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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대통령 [사진=CNN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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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을 요구한 이 군전문가는 "지난 2014년 아무런 준비없이 당했던 크림반도 위기와 돈바스 전쟁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우크라이나군은 재블린(레이시온의 개인 휴대용 대전차무기) 등 러시아군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무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재블린은 글로벌 방산기업인 미국의 레이시온이 개발한 레이저 유도방식의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로 현존하는 모든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성능을 자랑한다.
▲나토-러시아 전면전은 공멸...대리전 또는 국지전 양상 전망
폴란드에 배치된 미군의 모습 [사진=CNN화면 캡처]
그는 "북미의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유럽의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열강 대부분이 회원인 나토(NATO)군과 전면전을 벌일 수 있는 국가는 사실상 없다. 당초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을 요구했던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에 투입된 러시아 지상군은 100여개의 대대전투단이 주력"이라면서 "대대전투단체제는 사단체제보다 현장 적응력이 높아 국지전에 유리하다. 이는 전면전 가능성은 낮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고 그는 평가했다.
그는 이어 "나토는 직접 군사력을 개입하기 보다는 우크라이나 군을 지원할 가능성이 높다. 회원국이 아닌 우크라이나에서 병력피해가 발생하면 자국내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라며 "따라서 전투가 발생하더라도 대리전이나 국지전에 한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일반적인 군사력의 관점에서만 비교하면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발생할 경우, 해군과 공군은 나토가 우세하고 지상군에서는 20여만명에 이르는 러시아 군이 더 강력할 것으로 평가된다.
▲우크라이나군, 2014년 돈바스 전쟁 경험으로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 등 갖춰
이번 침공에 대해서는 2014년 돈바스 전쟁 때와는 달리 나토에서 우크라이나군에 조기경보기(ISR) 등을 통해 사전에 첩보를 줬다고 그는 밝혔다.
그리고 나토는 러시아 대대전투단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전차, 장갑차, 자주포에 대응할 수 있도록 NLAW(휴대용 대전차미사일), 재블린, 스팅어(휴대용 대공미사일) 등을 지원했다. 이런 무기들은 효율적으로 러시아군의 기갑전력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그는 "특히 우크라이나는 아르메니아전에서 대전차 무기로 맹활약한 터키산 드론 TB2도 수십대 도입했다. TB2에는 4개의 대전차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어 한번의 출격으로 최대 4대의 지상목표물을 공격할 수 있다"면서 "TB2의 가격은 약 2만 달러(2200만원)로 상당히 가성비가 높다"고 덧붙였다.
▲러시아군, 1년 짜리 징집병이 주력...전차, 자주포 노후화로 전투력 장담 어려워
러시아군의 자주포가 우크라이나에서 진격하는 모습 [사진=CNN화면 캡처]
우크라이나군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진 러시아군도 약점이 있다고 군전문가는 지적했다.
그는 "징병제와 모병제를 혼용하는 러시아군은 숫자상 징병비율이 높다. 그런데 이들의 복무기간은 1년이다. 제대로 훈련을 받고 복무하기에는 복무기간이 너무 짧다. 소규모 특수부대와는 달리 이번에는 대규모 정규군이 동원됐기 때문에 전투력을 발휘하는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숫자상 절대 우위에 있는 전차, 자주포 등의 노후화도 문제"라며 "고성능 전차로 알려진 5세대 T-14아르마타는 아직 실전배치가 안됐고 1960년대부터 운용되고 있는 T-72가 이번 작전에서 상당히 많이 눈에 띈다. 러시아의 자주포 전력은 6500여문으로 이 중 3분의2가 70년대 전에 배치됐고 1989년부터 전력화된 MSTA은 나토군의 자주포에 비하면 성능이 한단계 낮다"고 짚었다.
▲"당장 서진하거나 전선 확대는 어려워...향후 러시아계 많은 남부지역 노릴 것"
군전문가는 이같은 이유로 러시아가 추가적인 침공보다는 현재 확보한 지역을 자치주로 선포하고 철군할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그러면서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향후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푸틴은 이번에 차지한 루간스크와 도네츠크를 앞서 병합한 크림반도처럼 자치주로 선포하고 미국과 협상을 거쳐 철군할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면서도 "향후 분위기가 냉각되면 러시아계가 많은 우크라이나 남부지역에서 또다시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꾀할 수도 있을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장기화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지만 강력한 경제제재를 감당해야 하고 우크라이나의 항전분위기가 강해 본격적인 해빙기가 닥치기 전에 철군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덧붙였다.
김의철 기자 lycaon@greened.kr
출처: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45
우크라이나 역사④…소련 체제에 저항한 반군
2차 대전 중 우크라이나에 반군 조직…처음엔 독일에 호응, 후에 반기
1922년 12월 28일 소비에트연방(USSR)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트랜스코카서스의 4개 회원국으로 출범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Ukrai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은 1936년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꾼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12월 독립할 때까지 69년간 소련에 편입된 공화국이었다. 소련의 공화국(republic)은 독립국이 아니라, 미국의 주(stat)나 중국의 성(省)과 같이 일정한 자치권을 가진 지방정부였다.
우크라이나 하르키프의 아사한 농민들.(1933) /위키피디아
이오시프 스탈린은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에 집단농장화를 강요했다. 집단 농장은 일종의 감옥이었다. 그곳을 벗어나 여행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다. 무단으로 이탈할 경우 체포되거나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집단농장화는 대재앙을 초래했다. 1932~1933년 대기근으로 수백만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대기근은 국가가 집단농장에서 생산한 곡물을 전면적으로 몰수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또한 중앙통제 방식의 경영에서 곡물을 생산하던 곳에 사탕수수를 심거나 면화를 재배하면서 기근을 악화시켰다.
이 시기에 우크라이나 기근은 더 심각했다. 이 지방에서 대기근을 홀로도모르(Holodomor)라고 표현했다. 우크라이나의 사망자는 정확하게 얼마인지 모른다. 유엔은 700만~1,000만명이라고 추산했다. 인구통계학자에 따르면 1926년부터 1939년 사이에 우크라이나의 인구는 6.6% 감소했는데, 같은 기간에 러시아의 인구는 16.9%, 벨라루스는 11.7% 각각 증가했다.
카니발리즘이 행해졌다. 착한 사람이 먼저 죽었다. 남의 것을 훔칠줄 모르는 사람, 몸을 팔길 거부한 사람이 먼저 쓰러졌다. 소비에트 정부는 “당신의 아이를 먹는다면 야만인이다”는 포스터를 내걸었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Animal Farm, 1945)는 이 시기의 대기근을 배경으로 했다.
대기근을 거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의 식량수탈에 대한 반감이 높아갔다. 우크라이나인들은 굶주림이 소련 당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저질러진 학살이라고 믿었고, 대러시아에 대한 저항의식이 고조되었다.
1922~1954년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영토 확장 /위키피디아
1939년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개전 초기 소련은 독일과 비밀조약을 체결해 폴란드 서부를 점령했다. 이때 빼앗은 땅이 우크라이나로 편입되었는데, 볼히니아(Volhynia) 지역이다.
