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라이언 조셉 긱스 (Ryan Joseph Giggs)
생년월일 : 1973년 11월 29일
신장 : 180 cm
체중 : 68 kg
국적 : 웨일즈
출생지 : 카디프
포지션 : 포워드 or 왼쪽 윙
소속팀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국대 데뷔 : 1991년 10월 16일 웨일즈 vs 독일 (1 : 4, 패)
클럽 데뷔 : 1991년 3월 2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vs 에버튼 (0 : 2, 패)
▣ 통계로 본 라이언 긱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1990-91 시즌 : 2 경기 출장 / 1 골
- 1991-92 시즌 : 38 경기 출장 / 4 골
- 1992-93 시즌 : 41 경기 출장 / 9 골
- 1993-94 시즌 : 38 경기 출장 / 12 골
- 1994-95 시즌 : 29 경기 출장 / 1 골
- 1995-96 시즌 : 33 경기 출장 / 11 골
- 1996-97 시즌 : 26 경기 출장 / 3 골
- 1997-98 시즌 : 29 경기 출장 / 8 골
- 1998-99 시즌 : 24 경기 출장 / 3 골
- 1999-2000 시즌 : 30 경기 출장 / 6 골
국가대표
- 26 경기 출장 / 7 골
▣ 수상 경력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프리미어 리그 우승 : 1993, 1994, 1996, 1997, 1999, 2000
- FA 컵 우승 : 1994, 1996, 1999
- 리그 컵 (Rumbelows Cup) 우승 : 1992
- 챔피언스 리그 우승 : 1999
▣ 라이언 긱스의 축구인생 ▣
라이언 긱스의 축구 인생은 1987년 그의 14번째 생일날, 어린시절부터 줄곧 동경해 왔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유소년 팀 계약을 맺으면서 시작됐다. 그 당시, 맨체스터 Utd는 선수가 14세가 되기 전까진 계약 할수가 없었고, 지역 라이벌 맨체스터 시티가 어리고 재능있는 선수들을 찾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즉시 긱스를 올드 트래포드로 데려왔다. 그리고, 이것은 맨체스터 Utd의 유니폼을 입고 뛰었던 가장 재능있는 선수들중 한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운명적인 계약이었다.
비록 긱스는 훗날 웨일즈 국가대표 팀으로 활약하게 되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소년 팀에서 있던 2년 동안은 잉글랜드 유소년 팀의 주장이었으며 9경기에 출장했다. 또한 그당시 라이언 긱스의 원래 이름은 라이언 윌슨이었는데, 그의 부모님이 이혼한 후에 어머니의 성을 따르기로 결정해서 지금의 라이언 긱스가 된 것이다.
2년 간의 연습 생활 후 긱스는 16세의 나이로 팀의 정식 훈련생으로 계약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5개월 후 맨체스터 Utd는 긱스가 보기 드믄 재능을 지녔다는 것을 깨닫고 1990년 11월 29일 프로 선수로서 정식 계약을 맺었다.
그 이후로 긱스의 명성은 가히 경이적이라 할 만큼 높아갔다. 1991년 긱스는 주로 2군과 청소년 팀을 오가며 경기를 했다. 그러나 곧 전격적으로 1군에 합류했고, 3월 2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에버튼과의 경기에서 데니스 어윈의 교체선수로 들어가 그의 리그 데뷔를 가졌다. 그 후 긱스는 5월 4일 더비 매치로 열린 라이벌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전경기를 소화했다. 게다가 이 경기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며 모든 사람들에게 라이언 긱스라는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 시즌, 리 샤프의 부상으로 긱스는 주전 도약의 해를 맞이한다. 시즌이 시작되고, 긱스는 첫 15경기에 연속 출전했고, 총 38경기에 출전했다. 또한, 긱스는 이 해에 웸블리에서 열린 리그 컵 결승에서 맨체스터 Utd가 노팅햄 포레스트를 1 : 0으로 제압하면서 그의 프로 경력 첫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맨체스터 Utd가 시즌 초반의 압도적인 선두를 지키지 못하고 라이벌 리즈 Utd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면서 긱스는 실망스럽게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1992-93 시즌 시작과 동시에 맨체스터 Utd는 첫 두 경기에서 연패를 당하며 지난 시즌에 보여준 실망을 계속 이어가는듯 했다. 그러나, 곧 팀과 긱스는 다시 자신들을 추스리며 전력을 회복했고, 다시 한번 리그 우승을 위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미 팀에서 인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줬던 긱스는 곧 팀의 확실한 주전자리를 굳히며, 그의 이름이 선명히 새겨진 등번호 11번의 유니폼을 얻게 된다. 그와 동시에 팬들은 옛날 그 등번호를 달고 뛰던 스타 조지 베스트와 긱스를 비교하기 시작했고, 1992년 9월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벌어진 토튼햄과의 경기에서 환상적인 골을 터뜨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교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나, 베스트가 긱스의 특출난 재능을 인정하며 높이 평가면서 그 비교는 얼마 안가 사라지게 된다.
