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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새와 아히도벨의 모략
삼하 16:15-23
15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른지라
16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갈 때에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17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8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19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
20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하니
21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22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23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삼하 16:15-23 / [압살롬의 예루살렘 입성] 압살롬은 자기를 따르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였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와 있었다. 16) 다윗의 참모였던 후새가 압살롬을 찾아가서 이렇게 외쳤다. `임금님의 입성을 환영합니다!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17) 압살롬은 그를 수상하게 여기고 이렇게 비웃었다. `그대는 옛친구에 대한 우정을 이토록 쉽게 배반한다는 말이오? 그대는 어째서 옛친구를 따라 떠나지 않았소?' 18) 후새가 강력히 반대 의견을 말하였다.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저야 당연히 여호와께서 새 왕으로 뽑으시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 임금님으로 모시게 된 분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임금님 편이 되어 절대로 떠나지 않겠습니다. 19) 또 제가 이제 다른 누구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부왕의 아드님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는 부왕을 섬기던 마음으로 이제는 임금님을 섬기겠습니다.' 20) [부왕의 후궁을 차지한 압살롬] 압살롬은 입성한 다음 자기의 참모 아히도벨에게 무슨 일부터 해야 될 것인가를 물었다. 21) 아히도벨이 대답하였다. `부왕은 이 왕궁을 지키도록 후궁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왕은 이제 그 후궁들과 잠자리를 같이하소서. 이 소문이 온 이스라엘에 퍼지면 누구나 새 왕이 등장한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어 온 백성이 한결같이 임금님을 따를 것입니다. 임금님께서 그렇게 부왕과 명백한 선을 긋고 새 왕이 되시면 온 백성이 임금님만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22) 압살롬은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는 왕궁의 평평한 지붕 위에 천막을 치고 침실을 꾸미게 한 다음,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부왕의 후궁들을 데리고 들어가 동침하였다. 23) 그런데 당시 아히도벨이 제공한 조언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내리신 조언이나 다름없이 위대한 것이었다. 그 정도로 그의 조언은 정평이 나 있었는데, 이미 다윗왕에게도 정평이 난 것이었고, 이제는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도 존중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압살롬이 후새에게 속고 아히도벨의 모략에 따라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압살롬에게 간 후새(15-19)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여 일시적이지만 이스라엘을 통치합니다. 이때 아히도벨과 버금가는 모사인 후새는 압살롬의 지지자가 됩니다. 친구인 다윗 왕의 부탁을 받고 그를 돕기 위해서 입니다(삼하 15:34).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반역에 처음부터 함께 했으나, 후새는 다윗과의 협상(15:30-37)에 충실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거짓으로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를 부르며 압살롬을 환영한 것입니다. 후새의 환영에 처음에는 의아했던 압살롬이었지만 승리의 기분에 들떠 있었기 때문에 후새의 고백에 그의 본심을 헤아리지 못하고 속아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후새의 이런 고백은 전에는 다윗의 친구였지만 지금은 압살롬을 왕으로 섬기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압살롬은 그의 말을 신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모략(20-23)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모략에 따라 대낮에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다윗 왕의 후궁들과 함께 동침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모든 백성의 관심을 다윗에게서 압살롬에게로 옮기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방법은 너무나 야비하고 추악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은 이미 나단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말씀이었고, 현재 그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삼하 12:11). 다윗은 은밀한 중에 우리아의 아내와 간통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궁들로 하여금 백주에 그의 아들 압살롬에 의해 동침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다윗의 죄 값은 행한 대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모략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히도벨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아히도벨의 모략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다윗에게는 선한 정치를 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반면에 압살롬에게는 악한 정치를 하는 데 힘을 보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동일한 사람의 지혜가 그를 사용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욕심, 즉 죄를 부르는 결과를 얻게 될 것이며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약 1:15).
적 용 :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 또는 달란트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활용하고 있습니까?
‘너무 낙심하지 말도록 하시오. 하늘이 어찌 저리도 곱고 맑습니까. 나는 이제 그곳으로 갑니다.’ 루소의 말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너무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 죽음에 대해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 삶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을 것인가’ 그렇습니다. 죽음보다는 삶에 대해 더 많이 알도록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삶은 고해(苦海)의 바다라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루소처럼 죽음 이후의 저 세상을 아름답게 생각해봅시다.
호크마 주석
=====16:15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 여기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란 압살롬을 지지하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을 의미한다(19:9, 10). 한편 압살롬 반역 사건과 관련, 본서 저자는 압살롬을 지지하는 자들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다윗을 지지하는 자들을 '모든 백성'으로 표현하고 있다(15: 17, 23, 24;17:2, 3) 그런데 본 저자가 이와 같이 표현한 까닭은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이 압살롬을 왕으로 받아들여 압살롬의 세력은 이스라엘 건국에 걸쳐 확장된 반면, 다윗의 경우에는 각 지파들로부터 소수의 지지자들만이 그를 따랐음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Pulpit Commentary).
예루살렘에 이르고 - 15:37에서 언급한 상황을 다시 한번 반복, 묘사하고 있는 구절이다. 즉 이는 다윗과 그 일행이 황급히 예루살렘에서 탈출하자(15:14) 압살롬이 반역의 도배(徒輩)들을 이끌고 헤브론(15:9-13)에서 예루살렘으로 무혈 입성(無血入城)한 것을 가리킨다.
아히도벧도 저와 함께 이른지라 - 이는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한 아히도벧로 말미암아 모종의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암시 하고 있는 전조(前兆) 구절이다. 즉 이는 아히도벧의 사주로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들을 겁탈하는 사건(20-23절)이 일어나게 되었음을 시사하는 도입 구절이다. 한편 아히도벧(Ahithophel)의 신앙에 관하여서는 15:12 주석을 참조 하라.
=====16:16
아렉 사람 후새 - 아히도벧에 버금가는 다윗의 모사(謀士)이다. 다윗의 명을 좇아 압살롬에게 거짓 투항한 그는(15:32-37) 아히도벧의 모략을 꾀하는 데 성공하므로써(17:1-23), 압살롬의 반역을 종식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18장). 15:32 주석 참조.
왕이여 만세 - '왕이여 만세수(萬世壽)를 하옵소서'란 뜻이다. 공동 번역은 이를 "임금님, 만수무강을 빕니다"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압살롬에 대한 후새의 이와 같은 환영은 앞으로 압살롬의 조변에서 지내면서 다윗을 위해 활약할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기기 위한 가식적인 행동일 뿐이다(Wycliffe).
=====16:17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 자기를 환영하는 후새에게 일단 의심을 품고 그의 진의(眞意)를 떠보기 위해 질문하는 압살롬의 조롱섞인 말이다. 즉 이 말은 "네가 내 밑에 들어오는 것은 네 친구인 다윗을 배반하는 처사가 아니냐"는 의미이다.
=====16:18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 - 자기에 대한 압살롬의 의심을 불식 (拂拭)시키기 위해 후새가 압살롬의 정권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말이다. 따라서 후새가 이같은 말을 했다고 해서 진심으로 압살롬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마치 하나님이 선택하신 왕처럼 이스라엘 대중들에게 인기를얻고 있었던 당시 압살롬의 상황(15:6, 12) 만을 주관없이 전달 함으로써 자기의 의중(意中)를 감추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후새에게 있어서 압살롬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인정받지 못한 단순한 반란자였올 뿐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표면적으로 압살롬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듯한 후새의 대답은 반란 주모자인 압살롬의 마음을 충분히 흐뭇하게 할 만한 것이었다. 즉 압살롬은 후새의 아첨에 마음이 동하여 그를 측근에 두고 만 것이다(17:5).
=====16:19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 자신이 전왕(前王) 다윗에 이어 압살롬을 새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왕위 계승법상(繼承法上) 아주 당연한 것이라는 후새의 그럴 듯한 주장이나. 즉, 압살롬은 당시 다윗의 장자였기 때문에 다윗을 이어 왕이 된다는 것은 당시 주변 국가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같은 주장은 아직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엄연히 생존해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릇된 주장이다. 그러나 후새의 말에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 행세를 할 수 있는 그럴 듯한 정당성을 발견한 압살롬은 더이상 후새를 의심하지 아니하였다.
=====16:20
모략을 우리에게 가르치가 - 여기서 '가르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하부'( )는 복수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너희 들은...가르치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압살롬은 아히도벧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다른 여러 모사들에게도 모략을 베풀라고 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12-23절). 그렇지만 여러 사람들의 여러 모략중 압살롬에 의해 세종적으로 채택된 모략은 아히도벧의 모략이었음이 분명하다(21-23절). 한편, 여기서 압살롬이 신하들에게 모략을 베풀라고 한 것은 곧, 자신이 탈취한 왕권을 계속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략을 일러달라는 의미이다.
=====16:21
왕의 아버지가...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 -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갈 때 궁을 관리하고 지키게 할 목적으로 남겨 두었던 열명의 후궁들을 가리킨다(15:16).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소서 - 아히도벧의 이러한 모략은 다윗의 폐위(廢位)를 명확히 함과 동시에 압살롬의 왕권을 완전히 굳히기 위한 작전이었다. 즉, 왕위 찬탈자들이 자신의 왕권을 가시적(可視的)으로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전왕(前王)의 후궁들을 취해 동침하는 것은 고대 근동의 보편적 관례였다. 따라서 아히도벧은 이러한 당시 근동 지방의 관례에 따라 압살롬으로 하여금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케 함으로써 그의 왕권을 가시화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3 : 7 주석 참조.
왕께서 왕의 부친의 미워하는 바 됨을...강하여 지리이다 - 이와같은 아히도벧의 말은 그의 모략 속에 압살롬의 왕권의 가시화 외에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음흉한 목적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1) 아히도벧의 모략은 압살롬의 왕권의 가시화 뿐만 아니라다윗과 압살롬 간의 부자지정(父子之情)을 완전히 끊어놓기 위함이었다. 즉 만일 압살롬이 부친의 첩들을 취한다면, 이것이 야말로 부자지간의 상봉(相逢)을 완전히 끊어 버릴 수 있는 확실한 계략이 되는 것이었다(창 35:22;49:4). (2) 그리하여 압살롬과 함께 반역에 동참한 모든 자들의 우려를 말끔히 해소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려란, 다름아니라 다윗과 압살롬이 화해라도 하는 날에는 자기들이 모조리 반역자로 몰리어 처벌되고 말 것이라는 염려를 가리킨다. 따라서 아히도벧은 압살롬 추종자들이 안심하고 새 왕을 좇을 수 있도록 새 왕권의 완전한 독립성을 획책하였던 것이다. (3) 그밖에도 아히도벧의 이러한 모략은 다윗 왕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을 갚으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즉 아히도벧은 밧세바의 조부라는 사실이 거의 분명하므로(11:3 주석 참조), 우리는 아히도벧이 밧세바를 강탈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까지 모살한 다윗 왕(11장)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다가 기회가 오자 다윗에게 복수하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아히도벧의 이와 같은 모략은 세상 사람들의 관례에 비추어 볼 때에는 정당하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을 것 이다.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은 점에 의거할 때 분명 사악한 궤계가 아널 수 없다. (1) 근친 상간(近親相姦)을 금하고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했다는 점이다(레 18:7, 8) (2) 다윗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주권(삼상 16:1-13)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점이다.
=====16:22
지붕에 - 이 지붕은 다윗이 목욕하던 밧세바를 바라보고 음욕을 불태웠던 곳인 다윗 성의 왕궁 지붕(11:2), 바로 그곳일 것이다.
장막을 치니 - 따가운 햇볕을 괴하면서 시원한 바람을 즐기기 위해 평평한 지붕위에 텐트(tent)를 친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와 관련 당시 팔레스틴의 가옥 구조에 대하여서는 대하 33:1-11강해. '히브리인의 주거 형태'를 참조하라.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 앞에서...더불어 동침하니라 - 나단 선지자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는 순간이다(12:11).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죄에 대한 징계로서 장차 그의 처들이 백주(白晝)에 겁탈당할 것이라고 선고 하셨는데, 이제 아히도벧의 불의한 모략에 의하여 그같은 심판이 그대로 성취되고 만 것이다.
=====16:23
아히도벧의 베푸는 모략은...이와 같더라 - 여기서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이란 대제사장이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알아낸 하나님의 뜻을 의미한다(5 :19, 23;삿 1:1;18:5;20:18, 23, 27). 따라서 아히도벧의 모략이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는 말은, 그의 모략이 대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을 통해 받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처럼 다윗과 압살롬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 같은 아히도벧의 모략은 비록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런지 모르나, 압살롬에게는 악정(惡政)을 일삼도록 만든 촉진제 구실을 하였을 뿐이다. 왜냐하면 아히도벧이 현명한 머리는 지니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선한 양심은 지니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아히도벧의 지혜는 병든 양심에 사로잡힌 것이었으므로 그가 베푼 지혜는 필연적으로 파괴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설 교 >
아히도벨의 모략
세상은 힘을 자기의 신으로 삼고 살아갑니다(합 1:11). 이러한 세상에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합 3:19)는 고백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신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린 우리 자신을 가리켜 신자라고 스스로 인정하며 살아갑니다.
