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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지킨 홍의장군과 장령 17명의 500년의 충의의 함성이 들린다
의령宜寧 화목하며 평안한 땅
의령의 기운은 부의 전설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먼저 나라를 지켰던 붉은 의병의 혼에서 시작되었다.
배우고, 가르치고, 봉사하는 교직 퇴직자들의 모임에서
세계는 중동 호르무즈 해협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침략하는
종교 전쟁으로 혼란하고
국내는 여야의 정쟁과 지방 선거를 두고 편가르기와 분열로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정치 현황이다
평생을 교직에 근무한 사람으로 인간다움이 무엇이며 사람답게 사는 것인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위해 마음이 움직여져 봄 나들이를 가다
햇살 밝고, 공기 맑은 봄날 충효의 고장, 의병의 고장, 한국의 부자를 낳은 의령
홍의 장군 생가를 방문하고, 거제 파노라마 케이불카, 자연과 함께하는 생명의 공간
거제식물원을 탐방 하기로 하다
요즘 1600만 관객의 가슴을 울리는‘왕과 사는 남자’가 관객을 모은 것은
따뜻한 인간애다.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고, 사람들마저 효율과 성과의 논리 속에서
끊임없이 비교되는 시대다.
이런 현실 속에서 영화는 사람을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
약한 존재를 끝까지 바라보는 시선, 인간다움에 대한 믿음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붙든다. 그래서 관객들은 단순한 몰입을 넘어, 잊고 있던 감정의 온기를 다시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인간다운 따뜻한 인간애를 살다간 홍의장군 곽재우를 생각하게 하였다
‘대한민국 부자 1번지’의령
의령 솥바위 정암(鼎巖) 부자마을 소원바위 솥바위 위에 우뚝 서 있는 3그루의 나무가
더 인상적이이다. 3정승! 한국의 부자 3분을 생각하게 한다
삼성 호암 이병철(1910~1987), 금성 구인회(1907~1969, 함안군),
효성 조홍제(1906~1984 함안군), 삼영화학 이종환(1922~2023 기부왕)
조선중기 경상좌도 안동은 유학의 거두 퇴계 이황(1501~1570)의 경敬
(思無邪, 毋自欺), 毋不敬, 愼其獨)
경상우도 합천, 함양은 남명 조식(1501~1572)의‘경(敬)’과 ‘의(義)’로 집약된다.
내면을 바로 세우는 경의 수양을 통해 외부 현실에서 과감하고 올곧은 실천,
즉 의를 실행해야...
문제 해결과 국가·사회에 대한 책임으로 연결시키는 사상이었으며,
남명의 제자들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나서 나라를 구한 역사적 사실로 이를 입증..
곽재우, 정인홍, 김우옹, 정구 등 의병장 60명 중 46명이 남명의 문하에서 배출됐다
內明者敬 外斷者義내명자경 외단자의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義)이다.
조식이 경의검(敬義劍)과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차고 다녔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방장노자(方丈老子), 방장산인(方丈山人), 산해선생(山海先生)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25세 때 『성리대전』에 인용된 원나라의 유학자 노재 허형의 글을 읽게 된다.
志伊尹之所志 學顔子之所學지이윤지소지 학안자지소학
이윤의 취지를 뜻으로 삼고 안연의 학문을 배움으로 삼아야 한다.
出則有爲 處則有守 丈夫當如此출즉유위 처즉유수 장부당여차
대장부는 마땅히 출사하면 경륜을 펴야 하고 퇴처하면 지조있게 지켜야 한다.
出無所爲 處無所守 所志所學將何爲출무소위 처무소수 소지소학장하위
출사해서 한 것도 없고 퇴처하면서 지조가 없으면 뜻하고 배운들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
『노재유서(魯齋遺書)』 권1, 「어록(語錄) 上」
일상에서는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 1쌍과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칼을 차고 다니며
늘 자신의 행동을 단속하였다.
이러한 내외의 공부를 통해 그는 내면의 수양(敬)과 수양한 바의
실천(義)을 함께 중시하는 학풍을 함양해 나갔다.