2년후인 1941년 6월 아돌프 히틀러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약속한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했다. 독일군은 우크라이나 서부지역을 점령했다. 독일 점령기에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군을 해방자로 받아들여 우크라이나를 소련에서 독립하자는 부류와 나치에 저항하자는 부류로 나뉘었다.
민족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 저항군(Ukrainian Insurgent Army)을 결성하고, 정치조직으로 우크라이나 민족기구(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를 조직했다. 이들은 처음에 독일군을 해방자로 맞았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나치의 반유대주의에 공감해 유대인 홀로코스트에도 가담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유대인 150만명이 희생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극우적 경향을 띠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새로 영토로 편입한 볼히니아, 갈리치아에 사는 폴란드인들을 제거해 나갔다. 두 민족의 오랜 갈등을 인종청소로 복수하려 한 것이다. 1943~1945년 사이에 서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저항군이 저지른 폴란드인 학살 규모는 5만~1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집단 학살은 인종증오에서 비롯되었다. 이 극단적 증오범죄는 폴란드 지배시절에 억압받던 서우크라이나 출신의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1942년 10월에 독일에도 등을 돌렸다. 이는 나치 독일이 그들을 점령지의 하수인으로 대우한데 대한 불쾌감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진데 따른 대응책으로 풀이된다. 우크라이나 저항군은 서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 진지를 공격했다. 이들은 히틀러도, 스탈린도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소련이 승리한 후 우크라이나가 다시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정치적 메시지였다.
2차 대전중 독일 나치가 동부전선에서 점령한 지역 /위키피디아
독일군이 퇴각하면서 우크라이나 저항군은 소련군과 맞섰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니키타 흐루쇼프가 진압을 지휘했다. 소련의 자료에 따르면 1944년말에서 1945년초까지 우크라이나 저항군에서 8만9,000명이 사살되고 9만1,0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3만9,000명이 투항했다. 소련 비밀경찰 엔카베데(NKVD)도 1개 사단, 8개 여단이 우크라이나 진압에 투입되었으며, 소련군 측에서 1만2,000명 사망, 6,000명 부상, 2,600명 실종의 피해를 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크라이나 민족저항군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실감케 한다.
상황이 바뀌어 미국과 영국은 공산진영의 반군들을 지원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세력은 영국 비밀경찰과 미국 CIA로부터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으며 반공운동을 전개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저항운동은 진압되었으나 폴란드 변경 산악지대엔 그들이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미국 CIA의 비밀자료에 따르면, 2치 대전후 공산유럽에서 우크라이나 게릴라에 의해 제거된 소련 비밀경찰과 공산당원이 3만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소련 자료에도 1944~1953년 사이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에 의해 죽은 소련인의 숫자는 3만676명으로 집계되었다. 1944년 2월부터 1946년 1월까지 소련군은 우크라이나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4만회의 작전을 펼쳤으며, 이 기간에 10만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사망하고 저항단체 비밀조직원 8,300명, 시위자 1만6,000명이 체포되었다고 소비에트 기록은 전한다.
반군세력은 우크라이나에서 쫓겨나 국경지대인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들어가 파르티산 활동을 벌이며 소련과 그 위성국에 투쟁을 벌였다. 특히 폴란드 남동부 우크라이나인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에서 게릴라활동을 계속했다.
폴란드 군에 체포된 우크라이나 반군(1947) /위키피디아
폴란드는 동남부 산악지대에 우크라이나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1947년 4월부터 7월까지 그 일대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에게 이주명령을 내렸다. 소련은 2차 대전에 승리한후 폴란드에서 뺏은 영토를 돌려주지 않고, 대신에 독일 동부지역을 떼서 폴란드에게 주었다. 폴란드는 옛독일 영토에서 독일인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동남부의 우크라이나인으로 메웠다. 이 조치를 비스툴라 작전(Operation Vistula)이라 했다. 이때 이주한 우크라이나인은 14만명에 이른다. 폴란드 남동부에서 우크라이나인들에 소거되고 폴란드와 소련 군대의 진압작전이 가세하면서 1950년대초에 우크라이나 반군은 폴란드에서도 제거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우크라이나는 유엔에 가입했다. 우크라이나가 국제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유엔에서 미-소의 역학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소련은 3개의 회원권을 확보하고,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가입을 얻어낸 것이다.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고 우크라이나 출신의 니키타 후르쇼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되었다. 1954년 소련 최고회의는 러시아연방공화국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공화국으로 이양한다고 결의했다. 명분은 1654년 우크라이나 코사크 지도자 보흐단 흐멜니츠가 러시아 차르에게 복종하기로 약속한 페레야슬라브 회의 300주년을 기념한다는 것이었다. 소련 공산당 기록에는 경제적, 지리적, 행정적 편의에 의해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로 양도한다고 되어 있다. 흐루쇼프가 자신의 고향에 선물을 하나 준 것이다.
크림반도 이관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형제국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조치였다. 소련 치하에서 크림 반도가 어느 공화국의 관할인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소련인들은 설마 연방이 15개 공화국으로 독립할지를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Ukrai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Wikipedia, Soviet famine of 1932–1933
Wikipedia, Ukrainian Insurgent Army
Wikipedia, Massacres of Poles in Volhynia and Eastern Galicia
Wikipedia, 1954 transfer of Crimea
Wikipedia, Operation Vistu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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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54
우크라이나 역사⑤…오렌지 혁명과 그 한계
독립후 혼란의 30년…동과 서의 지역대결 심화, 친러-친유럽파의 갈등
1990년 미하일 고르바쵸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개혁·개방 바람이 우크라이나에도 밀려왔다. 그해 1월 21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서부도시 르비브 사이 482km에 30만명이 서로 손을 잡고 인간사슬을 형성했다. 그날은 1919년에 최초의 독립국을 세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통합을 선언한지 71년째 되는 날이다. 그들은 소비에트기를 버리고 청색과 황색으로 된 우크라이나 국기를 흔들었다.
우크라이나에선 1989년에 인민운동(People's Movement)이라는 반공산당 정치단체가 조직되어 독립을 요구했다. 이 단체가 인간사슬 시위를 주도하고, 70여년전 인민정부의 독립을 소환한 것이다. 이어 우크라이나 그리스정교가 첫 주교회의를 열어 모스크바의 러시아정교에서 이탈해 독자적인 종파를 형성한다고 선언했다.
우크라이나 독립의 진원지는 의회였다. 고르바쵸프의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으로 다당제가 도입되고 1990년 3월 4일 총선에서 공산당 독점이 종식되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주의 정파가 비록 소수였지만 26%의 의석을 차지했다. 공산당 의원들도 민주화, 민족 독립의 대세에 추수했고, 그해 7월 우크라이나 의회는 주권국임을 선언했다.