자기 힘으로 신을 삼는 자들은 힘으로서 세상을 정복하고 왕성하여 가는 반면에 주 여호와를 힘으로 고백하며 사는 신자들은 다 빼앗기고 압제받는 길을 걸어가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기뻐하며 승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스스로 신자로 인정하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고백과 함께 살아가는 신자라면 과연 그의 삶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요? 성경을 근거해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의 눈에 비취는 교회의 모습을 볼 때 과연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고백으로 사는 신자들이 모여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자기 힘으로 신을 삼는 자들이 다만 신자라는 껍데기만 걸치고 모이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걸치고 있는 신자라는 껍데기를 벗기시고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악한 모습들을 들춰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고백과 함께 사는 신자라면 그 신앙은 자신의 힘을 구하고 모으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에서 보여지는 대부분의 모습은 이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여호와를 불러 자신의 힘을 구하고 힘을 모으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힘을 정당화 해버립니다. 하나님을 세상에서 힘있는 신자로 만드시는 분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런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신자 역시 힘으로 세상에 군림하는 모습으로 증거되지도 않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거의 전부가 여러 길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로 국한 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선교사라면 아프리카로 갈까요? 중국으로 갈까요? 사업을 하려고 할 때 음식점을 할까요? 의류업을 할까요? 진학을 한다면 A대학을 갈까요? B대학을 갈까요? 이처럼 여러 길에서 어느 하나를 고르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모습이 보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일이 성공하고 잘되는 것으로 오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의 성공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켜 묻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어떤 일을 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진 사랑과 은혜와 긍휼이 있는 자로서 모든 일을 하라는 것이 우리를 행한 하나님의 일차적인 뜻이지 우리더러 무슨 거창하고 위대한 일을 하게 해서 성공하게 하고 그러 인해 영광을 받고 힘이 있는 자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란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자기 백성을 힘 있는 자로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선지자를 보십시오. 과연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로서 세상에 힘 있는 자로 세워졌던가요?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역할로 말미암아 매 맞고 쫓겨나는 인생으로 부름 받았을 뿐입니다. 사도들은 또 어떻습니까? 그들 역시 하나님께 부름 받고 복음을 위해 쓰이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분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성공의 길을 갔던가요? 그들 역시 매 맞고 죽음에 처해지는 상황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있던 자들은 하나같이 힘이나 성공과는 상관이 없이 약자로서 압제받는 길에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며 나의 힘을 구하고 힘 있는 자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위치에 있기를 원한다면 그는 분명 주 여호와를 힘으로 삼는 신자는 아닌 것입니다.
계획한 일이 잘되어 가고, 되어가는 상황들이 나에게 유리하게 되면 하나님이 도우신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님에 대한 착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가 잘되는 것에 그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는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증거 되는 것에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며 이 뜻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약자로 부르셨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즉 힘과 상관이 없는 존재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무지함으로써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동일하게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끌어당기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압살롬의 반역이 성공한 듯 보여집니다. 다윗은 도망을 쳤고 다윗의 친구 후새까지 다윗을 외면하고 자신을 섬기겠다며 머리를 조아립니다.
16절에 보면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아올 때에 저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라고 말합니다. 후새가 압살롬에게 투항하는 것은 후새를 압살롬에게 보내어 정탐하고자 한 다윗의 계략이었습니다. 압살롬도 후새가 다윗의 가까운 친구였음을 알기에 ‘왜 다윗과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면서 의심을 합니다. 그러나 이젠 압살롬을 왕으로 섬기겠다고 하는 후새의 말을 믿게 됩니다.
이처럼 반역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압살롬은 무엇을 생각하게 되겠습니까?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도우시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불의와 정당함은 생각하지 않고 설사 불의한 일이라 할지라도 순탄하게 잘되면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으로 여깁니다. 만약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이면 하나님이 막으셔야 하고 그렇게 되면 분명 실패하게 될 것인데, 잘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돕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나의 일이 잘되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돕고 계시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것은 그 영혼이 잘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일의 잘됨이 아니라 영혼의 잘됨과 강건을 위해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영혼의 잘됨을 위해 하나님은 때로 자기 백성에게 고난과 실패의 길을 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일의 잘됨과 실패를 기준 삼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직 모르는 소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20절을 보면 압살롬이 아비도벨에게 반역이 성공한 시점에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비도벨은 “왕의 아버지가 머물러 두어 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부친의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21절)는 말을 합니다.
아비도벨이 압살롬에게 말한 것은 다윗이 궁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남겨 둔 후궁들과 동침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다윗의 미움을 사서 다윗과 화해할 수 없는 관계가 될 것이고, 이것을 압살롬과 함께한 사람들이 알게 되면 더욱 힘을 내어 압살롬을 신뢰하게 된다는 것이 아히도벨의 모략이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이기에 혹 압살롬이 다윗과 화해하게 되면 압살롬과 함께 반역에 동참한 자신들의 미래가 불안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비도벨의 모략은 압살롬의 왕권을 굳건히 세우는데 그 중심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후궁 열 명을 남겨 놓은 것은 궁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후궁 열 명을 남겨서 궁을 지키겠다는 다윗의 생각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궁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다면 연약한 여인에 불과한 후궁을 남겨 두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모든 용사들을 남겨둠으로써 압살롬의 군대와 일전을 치르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고 궁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생각해 본다면 다윗은 궁을 압살롬에게 빼앗기지 않을 생각으로 후궁을 남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이 후궁이란 연약한 여인을 남겨둔 것은 압살롬에 대해 힘으로 싸울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힘을 위해 연약한 후궁과 동침하게 합니다. 이것이 아히도벨의 모략이 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후궁과 동침하는 윤리적인 악함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위해 약자를 압제하는 악함인 것입니다.
세상은 힘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고 있고, 힘 있는 자가 되기 위해 힘써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힘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힘있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세상은 여호와의 힘으로 살아가야 할 피조물의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앞에선 인간은 누구나 약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돕지 않으시면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약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는 그가 바로 신자이며, 이러한 신자가 약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세계는 약자의 세계입니다. 강자란 존재하지 않으며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과 은혜로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이것을 증거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교회는 이 일에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의 강함을 보여주기 위해 예배당을 지으려고 하고 교인 불리기에 힘을 쓰고, 선교나 구제 등의 모든 사업까지 교회의 명성을 위해 하는 것들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힘에는 사람이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섬김 받고 높임 받으며 많은 사람이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지만 한번 국회의원이 된 사람은 패가망신을 자초하면서까지 국회의원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힘의 맛을 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국회의원이라는 신분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그 맛에 심취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힘은 여호와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인간의 패역함을 드러내는 것이며 결국 망하는 길일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가 인정하지 않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힘에 의해 연약한 후궁 열 명이 희생을 당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원합니다. 이 세상에 연약한 후궁과 같은 존재로 남겨지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압살롬처럼 반역을 해서라도 힘을 갖게 된 자로 남기를 원합니까?
연약한 자로 남겨지고 연약한 자로 산다는 것은 분명 고통이며, 자존심까지 무너지는 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 길로 이끄십니다. 왜냐하면 연약함을 통해서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악함을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얘기가 여러분에게 전혀 힘이 되지 않음을 잘 압니다. 힘없으면 무시 받고 업신여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세상의 구조 속에 살아야 하는 여러분들에게 힘이 아니라 약자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분명 외면당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음을 잘 압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믿고 기도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세요. 할 수 있는 강한 믿음을 가지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우시며 복을 주시고야 말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귀를 솔깃하게 하고 그나마 마음에 조그만 희망이라도 갖게 할 수 있음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제가 아는 하나님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분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로 여러분을 속이고 아비도벨과 같은 모략을 여러분께 가르칠 수 없기에 힘이 되지 않는 말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의 말이 힘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 힘을 구하고 원하는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사는 신자의 힘이 무엇인가를 보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단지 입술에서 흘러나는 고백이 아니라 그 심령 깊숙한 곳에서부터 배어져 나오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고백이 신자로 하여금 세상의 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힘 되시는 주 여호와를 바라보고 의지하게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여호와가 나의 피난처라는 고백과 함께 주 여호와께로만 달려갈 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약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러한 약자로 세상에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을 추구하고 힘을 위해 산다면, 그리고 힘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그는 분명 신자라는 껍데기만을 들춰 입고 있을 뿐임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는 신자라 하나 예수님은 그를 모른다는 선언을 들을 자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여호와가 힘이라는 고백이 있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무능력한 것인가를 절감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육체의 삶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육체의 삶을 생각하게 되면, 힘이 제일이라는 생각을 벗어버릴 수 없습니다. 분명 육체가 사는 데는 돈이 제일이고 권력이 제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에 돈과 권력은 무용지물입니다. 착한 행위도 무용지물입니다. 착한 사람은 천국가야 하지 않는가라는 항변을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인간은 하나님이 원하는 착함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착함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역시 도덕의 수준에서 이해합니다. 즉 산상수훈을 수준 높은 도덕으로 이해하고 실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역할은 자신의 선함과 양심과 의미와 노력으로 말씀을 실천해 내고자 하는 사람과 양심대로 살았다고 자신했는데 말씀을 놓고 보니 내가 바로 날마다 말씀에 실패하며 살았던 죄인일 뿐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와 긍휼뿐이라는 고백을 하게하고 십자가 앞에 무릎 꿇은 죄인으로 서게 하는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이들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무능력과 악함을 고백할 뿐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보게 됩니다. 바로 이들에게 주의 도우심은 놀라운 힘과 능력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힘있는 자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결국 세상에서 한번 폼나게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힘있는 자가 폼 잡을 때 약자들이 고통을 받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피 흘리는 악함입니다. 그래도 이러한 삶을 원하신다면 아예 지옥가기로 작정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시고 힘써 일하십시오. 그러면 혹 힘있는 자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라는 이름은 떼버리십시오, 신자라는 이름은 힘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힘없이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신자에게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모사의 교훈
삼하 16:15-23 / by skd1
성경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의 갈림길에서 지혜를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무엘하 16장 15-23절을 통해 ‘모사’(고문, 조언자)의 역할과 그 교훈을 묵상해보겠습니다. 악한 모사 아히도벨과 선하신 모사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하며, 우리는 어떤 지혜로 싸워야 하는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성경을 읽는 모든 분들과 함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발견하는 시간을 가져볼까요? 자, 시작합니다!
아히도벨, 악한 모사의 길
사무엘하 16장 15-23절은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그의 모사 아히도벨이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신뢰받던 조언자였지만, 이제 압살롬을 위해 일하며 악한 계략을 제시합니다. 그는 압살롬에게 다윗의 첩들을 취하라고 조언하며, 이는 다윗과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는 모욕적인 행위였습니다(삼하 16:20-22). 아히도벨의 모략은 단기적으로 압살롬의 권력을 강화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아래 무너졌습니다(삼하 17:23).
아히도벨의 모습은 세상에서 만나는 ‘악한 모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지혜롭고 영리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조언은 결국 파괴로 이어지죠. 우리 삶에서도 비슷한 유혹이 있습니다. 빠른 성공이나 이익을 약속하는 조언에 끌릴 때가 있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하세요. 이사야 8장 20절은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릇된 길이라고 경고합니다. 둘째, 장기적인 결과를 생각하세요. 아히도벨의 모략은 순간의 승리를 주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조언을 들을 때 그 결과가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지 고민해보세요.
예수 그리스도, 선하신 모사
아히도벨의 악한 모략과 대조되는 존재는 바로 선하신 모사,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사야 9장 6절은 예수님을 “기묘자, 모사, 평강의 왕”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다른 지혜를 주십니다. 그는 복수와 권모술수가 아닌 사랑과 용서, 겸손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며,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을 이루셨습니다(요 3:16).
예수님의 모사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됩니다. 직장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가정에서 갈등을 마주할 때,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다툴 때 예수님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죠(마 5:44). 이는 세상 지혜와는 정반대지만, 진정한 평화를 가져옵니다. 예수님의 모사를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말씀을 가까이 하세요. 성경은 예수님의 지혜가 담긴 보물창고입니다. 둘째, 성령의 인도를 구하세요.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셔서 선한 결정을 돕습니다(요 16:13).
모략으로 싸우라, 하나님의 지혜로
아히도벨의 악한 모략과 예수님의 선한 모사를 보며, 우리는 삶의 싸움에서 어떤 ‘모략’을 선택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여기서 ‘모략’은 단순한 계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과 싸우는 전략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나음”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힘과 권모술수로 싸우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믿음과 순종으로 싸우라 하십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모략으로 싸우려면 몇 가지 실천이 필요합니다. 첫째, 기도로 준비하세요. 에베소서 6장 18절은 “모든 기도와 간구로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첫걸음입니다. 둘째, 공동체의 조언을 구하세요.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와 이야기를 나누면 하나님의 뜻을 더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시편 119편 11절은 “내가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악한 모략에서 보호하고 선한 길로 인도합니다.
모사의 교훈이 우리 삶에 주는 빛
삼하 16장 15-23절은 짧지만, 모사의 역할과 그 결과에 대해 깊은 통찰을 줍니다. 아히도벨은 세상의 지혜로 악한 길을 걸었고, 결국 파멸을 맞았습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로 영감 받은 모사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묵상하며 저는 제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따르는 조언은 어떤 모사에서 오는 것인지,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고민해보게 되었죠.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읽으며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혹시 세상의 조언에 흔들렸던 순간이나, 하나님의 지혜로 승리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성경은 우리에게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의 나침반을 줍니다. 이 글을 읽고 마음에 남은 구절이나 깨달음을 댓글로 나눠주시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여러분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마무리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모사의 교훈은 우리에게 선택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세상의 악한 모략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선하신 모사 예수님의 길을 따를 것인가.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리라 그러나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를 붙들고, 하나님의 모략으로 삶의 싸움을 싸워가길 소망합니다.