곽재우 장군, 안희제 선생 등 시대를 이끈 인물들의 생가를 잇는 여정을 통해,
의령이 품은‘정신적 부의 전통’을 배우다.
홍의장군 곽재우장군의 함성이 들린다
곽재우 장군(1552~1617) 생가 방문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남명 조식의 제자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운 대표적인 의병장입니다.
붉은 옷을 입고 싸워 ‘홍의장군’이라는 별칭으로 불렸으며,
기습과 유격전을 활용한 전술로 큰 활약을 펼쳤습니다.
의병장은 본관은 현풍이고 자는 계소, 호 망우당, 시호는 충익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9일째 되는 날 이곳 곽재우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곽재우장군을 비롯한 17장령들과 함께 책과 붓을 던지고 가재를 던지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곳 생가는 조선중기 사대부의 사저로서 전형적인 구조를 본떠서 안채,
사랑채, 별당, 큰 곳간, 작은 곳간, 대문, 문간채등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양반가의 집으로 2005년 복원하였다.
곽재우생가는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위치한다.
임진왜란 때 전국에서 맨 먼저 민중의병을 일으켜 왜구를 무찌른
곽재우 의병장의 생가를 복원한 건물이다.
생가를 나오면 넓은 광장에 마련된 곽재우 장군 문화공원에서 산책을 할 수 있습니다.
의병 정신이 시작된 역사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곽재우장군이 탔던 말에도 올라가 볼 수가 있으며
홍의를 입은 곽재우장군의 기마상을 만 날수 있습니다.
커다란 노거수 은행나무, 느티나무가 두 그루 마을의 이야기를 천년간 간직하고 있다
동사나무, 신목 당산나무이다
생가와 문화공원 전경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위치한 생가는 전통 한옥 구조로 복원되어 있으며
장군의 어린 시절과 삶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곽재우 장군 문화공원에 마련된 곽재우장군 생가는
전통 한옥 형태의 모습을 재현 해놓았습니다.
본래 생가는 마을내 현고수가 있는 곳의 뒤편에 있는 집이었으나
현재는 이곳으로 재현 한 것입니다.
문화공원 전경
북루에 커다란 북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모으기 위한 북 현고이다
홍의를 입은 곽재우장군의 마상의 늠늠한 모습
곽재우장군이 탔던 말에도 올라가 볼 수가 있으며
곽재우장군의 기마상을 만 날수 있습니다.
지금도 500년 전의 함성이 들린다
한시비가 둘 있다
有召命 유소명
임금이 부르는 명령이 있음
곽재우
九載休糧絶鼎煙 구재휴량 절정연
如何恩命降從天 여하은명 강종천
安身恐負君臣義 안신공부 군신의
濟世難爲羽化仙 제세난위 우화선
임금께서 부르는 명령이 있음
9년 동안 양식 없어 밥솥 연기(오르지 않고) 끊어졌는데
어떻게 은명이 하늘(대궐)에서 내려왔을까
한 몸 편안히 하자니 군신의리 저버릴까 두렵고
세상을 구제하자니 신선 되기 어려워라
贈李完平元翼증이완평원익-郭再祐(곽재우)
완평군 이원익에게 드림
곽재우 한시
心同何害迹相殊(심동하해적상수)
城市喧囂山靜孤(성시훤효산정고)
此心湛然無彼此(차심담연무피차)
一天明月照氷壺(일천명월조빙호)
마음만 같으면 행적 다름이 무슨 상관인가?
시중은 시끄럽고 산중은 고요하고 외롭네.
이 마음 맑아서 시중과 산중 구별이 없고,
온 하늘의 밝은 달이 깨끗한 마음 비추네.
두 그루의 고목 은행나무와 의병을 모으기 위해 북을 달았다 현고수 느티나무
문화공원을 나온다음 마을내 현고수나무로 이동합니다.
마을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끼며 마을안길을 산책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인상 깊었던 곳은 북을 매달아 의병을 모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현고수입니다.