의회 의장인 레오니드 크라프추크(Leonid Kravchuk)의 변신은 빨랐다. 공산당 정치국원이자 선전부장 출신인 그는 1991년 8월 소련 공산당의 쿠데타가 실패하자 잽싸게 공산당을 탈당하고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민족적 열망에 올라타고 독립국 초대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의회는 8월 24일 독립에 관한 법을 통과시키고,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와 대통령 선거를 동시에 실시한다고 결의했다. 1991년 12월 1월 실시된 투표에서 우크라이나인의 92.26%의 압도적 다수가 독립를 지지했다. 크림 자치주에서도 54%, 동부 루한스크, 도네츠크, 하르키프에서도 80% 이상의 지지를 얻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크라프추크는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고르바초프가 연방 해체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와중에 우크라이나에서 구멍이 뚫리는 바람에 연방은 와르르 무너지기 직전의 위기에 직면했다.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이 고르바초프의 노력에 쐐기를 박았다. 옐친은 12월 8일 우크라이나의 크라프추크 대통령, 벨라루스의 스타니슬라프 슈시케비치(Stanislav Shushkevich) 소비에트 의장을 만나 연방에서 탈퇴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소련은 해체되었고, 우크라이나는 다른 14개 공화국과 마찬자지로 독립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 우크라이나 크라프추크 대통령, 벨라루스의 슈시케비치 의장이 1991년 12월 8일 연방 탈퇴에 서명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우크라이나는 독립한 다른 공화국들처럼 공산체제를 종식시키고 자본주의를 도입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시장경제 운영에 미숙했고, 연방 해체로 원재료와 상품의 수급체인이 무너졌다. 러시아를 비롯해 구소련 소속 모든 공화국들이 독립 이후 경제 후퇴를 경험했지만, 그중에도 우크라이나가 가장 심각했다. 독립 직후 우크라이나 경제는 연 10% 이상 위축되었고, 1994년엔 20% 축소되었다.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움(지불유예)의 먹구름은 우크라이나 경제에도 밀려왔다. 여전히 공공기관을 차지한 옛공산주의자들은 관료적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부패가 만연했다. 돈이면 뭐든 할수 있다는 생각은 사회를 오염시켰고, 미숙한 민주주의는 정치인들을 타락시켰다.
지역 갈등도 심화되었다. 공산 치하에선 이념이 지역적 이질감을 덮어버렸지만 독립과 민주주의, 시장경제가 동시에 찾아오면서 서로의 차이점이 증오로 표출되었다.
우크라이나는 나라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드네프르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눠진다. 동쪽은 300여년간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 러시아화가 많이 진척된 반면에 서부는 오스트리아, 폴란드,의 지배와 독일의 침공을 받으며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또 동부 사람들은 친러시아 경향인데 비해 서우크라이나인들은 유럽을 선호한다.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의 시위대. /위키피디아
2004년 대통령 선거는 동부와 서부의 지역대결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동부를 대표해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총리가 출마했고, 서부를 대표해 빅토르 유셴코(Viktor Yushchenko)가 이에 맞섰다. 야누코비치는 여당 후보로 친러시아 성향을 드러냈고, 야당후보 유셴코는 부정부패 척결과 대대적인 개혁을 약속했다. 야누코비치 지지자들은 파란색, 유셴코 지지자들은 오렌지색 깃발을 들고 각자의 후보를 응원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결선투표에서 49.5% 대 46.6%로 야누코비치가 승리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선거감시단의 보고, 언론의 제보 등이 쏟아지면서 서부 우크라이나인을 중심으로 선거부정 시위를 벌였다. 시위자들은 야당을 상징하는 오렌지색 옷을 입거나 오렌지색 목도리를 걸쳤고 오렌지색 깃발을 휘두르며 재선거를 요구했다. 결국 대법원이 유례 없는 재선거를 치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해 12월 26일 실시된 재선거에서 유셴코는 52%를 얻어 44.2%를 얻은 야누코비치를 8%P의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세계의 언론들은 오렌지색 물결의 시위대에 주목해 ‘오렌지 혁명’이란 용어를 만들어 냈다.
2009년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과 율리아 티모셴코 총리 /이키피디아
오렌지 혁명은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의 시민혁명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우크라이나의 지역성에 의해 빛을 바랬다. 부정선거 혐의를 받은 야누코비치의 정치생명은 끝나지 않고 동부지역에서의 지지기반은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유센코 대통령 임기 5년 동안에 우크라이나는 유럽연합(EU)과의 관계개선을 적극 추진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골이 깊이 패이기 시작했다.
유셴코는 집권 초기에 정치적 동지이자 인기 있는 여성 정치인 율리아 티모셴코(Yulia Tymoshenko)를 총리로 임명했지만, 동지였던 두 정치인은 곧바로 충돌해 적이 되었고, 유셴코는 티모셴코를 총리에서 해임했다.
2006년 3월 총선에서 야누코비치가 이끄는 지역당이 최대의석을 차지해 총리 자리를 넘보았다. 유셴코는 정국안정을 위해 오렌지 혁명의 원흉이었던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유셴코와 야누코비치의 동거는 오래가지 못하고 2007년 4월 유셴코는 의회를 해산했다. 새로 치러진 총선에서도 야누코비치의 지역당이 제1당이 되었으나, 티모셴코가 연정 구성에 성공하며 총리 자리를 다시 꿰어찼다.
극심한 정치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2010년 대선이 치러졌다. 1차 투표에서 현직 대통령 유셴코는 5.45%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고, 야누코비치와 티모셴코가 결선투표로 가게 되었다. 결선투표에서 야누코비치는 49%를 얻어 45.5%를 얻은 티모셴코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야누코비치는 집권하자 2011년 정적인 티모셴코를 권력남용 혐의로 기소했고, 그녀는 7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정치보복의 악순환이 지속되는 가운데, 동과 서의 지역간 분열도 심화되었다.
오렌지 혁명의 주인공들은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타도의 대상이 된 세력이 권력을 잡은 것이다. 혁명의 반동은 새로운 혁명의 전조가 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History of Ukraine
Wikipedia, Orange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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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60
우크라이나 역사⑥…유로마이단과 크림 사태
야누코비치의 EU가입 서명 거부로 유혈사태 촉발…러시아, 크림 합병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다. 러시아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유럽연합(EU)에도 가입해 양쪽에서 꿀물을 빨아들일 생각을 했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2010~2014년 사이 우크라이나 경제는 유럽 재정위기의 질곡에서 벗어나 성장세를 회복하고 있었다. 러시아 일변도의 경제교류를 다변화해 유럽과의 교역 비중을 높이고 유럽자본율 적극 유치할 생각을 했다.
야누코비치는 2012년부터 EU 가입협상을 벌였다. EU는 민주화 성숙도가 미숙하고 시장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우크라이나에 규제완화 조치를 요구했다. EU는 또 야누코비치의 정적인 율리아 티모셴코의 석방도 요구했다. 야누코비치는 마뜩치 않았지만 국내 여론, 특히 서부우크라이나에 기반을 둔 야당의 주장을 수용해 법률적 개혁을 추진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방해자로 나타났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형제국으로 생각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해 관세도 낮춰주고 천연가스를 유럽보다 싸게 팔았다. 러시아는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의 옛 소련 소속 국가들을 묶어 EU에 대항하는 유라시아 꽌세동맹을 추진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가 EU에도 가입하고 유라시아 경제동맹에도 가입하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런데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는 옛러시아제국, 구소련의 영광을 되찾겠다고 별렀고, EU와 동진을 저지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막으려 별반 조치를 다했다.
