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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이사야서의 말씀 50,4-7>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 2,6-1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 복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마르코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14,1―15,47>
1 파스카와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까 궁리하고 있었다.
2 그러면서 “백성이 소동을 일으킬지 모르니 축제 기간에는 안 된다.” 하고 말하였다.
3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마침 식탁에 앉아 계시는데, 어떤 여자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4 몇 사람이 불쾌해하며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 여자를 나무랐다.
“왜 저렇게 향유를 허투루 쓰는가?
5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
6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가만두어라.
왜 괴롭히느냐?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7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으니, 너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잘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8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바른 것이다.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10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수석 사제들에게 팔아넘기려고 그들을 찾아갔다.
11 그들은 그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그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2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13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14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15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
16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17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셨다.
18 그들이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19 그러자 제자들은 근심하며 차례로 묻기 시작하였다.
“저는 아니겠지요?”
2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로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는 사람이다.
21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2 제자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23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2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26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2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28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29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30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31 베드로가 더욱 힘주어 장담하였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결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32 그들은 겟세마니라는 곳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기도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그런 다음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그분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
34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35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조금 나아가 땅에 엎드리시어, 하실 수만 있으면 그 시간이 당신을 비켜 가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시며,
36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37 예수님께서 돌아와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38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39 예수님께서 다시 가셔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40 그리고 다시 와 보시니 그들은 여전히 눈이 무겁게 내리감겨 자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랐다.
41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오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42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43 그러자 곧,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다가왔다.
그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44 그분을 팔아넘길 자는,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아 잘 끌고 가시오.” 하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두었다.
45 그가 와서는 곧바로 예수님께 다가가 말하였다.
“스승님!”
그러고 나서 입을 맞추었다.
46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
47 그때 곁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
48 예수님께서 나서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리된 것이다.”
50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51 어떤 젊은이가 알몸에 아마포만 두른 채 그분을 따라갔다.
사람들이 그를 붙잡자,
52 그는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53 그들은 예수님을 대사제에게 끌고 갔다.
그러자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 모두 모여 왔다.
54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뒤따라 대사제의 저택 안뜰까지 들어가, 시종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55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그분에 대한 증언을 찾았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56 사실 많은 사람이 그분께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였지만, 그 증언들이 서로 들어맞지 않았던 것이다.
57 더러는 나서서 이렇게 거짓 증언을 하기도 하였다.
58 “우리는 저자가, ‘나는 사람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59 그들의 증언도 서로 들어맞지 않았다.
60 그러자 대사제가 한가운데로 나서서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
이자들이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어찌 된 일이오?”
61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무신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대사제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
62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63 대사제가 자기 옷을 찢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이 더 필요합니까?
64 여러분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단죄하였다.
65 어떤 자들은 예수님께 침을 뱉고 그분의 얼굴을 가린 다음, 주먹으로 치면서 놀려 대기 시작하였다.
“알아맞혀 보아라.”
시종들도 예수님의 뺨을 때렸다.
66 베드로가 안뜰 아래쪽에 있는데 대사제의 하녀 하나가 와서,
67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를 보고 그를 찬찬히 살피면서 말하였다.
“당신도 저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지요?”
68 베드로는 부인하였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겠소.”
베드로가 바깥뜰로 나가자 닭이 울었다.
69 그 하녀가 베드로를 보면서 곁에 서 있는 이들에게 다시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 사람은 그들과 한패예요.”
70 베드로는 또 부인하였다.
그런데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던 이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갈릴래아 사람이니 그들과 한패임에 틀림없소.”
71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말하였다.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72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다.
15,1 아침이 되자 수석 사제들은 곧바로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 곧 온 최고 의회와 의논한 끝에,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겼다.
2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3 그러자 수석 사제들이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고소하였다.
4 빌라도가 다시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
보시오, 저들이 당신을 갖가지로 고소하고 있지 않소?”
5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상하게 여겼다.
6 빌라도는 축제 때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풀어 주곤 하였다.
