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힘이 들었습니다.”
최기용이 서류를 앞쪽에 놓으면서 윤성일에게 말했다. 파주 저택의 별장 응접실에는 윤성일과 최기용 둘이 앉아 있다. 윤성일에게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버릇이 만들어졌는데 별장 응접실에서는 개인사를 처리하는 것이다. 서류에 시선만 준 채로 윤성일은 움직이지 않았고 최기용이 말을 이었다.
“전세희는 소문이 아주 험하게 났습니다. 외국인 헌터이며 특히 흑인 남자를 좋아하고 혼음까지 즐긴다는 내용인데 추적해 들어갈수록 재미가 있었습니다.”
이제 최기용의 희멀건 얼굴에 웃음기가 번져 있다.
“글쎄, 물증이 없는 겁니다. 같이 잤다는 놈이 없다니까요? 주위의 증언을 듣고 같이 호텔에 갔다는 남자 여섯 명을 만났지만 모두 그런 일 없다는 겁니다.”
“....”
“펄쩍 뛰면서 욕하는 놈, 기억이 안 난다는 놈, 앞에서 헤어졌다는 놈 등 다양했지만 결론은 하나같이 같이 안 잤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런데 전세희는 제 입으로 같이 잤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모두 본인 입으로 그 소문을 들은 데다 실제로 같이 있는 장면을 수없이 목격 당한 터라 그렇게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최기용이 지그시 윤성일을 보았다.
“저도 이런 특수한 경우는 처음입니다. 제 약점을 숨기는 것이 정상인데 전세희는 증인까지 만들어서 더러운 사생활을 연출하고 있었던 겁니다.”
“미친...”
쓴웃음을 지은 윤성일이 소파에 등을 붙이면서 말끝을 잇지 않았다. 정보용역 전문가 최기용을 시켜 처음으로 전세희의 사생활을 조사시킨 것이다. 앞쪽의 벽을 응시한 채 윤성일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전세희를 24시간 감시 해줘요. 1급 감시를 하란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상반신을 세운 최기용이 앉은 채로 허리를 굽혔다. 최기용에게는 빅 오더가 하나 추가된 셈이다.
최기용이 응접실을 나가자 윤성일은 창밖으로 시선을 준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안개에 덮였던 사물이 안개가 걷히면서 드러나는 것 같다. 산만하게 흩어져있던 이야기의 줄거리가 맞춰지는 느낌이다. 전세희는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명확치 않다. 소 닭 보듯이 하면서 지냈던 어린 시절부터인지 또는 몇 년 전부터인지. 자신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전세희는 기를 쓰고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 시킨 것일까? 전세희가 남자관계가 복잡하고 지저분하다는 소문을 자주 들었고 어떤 때는 유흥가에서 마주치기도 했던 것이 모두 자신에게 보이려는 시위였던 것인가?
“빌어먹을.”
어금니를 물었다가 푼 윤성일의 눈앞에 다시 김가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윤곽은 흐리다. 전세희는 김가영까지 추적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김가영이 동명건설의 장기태 회장 정부가 된 후부터 놔둬 버렸다고 했던가?
심호흡을 한 장기태가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오전 10시 반, 방배동의 회사 회장실 안이다. 통화중인 상대방은 대한산업의 박민수 회장. 장기태와는 10여 년간 친분을 맺어온 사이로 형님, 동생 하는 사이다. 대한산업은 방위산업업체로 연간 매출이 2조원에 가까운 중견기업이다. 그때 박민수가 말했다.
“장회장, 어렵겠는데. 그쪽도 여유가 없는 모양이야.”
순간 가슴이 턱 막힌 장기태가 입만 벌렸고 박민수의 말이 이어졌다.
“열흘쯤 전에 다 나갔다고 하는군. 자금이 회수되려면 내년 여름이나 된다는 거야.”
장기태가 겨우 입을 다물었다. 절망감으로 눈앞이 흐려졌고 호흡까지 가빠졌다. 박민수는 마지막 카드였기 때문이다. 아니, 박민수가 소개시켜줄 사금융의 대부 윤회장이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다. 모든 곳이 다 막혔기 때문에 박민수의 보증으로 윤회장으로부터 돈을 빌려 다가오는 어음을 상환하려고 했던 계획이 무너졌다.
“장회장, 괜찮은가?”
걱정이 되는지 박민수가 물었으므로 장기태는 정신을 차렸다.
“예, 형님. 염려하지 마십시오. 다 잘될 겁니다.”
“기운 내, 이 사람아. 천하의 동명건설이 3천억으로 쓰러질 리가 있어? 채권 은행이 가만두지 않을 거네.”
“뭐 그러게 심각한 건 아닙니다.”
박민수의 말에 엉겁결에 그렇게는 말했지만 3억이 모자라 대그룹이 부도가 날 때도 있는 것이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장기태는 숨을 들이켰다. 아까부터 계속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오후 1시 반, 김가영은 핸드폰을 귀에 붙인 다음 발신음 소리가 10번 울린 것을 듣고 나서 떼었다. 두 번째 전화다. 이윽고 김가영은 문자 창을 열고 글로 썼다.