2013년 8월 14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하는 모든 상품에 대해 통관을 중단했다. 이는 EU 가입절차가 진행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우크라이나 정치인에게 확인시켜준 메시지였다. 그후 통관을 풀렸지만 러시아는 그동안 우크라이나에 베풀던 관세혜택을 줄여버렸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최대교역국이었다. 고율의 관세가 부과되는 바람에 그해 우크라이나 수출은 전년대비 10%(10개월간 14억 달러) 급감했다. 산업생산도 5%정도 가라앉았다.
야누코비치는 러시아어를 하는 동부지역의 지지로 대통령이 된 정치인이었다. 러시아의 경제 제재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과정에도 EU 가입 절차는 진행되었고, 2013년 9월 25일 집권당 솧속인 볼로디미르 리바크 의회의장은 EU가 요구하는 모둔 규제개혁 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소련 해체후 우크라이나 성장률 추이 /위키피디아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흔들렸다. EU에 가입하면 러시아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중도에 가입절차를 중단하자니 서부우크라이나의 지지를 얻고 있는 야당의 반발이 예상되었다.
EU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자기의 진영으로 끌어 당기기 위해 경쟁적으로 자금 지원을 약속했다. EU는 차관과 원조 형태로 200억 유로(270억 달러)를 지원한다고 했고, 러시아는 150억 달러를 지원한다고 했다. 지원 규모에서 유럽이 더 많지만 조건은 러시아쪽이 후했다. 유럽은 까탈스런 이행조건을 내세운데 비해 러시아는 그런 조건을 제시해지 않았다. 게다가 러시아는 당시 1,000큐빅미터당 400달러 하던 천연가스를 3분의2가격인 268 달러에 공급하겠다고 제의했다.
부채는 언젠가 갚아야 하는 것인만큼 러시아의 조건이 유리했다. 게다가 EU 가입은 지금 유예하더라도 언젠가 기회가 오면 다시 가입해도 된다. 야누코비치의 판단이 틀렸다고 할수 없다.
대통령은 결심을 질질 끌었다. 하지만 11월 28~29일 리투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열리는 .EU정상회의까지는 결정해야 했다. 11월 29일에는 우크라이나의 가입 세리머니가 예정되어 있었다.
11월 들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EU 가입 서명에 우물쭈물하는 것이 눈에 띠었다.
2014년 키예프 독립광장의 유로마이단 시위 /위키피디아
2013년 11월 21일 2,000명의 시위자들이 수도 키예프 ‘독립광장’(Maidan Nezalezhnosti)에서 EU가입을 요구하며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야당 인사 누군가가 그 시위를 ‘유로마이단’(Euromaidan)이라고 부르며 트윗했다. 우크라이나어로 광장을 ‘마이단’이라 하고, 유럽 가입을 요구한다고 해서 지어진 신조어였다. 이후 시위를 유로마이단 시위라 불렸다. 시위대는 하루 5만에서 20만명으로 불어갔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11월 29일이 지나도록 EU 가입에 서명하지 않았다.
당시 우크라이나 여론조사에서 EU 가입을 희망하는 여론이 45~50%였고, EU 가입을 반대하는 여론이 42~50%였다. 동부와 서부의 여론이 극명하게 갈렸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반대자들을 잘 설득하고 야당과 시위자들이 합리적으로 의견을 제기했더라면 폭력사태와 정권교체, 러시아군대의 개입이라는 극단적 상황은 피할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측이 강경하게 대치했다. 누가 먼저 폭력을 썼는지가 중요치 않다. 정교회가 나서서 자제를 요청했지만 폭력의 양상은 격화되었다. 야누코비치가 장악한 의회는 시위진압법을 만들어 탄압을 정당화하자 시위대는 시위법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2014년초 유로마이단 장악지역(갈색)과 탈환시도지(회색) /위키피디아
해를 넘기며 시위는 내전 양상으로 변했다. 시위대는 방패와 투석기, 철봉을 휘둘렀고, 진압경찰도 발포했다. 2월 18일 키예프 시내에 2만명의 시위대는 의회로 행진했다. 경찰이 시위대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발포했다. 양측이 서로에게 폭력을 사용하며 하룻동안에 82명이 사망하고 1,100명이 부상당했다. 경찰 사망자도 13명이나 되었다. 이날을 계기로 유로마이단 시위대는 각 지방의 정부청사를 장악하며 권력 접수에 나섰다.
2월 21일 독일, 프랑스, 폴란드가 중재에 나서 야누코비치 정부와 야당 사이에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양측은 각 정당이 참여하는 거국내각을 구성하고 연내에 조기 대선을 치르기로 했다. 이 합의를 믿지 못하는 과격파들이 있었다. 그들은 합의가 야누코비치가 시간을 벌려는 수법으로 받아들인 타협안으로 파악하고 투쟁을 이어가기로 했다.
2월 22일 시위대는 대통령궁을 점거했다. 의회는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탄핵과 야당 대선후보였던 율리아 티모센코의 석방 안건을 올려 의결했다. 결의안은 재적의원 450명 가운데 328명이 참석,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는데, 일부는 불참함으로써 의사를 표시했고, 일부 여당의원은 사위대에 동조했다. 야누코비치는 동부 국경지역으로 도주해 러시아로 망명했다.
5월 2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 페트로 모로셴코 후보가 54.7%를 얻어 결선투표 없이 당선이 확정되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 /위키피디아
우크라이나 상황이 악화되고 있을 때 러시아는 10만명의 병력을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그해 2월 소치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바람에 러시아는 개입을 자제하다가 올림픽이 끝나자 바로 크림반도를 접수했다.
크림반도는 원래 러시아 영토였으나, 1954년 우크라이나 출신 니키타 흐루쇼프가 연방공산당 서기장이 되면서 우크라이나로 떼어준 것이다. 명분은 우크라이나 코사크 추장이 러시아 차르에 복종한 페레야슬라브 회의 300주년을 기념한다는 것이었다.
크림반도는 러시아인들이 절반이상 살고 있었고, 우크라이나 내에서 자치공화국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2014년 2월 야누코비치가 축출되고 유로마이단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자 러시아는 크림반도 내 친러파들을 부추겼다. 이 기회에 우크라이나에서 독립해 러시아에 붙으라는 것이다.
올림픽은 2월 23일 끝났다. 2월 27일 러시아 특수부대가 크림자치공화국의 의회와 정부청사를 접수하고 의회를 소집했다. 크림 의회는 아나톨리 모히리오프 총리를 해임하고 세르게이 악쇼노프(Sergey Aksyonov)라는 의외의 인물을 총리로 당선시켰다. 그는 지방의회 100석 중 3석만 보유한 소수정당을 이끌었는데, 우크라이나에서 유로마이단 사태가 확산되자 크림반도에 친러 자경단을 조직하는 등 친러 강경파 인물이었다.
3월 1일, 약쇼노프는 러시아에 군대 지원을 요청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기다렸다는 듯 그날로 2,000명의 무장병력을 크림반도에 투입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러시아에 강력한 경고를 던졌으나, 말 뿐이었다.
