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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일
제1독서 : 잠언 9,1-6
제2독서 : 에페 5,15-20
복 음 : 요한 6,51-58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지혜와 자비의 행복한 삶
-무지로부터의 해방-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생명의 신비가 참 놀랍고 고맙습니다.
며칠 전 하우스 안 모종판에 심은 가을 김장할 배추 씨앗이
예쁘고 귀엽게 연록색 생명으로 싹이 터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새삼 하느님은 생명의 샘, 행복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지혜와 자비의 샘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 행복한 삶은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삶의 목표와 의미가 행복한 삶입니다.
한 번뿐이 없는 삶, 참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참 행복한 삶은 우리의 성소이자 의무요, 권리이자 책임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참으로 행복하십니까? 여러분은 참으로 자유롭습니까?
참 행복과 참 자유는 함께 갑니다. 참으로 자유로울 때 행복합니다.
얼마 전 강론 내용도 생각납니다.
모두 다 있는 데 기쁨이 없다면, 모두 다 있는 데, 평화가 없다면, 모두 다 있는 데 희망이 없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쁨과 평화, 희망이 있는 곳에 행복도, 자유도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의 지옥문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여기로 들어오는 모든 자들은 희망을 버릴지어다!”
희망 없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아무리 의식주 다 갖췄어도
희망 없는 곳이, 기쁨 없는 곳이, 평화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강론 쓰는 새벽 시간, 마침 고가高價의 손목시계가 며칠간 고장으로
제 기능을 못하고 멈춰 서니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아, 사람도 제 기능과 역할을 다 하지 못하면 쓸모가 없겠다.’ 하는 생각이 깨달음처럼 스쳤습니다.
참으로 희망차고 기쁘고 평화롭게 제자리에서 제몫을 다하며
죽는 그 날까지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새벽 책 한권의 표지 내용이 한 눈에 들어 왔습니다.
‘고대 수도 교부들이 전하는 행복의 지혜
-탐식, 음욕, 탐욕, 분노, 슬픔, 나태, 허영심, 교만의 여덟 가지 나쁜 생각들을 몰아낸다면
그 자리에 절제, 정결, 가난, 온유, 기쁨, 열정, 진솔, 겸손의 꽃들이,
행복과 지혜의 꽃들이 활짝 피어날 것이다.’라는 글이었습니다.
제가 누누이 강조하는 것이 ‘무지無知의 병’입니다.
참으로 인간은 무지한, 어리석은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습니다.
무지의 병, 어리석음의 병보다 더 심각한 마음의 질병은 없습니다.
불가의 탐진치貪瞋癡, 탐욕, 분노, 어리석음도 무지에서 나오고,
위에서 말한 여덟 가지 악한 생각들,
탐식, 간음, 탐욕, 분노, 슬픔, 나태, 허영심, 교만도 무지에서 나옵니다.
무지의 죄가, 무지의 병이, 무지의 악이 참 심각한 결정적 장애입니다.
참 지혜가 답입니다, 참 지혜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하여 우리의 모든 수행도 결국은 지혜의 수행입니다. 지혜와 더불어 저절로 따라 오는 자비입니다.
참 행복한 삶, 참 자유로운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참으로 지혜로운 삶, 자비로운 삶입니다.
삶의 지혜가 참 절실한 시대입니다. 지식의 정보는 넘치지만 참 지혜에는 굶주린 세상입니다.
옛 사막수도자들이나 우리 옛 조상들은 지식은 짧았어도 삶의 지혜는 넘쳤습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쓰레기 같은 정보의 지식들이 아니라 희망과 기쁨, 평화를 주는 참 지혜입니다.
어제 읽은 어느 선각자先覺者의 통찰에 공감했습니다. 길다 싶지만 인용합니다.
오늘 날 병든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담겼습니다.
-“내 친구들은 요즘 폐북 열심히 하는 사람 많아요. 하루에 몇 시간을 거기에 소모한다고 해요.