곽재우 장군 생가 장독대에서
옹기종기 모여 더 정겹고
반들반들 빛이 나는
저 장독도 알고 보면
먹고살려고 애지중지하던
우리네 어머니 삶의 진액 아닌가
저 고추장독 속엔
며느리의 매운 눈물 한 줌 들어있고
저 간장독 속엔
시어머니의 자린고비 맘도 들어있고
저 된장독 속에
할머니의 구수한 맘도 들어 있었으리라
그뿐이던가
어머니의 어머니가 남몰래 눈물을 훔치던 곳이었고
백 사발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소망 빌었고
행여 부정탈까 금줄을 처놓던 곳 아니던가
가족의 이름으로 참고 살고 아끼고 살고
보듬고 살고 믿음으로 살고
오래 두면 삭아서 효소가 되는 정신의 양식 아니던가
곽재우 장군 생가 우물
온 가족의 수없이 퍼 올렸던 우물은
주인을 잃은 지 몇백년
단단한 돌로 짜여 있어 아직도 단단하다
지나가는 길손 그 우물이 궁금해 고개 숙여 들여다보니
깊은 우물은 잘 보이지 않고
깊은 우물 돌 틈 사이사이
연록색 나뭇잎이든 고사리 잎이
삶과 죽음 그사이
변화를 대변해 주는 것 같아 만감이 교차한다
연당에는
판소리 사랑가
노래 속에 삶의 표현은 구구절절
리듬에 장단 맞춰
터져 나오는 쉰 목소리가
사랑을 몰라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
참고 참았던 심장에
꽃이 피어
울음이 터져 나오면
서로 젖은 얼굴을 바라보며
나도 웃고 나도 웃는다
생가는 6칸 마루 2둘 여름척 책을 읽으면 참 시원 하겠다
곽재우 장군 생가 마루에 앉아
텅 빈 마루에 홀로 앉아 바라보니
그 옛날 장군을 보고 있는 듯
오백 년 우람한 은행나무 믿음직하다
푸른 잔디가 가득한 넓은 마당엔
은행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적적한 넓은 마루엔 굴러다니는 연록색 은행잎이
손님처럼 해바라기하고 있다
주인 없는 빈집은 외롭지만
여기저기 남아 있는 그 분의 자취 유물은 은행나무 연초록빛 마냥 참 고풍스럽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의 웅장한 한옥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사랑채는 아랫광 4칸, 윗광 4칸 조선 부자의 광이고
의병들의 식량이 되었을 것이다
생가는 산자락 밑에 위치하여 자연과 어우러진 고즈넉한 분위기입니다.
의병의 시작, 현고수나무 전경
문화공원을 나온다음 마을내 현고수나무로 이동합니다.
마을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끼며 마을안길을 산책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인상 깊었던 곳은 북을 매달아 의병을 모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현고수입니다.
보호각 안에 보존된 현고수 나무는 오랜세월 견더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안내판과 함께 남아있는 역사적 흔적으로 이곳에서 북을 울리며 의병을 모집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과 결연한 의지가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의령 세간리 현고수(느티나무)
宜寧 世干里 懸鼓樹
천연기념물 제493호
의령 세간리 현고수는 나이가 약 600년 정도 되는 느티나무이다.
높이는 약 15m, 가슴 높이의 둘레는 7m에 이른다.
현고수(懸鼓樹)는 북을 매단 나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1592) 때 곽재우가
이 나무에 큰 북을 매달고 의병을 모아 훈련시켰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9일 뒤 곽재우가 이곳에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의 의병부대는 이곳에 본진을 두고 낙동강과 남강을 오르내리며
왜군의 진격을 막고 보급로를 차단하여 왜군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매년 열리는 의병제전에서는 의병의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이곳에서 성화의 불을 붙여 의병제전을 시작한다.
의령 세간리 현고수는 임진왜란 의병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의미와 더불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민속학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 의병 봉기(1592)
임진왜란 발발 직후 경남 의령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일본군의 진격을 견제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정암진 전투
남강의 중요한 요충지인 정암진에서 일본군 격퇴했으며,
수적 열세에도 지형을 활용한 기습전으로 승리했습니다.
