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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6 주일낮설교 / 충만교회 민창근 목사
막 11:1-10 / 예루살렘 입성에서 나타난 모습들
(♡ 0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0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0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0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05 거기 서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0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0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0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0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 오늘 말씀
오늘 말씀은 여리고에서 출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그리스도로서 입성하시는 장면이며, 구원을 위한 마지막 사역을 감당하시려 하는 일주일이 시작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나귀새끼를 준비하여 바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요한복음 12장을 참고해보면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린 베다니에서 하루를 묵으시고 그 다음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1.지명과 숫자적 의미를 이해합시다.
1) 감람산(올리브산) - 여러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석회암 산으로, 올리브(감람나무)가 많아 감람산으로 불리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나, AD 1세기경에는 숲이 다 망가져 버렸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동편의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는 해발 814m의 산이며,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는 언덕보다 약 90m가 더 높아 감람산 꼭대기에서 보면 예루살렘 성전 쪽이 한눈에 다 내려다 보였다고 합니다.
2) 벳바게 – 뜻은 “덜익은 무화과의 집”이며,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마을로(마 21:1) 감람산 남동편 기슭에 위치한 마을입니다(막 11:1).
3) 베다니 – 뜻은 “가난한 자의 집”이며, 탈무드에 의하면 “푸른 과일의 집”이라고 불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져 있으며, 문둥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이 격리되어 사는 감람산 기슭에 위치한 사회적 약자들의 마을이며,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가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찾은 것은 마가복음에는 처음이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이 여기를 찾은 것은 소외된 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건이 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신다면 당연히 들려야 할 곳입니다.
4) 말씀에 나타나는 숫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숫자 2입니다.
① 벳바게와 베다니, ② 제자 중 둘, ③ 나귀와 나귀 새끼, (참조 : 마 21;7) ④ 겉옷과 나뭇가지, ⑤ 앞에서 뒤에서, ⑥ 호산나가 두 번 나옵니다.
2는 숫자적 의미가 “교통, 간증, 증거, 분리, 짝, 결합, 조화, 사랑, 증인, 분쟁”의 뜻이 있는데, 이중에서 간증, 증거, 증인의 뜻이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부활한 나사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고, 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하는 것과 관련하여 독특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품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도 오늘 사회적 약자에게 희망을 주는 사역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2.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
예수님이 이튿날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미리 나귀와 나귀새끼를 구하기 위해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냈는데, 이 맞은편 마을은 벳바게일까요? 베다니일까요?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약 24km 떨어진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시며 베다니에서 첫날 묵었던 것으로 생각하면 벳바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1)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겸손과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를 타시는데, 그 의미를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탄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왕, 제사장, 사사, 부귀한 자들이 나귀를 타고 다녔습니다.
나귀는 아프리카산 야생동물을 길들인 것으로 험한 길이나 산언덕 등을 잘 다니고, 병이 없는 짐승입니다.
사실 말과 비교하면 체구가 작고, 속도가 뒤지며, 추위에 약하기에 말에 의존하던 북방민족들에게서는 업신여김을 당했지만, 애굽이나 팔레스타인 같은 중동지역에서는 나귀를 우수한 짐승으로 쳤습니다. 왜냐하면 말에 비하여 결코 미련하지 않으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고, 익살도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평탄한 길, 속도에서 앞서고, 나귀는 거친 자갈길에서 앞섭니다. 그만큼 발바닥이 튼튼하고 인내심도 강합니다.
나귀의 단점은 예민하지 못하며 고집쟁이라는 점이 있습니다. 말은 주인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강하지만 나귀는 주인의 말에 순종하기 보다는 자기가 딛고 가는 땅에 대한 관심이 크기에 주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가려는 곳으로 가려는 문제도 있습니다.
→ 여하튼 그리스도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고 평화의 왕으로, 화해의 왕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① 공의롭게, ② 구원을 위해, ③ 겸손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세속적인 일에 사용하지 않는 신성한 것을 찾을 때 흠 없고 아직 사용되지 않는 것을 찾게 됩니다.