제 느낌은 그저 한 마디로 병든 사회구나, 하는 것이죠. 전부 나르시즘이죠.
폐북에 한 마디 올리고 내 친구들이 무슨 소리 하는 기다리는 겁니다.
‘좋아요’ 몇 개인지 들여다보고, 댓글이 마음에 안 들면 친구삭제해요.
한마디로 다 외롭다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그 짓하죠.
폐북하면서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게 아니라 자기애가 강화되는 중독현상이 생깁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술도 잘 안 먹어요. 매일 그걸 들여다보고 있어요. 새벽에 눈 뜨자마자 들여다보고.
우리나라는 뭐든지 극단적으로 가는 모양입니다.
소셜미디어가 사람들을 전부다 자폐적으로 만들어 갑니다.
인간이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다 ‘아상我相’이라는 자기 감옥 속에 사는 것은 틀림없어요.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 참으로 지혜로운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 문화가 낳은 결과 중에 하나가 힐링과 위로를 강조하는 책들이 서점에 쏟아져 나온다는 겁니다.
우리는 남을 위로할 생각은 안하고, 자기상처를 드러내놓고 말하고 위로받을 생각만 합니다.
나만큼 타인들도 고통 받는 존재라는 생각을 안해요. 항시 내 상처만 중요한 거죠.
우리 문화가 ‘징징대는’ 어린애 문화가 되는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는 다 망합니다.
현실은 인간 자신이 더 성숙해지지 않으면 모두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공생의 윤리를 채택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어요.”-
구구절절, 반박의 여지가 없는 공감이 가는 현실진단입니다.
모두를 바보로 만들기 쉬운 소셜미디어입니다. 참으로 분별의 지혜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참 좋은 보물을 놔두고 엉뚱한 곳에서 힐링과 위로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넘치는 가짜 힐링과 위로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 힐링과 위로의 센터는 바로 주님의 교회요 수도원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힐링과 위로처도 없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지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지혜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행복의 보물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입니다. 행복의 발견입니다. 행복뿐입니까? 감사도 발견입니다.
지혜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행복과 감사의 하느님 선물들입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곡과 내용은 얼마나 흥겹고 힐링이 되고 위로가 됩니까?
참 아름답고 사랑스런 시편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 들여라.”
참 좋은 주님 맛입니다. 주님 맛은 말씀 맛, 기도 맛, 진리 맛, 지혜 맛, 행복 맛 끝이 없습니다.
이 맛이 정말 사람을 살리는, 생명을 주는 맛입니다.
세상맛, 돈맛, 일 맛, 밥맛, 술맛, 도박 맛의 중독을 해독시켜 줄 맛은 주님 맛뿐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맛 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맛에 중독되지 않고 온전한 영육의 건강입니다.
“수사님, 여기 수도원에서 무슨 맛으로 살아갑니까?”
자주 듣는 물음에 우리 수도자들의 지체 없는 대답은
‘하느님 맛으로, 찬미의 맛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언급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광야曠野 인생여정에 세 부류의 인간들이 있다.
하나는 성인聖人, 하나는 괴물怪物, 하나는 폐인廢人이다.’
사람이라고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맛에, 돈맛에 중독되면 누구나의 가능성이 괴물이요 폐인이고
하느님 맛에 중독될 때의 성인 역시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해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고 잘못 미치면 폐인입니다.
참 좋은 보물이,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이 지혜입니다.
어제 아침 성무일도 시편중 지혜서 말씀이 생각납니다.
‘인간의 아낙네들이 옹글다 해도, 당신의 지혜를 받지 않으면 쓸모없는 인간이오이다.
주여, 거룩한 하늘에서 지혜를 보내 주소서.
영광의 옥좌에서 그를 내려 주옵소서.
지혜가 나의 곁에 나와 함께 있게 하시고. 당신 뜻에 맞갖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이 활짝 열린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선사되는 주님의 지혜입니다.