7 마침 바라빠라고 하는 사람이 반란 때에 살인을 저지른 반란군들과 함께 감옥에 있었다.
8 그래서 군중은 올라가 자기들에게 해 오던 대로 해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9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10 빌라도는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1 그러나 수석 사제들은 군중을 부추겨 그분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
12 빌라도가 다시 군중에게 물었다.
“그러면 여러분이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13 그러자 군중은 거듭 소리 질렀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14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군중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15 그리하여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16 군사들은 예수님을 뜰 안으로 끌고 갔다.
그곳은 총독 관저였다.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17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서는, 이렇게 말하며 인사하기 시작하였다.
18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19 또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하였다.
20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자주색 옷을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21 그들은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그는 키레네 사람 시몬으로서 알렉산드로스와 루포스의 아버지였는데,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이었다.
22 그들은 예수님을 골고타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이는 번역하면 ‘해골 터’라는 뜻이다.
23 그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건넸지만 그분께서는 받지 않으셨다.
24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고 나서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는데 누가 무엇을 차지할지 제비를 뽑아 결정하였다.
25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
26 그분의 죄명 패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쓰여 있었다.
27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28)·29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그분을 이렇게 모독하였다.
“저런!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30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31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함께 조롱하며 서로 말하였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32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33 낮 열두 시가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34 오후 세 시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이는 번역하면,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35 곁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였다.
“저것 봐! 엘리야를 부르네.”
36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예수님께 마시라고 갖다 대며 말하였다.
“자,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봅시다.”
37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무릎을 꿇고 잠깐 묵상한다.>
38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39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40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41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그분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42 이미 저녁때가 되어 있었다.
그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었으므로,
43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빌라도에게 당당히 들어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명망 있는 의회 의원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열심히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44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벌써 돌아가셨을까 의아하게 생각하여, 백인대장을 불러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느냐고 물었다.
45 빌라도는 백인대장에게 알아보고 나서 요셉에게 시신을 내주었다.
46 요셉은 아마포를 사 가지고 와서, 그분의 시신을 내려 아마포로 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시고, 무덤 입구에 돌을 굴려 막아 놓았다.
47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분을 어디에 모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도 언제나 변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항구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결정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굶주리면 달라붙고 배부르면 떠나가며 따뜻하면 몰려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채근담)이 사람의 약점 중 하나입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으면 좋겠는데 인간의 마음은 흔들비쭉입니다.
흔들림 없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에 올라앉으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때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습니다.
또 어떤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습니다.
그리고는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마르 11,1-10).
정말 군중들은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마르 15,1).
빌라도는 군중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유다인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그러자 유다인들은 거듭 소리를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마르 15,13)
빌라도가 다시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하고 묻자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르 15,14) 하고 외쳤습니다.
환영하던 마음은 어디 가고 십자가에 못을 박으라는 말만 하고 있는지 가슴이 아픕니다.
유다인의 명절인 과월절 기간에 로마 총독이 정치범 한사람을 놓아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광복절 특별사면’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이 기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의 선동에 많은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을 박으라고 외쳤고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 예수를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주었습니다(요한 15,15).
소신 있게 판결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군중의 목소리에 따라가고 말았습니다.
소위 여론정치요, 인기정치였습니다.
이제 수석사제들도 율법학자들도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마르 15,31-32)하며 예수님을 더욱 조롱했습니다.
모욕과 조롱을 일삼는 것은 아마도 그들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켕기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이는 두려움을 모릅니다.
사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떳떳하고 당당하면 어떤 처지에서도 흔들림이 없고 그저 침묵하며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켕기는 것이 있으면 더 큰 소리를 내며 변명을 하게 됩니다.
방귀 꾼 놈이 성을 낸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침묵 속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까지도 주셨습니다.
과연 우리의 일상 안에서 나를 모함하고 헐뜯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침묵하며 기다릴 수 있을까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엉뚱한 구설수에 오르게 될 때 묵묵히 소문을 낸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요?