이 글이 여러분의 신앙 여정에 작은 등불이 되길 바랍니다. 다음에도 성경 속 또 다른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함께 말씀을 묵상하며 성장하는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눈가리개와 마취제
삼하 16장 15~23절 / 조약돌묵상
오늘 본문은 후새의 위장 전향이 성공하고,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략에 따라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을 대낮에 취한다는 내용입니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자 후새는 그를 반겨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작전을 받아들여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합니다. 이는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가 결별되었다는 것으로, 더 이상 물러설 것이 없다는 선전포고입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압살롬의 예루살렘 입성, 압살롬을 환영하는 후새, 아히도벨의 계략,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압살롬 등입니다.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 압살롬을 왕으로 굳히는 아히도벨의 전략입니다. 선왕의 왕비나 후궁들을 취하는 것은 왕위 계승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압살롬의 추종자들은 그 소식을 듣고 사기가 돋았을 것입니다. 더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세력들도 이제 압살롬의 편에 합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은 다윗과 압살롬이 화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왕은 두 병이 될 수 없기에 기왕지사 새 왕을 선택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고 볼 수 있으니, 이미 선왕은 왕좌를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의 그런 계략은 실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우선은 다윗과 압살롬 간의 부자간의 정을 완전히 끊어놓아야 왕권이 확립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선왕이 아직 살아 있으므로 동요될 수 있는 민심을 잠재우기 위함입니다. 다음은 그래야 자신과 부하들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윗과 압살롬이 기적적으로 화해한다면 그들은 모두 반역자로 처형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부모와 자식 사이에 제 3자가 끼어들어서 나중에 낭패를 당하는 일과 같습니다.
아무리 당시 사람들의 상식에 아히도벨의 전략이 합당하더라도 그것은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신정국가로, 그가 제의한 것은 근친상간인바 반드시 그 사회에서 끊어져야 하는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율법을 무시한 것으로 또한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운 하나님의 주권을 멸시한 것과 다름이 없는 사악한 궤계일 뿐입니다. 그것에 동조한 압살롬은 비극적인 파국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정당한 것이 정당한 것이 아니고, 세상의 상식이 판단의 시금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상식과 관례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 자기를 환대할 리 없는 후새를 보며 의심 어린 투로 비아냥댄 압살롬의 말입니다. 곧이어 어째서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고 물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는 친구를 배반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궁입니다. 그러자 후새는 여호와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택한 자와 함께 하겠다고 합니다. 단 한 마디로 압살롬의 정부가 합법적인 정부라는 선언입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단지, 압살롬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치적인 발언일 뿐입니다.
그 말에 그만 압살롬은 넘어갑니다. 반란군의 징크스입니다. 그들에게는 정통성이 없기 때문에 그럴듯한 인물이 그것을 인정하면 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후새는 다윗을 섬긴 것과 같이 압살롬을 섬기겠다고 다짐합니다. 전 왕에 이어 아들을 새 왕으로 모시는 것은 누가 보기에도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대신입니다. 압살롬은 더 이상 그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에게서 자신이 세운 왕국의 정당성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부왕인 다윗이 엄연히 살아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압살롬은 반역자 일뿐입니다. 그의 화려하고 이치에 닺는 말이 압살롬의 자존심을 충족시킨 것입니다. 압살롬은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 그만 그를 참모로 기용해 버리고 맙니다. 후새의 모략은 성공합니다. 필요한 말을 해 준다고 다 진실이 아닙니다. 마음에 드는 말을 해 준다고 모두 옳은 것이 아닙니다. 아부는 눈가리개와 같습니다. 귀에 달콤한 소리는 이성의 마취제와 같습니다. 세상에는 진실과 거짓이 있습니다. 문제는 거짓이 진실 같고 진실이 거짓 같을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변하지 않는 기준이 요구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상식과 합리성으로 찾는 것도 아닙니다. 오르지 하나님의 말씀에서만이 찾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바뀌고 시대는 흘러갑니다. 성경대로만 살기를 원합니다. 세상을 초월한,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리로 살 수 있는 삶은 오직 그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의 악한 계략
삼하 16:15-23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압살롬의 예루살렘 입성과 후새의 거짓 충성맹세, 그리고 압살롬이 다윗 후궁들과 동침한 것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먼저 15절에,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른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압살롬은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의 지지를 받으며 왕으로서 이스라엘 국가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당당하게 무혈입성했습니다. 또 그의 옆에는 이스라엘 최고의 모사인 아히도벨도 있었습니다. 23절에 의하면, 평소 아히도벨의 계략이 얼마나 그럴 듯했든지, 그의 계략에 대하여 다윗도 압살롬도 마치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것과 같이 여겼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천하가 그의 수중에 들어온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모습은 몇몇 백성들만 이끌고 초라하게 피난길을 떠난 다윗과는 누가 보아도 대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이 같은 일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저주하시고 압살롬을 축복하셨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까요? 다시 말해서 다윗이 쇠퇴하고 압살롬이 형통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로 보아야 할까요? 만일,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신정국가에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믿음의 사람이 바로 서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일지라도 악인들이 득세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압살롬의 형통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악한 계교로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한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압살롬의 악행을 묵인하신 것은 압살롬을 통해 범죄한 다윗을 징계하심과 동시에 거듭하여 악을 행하고서도 전혀 회개하지 않고 점점 더 큰 악을 행하던 압살롬을 심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압살롬의 형통은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가 아니라 심판의 전조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선을 행하는데도 어려움과 고난이 끊이지 않는 것에 비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잘되고 형통한 것을 볼 때 신앙적인 회의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구약성경 하박국서에도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하박국 선지자가 신앙적인 회의를 품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악인의 형통함은 일시적이며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과, 의인은 잠시 고난을 당하나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깨달은 후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여러분, 압살롬의 형통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었듯이, 세상 사람들의 형통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신앙이 흔들릴 때 압살롬을 기억하고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경건한 삶에 대해 하나님의 상급이 더디게 나타날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참음으로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오늘, 믿음을 다시 한번 굳게 다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0절에, 압살롬은 아히도벨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은 21절에 다윗의 후궁을 범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라는 모략을 제시했습니다. 여기서 이전 왕의 후궁들을 취하는 것은 차기 왕권계승자가 이전 왕의 소유물 전부를 인수했다는 것을 내외에 과시하는 행위로서 당시 근동에서 왕권의 가시화를 위해 행해지던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다윗의 넷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가 형 압살롬이 죽은 후에 왕위를 탐내어 다윗을 모시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고 청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왕상 2:15-17).
그러나 아히도벨이 제시한 모략은 세상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그 관습이기는 하나, 근친상간을 엄격하게 금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매우 불의한 일이었습니다(레 20:11). 그리고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러한 모략을 제시한 것은 다윗과 압살롬이 화해할 기회를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배신을 정당화하고 입지도 강화하려는 속셈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히도벨은 단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세상의 관습을 악용함으로써 거룩한 제사장의 나라가 되어야 할 이스라엘에서, 그것도 한 나라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왕궁에서 가장 더러운 범죄가 자행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모략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지혜로운 것 같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참으로 악하고 무서운 범죄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일은 우리의 삶에도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활용함에 있어서 이를 단지 자신의 이익을 따라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검토한 다음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의 지혜와 지식 가운데에는 올바른 것들도 있으나 인간의 죄 된 품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들도 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지혜와 지식을 사용함에 있어서 주의 깊게 옥석 여부를 가릴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세상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차이가 거의 사라지고 있는 것도 이에 대한 지혜 부족의 결과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요 18:36).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진정한 소금과 빛으로서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뜻과 사탄의 미혹을 분별하는 지혜를 소유해야 합니다. 오늘, 이러한 지혜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며 “나에게 합당한 지혜를 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2절에,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그대로 따릅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이러한 행위를 단지 왕위 찬탈을 위한 행동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윗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12:11-12).
그리고 이 사건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사실입니다. 압살롬의 범죄는 마치 다윗의 범죄를 모방하는 듯합니다. 먼저는,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을 범한 곳은 왕궁의 지붕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장소는 다윗이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음욕을 품던 그 장소였습니다(11:2). 또한, 이 두 사람이 간음한 여인들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압살롬이 범한 여인들은 정결한 처녀나 과부가 아니라 남편이 살아있는, 즉 다윗의 후궁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범한 밧세바 역시 우리아라고 하는 남편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11:3). 또, 한 가지는 이 여인들의 남편은 모두 각각 두 사람과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던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압살롬이 간음한 여인들의 남편은 그의 부친이었던 다윗이었고, 다윗이 취한 여인의 남편은 다윗의 충성스러운 부하였던 우리아였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아내를 범함으로써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7계명을 범한 것은 물론,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제10계명을 동시에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때문에 압살롬을 통한 하나님의 징계에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창세기 야곱의 삶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는 아버지 이삭이 눈이 어두운 것을 이용하여 속였지만, 자신도 어두워 잘 못 보는 점을 이용한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야곱은 에서의 의복과 염소의 털로 분장함으로써 아버지 이삭을 속였지만, 그 역시 자기 아들들로부터 염소의 피를 바른 요셉의 옷을 통해 속고 말았습니다(창 37:31-32).
우리는 이러한 야곱과 다윗의 예를 통하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처럼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마음대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눈에 안 보이시기에 더욱 두려워하며 행동을 삼가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눈은 피할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러하신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기에 더욱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믿음의 사람이 바로 서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일지라도 악인들이 득세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또한,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활용함에 있어서 이를 단지 자신의 이익을 따라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검토한 다음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사용해야 함도 배웠습니다. 이 모든 것을 삶에 온전히 적용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지혜의 사용
삼하 16:15-23 / 하늘기쁨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지혜자들의 모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후새의 모략
후새는 다윗을 위해 예루살렘에 남은 모략가입니다.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갈 때에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삼하 16:16)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라고 말합니다. '친구(레에)'는 '모략가'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왕궁에서 왕에게 모략을 베푸는 공식 직함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라고 말합니다. 후새는 압살롬 앞에서 '만세'를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압살롬에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략가답게 왕의 이름을 교묘하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압살롬 앞에서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다윗 왕을 생각하며 이 말을 하였을 것입니다.
압살롬은 후새를 의심하며 물었습니다.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삼하 16:17)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에서 '친구'의 히브리어는 친구(레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단어인데 16절에 나온 '친구(모략가)'와 거의 비슷한 단어입니다. 언어 플레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모략가가 어찌하여 '다윗과의 친구(친밀함)됨을 버리고 자신에게 왔는지' 묻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후새를 의심한 것은 당연합니다. 후새가 다윗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삼하 16:18) '여호와와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압살롬이 이 말을 듣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라고 착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후새는 분명 다윗을 생각하면서 이 말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후새는 아주 교묘하게 압살롬을 인정하지 않고 다윗을 향한 충성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 (삼하 16:19)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라고 말합니다. 후새는 이곳에서도 끝내 자신이 압살롬을 섬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압살롬의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다른 아들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번역은 '왕을 섬기리이다'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는 '왕 앞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모든 섬김에서 중요한 것은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입니다. 후새는 다윗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후새는 끝내 압살롬의 이름을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묘하게 자신이 다윗을 섬기고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는 다윗의 명령에 의해 예루살렘에 남아 압살롬의 신하처럼 보이게 되었지만 자신의 지혜를 사용하여 자신의 말에 있어서 거짓이 아니라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진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2. 아히도벨의 모략
아히도벨은 다윗의 모략가였지만 압살롬의 편에 섰습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삼하 16:21)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아히도벨은 매우 세상적인 모략을 압살롬에게 말하였습니다. 왕의 후궁(하렘)은 왕의 힘과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왕의 후궁을 사람들 앞에서 취하면 사람들에게 이제 압살롬이 왕의 힘과 위치에 오른 것을 공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왕의 후궁을 취함으로 압살롬은 다윗과 되돌이킬 수 없는 관계에 이릅니다. 이것은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사람에게 확신을 줄 것입니다. 혹시 압살롬이 다윗과 화해하면 이전에 모반한 자신들의 위치가 에매해집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 압살롬의 편에 선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히도벨은 여러가지를 생각하며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과 공개적으로 잠자리를 갖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뛰어난 모략'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선한 모략'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에 철저히 어긋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습니다. 아히도벨이나 압살롬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악한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얻는 모략은 분명히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창조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악한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악한 모략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리석은 모략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삼하 16:22)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 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고 말합니다. 아주 큰 불행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꼐서 이미 말씀하신 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 일은 아히도벨의 치밀한 보복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손녀 딸 밧세바가 건강한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다윗의 범죄에 의해 가정이 깨지는 것을 보고 생각한 보복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범죄에 대한 아히도벨의 보복이라 하여도 여전히 아히도벨이 잘못된 것입니다. 다윗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책망하셨고 재앙을 내리고 계십니다. 심판은 아히도벨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신이 심판한다 하여도 이렇게 악한 방식으로 한다면 자신은 결국 다윗보다 더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악한 방식으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삼하 16:23)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히도벨은 그만큼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었고 아주 뛰어난 모략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모략이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어긋난 모략은 어리석은 모략입니다. 세상은 성공으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진리로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유일한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히도벨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두 명의 아주 뛰어난 모략가가 모략을 실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후새는 말 한 마디조차도 정직하기 위해 힘을 다하였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한 상황이었습니다. 전쟁이기 때문에 거짓말이 용인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힘을 다하였습니다. 반면에 아히도벨은 어쩌면 더 뛰어난 모략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이 아니라 이기는데 급급하는 모략을 사용하였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해소하는데 사용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모략은 가장 어리석은 모략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혜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오직 말씀의 기준에 의해 사용해야 합니다. 심판자를 생각하면서 사용해야 진짜 지혜로운 지식 사용이 될 것입니다.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다
삼하 16:15-23 / 안병채목사
1.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다
(삼하 16:15)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른지라
⇨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난 후, 압살롬은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이때 다윗의 친구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아가 충성을 맹세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 행동은 겉으로는 압살롬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윗의 명령에 따라 아히도벨의 모략을 무산시키기 위한 치밀한 전략의 일부이다.