정말 우리가 추구할 바는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의인화된 지혜가 상징하는바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히브리말에서 지혜는 여성명사로 하나의 인격체로 등장합니다.
남성명사가 아니라 여성명사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지혜자체이신 주님의 여성적인, 모성적인 면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미사 잔치 상에
오늘 어리석고 지각없는 무지한 우리 모두를 초대해 주셨습니다.
“어릭석은 이는 누구나 이리로 들어와라!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주는 술을 마셔라.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지의 길을 걸어라.”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지의 길을 걷게 합니다.
바로 이에 대한 자세한 해설이 오늘 복음입니다.
주님의 성체성사가 우리 믿는 이들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주님 맛, 미사 맛으로 살아가는지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내 살을 마시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성체성사 사랑의 신비가 이 말씀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참 행복과 참 자유의 지혜와 자비는 주님과 일치될 때,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무지의 병의 치유에 유일한 처방의 답은 감히 미사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주님과 일치로 지혜의 은총을 깨달은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구체적 지혜의 처방을 주십니다.
“형제 여러분, 시간을 잘 쓰십시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에 취하십시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바로 이것이 생명의 빵, 예수님을 모신 우리가 행하여야 할,
참 행복한 삶, 참 자유로운 삶, 참 지혜로운 삶, 참 자비로운 삶입니다.
무지의 어리석음으로부터, 세상맛의 중독으로부터 해방되어 본연의 참 나를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 하나 된 우리 모두가
참으로 행복하고 자유롭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화답송 시편이 너무 아름답고 은혜로와 다시 나눕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주님을 경외하여라.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이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
인간이 물음이라면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은 지혜와 행복의 원천입니다.
하느님 망각에서 기인한 무지의 어리석음이 불행입니다. 아멘.
지혜의 외침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 우리는 잠언의 말씀을 듣습니다.
잠언의 저자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지의 길을 걸으라는 지혜의 외침을 전합니다.
지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 술을 마셔라.”
그리고 이어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빵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당신 자신을 빵이라고 하시면서 그 빵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수군거리고, 말다툼까지 벌어집니다.
사람들은 그가 자기들이 뻔히 알고 있는 목수 요셉의 아들인데,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웃기지 않는가? 라고 수군거리고, 예수님께서 자기가 빵이라며, 먹으라니,
어떻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느냐며 서로 말다툼을 합니다.
자기 살을 먹으라니, 우리가 식인종이냐고 말다툼까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식인종이 맛 투정할 때, 어떻게 말하는지 알아요? 답: 아, 살 맛 안 나.
여러분들, 빵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빠리 바께트입니까? 빵? 고소한 내음. 빵, 맛 있어요? 유럽에 가면, 빵이 그리 맛있을 수가 없어요.
빵이라고 들으면, 즉시 성체가 떠오르는 분? 그렇다면, 아주 대단한 신자입니다.
한편 우리는 루가 복음이 전하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클레오파스와 다른 한 제자,
두 사람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 두 제자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전하지요.
오랜 시간 함께 이야기하며 길을 같이 걸어갔어도 그분을 몰라 뵈었는데,
"빵을 떼어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었다"고 들려줍니다(루가 24,35).
성경에서 ‘빵을 뗀다’는 동사는 성체성사를 뜻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빵을 떼다, 빵을 나누다라는 동사가 신약성서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데,
초대교회의 성찬례를 뜻하는 동사라고 합니다.
자기들의 구세주라고 큰 기대를 걸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들어가시자
크게 실망하여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나눌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던 것처럼
주님과 함께 빵을 나누는 이 성체성사, 주님의 빵을 나누는 이 미사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됩니다.
미사는 그분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대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함께 머무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따라서 미사는 우리 가톨릭 신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사람에서 가장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 소중한 시간인 것입니다.
오늘 저는 성체에 대해 진실한 신심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소박한 사랑을 통해 성체의 소중함을 잘 보여 준 한 분을 떠올렸습니다.
바로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와 <나를 이끄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예수회원, 취제크 신부님입니다.
