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세재에 울려퍼진 독립선언문과 만세삼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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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간 이어져 온 산동네 작고 가난한 교회의 3·1절 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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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근세사에서 우리 민족에게 가장 치욕적인 역사는 언제였을까? 현존하는 민족의 비극인 남북분단의 원인이며, 지금도 국회에 계류 중이고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꼭 청산해야 할 민족의 숙원인 '과거사 청산' 대상 제 1호는 바로 일제 36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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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일의 의지와 목소리를 모아서 만세삼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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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침략의 만행을 뉘우치지 않고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저들이 누구인가. 우리 민족에게 저질렀던 수많은 죄악을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풀어주지 않으면서, 오히려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저들을 보며 상처가 덧나는 아픔을 느낀다.
1945년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까지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피 흘려 싸워 독립을 쟁취하였지만, 거국적인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렸던 자랑스러운 3·1 독립운동이야말로 우리 민족정신이자 저력이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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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때 농민군이 잠시 진을 쳤던 이진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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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총칼에 맨손으로 맞서 싸운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치욕의 역사를 기억하며 극일과 민족번영의 의지를 키우는 날이 바로 3·1절일 것이다. 그 3·1 정신을 계승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독특한 예배와 기념식을 벌써 20여년째 계속하고 있는 가난하고 작은 교회가 있다.
서울 성동구 마장동과 사근동 사이의 언덕 위에 있는 홍익교회에서는 해마다 3월 1일이면 20대에서 70대까지 거의 전교인이 3·1 등반대회를 겸한 기념예배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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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전쟁용 송진 채취로 밑부분의 껍질이 벗겨진 소나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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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일도 이 교회는 어김없이 남녀노소 백여 명이 멀리 경북 문경에 있는 새재를 찾았다. 문경읍을 지나 제1 관문인 주흘문을 지나 TV 사극 '태조 왕건' 촬영장을 잠깐 둘러본 후 일행은 새재를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촬영장에서 제3관문까지는 무려 6.2Km 경사는 약하지만 거리가 멀어 노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코스다. 80세가 가까운 노인 몇 명은 상당히 힘든 모양이지만 내색치 않고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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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관문 앞에서 바라본 마패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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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 몇 명이 노인들을 격려하며 모시고 올라가자 노인들도 힘이 나는 모양이다. 길가에는 밑 부분이 큼지막하게 벗겨진 커다란 소나무들이 자주 눈에 띈다. 안내문을 살펴보니 일제 말기에 전쟁용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라고 한다.
얼핏 보아도 수백 년은 넘었을 것 같은 소나무들이 커다란 상처를 드러낸 채 꿋꿋이 버티며 서 있는 모습이 우리 민족의 상처를 닮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 소나무들을 보며 올해 78세의 박 할아버지가 옛날을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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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 중 설교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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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참 힘들었지. 왜놈들이 전쟁말기에 얼마나 발악을 하던지…. 집에 있는 밥그릇뿐만 아니라 숟가락 젓가락까지 빼앗아 갔다니까. 공출이라고 했지.”
“여기뿐만이 아니야. 우리 나라 방방곡곡 다 그랬어. 쓸 만한 소나무들은 거의 수난을 당했지. 송진 받아서 비행긴지 전투긴지 연료로 쓴다는 소문이었어.”
“어떻게 일본군에 끌려가지 않으셨지요?”
“해방이 일 년만 늦었으면 나도 끌려 갈 뻔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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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선언문 낭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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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보니 길가에 '이진터'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1592년(임진년)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거느린 왜병 1만8500명이 바로 이곳 문경새재 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이때 신립장군의 농민군 8000여 명 중 1진을 제 1관문에 설치하고 이곳 이진터에 본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신립 장군이 부장 김여물 등의 극간을 무시하고 충주 달천강변의 작은 언덕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친 뒤 왜군의 조총과 맞서 싸웠으나 왜군에게 모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는 것이다.
노인이 혀를 끌끌 찬다. 장군이라는 지도자 한 사람의 오판으로 통쾌하게 왜적을 한 번 무찌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불쌍하고 아까운 농민군들이 모두 희생되었다고 안타까워 한다. 주변을 살펴보니 좁은 협곡에 양쪽의 산들이 경사가 급하여 잘 매복하고 있다가 바위를 굴러 내리고 커다란 돌을 마구 던졌다면 그까짓 조총쯤 거뜬히 이겼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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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안보쪽으로 내려오는 길가 작은 교회의 대문에 게양된 태극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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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노인과 젊은이들이 동행하니 힘든 줄 모르고 어느새 제 3관문에 도착했다. 곧 먼저와 있던 일행 백여 명과 함께 기념예배가 시작되었다.
김태복 목사는 설교에서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길 것을 강조하고, 남북분단 상황인 우리 나라가 일본이라는 강대국을 뛰어 넘어 세계 앞에 우뚝 서려면 모든 국민이 정부를 욕하고 탓하기 전에 우리들 스스로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고 기도하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모두들 숙연한 표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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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강아지들이 겨울잠 자는 벌집을 지키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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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서(己未 獨立 宣言書)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告)하야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고(誥)하야 민족자존(民族自存)의 정권(正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 (중략)
공약삼장(公約三章)
1. 금일)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正義), 인도(人道),생존(生存),존영(尊榮)을 위(爲)하는 민족적(民族的) 요구(要求)니, 오즉 자유적(自由的) 정신(精神)을 발휘(發揮)할 것이오, 결(決)코 배타적(排他的) 감정(感情)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
1. 최후(最後)의 일인(一人)까지, 최후(最後)의 일각(一刻)까지 민족(民族)의 정당(正當)한 의사(意思)를 쾌(快)히 발표(發表)하라.
1. 일체(一切)의 행동(行動)은 가장 질서(秩序)를 존중(尊重)하야, 오인(吾人)의 주장(主張)과 태도(態度)로 하야금 어대까지던지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하라.
조선건국(朝鮮建國) 4252년 3월 1일 민족대표(民族代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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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오는 버스 백미러 속의 태양과 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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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삼장을 마치고 만세삼창이 이어졌다. “대한독립만세”가 아니라 “대한민국만세”였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두 손을 번쩍 들고 한 목소리로 외치는 만세삼창이 문경새재 깊은 골짜기로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마주보이는 마패봉이 우리 민족의 기상처럼 늠름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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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과거는 현재의 실행을 위한 본보기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이정표일뿐, 그 것에 집착하여 빠지지 말자. 분단과 일제 36년을 생각하고 화합하고 부자되고 힘(경제, 외교, 국방)을 기르는 수가 가장 지름길일 것이다. 엄연한 국제사회에서 행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고 차분하고 치밀하게 대처해야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