그후 사태는 일사천리로 전개되었다. 3월 6일 크림공화국 의회는 3월 16일에 러시아와의 독립여부를 주민투표를 결정했다. 3월 11일 크림자치공화국 의회와 수도인 세바스토로폴 의회는 동시에 자치공화국의 독립을 결의했다. 주민투표에서 투표자의 96.77%가 독립을 의결했다. 3월 18일 크림자치공화국은 크림공화국이라는 독립국이 되었다고 선포했다.
3월 20일과 21일 러시아 하원과 상원은 크림 공화국과의 병합 조약을 각각 비준했다. 3월 26일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병합했다. 한달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크림반도 영유권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로 변경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Economy of Ukraine
Wikipedia, Revolution of Dignity
Wikipedia, Annexation of Crimea by the Russian Fed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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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24
우크라이나의 핀란드화, 바람직한가
독립 유지 위해 소련에 종속…우크라이나 국민이 선택할 몫
우크라이나의 핀란드화가 국제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이 방안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오가며 분쟁을 중재하고 있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7일 우크라이나의 핀란드화 가능성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고려되는 선택 중 하나"라고 말하면서 수면 위에 떠올랐다. 그런데 다음날, 마크롱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만나서는 그런 얘기를 부인했다. 우크라이나의 반발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핀란드화(Finlandization)란 용어는 1960년내와 1970년대에 독일의 정치인들이 외교정책 방향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경멸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시 친미적인 프란츠 요제프 스타라우스 기독사회당 대표가 사민당의 동방정책을 핀란드화라고 조롱하듯 표현했다. 핀란드가 취한 동방카드(East Card) 정책이 소련에 종속된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도 유럽과 일본이 소련에 경도되는 것을 우려했는데, 이를 핀란드화란 표현을 썼다.
핀란드인들은 서방국가에서 거론 핀란드화란 용어를 약소국이 살아나가기 위한 현실적 대안이라고 받아들인다. 소련의 팽창주의가 우려되는 시기에 약소국인 핀란드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친소적 정책을 어쩔수 없이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강대국 주변에 있는 약소국의 필연적 선택이다. 1차와 2차 대전 시기에 덴마크와 스위스가 독일에 편향적인 입장을 취하며 독립을 유지한 것도 비슷한 논리다. 태국이 18세기 중엽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2차 대전 때에 일본에 버마 공격로를 열어준 것도 생존의 논리였다.
핀란드의 위치 /위키피디아
핀란드화는 그 나라가 역사의 경험에서 터득한 결과였다.
핀란드인들은 오랫동안 스웨덴 영토에 속해 있다가 19세기초에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핀란드 대공국은 러시아와 별도의 국가였지만 군주가 동일한 형태로 러시아에 종속되었다. 러시아 지배하에서 핀란드 민족주의가 고양되었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자, 핀란드는 독립을 선언했다. 러시아의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도 핀란드를 제압할 여력이 없어 독립을 승인했다.
독립후 핀란드에선 적백 내전이 벌어졌는데, 백군은 독일의 지원을 받아 승리했다. 1939년 11월에 소련의 스탈린은 군대를 동원해 핀란드를 침공, 이른바 겨울전쟁을 벌였으나, 핀란드는 영토의 일부를 떼주고 소련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2차 대전이 확대되어 독-소전쟁이 벌어지자, 핀란드는 독일 편에 서서 잃어버렸던 영토를 되찾았으나,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연합국측으로 돌아섰고, 수복했던 땅도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소련에 돌려주었다.
지금 논란이 되는 핀란드화는 2차 대전 이후의 상황이다. 동서 냉전이 격화하면서 핀란드는 이웃 소련의 침공 가능성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1948년 소련과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에 의하면 핀란드는 독일과 그 동맹국의 공격에 저항할 의무가 있었고, 필요하다면 소련의 힘을 빌릴 수 있도록 했다. 또 이 협정에 의해서 핀란드는 중립 국가가 되었다. 이 때문에 핀란드는 미국의 마셜플랜에 참여하지 않았고, 소련의 대외 정책에 대해서도 중립을 취했다. NATO는 물론 바르샤바 조약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붕괴된 이후 핀란드는 서방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1994년 NATO와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고, 1995년에 EU에 가입하고 유로를 통화로 사용하고 있다. 친서방 정책으로 돌아선 것이다.
우크라이나도 핀란드와 비슷한 역사의 궤적을 밟았다. 우크라이나도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에 백색 세력에 의해 독립정권이 들어섰으나 볼셰비키주의자에 의해 장악되어 소련 연방에 편입되었다. 그후 우크라이나는 1991년 소련 해체 당시에 압도적인 표결로 독립을 선언하고 친서방정책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핀란드의 경우와 다른 점은 러시아와 같은 슬라브족이란 사실이다. 러시아가 벨라루스와 함께 슬라브족의 배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2014년 크리미아 반도 사건이 발발했을 때 헨리 키신저, 즈비그뉴 브르제진스키 등 미국의 내로라는 외교전문가들이 우크라이나의 핀란드화를 제안했다.
정작 핀란드인들은 우크라이나에 핀란드화를 권하지 않고 있다. 핀란드인들은 소련 시절에 자유를 제한한 경험을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핀란드화 정책이 추구되던 시절에 핀란드 도서관에 반소련적 서적이 퇴출당했고, 언론에서 반소적 표현이 제거되었다. 법적으로는 언론·출판의 자유가 있었지만, 보이지 않게 정부가 소련에 반하는 사회적 흐름을 금지시켰고, 사회 지도층들이 그런 분위기를 자제했기 때문이다.
핀란드화를 채택할른지 여부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선택해야 할 몫이지, 프랑스 대통령이 결정할 일은 아니다. 독립을 위해 스스로 자유를 제한당할 것인지 여부는 자결권에 해당하는 일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Finlandization
NYT, Finns Don’t Wish ‘Finlandization’ on Ukraine (or Anyone)
출처: https://www.asiatoday.co.kr/view.php?key=20141021010012994
출처:https://www.nocutnews.co.kr/news/1210149
[러시아는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왜 멀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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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선 주권연구소 연구원
기사입력 2021-09-24
미국은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한 직후 우크라이나와의 관계 확대를 통해 러시아를 공격해보려고 시도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2021년 9월 1일 백악관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며 러시아에 대한 공동전선을 확인했다. 미국의 이러한 행보는 동유럽에서 러시아와 가장 불편한 관계에 놓인 우크라이나를 지렛대로 삼아 러시아 공격의 빌미를 찾는 전략적 행보라는 해석을 낳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왜 미국의 대(對)러시아 공격에 동참하며 러시아와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는 걸까?
이번 글에서는 앞선 질문을 중점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를 살펴본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지역에 우크라이나인과 다양한 민족이 살아오면서 많은 역사를 만들어왔지만, 이 글에서는 1917년 이후부터 살펴본다.
제1차 세계 대전 도중에 러시아 제국은 1917년 2월 혁명으로 멸망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지역에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비롯한 많은 공화국이 생겨났지만, 대다수는 1920년 무렵 해체되었고 곧바로 폴란드와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었다.
소련으로 편입된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세워졌고 1922년 12월 30일 제1차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에 소련의 6개 공화국 중 하나로 참여했다.
