으면 이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더 가까운 자리를 잡아야합니다. 기도의 방법도 신앙이 높아질수록 더 깊게 변해갑니다. 주님의 기도는 1분이면 바치지만 아빌라의 데레사는 주님의 기도 한 번 바치는데 1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하는 마음입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알려주십니다. 더 가까이 가려는 의지가 더 새로운 기도법을 배우는 원동력입니다. 기도 방법도 신앙의 수준에 따라 발전해가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주교구의 주교좌인 중앙 성당에서 미사참례를 하였습니다. 가끔씩 주례나 공동 집전을 하지 않고 신자 석에서 미사참례를 하곤 합니다. 색다른 느낌이고, 신부님의 강론을 듣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서품 30주년을 맞이하는 신부님께서 ‘기도의 여정’이라는 책을 출판하셨고, 교우들이 읽을 수 있도록 판매를 하였습니다. 수익이 생기면 전액 성소후원회를 위해서 봉헌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신부님께서 직접 사인해 주신 책을 구입했습니다. 며칠 동안 책상 위에 있었는데 오늘 그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기도에 대한 갈망이 있는 분들은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여정, 생활성서, 남승택 신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다른 유다인들에 비해 월등히 엄격하고 경건하게 지냈습니다. 부정직하지도 않았으며, 구약의 관습에 따라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바쳤습니다. 이들은 규정을 잘 지키며, 신앙적으로 모범적인 생활을 보여 주었습니다. 즉 바리사이들은 율법이 정한 규범을 누구보다도 잘 준수하면서 은연중에 규범에 충실한 자신의 생활을 자랑하며, 그 능력을 통해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사고에는 자신의 능력과 의지가 먼저 자리를 잡아 하느님의 은총은 들어설 자리가 없어지며, 자비와 은총에 대한 중요성도 사라집니다.(기도의 여정 45쪽)
그에 비하면 세리는 일반적으로 부정과 부패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로마에 협조하는 관리였기에 이스라엘 민족을 배반하는 자로 치부되었습니다. 민족의 입장에 볼 때 세리는 저주받아야 할 인생이었으며,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모리배였습니다. 세리는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자인하고 고개도 들지 못하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아니라면 자신이 비참한 신세에 벗어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겸손한 기도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간절히 청했던 것입니다.(기도의 여정 46쪽)
예수님께서는 의롭다고 생각했던 바리사이의 기도보다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던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청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며,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세리의 기도이며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기도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이었다면 매일 미사참례를 했어도,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했어도 그것은 바리사이의 기도이며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기도는 아닐 것입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제게 이러한 습관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인터넷의 도움으로 묵상한 것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이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연수원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새미 은총의 동산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할 수 있는 길이 있고, 묵주기도를 할 수 있는 호수가 있습니다. 가까운 거리에 기도할 수 있는 동산이 있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주님의 기도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27주 수요일
복음: 루카 11,1-4: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다. 주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심으로써 제자들이 기도를 통해 당신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참여하게 하신다. 즉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준 기도이며, 그러기에 그분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자녀로서 또한 큰 책임을 부여한 기도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2절) 주님은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신다. 종들을 자유라는 지위로 들어 올리신다.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들의 대열에 있게 하신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그분께 맞갖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때에 우리의 간청을 받아주실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2절) 이 기도의 의미는 ‘그분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과 뜻 안에서 거룩하게 지켜지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이 기도는 그분의 이름이 영예롭고 거룩한 것임을 알고 고백하는 마음과 믿음이 자신에게 생기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이 기도가 생명의 근원이며 축복의 원천이다. 구원받아 높이 들어 올려지는 데 더 좋은 기도는 없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2절) 아버지의 나라는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마태 25,34)이다. 이것이 우리의 청원이다. 그 나라는 올 것인데, 만일 우리가 왼쪽에 서게 되면 우리는 그 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나라에서 모든 구원받은 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우리도 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3절) 일용할 양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빵만이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 또한 영적인 양식으로 단 하루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양식을 청하는 것은 그분 안에 살고 그분과 하나 되기를 청하는 것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4절)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빌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그들이 어떤 잘못을 했던지 용서해야 한다. 이렇게 용서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는 마지막으로 유혹자에게 끌리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즉 죄만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피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루과이의 한 작은 성당 벽에 이런 기도문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이라고 하지 마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딸로 살지 않으면서..."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라고 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말아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악에서 구하소서”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아멘'이라고 말하지 말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자기 기도로 드리지 않으면서."
사실 우리가 정말 많이 드리는 주님의 기도이지만 때로는 아무런 생각 없이 앵무새처럼 기도를 드릴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곧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만나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추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사도 여정이 되길 기도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가끔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부족한 정보를 바탕으로 적절하지 못한 결정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나중에 그것이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되새기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과오가 되어버려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을 지나쳐 온 지금 자신의 과오에 대한 회개의 작업으로 자선을 선택해왔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토빗은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암흑에 빠져 들지 않게 해 준다.”(토빗 4,10) 라고 하고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 자선을 베푸는 이들은 충만한 삶을 누린다.”(토빗 12,9) 라고 하며, 집회서에서는 “물은 타오르는 불을 끄고 자선은 죄를 없앤다.”(집회 12,3)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3) 라고 하시며,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루카 11,4) 라는 구절에 깊이 머물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는 처음에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아버지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청하며, 후반부에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 스스로 자격을 갖추는 노력을 기울이도록 주님의 섭리로 이끌어주시기를 청하게 됩니다. 지난 우리의 과오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주 하느님께 원수 같은 이웃과 어려운 형제들에게 다가가 우리의 용서와 자선을 죗값과 공덕으로 봉헌합시다.
<주님의 기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10. 10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저희의 따뜻한 마음으로 당신의 온유함을
저희의 해맑은 웃음으로 당신의 포근함을
저희의 올곧은 행동으로 당신의 정의로움을
아직은 당신을 모르는 이들에게
아직은 당신을 온전히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께서 저희에게 드러내시듯
저희가 드러내게 하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저희의 낮춤으로 섬김의 당신 나라를
저희의 내어줌으로 나눔의 당신 나라를
저희의 보듬음으로 화해의 당신 나라를
아직은 지배와 경쟁으로 갈라진 세상에
여전히 죽음 같은 경쟁을 강요하는 이들에게
당신께서 저희에게 곱게 심어주시듯
저희가 곱게 심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내일을 위해 정성껏 모아둔 저희의 양식을
오늘 배고픈 이들에게 아낌없이 나눔으로써
내일 저희만이 누릴 헛된 안락이 아니라
오늘 더불어 사는 가난한 풍요를 선물하시는
당신께 감사드리게 하소서.
“저희의 죄를 용서하소서.”
떨리는 약한 손길들을 뿌리쳤음에
죄 없는 억울한 주검들에 눈을 돌렸음에
삶에 짓눌린 애끓는 울부짖음을 비아냥거렸음에
가슴 찢는 통회의 마음가짐과 몸짓이
당신께 드리는 용서의 기도가 되게 하소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서서히 저희의 온 몸과 마음 얽어매어
당신을 섬기듯 자신을 섬기라며
당신을 밀어내고 자신을 심으려는
끝 모를 탐욕을 부추기는 재물과 권력의
달콤한 죽음의 유혹을 거슬러
언제나 어디서나
오직 당신만이 저희의 주님이심을
당당하게 고백하게 하소서. 아멘.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는 사람 <루카 11, 1-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생명을 지니기 시작하면서 어머니 태 안에서부터 스트레스를 받으며 성장합니다. 부모로부터 어머니 자신이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거나, 신경질을 부리거나, 강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태아에게 영향을 주게 되고 어린 아기는 불안 근심에 빠져 세상에 태어나도 같은 영향 속에 살게 되어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런데 이 상처를 그대로 두고 살면 그런 것이 모든 병의 원인이 되어 우울증, 조울증, 의욕 상실증, 대인 기피증 그 외 정신적 장애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이는 분명이 상처받은 것을 치유 받지 못하거나 슷로 용서하지 못하면 아버지 하느님으로 오는 자비를 받지 못하거나 아버지와 하나가 될수 없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상처 받은 것을 자신 안에 해소하지 못하고 세월이 지나면 점점 커져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복수심 까지 성장하고 희망 없는 삶으로 전의 되어 암보다도 더 무서운 병이 됩니다. 그래서 상처를 극복할 능력을 기워 나가야 합니다. 그라나 자기에게 상처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는 것은 죽음보다 더 힘든다고 하면서 내려 놓으며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깊이 살피고 묵상해보면 상처의 치유가 얼마나 중요하지를 알게 합니다. 아버지에게 용서 받지 못한다는 스스로의 고백은 하면서 실천 못하는 것은 유훅에 빠지겠다는 말씀이고 온갖 악에 휘둘리겠다는 말도 돱니다. 결국은 용서 하지 못하거나 자기 상처를 내려 놓치 못하면 너도 죽고 나도 죽에 됩니다. 오늘 이사야 33/13-16,를 보면 그 상처와 원수 관계를 해결하는 묘수가 있습니다.
1, 복수에 찬 말에 아에 귀를 막고, 악을 외면하고 눈을 감는 자들이로다.
이는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귀로 들은 것 눈으로 보것에 무감각하게 되 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이가 쓰례기 통을 마음 깊이 모시고 살면
냄새나 나고 마음이 함께 썩게 됩니다. 기억에서 빼버리고 오히려 좋은 것을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거스르는 사람은 하느님을 거스러 유혹 에 빠지고 악에 시달리게 됩니다.
2, 이런 이들은 드높은 곳에 살며 바위 위에 성곽이 그의 피난처이며. 그에게 언제나 빵이 주어지고 물으 그에게 늘 있으리라.
상처를 치유 받고 워수를 용서 하는 사람은 높은곳 아버지의 나라에 살게 되고 그런 사람에게는 의식주 걱정 없이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의 기도를 들이는 이는 마음이 치유를 받고 원수와 아버지 앞에서 뛰놀면서 살아 있는 의미를 깨우치고 행복한 살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참 아름답고 도전적인 영원한 기도 -주님의 기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벽 성무일도시 마음에 와닿은 시편성구입니다.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86,4)
이처럼 우리 마음 늘 주님을 항하여 있음이 바로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며칠 전 영명축일에 저는 세가지 참 좋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신부님이 선물한 모자요, 둘은 자매님이 선물한 성 프란치스코 이콘이요, 셋은 수녀님이 선물한 백자 성반과 성작입니다. 모두가 사랑과 기도가 가득 담겼기에 시간이 지나도 ‘짐’이 아닌 ‘선물’로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답입니다. 삶과 기도는 함께 갑니다. 아니 삶과 기도는 하나입니다. 믿는 이들만 아니라 사람이라면 기도는 사람됨에 필수 요소입니다. 기도가 빠진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인간됨을 위한 분명한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분도회 모토대로 ‘기도하고 일해야, 하느님 보고 사람 보고, 하늘 보고 땅 보고’ 그래야 균형잡힌 전인적 삶입니다. 너무나 자명한 이치입니다. 기도없이 사람되는 길은 없습니다. 날로 세상이 삭막해져가고 인간성이 황폐되어가는 것은 기도가, 영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없는 사람은 욕망의 짐승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혼의 힘은 쇠약해지고 남는 것은 육신의 욕망뿐이요, 건강, 돈이 삶의 전부가 되어 버립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바 노년의 품위 유지의 우선 순위도 1.기도, 2.건강, 3.돈입니다.
새벽 눈 뜨니 두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대통령, 프란치스코 교황 만나 북초청 의사 전달’;김정은 “교황 평양 방문하면 열렬히 환영하겠다.”-라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10월17일부터 18일까지 교황청을 공식 방문해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 초청의 뜻을 전달할 것이라 합니다.
이 또한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교회의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노력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한반도의 평화 분위기는 대세가 된 듯 합니다. 하느님의 이 ‘평화의 물결’을 아무도 바꾸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듭니다. 또 하나의 소식은 얼마전 택시 운전을 시작한 가난한 젊은 신자 형제로부터 전해 받은 카톡 메시지입니다.
“신부님, 어제 저녁 6:30부터 새벽 2시인데 3만원이 안되네요. 어제는 귀인을 만나 줄줄이 손님도 많았었는데--- 홍콩, 싱가폴, 어디라도 좋습니다. 돈 버는 데로 가고 싶습니다. 비도 오고---”
젊은이들에게 세상 삶이 얼마나 팍팍한지 보여 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오랜만에 듣는 ‘귀인貴人’이란 말마디가 반가워 찾아보니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고 반대말은 ‘천민賤民’이었습니다. 아, 정말 기도를 통해 영적 천민이 아닌 존엄한 품위의 영적 귀인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 많아 귀인이 아니라 돈 없어도 맑고 밝은 기도와 사랑의 사람이라면 영적 귀인입니다.
하느님이 이상이라면 돈은 현실인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는 필수입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살기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나이들어 가니 힘들고 바빠지는 게 한 둘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생 싸워야 할, 경쟁해야할 궁극의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기도가 답입니다.
사실 우리 수도생활에서 기도를 빼버리면 뭐가 남습니까? 아무 것도 아닌 허무와 무의미의 어둠뿐일 것입니다. 새삼 하느님은 우리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하느님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만나야 할 생명과 사랑의 살아있는 하느님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이 기도입니다. 기도가 사랑에 불을 붙이고 사랑에서 샘솟는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랑의 불도 꺼져 거칠고 사나워질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가 사랑의 삶을 살게 합니다. 끊임없이 우리 사랑을 정화하고 성화하여 맑고 밝은 사랑으로 타오르게 하는 기도입니다. 바로 오늘 1독서의 바오로의 열정적인 사랑의 활동 역시 기도의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늘 기도하라' 권했고, 우리는 새벽성무일도 찬미가중 '옥중에 갇혀있던 바오로처럼 밤마다 우리주님 찬미하리다.'노래했습니다.
기도의 복음이라 할 수 있는 루카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명한 주님의 기도입니다. 참으로 영원히 아름답고 도전이 되는 본질적인 기도입니다. 복음의 서두부터 인상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제자들과 함께 했지만 홀로 하느님과의 시간도 반드시 마련했던 주님이셨습니다. 주석을 보니 평범한 내용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루카는 자주 ‘예수님의 기도’를 언급한다. 이 기도야말로 그분께서 당신의 아버지와 만나시는 ‘때와 장소’이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는 말마디가 참 고맙습니다. 침묵이든 대화든 주님과의 만남이 기도입니다. 우리 역시 찬미와 감사의 미사공동전례를 통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위로와 치유도 받고, 기쁨과 평화도 선물로 받습니다.
사막교부들은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언제 어디나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가난하고 겸손한 우리들에게 당신 삶이 요약된 참 삶의 헌장과도 같은 단순하고 진실한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마태복음의 일곱청원 기도보다 더 간단해진 다섯의 본질적인 청원입니다.
-“아버지, 1.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시며. 2.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5.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참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의 절박한 청원입니다.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자체가 축복의 구원입니다. 군더더기가 말끔히 생략된 본질적 기도입니다. 참 단순하여 아름답고 깊은, 그러나 끊임없는 자극과 도전이 되는 기도입니다. 모두가 아버지라 부를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기에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서로는 형제가 됩니다.
혈연의 자녀와 형제보다 더 깊고 근원적인 하느님과 형제들과의 관계입니다. 바로 이런 관계를 새롭게 확인하는 매일의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저는 감히 하느님께서 신자들에게, 아니 온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 셋이 성경, 예수님, 미사라고 단언합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우리의 의무와 책임이 있어 도전이라 하는 것입니다. 청원기도에 걸맞는 우리의 노력입니다. 하느님께 협력하여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도록, 또 하느님의 나라가 오도록 우리의 간절하고도 항구한 노력이 전제되기에 도전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최선의 노력이, 나에게 잘못한 이에 대한 자발적인 용서의 노력이,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한 우리의 깨어 있는 삶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깨어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하는, 끊임없는 자극과 도전이 되는 참 아름다운 본질적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 삶을 주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꼴잡아가는 참 좋은 선물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의 기도가 우리 각자 삶을 통해 이뤄짐으로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당신을 바라는 이에게, 당신을 찾는 영혼에게 주님은 좋으신분!”(애가3,25). 아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11, 1-4(연중 27주 수)
오늘 <복음>은 흔히 ‘주님의 기도’로 불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준 기도’를 전해줍니다. 먼저, 이 기도의 두 가지 배경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1, 1)
<첫째 배경>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제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분의 기도하는 모습 속에서 지금까지 유다인들에게서 보지 못한 새로운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의 유다인들은 12세 이상의 성인이 되면 매일 아침과 저녁에 신앙고백으로 “들어라 이스라엘아”(신명 6, 4~)로 시작되는 ‘쉐마 기도’를 의무적으로 바쳤고, 18개의 축복기도문으로 되어 있는 ‘셰모네 에쉬레 기도’를 아침, 오후, 저녁이 시작되는 시점에 규칙적으로 바쳤으며, 회당에서 설교 후에는 ‘카디쉬’라는 기도를 짧은 형식의 응답기도로 바쳤는데,) <마태오복음>의 병렬복음에 따르면,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주로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 서서 위선자들처럼 드러내 기도하기를 좋아했고, 또 빈 말로 많은 말로 되풀이하며 이방인들처럼 기도했던 것입니다(마태 6, 5-8).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와는 반대로, 골방에 들어가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시고, 또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는 아버지시기에 빈 말이나 길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의 관습적이고 의례적인 기도와는 그 모습이 달라도 너무도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중의 하나가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묻게 됩니다.