2. 후새가 압살롬에게 충성을 맹세하다
(삼하 16: 16)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갈 때에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17)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8)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19)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
3. 아히도벨이 첫 번째 계략을 말하다
(삼하 16:20)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계략을 내놓아라 우리가 어떻게 행할까 하니 21)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께서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심히 미워하는 바 된 줄을 들을 것이라 그리하면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질 것이니이다 하니라
4. 압살롬이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하니라
(삼하 16:22)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의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23)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 압살롬은 아히도벨에게 다음 행동을 위한 계략을 묻는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여 압살롬의 반역이 되돌릴 수 없는 것임을 온 백성에게 보여주라고 조언한다. 이 계략은 다윗에 대한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며, 아히도벨의 모략은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겨질 정도로 뛰어났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조언대로 행동함으로써 반역의 정당성을 확고히 하려 한 것이다.
이 당시 왕의 후궁과 동침하는 행위는 단순한 개인적 욕망이 아니라, 왕권을 차지하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해석되었다. 즉, 전임 왕의 아내‧후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곧 그 왕의 권위를 완전히 넘겨받았음을 시위하는 행위였다.
이에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략을 따라, 자신이 진정한 왕임을 과시하고 다윗과의 결별을 천명하기 위해 후궁들과 동침하는 정치적‧상징적 행위를 공개적으로 실행했다. 이는 단순한 사적 행위가 아니라, 왕위 계승의 확실한 표식이었다.
무너진 충성, 드러난 욕망
삼하 16:15-23 / 김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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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성벽이 아니라, 마음의 성이.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권력의 교체가 아니라 진실과 거짓, 충성과 배신이 교차하는 하나의 무대였다.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선택을 해야 했다. 누구를 따를 것인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 그들의 말과 행동은 권력을 향한 충성인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인가.
후새는 다윗의 친구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압살롬에게 “왕이여 만세”를 외친다. 그 소리는 변절인가, 지혜인가. 압살롬은 의심하며 묻는다. “이것이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후새는 머물며 말한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곧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진심인가, 위장인가. 그의 말은 애매하지만, 그 중심에는 분명한 분별이 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는 누구인가. 후새는 인간의 충성보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려 한다. 때로는 머물러 있는 자가 더 깊이 싸우는 자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가장 깊은 어둠은 아히도벨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는 지혜로운 자로 불렸다. 그의 말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같았다.” 그러나 그가 압살롬에게 제안한 계략은 타락한 지혜의 극치였다.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하라는 제안, 그것은 단지 왕권을 선포하는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교만의 선언이었다. 아히도벨은 가장 지혜로운 자였지만, 그 지혜가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때, 그것은 가장 파괴적인 무기가 되었다.
압살롬은 그 계략을 따른다. 옥상에 장막이 치어지고, 모든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그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아버지의 아들이, 왕권을 쟁취한 자가,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 성은 그의 것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임재는 떠났다. 가장 높은 곳에서 저지른 가장 낮은 죄. 그것이 권력의 허상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무엇이 사람을 무너뜨리는가? 배신인가, 욕망인가, 권력에 대한 갈망인가. 이 장면은 다윗의 실패 위에 세워진 새로운 질서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아히도벨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겼지만,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았다. 진리는 언제나 그 중심에서부터 무너진다. 겉은 화려하지만, 안은 썩어 있다.
그러나 이 어둠 속에도 하나의 미묘한 빛이 있다. 후새의 침묵과 머묾, 아히도벨의 지혜에 가려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은 인간의 계략을 넘어 일하신다. 다윗은 도망쳤고, 압살롬은 승리한 듯 보이지만,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무너진 왕을 다시 세우시고, 드러난 욕망 위에 새로운 은혜를 심으신다. 그것이 복음이다. 죄가 드러날수록, 은혜는 더 깊어진다.
우리는 누구의 충성 안에 서 있는가. 어떤 지혜를 신뢰하고, 무엇을 따르고 있는가. 하나님 없는 지혜는 가장 치명적인 유혹이 되고, 신실한 침묵은 가장 강한 저항이 된다. 후새처럼 머무는 자, 아히도벨처럼 말하는 자, 압살롬처럼 나아가는 자. 이 모든 인물들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 “너는 누구를 따를 것이냐?”
진실은 드러나고, 충성은 시험받는다. 그러나 은혜는 여전히 흐른다. 무너진 곳에서 시작되는 회복,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악한 계략과 신념은 어디에서 나오나
삼하 16:15-23 / cjin001
아히도벨이 치명적인 계략을 내놓았다. 반역의 성공을 위해서 그는 최선을 다한다. 다윗의 나라를 완전히 뒤집으려 한다. 압살롬에게 예루살렘에 남은 후궁들을 강간하라 권한다. 아들에게 아버지의 첩들을 범하라는 것이다. 패륜적 도발이다. 돌이킬 수 없는 반역이다. 그가 이처럼 독한 계략을 내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사람들은 그가 내놓는 계획을 하나님께 받은 말씀처럼 여겼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성경 기자가 이렇게 기록하는 의미를 생각한다.
아히도벨은 영리한 사람이다. 최고의 모략가였다. 사람들은 그의 지혜와 판단을 칭송했다. 정확히 문제의 핵심을 찌르며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여겨졌다. 다윗도 압살롬도 인정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개국 공신으로 다윗을 섬겼었다. 그러나 일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갔다. 압살롬이 그를 불러내어 반역을 돕게 했다. 그러나 다윗의 참모였던 그가 왜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의 반역을 도왔을까? 그는 밧세바의 할아버지였다고 한다(삼하11:3, 23:34). 만일 밧세바의 아버지와 아히도벨의 아들이 동일인이 맞다면 우리는 이 사건으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가 다윗을 미워한 것은 다윗의 범죄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는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인 사건으로 인해 크게 분노하며 낙향한 것이 아닐까? 그는 율법주의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아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 즉 자기가 믿는 정의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영악한 사고와 판단, 신념의 모략가일 뿐이다. 사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말을 듣는 사람이다. 결국 그는 실패한다. 자기중심적인 악한 신념으로 스승 예수를 팔고 자살한 가룟 유다처럼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 스스로 판단하며 주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취한 피조물의 종말을 드러낸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듣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사탄의 말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자기를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자기 부인, 즉 십자가의 복음을 생활화하는 청결한 마음만이 하나님을 만나며 그 말씀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주체성과 자기 의를 고집하는 육의 사람들은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말, 거짓된 위로와 미혹의 말들을 기뻐하며 들을 것이다. 오늘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소원한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음모와 배신이 횡행하는 땅의 무능한 인생들에게 은혜와 진리의 말씀을 계시하시며 거룩한 나라, 영생의 길로 이끄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주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악한 계략을 세우고 열심을 다해도 주의 뜻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오늘도 택하신 자녀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복음으로 이끄시며 선하고 의로우신 말씀을 듣게 하소서. 그 말씀과 성령을 따라 하늘에서 세우신 뜻을 이루게 하소서. 부족하고 연약한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시며, 이 시대의 악한 신념, 음모와 계략들이 무산되게 하소서. 하늘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피할 길을 여시고 심판을 이루시는 하나님
삼하 16:15-23 / 행복한 말씀묵상팀
예루살렘에 입성한 압살롬(삼하 16:15-19)
다윗의 첩을 범한 압살롬(삼하 16:20-23)
<말씀묵상>
후새가 압살롬의 곁에 있게 된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반란에 성공한 압살롬이 백성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들어왔다."(15절)라는 언급은 아히도벨이 압살롬 정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임을 나타냅니다. 이때 후새가 "임금님 만세!"를 외치며 압살롬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후새가 다윗의 친구임을 아는 압살롬은 후새의 행동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조롱합니다. 후새는 하나님과 백성이 선택한 자를 자신도 왕으로 섬기겠다고 하며, 다윗에게 한 것처럼 압살롬에게 충성하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후새는 몇 마디로 압살롬의 신임을 얻고 그의 곁에 있게 됩니다. 이 일은 압살롬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도록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15:31).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우리는 기도로 수많은 것을 구합니다. 어떤 것들은 좋고, 어떤 것들은 나쁘며, 어떤 것들은 정말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십니다(마 7:7). 우리가 하나님께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 응답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6:6; 롬 8:26-27). 하나님의 대답은 “알겠다”, “안 된다”, “기다려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기도가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것과 성경이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밝히는 것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뜻과 다른 것을 구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지혜를 한참 넘어서므로, 우리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최선의 해결책임을 신뢰해야 합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왕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도록 어떤 계략을 베풀었나요?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압살롬은 아히도벨에게 이제 어떻게 하면 왕으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질 수 있을 지 묻습니다. 아히도벨은 궁에 남아 있는 다윗의 후궁들을 공개적으로 취하라고 제안합니다. 선왕의 아내와 동침한 것은 선왕의 권력과 모든 재산을 차지한다는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이로써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적대 관계가 되고, 압살롬 측은 결사적으로 싸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은 이를 통해 외부적으로는 압살롬이 다윗을 승계했다는 것을 알리고, 내부적으로는 더욱더 결속을 다지려고 합니다. 다윗 가문에 계속해서 여성들이 희생 당하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밧세바 사건 이후 다윗에게 선고하신 심판을 하나씩 이루고 계십니다(12:11-12).
약자를 희생시키는 잔인한 계략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요?
하나님은 사회적으로 비천한 상태에 있는 ‘약한 자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으로 그들을 동정하며 돌보고 구제하는 사람을 기억하고 계시며 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구원의 손길을 펴십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하나님으로 일관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고아나 과부는 절대적 약자로서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라고 하셨고, 고아와 과부를 멸시하거나 아프게 하는 자들을 무섭게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당연히 강도 만난 이웃을 돕는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우리가 본래 강도 만난 자들이었고, 이제는 주님의 은혜로 치유받아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된 복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세상의 지혜는 욕심을 부추기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함을 깨닫습니다. 오늘도 선택의 순간마다 우리 생각과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의 지혜에 집중하게 하소서. 우리의 죄로 인해 가족과 이웃과 공동체가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사무엘하 16:15-23
찬송가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유영진목사
압살롬의 입성과 후새의 계략(15-19)
오늘 본문은 압살롬이 다윗이 떠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15)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른지라
15절을 보면 아히도벨이 이제 압살롬의 진영의 중요한 사람으로 압살롬의 가까운 곳에서 그와 함께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무엘하 15장12절을 보면 아히도벨은 본래 다윗의 모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압살롬 반란의 때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 편에 섰습니다. 아히도벨은 정세를 파악하는 뛰어난 감각으로 힘의 흐름이 압살롬으로 기울어졌다고 판단되자 자신의 걸음을 강한 쪽으로 빠르게 옮기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와 같은 모습입니다.
(16)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갈 때에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압살롬 진영의 힘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윗의 측근 후새가 압살롬에게로 갑니다. 그러한 점에서 후새가 압살롬을 찾아간 것은 아히도벨의 경우와 다릅니다. 아히도벨은 새로운 통치자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고 압살롬을 지지하였지만, 후새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다윗을 돕고, 그를 살리고자 지금 압살롬의 진영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러한 본심 감추기 위해 후새는 압살롬을 만남과 동시에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압살롬도 후새의 충성심을 이전부터 알고 있던 터라, 후새가 어찌하여 다윗을 따라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물며 자신을 따르려고 하는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봅니다.
(17)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후새를 향한 압살롬의 질문은 짧지만 그 속에 뼈가 있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먼저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라는 압살롬의 질문은 다윗과 각별했던 후새의 충직한 본성을 자극하는 질문입니다. 후새는 압살롬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압살롬 만세’를 불렀으나, 압살롬은 차가운 눈빛으로 ‘다윗을 향한 너의 충성심이 고작 그 정도였는가?’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긴 시간 충직함을 자신의 목숨도 같이 여기고 살았을 후새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압살롬의 입장에서는 당대 최고의 모략가인 ‘아히도벨’과 ‘후새’ 두 사람 모두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는 것 자체로 굉장히 흥분되고, 감정이 고양될 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경솔히 행동하지 않고, 후새를 끝까지 의심하였습니다.
후새를 자극하는 압살롬의 표현은 또 있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 왕을 ‘네 친구’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자신 앞에 있는 후새를 낮추고 모독하는 표현임과 동시에,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 왕까지를 낮추고 모욕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로 후새를 자극하면서 압살롬은 다윗의 책사였던 후새를 마지막까지 의심의 눈으로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후새는 이렇게 반응하였습니다.