아직은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도 회개해야 하고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지금은 사랑할 때이고 기도할 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가장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으련만 도리어 발길로 채이고 맙니다.
사실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멀리 안보이면 괜찮은데 늘 가까이에서 보니 잊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그러나 힘이 드는 만큼 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힘든 상황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마르 15,34)하시며 더 간절히 아버지의 뜻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거기에 서 있던 백인 대장이 그분이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8)고 고백합니다.
그분의 정체를 모두가 안 것은 아니었지만 몇몇 여인들이 그분의 임종을 지켜 드렸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신 주님을 알아본 사람은 복됩니다.
그리고 임종을 지킨 여인들도 주님의 임종을 지켰으니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이들도 있었지만 끝까지 주님을 지킨 이들도 있습니다.
기왕이면 끝까지 주님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믿음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뒤늦게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본 백인대장처럼 늦게나마 주님의 정체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배신의 삶은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농담 삼아 ‘신자 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는 배신자’라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도 일상 안에서도 결코 배신하지 않는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 = 어린 나귀(겸손) + 어린 양(온유)>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전례에서 메시아요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분명 어린 나귀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왕은 말을 타야 정상이겠지만, 예수님은 마치 당신이 받는 영광에 합당하지 않은 듯 어린 나귀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는 분명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이 실현되기 위해 그리하신 것입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즈카 9,9)
제가 요즘 많이 묵상하는 주제는 다 아시다시피 ‘군고구마’입니다.
사랑이 되는 것을 잘 표현해주는 상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어린 나귀’는 바로 ‘고구마’를 나타냅니다.
‘겸손’입니다.
내가 고구마보다 더 잘난 사람으로 느낀다면 사랑은 틀렸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남을 위해 양식이 되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심으로써 그런 겸손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전례에서 예루살렘 입성 예식 후 본당에서 하는 미사 전례 복음은 마르코 수난기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침묵’이 두드러집니다.
어차피 죽을 거 괜히 반박하거나 변명을 하지 않으십니다.
이때 예수님의 모습은 ‘어린 양’으로 상징됩니다.
이런 모습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이사 53,7)라는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그래서 사랑이십니다.
겸손하심이 ‘어린 나귀’로 상징된다면, ‘온유함’은 어린 양으로 상징됩니다.
이 겸손과 온유가 합쳐지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겸손이 자신을 고구마로 느끼는 것이라면, 온유함은 에어프라이어에 들어가 잠자코 있는 마음입니다.
그래야 누군가를 위해 맛있는 군고구마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노신임 작가의 『7년간의 마법 같은 기적』이란 책이 있습니다.
치매 걸린 아버지를 위한 딸의 고통스럽지만 기분 좋은 사랑을 그렸습니다.
노신임 작가가 직접 아버지께 한 사랑입니다.
그 모습엔 군고구마 맛이 납니다.
어린 나귀와 어린 양, 곧 겸손과 온유가 다 들어있습니다.
한 가지 에피소드만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집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풀풀 나기 시작했다.
거실 화분 옆에 작고 둥근 물체가 떨어져 있었다.
똥이었다.
며칠 후 결정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아빠가 거실을 걷고 있는데 아빠 옷자락에서 작은 물체가 툭 튀어나와서 거실 수납장 쪽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엄마 말대로 똥의 주인은 아빠였다.
마치 농부가 정성스레 씨를 뿌리듯 아빠는 똥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녔다.
어느 날엔 집안 사방팔방 똥으로 보이는 것들이 수두룩했다.
아빠는 기저귀 착용을 완강히 거부했다.
오랜 궁리 끝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일명 기저귀 패션쇼.
원래 남이 하기 싫은 건 나도 하기 싫은 법이다.
반대로 남들이 즐거워하는 것은 나도 하고 싶어진다.
‘기저귀 차는 일이 즐겁고 행복한 일임을 보여주자. 그러면 아빠도 기꺼이 기저귀를 찰 것이다.’
다음 날부터 츄리닝 위에 기저귀를 덧입었다.