<또 하나의 배경>은 당시 로마의 억압과 과도한 새금 징수와 종교인들의 부패 속에서 종교적 민족적 메시아 대망사상을 담은 부흥운동 그룹들이 나타나 그들의 열망을 담은 기도문들을 가르쳤고, 세례자 요한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그 제자는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주님의 기도’의 탄생 배경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새 공동체의 원리와 삶과 질서를 담은 새 기도문이 요청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곧 새로운 나라, 새로운 공동체로를 향한 혁명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태오복음>에서는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윤리와 삶을 이야기 하고 있는 “산상설교”의 중심에 이 기도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곧 새로운 나라의 삶의 원리와 질서를 말하고 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또 다른 특성>으로, 이 기도는 “저희에게 가르쳐주십시오.”라고 청해진 기도이며,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라고 하신, 개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에 주어진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처음 시작부터가 충격입니다. 하느님을 단지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압바”라는 친밀함으로 부르시며,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건네주십니다. 곧 인간인 저희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원과 지위로 들어 올리십니다. 저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시어, 당신과 함께 아들인 성자의 반열에 들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시편작가의 노래를 실현하십니다.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 2)
우리는 이 특전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충격은 그냥 “압바”가 아니라, “우리 압바”인 것입니다. 곧 복수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한 형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우리’에는 시제가 없습니다. 곧 과거의 선조들과 예언자들을 포함하여 미래의 하느님의 자녀들까지를 포함하여 “우리”라는 형제 가족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로서의 삶의 원리가 기도로 주어집니다. 곧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이들에게 걸 맞는 삶이 소명으로 주어집니다. 곧 자녀로서의 삶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다름 아닌 ‘자녀의 길’을 걸어갑니다. 오로지 아빠 아버지께 속해 있는 아들, 딸로서,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길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나게 하는 일이요, 자신이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나라를 이루는 일이요,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생명의 빵으로 선사하신 당신 아드님을 “양식”으로 삼는 일입니다. 곧 당신의 아드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며,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일입니다. 또한 아빠 아버지의 일이신 “용서”하는 일을 하는 것이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시련이나 “유혹과 악”에서도 아버지를 신뢰하는 일이요, 자신이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의탁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유혹과 악”을 제거해 달라거나 없애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빠지지 않게 구해달라고 아버지께 청하는 일입니다. 바로 그것을 통해서 아버지께 마음이 향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곧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 속에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것을 통하여 아버지를 만나는 일입니다.) 아멘.
기도생활의 반석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기도는 너무 자주, 흔하게 바치는 기도이기에 고루하고 낡은 기도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완전한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미사여구와 성경말씀을 덧붙여 길게 늘어놓아야 기도를 잘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그저 입으로 외우는 것으로 만족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가장 완전한 기도이면서도 깊이 있는 기도이니 입술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사랑을 담아서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 기도생활의 반석"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아버지'에게서 받는데 성령의 은총 없이는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시며 '아버지'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나 도전의 순간에 언급하셨는데 만약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고 느끼지 않거나 그분의 자녀라고 여기지 않아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믿음이 없거나 어휘의 나열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 시선을 느끼게 해 줍니다. 아버지께 향하는 기도의 말은 미신에서 하는 주문처럼 소용없는 말들이 아닙니다. 나를 당신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주신 분에게 향하는 목소리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임을 깨닫고 동시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는 아버지가 계심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기도는 모두를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잊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친밀한 아버지로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중 하나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반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희망하고 후반부는 우리 서로간의 용서와 화해를 청하며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과 땅이 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도록 비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챙겨주게 될 때 주님의 기도는 완성됩니다. 그때 하늘 아버지를 당당하게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자신이 아버지의 품위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고,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고 또 이것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사실“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사랑과 사랑이 통하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깊은 기도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행복한 기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어제 마르타와 마리아 얘기 뒤에 오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듣는 복음을 배치한 것은 루카복음의 의도일지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마르타는 종종 기도 또는 관상의 모범으로 얘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말의 영향 때문인지 기도를 뭔가 내가 하는 행위로 이해를 하거나, 행위를 하더라도 듣는 행위가 아니라 말하는 행위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말은 ‘기도하다’ 또는 ‘기도를 하다’와 같이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고 그래서 노래를 하거나 싸움을 하는 것과 같이 행위적으로 쉽게 이해됩니다.
물론 그런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기도를 하면서 청원을 할 수도 있고,
기도를 하면서 명상을 할 수도 있으며
기도를 하면서 자세를 취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기도에 있어서 행위에 중심이나 중요성을 두기 쉬운데 저는 행위에 중요성을 두기보다는 관계에 중요성을 두고 싶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중요하고, 신뢰와 의탁과 사랑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관계는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어머니여도 좋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형제일 수도 있고 친구여도 좋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애인일 수도 있고 정배이면 더 좋을 겁니다.
이런 관계일 때 기도하는 것은 무엇을 할 수도 있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앞에서는 부복하고만 있어도 됩니다.
어머니이신 하느님 앞에서는 그저 품에 안겨 있어도 됩니다.
형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는 아버지의 뜻을 같이 실현하기 위해 의논을 해도 좋고 친구이신 주님과는 하고 싶은 얘기 다 해도 좋을 겁니다.
애인이신 하느님과는 당연히 밀어를 나누겠고 어제의 마리아처럼 아무 얘기하지 않고 그저 발치에 앉아 듣기만 하는 것도 사랑이니 좋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뭘 해야 한다고 강박관념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쩌면 강박적으로 하는 기도를 하느님은 제일 싫어하실 겁니다.
그것은 싫은데 억지로 나온 것이나 하고 싶은 말이 없는데 지어내어 하는 말처럼 억지로 하는 것이기에 부자연스러운 것이 될 뿐 아니라 그런 것일 때 하느님께서는 마음이 엄청 상하실 겁니다.
그런 기도는 진정 하느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아니고 인간 편에서 그래도 나는 의무를 다했다는 자기 합리화와 위안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관계라고 하였으니 의무로라도 관계를 끊지 않는 것은 요즘처럼 의무도 팽개치고 부모를 찾지 않는 자식들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부모에게 하지 않는 의무를 하려는 것은 그나마 칭찬할만한 거겠지요?
그렇긴 하지만 왜 기도하는지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면 이 정도로 위안 삼아도 될까요?
우리는 왜 기도를 하고 배우려고 합니까?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배웁니까?
나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러니 행복한 기도를 하십시다. 우리.
친구
이종훈 신부님
어느 날 오후 90이 넘은 노인 형제가 성체조배를 마치고 보조기구에 의지해서 제대 앞을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내 귀에 들리지는 않았지만 ‘주님, 이제 나이가 많이 들어 주님 뵈러 오기도 버겁네요.’라고 기도할 것 같았다.
내게는 대선배이지만 그 형제는 주님 앞에 아직도 어린이이고 또 90년을 알고 지냈고 70년 동안 매일 만나며 지냈으니 친구도 이런 친구는 없다. 기도는 이런 것이다. 주님과 오래된 친구처럼 아주 친근하게 어린이처럼 솔직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나누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온통 청원이다. 고맙다는 말보다는 뭔가를 청하는 마음이 더 질실한 법이다. 그 청원들이 주님과 나를 더 가깝게 만든다. 인류의 평화를 청할 때보다는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청할 때 주님과 더 가깝다. 통일보다는 가정의 평화를, 가정의 평화보다는 내 안이 평화롭기를 청할 때 주님과 더 가깝다.
새 날이지만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 날에 익숙하지만 매 사건들이 만만치 않다. 걱정, 아픔, 괜한 미움들이 생길 것 같다. 그렇다고 도망갈 수는 없다. 내 삶은 내가 짊어져야 할 나의 몫이다. 내 마음은 좋은 것, 나쁜 것을 모두 만들어낸다. 주님께는 좋은 것만 나누고 싶지만 그러면 그분은 친구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나쁜 것을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어야 좋은 친구다. 사실 주님은 그보다 훨씬 내게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분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루카 11, 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도의 주님께서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기도로 자라나는
우리의 삶입니다.
기도로 자녀들은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게됩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함께하시는 사랑을
만나게됩니다.
막연한 관계가 아닌
그날 그날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는
아버지십니다.
관계와 일상
신앙과 생활은
기도로 살게됩니다.
겉돌던 우리 마음이
주님의 기도로
삶의 핵심을
찾게됩니다.
찬미와 감사
겸손과 의탁을
찾게됩니다.
기도 없이
도움 없이
아버지의 뜻을
우리 삶안에 이룰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 안에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가장 아름다운 길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겨드립니다.
제가 오래전부터 쓰고 있었던 태블릿 PC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 웬만한 것은 스마트폰으로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이 태블릿 PC를 자주 사용하지 않게 되더군요. 그런데 며칠 전에 급하게 사용할 일이 있어서 찾았고, 전원 버튼을 눌렀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에 그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고장 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이 태블릿 PC의 충전식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어서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최고 성능의 최신식 컴퓨터가 있습니다. 그런데 연결할 전원이 없다면 어떨까요? 또한 최신형 스마트폰이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저의 경우처럼 충전되어 있지 않다면 어떨까요? 에너지원이 없으면 그 성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해도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컴퓨터는 비싼 고철덩어리 일뿐이고, 스마트폰은 종이를 눌러놓는 문진 정도로밖에 쓰지 못할 것입니다.
전원이 연결되고 또 충전되어 있어야만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전원도 연결되지 않고, 또 충전도 시키지 않고서는 작동되지 않는다고 이 기계가 엉터리라면서 소리치면 어떨까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정신 차려! 네가 문제지 기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야.”
우리는 주님께서 불평불만을 많이 합니다. 나를 보살펴 주시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과 차별한다면서 계속해서 주님께 문제가 있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요? 솔직히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기계에 에너지원이 공급되고 충전되어 있을 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듯이, 우리 역시 주님과 연결되고 주님의 힘으로 충전되어야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주님과 아무런 연결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불평불만만 던지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주님과의 연결 방법은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던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주님의 기도’를 직접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 기도만 잘 바쳐도 주님과 연결되어 힘을 낼 수 있고, 용기 있게 세상 안의 어려움들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주님의 기도를 얼마나 정성껏 바치고 있을까요? 그냥 바치라고 하니까 습관적으로 바치는 기도, 또 억지로 바치는 기도는 아니었을까요?
이 기도를 직접 가르쳐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우리와 연결되고 우리를 당신 힘으로 충전시킬 수 있는 기도를 직접 가르쳐 주시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때 분명히 정성껏 바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성으로 주님과 연결되고 충전될 때 불평불만의 모습에서 벗어나 힘과 용기를 얻어 힘차게 살아가는 멋진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경청의 ‘경’자는 ‘기울일 경’이다. 몸을 기울여서 들어야 진짜 경청이다(김재원).
스팸전화 대처법
인터넷을 보다가 ‘스팸전화 대처법’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대처하라고 하더군요.
1. 보험회사에서 전화 왔을 때: "여기도 보험회사입니다."
2. 초고속 인터넷 권유전화!“ "여기 한국통신입니다."
3. 대출권유 전화: "여기도 대출회사입니다."
이렇게 대처하면 바로 끊는다고 합니다.
귀찮은 스팸전화지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인데도 상관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그들의 재주가 정말로 대단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들으면 솔깃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따라서 이런 스팸전화는 그냥 끊어버리는 것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위와 같은 방법도 있지만, “죄송합니다. 저하고는 상관없습니다.”라고 그냥 끊어도 똑같은 전화가 다시 반복해서 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 죄의 유혹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접하면 접할수록 빠지고 싶은 것이 죄의 유혹이지요. 그래서 초반에 “안 합니다.”라고 과감하게 뿌리쳐야 합니다.
내 영광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던 가 봅니다. 안하던 기도를 하기가 무척이나 힘겨웠겠죠? 그래서 스승님께 청합니다.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복음 11장 1절)
제자들의 간청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선물로 건네주십니다. ‘주님의 기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가장 기본적인 기도, 가장 초보적인 기도, 조금은 차원 낮은 기도, 그래서 습관적으로 바치는 기도라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너무 자주 바치다보니 식상해지고 너무 간단해서 ‘이게 무슨 대단한 기도인가?’ 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사실 주님의 기도는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짧고 단순하지만 복음의 요약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 일생의 종합입니다. 주님의 기도 안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이정표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매일 여러 차례 바치는 주님의 기도만 정성껏 잘 바치고 실생활 안에서 실천한다면 우리는 아주 훌륭한 영성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중에 이 구절이 계속 제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카복음 11장 2절)
이 문장은 예수님 삶을 아주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바치시고 제자들에게도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를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당신 삶에 적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애 안에서 기도와 삶을 완벽히 일치시킨 것입니다.
오늘 제 발밑을 들여다봅니다. 제가 바치는 기도의 내용과 구체적인 삶이 너무나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생각과 행동 사이의 간극이 넘나 큽니다. 결심과 결과는 천지차이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은 오로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기 위해 당신이 지닌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부었습니다.
오늘 내 모습을 들여다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라 내 이름을 드러내느라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왕국을 건설하고 내 영역을 확보하느라 얼마나 기를 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과 영광을 드러내는 ‘주님의 기도 정신’이 오늘 우리 각자와 공동체 안에 실현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각자의 거룩하고 빛나는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아버지의 얼굴과 아버지의 나라를 발견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함과 다스림이 실현되는 나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주님의 기도’ 가운데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11,2)라는 구절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친밀함과 신뢰와 자애로우심을 불러일으키는 ‘아빠’(Abba)라는 호칭으로 시작합니다(11,1). 이 고백에는 비참한 인간을 자녀로 삼아주신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주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11,2) 하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속적인 것과 구별되는 힘과 신비와 존엄성을 갖추신 거룩하신 분이시며, 몸소 거룩하게 하십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고 인간을 행복으로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거룩하게 되도록 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거룩하게 되도록 청하는 것입니다.”(치프리아누스)
아버지의 거룩한 이름은 나와 형제자매들 안에서, 그리고 이 세상과 피조물을 통하여 드러나야겠지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5)고 하시는 주님 말씀 따라 매순간 아버지의 거룩함을 알아차리고 그 안에 머물며,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의 뜻을 실행해야겠습니다. 이것이 개인의 성화, 공동체의 성화, 세상의 성화로 가는 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묵상했듯이 거룩함은 “하느님의 무한하고 영원한 지식이 우리 안에서 밝게 빛나 당신의 은혜가 얼마나 넓고 당신의 약속이 얼마나 길며 위엄은 얼마나 높고 판단은 얼마나 깊은지 깨닫는 것”('주님의 기도' 묵상, 3)을 말합니다. 조건없이 건네고 나누는 사랑과 너그러움, 온화한 미소와 배려, 타자의 아픔과 고통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 차별과 불평등이 없는 상태, 세속적이고 탐욕적인 것과 구별되는 성령의 선물을 지니는 것을 말하지요.
다음으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11,2) 하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공간이 아니라 품위를 갖고 권능을 갖춘 ‘하느님의 다스림’이며, “그곳에는 당신께 대한 또렷한 바라봄이 있고 당신께 대한 완전한 사랑이 있고 당신과의 복된 사귐이 있으며 당신의 영원한 누림이 있습니다.”('주님의 기도' 묵상, 4)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한국사회는 과연 정말 행복하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선과 자비와 정의는 짓밟히고 국민의 주권을 짓밟는 권력집단에 의한 진실은폐와 언론통제와 조작, 정경유착에 의한 부정부패, 빈부격차의 심화 속에 존엄한 인간이 설 자리는 사라져가는 암울한 현실이라고들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우리에게 다가온 하느님의 사랑의 다스림, 정의의 다스림이 이 땅에서 실현되길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 친히 하느님의 나라이므로 그분이 오시기를 청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제외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계속해서 기도와 간청을 바쳐야 합니다.”(치프리아누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하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나라는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가 되도록 우리 자신부터 회개하고 서로 아끼고 존중하며 연대해야겠습니다.
이 땅에 진정 아버지의 거룩함이 드러나고, 그분의 사랑과 권능이 드러나 인간다운 세상이 되길 갈망하며 온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오늘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엠이 모임에서 ‘이그잘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중에는 제가 즐겨 사용하는 말도 있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인 것 같아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이유가 있겠죠.’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를 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데 나를 배신할 수 있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런 말을 하니!’ 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있겠죠.’라는 생각을 하면 대화의 여지가 생깁니다. 혹 내가 가졌던 오해가 풀릴 수 있습니다. 극한 대립으로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정치인들이 꼭 들어야 할 덕목입니다.
두 번째는 ‘그럴 수도 있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잘못을 벌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다시금 하느님께 돌아오면 우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잘 될 거예요.’입니다. 걱정과 근심 중에 있는 사람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고, 즐겨 하는 말입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처럼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를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의 닫힌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거친 세상을 향해서 힘차게 나갈 수 있었습니다.