흠이 없는 순결한 것이며, 세속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닌 신성한 것을 사용하여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 우리는 세상속에서 부족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고, 그 피를 통하여 순결함과 신성함을 유지하며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의 분리나 세상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혁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는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 타이타닉 호의 침몰과정 이야기
1912년 4월 14일은 공포의 날이었습니다. 타이타닉이 침몰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고로 1,514명이 사망했고 710명이 구조되었습니다. 사고 당시 38세였던 타이타닉호의 이등 항해사 찰스 래히틀러 씨는 구조된 승객을 책임지기 위해 선원 중 유일하게 구조된 승무원이었습니다.
찰스 래히틀러 씨가 남긴 17페이지 분량의 회고록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① 애스터 IV(당시 세계 최고 부자) 씨는 임신 5개월 된 아내를 구명보트에 태워 보내며 갑판 위에 앉아, 한 손에는 강아지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시가 한 대를 피우면서 멀리 가는 보트를 향해 외쳤습니다. ‘사랑해요 여보!’
승객들을 대피시키던 선원 한 명이 애스터 씨에게 보트에 타라고 하자, 애스터 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사람이 최소한 양심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한 자리를 곁에 있던 한 아일랜드 여성에게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배의 파편들에 의해 찢겨진 애스터 씨의 시신을 생존자 수색 중이던 승무원이 발견했습니다.
그는 타아타닉호 10대도 만들 수 있는 자산을 가진 부호였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거절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으로 양심을 지킨 위대한 사나이의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② 성공한 은행가였던 구겐하임 씨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도 화려한 이브닝드레스로 갈아 입으며 이처럼 말했습니다. “죽더라도 체통을 지키고 신사처럼 죽겠습니다.”
구겐하임 씨가 아내에게 남긴 쪽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이 배에는 나의 이기심으로 구조받지 못하고 죽어간 여성은 없을 것이오. 나는 금수만도 못한 삶을 살 바에야 신사답게 죽을 것이오.”
③ 미국 메이시(Macy’s)백화점 창업자 슈트라우스 씨는 세계 2번째 부자였습니다. 그가 어떤 말로 설득해도 아내 로잘리 씨를 구명보트에 태우지 못했습니다.
아내 로잘리 씨는 “당신이 가는 곳에 항상 함께 갔어요. 세상 어디든지 당신과 함께 갈 거예요”라며 남편을 두고 배에 오르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8번 구명보트의 책임 선원이 67세의 슈트라우스에게 “누구도 어르신이 보트를 타는 것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구명정 탑승을 권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슈트라우스 씨는 단호한 말투로 “다른 남성들보다 먼저 보트에 타라는 제의는 거절하겠습니다”라며 생사의 순간에도 초연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63세의 아내 로잘리 씨의 팔을 잡고 천천히 갑판 위의 의자에 앉아 최후의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현재 뉴욕 브롱크스에 슈트라우스 부부를 기리는 기념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바닷물로 침몰시킬 수 없었던 사랑.’
④ 그러나 예외도 있었습니다. 일본 철도원 차장인 호소 노텍스트 씨는 여장을 한 채 여성과 어린이들로 채워진 10번 구명보트에 올랐습니다.
그는 귀국 후 바로 퇴직당했습니다. 모든 일본 신문사와 여론은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으며 그는 십여 년 뒤 후회와 수치로 가득 찬 삶을 마감했습니다.
→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에 살 때도 그렇지만 죽을 때도 아름답게 죽어야 합니다.
살아 있을 때, 죽기 전에 ① 아무도 드리지 못한 것, ② 나만이 드릴 수 있는 것을 귀하게 드리고 죽도록 생각해둬야 합니다.
3. 나귀 주인의 헌신의 자세
“2...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0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어떤 비밀작전처럼 제자 둘이 가서 ‘주가 쓰시겠다’ 하고 끌고 옵니다.