제가 번역한 <모든 것 안에서 그분과 함께>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월터 취제크 신부님은 미국에서 태어나 예수회에 들어왔고,
구소련으로의 비밀 선교를 위해 폴란드에서 활동하다가 구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바티칸 스파이라는 혐의로 구 소련으로 끌려가 감옥과 시베리아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무려 23년을 보냈습니다.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로 간 이후 아무 소식을 접할 수 없었던 미국 예수회에서는
취제크 신부님이 결국 시베리아에서 죽었다 생각하고 사망자 명단에 넣어 위령미사를 드렸었지요.
(나중에 취제크 신부님은 그 사실을 알고,
약간은 해학적으로 아마 자기가 그 위령 미사의 덕으로 살아남았나보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미국 정부의 노력으로 구 소련의 스파이 두 사람과 교환되어,
죽었다고 생각한 그가 고국 미국으로 송환됩니다.
그는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먼저 자기의 체험을 생생하게 전하는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을 쓰고,
그 책이 출간된 이후에 자기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 담지 못했다고 느끼며
다시 자기 체험을 더 깊이 묵상해서 책을 쓰지요. 그것이 <나를 이끄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당연하게 취제크 신부님에게 혹독한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
보통 사람들은 불과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가는 곳에서
신부님은 어떻게 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물음을 던집니다.
취제크 신부님의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매일 매일 몰래 드리던 미사를 통한 힘이었다고.
그는 <나를 이끄시는 분>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미사를 집전하지 못하거나 미사에 참여할 기회를 박탈당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미사가 얼마나 소중한 보물인가를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북극의 지루한 여름철이 오면 작업할 낮 시간은 최고로 길어지고 그 대신 수면시간은 대단히 짧아지는데,
이때가 되면 죄수들은 한숨이라도 더 눈을 붙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사제들과 신자들은 육체에 필요한 수면시간마저 희생한 채,
기상종이 울리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한 막사 안에서 몰래 미사를 드렸다.
미사를 드리다 발각되는 날이면 우리는 심한 벌을 받아야 했고, 게다가 밀고자들은 사방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런 위험과 희생을 기꺼이 감수할 만큼 미사는 우리에게 소중했다.
우리는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거의 무슨 짓이나 다했다.
우리에게 있어 성체성사는 중대한 실존의 근원이었다.
성체성사가 우리 마음과 정신, 우리 하루의 삶에 주는 영향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이곳, 이 자리에서 미사를 집전했다는 생각만으로도
내가 소련에 와서 그간 겪었던 고난들이 하나같이 필요했고 또 소중했다고 느껴졌다.
새날을 맞이할 때마다 나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었다.
어떤 위험도, 어떤 역경도, 어떤 보복도 나로 하여금 매일 미사를 집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없었다.”
오늘 다시 한 번 미사의 소중함, 성체를 통해 깊이 예수님과 만나는 신비를 묵상하며, 감사를 드립시다.
오늘 시 하나 나눕니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겼네.
빛을 창조하시자 어둠과 그림자가 따라왔네.
빛과 그림자는 낮과 밤이 하루이듯 하나라네.
그림자는 빛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네.
다만 물체가 빛을 가릴 때, 그림자가 생겨나네.
빛과 그림자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기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다만 빛이었는데
빛 속에 서면 물체는 그림자로 창조에 응답하네.
우리도 빛을 받아 아름다운 그림자를 그려야 하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는 지난 7월 하순과 8월 초에 걸쳐 국내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을 때였지만, 성지 담당 신부로서
전국의 성지들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혼자 바쁘게 다녔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오후 5시까지에 마치는 빡빡한 일정을 치르다보니
총 8일 동안 자그마치 86군데의 성지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이번 성지순례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인지 묻더군요.
무더위? 피곤함? 외로움? 모두 아니었습니다.
사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순례 중에 제게 달려드는 날파리, 모기 등의 벌레였습니다.