일부러 집안 곳곳을 배회했다.
아빠는 놀라는 반응이었다.
‘신임아, 너 그게 무슨 옷차림이냐?’
‘어 이거 나 기저귀 찬 거야.
아빠, 몰랐구나. 요즘엔 기저귀 차는 게 유행이야.
색상도 되게 다양하게 나와 있어.
핑크색 입으려다가 많이 튈까 봐 이거 하얀색 입은 건데.
이 기저귀 입으면 복이 온대.
앉아도 푹신하고 골반을 착 잡아줘서 고관절도 튼튼해진대.’
나의 기저귀 패션쇼는 1주, 2주, 3주가 지나도록 외롭게 진행되었다.
여전히 아빠는 기저귀를 거부했다.
또다시 일주일쯤 지났을 때 아빠가 날 불렀다.
‘신임아, 그거 그렇게 입을 만하냐?
기저귀 말이야.’
순간 너무 놀라 기절할 뻔했다.
그렇게 아빠의 기저귀 착용이 시작되었다.”
[출처: ‘7년간의 마법 같은 기적’, 유튜브 채널, ‘책한민국’]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되는 것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되는 방법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온유함과 겸손으로 타인을 위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위 이야기에서 노신임 작가는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하지만 중증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위한 거짓말은 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랑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아버지를 위해 다 큰딸이 기저귀를 차고 1달 동안 집을 돌아다니는 모습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그 사랑이 아버지도 기저귀를 차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사랑도 이러한 모습을 닮지 못하면 오늘 나귀를 타고 들어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노력이 우리에겐 헛것이 될 것입니다.
자존심 내려놓고, 고구마임을 인정합시다.
사실 주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지 않으셨다면 고구마보다도 못한 존재일 수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리고 상대의 구미에 맞게 십자가에서 구워집시다.
사람들이 나를 먹고 자신도 그런 기저귀를 차고 싶어진다면 성공한 것입니다.
그 기쁨은 그동안의 노고를 다 잊게 해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이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그러한 군고구마 사랑도 주님 마음에 길이 기억될 것입니다.
우리가 고구마임을 기억하게 만드는 어린 나귀를 탄 그리스도와 구워져야 한다는 십자가 위의 어린양의 모습을 항상 바라봅시다.
그러면 매일 조금씩 더 맛있게 구워져 더 큰 사랑이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특유의 유머 감각을 마음껏 발휘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은 스승님께서 만왕의 왕이요 세상의 구원자로서 그에 걸맞은 화려한 입성을 잔뜩 기대했습니다.
멋진 한쌍의 백마가 이끄는 화려한 마차를 타고 입성하시지 않을까 꿈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계획이 참으로 의미심장하고 꽤나 코믹합니다.
예수님의 왕권에 대한 허황되고 그릇된 기대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깜짝 이벤트를 준비하셨습니다.
“너희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
(마르코복음 11장 2절)
예수님이 선택한 입성 수단은 준수하게 생긴 백마가 아니라 어린 나귀였던 것입니다.
언젠가 해외여행 중에 나귀를 타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 마주하는 순간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이건 말도 아니고 말이 아닌 것도 아니고. 생긴 것도 작고, 볼품없고, 생뚱맞게 생겼더군요.
나귀를 모는 소년과 제가 녀석의 등에 올라 비탈길을 오르는데, 얼마나 힘겨워하는지 불쌍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계속 헥헥 대는데, 이러다 고꾸라지지 싶어 내려서 걸어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을 통해 세상 사람들의 세속적인 기대와 갈망을 여지없이 뭉개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치적 해방자가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어린 나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크고 존귀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가장 작고 볼품없는 어린 나귀를 타고 하느님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는 것, 크고 휘황찬란한 것들만 선호하는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은 즈카르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미리 예언된 바 있습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즈카르야서 9장 9절)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지만 제자들과 군중들은 큰 존경과 예의를 표하는 의미로 겉옷을 벗어 나귀 등에, 그리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길 위에 깔았습니다.
