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림답부(明臨答夫, 67~179)는 고구려 7대 차대왕을 제거하고, 차대왕의 아우 백고를 신대왕으로 모신 인물이다. 그는 고구려 최초의 국상이었고, 뛰어난 지략으로 한나라 대군을 물리친 명장이기도 했다.
고구려 7대 차대왕의 정치
고구려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재위(53~146년)시절 한(漢)나라와 여러 번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은 왕의 동생인 수성(遂成)이었다. 당시 고구려에는 왕실인 계루부를 비롯해 관나부, 환나부, 소노부, 연나부 등 5개의 중요한 부족이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소노부, 관나부, 환나부가 수성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는 형이 너무 오래도록 왕위에 있자,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반란을 계획했다. 그러자 태조대왕이 동생의 야심이 큰 것을 알고 스스로 왕위를 물려주었다. 차대왕(次大王, 재위: 146~165년)이 된 수성은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우보(右輔: 고구려 초기의 최고 관직) 고복장(高福章)을 죽였고, 왕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조카이자 태조대왕의 아들인 막근과 막덕도 죽였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재위 시절 일식과 지진, 기상이변 등 특이한 자연현상이 거듭되면서 백성들의 삶이 나빠졌다고 하였다.
명림답부, 차대왕을 시해하다
165년 10월 연나부 출신 명림답부는 백성들을 고통을 보다 못하여 차대왕을 시해(弑害)했다. [삼국사기]는 그가 서기 179년에 113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하였으니, 차대왕을 시해했을 때의 나이는 무려 99세가 된다. 물론 이 내용을 그대로 믿기 어렵지만, 차대왕 시해 무렵의 그가 결코 젊은 나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차대왕의 재위 20년 동안 그가 신하로서 봉사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뒤늦게 폭군 차대왕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 때문에 왕을 시해했다는 점은 정변(政變)의 합리화를 위해 과장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18세기의 실학자이자 역사가인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이 점을 들어, 명림답부 자신에게 급박한 위기가 있었고, 권력 욕심에 흔들려 왕을 시해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차대왕이 시해를 당한 가장 큰 원인은 차대왕 시기에 고구려 5부 가운데 유독 권력에서 배제된 연나부의 불만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차대왕을 시해할 당시 명림답부의 관등은 겨우 조의(皁衣)에 불과했다. 각 부의 부족장들이 맡은 상가(相加), 패자(沛者) 등과는 신분상의 차이가 컸다. [삼국지(三國志)]에 따르면 고구려 10관등 가운데 겨우 9위에 불과한 것이 조의였다.
그럼에도 그가 차대왕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은,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호위부대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왕을 시해한 후 곧장 왕궁을 장악하고 권력을 움켜쥐었다. 조의에 불과한 그가 그토록 권력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소속된 연나부에서 적극 도왔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명림답부는 임금을 죽인 이후 벌어진 고구려의 정치적 혼란에서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왕이 죽었으니, 다음 왕을 선정하는 회의를 주도한 것은 당시 고구려의 최고 벼슬인 좌보(左補) 어지류(菸支留)와 여러 신하들이었다. 이들은 차대왕의 동생인 백고(伯固)를 왕으로 모시기로 결정했고, 백고가 곧 8대 신대왕(新大王, 재위: 165~179년)이 되었다.
국상이 된 명림답부
하지만 신대왕을 추대한 사건의 배후에는 명림답부가 있었다. 신대왕은 왕위에 오른 후, 명림답부에게 국상(國相: 고구려의 최고 관직)이란 관직을 주고, 패자의 관등을 주어 나라 안팎의 병마(兵馬: 군대) 관련 업무를 맡게 했다. 더불어 양맥(梁貊) 부락을 식읍(食邑: 국가에서 공신에게 지급한 지역)으로 주기도 했다. 특히 신설된 국상이란 관직은 이전까지 고구려 최고 관직인 좌보(左輔)와 우보(右輔)를 합친 것이었다. 이로써 명림답부는 왕에 버금가는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고구려의 왕실은 본래 소노부였으나, 계루부로 변화했다. 그렇다면 계루부 출신 차대왕을 연나부에서 제거한 만큼, 연나부 출신 명림답부가 직접 왕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명림답부는 연나부 내에서 지위가 낮았기 때문에, 연나부의 우두머리로서 고구려의 왕이 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는 신대왕에게 패자의 관등을 받음으로서 연나부 내에서 지위가 부족장 수준으로 올랐다. 명림답부는 정변(政變)을 일으켜 권력과 부(富) 모두를 얻었다. 그렇지만 그를 권력욕에 가득한 자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청야(淸野) 작전의 선구자
고구려가 정치적 혼란을 겪는 동안 후한(後漢, 25~220)에서 고구려를 위협해왔다. 고구려는 후한과 당장 맞설 상황이 아니었기에, 168년에 후한이 부산(富山: 중국 요령성 의무려산으로 추정됨)의 적(賊)을 토벌할 때 군사를 보내 돕기도 했다. 하지만 후한과의 평화관계는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서기 172년 후한은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신대왕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대응책을 강구했다. 나가서 맞서 싸우느냐, 아니면 방어에 전념하는 것이 좋으냐를 선택하기 위한 회의였다.
“후한의 병사들은 많은 수를 믿고 우리를 업신여기므로, 만일 우리가 나아가 싸우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를 비겁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시로 우리를 공격해올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도 좁으니 1명의 군사로도 요새에서 싸운다면 만 명의 군대도 당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후한의 군사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니 우리도 군사를 내어 막아야 합니다.”