(18-19)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
압살롬의 냉정한 반응에도 후새는 놀라거나 움추려들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입장을 전합니다. 후새의 표현은 이렇습니다. ‘저는 다윗의 친구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인정하셨고, 백성들이 택한 왕 압살롬에게 속하여 이제 저는 다윗이 아닌 압살롬에게 힘이 되기를 원합니다.’ 후새의 이와 같은 표현은 겉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을 배신한 베드로와 같은 모습으로 보이나, 실상은 하나님과 다윗에 대한 충성심이 있어야만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땅에는 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하나님을 배신하는 아히도벨과 사람이 있고, 이와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어떠한 위험도 감당하는 후새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디모데후서 3장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딤후 3: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말세의 사람들 즉,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쉽게 배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믿음으로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해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따라가는 것이 더 지혜로운 길이라고 자만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삶의 태도는 결국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자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신만을 생각했던 아히도벨과 압살롬은 결국 스스로를 망가트리는 파멸의 길로 들어가게 되었고,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따랐던 후새와 다윗과 같은 사람들은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았을 때, 자신을 사랑하는 자 결국 자신을 잃게 되고,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버리는 자는 결국 자신을 얻게 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은혜의 역설임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히도벨의 계략을 따르는 압살롬(20-23)
(20)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하니
압살롬은 아히도벨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압살롬의 필승전략이었고 지금까지 이 작전은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압살롬도, 아히도벨도 모두 교만해졌을 것입니다. 압살롬은 압살롬대로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서 자신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아히도벨 역시 그 나름대로 자신의 계략은 인간이 감히 생각해 낼 수 있는 최고의 계략임을 자찬하며, 교만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바 인간의 지혜는 그 한계가 명확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그 한계가 무한함을 강조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압살롬’과 ‘아히도벨’은 하나님의 지혜를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인 다윗의 왕위를 탈취해 가려는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하나님의 지혜와 맞서는 것은 매우 미련한 결정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맞서는 미련한 길로 가는 아히도벨의 계략은 이러했습니다.
(21)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선으로 보면, “자신의 아버지의 후궁들과 잠자리를 하라는 것이 몰상식하고 폐륜적인 행동이지 이게 무슨 대단한 계략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 매우 지혜로운 계략이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는 말처럼 지금은 서로가 죽일 듯 갈라선 압살롬과 다윗이지만 시간이 지나거나 환경이 달라지면 이들은 자신들이 언제 싸웠는지 조차 모르게 금방이고 화해할 수 있는 부자지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을 따른 이들에게 배신의 전력은 결코 가볍게 넘어갈 이력이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고 압살롬을 따라도 되는가?”, “나중에 압살롬과 다윗의 관계가 회복되면 우리만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러한 점에서 압살롬과 그 뜻을 함께한 사람들은 이러한 근원적인 두려움이 있었고 이 두려움은 압살롬 세력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역사속에서 왕을 배신하는 세력들은 제각각 그 상황에 따른 치명적인 약점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란군의 특성상 어느 한 순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 약점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면, 당장은 반란군이 엄청난 기세와 힘으로 한 나라를 쉽게 장악할 것처럼 보여도, 예상하지 못한 작은 오해나 사고로, 쉽사리 그 불길이 사그라져, 쉽게 반란이 진압되는 처지가 됩니다. 그렇기에 반란세력은 자신들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대의와 명분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압살롬 군대의 이와 같은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폐륜적인 행동을 하게 함으로,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의 관계는 이제 절대로 회복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만천하에 선언하게 한 모양을 만든 것입니다. 아히도벨이 예상하는 바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들을 범하면 압살롬 진영의 모든 사람의 힘은 더욱 강해지게 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예상은 단기적으로 적중했습니다.
아히도벨의 이러한 계략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정치’이자, ‘처세’에 불과합니다.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레위기 18:7,8)는 율법을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방식을 싫어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싫어하신다 하여도, 그 행동이 자신의 입지를 더 견고하게 해주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을 더 쉽고 빠르게 이루어줄 것으로 보인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어기는 사람이 바로 아히도벨과 같은 사람입니다. 아히도벨과 같은 삶이 당장은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끝은 결국 파멸입니다. 아히도벨의 길이 망하는 길인지 모르는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략을 그대로 따릅니다.
(22-23)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압살롬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와 비교하여 보았을 때 다윗은 참으로 미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를 끝까지 보호하고자 하였으며, 한참 후에는 자신을 죽이려 하였던 압살롬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자신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한 사람들을 민망하게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윗의 미련함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세상적으로 미련한 그것이 다윗에게 강점이 되어 하나님께서는 그를 들어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머리를 써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끝없이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방법을 즐거워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 23절에 나타나는 아헤도벨을 향한 칭찬은 그것이 마냥 칭찬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 내용인즉슨 아히도벨의 그 머리가 하도 비상하여, 그가 무언가를 만들어 내면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직접 만들어서 주신 것처럼 느껴진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을 떠나 자신을 위해 그 비상한 머리를 사용하니 그는 가장 빠르게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아히도벨의 계략과 같이 멋지고 뛰어난 방법처럼 보이나 하나님과 멀어지는 길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조금은 느리고, 미련한듯하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참 진리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까? 오늘 삶의 자리에서 능력의 주님과 함께 지혜의 근본 되시는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든 교우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브살렐 / 삼하16:15~23
아히도벨과 후새는 둘 다 군사전략가이자 다윗의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다윗 정부의 각료가 된 사람은 아히도벨이었습니다 훨씬 유능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유능했는지 하나님의 모략처럼 여겨졌습니다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삼하16:23)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 배반했습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역모에 가담하고 첫 번째 베푼 계략은 심리선전전이었습니다 옥상에 장막을 치고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아버지의 후궁들을 범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삼하16:21) 군대는 지휘관과 동질감을 느끼는 감정적 공감대를 강하게 형성할수록 사기가 급격히 높아집니다 그래서 압살롬이 더 이상 다윗의 아들이 아니라 자기들과 같이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모두가 한 편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한 것입니다 참으로 누가 진짜 친구인지는 위기 때에 드러납니다. 다윗의 참 친구는 후새였습니다 "아히도벨은 왕의 모사가 되었고 아렉 사람 후새는 왕의 벗이 되었고"(대상27:33) 어쩌면 이 말씀이 후새에게는 치욕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아히도벨은 승승장구하는데 자신은 능력을 인정받지 못해 그냥 친구일 뿐이라는 평가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친구는 먼 형제보다 낫습니다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잠27:10) 그러므로 유능한 모사보다 참 벗이라는 평가가 훨씬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여기십니다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눅12:4) 그리고 친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 아히도벨은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압살롬을 따라 넓은 길로 갔지만, 후새는 소수지만 친구 다윗을 따라 좁은 길로 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진실한 친구가 되기 원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3~15) 아멘 아멘
책사 후새와 아히도벨
사무엘하 16:15-23 / 매원감리교회
1. 다윗의 친구이자 책사였던 후새가 압살롬에게 위장 투항을 함.
2. 아히도벨은 예루살렘을 차지한 압살롬에게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부왕의 후궁들과 동침할 것을 요청. 부왕의 미움이 압살롬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힘을 모으는 계기가 될 것을 예상함.
묵상 말씀: “사람들은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무엇이든지, 마치 하느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과 꼭 같이 여겼다.”(삼하16:23)
1. 아히도벨의 모략
아히도벨의 모략은 뛰어났던 모양입니다. 반란을 일으키면서 압살롬은 제일 먼저 길로에 있던 아히도벨을 데려왔으니 말입니다(삼하15:12). 다윗이 범했던 밧세바의 아비가 엘리암이고 엘리암의 아비가 아히도벨(삼하23:34)이니, 아히도벨은 다윗의 사돈어른이 되는 처지입니다. 그의 뛰어난 모략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과 같이 여길 정도로 뛰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만, 문제는 그의 모략은 파괴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히도벨의 모략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부왕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일-은 그야말로 생명을 죽이는 모략이요 점점 더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어두움의 모략입니다. 아마도 그의 그러한 태도 때문에 다윗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를 잘 아는 다윗은 그의 모략이 파괴적임을 알고, 그의 모략이 실패로 끝나길 기도하였습니다.(삼하15:31) 예루살렘에 남은 후새의 역할이 바로 그러한 아히도벨의 모략을 제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악은 악을 낳게 마련입니다. 압살롬의 선택은 그런 아히도벨의 파괴적인 모략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수렁으로 빠지게 됩니다.
2. 후새의 모략
후새는 예루살렘에 남은 동기가 뚜렷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는 다윗과 함께 떠나려했지만 다윗의 권고로 남은 것입니다. 친구 다윗을 위해 생명을 걸고 예루살렘에 남은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15:13)는 말씀을 실천한 셈입니다. 친구를 돕기 위해 남은 자와 파괴적인 모략을 사용하는 아히도벨은 출발부터 뭔가 달라 보입니다. ‘사람 중심의 모략’과 ‘일 중심의 모략’의 대결인 셈입니다. 뛰어난 지략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동기입니다. 그 동기가 어떠냐에 따라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 동기 속에는 옳고 그름에 대한 치열한 성찰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명기 기자는 “생명을 택하십시오”(신30:19)라고 가르쳤습니다. 친구를 살리는 후새의 모략은 다윗을 죽이려는 아히도벨의 모략과 출발부터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승부 또한 이미 끝나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섬기리이까
사무엘하 16:15-23 / 정상기 초원지기
세상을 섬기려고 수고한 저를 모으셔서 이 자리에 서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예배의 자리로 모으시는 주님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녕하세요. 정상기 초원입니다. 오늘 큐티인 제목은 <내가 누구를 섬기리이까> 사무엘하 16장 15절에서 23절 말씀입니다. 오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내가 누구를 섬기리이까는 결정을 해야 하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인식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의사결정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감정과 이성, 간 균형이 중요하다고 하는데요. 느끼는 감정 상태가 의사결정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수많은 결정에 기분이 좋을 때와 나쁠 때에 따라 결정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공동체에서 묻자와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 같습니다.
저는 결정 장애가 있는 것 같이 결정을 내리기가 힘이 듭니다. 사소한 것. "뭐 먹을까?" 해도 "아무거나" "어디 갈까?" 해도 "아무데나" 늘 결정권을 아내에게 맡기는 편입니다. 책임지기 싫고 탓을 듣는 게 싫어서 생각하다가 생각에 머무르고 끝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인물의 압살롬의 선택, 후새의 선택, 아히도벨의 선택이 나옵니다.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는데 그럼 잘하는 선택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선택을 잘하기 위해서는
1.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분별을 잘 합니다.
다윗은 압살롬에 반역해 백성을 생각하고 아들 압살롬을 생각해서 도망을 선택합니다. 다윗 입장에서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지만 칼이 네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나단 선지자의 예언에 자기의 삶의 결론이라는 것을 즉시 인정하고 떠난 것입니다.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망간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모든 것이 다 이로운 듯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는 말을 듣자마자 다윗은 여호하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후새가 등장합니다. 후새도 다윗과 함께 가려고 했지만, 다윗은 아히도벨의 모력을 패하게 하는 목적으로 후새에게 궁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아가 왕이여 만세 하고 다가갑니다. 압살롬은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후새는 내가 여호와와 이백성 모든 이스라엘이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며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니까? 그의 아들 아니니까하며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다 합니다. 압살롬이 후새를 선택한 것은 자신을 위해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ㄴㅂ하지만 후새를 통해서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하기에 자기 욕심에 자기가 넘어간 것입니다.
