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온갖 종류의 성경 공부를 다 해보았다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을 대했을 때 저의 첫인상은 성경 공부로 지식은 많이 늘었을지 모르나 생명을 만진 적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은 저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성경은 공부를 위한 책이 아니고, 하나님의 호흡(God-breathed)이고, 우리의 먹거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딤후 3:16, 렘 15:16, 겔 3:1). 이 말은 우리가 머리로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그 말씀 안에서 영과 생명, 심지어 주님 자신을 만나는 단계까지 더 전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요 6:63, 5:40). 그러나 솔직히 이런 인식이 생겼어도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 상태를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이해는 생각의 영역이고 주님을 영과 생명으로 만나는 것은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서 이뤄지는데, 그동안 주로 혼을 사용하고 연합된 영을 사용하는 기회가 많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받은 족속이고, 왕들인 제사장 체계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시어 자신의 기묘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분의
미덕들을 널리 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벧전 2:9).
우리가 뷔페집에 갔을 때 차려진 음식을 다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또 다 먹을 수도 없습니다. 또한 이번에는 이 음식에 손이 가지만 다음에 갈 때는 저 음식을 시도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위 말씀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요즘 제가 실행하는 대로 위 본문을 20여 번 기도하며 읽으니 거의 외워졌습니다. 그 후에 관련 각주들과 앞뒤 본문의 문맥까지 살피는 과정에서 제 안에 다음 세 가지 단어가 깊이 새겨졌습니다.
하나: 처음에는 선택받은 족속, 왕들인 제사장 체계, 거룩한 민족,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단계에서 잠시 멈추고 주님을 앙망할 때, 영어 성경에서 이 네 단어 앞에 각각 부정관사 a가 네 번 반복해서 쓰인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즉 “여러분”은 복수이나, 이 네 범주 모두 ‘단수’ 명사인 것에 빛이 왔습니다. 말하자면, 이들이 모두 단체적인 하나인 것이 깊이 만져졌습니다.
구약을 읽어보면, 창세기에서는 아담, 아벨, 에노스,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 개인 인물 위주로 다뤄지지만, 출애굽 이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의 단체적인 실체로 등장합니다. 한편 미리암이나 아간처럼 특정 개인의 죄는 이 단체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이들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된 것은 이들의 정체성과 존립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런 원칙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고전 10:11, 엡 4:4). 따라서 이 한 몸인 교회 안에 누룩에 해당하는 어떤 이물질을 가져오거나 몸의 하나를 나누는 어떤 분열적인 움직임도 우리의 하나의 정체성을 손상시킵니다. 특히 분열은 우리를 부르신 분의 미덕 중 하나인 ‘하나’(oneness)와도 충돌합니다(신 6:4, 딛 3:10, 롬 16:17).
흥미로운 것은 사도 베드로가 ‘거듭남’(1장), ‘말씀의 젖을 먹음으로 생명이 자람’, ‘살아 있는 돌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증가되심으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됨’(2장)을 말한 후에 위 본문을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를 지키는 길은 산 돌이신 주님과 더 깊이 연합하는 것뿐임을 암시합니다.
어둠: 그동안에는 에클레시아 하면, ‘부름 받아 나온 무리’ 즉 분별에 강조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 말씀은 우리가 그 이전에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해줍니다. 즉 보통은 우리가 죄악 가운데 혹은 세상에 있었다고 알아 왔습니다. 그러나 위 본문에 따르면, 우리는 본질에 있어서 ‘어둠’ 안에 있었고, 심지어 ‘어둠 자체’였습니다(엡 5:8, For you were once darkness).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어둠이었던 이유가 영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이고, 또한 어둠은 사탄의 권세와 관련이 있음을 말씀합니다(행 26:18). 그러나 우리를 부르신 분의 또 다른 미덕 중 하나는 “그분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요일 1:5).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예전에 누렸던 한 찬송 가사가 떠올랐습니다. “어둠 속에 빛을 찾아서 피곤하게 헤매었네/ 내 왕 되신 예수를 보니 모든 것이 밝아지네/ 나의 눈을 돌이켜 주 영광의 얼굴 보리/ 주의 영광 빛 가운데에서 땅의 것들은 희미해져”(475).
그분의 기묘한 빛에 들어감: 이 말씀은 우리가 구원받아 들어간 영역이 어디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듭나서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었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그분의 기묘한 빛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 부분을 묵상할 때 전치사 ‘into’(His marvelous light)가 얼마나 달콤하게 다가왔던지요! 거듭난 후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빛 안에서 행하며, 빛이신 분과 교통하는 동안 그분의 속성과 미덕을 마음껏 누리고 또 널리 알리면서, 각 도시에서 하나의 금등잔대로 표현되고, 마침내 빛 가운데 있는 영광의 성,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 것입니다(요일 1:7, 계 1:12, 20, 21:11, 23). 할렐루야!
첫댓글 성경해석에도 원리와 법칙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 원리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모두 자기방식으로 성경을 보는 겁니다 그 원리는 계시를 받아야 아는 것이고 계시받은자가 알려주는 데로 성경을 봐야지 다른 방식으로는 도적이거나 우상숭배밖에는 안됩니다
예수를 아는 것이 영생인데 어떤 인간들은 성경을 예수로 풀어야 한다고 하죠. 자기가 이미 결론을 안상태에서 성경을 푼다는 말이되니 말이 안되는 거죠. 그러니 누구라도 성경을 알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도 모르면서 십자가도 모르면서 성경을 십자가 풀어야 한다 예수로 풀어야 한다는 사기꾼들이 너무 많죠. 영지주의자들이 이런 자들이고 실상 우리나라에 영지주의가 진리인양 다 퍼져있는 겁니다 모두 사기꾼들입니다
성경을 푸는 원리는 간구하는 자에게 베푸는 사랑의 진리입니다 왕은 간구받는 자이고 간구를 듣는 것이 다스리는겁니다 제사장은 간구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간구받는 자들인데 간구받는 자들이 자기마음대로 하면 질서가 깨지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이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도 그 간구라는 원리대로 행하시지 마음대로 행하시면 질서가 깨지니까 우주가 엉망이 되겠죠.
그러나 인간들은 도적들이라 진리를 듣고 도적이 되어 진리를 죽이고 자기가 그 진리를 차지하려고 하니 신학이 개판이 된겁니다 님도 진리를 듣고 진리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데도 가만히 있으니 소돔왕같은 사람인겁니다
시크릿 끌어당김의 법칙
이책을 아시는 분도 있을턴데 진리를 도적질해서 부자가 되는 방법을 가르치는 책입니다. 간구를 도적질에 쓰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