네 번째는 ‘사랑합니다.’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밤새 울어도 짜증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아파서 병원엘 가야 할 때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먼 길 바래다주면서 기분나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몇 시간씩 공항 대합실에서 출장 갔다 오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는 비행기가 연착되었다고 해서 지루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다림은 설렘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이그잘사’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내 뜻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마음의 자제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여유”입니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도 현실에서와 같이 무엇인가 빨리 빨리 하려고 합니다. “빨리 한다.”는 것은 결국 생각을 만들어 내고, 생각이 나면 내 중심적으로 무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하고 있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되도록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인내”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시편 23을 묵상해야 합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세 번째 필요한 것은 “갈망, 혹은 열망”입니다. 기도할 때 하느님을 만나도 그만, 안 만나도 그만하는 마음가짐으로 하는 것과 하느님을 만나려고 하는 간절함이 있는 것은 다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겠다는 갈망이나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따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고, 밤늦게 기도하셨습니다. 운동선수들이 매일 정해진 시간에 운동을 하듯이, 기도는 정해진 시간에 할 때 서서히 기도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꾸준히 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만 운동을 하고, 나머지 6일은 엉망으로 살면 건강을 유지하기 힘들 것입니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하면서 한 달은 적게 먹고 나머지 11개월은 마음껏 먹는다면 몸매관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도 꾸준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기도의 묘미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매일 매일 정해진 시간에 또는 허락되는 시간에 하느님 앞에 자기 자신을 보여 드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시간이 쌓여 가면 어느덧 기도는 내 삶의 중심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 -바르고 진실한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람 하나 만나기도, 제대로된 가정공동체 하나 만나기도 참 힘든 세상입니다. 중심이 없거나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확고한 중심이 있어야 내적일치의 참 사람, 참 공동체가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하여 인생광야여정에 사람이 되든지, 괴물이 되든지, 폐인이 되든지 셋중 하나뿐이 없다고 단언하곤 합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닙니다. 괴물같은 사람도, 폐인같은 사람도 부지기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힘든 일도 없습니다. 평생과정의 평생공부가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 믿는 이로 말하면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바르고 진실한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뭐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말도 있습니다. 혼인 주례를 부탁한 어느 부모의 딸 이야기도, 결혼을 앞둔 어느 자매의 딸 이야기를 들으며 참 바르게 잘 큰 자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까이 평생을 두고 함께 산 부모의 증언이라며 이보다 진실은 없기 때문입니다.
삶도 보고 배웁니다. 영원한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바르고 진실한 삶보다 좋은 선물도 없습니다. 이런 삶은 존재 자체가 하느님 현존의 표징이자 구원의 선물입니다. 이런 삶을 대하면 저절로 기분이 좋고 위로가 되고 힘이 나며 희망과 용기가 생깁니다. 얼마전 읽은 다음 글에서도 순수함 자체가 최고의 선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극단적으로 혼돈스러운 시대에 죽어가는 아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은 자신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건 어쩌면 순수한 것은 순수한 것으로 보답하겠다는 심성같은 것이다. 영화속에서도 지로의 여자 나호코만이 남자의 그 마음, 그 순수의 결정체를 이해한다. 그녀가 죽기 직전 스스로 이불을 걷고 거리로 나가 홀로 사라지는 건 더 이상 남자가 자신 때문에 상처를 받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잊혀지지 않는 감동적인 대목입니다. 어떻게 하며 바르고 진실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는지요. 요즘 자주 묵상하는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시편46,11)라는 시편구절이 답을 줍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때로 멈춰 기도하며 우리 삶의 중심이자 방향인 하느님을 확인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어제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 수도원길, 하늘길을 걸으며 잠시 멈춰 써놓은 ‘행복의 발견’이란 두편의 글도 생각납니다.
1.어둔 밤은/어둔 밤대로 좋고
밝은 낮은/밝은 낮대로 좋다
어둔 밤/별들 보며 하느님 은총을
밝은 날/해를 보며 하느님 사랑을/생각한다.
2.높은 나무/높은 산
저절로 하늘로 향하는 눈길
높은/나무 있어/하늘 높은 줄
높은/산 있어/하늘 높은 줄 알겠다
높은 사람 있어/하느님/높은 줄 알겠다
이렇게 잠시 멈춰 기도하며 우리 삶의 중심이신 하느님을 체험, 확인할 때 행복의 발견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만큼 살고 사는 만큼 기도합니다. 결국 남는 얼굴도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바르고 진실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오늘 루가복음의 예수님이 기도의 모범입니다. 기도의 복음이라 할 수 있는 루카 복음입니다.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셨을 때 어떤 제자의 간절한 청입니다.
‘저희에게도 사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바로 기도를 배우며 삶의 본질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가 바로 삶의 원리를, 삶의 본질을 가르쳐 줍니다. 참 단순 명료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진실하고 단순하고 순수한 삶 자체의 요약입니다. 이런 기도가 겸손한 참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마태복음의 주님의 기도보다 짧고 간명하여 그 핵심이 투명하게 잘 드러납니다. 다양한 공동체의 구성원이지만 모두 아버지의 중심을 향하기에 저절로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모두가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고 서로는 형제자매들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미사때 마다 실감하고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중심의 삶이 우리에게 평화와 안정을 주고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냅니다. 복잡하고 혼란한 삶도 단순하고 질서있는 삶으로 조정됩니다.
아버지 중심의 두 청원에 이은 세가지 기본적인 청원이, 날마다의 일용할 양식이요, 잘못한 모든 이들에 대한 용서와 아버지께 용서의 청원이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청원입니다. 이 세 청원에 우리 삶의 모두가 망라되어 있습니다. 날마다, 하루하루 이렇게 기도하고 살 때 비로소 바르고 진실한 삶입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공적으로 매일 미사때, 아침성무일도때, 저녁성무일도때 주님의 기도를 함께 바치며 묵주기도때도 무수히 바칩니다. 특히 매일미사때 주님의 기도를 바친후 서로간 평화의 인사를 하고 날마다의 일용할 양식인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주님과 공동체와의 일치를 체험합니다. 천사의 양식인 성체를 모심으로 찬미와 봉사의 천사적 삶을 살게 하는 미사의 은총, 주님의 기도의 은총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사도인 베드로와 바오로의 불화도 하나의 과정으로, 살다보면 흔히 겪게 되는 현상입니다. 아마 함께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서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화해하여 다시 일치의 삶을 살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주님의 기도’의 본자리는 공동미사전례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아버지의 자녀임을, 서로간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깊이 깨달아 바르고 진실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김진 신부님
요즘 제 일상을 돌아보면,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하는 일 중에 하나가 오후 2시부터 1시간가량 소방도로를 따라 산길을 하고, 산을 내려와서는 사제관 거실에서 신나는 노래를 들으며 30분가량 자전거를 전력으로 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스스로 생각해도 아주 좋은 습관을 들였다고 만족을 하며, 앞으로도 신학교를 사는 동안 계속하고 싶은 일은, 바로 하늘묘원에 들려 최근에 돌아가신 신부님을 위해서 주모경을 바쳐드리는 일입니다. 어제는 교구의 박 야고보 신부님, 한 분이 더 묻혀서 주모경을 한 번 더 바쳤습니다.
비석에 새겨진 신부님들의 영정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그분들 사제로서의 삶이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되어서, 하늘에서 주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고 계시고 있음을 자연히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없이 부족하기만 한 제 사제생활이지만 ‘남은 생은 주님 보시기에 더 좋은 모습으로 성실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내게 허락된 이 지상에서의 내 마지막 순간에는 꼭 양지바른 이곳 하늘묘원에 묻히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구름 사이에 비치는 한 가닥의 빛줄기처럼 어떤 희망을 자아내는 기분을 느껴보기도 합니다. 그러면 한껏 기분이 좋아져 포장된 내리막길을 발걸음도 아주 가볍게 내려오게 됩니다.
주모경, 거의 매일 습관적으로 바치지만, 돌아가신 신부님들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줄줄 바치기보다 매우 느린 속도로 정성스럽게 바치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히 그 기도말의 의미 또한 깊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기도 한 가지를 알려주십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오늘 복음에서 만나는 제자들처럼 주님께 제가 제대로 기도할 줄 모르니,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청하신 적이 있나요? 전 기도할 때 어느 때에는 진짜 분심으로 가득 차서 기도에 온전히 머물러 있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데요. 그러면 나는 정말 아직도 기도할 줄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 듯, 주님이 직접 알려주셨다고 해서 주님의 기도인데, 그 기도 말을 한 구절 한 구절 천천히 음미하면서 바치고 있노라면, 우리가 흔히 온갖 분심 잡념으로 의심하면서 바치는 기도처럼 전혀 복잡하지 않고, 어린이가 바치는 기도처럼 매우 단순하면서도, 꼭 필요한 내용만을 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에게 너무 친숙해져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기도는 주님이 직접 알려주시기도 하셨지만, 그 기도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우리에게 전수되고 있음을 볼 때, 아주 각별하고 소중한 기도이면서, 또 주님을 믿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무의식중에도 아무 때에나 바치는 기도입니다. 그만큼 사랑하는 기도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개인의 기도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 모두가 함께 바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혼자서 기도 해야지 하면서 도무지 나오지 않는 기도를 머리를 쥐어뜯고, 또 진심이 없는 기도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보다, 차라리 '기도해야겠다.’하면 모든 사람의 입과 마음에서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오는 최고의 기도! 그래서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오늘도 미사 때나, 묵주기도 성월에 묵주기도를 바칠 때에도, 또 성무일도를 할 때에도 중간 중간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치게 되겠는데요. 오늘 만큼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주님의 기도를 아주 천천히, 느린 속도로 바치면서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지향이 주님의 바람대로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입으로 말하는 기도가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청하신 게쎄마니의 기도를 닮아 있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완벽하게 심판할 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희 교구 사진가 협회 지도 신부님이 사제의 수고에 대한 사진을 찍기 위해 일부러 수단을 입고 땀을 흘렸다고 합니다. 일주일간의 노력으로 드디어 검은 수단 여기저기에 흰 땀 마른 자국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땀을 말리기 위해 걸어놓은 수단을 본 주방 도우미 자매님께서 물수건으로 그것들을 닦아낸 것입니다. 일주일간 일부러 땀을 내며 입고 다녔던 수단, 드디어 그 땀이 밴 수단을 찍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런 옷을 입고 다녀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자매님이 지워버리신 것입니다. 자매님은 참 좋은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무어라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아무리 확신하는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 확신이 항상 옳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를 만나 자신의 사도직을 인정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았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파견을 받았다고 해서 독자적인 노선만 고집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고 교회의 인정 없는 복음 선포는 결국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교회가 어떤 소명이 있는지는 깨닫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오로는 케파, 즉 베드로와 이러한 약속을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수장입니다. 교회의 복음 선포가 할례 받은 유다인들에게만 한정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의문입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베드로도 바오로도 모두 이방 땅인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오래 머물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방 민족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고 나머지 사도들도 모두 이방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만 이방 민족들에게 파견된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야고보와 케파(베드로)와 요한을 “교회의 기둥”으로 여기고 있고 그 “주요 인사들”을 존중하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사도들 위로 세우신 교회의 권위는 인정하고는 있지만 아직 교회가 온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 받았음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위대한 성인들이라고 다 완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가 바오로 사도에게 야단맞을 행동을 한 것은 맞습니다. 베드로 스스로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음을 믿고 있었음에도 할례를 주장하는 신자들이 오자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과 식사를 하다가 은근슬쩍 자리를 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 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진리보다 사람을 두려워한 행위는 분명 교회의 수장으로서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렇더라도 바오로 사도가 교회의 수장을 사람들 앞에서 질타하고 또 그것을 어쩌면 자랑스럽게 편지에 쓰기까지 하는 것이 과연 예수님의 가르침에 합당한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에서 형제가 잘못을 하면 먼저 개인적으로 가서 말해주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다른 한 사람을 데려가서 말해주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바오로는 할례의 율법적인 행위보다는 믿음으로 구원된다는 확신을 사람들이 믿게 하게 위해 자신의 권위를 세울 필요는 있었으나 현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조금 심한 면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칫 사람들에게 얼마 안 되는 유다인들에게만 복음을 선포할 책임이 있는 베드로가 그를 야단칠 수 있는 온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파견 받은 바오로보다 낮은 수준의 사람으로 인식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오로 위에 교회를 세운 것도 아니고 바오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준 것도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주신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위대함은 재차 강조할 필요가 없겠지만 오늘 독서에서는 그래도 바오로 사도의 조금은 완벽하지 못한 면도 엿볼 수 있다고 믿어집니다. 바오로의 칼과 같은 성격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는 물불을 안 가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어떻게 모든 행동이 주님의 뜻에 맞을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이런 정도의 실수는 바오로 사도의 위대함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예수님께 사탄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바오로 사도가 베드로 사도를 그렇게 질타하면서도 교회 수장으로서의 존중은 끝까지 잃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자칫 부족함이 보이는 바오로 사도도 단지 그것 때문에 사람까지 판단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사람의 어떤 맘에 들지 않는 행위 한 두 개를 가지고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의 온전한 평가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고 주님을 대신해 교회가 신중하게 대신 해 주기도 합니다. 한두 가지의 행동으로 쉽게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바오로 사도도 모든 행동이 다 완벽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위대한 사도들도 그 정도였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 판단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생활의 반석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기도는 너무 자주, 흔하게 바치는 기도이기에 고루하고 낡은 기도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완전한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미사여구와 성경말씀을 덧붙여 길게 늘어놓아야 기도를 잘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그저 입으로 외우는 것으로 만족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가장 완전한 기도이면서도 깊이 있는 기도이니 입술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사랑을 담아서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 기도생활의 반석"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아버지'에게서 받는데 성령의 은총 없이는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시며 '아버지'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나 도전의 순간에 언급하셨는데 만약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고 느끼지 않거나 그분의 자녀라고 여기지 않아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믿음이 없거나 어휘의 나열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 시선을 느끼게 해 줍니다. 아버지께 향하는 기도의 말은 미신에서 하는 주문처럼 소용없는 말들이 아닙니다. 나를 당신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주신 분에게 향하는 목소리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임을 깨닫고 동시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는 아버지가 계심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기도는 모두를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잊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친밀한 아버지로 모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열망이고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며 하느님의 선물입니다(성 이냐시오). 그리고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 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기도의 참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알베리오네).“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일깨워 주는 것들을 즉시 생활 실천으로 옮겨야 합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오늘 복음을 보면 다섯 가지 청원을 볼 수 있는데 앞의 두 청원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하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고대하는 청원이요, 뒤의 세 가지는 ‘날마다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 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 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하며 하느님 나라를 고대하며 살아가는 동안에 꼭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고,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고 또 이것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사랑과 사랑이 통하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깊은 기도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루카 11,1)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기도를 잘 하시나요?
어떤 기도를 주로 바치시나요?
미사와 성무일도, 묵주기도, 성체조배, 화살기도,
그 외 각종 기도문들을 바치시겠지요.
그런 기도를 바치면 기분이 좋아지나요?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나의 기도를 즐겨 들어주시는 것 같고 무엇보다 하지 않았을 때의 찜찜함과 죄스러움은 없어지겠지요.
그런데 정작 하느님을 기도 안에서 뵙고 그 기도를 통해 내 삶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나요.
여러분도 여러 기도 모임에 나가 보기도 하고 지금도 나가는 곳도 있겠지요.
성령기도회, 지속적인 성체조배회, 관상기도, 비움 기도, 구심기도, 다락방 기도, 떼제 기도 모임 등도 있지요.
어떻게 하면 더 기도를 잘 할 수 있을까는 어제나 오늘이나 모든 종교인들의 고민중의 고민이랍니다
기도의 전문가라는 수도자들도 사실은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몰라 늘 고민이랍니다.
35년 수도생활을 하였지만 아직 잘 모르겠어요.
분명한 것은 오늘 제자들이 고민하여 질문하였듯이 기도하면 할수록 점점 단순해진다는 것입니다.
더이상 기도를 많이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전통적이거나 새로운 수많은 기도방법론들 또한 초보자들에게는 좀 도움이 되지만 결국 형식과 방법이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그저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 고맙습니다.
하느님 사랑합니다.
하느님 찬미합니다." 하는 것과 "이 부족한 죄인 용서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지켜 주시고 오늘 일용할 먹거리만 주십시오.
그러면 소박하게 당신 자녀로서 잘 살 수 있겠습니다." 하는 것밖에 더 하느님께 드릴 말씀이 없어지고 맙니다.
이제 미사도 성무일도도 묵주의 기도도 성체조배와 관상기도도 기회가 주어지면 주어지는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그냥 하느님 만나뵙고 소박한 담소 나누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그저 하느님 자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주님의 기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저희의 따뜻한 마음으로 당신의 온유함을
저희의 해맑은 웃음으로 당신의 포근함을
저희의 올곧은 행동으로 당신의 정의로움을
아직은 당신을 모르는 이들에게
아직은 당신을 온전히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께서 저희에게 드러내시듯
저희가 드러내게 하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저희의 낮춤으로 섬김의 당신 나라를
저희의 내어줌으로 나눔의 당신 나라를
저희의 보듬음으로 화해의 당신 나라를
아직은 지배와 경쟁으로 갈라진 세상에
여전히 죽음 같은 경쟁을 강요하는 이들에게
당신께서 저희에게 곱게 심어주시듯
저희가 곱게 심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내일을 위해 정성껏 모아둔 저희의 양식을
오늘 배고픈 이들에게 아낌없이 나눔으로써
내일 저희만이 누릴 헛된 안락이 아니라
오늘 더불어 사는 가난한 풍요를 선물하시는
당신께 감사드리게 하소서.
“저희의 죄를 용서하소서.”
떨리는 약한 손길들을 뿌리쳤음에
죄 없는 억울한 주검들에 눈을 돌렸음에
삶에 짓눌린 애끓는 울부짖음을 비아냥거렸음에
가슴 찢는 통회의 마음가짐과 몸짓이
당신께 드리는 용서의 기도가 되게 하소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서서히 저희의 온 몸과 마음 얽어매어
당신을 섬기듯 자신을 섬기라며
당신을 밀어내고 자신을 심으려는
끝 모를 탐욕을 부추기는 재물과 권력의
달콤한 죽음의 유혹을 거슬러
언제나 어디서나
오직 당신만이 저희의 주님이심을
당당하게 고백하게 하소서. 아멘.