많은 곳의 성지가 산속 깊숙이 있다 보니 벌레들을 참 많이 만나게 되더군요.
벌레들을 쫓으려다가 제 안경을 쳐서 안경알이 깨져버리기도 했고,
모기가 물어서 얼굴의 한 부분이 퉁퉁 붓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벌레 때문에 점점 화가 났고 짜증이 났습니다.
그렇다면 이 벌레의 공격(?)에 저는 어떻게 했을까요?
벌레들과 대화를 나눠서 성지순례 중이니까 지금은 가만히 좀 놔둬달라고 타협했을까요?
벌레들을 없애게 해달라고 그래서 순례를 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했을까요?
당연히 아니지요. 벌레를 절대로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저 손만 휘휘 저으며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짜증도 나고 화도 났지만 저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원 목적인 성지순례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벌레 때문에 성지순례를 제대로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해야 할 것을 했다는 뿌듯함과 함께 큰 기쁨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말이 통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 자체의 모습들을 인정하면 어떨까요?
그 사람이 변화되기를 원하는 기도보다 그 자체를 인정하면서
자기 자신에 집중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있어서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과 행적에서 꼬투리를 잡으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신 예수님을 인정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예수님의 말 자체에만 신경 쓰면서 거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들이 중첩되어집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5)
이제까지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과 사람들을 통해 보여주신 많은 표징들에 집중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분명히 주님께서 참된 양식이고 참된 음료임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1독서의 잠언에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어라.”(잠언 9,6)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어리석음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지는 삶에서 벗어나, 우선 내 자신에 집중하는 것이 어떨까요?
사도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에페 5,17)
우리를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내 안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는 삶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급급한 삶이 아닌, 주님께서 명령하신 삶을 쫓아 살아갈 때
진정으로 주님의 살과 피는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되어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해 줄 것입니다.
미사 때 내 안에 모시는 주님을 다시금 기억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모신 내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묵상해보시길 바랍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살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빵으로 출발해
빵으로 완성되는
성체성사의 신비입니다.
성체성사는
생명의
보편적인 의미에서 출발합니다.
생명은 서로 주고받는
살아 있는 상호관계입니다.
서로 주고받으며
생명은 생명으로
존재하며 성장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또한
빵의 관계 안에서
공동체가 됩니다.
빵의 공간은
생명과 사랑
나눔의 진실 된
공간이 됩니다.
성체성사는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가 가야 함을
잘 보여줍니다.
빵의 신비는
자기중심이라는
좁은 시각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살과 피로
우리의 욕망을
정화합니다.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은
하느님 사랑뿐임을
성체성사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생명을 먼저
우리에게 내놓으십니다.
영원한 생명의
시작은 사랑을
받아들이고 내어놓는
감사에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빵과
사랑의 빵은
하나가 되어
우리를 살리고
있습니다.
모두를 살게 하시는
구원의 하느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입시다.
마음에 드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의 마음에 들려고 합니다.
자신이 좋을 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사람들이 좋아해주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면 자신은 외적인 매력을 좋아해서 외적으로 예쁘게 꾸미면
다른 사람들도 좋아해줄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외모보다는 성격을 더 중요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지나치게 외모에 신경 쓰는 사람은 오히려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좋아하는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의 마음에 들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있어야 상대의 마음에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의 마음에 들려면 먼저 상대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야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타인을 좋아하는 것도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영화 ‘지니어스’(2016)는 실존했던 전설적인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와
천재 작가 ‘토마스 울프’에 대한 실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맥스웰 퍼킨스는 당대 최고의 소설 편집자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프랜시스 스콧,
피츠 제럴드를 발굴하여 대문호로 만든 최고의 베테랑입니다.
날마다 일에 치여 사는 맥스는 어느 날 우연히 무명작가인 ‘토마스 울프’의 원고를 읽게 됩니다.
토마스 울프는 워낙 글을 길게 써서 어떤 출판사도 그의 글을 출판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맥스는 그 엄청난 양의 원고 속에서 보석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출판을 하자고 제안합니다.