저는 지나간 삶을 뒤돌아보니 수많은 선택 앞에서 내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선택이었고 때로는 내 욕심에 가려서 한 선택으로 힘들었던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경북 첩첩산중인 산골에서 6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믿는 집안에서 불신 결혼으로 아버지와 결혼하셨습니다. 열심히 살으셨지만 가난한 시골에서 형님들은 크고 작은 사고를 쳤고 그로 인해 몇 번의 기절도 하셨습니다. 집안에 제사가 많아 두 달에 한 번꼴로 제사를 지냈고 그것도 모자라 동네 제까지 지냈습니다. 집안은 점점 기울어 막내인 제가 아들이면 남의 집에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아들로 태어난 저는 부잣집에 데리러 왔는데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가 못 주겠다고 다시 데려왔다고 합니다. 가난으로 상급학교인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하고 풀 베고 나무하는 날들을 보내며 지내던 5월 어느 날 어머니는 푸념조로 "상기여 너는 예수 믿어라. 예수 믿으면 천국가고 잘 된다 하더라" 하셨습니다. 저는 형님들에 치여 힘들어하는 부모님께 어려서부터 절대로 부모님 눈에 눈물 흘리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집안에 있는 듯 없는 듯 보내고 있었는데, 그날 어머니의 말을 듣고 교회가 없는 시골에서 방송으로 예수님을 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너무 좋았고 교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던 차에 시골에 교회가 생기니 거의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중학교에 가면서 시골 교회라 일꾼이 없어서 주일학교 교사를 했는데 그때 하나님께 "60이 될 때까지 교사하게 해주세요." 했던 기도로 정확히 3년 전까지 청소년 교사를 하였습니다. 군대에 갔다 오면서 빵 기술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기술을 배울 때 주일을 쉬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느 정도 기술자가 되자 주일 쉬어주는 제과점을 찾았지만 없었고 그만 제과 기술을 포기하려던 차에 주일 쉬어주는 조건으로 들어간 제과점이 아내의 외사촌 오빠가 운영하던 제과점이었습니다. 지금 아내인 동생을 소개해 준다면서 예쁘고 똑똑하고 믿음도 좋다고 했습니다. 당시 아내는 두 달 후 직장을 가기로 하고 집에 있었는데, 두 달만 간만 오빠가 가게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빠의 소개와 다르게 평범한 외모에 매장을 보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저는 신교제를 기도하고 있었지만 함께 장사하게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인지를 미리 그리고 있었고, 아내의 모습은 아니다로 선을 그었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이 후새에 이름했듯이 급속이라 하는데 두 달 정도 일정이 끝나자 아내는 잘 지내시라 하고 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는 마음이 급히 드는 생각이 너는 저 여자 아니면 결혼 못 한다는 강한 생각이었습니다. 나중에 아내는 오빠에게 소개받은 말과 다른 저의 외모가 싫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처가에서는 사촌 오빠의 말을 듣고 믿는 청년이고 총각 집사라는 말에 두 말 안 하고 밀어붙였다고 합니다. 어쨌든 우린 교회에서 결혼했고 바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서로 너무나 안 맞았기에 장사가 잘 되면 피곤해도 넘어갔지만 안 되는 날은 서로 예민해져 싸움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안 맞는 면이 많았지만 아내는 교회 일을 하는 데는 어떤 조건도 없이 밀어주었습니다. 아내가 둘째를 임신해서 만삭일 때 전 당시 선교부에서 섬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에게 "미얀마 가야 될 것 같은데" 했더니, 가게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해서 다녀왔습니다. 청소년 교사로 섬기고 있어서 교회에 차로 먼저 출발하였는데 아내는 둘째를 업고 첫째와 연년생인 조카 전두한 이웃 꼬마 총 남자 아이들 4명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불평을 안 하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래서 신결혼이 중요한가. 봅니다.
적용 질문 드리겠습니다.
- 선택을 할 때 감정이 많이 좌우됩니까?
- 신결혼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 공동체에 선택 시 잘 못자와 하고 있습니까?
선택을 잘하기 위해
2. 욕심에 의한 계략은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아히도벨의 계략이 나옵니다. 아히도벨은 악당과 거리가 멀고 현명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다윗은 어찌할 바를 모를 때마다 아히도벨에게 물으면 딱 답이 나왔고 혼란스럽고 확신에 서지 않을 때 대화를 나누면 답이 분명히 나오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아히도벨이 결정적으로 가장 다윗이 필요로 할 때 배신을 합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왕의 후궁을 취하는 것은 왕권을 주장하는데 공개적인 선언이었다고 합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운명을 걸었기에 자신의 권세를 철저히 배신합니다. 이는 하나님에 반하는 계략이었지만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최고의 계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계략을 뛰어넘습니다.
아내와 결혼하자마자 저희는 18년 동안 두 번의 제과점을 운영하였습니다. 기본 기복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모르고 세상 성공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저희를 구속사를 알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 교회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행위적인 죄를 별로 짓지 않았던 저는 처음 탐방 오신 목사님으로부터 "정 집사님은 죄를 못 보시네요"를 못 알아듣고 무시로 들렸습니다. 목자님이 수시로 전형적인 바리새인이라고 했던 말이 칭찬으로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모으게 하시려고 작정하셨는지 사건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잘 되던 제과점이 기울기 시작하였고 여러 가지 사건이 터지면서 폐업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가게를 폐업할 때 여호야긴이 유다가 망하여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날 폐업 예배를 드릴 때 잘 망하는 것이 축복이라는 말씀으로 포로 생활을 잘하라는 말씀을 주셨고 그러나 수넴 여인에게 이 땅에 기근이 들터이니 블레셋으로 피하라고 한 날 인도한 학원에서 말씀대로 포로 생활을 13년 하고 작년 3월에 폐업하였습니다. 코로나 때는 욕심에 앞서 아내와 하나가 되어 저희는 노후가 걱정되어 그때 아히도벨 같은 지인의 권유로 분별 못하고 땅을 사기로 했는데 나중에 그것이 사기로 밝혀져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통해 속이는 자보다 속는 자가 더 나쁜 것을 깨닫게 하시고 묻자와 하지 않는 죄를 회개하였으므로 평안을 주셨습니다. 내가 욕심 앞에서는 아히도벨을 분별하지 못함을 인정하고 공동체에서 고백하고 가게 하시니 목장은 가장 든든한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운영하면서 여러 가지 잘 될 수 있는 기회를 왜 비껴가게 하셨을까를 묵상해보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 바리새인의 모습을 깨시기 위한 훈련의 장소였고 중요한 것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힘을 빼는 최고의 장소였음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힘들 때마다 옥상에 올라가 울면서 기도하니 아픈 훈련생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내 얘기를 하게 되었고 깜짝 놀라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도 하고 또 학원이 힘들어도 예배 때 주시는 은혜와 목장 공동체를 전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적용 질문 드리겠습니다.
- 내 욕심 앞에서 아내와 하나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 속이는 자보다 속는 자가 더 나쁜 것에 동의가 되시나요?
선택을 잘하기 위해
3.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저는 작년에 학원을 폐업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학원을 폐업하고 친구가 운영한 베이커리 카페를 방문했는데 친구에게서 함께 일하자는 권면을 받았습니다. 나와 너무 다른 친구는 기술도 좋았고 일하는 직원만 13명이었습니다. 직장을 하는데 한 파트에서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던 차에 제가 놀고 있다고 하니 함께 일해보자고 했습니다.
지방이었는데 가게를 둘러보니 가게의 화려함과 기술이 가고 싶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아내는 친구의 가게에 가는 것이 신기술을 배울 수 있고 운영 기술이 뛰어난 친구에게 시야를 넓힐 수 있다는 생각에 가는 것을 찬성했고 적극적으로 가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목자 모임에 목장에도 묻자와 했고 가도 된다는 권면을 해 주셨습니다. 아내는 주말 부부에 상당히 매력을 사실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TT 다녀와서 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저희 초원의 한 집사님이 천국 가는 사건을 경험하며 지방에 내려가면 초원의 자리가 비는 것 같아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친구에게 전화해서 못 간다고 연락하니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실업급여 받으며 몇 달 전에 이력서를 냈던 지금의 빵 공장에 연락이 와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학원을 하다가 빵 공장에 일하려니 새로운 직장에서의 긴장감과 육체적인 노동에 힘이 들고 대량 생산으로 반복되는 손 작업에 손이 아프기 시작했고, 밤에 손이 저리고 아파 잠을 깨는 날이 많으니 저의 아픔을 본 아내는 그만두라고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곳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기도하면서 일을 하기로 했고 몇 달 후 처음 했던 곳보다 조금은 손에 무리가 가지 않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기도의 응답으로 감하여 주신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다 보니 일은 힘들지만 시간상으로 편합니다.
경상도 TT를 준비하면서 대구에서 몇 주 전에 오셨던 목사님 말씀을 들었을 때 주님이 제게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이 미국 유학 중 음식점에서 일하고 계실 때 손이 너무 아픈 나눔을 하셨는데 지금의 제 모습인 것 같고, 손이 아프고 힘들지만 고난에 머무르라고 하는 말씀을 응답으로 들렸습니다. 대구 생명교회란 말을 듣고 사실 더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에 어렸을 때 어머니가 "네 외삼촌은 교회 짓고 장로가 되었다 하더라" 했던 교회임이 기억나서입니다. 가장 힘들 때 들었던 외삼촌은 어머니를 통해서 부자란 얘기를 들었지만 막내이고 왕래가 없었기에 이름만 알지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아내에게 외삼촌이 장로님으로 계셨던 교회에서 오신 목사님이야라고 하니 아내가 교회 연역에 들어가서 70년대 외삼촌 성함을 발견하고 "장로님으로 계셨었네" 합니다. 신기하다고 하면서 고난 가운데 머무르라가 마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다고 합니다. 70년대 외삼촌 장로님이 26년도에 오셔서 고난에 머무르라고 하시는 것 같으니 아내는 더 이상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70년대에 어머니를 위해서 간구하시던 외갓집의 기도가 이루어져 제가 장로가 되어 있는 듯해서 새삼 초원의 일을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라고 다짐해 봅니다. TT를 준비하는데 저희는 노방전도 목장인도 예배 간증에 은혜를 부어주시라고 팀원들과 기도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
적용 질문 드리겠습니다.
- 하나님께 잘 묻고 있나요?
- 지금 힘든 시간들이 하나님께서 모으기 위한 시간임이 믿어지시나요?
맺겠습니다.
내가 누구를 섬길까 선택이라고 하셨는데 말씀이 깊이 묵상해야 분별을 잘 합니다. 욕심에 의한 계략은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결론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려서 가난하게 지낸 것이 돈이 우상이 되어 세상을 쫓다 모으시는 주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서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아히도벨을 분별하지 못하는데 공동체에 묶여 있어서 묻자와 할 수 있게 하시니 은혜입니다. 첫째, 아들이 불신교제로 공동체를 떠나 있는 것에 애통이 됩니다. 저의 어정쩡한 태도에 아들의 구원이 방해될까 회개하게 됩니다. 아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모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히 응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담임 목사님의 영육의 건강을 지켜주시고 문서사역과 방송사역에 기름 부어 주셔서 죽어가는 한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를 부어주시옵소서. 이념적으로 어느 때보다 대립이 되어 있는 이 나라를 살려 주시고 창조 질서를 지키는 법과 제도가 세워져 생명을 지키는 법이 세워지고 악법들을 막아 주시옵소서. 경상도 TT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구속사의 말씀과 간증이 빛이 되어 숨이 있던 은밀한 방의 문비장이 열리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나를 죄에서 모아주시고 공동체와 함께 언약을 세워가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내가 누구를 섬기리이까
사무엘하 16:15-23 / 우리들교회 새벽기도회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섬기려고 수고한 저를 모으셔서 이 자리에 서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예배의 자리로 모으시는 주님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녕하세요. 정상기 초원입니다. 오늘 큐티인 제목은 <내가 누구를 섬기리이까> 사무엘하 16장 15절에서 23절 말씀입니다. 오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내가 누구를 섬기리이까는 결정을 해야 하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인식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의사결정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감정과 이성, 간 균형이 중요하다고 하는데요. 느끼는 감정 상태가 의사결정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수많은 결정에 기분이 좋을 때와 나쁠 때에 따라 결정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공동체에서 묻자와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 같습니다.
저는 결정 장애가 있는 것 같이 결정을 내리기가 힘이 듭니다. 사소한 것. "뭐 먹을까?" 해도 "아무거나" "어디 갈까?" 해도 "아무데나" 늘 결정권을 아내에게 맡기는 편입니다. 책임지기 싫고 탓을 듣는 게 싫어서 생각하다가 생각에 머무르고 끝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인물의 압살롬의 선택, 후새의 선택, 아히도벨의 선택이 나옵니다.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는데 그럼 잘하는 선택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선택을 잘하기 위해서는
1.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분별을 잘 합니다.
다윗은 압살롬에 반역해 백성을 생각하고 아들 압살롬을 생각해서 도망을 선택합니다. 다윗 입장에서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지만 칼이 네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나단 선지자의 예언에 자기의 삶의 결론이라는 것을 즉시 인정하고 떠난 것입니다.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망간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모든 것이 다 이로운 듯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는 말을 듣자마자 다윗은 여호하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후새가 등장합니다. 후새도 다윗과 함께 가려고 했지만, 다윗은 아히도벨의 모력을 패하게 하는 목적으로 후새에게 궁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아가 왕이여 만세 하고 다가갑니다. 압살롬은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후새는 내가 여호와와 이백성 모든 이스라엘이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며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니까? 그의 아들 아니니까하며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다 합니다. 압살롬이 후새를 선택한 것은 자신을 위해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ㄴㅂ하지만 후새를 통해서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하기에 자기 욕심에 자기가 넘어간 것입니다.