기도합시다. <루카 11, 1-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전례 중에 “기도합시다.” 누가 과연 사제와 함께 기도하는지, 그 시간에 각자가 필요한 기도를 청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의 기도를 주님에게서 듣습니다. 주의 기도는 가장 중요한 기도입니다. 전례 기도 때 언제나 드리는 기도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화하는 사람은 서로가 대화의 내용을 알고 대화를 통해 관계가 좋아집니다. 요사이 우리는 대화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아버지를 떠나 세상에 파견을 받으신 후 밤낮없이 기도하셨으며 그 기도의 효과는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가난한 마음과 진, 선, 미를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부모에게 효도하듯이 사랑과 은총 속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거룩하게 하고, 그의 나라에 살고, 하느님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돌보며, 너와 나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자비를 베풀고, 세상의 온갖 유혹에서 자유스러움을 가지게 됩니다.
기도는 시련 중에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억압을 받고 사는 사람,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 외로움과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이들 위해 행하는 구원의 기도여야 합니다.
온갖 유혹을 주님이 광야에서 기도하신 후 물리치신 것같이 기도만이 유혹을 물리치고 악마의 유혹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대화자와 깊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지극하시므로 우리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기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의 아침 기도는 4시에 일어나 8시 되어야 끝이 나는 기도의 생활입니다. 잠에서 깨어 일어나면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로 시작 "오늘 주님의 사랑 받는 사람으로 살게 하시고, 어제의 잘못을 기억하시지 마시고,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을 친미하고 찬송하게 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아멘."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알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자유, 평화,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루카 11, 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길을
받아들이는 참된
순명을 배우게됩니다.
우리또한 기도로
우리존재를 깨닫고
나아갈 길을
배우게됩니다.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루카 11, 1)
기도는
삶다운 삶을
살고싶은
우리들의 뜨거운
갈망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삶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용서의 삶이며
존중의 시간이며
하느님을 되찾게
해주시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위한 기도이며
관계를 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임을 절실히
깨닫게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기도를 통해
구체화됩니다.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하느님을 깨닫고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온 생애를
돌보시는 하느님을
믿기때문입니다.
어떤 본당신부님께서 신자들에게 강론 중에 물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싫으신 분이 계시면 손들어 보세요.”
신자들은 웃으면서 주변을 바라봅니다. ‘설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싫은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지요. 정말로 단 한 명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재차 확인을 하듯이 “정말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싫으신 분이 단 한 명도 안 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역시 신자들은 웅성대며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면서 단 한 명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이제 신부님께서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십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하느님 나라에 가고 싶으신 분 손들어 보세요.”
어떠했을까요? 이 질문에 모든 사람이 곧바로 손을 들었을까요? 아닙니다.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고는 싶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느님 나라에 갈 때는 언제입니까? 내가 이 세상의 삶을 모두 마쳤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가면 절대로 안 된다 생각을 했나 봅니다.
왜 지금 당장은 안 될까요? 죄가 너무 많기 때문이지요. 깨끗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지은 그 모든 죄를 생각해보니 곧바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아마 지금 당장 하느님 나라에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 했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쭉 봐왔던 제자들인데 과연 기도하는 방법을 몰랐을까요? 그보다는 기도하는 방법에 자신이 없을 만큼 스스로를 나약한 존재로 느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라는 호칭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는 종의 신분에서 건져 내시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러 아들의 대열에 서도록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종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닌, 아들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들의 모습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이 땅에 거룩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죄로 물들어 심판 날을 겁내는 것이 아닌, 오히려 아버지의 나라가 하루 빨리 오기를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일까요? 이를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용서를 본받아 우리 역시 용서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 말씀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닮고,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용서의 삶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야 심판 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하루 빨리 오길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치유되어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오드리 햅번).
청원기도의 세 가지 원칙(곽승룡, ‘기도,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순간’ 중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국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 종종 의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했다.
“하느님은 청하는 이들을 항상 도우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위해 기도합시다.”
링컨 대통령은 기도할 시간이 없다면 생활하는 시간도 없다며, 바쁜 국정 가운데에서도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청원기도를 할 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을 생각해야 한다.
첫째, 무엇이 필요한지를 되묻는다.
둘째, 욕심 없는 마음으로 청한다.
셋째, 공동선에 부합한 것을 청한다.
청원기도의 세 가지 원칙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청원기도를 바쳐보세요. 분명히 더욱 더 깊이 있는 기도, 주님의 마음에 쏙 드는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빠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기도를 잘 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우린 기도에 굶주리고 있지만, 그 방식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한 주님의 제자들처럼 기도 방법을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립니다. 이런 방식으로도 해보고 저런 기도 방식도 써보고 합니다. 그러고는 지쳐서 기도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기도는 강에 놓인 다리처럼 건너가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기도 방식에 달린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어떤 기도이든 기본은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목적은 하느님을 내 자신보다 더 친밀한 분으로 받아들이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기도의 모범이십니다. 하느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인식하셨습니다. ‘아버지’(아빠)란 말은 ‘엄마’란 말과 함께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육 신의 아버지는 때론 우리와 가까이 하는 방법도 사랑하는 방법도 모르지만, 참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우리보다 더 가까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사람은 이미 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 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기도의 참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알베리오네). 그리고 기도는 “영적 생활의 기초입니다. 기도할 때에 그대는 하느님과 통교하게 됩니다. 마치 전등이 발전기와 연결됨으로써 빛을 발하는 것과 같습니다”(구엔 반 투안 주교). 그러므로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호흡을 해야 살듯이 기도해야 신앙의 삶을 지킬 수 있습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의미하고 하느님의 다스림이란 결국 사랑의 삶을 말합니다. 요한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까롤로 까레또는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때 바로 그곳이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또 한 우리는 매일 필요한 양식을 청해야 합니다. 양식은 단순히 밥을 의미 하지 않습니다. 우리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양식은 그날에 필요한 양식입니다.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하느님이 다 뭐냐?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잠언30,8-9). 매일의 양식을 달라고 간절히 ‘날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육적인 양식뿐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더불어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을 매일 모셔야 합니다. 미사는 다른 여느 기도 중에 가장 중요한 기도이며 영성체를 통해서 가장 완전하게 주님과 하나가 되는 은총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13)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실수와 잘못 안에 용서 받아야 할 연약함을 지니고 살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유혹은 믿음으로부터 멀어지는 위험을 의미합니다. 그 유혹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고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사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 이뤄지고 유혹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은 기도하게 됩니다.
성 레오교황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성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께 면류관이 가까이 있습니다. 죄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습니다. 이방인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생명에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탄생에 참여하게 된 자들로서 육신의 행위를 끊어버립시다.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 과거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갈망하는 현재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미래의 다스림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잊지 않고 자비와 사랑, 섭리의 하느님과 더불어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예언자직의 대상엔 제한이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종교박람회’란 책에 예언자직에 대한 이런 예가 나옵니다.
하느님은 한 예언자를 시켜 머잖아 지진이 일어나 땅의 모든 물을 삼켜 버리게 되리라고 사람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신 생겨난 물을 마시는 사람들은 미치게 되리라고.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 예언자 한 사람만이 하느님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여, 자기가 사는 산속 동굴에 커다란 물독을 갖다놓고, 죽을 때까지 마셔도 넉넉할 만큼 마실 물을 잔뜩 길어다 부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지진이 일어나 물이 바싹 말라 들었다가, 새로 물이 솟아나 크고 작은 내와 못들을 채웠습니다. 몇 달 뒤, 예언자는 세상이 어떻게 됐나 살펴보려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역시나 모두가 새로운 물을 마셔 미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를 공박하거나 아예 상종하려 들지조차 않았습니다. 혼자만 멀쩡한 그가 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산속 동굴로 되돌아갔습니다. 물을 비축해 놓았으니 천만다행이라고 여기며.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사귀며 살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간절해진 것입니다. 결국 또다시 평지로 내려간 예언자는 또다시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전혀 딴판으로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언자는 결단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저장해 놓았던 물을 쏟아 버리고, 새 물을 마시며 다른 사람들의 미치광이 짓에 한데 어울리게 된 것입니다.
이 예화는 예언자직이 얼마나 고독하고 힘든 길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바오로 또한 약간은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바오로는 오늘 독서에서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까지도 비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단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할례를 받지 않아도 좋다고 결정을 내렸음에도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그리스도인들이 도착하자 그들에게 비판받지 않기 위해 은근슬쩍 할례 받지 않은 이방-그리스도인들과의 식사자리를 뜨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바로오는 베드로의 그런 일관성 없는 행동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 이해하면, 바오로는 지금의 주교이고 베드로는 교황인데 어떻게 주교가 교황을 비판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판한다고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비판하지 못하는 것이 더 먼 사이일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에서 신자들은 사제에게 필요한 요구사항을 가감 없이 건의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제는 목자이고 아버지입니다. 목자라도 위험하지만 않다면 양의 요구에 따라 움직일 수 있어야하고 아버지라도 자녀의 요구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목자가 양이 느끼는 풀 맛을 알 수 없고 아버지라 해도 아들의 생각을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은 신자들에게는 ‘예언자직’이 부여됩니다. 예언자직은 물론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직무입니다. 예수님도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 죽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시며 당신의 삼중직무(왕직, 사제직, 예언자직) 가운데 예언자직 때문에 죽임을 당할 것임을 암시하셨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자직은 아랫사람에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윗사람에게도 필요하다면 잘못하는 것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직무, 즉 우리의 의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직언을 들을 때 기분은 썩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그렇게 직언을 해 주는 분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큰 레스토랑의 지배인을 형으로 둔 분이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그 가게 지배인이나 일하는 사람들은 음식이 맛이 없을 때 자신들에게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이 가장 고마운 손님들이라고 합니다. 밖에 나가서 맛이 없다고 하면 손님이 떨어지지만 자신들에게 말하면 고치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받아들여지면 좋은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제가 나를 미워할까봐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사랑의 결핍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기가 부모에게 젖을 달라고 운다거나 필요한 학용품을 살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마땅히 요구해야 하는 것 또한 상대가 마땅해 해야 하는 의무를 상기시키는데 도움이 됩니다. 물론 그 요구를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는 상대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말을 해 주어야 할 의무는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 가능할 길은 예수님의 가르침뿐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가족 적어 단란하다며 행복해하던 부부가 늙어서 자식을 두려워합니다. 귀염과 과잉보호로 아이는 성장하며 자기중심 형으로 자라기 십상입니다. 앞으로 한참 우리의 가족 대부분이 아마 그리 되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형제간 양보 대등 보살핌 나눔 질서 같은 심성이 자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참 커서 학교생활하며 배울 수도 있다지만 거긴 이미 경쟁사회인걸요. 이제 행복이 가능할 길은 예수님의 가르침인 지상명령뿐, 없다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4)”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신앙인들의 책임이고 사명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낚시’를 하는 것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 낚시를 하려면 밑밥을 많이 주어야 합니다. 물고기들은 밑밥을 많이 뿌린 곳으로 모여들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기적과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을 보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도의 밑밥, 봉사의 밑밥, 사랑의 밑밥’을 주어야 합니다.
둘째, 낚시를 하려면 집중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고기를 놓치는 것은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시 다른 곳을 볼 때, 화장실을 다녀올 때 물고기는 어김없이 먹이를 먹고 달아납니다.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위에 떠있는 찌를 잘 살펴야 합니다. 어느 순간 찌가 물위로 올라오게 됩니다. 그때 낚싯대를 들어 올리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것들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씨 뿌리는 이의 비유, 누룩의 비유,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스쳐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의 눈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낚시를 하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밤을 새우기도 합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 분명히 물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잘 알아듣지 못하고, 겁이 많았던 제자들을 믿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에게도 예수님은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용서하였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인내’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넷째, 낚시를 하려면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낚시를 할 때마다 물고기를 많이 잡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유다는 희망을 버렸기 때문에 용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용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희망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가져야할 덕목입니다. 희망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전교가 가장 효과적인 전교인가! 저는 “가장 예수님적인 전교가 가장 효과적인 전교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모습으로 전교를 하였습니까! 예수님은 과연 어떻게 하였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몸으로 뛰셨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만나셨고,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만나셨고, 부유한 자와 가난한자를 가리지 않고 만나셨습니다. 하지만 가난한자 병든 자, 외로운 자를 더욱 많이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셨고, 힘을 주셨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몸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전교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기도 하셨고, 언제나 섬기는 자가 되라 하셨고, 자신의 십자가를 먼저 지라 하셨고, 착한 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알아듣고, 양들을 푸른 시냇가로 인도하고, 비가 오면 양들을 안전한 우리로 인도하며, 사나운 짐승이 나타나면 지팡이를 들고 지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혼자 하시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비록 제자들이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제자들을 신뢰하셨고, 제자들에게 힘을 주셨고, 제자들과 더불어 전교 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비록 겨자씨와 같이 작은데서 시작하지만 엄청난 결실을 맺으리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분이셨지만 기다려 주셨고, 인내해주셨고, 함께 하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따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고, 피눈물이 나도록 기도하셨고, 자신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누워 잠을 자고 있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며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기도는 바로 전교의 힘이며, 기도는 바로 전교의 발판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항상 당당하셨습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으셨지만, 비록 내일 어찌될지 기약은 없으셨지만 늘 당당하셨고, 자신감이 있으셨습니다. 당당한 예수님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셨고, 권력에 무릎을 꿇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 불의와 권력을 야단치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지치고, 힘든 자 앞에서는 늘 자비를 베푸셨고, 늘 그들에게는 약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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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제자들의 부탁에 대한 응답으로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우리는 ‘주님의 기도’라고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기도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기본적인 뜻을 이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습니다.
하여, 작년에 올렸던 글을 다시 올립니다.
이미 읽어보신 분들께서도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곱씹어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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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유일한 기도 그것을 우리는 주님의 기도라고 한다.
그분께서 만드신 기도이니 모자람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마도 가톨릭이나 개신교 상관없이 가장 많이 신자들의 입술을 통해 드려지는 기도가 바로 주님의 기도가 아닐까?
하지만 얼마나 그 기도의 뜻을 이해하고 의식하면서 바치고 있을까?
이 기회에 주님의 기도에 대한 간단한 묵상을 나누어보고 싶다.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당신께서는 하느님이시며 우리는 당신을 아버지라 부른다. 그리고 그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흠숭과 찬미를 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뜻이 먼저임을 고백한다.
게 쎄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던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카 22,42) 라고 하신 그 마음을 우리는 가슴에 새겨야 한다.
무엇보다도 기도란 그분에 대한 찬미와 흠숭(欽崇) 그리고 전적인 의탁의 자세로 시작되어야 함을 예수님께서는 일깨워주시고 계시다.
2.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당신께서 주신 생명 이끌어 주시고 책임져 주십사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하지만 이러한 간절한 바람 이전에 우리에게는 전제되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내시었다는 믿음이며,
우리의 협조가 있다면 절대 우리를 내치시지 않으신다는 믿음이다.
옆에 성서가 놓여있다면 루카 복음 12장22절부터 32절까지 천천히 읽어보도록 하자.
솔로몬의 영화도 피었다 지는 들꽃보다도 하늘을 나는 새보다도 화려하지 못했다 하신다.
하물며 그보다 귀하디 귀한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시다.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포기하는 것은 우리 쪽일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으신다.
그렇다. 우리가 구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가장 필요한 양식 즉, 그분의 사랑에 대한 확신일 것이다.
아울러 생각해야만 할 일이 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눈길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계는 있다.
하지만 최소한 배고픔으로 힘들어하고 있고 심지어 죽어가는 이들이 이 세상에 공존한다는 의식이 필요할 것이고,
최선을 다해 그들과 함께 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어느 이는 말한다. “나는 누구를 도울 여력이 없다고.” 하지만 분명히 말하고 싶다.
“이 세상에는 누구를 도울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3.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가 장 엄하고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구절이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려 한다면 거기에는 엄격하고 분명한 조건이 따름을 말씀하고 계시다. 결국 구원이란 다른 말로 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겠는가? 죄로부터 해방이 된다는 것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우선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용서받는 조건이 너무 까다롭다.
내 가 먼저 용서해야 할 이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던지지 않는다면 나 역시 그분으로부터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말씀이시다. 미워하는 것처럼 힘든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미움을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음을 우리는 체험으로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만큼 용서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용서하시란다.
무조건 용서하시란다. 그래야만 내가 용서를 받을 수 있다 하신다.
여기서 한 가지 늘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용서하는 마음이나 용서할 수 있는 힘은 그분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말이다. 용서하라신다. 무조건 용서하라신다.
4.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빛 이 강하면 그 그늘도 짙어진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선을 향한 마음, 사랑을 하려는 마음, 즉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으로 애를 쓰려할 때 거기에는 늘 악의 세력이 더 크고 강하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사도 바오로께서 하신 말씀을 상기해보자.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로마서 7,21)
어 차피 우리의 실존은 그분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온갖 종류의 유혹과 싸워야 하는 삶이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보다도 이러한 인간의 실존에 대해 체험하셨고 이해를 하신 분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간청하신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신다.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라 하신다. 우리의 나약한 의지는 늘 유혹 앞에 흔들리고 넘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당연한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다. 때로는 악에 지는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성숙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어서야 한다. “고지가 저긴데 예서 멈출 수 없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은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기도에 대한 의미를 의식하면서 살았으면 한다.