소련은 1922년 건국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호라즘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이후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이후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후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연합으로 이뤄졌다.
폴란드가 점령하던 우크라이나 일부 지역은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점령하면서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패한 후 해당 우크라이나 지역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합됐다.
그런데 1930년대 우크라이나 지역의 가뭄과 대기근으로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소련 정부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많은 노동자가 소련의 공업화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으로 이동하기도 했고 이들은 현재 우크라이나에서도 우크라이나를 공업화한 경제 역군으로 여겨진다.
소련은 러시아 제국과 카자크 수장국(1649년~1764년 우크라이나 지역에 존재했던 국가)의 통일을 합의한 페레야슬라브 협정 300주년인 1954년에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시켰다.
소련공산당 서기장들도 우크라이나와 연관이 있었다. 스탈린 이후 집권한 흐루쇼프는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우크라이나에서 자라고 활동했다. 브레즈네프는 우크라이나의 드네프로페트롭스크에서 태어났고 시당 위원장을 지냈다. 그 뒤를 이은 체르넨코는 시베리아에서 태어났지만 우크라이나인이었고,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와 그의 부인은 우크라이나 혼혈이었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벨라루스와 독립국가연합을 만들었다. 독립국가연합은 소련 해체로 독립한 국가들의 국제기구로, 경제 정책의 상호조정·단일 화폐의 사용·자유로운 경제 교류의 보장 등 단일경제권 형성과 집단 안전보장 체제 구축을 지향하고 있다. 1991년 이후 독립국가연합에 몰도바·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그루지야(현재 조지아)가 추가로 참여했지만, 현재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는 탈퇴했다.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는 독립 후 전국의 행정단위를 24개 주와 두 개의 도시(키예프·세바스토폴), 크림 자치공화국으로 구성했다. 또한 중앙집권제를 채택해 대통령이 주지사와 크림 공화국 총리를 임명했다.
우크라이나의 인구는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소련 붕괴 직전인 1989년에는 총인구 5,170만 명 중에서 우크라이나인이 3,740만 명(72%), 러시아인 1,140만 명(22%)이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독립과 이른바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많은 러시아인이 러시아로 이주해 2021년 기준 712만여 명(약 17%)으로 감소했고 현재까지 크림·돈바스 등 동남부지역에 밀집 거주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는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 이외에도 벨라루스인·헝가리인·루신인·유대계·그리스인·우룸인 등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다. 이러한 민족들과 공통의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 연방주의 정치체제를 마련하는 것이 우크라이나 국가건설의 주요과제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분리주의를 우려하면서 연방주의 도입에 반대했고 끝내 무산시켰다.
우크라이나는 독립 이후 외교적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래서 러시아의 기대와 달리 독립국가연합 간 경제통합에 소극적이었고, 1990년대 후반부터 크랍추크·쿠치마·유셴코로 정권을 이어가며 유럽연합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고자 했다. 우크라이나는 1994년 6월 독립국가연합 회원국 가운데 최초로 유럽연합과 동반자협력협정을 체결했고, 1997년 9월 우크라이나-유럽연합 정상회담을 개최하면서 유럽연합 가입을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
유셴코 대통령은 2005년부터 유럽연합의 유럽근린정책에 입각해 행동계획을 마련했고 유럽연합과 협력·협정 체결을 추진했다. 이 협정이 체결되면 우크라이나는 유럽연합과 단순히 자유무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국가연합에서 벗어나 약 10만 페이지에 달하는 유럽연합 규정을 모두 수용하는 유럽연합 국가가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크라이나와 독립국가연합 간 자유무역협정에 배치되는 일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와 연관이 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은 소련이라는 과거에서 벗어나 동유럽의 한 국가로서 유럽연합과 나토 가입을 원한다. 이에 이들은 독립국가연합을 멀리하고 우크라이나인 다음으로 많은 러시아인을 경계하며 반러 정서를 만들어왔다.
우크라이나는 1996년의 제정헌법에서 다른 독립국가연합 국가들과는 달리 우크라이나어를 유일한 공식어로 지정했다. 이것은 모든 공문서와 표지판이 우크라이나어로 쓰인다는 것이다.
또한 2006년에는 유셴코 대통령이 의회에서 1930년대 대기근을 소련의 대학살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과 서방 언론들은 이를 근거로 소련을 또다시 헐뜯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야누코비치 총리를 포함한 동우크라이나 출신 의원들은 1930년대의 대기근을 우크라이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소련 전 국민이 함께 겪었던 뼈아픈 희생이었다고 반박했다.
이후 친러 성향의 야누코비치 정부가 들어서면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야누코비치 정부는 2012년 최소한 주민의 10%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는 해당 지역의 공식어로 인정하는 언어법을 공포했고, 27개 중 13개 지역에서 러시아어를 공식어로 인정했다. 당시 우크라이나 전 국민 중에서 러시아어 가능 인구는 무려 80%에 달했다. 2012년 발간된 신문의 60%, 잡지의 83%, 도서의 87%, TV 프로그램의 72%가 러시아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다언어 정책이 러시아 주민의 분리주의를 촉진할 것이라며 야누코비치 정부에 반발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크라이나 의회는 2013년 5월 25일 대통령 선거와 함께 연방주의에 관한 찬반 국민투표를 동시 시행하자는 제안을 거부했고 연방주의와 분리주의는 동의어로 받아들여졌다.
야누코비치 정부는 끝내 2013년 11월 유럽연합과의 협력·협정 서명을 보류하기로 했다. 이러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와 야누코비치 대통령 실각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른바 ‘우크라이나 사태’
우크라이나 사태란 ‘키예프의 마이단 시위’, ‘크림 공화국과 러시아의 합병’, ‘돈바스 독립 분쟁’이라는 3가지 사건을 총칭한다.
마이단 시위의 발단은 2013년 야누코비치 정부가 유럽연합과의 협력·협정 서명을 보류한 것 때문이었다. 이 시위는 협정 체결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주도로 일어났기 때문에 유로 마이단(광장) 시위라고도 불린다. 2013년 말 키예프 시내 독립광장에서 일어난 마이단 시위는 민족주의 성향의 자유당과 티모셴코가 이끄는 조국당의 지지를 받았다. 즉 마이단 시위는 2004년의 오렌지 혁명(2004년 11~12월에 유셴코의 지지자들이 진행한 일종의 정치적 시민저항)에 이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의 반정부 시위였다.
마이단 시위 이후, 2014년 초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사실상 실각하였고 친서방 세력이 우크라이나 임시정부의 구성원이 되었다. 러시아는 이를 강력히 비판하며 임시정부를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한 합법적이지 않은 정권’으로 규정했다.
러시아인이 다수 거주하는 크림과 돈바스 지역에선 반 마이단 시위가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에 대항해 크림합병과 돈바스 내전으로 이어졌다.
크림합병은 크림의회 주도로 분리 독립·러시아 편입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를 통해 이뤄졌다. 투표 결과 83%의 주민이 참여해 96.7%가 찬성했다. 주민투표 직후 러시아 국가두마는 합병을 승인했고, 크림은 우크라이나에서 독립해 러시아의 22번째 공화국이 되었다. 그리고 세바스토폴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어 러시아의 3번째 연방시가 되었다. 이는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크림합병이었다.