26년 무관의 설움을 떨쳐버리고 챔피언쉽을 노리는 맨체스터 Utd의 형용할 수 없는 열망은 1993년 에릭 칸토나의 맹활약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긱스의 팀 기여도도 상당했으며, 특히 2월에 벌어진 사우스 햄튼과의 경기에서 0 : 1로 패색이 짙던 경기를 후반 막판 2골을 터뜨리며 팀을 역전승으로 이끈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우승의 짜릿함을 맛본 긱스는 더 큰 성적을 원했고, 93-94시즌 맨체스터 Utd는 프리미어 리그와 FA컵을 동시에 석권, 2관왕에 오르며 긱스를 충족시켰다. 1960년대 이후 올드 트래포드가 새로운 축구의 전성시대를 구가함과 동시에 긱스도 득점 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한 해를 보냈다. 그의 많은 득점중, 퀸즈 파크에서 레인저스를 상대로 3 : 2의 승리를 거둘 때의 골이 당연 백미일 것이다. 루즈 볼을 잡은 긱스는 레이 윌킨스의 태클을 피하고, 폭발적인 스피드로 순식간에 3명의 수비수들을 따돌리고 환상적인 골을 터뜨렸다. 그 골은 라이언 긱스의 뛰어난 기술, 명석함, 차분함, 완벽한 몸의 균형, 스피드, 볼 컨트롤 그리고 위협적인 왼발등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보여줬다. 이러한 긱스의 장점들은 그가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선수중 한명이 될 운명을 가져다줬다.
그러나 1994-95시즌, 긱스는 계속되는 부상으로 큰 고통을 경험해야 했다. 시즌 초 입스위치와의 경기에서 부상당한 햄스트링을 시작으로 발목, 발꿈치 그리고 허벅지 부상이 차례로 긱스를 괴롭혔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긱스의 부상은 팀의 부진으로 이어지면서 맨체스터 Utd는 블랙번에게 승점 1점차로 리그 우승을 내주고, FA컵 결승에서 에버튼에게 0 : 1로 패하면서 리그와 FA컵 2연패에 실패한다. 긱스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39 경기에 출전했지만, 기록은 전(前) 시즌 그가 보여줬던 것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며 급강하했다.
맨체스터 Utd에서 5번째 시즌을 맞이한 긱스는 팀이 많은 주축 선수들을 내보내고 재정비에 들어가면서 또 다른 도약의 계기를 갖게 된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베켐, 버트, 스콜스 그리고 네빌 형제와 같은 잉글랜드 선수들을 팀의 주축으로 구성했고, 이것은 놀랍게도 약관의 긱스를 팀에서 가장 경험있는 선수로 만들었다. 부상에서 회복한 긱스는 왼쪽 윙으로써 다시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고, 이는 맨체스터 Utd가 2번째 리그 & FA컵 2연패를 달성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이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긱스가 잉글랜드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들 중 한명이라고 인식되었다. 그러나 긱스는 아직 유러피언 리그(챔피언스 리그 & UEFA 컵)에서는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으나 1996-97 시즌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지난 시즌 리그 챔피언과 챔피언스 리그에서 선전했던 맨체스터 Utd는 부진하게 시즌을 출발한다. 그들은 홈에서 처음으로 페네르바체에게 패한 것을 포함해서 초반 6경기 중 3경기에서 패하는 부진을 보였으며, 2주 후 홈에서 다시 유벤투스에게 0 : 1로 패하고 만다. 비록 경기 결과는 유벤투스의 승리로 돌아갔을지 몰라도 긱스는 후반 내내 그가 유러피언 레벨의 성숙한 선수로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줬다. 비록 그의 스피드, 기술, 그리고 드리블은 유벤투스의 수비수들을 당황시켰으나 팀에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비엔나에서 열린 조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긱스는 멋진 선취골을 기록하며 활약했고 결국 맨체스터 Utd는 8강전에 진출해 FC 포르투와 대결하게 되었다.