한 번을 소리 내어 외워도 그 의미를 곱씹으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드렸으면 한다. 그분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
(20130219)
성공적 인생순례를 위한 비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이렇게 비행기내에서 강론을 쓰기는 제 인생 초유의 일입니다. 순례50일차 강론을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쓰니 감격스럽습니다. 저는 감히, 나이 66세에 산티아고 800km를 완주하며 매일미사와 매일강론에 매일 시간경을 바친 사제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하느님은 안식년을 맞이한 당신의 사제인 저를 통해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느님께 온통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저와 시종일관 동행했던 도반, 나이 69세의 박용대 이냐시오 형제도 한결같기가 놀라웠습니다. 매일 저와 똑같이 새벽같이 일어나 미사를 드리고, 매일 줄기차게 20-30km를 걸었습니다.
"형제님, 순례가 끝나면 성인이 될 것입니다. 집에 가시면 순례지마다 무수히 확인 도장 받은 훈장과 같은 증서와, 산티아고에서 받은 졸업장 같은 순례증서, 상장같은 거리확인서를 액자에 넣어 거실에 걸어 놓고 가보로 전하십시오"
순례중 나눈 덕담이 오늘 현실이 되었습니다.
"귀국하여 감사미사는 형제님 시성(?)미사가 되겠습니다. 사정상 순례를 도중에 포기한 김승월 프란치스코 형제에겐 시복(?)미사가 되겠습니다."
웃으며 나눈 오늘 아침의 덕담입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매일 3시경 서두의 시편 말씀 그대로 매일 힘차게 걸었고, 주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주님을 등에 업듯이 미사가방을 제 배낭에 넣어 등에 업고 걸으니 주님께서는 저와 이냐시오 형제를 당신 등에 업어다 마침내 이 자리에 놓아 주셨습니다.
비행기내에서 언뜻 눈에 스친 일간 신문의 기사내용입니다.
-초갈등 사회 진입한 대한민국; 국민10명중 9명 '심각한 수준' 사실상 '관리 불가능 상태'-
라는 비관적 견해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지섭 전 삼성전자 부사장의 인터뷰중 한 대목입니다.
-사람은 부유해질수록 본질적 가치로 돌아간다. 합리주의는 삼성그룹의 창업이념 중 하나이나, 너무 합리적인 것만 찾다보면 감성을 놓치기 쉽다. 감성경영을 어떤 식으로 해결해 나갈지가 삼성전자의 숙제가 될 것이다.-
바로 중심과 질서가 문제의 핵심임을 깨닫습니다. 중심에 이어 질서를 잃어버렸기에 초갈등 사회입니다. 합리와 감성의 조화와 균형을 위해 중심을 찾아야 합니다. 두 말할 것 없이 중심은 하느님이십니다.
첫째, 늘 하느님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방향이자 목표이고,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하여 오늘 복음의 주님의 기도 역시,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하며 아버지에게 우선순위를 주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살든 하느님 아버지를 중심에 모실 때 안정과 평화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의 어둠도 걷힙니다. 하느님 중심 없이는, 하느님 은총 없이는 결코 인생의 신비는, 깊이는, 의미는 계시되지 않습니다.
둘째,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삶은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중 제자들의 요청에 당신 노하우의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전수하십니다. 삶은 관광이 아니라 순례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여정은 인생평생순례여정을 상징합니다. 산티아고 순례중 이냐시오 형제와 저는 끊임없이 일정한 시간에 미사와 시간경을 바쳤고, 걸을 때는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하여 저는 800km 걷는 동안 한번도 스틱을 잡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지팡이' 묵주가 스틱을 대신했습니다. 바로 이런 기도가 순례 동안 하느님을 가리키는 저희 삶의 이정표가 되어 주었고, 삶의 질서를 잡아 주었습니다. 도반과 간혹 내적갈등도, 용서도 기도를 통한 인내가 해결해 주었습니다. 신실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어김없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셋째, 하루하루 사십시오.
저의 지론이자 좌우명입니다. 우보천리,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입니다. 이냐시오 형제와 저는 그냥 하루하루 충실했습니다. 매일 헤드랜턴을 이마에 달고 인적없는 새벽길을 걸었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면서도, 기도할 때는 기도하고, 걸을 때는 걷고, 잘 때는 자고, 먹을 때는 먹으면서 아주 현실주의자로 오늘만 살았습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 말씀대로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즉 날마다 필요한 건강을, 믿음을, 사랑을, 희망을, 힘과 의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매일미사를 통해 날마다 선사되는, 하루하루 살게 하는, 말씀과 성체의 일용할 양식보다 더 좋은 양식은 세상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것이 산티아고 순례를 통해 제가 얻은 성공적 인생순례여정의 비결입니다.
하느님은 물론 저희를 사랑하는 수많은 형제자매들의 기도와 사랑 덕분에 이냐시오 형제와 저는 장장 50일간의 '파리-루르드-산티아고-파티마-마드리드' 순례여정을 성공리에 마치고 그리던 집에 돌아왔습니다. 매일 길 떠나기전 바치던 3시경 기도대로 되었습니다.
-저희를 인생의 순례자로 부르시는 하느님,
길 떠나는 저희를 안전하게 인도해 주시고,
낯선 곳, 낯선 얼굴들 속에서 놀랍고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곳곳에서 당신 얼굴을 보게 하시고,
몸은 고단해도 환한 얼굴로 충만한 생명력을 얻어 그리운 집으로 돌아오도록 축복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그러나 우리의 인생순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집'에 귀가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자비하신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1독서의 바오로 사도처럼 평생순례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의 기도는
생명의 기도입니다.
공동체의 생명을 아름다운
삶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나날이 바치는
기도의 힘입니다.
생명의 주체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먼저
사랑의 기도로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주님의 기도는
당신의 삶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 삶 자체가
가장 아름다운 기도였음을
기도로 깨닫게 됩니다.
기도와 삶은
분리될 수 없는
생명의 선물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모르고 산 우리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가르쳐줍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시고 이끌어가시는
하느님 생명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보다
더 값진 시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를
잘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의 뜻인
사랑과 감사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기도하는
서로 용서하는 생명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절정은
내어맡기는 기도의
절정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의 기도처럼
겸손되이 모든 것을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단 한순간도
하느님을 떠나 살 수 없는
우리 공동체의 기도이며
하느님과 결합되는
일치의 기도입니다.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이 기쁨은
주님의 기도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 저희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기도는 진실된 사랑입니다.
진실된 사랑은 성숙을 지향합니다.
인격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침묵하며 머무르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기도는 머무르는 침묵입니다.
그래서 침묵은 경청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생명의 열매를 결코 맺을 수 없습니다.
썩지 않을 열매는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만
맺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주님, 저희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십시오."
기도는 회복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본래의 모습이란 아버지 하느님을
기도를 통해 우리가 만나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는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오늘을 기쁘게 살아갈 힘을 주소서."
기도는 가장 중요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기도는 가장 아름다운 기쁜 소식입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는
평화와 용서, 일치와 현존을 체험합니다.
이 모든 것을 깨어나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 이십니다.
살아있는 오늘을
이끌어 가시는 오늘에 감사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통해
이미 기쁜 소식은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포기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기도는 무집착입니다.
기도는 어둠을 포기하고
빛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봉헌입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으로 기뻐하기 위해서는
허무하게 사라져 버릴 것들을
이제 내려 놓아야 합니다.
기도는 사랑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 삶의 모든 사랑입니다.
기도의 완성은 우리가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기도의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언젠가 강의 때문에 어느 성당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갑자기 일이 생겼다면서 제게 먼저 사제관으로 가 있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신부님 말씀을 듣고 사제관 앞으로 갔고 사제관의 문을 잡아 당겼지요.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잠겨 있다는 생각에 약간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닫혀 있는 사제관에 왜 혼자 가 있으라고 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거든요. 그러면서 본당 신부님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뒤 신부님께서 급하게 오셨고, “사제관 문을 안 잠갔는데 왜 밖에 계세요?”라는 것입니다. 저는 퉁명스럽게 잠겨서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했지요.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고개를 갸웃거리시더니 이 사제관의 문을 제가 시도했던 것처럼 앞으로 잡아당기지 않고, 의외로 옆으로 미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닫혀 있다고 생각했던 문은 언제 잠겨 있었냐는 듯이 스르르 열리더군요.
그렇습니다. 이 사제관의 문은 앞으로 잡아당기는 문이 아니라, 옆으로 밀어야 열리는 미닫이 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힘껏 잡아당기기만 했으니 열리리가 만무했던 것이지요.
문이 닫혀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문을 여는 방법이 잘못 되었다면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는 문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문을 여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들어가야 할 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으니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 모두가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2천 년 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이로써 구원의 문이 열렸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이 구원의 문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어떻게 해야 그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열려 있다고는 하는데 닫혀 있어 보이는 이 문. 이 문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바로 ‘기도’입니다.
제자들은 그 방법이 기도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예수님께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이때 가르쳐주신 기도가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시지요. 즉, 우리의 기도 내용에는 주님의 기도에 담겨 있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내용이 담겨 있습니까? 그렇게 매 미사 때마다 바치는 주님의 기도이지만, 그 내용이 잘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은 주님의 기도를 천천히 그 뜻을 음미하면서 바쳐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래야 내가 바쳐야 할 기도 내용이 어떠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확실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가렵다는 것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가려운 곳이 없으면 어떻게 긁는 순간의 쾌감을 느낄 것인가(은희경).
굳게 닫힌 성문
어떤 왕이 중책을 맡길 사람을 뽑기 위해 대소 신료를 시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왕은 신하들을 어마어마하게 큰 성문 앞으로 데리고 갔지요.
“내게는 풀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소.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성문은 제국 안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성문이오. 여러분 가운데 이 성문을 열 수 있는 자, 그 누구요?”
몇몇 대신은 불가능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현자로 추앙 받는 몇몇 관료들 역시 가까이 다가가서 성문을 살핀 뒤, 결국엔 못하겠노라고 털어놓았습니다. 현자들이 이렇게 말하자 나머지 신하들도 하나같이, 너무 어려워 도저히 풀 수가 없다고 입을 모았지요.
이 때 대신 한 사람이 성문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는 성문을 면밀히 관찰하고 만져 보면서 갖가지 방법으로 성문을 움직여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가는 단숨에 성문으로 달려가 문을 두 손으로 밀어 젖혔습니다. 바로 그 순간 성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성문은 그저 슬쩍 닫혀 있었을 뿐, 완전히 꽉 잠겨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고 있는 커다란 성문을 도저히 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쉽게 열 수 있는 성문을 열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 성문을 여는데 필요한 것은 엄청난 힘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할 수 있다는 용기와 더불어 대담하게 행동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뿐이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할 수 있는 것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와 적극적인 자세, 긍정적인 마음입니다. 이것만 있다면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을 테니까요.
한상봉 신부님
연중 제27주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디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화합과 평화를 이루는 가장 풍요로운 하느님의 강복 속에서 참으로 기뻐하는 그날이 오기까지, 한국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그 새로운 날의 새벽을 준비해 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프란치스코 교종이 명동성당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면서 하신 말씀이다. 교종은 방한일정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고 하셨는데, 그 나라가 대한민국에서도 이뤄지기를 희망하셨다. 교종은 먼저 개인과 민족의 회심을 요청한다. 이 회심은 “하느님의 긴박한 부르심”이며 신자들에게는 “하나의 도전”이 된다. 이 도전은 “참으로 정의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이룩하는 데에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얼마나 질적으로 기여했는가를 점검해 보라는 부르심”이라고 교종은 말씀하신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한국교회가 아직 교종의 요청을 받아들일 준비가 잘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번영했으나 그만큼의 깊이는 없는’ 교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교종은 우리 각자가, 개인으로서 또한 공동체 차원에서 불운한 이들, 소외된 이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이들, 많은 이가 누리는 번영에서 배제된 이들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복음적 관심을 증언하는가에 대하여 반성하라고 초대한다. 한국교회가 전적으로 중산층을 위한 교회가 되었다는 진단이 나온 지 오래되었고, 교회에서조차 배제되고 소외되는 가난한 신자들이 없지 않은 탓이다.
교종은 이날 강론에서 “만일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정직한 기도를 바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이렇게 물어보아야 한다. “만일 우리 교회가 가난해질 용기가 없다면 어떻게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정직하게 기도를 바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기도>
송영진 모세 신부님
10월 8일의 복음 말씀은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인간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의 모범인데, 거꾸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으로 바꾸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의 삶으로 내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도록 하고, 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협력하여라. 날마다 너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줄 테니까 혼자 먹지 말고 함께 먹도록 하고, 너희의 죄를 용서하니까 너희도 서로 용서하도록 하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일은 하느님께 다 맡기고, 인간은 기도만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은 기도하면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은 사람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는 일'은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신앙인은 신앙인답게 살고,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아버지의 거룩한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게 됩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것도 신앙인들의 주 임무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생활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내 것'이 아니라 '우리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나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입니다.)
이웃과 나누어 먹기를 거부한다면 주님의 기도를 바칠 자격이 없습니다.
만일에 "나는 순전히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일용할 양식을 마련했다.
그러니 이것을 나 혼자 먹는 것은 당연하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냥 사람들과 떨어져서 무인도 같은 곳에서 혼자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니, 하느님도 안 계신 곳에서 혼자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도 안 계신 곳이라면? 그곳은 지옥입니다.)
"구걸을 할 힘만 있어도 은총입니다."
혼자서 구걸을 해서 얻은 밥도 다른 사람과 나누어 먹은 분이 있습니다.
각자 투자한 만큼 각자의 몫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자기의 것을 무상으로 베풀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말하는 '죄'는 '저희의 죄'이고, 용서에 대해서도 '저희'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인류의 연대 책임을 뜻하기도 하고, 모든 사람은 다 같은 처지에 놓인 죄인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할 때,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 놈의 죄는 용서하지 마소서.'라는 식으로 기도하면 안 됩니다.
용서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각자 할 일이지만, 다른 사람이 용서 대신에 천벌을 받기를 바라는 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조선시대처럼 '이 죄인을 죽여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라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자기 스스로 지옥에 가겠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큰 죄입니다.)
'유혹'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을 방해하고,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라는 기도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달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어떤 유혹을 받았을 때,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그 유혹을 물리치려고 하면 거의 백전백패일 것입니다.
유혹은 기도의 힘으로, 즉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서 물리쳐야 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루카 22,46)."
그리고 이 경우에도 역시 '저희' 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인데. 이것은 자기가 다른 사람을 유혹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일을 방해하고서도 자기는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루카 17,1-3).
'주님의 기도'는 사람이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이면서 동시에 그렇게 노력하겠다는 다짐의 기도이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신앙생활의 지침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우리가 하느님께 바라는 것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일치시키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여라.”
<영혼의 집, 기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정말 쉽고 간결하게 우리를 영성생활로 인도하고 있는 이 시대의 대 영성가가 헨리 나웬 신부님께서는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한 마디로 표현하였습니다.
“산다는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적인 삶의 단계가 올라갈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영성생활이 진보할수록 하느님의 크신 자비, 나를 향한 극진한 사랑을 알게 됩니다. 기도생활에 참맛을 들일수록 세상 것들의 덧없음을 알게 되고, 결국 하느님께 점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더 그분께 의탁하게 됩니다.
영성생활의 대가들은 하나같이 교만하거나 거만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누군데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단순하고 소박했으며 겸손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했습니다. 하느님 손바닥에 자신을 올려놓을 줄 알았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거창하지도 않았습니다. 복잡하지도 않았습니다. 장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요즘 아이들 표현대로 ‘쿨’했습니다. 단순한 기도, 소박한 기도, 그러나 목표가 명확한 기도, 예를 들면 오늘 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주님의 기도’같은 기도였습니다.
주님의 기도, 복잡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 하나 짚어나가면 참으로 단순합니다. 간결하고 명확합니다. 너무나 간단해서 이게 무슨 기도인가,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복음의 진수가 담겨져 있습니다. 신앙생활 잘 하는 비결이 들어 있습니다.
짧고 단순한 기도, 그러나 강력하고 의미심장한 기도의 대가였던 노리치의 신비가 줄리안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스스로를 축복하며 기도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주님의 기도는 철저하게도 낙관적인 기도입니다. 매일 저녁 우리를 짓누르는 다양한 근심걱정을 모두 주님 발치에 내려놓으면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 좋습니다. 매일 저녁 조금은 부끄럽고 조금은 불성실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모두 주님께 맡겨드리며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 좋습니다.
한 유대인 신학자는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기도는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비상금 같은 것이 절대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의 안식처, 다시 말해서 영혼의 집입니다. 이 세상 모든 생명체는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에게는 둥지가 있고 여우에게도 굴이 있고 벌에도 벌집이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의 집입니다. 기도가 없는 영혼은 집 없는 떠돌이 영혼입니다.”
정성껏, 그리고 자주, 하느님을 바라보며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튼튼한 영혼의 집을 마련하기 바랍니다.
용서의 기준
-김희준 신부님-
저희 공동체는 두 마리의 견공犬公을 키웁니다. 저는 그중 한 마리를 아주 미워합니다.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쓰레기봉투를 찢어 온갖 쓰레기들을 여기저기 어지럽혀 놓고,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나뭇가지도 물어 와서는 잔디밭에 볼썽사납게 물어뜯어 놓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 견공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뻔뻔함에 있습니다. 그렇게 사고를 쳐 놓고도 조금의 잘못한 기색이나 반성의 눈빛 하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단을 쳐도 참으로 어이없게 그저 해맑게 혀를 내밀고는 뻔뻔하게 꼬리를 흔들어 댑니다. 그 염치없음에 저의 미움은 더욱더 커져만 가고, 견공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를 청하면 몰라도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뉘우치지 않는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완고함에 빠지고 맙니다. 아마도 우리가 다른 이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즉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한다고 했을 때 그 기준은 절대적으로 상대방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늘 되뇌는 ‘주님의 기도’에서 용서의 기준은 상대방의 태도가 아닌 ‘내 영혼의 구원’에 있음을…. 다른 이들의 구원이 아닌바로 내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해 먼저 용서해야 하는 것임을….