문제는 톰의 글을 줄이는 일입니다.
톰은 우선 자신의 글을 출판해주는 것에 고마워 허락은 했지만
자신의 글이 붉은 펜으로 한없이 지워져나갈 때는 자신의 심장이 찢겨나가는 아픔을 겪습니다.
결국 300여 페이지를 줄여 책 한 권으로 출판할 분량을 만듭니다.
그 책이 토마스 울프의 첫 작품 ‘천사여, 고향을 보라’입니다.
이 책은 출간과 함께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토마스 울프는 헤밍웨이, 피츠 제럴드에 이은
천재 작가라는 칭송을 받습니다.
첫 작품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톰은 바로 두 번째 원고 작업에 들어갑니다.
자신감을 얻은 톰은 쏟아지는 영감과 타오르는 창작열로 이번엔 5,000페이지가 넘는 원고를 맥스에게 넘깁니다.
인기를 등에 업고 조금은 교만해져있는 톰의 글을 줄여나가는 작업은 처음보다 어려웠습니다.
첫 작품 땐 한 장을 붉은 펜으로 날려버려도 잘 참았던 톰은 단어 하나 없애자고 하는 것을 가지고도 크게 거부합니다.
그렇게 거의 편집에만 2년이란 세월이 흐릅니다.
옥신각신하며 겨우겨우 책 한 권 분량으로 만들어 출판합니다. 그 책이 ‘때와 흐름에 관하여’입니다.
이 두 번째 책도 역시 큰 성공을 거둡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맥스의 편집 덕분에 좋은 책을 내게 되었다는 식으로 톰의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물론 맥스는 자신에 대한 감사는 절대 책에 넣지도 말라며 모든 영광을 작가인 톰에게 돌립니다.
하지만 톰은 그런 평가에 분노해 맥스에게 질투를 느낍니다.
그리고 그와 더 이상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는 먼 여행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의 머리엔 이미 결핵균이 퍼져있었습니다.
그는 병원에 입원하여 죽기 직전 맥스에게 한 잘못을 뉘우칩니다.
그래서 자신 안의 보석을 찾아 끝까지 자신과 같은 괴팍한 성격을 이끌어준 맥스에게
미안하다는 편지를 쓰고는 숨을 거둡니다.
하느님은 마치 맥스가 톰의 속에서 자신이 발견하려는 보석을 찾듯 우리 안을 살펴보십니다.
맥스는 자신의 것을 톰 속에서 찾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우리 안에서 당신의 것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만을 자랑할라치면 주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것이 있어야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챙기십니다. 그분의 것을 가지고 있다면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의 신붓감을 찾아오는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누구를 당신 마음에 두려고 하시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임종에 다다르자 아들 이사악에게 돌아갈 재산을 하인에게 맡겨
이사악의 신붓감을 구해오라고 합니다.
하인은 낙타 열 마리와 금은보화와 장신구들을 잔뜩 싣고 레베카라는 여인을 만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녀를 이사악의 신붓감으로 원하신다는 것을 아시고
그에게 자신이 가지고 온 모든 재산을 줍니다.
그녀는 그 낙타를 타고 받은 장신구를 걸치고 받은 것들을 가지고 이사악에게로 옵니다.
이사악은 자신의 장신구를 걸치고 자신의 낙타를 타고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오는 신붓감을 멀리서도 알아봅니다.
어차피 다시 가져오게 될 낙타와 장신구는 왜 굳이 준 것일까요?
그것을 잘 보존하여 다시 봉헌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서 찾을 수 있는 가장 귀한 보물은 인간이 피조물로서 자신의 힘으로
바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시는 성령입니다.
자녀가 부모로부터 받은 용돈으로 다시 부모에게 선물하듯,
아내가 남편이 벌어온 돈으로 남편에게 좋은 음식을 차려주듯,
사랑하면 자신이 준 것을 받을 때 큰 행복을 느낍니다.