이에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캐나다, 독일, 리투아니아, 폴란드, 코스타리카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유엔총회에서 통과시켰다. 서방 국가들은 푸틴을 향해 비난을 일삼고 경제 제재를 가했다. 또한 미국은 그림자 침략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런 비난과 달리 러시아 국내외에선 합병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은 크림반도를 잘못 넘겨준 역사적 오류가 정정되었다고 말하였다. 슈미트 전 독일 총리는 합법적이진 않지만, 이해는 된다고 말했다. 클라우스 전 체코 대통령은 크림 공화국 주민들의 자발적인 요구로 이루어진 합병이라고 옹호했다. 즉 크림반도에서 사는 사람들이 선택한 결과가 러시아와 합병이었다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사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오랜 협상 끝에 1997년 흑해함대 분할에 합의했고 2년 후 우크라이나 의회의 비준을 통과했다. 세바스토폴 기지를 최초 20년간 임대했던 러시아는 2010년에 다시 25년을 추가 연장하는 대가로 가스관을 통해 공급되는 천연가스 가격을 우크라이나에 톤당 100달러 할인해주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이곳에 최대 25,000명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었다. 크림합병이 있었던 2014년 당시 12,500명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가 병력을 보낸 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가 개입했다고 반발한 것이다. 이에 2014년 2월 25일 레이니트 슬루츠키 러시아 하원 독립국가연합 문제 담당 위원회 위원장이 이끄는 의회 대표단이 크림 공화국 수도 심페로폴을 방문해 지방 정부·의회 관계자들을 만났다. 의회 대표단은 이 자리에서 “주민투표와 의회 결정 등을 통해 병합 요청이 들어올 시 이를 신속히 검토할 것”이라고 밝히며 크림 공화국 주민들의 의사를 존중했다.
크림합병은 돈바스의 러시아 주민을 고무해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의 선포로 이어졌다. 브리드러브 나토 사령관은 러시아가 노보러시아의 재건을 시도한다고 경고했다. 노보러시아란 1764년 이후 약 150년 동안 러시아 제국에 소속된 행정단위로서 트란스니스트리아(트란스니스트리아 몰도바 공화국)에서 돈바스까지의 흑해 연안을 가리킨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가 공식적으로 노보러시아 재건을 지지한 적은 없었다.
도네츠크 공화국과 루간스크 공화국은 2014년 5월 11일 650만 주민에게 독립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를 했다. 투표 결과 75%의 주민이 참여해 96%가 찬성했다.
앞서 올렉산드르 투르치노프 대통령 권한대행은 2014년 4월 7일 돈바스의 분리 독립 운동에 대해 대테러 작전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아르센 아바코프 내무부 장관은 2014년 4월 9일 돈바스의 분리 독립 움직임은 협상이나 무력 사용을 통해 48시간 안에 진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이 세워지면서 돈바스 지역에선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돈바스 반정부군 간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다 2014년 9월 5일 러시아·유럽안보협력기구의 중재로 두 공화국 대표와 우크라이나 대표가 민스크에서 만나 휴전을 합의했다. 이 합의로 내전은 약화되었지만 완전 종식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당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미국에 무기 지원을 요청했고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체첸화”를 목표로 소형 무기를 제공할 것을 고려했다.
돈바스 분쟁이 장기화하자 러시아·우크라이나·독일·프랑스 정상은 2019년 12월 9일 프랑스 대통령관저인 파리 엘리제궁에서 만나 ‘민스크 협정’의 실질적 이행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하고 합의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돈바스 지역 국경 통제권을 먼저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해 돈바스 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런 ‘우크라이나 사태’로 서구의 제재가 러시아에 가해졌다. 2008년부터 시작된 유럽연합과 러시아 간의 경제협력 대화가 중단되었고 소치에서 개최하기로 한 G8 회담이 취소되었다. 러시아 주요 인사의 해외자산 동결과 입국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러시아의 에너지 기업과 은행들이 제재의 주요목표가 되었다. 미국은 UN 총회에서 크림합병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4년 5월 28일 미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미국이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어 러시아를 고립시켰다고 말했다.
한편, 러시아는 미국의 제재 등으로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고 크림합병으로 우크라이나에 천연가스 가격을 할인해줄 이유가 사라졌다. 그래서 러시아는 가스 가격 인상을 우크라이나에 제안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이를 거부하고 돈을 제대로 내지 않으면서 러시아가 가스관 꼭지를 잠글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 여파로 러시아 가스의 유럽 수출이 차질을 빚어 유럽 전역에서 대규모 혼란이 일어났다. 유럽 국가들의 설득으로 재개는 되었지만 얼마 안 돼 결국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고 우크라이나는 2018년 5월 19일 독립국가연합 탈퇴를 선언했다.
우크라이나의 친서방·반러 행보
현재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다. 젤렌스키는 마이단 시위를 지지하고 돈바스 분쟁에서는 우크라이나 정부군을 지지했다. 그는 2018년 3월 텔레비전 방송 제작사인 크바르탈95 소속 인사들과 함께 ‘인민의 일꾼’이라는 정당을 창당하고 2019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친서방·반러 정책을 펼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최근 크림반도 등 우크라이나 접경에 러시아군의 집결 규모가 12만 명이 넘는다며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를 촉구해왔다.
이에 러시아는 자국 군부대 이동이 군사훈련 일환이라며 특정 국가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며 해당 병력의 원대 복귀를 명령했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부 장관은 우크라이나의 우려를 고려해 2021년 4월 22일 크림반도에서 훈련을 참관한 뒤 남부군관구·서부군관구의 군부대 비상 점검 훈련을 종료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훈련 참가 부대들에 4월 23일부터 상시 주둔지로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쇼이구 장관은 이날 크림 지역에서 나토의 군사·정찰 활동이 많이 증가했다며 나토 연합군의 ‘디펜더 유럽-2021’ 훈련 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외무부는 러시아 측의 발표가 나온 뒤 “상황을 감시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자국으로의 군사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며 나토 국가들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미국과 나토 동맹국들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와 크림 접경 지역으로 군부대를 증강 배치한 데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바이든 정부는 2021년 3월 1억2,500만 달러(약 1,500억 원)의 군사 지원을 젤렌스키 대통령과 협의했다.
그리고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오히려 2021년 6월 28일부터 7월 10일까지 유럽의 흑해에서 다국적 연합해상훈련 ‘시 브리즈21(Sea Breeze 21)’을 실시했다. 시 브리즈 훈련은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1997년부터 매년 실시하는 러시아 압박용 군사훈련이다. 이 훈련에 2017년 18개 나라가, 2020년 9개 나라가, 2021년 32개국이 참가했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2021년 9월 19일부터 10월 1일까지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서 미국을 포함한 15개 나토 국가들과 합동군사훈련 ‘래피드 트라이던트 2021’을 하고 있다. 이 훈련도 나토 주도로 매년 시행되어 이번에는 15개국(우크라이나·미국·불가리아·캐나다·조지아·독일·이탈리아·요르단·리투아니아·몰도바·파키스탄·폴란드·루마니아·터키·영국)에서 6,000명의 군인이 참가한다.