유시찬 신부님과 함께하는 수요묵상
비록 짧은 복음이고 특별한 사건도 없긴 합니다만 복음관상을 해봤으면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살펴보는데, 우선 기도에 들어가시기 전의 모습을 좀 봤으면 합니다. 따로 무슨 준비가 있으신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보세요. 이어서 예수님께서 직접 기도하고 계시는 모습을 살펴봅니다. 자세도 보고, 표정도 보고, 눈을 뜨고 계시는지도 살펴보세요. 기도 중에 무슨 움직임이 있으신지도 봤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가 끝난 다음 어떻게 하시는지도 보세요.
다음으로 살펴봤으면 하는 것은 제자들의 모습 내지 움직임입니다. 이들이 평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들어 보세요. 그리고 제자들의 마음속에 기도에 대해 무슨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봤으면 합니다.제자들 내면 속에 일어나고 있는 열정 같은 움직임이 포착되는지 봤으면 하는 거예요.
끝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는 장면을 바라봅니다.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시는지 세밀하게 보세요. 그 광경 속에서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어떤 역동적 흐름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보세요. 묻고 답하는 과정이 있는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제자들이 보이는 반응 등을 살피는 겁니다.
물론 이런 여러 가지를 살펴볼 때 장소에 대해서 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어떤 곳에서, 어떤 분위기 속에서, 이런 가르침이 베풀어지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얻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법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음악성이 있는 사람이 있지요.
선천적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 해도 배우지 않고 피아노를 잘 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예외 없이, 무엇이든 예외 없이 배우지 않고 깊이 들어갈 수 없고 높이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배우는 것은 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자전거. 타면서 배웁니다.
처음서부터 자전거 잘 타는 사람 없습니다.
당연히 처음에는 넘어질 것이고 무릎이 까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싫어 타지 않으면 타는 것을 영영 배울 수 없습니다.
사랑.
사랑도 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연애감정으로서의 사랑이야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생기지만
차원이 높은 사랑은 수많은 사랑의 실패와 수없는 사랑의 상처를 딛고서 배워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패와 사랑의 상처를 두려워하면, 그래서 사랑하려 하지 않으면, 그래서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은 영영 배울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기도.
기도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사랑이니 배울 것도 최고로 많겠지요.
그러니 기도를 배우려면 단단히 마음먹고 덤벼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고의 기도가 아니어도 기도가 아닌 것은 아니니까요.
기도도 하면서 배우는 것이고, 최고의 기도도 기도 하면서 배워지는 것이니 그저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언제나 기도하는 것입니다.
“언제나”는 “늘”과 다르지요.
“늘”, “항상”이 모든 시간을 얘기하는 것이라면 “언제나”는 모든 경우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다급할 때만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의 마음이 솟구칠 때만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화가 나도 기도 안에서 화를 내고, 저주가 솟구쳐도 기도 안에서 저주를 퍼붓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정관념처럼 화가 나면 기도할 수 없고, 저주의 마음을 가지고는 도저히 기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이 기도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화를 자기 안에서 삭히거나 남한테 풀지 말고 하느님을 불러서 화가 난 것을 하느님께 아뢰고 하느님을 통해서 화를 삭히면 그것도 훌륭한 기도입니다.
저주의 마음도 마찬가집니다.
이렇게 언제나 기도를 하다보면 오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처럼 최고의 기도, 완벽한 기도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틈나는 대로 중얼거려 봅시다.
주님의 기도가 주는 영적 유익
-김기현 신부님-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영적인 유익이 두 가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첫째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신자는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화단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화단을 잘 정리하고 있는데, 그화단 한가운데 큰 돌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들이 그 돌을 옮기려고 있는 힘을 다합니다. 그돌을 드느라 땀을 뻘뻘 흘리지만, 돌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호통을 치며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매사에 최선을 다하라고 그랬지... 그런데 넌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거니?”
아버지의 꾸중을 들은 아들은 땀까지 흘리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아버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반항투로 아버지에게 대듭니다.
“아버지는 눈도 없어요. 지금 제가 이렇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일하는데, 어떻게 저에게 그렇게 매정하게 말씀하실 수 있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가 지금 혼자서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야... 정말 최선을 다하는것은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겠니...”】
우리 가운데도 혼자 모든 고민을 다 하고, 혼자 모든 계획을 다 짜고, 혼자 힘으로 모든 일을 더 하려고 하는 아들과 같은 신자가 있을 겁니다. 그는 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정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나의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아버지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아버지의 도움을 청하는 신 자들은 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신자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든든한 아버지가 있기때문입니다.
【거센 폭풍에 중형 기선이 나뭇잎처럼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승객들은 공포에 질려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만 한 어린이만은 파도 구경이 재미있다는 듯이 태연하게 즐기고 있었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중년 여성이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무섭지도 않니?” 그러자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예, 무섭지 않아요. 아주머니는 무서우세요?”
“무섭다마다, 나는 죽을 지경이다.”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우리 아버지가 이 배의 키를 잡고 계시거든요. 우리 아버지는 일등선장이세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아주머니도 무사하실 거에요.”】
신앙의 배를 타고 항해하는 우리 공동체 안에도, 선장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신자가 있는 반면, 아버지 하느님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여 불안에 떨며 살아가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신앙에 배에 오른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주님의 기도를 외우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아버지 하느님이 함께 하시고 이끌어주심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체험이 세상의 풍파와 시련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감 있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될 수 있겠죠.
신앙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또 자신감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주님의 기도를 자주 외워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한 남자가 새벽 4시에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당신네 개가 짖는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겠소.”
남자는 알았다고 대답한 후 전화 건 사람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4시에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저희 집에는 개가 없습니다.”
비행기는 지상으로부터 8,000미터 이상의 고공으로 비행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비행기 바깥의 온도는 영하 40~50도 정도가 되고, 산소도 거의 없어서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행기 안에는 어떨까요? 비행기 안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지요. 비행기 바깥과 달리 적절한 온도와 알맞은 산소가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상징되는 인생의 겨울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주님 안에만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쉽게 살아갈 수 있는 적절한 힘과 알맞은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주님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 밖으로만 나아가려 합니다. 주님 밖이 훨씬 넓고 할 일도 많아 보이지요. 주님 밖이 나에게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만이 내가 살 수 있는 공간이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느님 아버지께 쉽게 나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기도’를 직접 가르쳐주시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하느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 보고 감히 ‘아버지’라는 표현을 쓸 수가 없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라는 호칭을 쓰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쉽게 주님 안으로 들어와 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제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받아 들여 스스로 변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5,000원짜리 쇠붙이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연장을 만들어 5만 원짜리가 되었지요. 또 어떤 사람은 바늘을 만들어 50만 원짜리가 되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명품 시계를 만들어 500만 원짜리가 되었답니다. 같은 물건이 어떤 물건으로 변화되느냐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지는 법이지요. 같은 사람도 그가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천한 사람도 되고 또 반대로 귀한 존재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안에 있을 때 귀한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 주님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어느 곳에 자리 잡고 있을까요?
이란 테헤란에는 아름다운 궁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궁전을 다 짓고 유리를 끼우려다가 유리가 깨지고 만 사건이 있었지요. 다시 유리를 만들어 끼우려면 여러 달이 걸리기 때문에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때 어느 기술자가 이 깨진 유리 조각을 잘 이용하여 아름답게 창문에 끼웠는데 그 깨진 조각으로 햇빛이 비칠 때마다 찬란하게 무지개 색깔을 냈습니다. 그리고 그 창문 때문에 오히려 관광객들이 더 모여 들었지요.
내가 주님 안에 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고통과 시련 안에 있을 때, 주님의 기도를 천천히 의미를 새기면서 바쳐 보십시오. 깨진 유리 조각이 아름다운 빛을 내듯이, 우리의 삶도 주님 안에서 더욱 더 빛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정성을 다해 바치도록 합시다.
한 우물을 파라(네꼬)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라. 샘물이 날 때까지.’
이 말은 20세기의 성자 슈바이처의 그 유명한 좌우명입니다.
가진 재주 많아 온갖 것을 다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 행복하고 신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창조주가 이 모든 재능을 준 사람은 이 세상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대신 가장 잘 하는 한 가지 재주를 사람들 모두에게 주었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운동을 잘 하는 사람.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재주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또 자신의 재주를 알면서도 늘 남의 밥상이 커 보여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은 하루 이틀을 지날 때는 모르지만 달이 가고 해가 가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한 우물을 파야 합니다. 한 우물을 10년만 파면 반드시 생수가 나올 수 있습니다.
주위의 한 가지 주어진 일이나 직업에서 10년을 일한 사람을 보십시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열의 아홉은 성공을 했거나 성공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법, 기도하는 것
-정동수 신부님-
짧은 기간의 교리교육을 통해 세례를 받은 병사들은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터득해나갑니다. 특히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달라는 병사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가르쳐주기 시작합니다.
“기도에는 청원기도와 감사기도, 염경기도와 묵상기도와 관상기도가 있습니다.
염경기도는….” 또 묵주로 기도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마지막으로 잊지 않고 꼭 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혼잣말 하듯이 하지 말고, 내 앞에 있는 하느님과 대화하는 마음으로 하세요.’ 신기한 듯 묵주를 꺼내 들고 기도하며 돌아서는 병사의 뒷모습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병사와 헤어져 걷다가 문득 배우자마자 기도를 시작하는 그의 모습과 가르쳐주기만 하고 그냥 되돌아서서 가는 제 모습이 비교가 되었습니다.
기도는 지식이 아닌데, 알고 있는 것에만 머물고 있는 저의 모습을 반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기도하셨고,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기도의 힘과 필요성을 느껴서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달라고 청했을 것입니다.
단순히 기도하는 방법만 가르치는 사제가 아니라, 기도하는 것을 보여주고 가르칠 수 있는 사제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욕심을 버릴 때
-배인호 신부님-
우리가 살면서 욕심을 버리면 얼마나 편하고 행복할까요? 그만큼 욕심을 버리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나와 내 가족에 대한 사랑과 애착이 강할수록 욕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렵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苦)라고 하고, 고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고(苦)는 삼독(三毒)에서 연유한다고 합니다. 삼독은 탐진치(貪瞋痴)라고 하는데 탐욕·분노·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이는 마음에서 연유합니다. 곧 마음을 다스리면 고통에서 벗어나고 그렇지 못하면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중 가장 큰 독은 탐(貪), 곧 욕심입니다. 결국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면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실상 자본주의 사회, 물질이 중요시되는 사회에서 욕심은 점점 더 큰 고통입니다. 욕심은 끝이 없을 뿐더러 부리면 부릴수록 만족을 모르는 괴물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 다툼을 벌이고, 친구가 원수가 되고 형제 사이에 우애가 깨지는 것을 어렵지 않게 봅니다. 언젠가<공공의 적>을 봤습니다. 더 많은 돈과 권력을 쥐기 위해 양심의 가책도 없이 부모를 살해하는 인간 괴물이 등장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종종 일어나는 실재(實在)입니다. 욕심은 자신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이웃과 형제, 부모 자식의 혈연마저도 파괴하는 괴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각자의 욕심을 이겨내지 못해 오늘도 비정한 눈을 부릅뜨고 있지는 않습니까?
욕심은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하느님 나라에도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듯이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24) ‘주님의 기도’입니다. 특별히 우리의 뜻과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이름이 드러나기를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욕심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오게 하라고 합니다. 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라고 하셨을까요? 아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끝없는 욕심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 계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신을 파괴하고 이웃, 형제를 파괴하는 욕심의 결과를 알고 계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는 기도할 때 나와 내 가족이 바라는 바를 청하기 전에 나의 삶과 의지가 먼저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그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의 바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행복은 하느님 나라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나와 내 이웃, 형제가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내 안에 가득한 욕심을 버려야겠지요.
기도하는 법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나 지금이나 좀 더 신앙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분들은 기도에 갈증을 느끼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답함이 있나 봅니다.
저에게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묻는 분들이 많은데 그때마다 저는 기도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지 찾아 헤매지 말라고 합니다.
누구의 기도가 아니라 자기의 기도를 하라는 뜻이고 정해진 어떤 기도가 아니라 그때그때의 자기 기도를 하라는 뜻입니다.
수도원 들어와서 10년이 될 때까지 저도 기도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랐고 10년을 기도해도 그 맛을 몰라 기도는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기도의 맛을 모르니 어떻게 일생 수도생활을 해야 할 지 암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수련을 받게 되었을 때 기도에 승부를 걸기로 하였습니다.
수련을 마칠 때까지 기도의 맛을 느끼지 못하면 수도원을 떠날 각오로 시간만 나면 성당에 가서 죽치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성당에서 기도하다 잠이 들었는데 아예 의자에 누워 자 버린 것이었습니다.
전에도 그렇게 잠이 들곤 하였고 그러다 깨면 죄책감과 자기 모멸감으로 너무 씁쓰레 했는데 그런데 그날은 왠지 너무도 평온하였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 품에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때 깨달음이 왔습니다.
성인전을 너무 많이 읽어서 기도에 대한 고정관념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기도를 하면 성인들처럼 아무 분심잡념이 없어야 하고 즉시 무아지경에 들어가 완전히 주님과 일치해야만 한다는.
그런데 성인들처럼 기도해야 한다면 나는 그런 기도를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높은 차원의 기도만이 기도라면 나는 기도를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기도에도 겸손이 필요합니다.
자기 주제에 맞는 기도. 분심이 있을 때는 분심을 할 수밖에 없고, 걱정이 있을 때는 걱정을 안 할 수 없는 나입니다.
그렇다고 기도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레오파고에서 바오로 사도가 설교하였듯이(사도 17,28) 우리는 무엇을 하건 하느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분심을 하는 중에도 나는 주님 안에 있는 것이며 걱정을 하는 중에도 나는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자의식을 가지고 분심케 하는 것이 있으면 그 분심을 주님 안에서 하고 걱정케 하는 것이 있으면 그 걱정을 주님과 의논하며 화나는 것이 있으면 돌멩이한테 풀지 말고 주님께 풀면 그것이 곧 기도이고,그것이 그때 내가 가장 진실하게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사랑을 하면 무엇을 하건 그 사람을 떠나지 않듯 기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을 하건 그분 안에서 하는 모든 것입니다.
<독서강론> :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님-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도 한 분뿐이신데 그분이 바로 사람으로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1디모 2,5)는 말씀처럼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예수님도 오직 한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서로 비난하며 다투고, 심한 경우 서로 죽이기까지 한다. 도대체 그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그 까닭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의탁하고 맡기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맡기기보다 자신을 고집하고 자신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각기 다르게 만드셨고, 각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도 자신과 같기를 바란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서로 비난하고 다툰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은 것처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도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러한 주장으로 인하여 갈라디아 교회는 분열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로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합의한 바를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설명한다.
사도 바울로가 전하는 복음과 사도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은 다를 바가 전혀 없다. 다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방식 안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율법을 지켜왔던 유대인은 계속하여 율법을 지키면서 복음을 받아들였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던 이방인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즉, 복음은 율법의 준수 여부와 무관하다. 사도 바울로와 베드로는 이를 인정했으며, 또한 각기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직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음을 인정하고 합의했다는 점을 말한다. 그리고 유대인은 유대인으로 살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방인은 이방인으로 살면서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명한다.
사도들은 사람들의 다양성을 인정했다. 그리고 서로 다른 것이 복음전파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했다. 각기 다른 문화와 전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믿고 주님을 믿으면 구원된다는 것을 합의했다. 서로의 다른 점을 존중할 것을 합의했다. 그러나 이러한 복음의 본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을 고집하는 이들은 다른 이들도 자신과 같아지기를 바란다. 자신과 다르고 이질감을 느낀다는 이유로 상대를 비난하고 상대와 다투곤 한다. 그로 인하여 교회는 분열되곤 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을 각기 다르게 창조하셨다. 각기 다른 사람이 각각 다른 문화와 전통 속에서 살도록 배려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각기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 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을 찬미하기를 원하시며, 찬미 받으신다. 예수님께서는 나만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나와 전혀 다른 그를 위해서도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다. 예수님께서는 나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와 전혀 다른 그도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나만을 고집하지 말고 다른 이를 인정하는 신앙인이 되자. 일치란 모든 것이 똑같은 획일이 아니라 다양함 속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임을 생각하자. 마치 일곱 가지 무지개 빛이 합해져서 햇빛을 이루는 것처럼 서로 다름이 합하여 하나의 조화를 이룸을 생각하자. 구원은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이지만, 이 은총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각기 다름을 인정하는 신앙인이 되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내용
-박성태 신부님-
가을 풍경들이 더욱 아름답게 변해가는 요즘입니다. 아름다운 이 계절에 여러분들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가을 여행도 좋겠고 가을걷이로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 봉사활동가는 것도 좋겠습니다. '가을'하면 습관적으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란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올 정도로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 '책 속에 길이 있다'든지 '책 속에 진리가 있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같이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저도 여러분을 같은 마음으로 간절하게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올바른 인생길이 열릴 것입니다.