“제자들은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자,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입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마르코복음 11장 7~8절)
그리고 마치 예수님을 호위하듯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따라가면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마르코복음 11장 9~10절)
호산나는 히브리 말로 ‘hoshiah-na’, ‘지금 즉시 구원하소서!’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당시 군중들이 익히 알고 있던 외침, 구원과 도움을 바라는 외침이었습니다.
당시 이 시편은 유다 큰 축제 때마다 불려졌습니다.
과월절 새끼 양이 성전에서 도살될 때, 각 가정에서 파스카 예식을 행할 때 불려졌습니다.
어린 나귀!
창조주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타시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동물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특유의 유머 감각을 마음껏 발휘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탄생 때부터 시작해서 죽음의 순간까지 시종일관 계속된 예수님의 겸손, 아래로의 행보가 돋보이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성지 주일>
잘 아시다시피 사순 제6주일은 두 가지 의미를 같이 기념합니다.
하나는 성지주일이고 다른 하나는 수난주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대부분의 신자가 성 금요일 수난 예식에 참여치 못하거나 않기에 마지막 주일에 두 가지를 같이 기념하는 겁니다.
그러나 저는 성 금요일에 주님 수난에 대해 강론을 올릴 것이기에 올해는 성지주일 강론을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주일의 명칭도 성지주일이 아니라 예루살렘 입성 주일이라고 마음대로 이름을 바꾸어 지내고자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입성에는 주님의 입성과 제자들의 입성이 같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상이몽이라고 할까 입성의 목적이 다릅니다.
예루살렘 입성 전 주님은 당신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어떻게 수난을 당하고 어떻게 돌아가실지 세 번이나 예고를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에게는 예루살렘이 수난과 죽음의 현장이 아니라 자기들 꿈이 이루어지는 곳일 뿐이고 사람들이 주님을 '다윗의 후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이라고 부를 때 한껏 고무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보고싶은 것을 보는' 현상을 여실하게 보게 됩니다.
제가 미국 메릴랜드에서 살 때 뉴욕을 한 달에 한 번씩 다녀왔는데, 기차를 타면 필라델피아에서 한번 정차를 하고 새로운 사람을 태웁니다.
한번은 제가 사람이 타건 말건 올라가서 강의할 것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저 뒤에서 소곤소곤 한국말 하는 것이 제 귀에 그대로 들리는 거였습니다.
바로 제 옆에서 하는 영어는 안 들리고 꽤 떨어진 곳에서 하는 한국말이 들리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아이 중에서 자기 아이를 즉시 알아보는 것과 같은, 사랑하는 것을 보고, 원하는 것을 보고, 보고 싶은 곳을 보는 현상이지요.
그리고 사랑이, 원하는 것이, 보고 싶은 것이 너무도 크고 간절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그것만 보이는 현상도 일어납니다.
그러니 주님도 어쩔 수 없어 사람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고 제자들이 들떠서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둡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나 제자들 모두 들떠 있고, 그 상태에서 보는데, 이런 상태에서는 뭔 말을 해도 들리지 않기에 주님도 내버려둡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들뜬 눈'을 경계해야 합니다.
들떠 있다는 것은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말 그대로 떠 있는 것이기에 이내 곤두박질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들떠 있을 때 본 거짓 희망이 참 희망을 가려 참 희망을 못 보게 하고, 곤두박질쳤을 때는 오히려 절망만 보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이런 들뜬 눈은 사랑의 눈이 결코 아닙니다.
사랑의 눈은 현실을 그대로 보고 현실을 사랑으로 보게 하지만, 들뜬 눈은 헛된 꿈과 거짓 희망으로 자기를 기망(欺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로또 당첨이나 주식 투자나 성공 예감 같은 것이 우리를 망치고, 수난 예고나 모욕과 질타나 곤두박질이 오히려 우리를 현실에 발붙이고 부활의 참 희망을 꿈꾸게 하는 것임을 오늘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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