저는 지나간 삶을 뒤돌아보니 수많은 선택 앞에서 내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선택이었고 때로는 내 욕심에 가려서 한 선택으로 힘들었던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경북 첩첩산중인 산골에서 6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믿는 집안에서 불신 결혼으로 아버지와 결혼하셨습니다. 열심히 살으셨지만 가난한 시골에서 형님들은 크고 작은 사고를 쳤고 그로 인해 몇 번의 기절도 하셨습니다. 집안에 제사가 많아 두 달에 한 번꼴로 제사를 지냈고 그것도 모자라 동네 제까지 지냈습니다. 집안은 점점 기울어 막내인 제가 아들이면 남의 집에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아들로 태어난 저는 부잣집에 데리러 왔는데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가 못 주겠다고 다시 데려왔다고 합니다. 가난으로 상급학교인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하고 풀 베고 나무하는 날들을 보내며 지내던 5월 어느 날 어머니는 푸념조로 "상기여 너는 예수 믿어라. 예수 믿으면 천국가고 잘 된다 하더라" 하셨습니다. 저는 형님들에 치여 힘들어하는 부모님께 어려서부터 절대로 부모님 눈에 눈물 흘리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집안에 있는 듯 없는 듯 보내고 있었는데, 그날 어머니의 말을 듣고 교회가 없는 시골에서 방송으로 예수님을 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너무 좋았고 교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던 차에 시골에 교회가 생기니 거의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중학교에 가면서 시골 교회라 일꾼이 없어서 주일학교 교사를 했는데 그때 하나님께 "60이 될 때까지 교사하게 해주세요." 했던 기도로 정확히 3년 전까지 청소년 교사를 하였습니다. 군대에 갔다 오면서 빵 기술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기술을 배울 때 주일을 쉬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느 정도 기술자가 되자 주일 쉬어주는 제과점을 찾았지만 없었고 그만 제과 기술을 포기하려던 차에 주일 쉬어주는 조건으로 들어간 제과점이 아내의 외사촌 오빠가 운영하던 제과점이었습니다. 지금 아내인 동생을 소개해 준다면서 예쁘고 똑똑하고 믿음도 좋다고 했습니다. 당시 아내는 두 달 후 직장을 가기로 하고 집에 있었는데, 두 달만 간만 오빠가 가게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빠의 소개와 다르게 평범한 외모에 매장을 보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저는 신교제를 기도하고 있었지만 함께 장사하게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인지를 미리 그리고 있었고, 아내의 모습은 아니다로 선을 그었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이 후새에 이름했듯이 급속이라 하는데 두 달 정도 일정이 끝나자 아내는 잘 지내시라 하고 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는 마음이 급히 드는 생각이 너는 저 여자 아니면 결혼 못 한다는 강한 생각이었습니다. 나중에 아내는 오빠에게 소개받은 말과 다른 저의 외모가 싫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처가에서는 사촌 오빠의 말을 듣고 믿는 청년이고 총각 집사라는 말에 두 말 안 하고 밀어붙였다고 합니다. 어쨌든 우린 교회에서 결혼했고 바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서로 너무나 안 맞았기에 장사가 잘 되면 피곤해도 넘어갔지만 안 되는 날은 서로 예민해져 싸움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안 맞는 면이 많았지만 아내는 교회 일을 하는 데는 어떤 조건도 없이 밀어주었습니다. 아내가 둘째를 임신해서 만삭일 때 전 당시 선교부에서 섬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에게 "미얀마 가야 될 것 같은데" 했더니, 가게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해서 다녀왔습니다. 청소년 교사로 섬기고 있어서 교회에 차로 먼저 출발하였는데 아내는 둘째를 업고 첫째와 연년생인 조카 전두한 이웃 꼬마 총 남자 아이들 4명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불평을 안 하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래서 신결혼이 중요한가. 봅니다.
적용 질문 드리겠습니다.
- 선택을 할 때 감정이 많이 좌우됩니까?
- 신결혼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 공동체에 선택 시 잘 못자와 하고 있습니까?
선택을 잘하기 위해
2. 욕심에 의한 계략은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아히도벨의 계략이 나옵니다. 아히도벨은 악당과 거리가 멀고 현명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다윗은 어찌할 바를 모를 때마다 아히도벨에게 물으면 딱 답이 나왔고 혼란스럽고 확신에 서지 않을 때 대화를 나누면 답이 분명히 나오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아히도벨이 결정적으로 가장 다윗이 필요로 할 때 배신을 합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왕의 후궁을 취하는 것은 왕권을 주장하는데 공개적인 선언이었다고 합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운명을 걸었기에 자신의 권세를 철저히 배신합니다. 이는 하나님에 반하는 계략이었지만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최고의 계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계략을 뛰어넘습니다.
아내와 결혼하자마자 저희는 18년 동안 두 번의 제과점을 운영하였습니다. 기본 기복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모르고 세상 성공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저희를 구속사를 알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 교회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행위적인 죄를 별로 짓지 않았던 저는 처음 탐방 오신 목사님으로부터 "정 집사님은 죄를 못 보시네요"를 못 알아듣고 무시로 들렸습니다. 목자님이 수시로 전형적인 바리새인이라고 했던 말이 칭찬으로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모으게 하시려고 작정하셨는지 사건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잘 되던 제과점이 기울기 시작하였고 여러 가지 사건이 터지면서 폐업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가게를 폐업할 때 여호야긴이 유다가 망하여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날 폐업 예배를 드릴 때 잘 망하는 것이 축복이라는 말씀으로 포로 생활을 잘하라는 말씀을 주셨고 그러나 수넴 여인에게 이 땅에 기근이 들터이니 블레셋으로 피하라고 한 날 인도한 학원에서 말씀대로 포로 생활을 13년 하고 작년 3월에 폐업하였습니다. 코로나 때는 욕심에 앞서 아내와 하나가 되어 저희는 노후가 걱정되어 그때 아히도벨 같은 지인의 권유로 분별 못하고 땅을 사기로 했는데 나중에 그것이 사기로 밝혀져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통해 속이는 자보다 속는 자가 더 나쁜 것을 깨닫게 하시고 묻자와 하지 않는 죄를 회개하였으므로 평안을 주셨습니다. 내가 욕심 앞에서는 아히도벨을 분별하지 못함을 인정하고 공동체에서 고백하고 가게 하시니 목장은 가장 든든한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운영하면서 여러 가지 잘 될 수 있는 기회를 왜 비껴가게 하셨을까를 묵상해보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 바리새인의 모습을 깨시기 위한 훈련의 장소였고 중요한 것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힘을 빼는 최고의 장소였음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힘들 때마다 옥상에 올라가 울면서 기도하니 아픈 훈련생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내 얘기를 하게 되었고 깜짝 놀라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도 하고 또 학원이 힘들어도 예배 때 주시는 은혜와 목장 공동체를 전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적용 질문 드리겠습니다.
- 내 욕심 앞에서 아내와 하나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 속이는 자보다 속는 자가 더 나쁜 것에 동의가 되시나요?
선택을 잘하기 위해
3.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저는 작년에 학원을 폐업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학원을 폐업하고 친구가 운영한 베이커리 카페를 방문했는데 친구에게서 함께 일하자는 권면을 받았습니다. 나와 너무 다른 친구는 기술도 좋았고 일하는 직원만 13명이었습니다. 직장을 하는데 한 파트에서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던 차에 제가 놀고 있다고 하니 함께 일해보자고 했습니다.
지방이었는데 가게를 둘러보니 가게의 화려함과 기술이 가고 싶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아내는 친구의 가게에 가는 것이 신기술을 배울 수 있고 운영 기술이 뛰어난 친구에게 시야를 넓힐 수 있다는 생각에 가는 것을 찬성했고 적극적으로 가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목자 모임에 목장에도 묻자와 했고 가도 된다는 권면을 해 주셨습니다. 아내는 주말 부부에 상당히 매력을 사실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TT 다녀와서 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저희 초원의 한 집사님이 천국 가는 사건을 경험하며 지방에 내려가면 초원의 자리가 비는 것 같아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친구에게 전화해서 못 간다고 연락하니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실업급여 받으며 몇 달 전에 이력서를 냈던 지금의 빵 공장에 연락이 와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학원을 하다가 빵 공장에 일하려니 새로운 직장에서의 긴장감과 육체적인 노동에 힘이 들고 대량 생산으로 반복되는 손 작업에 손이 아프기 시작했고, 밤에 손이 저리고 아파 잠을 깨는 날이 많으니 저의 아픔을 본 아내는 그만두라고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곳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기도하면서 일을 하기로 했고 몇 달 후 처음 했던 곳보다 조금은 손에 무리가 가지 않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기도의 응답으로 감하여 주신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다 보니 일은 힘들지만 시간상으로 편합니다.
경상도 TT를 준비하면서 대구에서 몇 주 전에 오셨던 목사님 말씀을 들었을 때 주님이 제게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이 미국 유학 중 음식점에서 일하고 계실 때 손이 너무 아픈 나눔을 하셨는데 지금의 제 모습인 것 같고, 손이 아프고 힘들지만 고난에 머무르라고 하는 말씀을 응답으로 들렸습니다. 대구 생명교회란 말을 듣고 사실 더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에 어렸을 때 어머니가 "네 외삼촌은 교회 짓고 장로가 되었다 하더라" 했던 교회임이 기억나서입니다. 가장 힘들 때 들었던 외삼촌은 어머니를 통해서 부자란 얘기를 들었지만 막내이고 왕래가 없었기에 이름만 알지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아내에게 외삼촌이 장로님으로 계셨던 교회에서 오신 목사님이야라고 하니 아내가 교회 연역에 들어가서 70년대 외삼촌 성함을 발견하고 "장로님으로 계셨었네" 합니다. 신기하다고 하면서 고난 가운데 머무르라가 마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다고 합니다. 70년대 외삼촌 장로님이 26년도에 오셔서 고난에 머무르라고 하시는 것 같으니 아내는 더 이상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70년대에 어머니를 위해서 간구하시던 외갓집의 기도가 이루어져 제가 장로가 되어 있는 듯해서 새삼 초원의 일을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라고 다짐해 봅니다. TT를 준비하는데 저희는 노방전도 목장인도 예배 간증에 은혜를 부어주시라고 팀원들과 기도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
적용 질문 드리겠습니다.
- 하나님께 잘 묻고 있나요?
- 지금 힘든 시간들이 하나님께서 모으기 위한 시간임이 믿어지시나요?
맺겠습니다.
내가 누구를 섬길까 선택이라고 하셨는데 말씀이 깊이 묵상해야 분별을 잘 합니다. 욕심에 의한 계략은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결론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려서 가난하게 지낸 것이 돈이 우상이 되어 세상을 쫓다 모으시는 주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서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아히도벨을 분별하지 못하는데 공동체에 묶여 있어서 묻자와 할 수 있게 하시니 은혜입니다. 첫째, 아들이 불신교제로 공동체를 떠나 있는 것에 애통이 됩니다. 저의 어정쩡한 태도에 아들의 구원이 방해될까 회개하게 됩니다. 아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모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히 응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담임 목사님의 영육의 건강을 지켜주시고 문서사역과 방송사역에 기름 부어 주셔서 죽어가는 한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를 부어주시옵소서. 이념적으로 어느 때보다 대립이 되어 있는 이 나라를 살려 주시고 창조 질서를 지키는 법과 제도가 세워져 생명을 지키는 법이 세워지고 악법들을 막아 주시옵소서. 경상도 TT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구속사의 말씀과 간증이 빛이 되어 숨이 있던 은밀한 방의 문비장이 열리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나를 죄에서 모아주시고 공동체와 함께 언약을 세워가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삼하 16:15-23 / 구례제자교회
압살롬의 반역은 다윗에게 예상치 못한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급하게 도망을 가야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습니다. 자신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위급한 가운데서 붙잡았습니다. 그 믿음은 다윗으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피난하는 가운데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먼저 다윗을 따라 언약궤를 메고 온 제사장 사독과 레위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려보내면서 사독에게 예루살렘의 소식을 전해 줄 것을 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편에 섰다는 소식을 듣고 염려하고 있을 때 찾아온 후새를 압살롬에게 보내어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행하여 진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믿고 그 일하심에 나도 동참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명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새는 압살롬의 편에 서는 것처럼 행하였습니다. 그와 경쟁하게 될 아히도벨의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편에 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달라고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왕위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다윗이 왕궁을 지키도록 남겨둔 후궁을 취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면 압살롬과 다윗과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되어져 압살롬을 지지하던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략대로 행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압살롬은 이제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처럼 행하였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높여갔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께서 잠시 허락한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함은 잠시 잠깐입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코 부러워할 것이 못 됩니다. 하나님께 붙어있는 것이 영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영원합니다.
악인의 형통은 축복이 아니다
삼하 16:15~23 / js9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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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갈 때에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삼하 16:16)"
'홍불감장, 홍불감장이란 사자성어는 붉으나 달지 않는 장이라는 뜻으로 빛깔은 붉지만 맛이 쓴 간장처럼, 겉으로는 좋아보여도 속이 신통치 않을 때 쓰이는 말입니다. 겉은 그럴듯하지만 실속이 없다는 거예요. 빛 좋은 개살구라는 속담도 같은 뜻이죠. 악인의 형통이 바로 홍불감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인들이 겉으로는 형통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파멸의 길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압살롬과 아히도벨도 홍불감장이었습니다. 그들의 반역은 거침없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윗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비참하게 도망갔고 압살롬의 주변에는 탁월한 사람들이 모였어요.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형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형통 사이사이에는 그들을 파멸로 이끌 작은 틈새들이 있었어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전하는 영적인 교훈이 무엇인지 함게 살펴보고자합니다.
첫번째로,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틈이 생깁니다.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은 예루살렘에 무혈입성 했습니다. 아무런 충돌 없이 손쉽게 수도를 손에 넣은 것이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윗의 친구인 후새가 압살롬에게 찾아왔습니다.
압살롬이 후새에게 어찌하여 다윗과 함께 가지 않았냐고 물어보자 후새는 이제부터 다윗이 아니라 압살롬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압살롬의 입장에서는 너무 좋은 일이었죠. 다윗은 점차 세력을 잃어가고 자신은 세력을 확장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그러나 후새의 접근은 철저히 위장된 것이었죠.