기도할 줄 알고 하느님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말씀드리며 하느님의 뜻을 진지하게 헤아려보고 하느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가슴깊이 새겨들을 줄 아는 사람이며,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다정히 손잡고 하느님 나라 건설에 앞장서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게 변화할 것입니다.
'같이 기도합시다' 라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먼저 나타냅니다. 그 이유가 첫째 기도는 나약한 인간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나는 기도 할 줄도 모르거니와 관심도 없으니 기도를 잘하는 당신이나 하시오' 라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걱정 마십시오. 혹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를 남겨 주셨는데 그것은 누구나 어디서나 바칠 수 있는 훌륭한 기도입니다. 그 기도를 오늘 복음에서 다시 찾아 기도해 보겠습니다.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그럼 기도 내용을 함께 묵상해 봅시다. 먼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하신 것은 바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아버지와 자녀의 사이로 관계를 맺어주셨는데 이 관계에서는 무엇보다도 생명이 흐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관심은 항상 모든 자녀들의 행복에 있으며 언제나 따뜻한 정으로 다가오십니다.
아버지에 대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관계를 맺게 하시니 하느님은 멀리계시는 분, 나와는 관계없는 분, 나의 기도와 관계없는 분이 아니라 늘 내 곁에 계시고 내 마음에 계시는 하느님으로 다가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 인간(자녀)편에서는 설령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어둠 속에서 움츠리고만 있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고, 부를 수 있고, 나아갈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떠한 처지,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진정한 아버지로 모시고'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며 그분의 뜻을 찾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기도 끝부분은 용서와 악의 유혹에 관한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진정한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다른 이웃과도 평화롭게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든 이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내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바로 그 사람, 용서하기 힘든 그 사람도 내가 용서 못해서 그렇지 그 역시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사랑하고 아끼시는 사람을 내가 감히 뭐길래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얼굴을 붉히며 살아야합니까?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유혹이란 내 스스로가 하느님의 자녀됨을 거부하고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것, 원하지 않는 것에 매력을 느끼고 탐닉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아름다운 기도에 우리들 마음을 함께 담아봅시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 참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저는 매일 자전거를 타면서 운동을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바쁜 일들이 많다보니 새로운 코스를 정해서 자전거를 타는 것이 아니라, 매일 똑같은 20~30Km 되는 코스를 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이렇게 매일 똑같은 곳을 간다고 하니까 지겹지 않냐는 말씀을 하십니다. 또 어떤 분은 이제 그 코스로 자전거 탈 때는 힘이 전혀 들지 않겠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똑같은 길이기 때문에 지겨울 것 같고 또한 낯익은 길이 되어서 힘들지 않을 것 같지만, 매일매일 자전거 탈 때마다 새로움을 느끼고 여전히 언덕을 오를 때에는 힘듭니다. 아마 이 세상 삶도 이렇지 않을까요?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삶을 한 번 떠 올려 보세요. 어제의 삶과 그저께의 삶 안에서 뭐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까? 오늘은 또 어떨까요? 특별한 사건이 있는 날도 있겠지만, 항상 새롭고 특별한 날만이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똑같은 삶 안에서,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생활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나요? 그렇다면 이렇게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매순간 지겨움을 느끼나요? 또한 매일 똑같으니까 전혀 힘들지 않다고 생각하나요?
그렇지가 않지요. 얼핏 보면 똑같은 일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어제와 오늘이 다른 어떠한 새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움 때문에 어떤 날은 하루를 편하게 보내는 반면에, 또 어떤 날에는 너무나 힘들고 지치게 보내기도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매순간 주님께서 주시는 그 새로움을 발견하면서 사는 사람은 하루하루를 기쁘고 행복하게 보내는 반면, 그 새로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너무나 힘들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 더군다나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정도로 중요하고 뜻 깊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기도인지 아십니까? 아마 저의 이 질문에 곧바로 ‘주님의 기도’를 입으로 암송해 보는 분들이 많을껄요? 그만큼 우리들이 가장 대충대충 습관적으로 바치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가 아닐까요?
이렇게 습관적으로 바치는 이유는 내 마음 안에서 그 새로움을 찾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생활처럼 보이지만 하루하루가 큰 차이를 보이는 것처럼, 똑같은 장소를 가도 어떤 마음으로 가는가에 따라서 다른 느낌을 받는 것처럼, 주님의 기도도 우리들이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우리에게 더욱 더 깊이 있게 다가올 것입니다.
단순히 주님의 기도를 외우라고 해서 그냥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하나씩 새겨보면서 천천히 외워보세요. 주님의 새로움을 다시 한 번 체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움으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의미를 새기면서 주님의 기도를 천천히 기도합시다.
선(박성철, '행복한 아침을 여는 101가지 이야기' 중에서)
유명한 조각가가 있었습니다.
그의 조각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했습니다. 그의 작업실에 견학 온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조각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한가지 규칙만 잘 적용시키면 됩니다."
"그 한 가지 규칙이 무엇이죠?"
"네. 그것은 조각을 할 때마다 내 영혼을 담아 온 힘을 다하여 다짐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냥, 대충대충, 얼렁뚱땅, 어영부영, 미지근하게 이룰 수 있는 성공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걷고 있는 한 걸음 걸음에,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내가 만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혼을 담아 온 힘을 다 하십시오. 피와 땀과 눈물. 인생의 이 3대 액체를 자신의 삶의 공식으로 삼으십시오. 그 공식을 자주 사용하는 삶. 그 삶은 이미 인생의 성공에 바짝 다가온 삶입니다.
너무 이르다하여 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늦었다 하여 할 일을 하지 않는다. 너무 배부르다하여 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배고프다하여 할 일을 하지 않는다. 너무 덥다하여 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춥다하여 할 일을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출요경(出曜經)」에서는 이런 사람을 인생의 성공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의 공통된 여섯 가지 습관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성공을 이루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먼저 한 걸음을 내딛는 사람이고 인생의 성공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수많은 변명과 핑계를 이유로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어떤 일이든 완벽한 출발은 어려운 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완벽한 출발을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은 '하기 싫다'는 이유를 수 없이 만들기 위한 사전작업에 불과 합니다. 미적거리고 망설이는 대신 무슨 일이든 시작해보십시오. 과감함과 적극성에는 놀라운 마법의 힘이 숨겨져 있습니다. 지금 어떤 일이나 계획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당신.
두 주먹 불끈 쥐고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디십시오.
그러면 적어도 당신은 필연적으로 인생의 성공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의 여섯 가지 습관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아버지 하느님, 사랑이 극진한 아빠, 절대자 신
-이성우-
우리가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기를 바라시는지 예수님의 간절한 소망이 들어 있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 아빠라 부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이 내 삶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하실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의 모습이 이루어집니다. 나에게 하느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하느님이 나의 아버지이십니까? 나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이 되고 나의 울타리이며 나의 안식처입니까? 하느님이 내 삶에서 아빠가 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지상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나의 삶에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신(神)으로만 존재할 때, 우리는 내 삶과 신앙이 분리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신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아버지가 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아버지의 뜻이 내 삶에서 이루어지도록 노력할 수 있게 됩니다. 나와 동떨어진 다른 세계에 있는 신이 어떻게 나를 변화시키겠습니까? 그런 신이 어떻게 나의 일상 삶과 관련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로 받아들이고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바로 그 모습을 예수님이 먼저 보여주시고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시며 아버지의 뜻이 예수님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셨습니다. 그럴 때 이 지상의 삶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의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신앙과 삶이 분리된 이름만 신앙인의 삶으로 살 것인지는 우리 자신의 선택입니다.
일상 속의 신앙
-김정대 신부님-
가끔 신자들은 신심생활을 게으르게 했다고 해서 죄의식을 갖곤 한다. 예를 들어 어떤 기도를 바쳐야 했는데 못한 경우이다. 글쎄, 신심생활이 신앙 자체도 아닌데 너무 세심한 것이 탈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중 많은 경우는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관심조차 없다. 자기만 열심히 살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것 같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인기있다는 강연이나 프로그램만 열심히 쫓아다닌다. 이들 중 많은 사람도 사회문제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 나는 잘못된 사회구조 안에서 개인이 아무리 열심히 살려고 해도 죄의 구조에 쉽게 빠지기 때문에 사회구조를 올바로 개선하는 것이 신앙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앙과 우리 삶을 분리해서도 안 되고, 전례 안에 가두어 두어서도 안 된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청에 평범하게 보이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사실 이 기도는 당시 유다인들이 늘 하던 기도였다. 이렇게 평범한 기도를 가르쳐 주신 이유는 마음이 허한 사람처럼 인기있고 특별한 것에 마음을 두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오늘의 삶을 올바로 열심히 성찰하며 살라는 것이다. 오늘도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하느님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자.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가장 탁월한 처방전, 기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여러 수도회 수도자들이 모여 각자 자신들의 기도생활에 대한 체험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참으로 그 나눔이 풍요로웠습니다.
“기도에 몰입하면 할수록, 묵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관상에 도달하면 도달할수록, 절실히 느끼는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 앞에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동체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상처나 고통의 치유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대처방법은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도야말로 공동체 내외부의 다양한 갈등국면을 최대한 빨리 해소시키는 탁월한 처방전임을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한 가지 중요한 청을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 시대 당시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은 스승에게 기도 방법을 청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당대 큰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 역시 이런 흐름에 따라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지도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를 눈여겨보았던 예수님의 제자 역시 스승님께 기도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기도문 하나를 하사하시는데, 오늘날 우리가 틈만 나면 바치는 ‘주님의 기도’의 원형입니다.
기도 중의 기도, 공동체의 기도, 모든 기도의 기반이 되는 기도, 그래서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차례나 바치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너무나 자주 바치다보니 거의 습관적으로 바치는 경향이 많습니다. 다양한 전례 안에 반드시 빠지지 않고 ‘약방의 감초’처럼 ‘기본양념’처럼 들어가는 기도이기에 형식적으로 바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음미해보면, 사실 ‘주님의 기도’ 안에는 신앙인으로서 지녀야 할 자세 전반이 다 들어있습니다. 짧은 기도지만 그 안에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신앙인의 일상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만 정성껏 잘 바쳐도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게 되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 직접 우리에게 건네주신 기도의 유산입니다. 전 세계 모든 신앙인이 밤낮으로 바치는 교회의 기도이자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적당히, 건성으로가 아니라 교회의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거룩한 교회의 신비체에 합일하는 것이고,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의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 신음하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을 기억하며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그 기도 자체로 그들을 위한 위로와 사랑의 손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마다 나 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 공동체와 함께 바친다는 마음으로 기도드리길 바랍니다. 나 자신의 내면에서 물결치는 감정의 흐름에 따라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의 창시자인 예수님과 함께, 온 교회와 함께 전 세계를 향해 기도 바치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기도 바치는 사람은 기쁨의 순간에도 슬픔의 때를 생각합니다. 열렬히 기도 바치는 사람은 슬픔의 순간에도 슬픈 감정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도우심에 희망을 두고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자기 위주의 기도를 탈피하는 것입니다. 내 기쁨을 위해, 내 만족을 위해, 나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기도하기보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기도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감정으로부터의 탈피와 극복은 바람직한 기도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런 균형감각은 내 시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보게끔 도와주며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보다 깊이 공감하고 동참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줄 것입니다
기도할 때
-이회진 신부님-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기도를 잘 하고 싶어하리라 생각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기도를 잘 하고 싶어서 여러 형태의 기도방법에 대해 배우고 있고, 또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 기도하려 노력합니다.
단순한 원리이긴 하지만 기도는 “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 마음이 간절하기만 해도 안되고, 생각만 해서도 안되고 하겠다고 결심만 해서도 안되는 것이죠.
기도는 실제로 하느님 혹은 다른 기도의 대상에게 자신이 직접 시간을 내어 마주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타인을 사랑하려고 할 때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그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할 수 있고, 말을 해 줄 수 있고, 위로를 줄 수 있듯이 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도 그분이 어떤 것을 좋아하시는지 알아야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세례를 받을 때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세례 받은 뒤 처음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꼭 들어주신다며 세례 한 달 전부터 어떤 것을 하느님께 청할 지 잘 생각해 두라고 세례를 받는 모든 이에게 당부를 주셨죠.
당시 저는 같은 대학에 다니는 고향 출신의 동료 여학생을 좋아했습니다.
성당에 다니며 교리 공부를 한 이유도 제게서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그녀의 마음을 잡아보려는 의도에서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기도로 청할 것을 하나 정해두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와 결혼하게 해 주십시오.”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세례 받는 날이 되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영성체 후 한 사람씩 제단 앞으로 나와 자신의 세례 후 첫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 차례가 되자 저도 일어나 제단으로 나아가며 다시 한 번 저의 기도를 머릿속으로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단 앞에 잠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자리로 돌아갔죠.
그런데 제단을 지나 신자석을 돌아서는데 “아차!” 싶었습니다.
분명 “마리아와 결혼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려고 결심하고 제단 앞에 나아갔는데 신자석을 돌아서면서 엉뚱한 기도를 드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제단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주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신자석을 돌아오며 세례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 온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미안하다는 생각과 내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는 마음 등이 복잡하게 얽혔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도의 기억은 잊혀졌습니다.
원하지도 않는 기도였고, 세례 후에 제 생활이 변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3년 뒤에 성소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때 까마득하게 잊혀졌던 기억 한 편에서 세례 때 하느님께 드렸던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저는 잊어버렸던 기도를 하느님은 잊지 않았던가 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알았죠.
기도할 때, 잘 생각해서 해야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당신께 봉헌하는 기도를 마음에 두셨다가 언젠가는 꼭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이름을 부르며 우리가 기도할 때, 나의 기도와 청을 들어 달라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아버지가 지금 내 삶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를 바라보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은 어떠신지 한번은 생각해 보고 시작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좀 더 하늘 가까이 이를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그렇게 아버지의 마음을 느껴보는 시간으로부터 우리의 기도를 시작해 봅시다.
“주님, 당신은 저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 기도 안에 이제는 살 힘도 주소서.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이기양 신부님-
오래 전에 부유한 한 가정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집안에 들어서서 둘러보고는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수도자와 성직자들이 아침저녁으로 바치는 기도서인 「성무일도」가 5권이나 놓여 있어서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온 가족이 성무일도를 바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생인 두 자녀도 부모와 함께 기도를 하고 어쩌다가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날은 저희들끼리 성무일도를 바친다는 것입니다. '이 가정은 완전히 수도원이네!‘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따라합니다. 부모의 모습이 곧 자녀의 모습이지요.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궁금하다면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자녀들이 툭하면 싸우고 욕지거리를 한다면 내가 매일 욕하고 싸우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자녀들이 주일 미사에 잘 빠지고 성당에 소홀히 한다면 부모인 내가 미사에 잘 빠지고 성당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이들의 입에서 ??돈, 돈?‘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으면 내가 평소에 ??돈, 돈?‘하고 살고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11,1)
오늘 복음에서 제자 하나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어떤 곳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지요.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기도하고 싶은 원의를 갖게 된 것입니다. 가르침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지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외딴 곳에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기도 안에서 하루 하루의 삶을 하느님과 잘 승화시키시는 스승의 모습을 자주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스승님 살아 생전에는 잘 하지 못했던 제자들도 후에 스승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그 길을 따라 가게 되어 있지요. 그것이 산교육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미사 때마다 바치고 있는 주님의 기도와는 좀 다릅니다. 미사 때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 복음에 있는 주님의 기도를 많이 본 따서 만든 기도문이고, 오늘 주님의 기도는 루카 복음의 기도문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많을 때는 수십 번씩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미사 때마다, 또 묵주기도를 드리며, 그리고 아침저녁 기도 때 등등 수없이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있고, 신자라면 누구나 이 주님의 기도를 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기도문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기도하고 있으며, 주님의 기도를 바칠 자격은 있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한들 행동이 뒤따르지 않은 채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공허한 울림이 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지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감히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습니다. 성경에도 하느님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하여라.?“(탈출3,14)
하느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들려주신 답변으로 감히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 성경학자들이 하느님을 표현한 방식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불경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이와 같습니다. 평소에 우리는 대통령 이름도 쉽게 호명하며 편하게 이야기하지만 만약 대통령을 만나게 되었다고 가정할 때 대통령과의 독대 자리에서 ?’ㅇㅇㅇ씨.?“하고 대통령의 이름을 호명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실례를 범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존경하고 또 어려운 어른의 존함을 함부로 부른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은총을 내려주셨습니다. 또한 그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입니까?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입니다. 집 나간 아들을 애타는 부정으로 그리며 모든 것을 다 용서해 주는 아버지, 바로 이 분이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바로 그 분이지요.
'아버지‘라는 이 한 마디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인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은혜를 입고 있음을 그 한 구절에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나의 욕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입으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하고 기도하지만 속마음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제 아들의 대학 합격을 꼭 이루어 주십시오.“하고 기도합니다.
물론 하느님께 나의 소원을 기도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가 원하는 지향을 하느님께서 들어 주신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온전할 리가 없지요. 모두가 다 성공하고 편히 잘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욕심이 부딪힌다면 세상은 곧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위하고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 됩니다.