1997년 3월 4일은 긱스가 가진 최고의 기량을 선보인 날임에 틀림없었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거친 포르투갈 챔피언을 맞아 긱스는 상대 중앙 미드필드 진영을 헤집고 다니며 팀의 세번째 골을 성공시켰고, 맨체스터 Utd는 4 : 0의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긱스는 부상으로 두번째 리그 경기와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준결승에 결장해야 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맨체스터 Utd는 긱스의 공백을 절실히 느꼈고 결국 많은 득점 찬스를 살리지 못한 채 보루시아 도르트문드에게 아깝게 패하며 결승 진출에 좌절한다.
실망감에 자극을 받은 긱스는 이듬해 꾸준히 최고의 기량을 과시하며 컴백했다. 긱스의 시즌 중 최고의 경기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유벤투스를 3 : 2로 물리쳤을 때였다. 전 시즌 유벤투스에게 2번의 패배를 맛본 맨체스터 Utd는 라이언 긱스의 화려한 윙 플레이에 힘입어 보기좋게 복수한다. 긱스는 테디 셰링햄의 동점골을 어시스트 하고 경기 종료 직전 환상적인 결승골을 터뜨리며 대활약 한다. 경기 후, 유벤투스의 마르셀로 리피 감독은 다음과 같은 말로 긱스의 유러피언 레벨을 칭찬했다. "긱스는 진정한 최상급 선수이다."
긱스는 맨체스터 Utd가 챔피언스 리그와 프리미어 리그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는데 일조를 한다. 그러나 그 해 2월, 긱스와 팀에 있어 불행한 일이 닥쳐온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긱스의 선취골로 더비 카운티를 2 : 0으로 리드하고 있던 가운데 긱스가 햄스트링에 부상을 당하면서 두달간 1군에서 제외된다. 이번 공백으로 인해 맨체스터가 얼마나 긱스에 의존하고 있었는지 확연히 증명되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탈락을 맛본 맨체스터 Utd는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초반 승점 12점차를 지키지 못하고 아스날에게 챔피언 자리를 내주며 무너졌고, 뒤늦게 합류한 긱스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러나 1997-98 시즌 부상에서 완쾌되면서 그는 그가 명백히 최고 레벨의 선수임을 입증했다.
부상에서 탈출한 긱스의 맹활약으로 맨체스터 Utd가 챔피언스 리그 초반 독주를 이끌며 운명적인 1998-99 시즌이 화려하게 시작된다. 긱스는 로즈, 바르셀로나, 브론드비와의 경기를 포함한 챔피언스 리그 4경기에서 4골을 넣으며 그가 유러피언 리그에서 맨체스터 Utd의 가장 능력있는 선수라는걸 다시 한번 증명해냈다.
그러나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리버풀과의 경기 도중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하다 발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한 긱스는 몇주간 결장해야 했고, 놀랍게도 올드 트래포드에서 벌어진 더비 카운티와의 경기에서 또 햄스트링에 부상을 당했기에 기대가 됐던 시즌이 다시 한번 무너지는 듯 보였다.
운좋게도 부상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아서 긱스는 무사히 팀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이베리에서 열린 FA 컵 준결승, 아스날과의 경기에서 맨체스터 Utd는 연장전 10명으로 싸우는 수적 열세로 탈락을 눈앞에 두며 그들의 시즌 3관왕의 길은 멀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멋진 골을 작렬시킨 긱스 덕분에 맨체스터 Utd가 2 : 1의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둔다.
맨체스터 Utd 진영 중앙에서 패트릭 비에이라의 패스를 가로챈 긱스는 폭발적인 드리블로 유럽 지역에서도 강력한 수비로 정평이 나 있는 아스날 중앙 수비를 치고 들어가 4명의 수비수를 제낀 뒤 데이비드 씨맨이 손쓸 수 없는 각도로 슈팅을 날려 골을 성공시킨다. 이것은 잉글랜드 축구의 전설 조지 베스트조차도 할 수 없는 그런 환상과도 같은 플레이였다
그 후 발목 부상으로 잠시동안 고생하던 긱스는 부상을 회복하고 돌아와 맨체스터 Utd가 프리미어 리그, FA 컵, 그리고 챔피언스 리그를 모두 석권하며 3관왕에 오르는데 큰 몫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99년 4월 14일 밤 보여줬던 라이언 긱스의 골(FA 컵 준결승, 對 아스날 전의 골)은 잉글랜드 축구계에 있어 영원한 전설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