하느님도 당신이 주신 은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다시 봉헌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은 무엇일까요?
바로 당신 아드님입니다.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성모님께서 아드님을 잉태하셨을 때
이 세상에서 성모님만이 하느님께 가장 사랑받는 분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보물을 품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려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그분을 주인으로 모셔 성령의 힘으로 그분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받아 모신다고 그대로 머무시지 않고 그 뜻이 성취될 때에만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내 뜻을 죽이고 그분의 뜻을 실현시키면 하느님의 보물은 나에게 장신구가 되어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보물을 잘 간직하면 그 보물을 간직한 사람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진 남자가 청혼하기 위해 여인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세요?”
집안에서 여인이 묻자 남자가 말했습니다.
“나예요.”
그러나 여인은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데 왜 그랬을까요?
남자는 여러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후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남자는 다시 여인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세요?”
남자가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입니다.”
그러자 비로소 여인은 밖으로 나와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상대의 눈으로 나를 보아야 상대가 원하는 것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에게 받아들여집니다.
마음 안에 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들려면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하느님께 보석이란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사랑입니다. 성령이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을 모시고 그 사랑의 열매를 간직합시다.
그러면 하느님 안에 머물게 되고 그러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우리 안에서 찾고 계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문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연중 20주일입니다. 지난 세 주일에 이어, 이번 주일에도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지의 길을 걸으라는 <잠엄>의 외침을 전하며,
<제2 독서>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당신의 몸과 피가 어떻게 우리의 음식이 되시는지를 말씀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 51)
참으로, 어마어마한 말마디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우리에게 “줄 빵”이라고 하시면서, 그 빵은 “당신의 살”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이 이 빵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빵을 먹었을 때의 일입니다.
곧 “그 빵을 먹으면”, 그렇게 되겠지만 먹지 않으면 아무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 빵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 53)
예수님께서는 마치 어머니들이 건강에 꼭 필요한 음식이나 약을 자녀들에게 먹일 때에
으름장을 놓으며 먹도록 위협하거나 그럴싸한 약속으로 어르고 꼬듯이,
‘당신의 살’인 이 빵을 우리에게 먹이기 위해 으름장을 놓으며 위협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최상의 약속으로 우리를 어르고 꼽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 54)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라는 말씀은 세 가지 의미를 밝혀줍니다.
<첫째>는 당신께서 우리의 밥이요, 양식이며,
그 양식은 우리의 육체적 생명을 살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잠언 9, 5)
사실, 우리는 오늘도 물과 피를 섞어 마십니다.
미사 중 <예물준비기도> 때 사제는 포도주가 담긴 성작에 물을 조금 섞으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가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그리고 “평화의 인사”를 한 후, 사제는 축성된 빵 조각을 포도주가 든 성작에 넣으며 혼자 기도합니다.
“여기 하나 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이를 받아 모시는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하소서.”
이처럼, 오늘도 우리는 섞어 그리스도의 신성을 음료로 먹고 마시며, 신적생명에 참여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과 사귐을 말합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기리는 찬양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와의 사귐이요,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과의 사귐이 아니겠습니까?”(1고린 10, 16)
유대인들에게 있어, ‘몸’은 ‘인간관계’를 말하며, 곧 ‘사랑의 사귐과 친교’를 말합니다.
그리고 ‘피’는 ‘생명’을 말하며, 곧 ‘일치와 유대’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몸’에서 친교와 사귐으로 사랑의 관계를 배우고,
‘예수님의 피’에서 유대와 일치를 이루는 사랑을 배웁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무름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문다.”(요한 6, 5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시는 이 안에서 머물며,
당신의 신적 생명을 우리에게 선사하십니다.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증여하십니다.
당신의 살은 우리의 살이 되고, 당신의 피는 우리의 피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잠시 후에, “아멘”이라는 응답과 함께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살겠다는 응답입니다.
곧 예수님이 가지셨던 그 사랑의 관계를 가지겠다는 응답이요,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살겠다는 응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 57)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