저는 어린이들이 고백성사를 보면 착한 일을 하고 칭찬을 몇 번 하는 것을 보속으로 내줍니다. 주님의 기도는 물론 기본으로 바치게 하지요. 어른들도 주님의 기도를 보속으로 받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내가 먼저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 대한 미움을 가슴에 그대로 담고 있는 사람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자격이 없다는 말씀이지요. 나는 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을 갖고 있는 자가 어떻게 하느님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기도를 바치려면 먼저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우리는 참으로 유혹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도처에 유혹거리가 넘쳐나고 있지요. 이 시대가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육신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남이야 어찌 되든 말든 내 욕망만을 채우려 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유혹 또한 넘쳐납니다. 그래서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쉽게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지키려면 나쁜 환경에 아예 몸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내기 골프를 좋아하고 더 나아가 모르는 남자나 여자들과 쉽게 어울려 놀기를 좋아한다면 그와는 친분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친구와 어울려 다니면 나 또한 곧 그렇게 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도 있듯이 나쁜 친구를 사귀면 나도 모르게 나쁜 일에 휩쓸리게 되어 있지요. 유혹에 스스로를 노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면 많이 배우고 내 삶이 발전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자 중에 자매님 한 분이 열심히 <100권 신심 서적 읽기>에 동참하며 책을 읽는데 신자 아닌 남편이 옆에서 그대로 다 따라 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좋은 이웃을 만난다는 것은 이렇게 내 인생에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이 세상에 대해서 다소 모자라는 점이 있더라도 아주 깨끗하고 거룩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이것저것을 다 경험해야 풍부한 사목이 나오지 않겠느냐고 더러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좋은 환경은 스스로 절제하고, 유혹으로부터 자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것이 거룩함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시대는 가까이에 유혹 거리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런 남편과, 아내와 어떻게 사느냐, 이제 그만 이혼해라.“
이렇게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결코 복음적이지 않은 이런 친구들과는 멀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우리가 청하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은총을 주셨고, 그 아버지가 얼마나 인자하신 분인지를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하며, 용서를 청하기 전에는 먼저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 유혹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웃과 환경 안에서 살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더욱 정성껏 바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기도 : 가장 완벽한 기도
-박상대 신부님-
루가복음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가르침은 바로 ‘기도’에 관한 것이다. 오늘 복음은 모든 기도의 모범이 될 ‘주님의 기도’를 예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는 대목이다. 우선 루가복음의 주님기도(11,1-4)와 마태오복음의 주님기도(6,9-13)를 비교해 보면, 루가는 5개의 청원을, 마태오는 7개의 청원을 담고 있다. 루가에는 마태오의 세 번째 청원인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와 일곱 번째 청원인 ‘또한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가 빠져있다. 루가는 주님의 기도를 ‘아버지’ 라고 시작하는 반면, 마태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부르며 시작한다. 마태오는 예수께서 산상설교(5-7장)의 테두리 안에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지만, 루가는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자기들도 기도하고자 하는 제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오늘 편의상 현행의 주님기도를 묵상해 보자.
주님의 기도는 우선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로 볼 수 있다. 이 기도는 일곱 가지 청원을 담고 있는 바, 전반부의 세 가지 청원은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에 관한 것으로서 하느님에 대한 청원이며, 후반부의 네 가지 청원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 ‘우리 잘못의 용서’, ‘우리를 유혹으로부터 보호’, ‘우리를 악에서 구제’에 관한 것으로서 우리 인간과 삶에 대한 청원이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청원에 의해 이 땅에 하느님의 영광(이름)과 통치(나라)와 섭리(뜻)가 계시되었음을 선포하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이다. 아울러 이 땅위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육체적 구원(양식)과 영혼의 구원(용서)을 도모하여, 모든 인간을 온갖 유혹과 악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해방) 종말론적 구원(영생)을 주시려는 예수님의 다짐기도인 것이다.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께서 당신의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이 땅위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심으로써 이 기도는 제자들의 기도가 되었고, 우리의 기도가 되었다. 주님의 기도는 다른 어떤 기도가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한 기도이다. 주님기도의 후반부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께 청하는 일용할 양식은 어제나 내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늘만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은 우리의 지나간, 즉 이미 행한 어제의 잘못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갖은 유혹과 악으로부터 보호와 해방을 청하는 것은 미지(未知)의 내일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주님기도의 후반부는 우리 인간자신과 실존을 위한 것으로써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차원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가 오늘만을 위한 일용할 양식을 청할 때는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또 우리가 어제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할 때는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봉헌을 생각하며 구세주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또한 우리가 다가올 온갖 유혹과 악으로부터의 보호와 해방을 청원할 때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강림하신 진리이며 위로자요 협조자인 성령 하느님께 의지하여 우리의 미래를 맡겨드리면서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는 한 분이신 하느님의 이름과 통치와 섭리를 청원하며, 성삼이신 하느님의 각 위격에 일용할 양식과 용서, 보호와 해방을 청원하면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완벽한 기도인 것이다. 이제 주님의 기도는 매일 매일 하느님 성삼께 바치는 나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주님의 기도를 매일 외우는 것으로만 끝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것은 주님의 기도가 모든 신앙인이 지녀야 할 진실한 삶의 자세를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기도는 이 기도가 담고 있는 내용의 실천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기도 중에서 자신의 신원을 재삼 확인하시고, 신원에 따른 사명을 다짐하신 후 항상 그 대로 행동하신 것처럼 말이다. 이 점이 어제 복음에서 밝혔듯이 관상과 활동을 한데 묶어 적극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이유이다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까 11,1-4)
-유광수 신부님-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제자가 "저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듯이 우리도 오늘 '기도하는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하면서 오늘 복음을 묵상하자. 모든 것이 그렇듯이 우리가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도하고 싶은 원의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셨다. 그렇지만 제자들보고 기도하라고 먼저 말씀하지 않으셨다.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늘 기도하셨지만 한번도 제자들보고 기도하라고 하시거나 아니면 내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줄게 하고 서두르지 않으시고 당신 혼자 묵묵히 기도하시면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여 주셨다. 왜 그러셨을까? 하나의 교육적인 방법이다. 사실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제자들, 기도를 한번도 해보지 않은 제자들보고 무조건 기도하라고 하거나 아니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한들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기도하겠는가? 기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 전에 먼저 당신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기도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셨고 궁금하게 생각하도록 하셨다. 드디어 참다못해 제자들이 나서서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루가는 다른 복음서보다 기도에 관한 부분이 제일 많이 기록하였다. 그마만큼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도에 관한 이 부분을 자기 복음의 첫 부분이 아닌 중간 부분에 갖다 놓은 것은 루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즉 기도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기도에 대한 관심이 없이 또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 없이 기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제자들이 기도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신 것이다.
열망은 기도를 잘 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할 조건이다. 이 조건이 채워졌을 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기도하는 방법의 첫째는 기도의 분위가 즉 내가 누구에게 기도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라고 아버지를 처음에 갖다 놓은 것은 누구에게 기도한 것인가를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은 아버지이시다. 내가 지금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께 하는 것이다. 즉 기도는 아버지 앞에 나오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대화를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의논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다. 즉 기도는 아버지와 자녀의 만남이요, 대화요, 느낌이요, 확인이다. 삶을 나누는 것이다.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아버지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분이, 나보다 더 나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더 잘 아시는 분, 지금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분이시다. 아버지는 나에게 모든 것을 주고자 하시는 분이시며 내가 잘되기를 나보다 더 바라시는 분이시다. 아버지는 내가 행복하기를 나보다 더 바라시는 분이시며, 아버지는 내가 슬퍼할 때 나보다 더 슬퍼하시는 분이시며 내가 고통을 당할 때, 병들어서 아플 때, 내가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때 나보다 더 고통스러워하시고 아파하시고 안타까워하시는 분이시다. 내가 기뻐하면 나보다 더 기뻐하시는 분이시며, 늘 나에게서 당신의 눈을 떼지 못하시는 분이시다. 가장 좋은 옷을 입혀주시기를 바라시는 분이시며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이지 못해 안달해하시는 분이시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늘 잔치를 차려주시며 함께 먹고 춤을 추시는 분이시다. 늘 나를 기다리시는 분, 당신의 넓은 품으로 나를 안아주시고 싶어하시는 분이시다. 자녀는 그런 아버지 앞에 드릴 말이 많지 않다. 그저 아버지 품에 안겨있으면 된다. 대 데레사는 주의 기도를 바칠 때 "아버지"라는 말 이외에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냥 아버지하고 몇 시간이고 머물렀다고 한다. 아버지의 품속에 오랫동안 안겨있으면서 아버지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 앞에 나와 있으면서 많은 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고 기쁨이고 행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할 때 내가 알 지 못하는 낮선 분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내가 일일이 말을 하고 설명을 해야 알아듣고 그때서야 당신 마음에 내키면 기도를 들어주시는 인색한 분이 아니다. 내가 혹시나 잊어버리고 청하지 않았으면 그것을 들어주시지 않고 오히려 잘되었다고 하고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나의 청 때문에 성화에 못 이겨서 마지못해 나의 청을 억지로 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큰 소리로 많은 말을 해야 그 때서야 알아듣고 귀찮아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정말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를 올바로 알고 기도한다면 많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며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인지 안 들어주실 것인지 하고 불안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기도하는 사람은 불안해 하지 않고 늘 편안할 것이고 든든한 아버지의 보호아래 자신감을 갖고 살아갈 것이며 외롭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지켜 주시는데, 아버지가 나를 보호해주시고 나와 함께 계시는데 얼마나 든든하고 편안한가! 두려울 것이 없다.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노력한다. 즉 나의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것이다."(루가 15,31)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또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를 하면서도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나라만을 찾고 나의 나라가 오게 하기 위해 기도한다. 즉 기도하면서도 아버지와 하나되지 못하고 아버지와 나와 늘 떨어져 있고 분리해서 기도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토록 오랫동안 기도했으면서도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시는지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내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나도 기뻐하는 것이 우리가 청해야할 아버지의 나라이며,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을 내가 받아들이는 마음을 갖는 것이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하는 것이다. 즉 내가 기도하면서 청해야할 아버지의 나라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 아버지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것, 아버지께서 나를 위해 마련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말로는 아버지의 나라를 청하면서도 돌아서서는 모두 나의 나라를 오게 해달라고 말하고 행동한다. 이 얼마나 모순된 기도의 모습인가? 아무리 아버지가 원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싫으면 내가 고통을 당하거나 손해를 봐야하는 것이라면 절대로 양보하지 못하고 끝까지 자기 것을 주장하고 고집하는 기도를 바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아버지의 나라는 오늘 나의 일용할 양식이다. 오늘 우리의 양식은 빵이든 밥이든 그것은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양식들이지 나의 나라를 위해서 청하는 것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늘 청하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욕심을 부려 갖기 위해 청한다. 이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말로는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해달라고 청하면서 늘 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은 유혹을 받고 있다. 유혹이란 바로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생각들과 행동들이다. 우리는 이런 유혹을 늘 받고 있고 또 그런 유혹에 빠지기 쉽다.
우리는 오늘 이 기도를 바치면서 적어도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머물어 보고 아버지께서 오늘 나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일용할 양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자. 아니 이용할 양식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해보자.
무슨 기도문이 그리 많은지 우리 주위에는 기도문이 너무 많다. 그 기도를 다 바치려면 시간 반 또는 두 시간 걸린다고 한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다 좋은 내용들이고 다 필요한 것들을 청하는 내용들이다. 가정을 위한 기도, 연령을 위한 기도 사제를 위한 기도, 성전 건립을 위한 기도, 수재민을 위한 기도, 통일을 위한 기도,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 예수 성심께 바치는 기도, 묵주의 기도, 등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기도문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
왜 그렇게 일일이 조목조목 나누어서 기도를 바쳐야 하는가? 예수님이 가르쳐 준 기도의 내용을 보면 한 가지 뿐이데 즉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라는 것뿐인데 우리의 기도문을 보면 책 한권이 모자란다. 정말 기도를 올바로 하고 있는지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강영구 신부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그대에게
당신은 지금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만 바르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온전히 하느님께 귀의(歸依)하여 하느님 안에 인생의 뿌리는 내린 사람이 기도합니다.
기도는 서로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對話)입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 기도입니다.
바르게 기도하는 사람은 바르게 서있고, 그의 삶은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기도하는 그의 삶에서 아버지의 생명을 느낄 수 있고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이 향기로운 유향연기처럼 하늘로 오릅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에 실패합니다.
스스로 아버지가 되어 제 발로 서 있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독백이거나 억지이거나 일방적인 통고입니다.
그들이 바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거래이거나 흥정입니다.
그들은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당신의 삶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주님의 기도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렸을 때 가위에 자주 눌렸었습니다. 악령들에 의한 장난인 것처럼 생각되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로 했습니다. 어떤 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처음엔 목소리가 안 나오다가 여러 번 하다보면 목소리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고 눌렸던 가위도 풀렸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예수님의 이름 대신 주님의 기도가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반복하는 것보다 더 편했고 주님의 기도가 한 번 끝나기 전에 항상 가위가 풀렸습니다. 아마도 그 때는 예수님보다는 ‘아버지’를 부를 때 더 힘이 났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까지도 힘을 얻기 위해 불렀던 분이 ‘아버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가위에 눌려도 두렵지 않았고 설사 가위에 눌리더라도 주님의 기도를 외우면서 그것이 풀릴 것을 걱정도 하지 않고 그냥 다시 잠이 들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는 마치 부모를 보지 못하여 불안하던 아이가 다시 부모를 찾은 것처럼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당신의 기도 안에는 보다 심오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깊은 의미들을 한 번 되짚어 보겠습니다.
1. 하늘에 계신; 하느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땅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때 저주를 받았고 저주 받은 곳에는 하느님이 거하시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 합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마음을 하늘처럼 깨끗하게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이 하느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더러운 상태에서 주님께서 하늘에 계시다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2.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모인 이들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사람들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라 하면서 교회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안 될 것입니다. 아버지는 한 개인인 ‘나’의 아버지도 아니고, 또 세상 ‘모두’의 아버지도 아니고 바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 안에 모인 ‘우리’들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모이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 고백할 수 없습니다.
3. 아버지; 하느님의 아들은 독생자 그리스도밖에 안 계십니다. 그래서 오직 아드님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드님은 당신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며 당신과 한 몸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그래서 그 분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옆구리로부터 나온 피와 물로 만들어진 그 분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분과 한 몸을 이루지 않고서는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4.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모든 기도의 핵심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영광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에 불만과 불평이 존재한다면 온전히 하느님을 찬미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만족스런 이들은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구체적인 찬미는 미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미사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봉헌하시며 제정하신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감사의 봉헌이 없는 미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자신을 감사로이 봉헌하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5.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담과 하와의 죄로 하느님의 나라를 잃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참 행복입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이 주는 명예나 쾌락, 재물 등이 주는 헛된 행복을 추구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6.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하늘나라의 행복을 잃었지만, 성모님과 그리스도의 Amen을 통한 순종으로 그 죄를 기워 갚았습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또 그리스도는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시며 하느님의 뜻에 No가 아닌 Yes, 즉 Amen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뜻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실천하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라고 기도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7. 오늘;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매일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 생명의 에너지가 우리에게로 옵니다. 그러나 미사만큼 큰 기도는 없습니다. 음식도 매 끼니를 먹어야 하는 것처럼, ‘오늘’의 양식을 청하는 것은 ‘매일’ 기도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육체적으로 먹고 살 것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질제로 우리가 구해야 할 양식은 영적인 양식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살과 피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오시는 양식입니다. 이 양식은 ‘성경말씀’(말씀의 전례)과 ‘성체’(성찬의 전례)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미사에 참례하지 않으면서, 혹은 성경말씀을 매일 먹지 않으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청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9.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내가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나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청할 수 없습니다.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마음으로는 절대 바칠 수 없는 부분입니다.
10.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유혹거리들에 가까이 머물거나 유혹거리들을 치워버리지 않으면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혹을 이길 힘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겸손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11. 악에서 구하소서; 죄를 짓고 바로 고해성사를 보지 않으면서 악에서 구해 달라고 청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뿌리치면서 악에서 구해달라고 청해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님의 기도 안에 교회의 핵심적인 모든 가르침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입으로 의미 없이 반복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 기도의 내용을 음미하며 그 기도에 합당하게 살아가려는 마음으로 바쳐야 할 것입니다.
그 나라가 임하시며
-김대열 프란님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루카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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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가 전하는 ‘주님의 기도’의 앞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제일 먼저 강조한 기도의 내용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를 고백하고, 그분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으로 기도가 시작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처럼 기도의 제일 앞 부분에 하느님에 대한 찬미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내용을 집어넣으신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주님의 기도의 내용을 가지고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 부분은 마태오와 루카의 내용이 합쳐져서 완성된 부분입니다.)
생각해봅니다.
만약 이 구절의 기도가 실현만 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이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느님, 그 하느님의 이름이 빛나고, 그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하고,
그 하느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그것은 다름아닌, 사랑의 나라이고, 행복의 나라이고, 하느님 나라이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목적은 제일 앞 부분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한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일용할 양식도 청하는 것이고, 용서할 수 있는 힘도 청하는 것이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청하는 것이고, 악에서 구해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상상을 해봅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열심히 살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비록 이 세상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세상이라고 해도, 그러한 세상을 꿈꾸며 열심히 살아가려 할 때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허락된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가장 중요한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려 하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목적은 결국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의 뜻에 최선을 다해 협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꿈을 꾸고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해서 어떤 자세와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신 최고의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입에 달고 살아야 합니다.
비록 늘 부족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라 할 지라도,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분께 도움을 청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단 한 번을 외워서 하는 주님의 기도라도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바치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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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주님의 기도를 소개한 복음서는 마태오 복음(6,9-15)과 오늘 복음으로 읽히는 루카 복음(11,2-4)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주님의 기도는 대부분 마태오 복음(6,7-15)의 내용에 루카 복음을 더해서 완성된 것입니다.
(2013.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