‘오늘 어디로 예약했어? 바쁘면 문자로 보내.’
오늘 장기태와 외식 약속을 한 것이다. 김가영이 말에 덧붙였다.
‘내가 곧장 약속장소로 갈게.’
그리고는 조금 미진한 느낌이 들었으므로 줄을 바꿔서 썼다.
‘사랑해.’
윤정수의 사금융은 회원들 사이에서는 ‘대일사’로 부른다. ‘대일종금’과 따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대일사는 자체 회사 체제를 형성하고 있지는 않아도 기획, 정보, 보안, 영업의 4개 부문으로 나뉘어져 관리하고 있다. 사무실만 모여 있지 않을 뿐이다. 박상호가 저택 응접실로 들어왔을 때는 오후 1시 45분이다. 소파 앞좌석에 앉은 박상호가 앞쪽에 서류를 놓더니 건성으로 말했다.
“사장님, 동명건설의 장기태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는데요.”
서류를 들추면서 박상호가 말을 이었다.
“오전 11시쯤 사무실에서 쓰러져 지금 제일병원에 실려갔지만 혼수상태라고 합니다.”
“....”
“만기 어음이 이달 말에 1,200억. 다음달에 500. 9월까지 모두 3,500억이 몰려오는데 장회장까지 쓰러져서 회사 회생이 어렵겠습니다.”
“....”
“박민수 회장이 보증을 선다고 했지만 자금을 빌려주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머리를 든 박상호가 쓴웃음을 지은 얼굴로 윤성일을 보았다. 장기태의 대출 요구를 거부한 것은 동명건설의 재무구조가 나빴기 때문이다. 박민수의 보증이 있다고 해도 해당업체의 상태가 나쁘면 거절하는 것이 대일사의 방침인 것이다.
오후 1시 55분,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주방에 있던 김가영이 뛰어왔다. 탁자위에 놓인 핸드폰을 들어 본 김가영의 머리가 기울어졌다. 발신자 번호가 찍혀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김가영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김가영의 목소리가 울린 순간 윤성일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눈을 크게 뜨고 앞쪽을 응시했지만 머릿속이 안개로 꽉 찬 느낌이 들었다. 김가영의 목소리. 20개월 전과 똑같다. 횟수로 2년. 목소리가 변하지 않은 것이 조
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때 김가영이 다시 부른다.
“여보세요.”
그때 윤성일은 통화 정지 버튼을 눌렀다.
별장 응접실에서는 아래쪽 산골짜기가 보인다. 저택 위치가 산 중턱이기 때문이다. 6월 중순이어서 산은 진녹색 숲으로 부풀어 올랐고 골짜기를 흐르는 개울물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곧 목소리가 울렸다.
“장기태가 혼수 상태인 것은 들으셨지요?”
최기용이다. 몸을 돌린 윤성일을 향해 머리를 숙여 보인 최기용이 다가와 섰다. 윤성일이 따로 최기용을 부른 것이다. 그래서 본채 응접실에서는 박상호로부터 사업상 보고를 받고 이곳에서 최기용한테서 개인사 보고를 듣는다. 최기용이 말을 이었다.
“장기태는 지금 산소호흡기로 연명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 식물인간이 될 것 같다는 판정을 받았는데 조만간에 가족의 동의 하에 호흡기를 뗄 것 같습니다.”
최기용이 들고 있던 서류를 펼치면서 말을 이었는데 한번도 윤성일한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동명건설은 이번 달 안에 부도가 날것이고 회사는 공중분해가 됩니다. 부채가 많아서 은행 채무와 미불금까지 처리하려면 사주 장기태의 재산은 모두 압류가 됩니다.”
윤성일은 길게 숨을 뱉고 나서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2시 반이다. 장기태는 아직 호흡하고 있지만 야수들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그림이 그려졌다. 그때 최기용이 머리를 들고 윤성일을 보았다.
“김가영의 아파트도 은행 담보에 들어가 있습니다. 곧 아파트를 비워줘야 될 것입니다.”
“....”
“명의는 김가영 앞으로 해놓았지만 석달 전에 회사 자금사정이 나빠지면서 장기태가 은행에 담보로 넣었습니다.”
그때 윤성일이 머리를 끄덕였으므로 최기용이 서류를 탁자위에 내려놓더니 목례를 하고나서 몸을 돌렸다.