어떤 사전의 계획된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놀라운 주님의 역사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나귀 주인은 몇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나귀 주인은 그의 모든 것을 주를 위하여 드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말씀을 생각하면 제자들은 나귀와 나귀 새끼 둘 다 가져갔습니다. 나귀 주인은 그것을 다 허락했습니다.
- 우리의 것은 주님의 것입니까?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의 “제자입니까”에 보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배우고 믿으며, 성도들이 그들의 재산과 자동차, 아내와 자녀들, 자신들의 피까지 주를 위한 일에 쓰도록 내놓았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물론 집과 자동차 등 그들이 원래 가진 것을 되돌려주면서 말했습니다. “이제 이 집은 다시 여러분에게 주어지지만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도록 사용하십시오.”
우리는 주를 위한 일에 무엇을, 어디까지 헌신할 수 있을까요?
2) 나귀 주인은 헌신의 순간이 “즉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에 아브라함의 이삭 드림이 즉각적인 헌신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 우리는 헌신을 해도 생각을 해야 하고, 계산하며 따져야할 때가 많습니다.
언제든 헌신할 자세가 있다면 “주가 쓰시겠다”고 갑자기 말한다고 하더라도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즉각적인 순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주를 위한 헌신에 큰 구멍이 생길 것입니다.
따라서 순종, 헌신의 순간은 늘 즉각적이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예) 1991년 12월 13일 공군비행사 이상희 중위는 비행기를 몰다 비행기 고장으로 탈출하려다가 탈출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교신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추락한다, 탈출하겠다. 아, 전방에 민가가 보인다. 탈출불가.”
민간인들의 무고한 죽음을 막기 위해 마지막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고 미나리 밭으로 떨어지며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23살 때입니다.
이것을 늘 생각하고, 교육해 놓지 않으면 즉각, 갑자기 해도 흔들리지 않고 우리는 올바로 반응할 수가 없습니다.
- 즉시, 언제든 헌신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3) 나귀 주인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 예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의 믿음이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는 것이 예배나, 제사, 이웃돕기 등으로 연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귀 주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있었고, 예수님의 사역에 필요한 것이라면 언제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 자기의 것을 기꺼이 드리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하여 귀하게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헌신해야 합니다.
4) 나귀 주인은 나귀를 언제까지 사용하고 돌려줄 것인가 묻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면 우리는 우리의 것을 언제 돌려받을 것인지, 언제까지 사용할 것인지 묻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나귀 주인은 묻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것은 주를 위한 일에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돌려받지 않는다고 해도 손해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저 기쁘게 주께서 사용하신다면 그것으로 그의 마음의 기쁨과 감동이라 생각했습니다.
→ 나귀 주인의 믿음과 고백, 즉각적이고 온전한 헌신의 자세를 우리가 배우게 되길 바랍니다.
4. 겉옷과 종려 나뭇가지로, 소리치며 헌신한 사람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실 때 겉옷을 벗어 얹어놓고, 길에 펴는 사람들은 특히 더한 헌신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덥기 때문에 네모진 겉옷에 속옷을 입고 있는데, 겉옷을 벗어 나귀 새끼 위에 올리고, 길에 편다면 속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됩니다.
보기에 따라 창피한 느낌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꺼이 자기의 창피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전적인 헌신을 겉옷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비교)
그리고 나뭇가지로 깔고, 호산나(‘지금 구원하소서’)라고 힘껏 소리치며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의 입성을 고백하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회, 즉 성전체제를 흔들고, 로마 사람들에게 긴장된 사건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우려와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소리치며 증거하였습니다.
→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정말 중요한 순간에 그 신앙이 표현되어야 합니다.
숨어 있는 신앙만 되면 안됩니다.
드러나야 하고, 창피를 넘어선 고백과 헌신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 예루살렘 입성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 사람들의 헌신의 모습을 배우며, 우리도 아름답게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첫댓글 속옷만 입고도 목터지게 외치고 싶은 구원에의 열망... 호산나.... 그 소리가 우리에게도 들려오지 않는가?
2015년 3월 1일부터 마가복음 설교를 시작하였는데, 이번 설교가 127번째 설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