많은 신하들은 고구려가 적과 맞서서 싸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명림답부는 다수의 의견과 다른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후한은 나라가 크고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 강한 군대를 이끌고 멀리 와서 싸우므로 그들의 힘을 쉽게 당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군사가 많으면 나아가 싸우고, 적으면 마땅히 지키는 것이 병가(兵家)의 상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후한의 군대는 천리 원정에 필요한 양식을 운반하게 되므로, 우리가 보급로를 끊으면 그들은 오래지 않아 식량이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을 높게 쌓아 막고, 들판을 비워서(淸野) 기다라면 그들은 얼마가지 않아서 굶주림에 지쳐서 철수하게 될 것이니, 그때 우리의 강한 군사로 나아가 싸우면 적들을 크게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명림답부가 말한 것은 청야(淸野: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과 건물 등 지상에 있는 것들을 없앰) 작전이다. 청야 작전을 구체적으로 실행한 인물로 612년 수나라 30만 대군을 살수대첩에서 물리친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말하지만, 을지문덕과 관련된 기록에 청야라는 말은 없다. 을지문덕보다 먼저 청야 작전을 실행한 인물이 바로 명림답부였다.
한나라 대군을 물리친 명장
청야 작전은 본래 유목민이 농경민의 대군과 대결할 때 주로 사용하는 병법이다. 투르크어로 '투란(turan)'이라 불리는 이 작전은 척후(斥候: 적의 형편과 지형을 탐색함) - 유인(誘引: 주의를 끌어 꾀어냄) - 매복(埋伏: 불시 공격을 위해 숨어 있음) - 기습(奇襲: 갑자기 들이쳐 공격함) 의 순서로 적과 대항한다. 먼저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우수한 기동력으로 바탕으로 적을 끌어들였다가, 숨어서 적이 지치기를 기다린 후, 적이 후퇴하거나 대열이 흩어질 때 공격하는 작전이다.
신대왕은 명림답부의 작전에 동의했다. 고구려는 후한의 대군과 맞서 싸우지 않고, 성에 들어가 철저하게 지키기를 거듭했다. 후한의 군사들은 장거리 원정으로 인해 피로감이 쌓여갔고, 차츰 식량마저 부족해져 사기가 떨어졌다. 결국 후한의 군대를 철군을 시작했다. 명림답부를 이때를 노렸다. 그는 자신이 직접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후한의 군대를 뒤쫓아 좌원(坐原)이란 곳에서 싸웠다. 이 전투에서 명림답부는 후한의 군대를 크게 물리쳐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할 정도였다.
단재 신채호는 이를 ‘좌원대첩’이라고 불렀지만, [삼국사기]를 제외한 다른 기록에는 전혀 언급이 없어, 적군을 크게 물리쳤다는 결과를 제외하곤 자세한 전투 상황은 알 수가 없다. 또한 고구려와 후한 관련 기록도 172년 이후 184년까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전투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기가 어렵다. 다만 명림답부가 청야 전술로 큰 승리를 거둠으로써 고구려를 지켜낸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고, 그의 청야 작전이 훗날 을지문덕의 작전 수행에 모델이 되었음을 분명하다고 하겠다.
연나부의 성장: 고구려의 정치구도를 바꾸다
신대왕은 명림답부가 후한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자 대단히 기뻐하며 그에게 좌원과 질산(質山)의 땅을 주고 다스리게 했다. 이로써 명림답부의 권력, 부와 명예는 더욱 높아졌고, 그의 출신 부족인 연나부의 힘도 커졌다. 신대왕은 장남인 남무를 연나부 출신 우소의 딸과 결혼시켰다. 남무가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179~197)이 된 이후, 10대 산상왕(山上王, 재위: 197~227), 11대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248), 12대 중천왕(中川王, 재위: 248~270), 13대 서천왕(西川王, 재위: 270~292) 역시 연나부 출신 왕비를 맞아들였다. 명림답부의 후손인 명림어수(明臨於漱, ?~254)는 동천왕 시절에 국상이 되었고, 명림홀도(明臨笏覩, ?~?)는 중천왕의 사위가 되었다.
명립답부가 권력을 쥔 이후로, 100년 이상 연나부는 거듭해서 왕비를 배출하여 왕실인 계루부에 버금가는 큰 세력을 갖게 되었다. 반면 차대왕을 지지했던 관나부와 환나부는 급격히 몰락해서 세력이 크게 약해졌다. 명림답부는 고구려의 정치구도를 크게 변화시킨 셈이었다.
충신으로 기록된 명림답부
그가 서기 179년 9월에 죽자, 신대왕은 그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 슬퍼하고, 7일 동안이나 신하들과의 조회를 중지하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 또한 그에게 최대한의 예를 다하여 질산 땅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고,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20가구를 두게 했다. 신대왕은 그에게 왕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준 셈이었다.
고구려 인물 가운데 임금을 시해한 자는 명림답부, 창조리, 연개소문 3명이 있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는 <열전〉에서 창조리와 연개소문은 하나의 열전에 묶었지만, 명림답부는 을파소, 김후직, 밀우, 유유, 석우로, 박제상, 귀산, 온달과 같은 열전에 실었다. 그것은 창조리와 연개소문에 대해서는 왕을 시해한 것에 평가에 초점을 둔 반면, 명림답부는 나라에 충성하고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인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명림답부. 그는 고구려 최초의 국상이자, 청야전술을 실전(實戰)에 옮긴 명장으로 기억될 인물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