핸드폰이 울린 순간 김가영의 눈이 크게 떠지면서 얼굴에 순식간에 웃음이 번져졌다. 발신자 번호가 떴기 때문이다. 장기태의 번호다. 이 번호는 장기태가 가진 세 개 핸드폰 중 하나로 김가영과의 통화에만 사용되는 것이다. 호흡을 고른 김가영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서둘 것 없다. 지금까지 장기태에게 세 번 전화를 했고 두 번 문자를 보낸 후에 차분하게 기다렸던 것이다. 항상 회의에 바쁜 사람이어서 어떤 때는 여덟 시간을 회의한 때도 있었으니까, 이제는 장기태의 습성에 익숙해진 김가영이다. 핸드폰을 귀에 붙인 김가영이 외식 장소로 크리스탈 호텔 양식당이 낫겠다고 마음을 바꾸었다. 조금 전까지는 일식당이었다. 장기태가 예약을 하면 된다. 지금은 오후4시, 저녁 식사는 7시면 된다. 시간은 충분하다. 김가영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김가영이 소리치듯 응답했다.
“자기야?”
“저, 비서실의 윤병수입니다.”
낮고 억양 없는 사내의 목소리에 김가영은 주춤했지만 기다렸다. 회장이 시켰겠지, 그때 사내가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서 조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방배동의 ‘루즈’클럽은 회원제로 운영이 되었는데 골목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다 분위기도 우중충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 단골이 유명 탤런트, 가수, 모델들이며 회원이 되려면 엄격한 심사를 거친다는 것을 모른다. 오후 8시 반, 종업원의 안내를 받은 윤성일이 C룸으로 들어서자 전세희가 웃음 띤 얼굴로 맞았다.
“내가 먼저 한잔 하고 있어.”
술잔을 들어 보인 전세희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다. 테이블에는 이미 술과 안주가 가득 벌려져 있었으므로 전세희가 윤성일의 잔에 술을 채웠다.
“여기 회원 되기 힘들다고 하더구나.”
술잔을 받은 윤성일이 방안을 둘러보며 말하자 전세희가 피식 웃었다.
“그럼, 아무나 회원 되는지 알어? 회원도 돈만 많다고 시켜주는 거 아냐.”
“회비는 얼마 내는데?”
“그건 알 필요가 없고.”
한 모금 술을 삼킨 전세희가 지그시 윤성일을 보았다. 전세희는 머리를 짧게 잘라서 마치 장발의 미소년 같다. 흰색실크 블라우스에 검정색 스커트를 입었는데 전보다 얼굴이 여위었다. 불빛을 받은 두 눈에 습기가 많이 끼었다. 전세희의 시선을 받은 윤성일이 술잔을 들었다. 오늘 만남은 윤성일이 연락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과 장소는 전세희가 정했다. 윤성일이 입을 열었다.
“너, 내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니?”
“응? 누구?”
되물었던 전세희가 픽 웃었다.
“오빠 아버지?”
“그래.”
전세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여전히 웃음 띤 얼굴이다.
“내 아버지를 강조한 이유가 뭐야?”
“아버지가 널 참 이뻐하셨는데, 친딸처럼 여기셨고 말야.”
“바로 그거군.”
한 모금에 술을 삼킨 전세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날 배신자로 몰아붙이려고.”
“정신 좀 차리라는 거다.”
윤성일도 한 모금 술을 삼키고는 지그시 전세희를 보았다.
“너, 어머니한테 무슨 감정이 있니?”
하고나서 윤성일이 덧붙였다.
“우리 어머니 말야.”
“우리 어머니?”
전세희가 되물었다.
“오명화 여사 말야?”
“그렇다.”
“그 여자가 왜 우리 어머니야? 내 엄마지.”
“바로 이거군.”
입맛을 다신 윤성일이 제 잔에 술을 따르면서 말을 잇는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되었어. 너하고 어머니하고의 불화.”
“웃기지마 윤성일.”
“너, 나하고 잘 자신 있어?”
술잔을 든 윤성일이 지그시 전세희를 노려보았다. 술잔이 전세희의 콧날과 일직선상에 놓여졌다.
“홀랑 벗고 섹스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난 섹스 잘해. 너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말야.”
전세희의 눈빛이 강해졌으나 입도 꾹 닫쳐졌다. 다시 윤성일이 말을 이었다.
“전위로 시작했다가 후배위로, 다시 옆으로, 그땐 다리 한쪽을 번쩍 올려야지. 그런 다음 후배위로 들어가면 대부분이 폭발한다.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두드려주면 좋아하는 애들이 많아.”
“....”
“그래, 내 밑에 깔려 탄성을 질러대는 널 상상해본 적 있냐? 있겠지. 물론.”
“....”
“골짜기에서 넘쳐흐르는 질펀한 애액, 쾌락으로 몸부림을 치면서 매달리는 네 벌거벗은 몸. 오빠, 날 죽여줘! 하겠지.”
“개새끼.”
마침내 전세희가 잇사이로 말하고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두 눈이 더 번들거리는 것 같더니 곧 두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전세희는 눈도 깜박이지 않는다. 그때 윤성일이 한 모금에 술을 삼키고는 조용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우리 개가 되어볼래?”
첫댓글 김사~
즐감요
굿,,즐감,,,
^^
즐감요~
즐감하고 갑니다.
잘 읽고 갑니다^^
즐감요
감사히 잘봤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즐감 하고 감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
감사...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