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ML clipboard
이데아님, 여전히 시민군 최초무장시점이 5월 21일 오후라고 우기고 계시는군요. 그러면 시민군은 5월 21일 오후 한 시 이전에 이미
무장하고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들 중 우선 세가지만 님에게 제시하겠습니다. 첫번째 증거는 시민군 장갑차가 공수부대원 두 명을 깔아 그 중 한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한 사건이 발생한 시각은 5월 21일 오후 한시경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위 동영상에 보시면 오후 1시 이전에 시민군 장갑차가 도청으로 진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 대본입니다.
배창복은 "시위대들이 급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고만 나레이션을 집어넣지만, 화면에서는 시민군 APC 장갑차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배창복na--------
22“ 나는 사람들이 건설장비를 몰고 나오는 모습을 촬영했다.
군대와 직접 대결을 할 모양이었다.
시위대들이 급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36“ 시민들은 어디에선가 총과 실탄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이를 서로 나누어 가졌다.
이때 사람들의 구호는 ‘우리를 죽여라’ ‘싸우다 모두 죽자’였던 것으로 기 억된다.
정말 그들은 죽을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일이었다.
나는 남은 필름을 모두 사용해 이 상황을 촬영했다.
13“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이날 시민들이 불태워 버린 KBS방송국을 촬영하려 했으나 포기했다.
이제 정말 빨리 광주를 빠져나가야 했다.
_____________
위 대본에서 광주사태 때 침투하였던 북한군의 자폭정신을 연상시키는 ‘싸우다 모두 죽자’라는 구호가 있는데, 바로 아래의 5월 20일자의
대자보 구호 그대로입니다.

자, 힌츠페터의 영상물에서 시민군 APC 장갑차가 도청으로 진격하는 장면이 오후 1시 이전의 장면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부정하십니까?
아래의 광주청문회 동영상 2:10-16에서 김영택 기자는 시민군 APC 장갑차가 군이 두 명을 깔아 죽이는 사건 발생 시점은 오후
1시경이라고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이처럼 장갑차 등으로 무장한 무장시민군 무기가 군인들을 죽인 시점이 이른바 집단발포 사건 이전이라는 사실은 시민군 무장이 먼저이고,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의 교전이 나중이었음을 명백하게 입증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 역사학도님, 이 글을 제 사이트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끝장토론의 방법에 관해 드릴말씀이 있습니다. 이글을 필두로 글에 기호와 번호를 붙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호송이님이나 제가 항상 모니터 앞에 있을 수 없으니(저는 특히 저녁 이후에 시간이 있어요), 옮기는 사람이 순차적이고 체계적으로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글을 [역 : 01 ]로 정하고 답변은 [이 : 01]형식으로 제목을 달고 글을 게시하는 것으로 정하겠습니다. 그 다음 역사학도님의 답변이나 질문은 [역- 02], 이데아는 [이 : 02] 이런 형식으로 진행함이 그 예가 되겠지요.
네, 상당히 좋은 제안으로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