훈련 책임자인 블라디슬라프 클로취코프 준장은 이번 훈련이 우크라이나의 유럽 통합을 향한 중요한 단계라고 말했다. 그는 “8년 동안 러시아 침략을 저지해 온 우크라이나군의 독특한 전투 경험을 국제 동료들과 공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는 이러한 군사적 협력을 넘어 국제회의를 출범시켰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202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독립 30주년을 맞아 유럽연합 국가들을 중심으로 46개국 대표들(발트 3국·폴란드·조지아·미국·독일·영국·일본·호주·한국·중국 등)을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독립광장 행사로 초청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44국 대표들(한국·중국 불참)과 ‘크림 플랫폼(Crimea Platform)’이라는 국제회의를 출범시켰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크림반도를 되찾아올 때까지 이 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겠다”라고 선포했다. 이에 참석한 국가들도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을 위해 필요한 공동의 외교적 노력을 환영한다”라는 공동선언문을 채택했다.
이러한 우크라이나의 친서방·반러 행보는 2021년 9월 1일 백악관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이 만나면서 당분간 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회담 모두발언에서 “미국은 러시아의 침략에 직면해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위해 굳건히 헌신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은 우리의 전략적 파트너이자 주권과 영토 보전의 확고한 지지자”라고 화답했다.
또한 양국 정상은 공동성명을 통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전방위적 안보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양측은 전략적 방위 협력을 심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미국이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에 첨단 전략·감시 자산을 동원한 방위 협력을 약속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일각에서는 양국 간 방위 협력이 우크라이나가 희망하는 자국 내 미군 기지 설치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미국은 이날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던 기존 안보 지원에 더해 6,000만 달러(약 696억 원)에 이르는 안보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 수출입은행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초기 자금 30억 달러(약 3조4,824억 원)를 지원해 경제 재건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부 장관도 우크라이나를 도와 러시아를 비롯해 중국·북한·이란에 대한 대응에 집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러시아는 이러한 우크라이나의 행보에 대응해 비판과 제재 연장을 하고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2021년 8월 25일 크림병합을 주민투표 결과에 따른 합법 조치라며 “러시아는 크림 플랫폼을 우리에 대한 아주 비우호적 행사로 간주하며 러시아 지역인 크림에 대한 유사한 성명들을 절대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21년 9월 20일 제재 관련 대통령령에 서명하며 서방 주요국 식료품 수입금지를 골자로 한 제재를 2022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러시아는 2014년 3월 크림병합 이후 이어진 서방의 제재에 대응해 제재 국가 목록을 만들고 해당 국가로부터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2014년 8월 초 서방의 대러 제재에 대한 대응으로 먼저 유럽연합(유럽연합) 회원국과 미국·캐나다·호주·노르웨이 등의 농수산물 및 식료품 수입을 전면 금지하는 제재를 가했다. 그러다 2015년 8월부터는 알바니아·몬테네그로·아이슬란드·리히텐슈타인 등을 제재 국가 목록에 추가했고 2017년 1월에서야 우크라이나를 목록에 추가했다.
이처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서로 제재를 가하며 견제하고 있다. 이러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는 당분간 좋아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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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미제 패권의 종말을 알리는 축포가 울려 퍼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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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에너지는 못 건든다…미국, 제재에서 석유 제외
맹진규 기자
입력2022.02.24 11:36 수정2022.02.24 11:52
미국이 우크라이나 침공의 대가로 러시아에 대한 제재 수위를 높이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 석유는 제재 대상에서 제외할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이 23일(현지시간) 미국 국무부 고위 당국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미 고위 당국자는 "이제까지 미국은 러시아산 석유에는 제재를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라며 "유가가 더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를 시장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인플레이션 위험에 처해 있는 미국 입장에서 높은 유가는 큰 부담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러시아는 석유 및 가스 수출이 끊기는 최악의 경우에도 중국이라는 대안이 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전문가들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 반도 병합 이후 제재가 발생할 수록 러시아와 중국 간의 무역 관계가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러시아 상품의 최대 수입국이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 무역대표부(USTR)에서 일했던 해리 브로드먼 전 세계은행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 조치가 내려질 수록 중국과 러시아 간의 무역이 활발해질 수 있다"고 했다.
출처: https://news.v.daum.net/v/20220225180724758
세계 4위 군사강국 우크라, 동네북 전락..어쩌다 이지경까지
민병권 기자
입력 2022. 02. 25. 18:07수정 2022. 02. 25. 18:55
◇재정난으로 자멸한 군사력=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최고의회는 우크라이나군 창설을 결의했다. 우크라이나 영토 내의 모든 소련군을 우크라이나 정부의 통제하에 두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우크라이나 내의 군 규모는 무려 78만 명이나 됐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이런 대군을 유지할 만한 경제력을 갖추지 못해 군비를 급격히 축소했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병력은 대외적으로 약 25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에 크게 못 미친다. 미 의회조사국(CRS)은 올해 1월 26일 발간한 ‘초점:우크라이나군’ 보고서에서 “오늘날 우크라이나 군대는 약 14만 5000~15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울러 많은 무기들이 30년 이상 된 구식이라고 진단했다.
우리나라도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남의 일처럼 말할 처지가 못 된다. 우리 역시 국방 개혁을 외치지만 여전히 병역 자원 부족으로 인력을
완편하지 못한 부대가 적지 않다고 군 관계자들은 전하고 있다. 아울러 지속적인 신형 무기 개발·획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수의 장비와 물자는 수십 년 된 구형으로 이뤄져 있다.
◇‘징병제에서 모병제’로의 전환 실패=우크라이나는 원래 옛 소련식 징병제 및 예비군 동원제도를 운영했다. 그러나 2014년부터는 나토에 가입하기 위해 점진적으로 모병제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유급병의 비중을 늘려 상비 병력을 확충하고 종국적으로는 오는 2024년까지 징병제를 폐지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정책은 성공하지 못했다. 병사에 대한 처우가 형편없어서 직업으로서 군인이 선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영에 있는 (우크라이나군) 병사들은 맥도날드의 계산원과 같은 월급을 받는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로 인해 “65%의 군인들이 첫 번째 계약 후 떠난다”며 직업군인 확충을 통한 점진적 징병제 폐지의 실태를 전했다. 병역 자원 확보난을 한층 부추긴 것은 복무 기간 단축이었다. 2004년의 ‘오렌지 혁명’ 이후 집권한 새 정부는 나토의 권고에 따라 병사의 복무 기간을 기존 18개월에서 12개월로 줄였다.
국방 예산도 역주행했다. 우크라이나의 2021년도 국방 예산은 전년 대비 1억 2700만 흐리브냐(약 52억 원) 줄어든 1176억 흐리브냐(약 4조 7931억 원)로 편성됐다. 여전히 군 부대 현장에서는 탄약·물자 부족과 장비 노후화·불량 문제가 터져나오는 것으로 전해진다. 방위산업은 일부 거대 국영기업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어 국방 조달 관련 비리 의혹이 끊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