낙동강 방어 작전
낙동강 일대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차단했으며, 게릴라식 전술로 지속적인 타격했습니다.
정규군이 아닌 의병으로서 기습·매복·야간 공격 등으로 일본군을 괴롭힘으로서
적은 병력으로 효과적인 전투를 수행했습니다.
의령읍 의병탑 탐방은 역사책을 통해 배우다
생가 탐방 후에는 20여km를 달려 의령읍으로 이동하여 의병탑을 방문했습니다.
1972년도에 세워진 의병탑은 웅장한 모습으로 탐방객을 맞이합니다.
이곳은 곽제우장군과 그 휘하 17장군의 영과 의병 정신을 기리는 기념 공간입니다.
의병탑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의병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장소입니다.
의병탑 바로 옆에는 기념공원과 체험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병박물관이 건립되기전까지는 이곳에서 곽재우장군의 의병활동과 유물들이 전시되었으나
이제는 체험전시관으로 간단히 곽재우장군의 의병활동을 소개 합니다.
의병박물관 관람
의병탑 관람을 마치고 바로 옆에 위치한 의병박물관으로 이동 했습니다.
이곳은 의병의 역사와 곽재우 장군의 삶을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현관을 들어서면 말을타고 홍의를 입고 있는 늠름한 모습의 곽재우장군
기마동상을 만납니다.
박물 전시관안에는 곽재우장군의 일대기와 장군의 전투 모습,
의병 활동을 재현한 전시물 등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해석하는 통찰, 인간에 대한 따뜻한 믿음,
문화는 혼자 빛나는 성공이 아니라, 함께 살아나는 생태계 위에서 만들어진다.
인간다움이 왜 여전히 중요한지를 다시 묻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기술의 속도가 아니라,
사람을 향한 깊은 이해와 따뜻한 시선일지 모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천강홍의대장군'의 깃발을 내걸고 혼자서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했으며, 함성으로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미기도 하여
적을 물리쳤다. 붉은 옷을 입어 홍의장군으로 잘 알려져 있다.
조식의 외손녀 사위이자 문인이다.
대제학을 지낸 김우옹(金宇顒)과는 동문이자 동서지간이다.
망우당 곽재우 일대기
본명 곽재우 (현풍곽씨)
호 망우당,
별칭 홍의장군,
시호 충익.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의 활동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 그뒤 향촌에 거주하고 있던 중
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천강홍의대장군'의 깃발을 내걸고 혼자서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적을 물리치다
1592년 5월 솥바위나루[鼎巖津]를 건너려는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의령·삼가·합천 등의 고을을 지켜냈고, 일본군이 호남으로 침략해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또한 거름강[岐江]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가로막았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물리쳤다.
10월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싸움에 자신이 거느린 의병을 보내 응원하기도 했다.
의병활동의 공으로 7월에 유곡찰방에 올랐고,
10월에는 절충장군 겸 조방장이 되었다.
1593년 성주목사로 임명되어 삼가의 악견산성을 쌓았다.
1595년 진주목사가 되었으나 그만 그만두고 현풍으로 돌아왔다.
1597년 경상좌도방어사로 나가 현풍에 석문산성을 쌓는 도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창녕 화왕산성으로 옮겨 밀양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적을 막았다.
8월 계모 허씨가 죽자 장례를 지내고 울진으로 돌아갔다.
1599년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다.
10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올라 경주·울산의 전투경험이 많은 군사 2,000명을
수성군으로 삼고,
내륙에 있는 잡병 6,000명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에 충실하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으로 귀양갔다가 1년만에 풀려났다.
그뒤에는 현풍 비슬산에 살면서 영산의 창암진에 망우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의병을 일으키기 이전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1604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찰리사·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 등에 임명되고,
광해군 즉위 뒤에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호분위부호군,
대호군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한성부좌윤,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거의 사양하거나 곧 사퇴했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1618년 현풍에 그를 추모하는 충현사라는 사당이 세워졌고,
1677년(숙종 3) 여기에 예연서원의 사액이 내려졌다.
1709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망우당집〉이 있다.
시호는 충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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