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XX영아원 아름다운 동산에...! ****
1967년 2월말,
어느 날 나는 셋째누님의 손에 이끌리어 형님의 허락도 없이 집을 탈출하여 대전 삼성동의 어느 영아원 푸른색 페인트칠을 한 철대문의 초인종을 눌렀다. 떨리는 가슴으로...
곧이어 문이 열리고 우리는 영아원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 가운데 아주 둥그렇고 커다란 향나무가 있으며 안으로 길게 고아들의 방이 있고 양 옆으로 안채와 사무실이 위치하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나는 영아원 여자 원장님께 소개가 되었고 이 꺼벙한 시골 총각은 초면부터 원장님과 담판을 했다.
- 낮에는 열심히 일을 할 테니 밤에는 야간상고를 다닐 수 있도록 해 주십시요.
키가 땅딸막하고 몸이 통통하고 야무져 보이는 여자 원장님은 속으로,
- 호 ! 시골 녀석이 꽤나 당돌한데...??
하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 그래, 네 소원대로 약속을 하마. 그런데 중학교는 다녔느냐 ?
아이구 ! 감사해라. 그런데 왜 남 아픈 곳을 긁으시나 !
- 아니요. 검정고시를 보려고 해요.
- 흠. 그래...
또래 같으면 고등학교 2학년에 다닐 나이에 겨우 이제 중학교 졸업장과 같은 검정고시를 보겠다고 하니 원장님은 별로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면접시험은 쉽게 끝나고 나는 이제부터 당당하게 영아원 직원이 된 것이다.
대우는, 당시에 신학교를 다니던 이천세 선배님과 방을 같이 사용하고 식사를 제공받고 월급은 거금... 놀라지 마십시요...
800원... ㅎㅎㅎㅎ
기억으로 당시의 이발요금이 50원 정도였으니까 현재의 돈으로 약 20만원은 될 것이다. 그때 보모들의 봉급은 2,000원이었다.
봉급보다도, 솔직히 말해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연무대 우리 집보다 더 좋았다.
무엇보다 방안에 형광등이 있었으니... 당시 시골집에는 석유등잔을 사용하고 전깃불도 들어오지 아니할 때였었다.
XX영아원 아름다운 동산에
모두 예쁜 어린이만 모였어요.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 떠들지 않고
동무들을 귀찮게 하지 안 해요 !
고아 어린이들이 목청껏 부르는 노래가 옆에서 들려왔다.
그래 나도 이제 XX영아원의 예쁜 어린이가 된 셈으로 생각하자 !
자, 이제부터 6년간의 영아원 시절의 애환이 시작된다.
잠실 베레모
**** 박 군의 하루일과란? ****
XX영아원은 원생이 약 100 명, 직원이 약 20 명, 원장님 가족이 4 명 등 모두 120 여명의 대가족이었는데 총무 아저씨가 사무를 보았고, 간호원 선생님 한분과 보모들 열댓 명, 침모 아주머니 한분, 그리고 막내로서 나 - 박 군이 있었으니 120 명 식구의 바깥일, 다시 말해서 온갖 허드렛일은 모두 내차지였다.
아침에 먼동이 트면 일어나서
- 매일 새벽 마당 쓸고 연탄재와 쓰레기 치우기
(연탄재만도 한 리어카가 되었으며 쓰레기장이 영아원에서 자꾸 멀어지고 나중에는 버릴 곳이 없어 쩔쩔 매야 했다.)
- 연탄창고 관리
- 정원수 관리
- 창고 물품관리
- 닭, 강아지 키우기
- 화장실 청소
- 창문 바르기와 방충망 관리
- 금붕어 어항 관리
- 시장에서 짐 들어오기
- 화물 찾아오기, 포장 및 배송
- 연탄아궁이 고치기
- 방 도배하기
- 단수 때에 우물물 길어오기
- 초인종 울리면 대문 열어주기
- 대문, 기타 벽 등에 페인트 바르기
- 다른 사회복지시설과의 심부름
- 때로는 그 많은 연탄불 갈기도 !
- 장작 만들기
- 빨래터에 빨래함박 나르기
- 장마철에 지하실 물 퍼내기
- 간장 달이기
- 김장철 무 파묻기
- 총무님 사무도와 주기
- 방구들 고치기
- 영아들 장례까지...
새벽 눈을 뜨고 저녁 10시쯤 잠자리에 든 후에도 초인종이 울리면 뛰어나가야 했었다. 아무튼 시골 꺼벙이는 지금 내가 생각해도 기똥차게 일을 잘했고, 또 열심히 하여 온갖 신망을 모두 받았다.
어휴... 내 자랑...
잠실 베레모
첫댓글 그 삶이 어느덧 지나간 추억으로 변하였습니다..참 빠르죠..ㅎㅎㅎㅎㅎ
이제는 어쩔수없이 저도 과거를 먹고 사는 나이가 되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