후새는 다윗이 아히도벨의 계략을 무너뜨리기 위해 보낸 스파이였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의 무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를 환영했습니다. 만사가 형통한 듯 보였지만 그 사이에 틈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균열이 생기고 빈틈이 생깁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b)"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완벽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틈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셔야 그 팀이 메워집니다. 오늘도 악인의 형통에 파멸의 틈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번째로, 아무리 똑똑해도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면 파멸합니다. 아히도벨은 예루살렘을 장악한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과 동침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것도 옥상에 장막을 치고 온 이스라엘의 무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동침할 것을 제안했어요.(21) 백성들 앞에서 선왕인 다윗을 모욕하고 자신이 더 강한 존재임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근동에서 종종 이루어졌던 일입니다. 새로운 왕이 왕위를 찬탈했을 때 선왕의 영향력을 지워버리고 나라를 장악하기 위해서 사용된 책략이었어요. 사람들은 아히도벨의 계략에 감탄했습니다.(23) 아히도벨의 계략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만큼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라는 그의 계략은 율법이 금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적인 방법이었어요. 아히도벨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악인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똑똑한 머리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았지만 하나님께는 외면을 당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아무리 똑똑해도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면 파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의 길로 들어갈 수 있어요. 악인의 똑똑함을 부러워하지 마시고 조금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반드시 틈이 생긴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파멸의 틈이 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고 악인의 똑똑함도 부러워하지 않기 원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 파멸이 아닌 생명의 길에 서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한 압살롬
삼하 16:15~23 / Only Jesus
압살롬과 그를 따르는 백성이 예루살렘에 이릅니다. 후새는 "왕이여 만세"를 외치며,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을 섬기겠다고 속입니다. 한편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략대로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합니다. 압살롬이 다윗에게 미움받게 되었음을 온 이스라엘에 알려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함입니다.
< 연구와 묵상 >
반란에 성공한 압살롬이 백성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른지라"(15절)라는 언급은 아히도벨이 압살롬 정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임을 나타냅니다. 이때 후새가 "왕이여 만세"를 외치며 압살롬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압살롬은 후새의 행동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조롱합니다. 후새는 하나님과 백성이 선택한 자를 자신도 왕으로 섬기겠다고 하며, 다윗에게 한 것처럼 압살롬에게도 충성하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후새는 몇 마디 말로 압살롬의 신임을 얻고 그의 곁에 있게 됩니다. 이 일은 압살롬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도록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15:31).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칩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 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합니다. 이 옥상이 바로 다윗의 궁전 옥상입니다. 이전에 다윗이 암몬 족속과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오수를 즐긴 후에 밧세바를 보고 음욕이 일어 범죄했던 바로 그 옥상입니다. 여기 옥상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명확하게 해주는 핵심단어입니다.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된 곳입니다. 그 옥상에서 왕권을 향한 불타는 욕망 때문에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패륜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왕의 후궁들을 취하는 것은 전 왕을 폐하고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은 이 한 수를 통해서 압살롬과 다윗이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는 것을 알립니다. 외부적으로 압살롬과 다윗은 대적이 되었고 왕위를 계승했다고 선포하려 했던겁니다. 이런 선포를 통해 내부적인 결속을 굳게 하여 이제는 목숨 걸고 싸워서 지켜내자는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뛰어난 책략가이지만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으로 기회주의자 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아히도벨과 같은 머리 좋은 세속주의자가 중심이 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보다 효과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말씀의 원리를 쫓는 일보다 정치적인 책략이 더 우선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아히도벨이냐 후새냐의 선택이 치열한 전쟁 속 입니다. 옥상에 오르려 하는 자가 아닌, 낮은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하나님의 택함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결단과 적용 >
아버지. 비록 세상 가운데 속해 있지만, 세상의 지혜와 욕심을 내려놓고, 아버지께서 만드신 곳 안에서 낮은 자의 모습으로 섬기게 하옵소서. 세상의 방식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닌, 주신 말씀의 방식으로 이 땅에서의 사명을 다 하는 것에 열심을 기울이게 하옵소서. 저의 죄로 인해 가정과 이웃과 공동체가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말씀의 길로 행하게 하옵소서.
♤ 나눔
- 세상의 중심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이 나의 소망이 될 수 있는지, 세상의 지혜를 품는 그리스도인인지, 주님의 말씀을 품는 그리스도인인지 함께 나눠봅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
삼하 16:15-23 / Samanju
목차
사무엘하 16:15-23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
1. 광야의 역설: 고난의 장소인가, 말씀의 장소인가?
2.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 두 가지 관점
3. 후새의 지혜 vs 아히도벨의 계략: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4. 권력의 속성과 하나님의 법
5. 하나님의 시선: 징계와 구원의 이중주
핵심 적용 질문
Q1.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받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떤 신앙적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Q2. 후새의 말처럼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오늘날 우리의 삶의 결정 속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Q3.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상적 지혜’와 ‘권력’의 위험성은 무엇이며, 우리는 이를 어떻게 경계해야 합니까?
Q4. 다윗이 겪는 ‘광야’와 같은 고난을 ‘하나님의 복’으로 해석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오늘의 기도
사무엘하 16:15-23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
15 압살롬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른지라
16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아갈 때에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17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8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19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
20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하니
21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22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의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23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그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오늘 설교는 다윗의 인생 후반기 광야에서,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는 강력한 진리를 선포합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받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성도는 어떤 시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극명한 대조를 통해 심도 있게 다룹니다.
1. 광야의 역설: 고난의 장소인가, 말씀의 장소인가?
설교는 ‘광야’의 의미를 재해석하며 시작합니다. 인생의 문제가 찾아올 때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광야는 ‘미드바르(מִדְבָּר)’인데, 이는 ‘말씀’을 의미하는 ‘다바르(דָּבָר)’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화려한 성전이나 도성이 아닌,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말씀하실까요?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화려함과 유혹 앞에서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기 쉬운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모든 것이 사라진 광야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대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인생의 광야에 섰을 때가 가장 지혜로운 순간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빈들로 나아가셨던 것과,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 고멜을 ‘거친 들’로 인도하여 거기서 ‘소망의 문’을 주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친 광야는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이 되는 기회입니다.
God is watching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 A vast, empty desert landscape (the wilderness) under a scorching sun. In the center, a lone figure is on their knees, looking up towards the sky, from which a subtle, divine light seems to emanate. The scene conveys a sense of utter dependence and direct communion with the divine, away from any worldly distractions. Photorealistic, high-contrast. 뜨거운 태양 아래 광활하고 텅 빈 사막의 풍경(광야). 중앙에 고독한 인물이 무릎을 꿇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거기에서 은은하고 신성한 빛이 발산되는 듯합니다. 이 장면은 세속적인 방해 요소에서 벗어나 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신과 직접 교감하는 느낌을 전달합니다. 사실적이고 높은 콘트라스트.
2.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 두 가지 관점
본문은 악한 아들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무혈입성하여 성공을 만끽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반면, 의로운 아버지 다윗은 모든 것을 내어 맡긴 채 눈물 흘리며 쫓겨나는, 저주받은 듯한 모습입니다. 이 극명한 대비는 우리에게 ‘악인의 형통’이라는 오래된 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올바른 관점: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설교는 ‘시간’의 한계를 넘어선 ‘영원’이라는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와 신앙을 결코 잊지 않으시며, 악인의 악함 또한 잊지 않으십니다. 이 믿음이 바로 우리가 부조리한 세상을 견뎌낼 힘의 원천입니다.
잘못된 해답 비판: 설교자는 이 문제에 대해 ‘고난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기도하고 헌금하고 묵상하면 범사에 잘 될 것’이라는 식의 기복주의적 해답을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만약 이 논리가 맞다면,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수많은 순교자들과 사도들, 심지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조차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 되는 심각한 모순에 빠집니다. 성경은 결코 세상적인 성공을 믿음의 척도로 말하지 않습니다.
3. 후새의 지혜 vs 아히도벨의 계략: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압살롬의 성공 가도에 두 명의 모사가 등장하며 두 가지 길이 선명하게 갈립니다.
후새의 지혜 – ‘하나님 편에 서는 길’: 다윗의 친구 후새는 압살롬에게 나아가 “왕이여 만세”를 외칩니다. 압살롬이 “어찌 친구를 배신했느냐”고 묻자, 후새는 신적인 지혜가 담긴 중의적 대답을 합니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사무엘하 16:18). 이 말은 교만으로 눈이 먼 압살롬에게는 ‘하나님이 택한 나에게 속했다’는 아첨으로 들렸지만, 그 본심은 ‘나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택하신 다윗 왕의 편에 서 있다’는 충성의 고백이었습니다. 후새의 이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누구의 편입니까
?’
우리는 성공과 결과가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고 믿는 세상의 논리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결과와 상관없이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을 택할 것인가?
God is watching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 A tense interior scene in a royal court. A cunning man (Hushai) bows before a young, arrogant king (Absalom) on a throne. The king looks suspicious yet flattered. The court is filled with soldiers and nobles watching intently. The lighting is dramatic, with shadows playing on their faces, highlighting the psychological battle and the double meaning in the courtier's words. Style of a Rembrandt painting. 왕궁의 긴장감 넘치는 실내 장면. 교활한 남자(후사이)가 왕좌에 앉은 젊고 오만한 왕(압살롬) 앞에 절을 합니다. 왕은 의심스럽지만 아첨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궁정은 병사들과 귀족들로 가득 차 있고, 왕의 모습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극적인 조명은 심리전과 궁중 인사의 말에 담긴 이중적인 의미를 강조합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스타일.
아히도벨의 계략 – ‘세상의 방법을 따르는 길’: 반면, 아히도벨의 지혜는 철저히 세속적이고 악합니다. 압살롬이 앞으로의 방향을 묻자,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이 아닌, 권력을 공고히 할 가장 효율적이지만 비도덕적인 방법을 제시합니다.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둔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사무엘하 16:21). 이는 부자 관계를 완전히 끊고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만들어 백성들의 충성을 강제하려는 인간적인 술수이자, 하나님의 율법과 도덕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죄악입니다.
4. 권력의 속성과 하나님의 법
압살롬은 이 악한 조언을 망설임 없이 실행합니다. 왕궁 옥상, 바로 다윗이 밧세바(아히도벨의 손녀)를 보고 범죄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그는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후궁들을 범하는 죄를 짓습니다. 이는 권력이 어떻게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을 법으로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 장면입니다. 설교는 이를 현대 민주주의에 빗대어, 다수의 뜻(다수결)이라 할지라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법(법치주의의 근간) 위에 서 있지 않으면 폭정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사람이나 다수가 아닌 하나님의 법 아래 있어야만 합니다.
5. 하나님의 시선: 징계와 구원의 이중주
압살롬의 성공과 악행은 그의 승리가 아니라, 사실상 ‘무너진 것 위에서 무너진 줄도 모르고 일어서서 춤추고 있는 한 연약한 인간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그의 행동은 자신의 욕심에서 비롯되었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전에 다윗의 죄에 대해 예언하신 징계의 성취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사무엘하 12:11)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과율을 넘어서는 창조주의 법칙: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궁극적인 대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미 모두 치러졌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도의 삶에 고난이 있는가? 그것은 단순한 ‘인과응보’가 아니라, 우리를 걸작으로 만들어가시는 ‘창조주의 법칙’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문제’라는 복(福)을 통해 우리를 광야로 이끄시고, 그곳에서 우리를 더욱 아름답게 빚어가십니다. 다윗의 광야는 징계인 동시에, 그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과정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세상의 모든 계획은 무너져도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편 33:11). 지금 눈앞의 현실이 다윗의 눈물 골짜기처럼 보일지라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편을 선택한 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핵심 적용 질문
Q1.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받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떤 신앙적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A: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고난받는다’는 기복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다르며 영원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자세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믿음을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상황과 기도, 그리고 악인의 악행까지도 보고 계시며, 그분의 완전한 때에 그분의 계획을 이루실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Q2. 후새의 말처럼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오늘날 우리의 삶의 결정 속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A: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은 성공, 인기, 대세 등 세상적인 결과나 힘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후새가 압살롬의 권력 앞에서 ‘여호와께서 택한 자’에게 속했다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직장, 사업, 관계 등 모든 선택의 순간에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인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설령 그 길이 세상적으로는 실패처럼 보이고 고난이 따를지라도,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영원한 승리의 길임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Q3.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상적 지혜’와 ‘권력’의 위험성은 무엇이며, 우리는 이를 어떻게 경계해야 합니까?
A: 세상적 지혜와 권력은 당장의 효율성과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법과 도덕적 기준을 쉽게 무시하게 만드는 위험이 있습니다. 압살롬이 왕권을 위해 아버지의 후궁을 범하는 죄를 망설임 없이 저지른 것처럼, 권력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여 스스로를 법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이를 경계하기 위해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과 법 아래 우리 자신을 두어야 합니다. 개인과 공동체 모두 인간의 신실함이나 다수의 의견이 아닌, 변치 않는 하나님의 진리를 기준으로 삼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Q4. 다윗이 겪는 ‘광야’와 같은 고난을 ‘하나님의 복’으로 해석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A: 성도의 고난은 죄에 대한 단순한 ‘인과응보’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죄의 대가는 십자가에서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겪는 고난, 즉 ‘광야’는 우리를 연단하여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걸작(Masterpiece)으로 빚어가시는 ‘창조주의 법칙’이 적용되는 현장입니다. 하나님은 문제를 통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비로소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저주가 아니라 우리를 회복시키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자 복이 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