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않으면 이길 수 있다"
역대 가장 험난한 우승이었다. '슈퍼맨' 조재호(NH농협카드)는 아마추어 무대와 프로 무대를 모두 섭렵한 몇 안 되는 선수고, 우승 경험도 손가락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런데 이번 우승처럼 힘겨웠던 순간은 드물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조재호는 세계대회 결승이나 준결승에서 유럽의 선배 강자들과 겨루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프로당구(PBA) 투어에 와서는 유독 후배들의 역습이 날카로워졌고, 과거에는 실력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던 선수들이 그보다 정상에 올라 있기도 하다.
위아래나 앞뒤로나 여러모로 승부는 까다롭고 험난해졌다. 이번 시즌 7차 투어 '하이원리조트 챔피언십'은 이러한 기류의 절정을 보여준 대회였다.
조재호는 8강에서 만난 91년생 이영훈(에스와이)에게 벼랑 끝까지 몰렸다. 세트스코어 2-2, 풀세트 10:10의 피 말리는 승부였다. 힘겹게 살아남은 조재호는 다음 날 93년생의 스페인 신성 안토니오 몬테스(NH농협카드)와 준결승에서 패배 2점을 남겨두고 동점을 만들어, 또 11:10의 역전승을 거뒀다.
몬테스는 NH농협카드 팀원으로 팀리그에서 선봉에 서 있는 조재호를 착실하게 돕고 있는 '특급소방수'로 정평이 나 있는 선수다.
시간문제일 뿐 몬테스는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선수이기 때문에 아무리 조재호라고 해도 쉽지 않은 상대다. 결과는 조재호의 완패로 끝날 뻔했던 승부였다.
중반이 다 되도록 조재호는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반면에 몬테스는 20번의 타석에서 45점을 쳐 세트스코어 3-1을 만들더니 5세트도 5이닝에 7점을 쳐서 11:6, 7이닝에는 13:8까지 달아나며 결승행을 단 2점 남겨놓았다.
그런데 이 승부가 뒤집혔다. 몬테스가 딱 두 번 마무리에 실패했을 뿐인데, 조재호가 이 순간에 갑자기 살아났다. 6세트도 11:9로 앞선 몬테스가 4점을 남겨두면서 패색이 다시 짙어졌는데 5이닝에서 조재호의 끝내기 6점타가 터지면서 11:15로 뒤집혔다.
마지막 7세트에는 조재호가 2이닝 만에 9점을 쳐 9:2로 앞섰는데, 이번에는 몬테스가 끈질기게 따라붙어서 10:10 동점을 만들었다. 결국, 매치포인트에서 승리의 여신은 다시 한번 조재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처럼 어린 후배들의 도전이 매서웠던 이 험난했던 승부의 결과에 대해 조재호는 "신이 도와준다고 생각했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 같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8강전이 열리는 날 오전에 기자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조재호는 "세트제 승부는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는 경기다. 그래서 상대가 누구든지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기본기와 집중력이 좋은 2, 30대 선수들이 점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프로당구 투어가 점점 더 험난해지고 있는 이유다. 다음은 고전 끝에 통산 4승을 수확한 조재호가 결승전 후 현장에 있던 기자들과 인터뷰한 내용이다.
경기 및 우승 소감은? 너무 기쁘다. 지난 시즌 월드챔피언십 우승 이후 이번 시즌 개막전부터 1회전(128강) 탈락은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32강~8강에서 탈락이 반복되다 보니 이게 더 좋지 않더라. 4강 이상의 입상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나는 이상하게 리조트 대회가 잘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프로 첫 우승을 블루원리조트에서 했다. 아무튼 좋은 기운으로 우승한 것 같다. 작년에도 하이원리조트에서 4강에 올랐었는데. 무엇인가 나를 도와주는 기분이었다.
8강과 4강에서 정말 힘든 경기를 펼쳤다. 앞서 힘든 경기가 결승전을 치르는 데 도움이 됐나? 이전 대회때는 8강과 4강에서 쉽게 이기면 항상 결승에서 지더라. ‘저승사자’라고 하지 않나. 죽다 살아나서 돌아오면 잘 친다는 말이 있다. 8강에서는 정말 졌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났다. 4강에서 같은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이건 우승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신이 도와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승 초반에 더욱 집중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결승을 돌아보면 레펀스 선수에게 공이 조금 아쉽게, 나한테는 풀어칠 수 있는 찬스가 왔다. 1세트 13:13 상황에서 레펀스 선수가 시도한 뱅크샷이 다소 두껍게 맞으면서 실패했고, 나에게 온 기회를 살린 것이 승부처가 됐던 것 같다.
4강전이 다소 늦게 끝났다. 휴식시간이 짧았는데. 어떤 준비를 했나? 재빠르게 내려가서 정선의 ‘곤드레밥 정식’으로 식사를 했다. 그리고 누워서 TV시청하면서 휴식을 취하다가 나왔다.
4강 1경기와 2경기 중 편한 경기는? 4강 1, 2경기를 모두 해봤는데, 두 경기 모두 장단점이 있다. 4강 2경기를 했을 경우에는 긴장을 풀지 않게 된다.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사실 오늘 조금 피곤했는데 경기에 들어가니 집중이 됐다. 4강에서 이긴 팀 동료 몬테스의 얼굴을 보니 더 힘이 났다. 만약 자기 관리를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첫 경기가 나을 것 같기도 하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두 번째 경기도 괜찮다.
4강 상대 몬테스를 평가하자면? 사실 그 친구를 유심히 본 적이 없었다. 지난 시즌, 이 대회에서 8강까지 올라왔고, 이번 시즌 NH농협카드의 팀 동료가 됐다. 생각보다 본인만의 당구가 확고했다. ‘이 친구는 무조건 잘 치겠다’ 생각했다. 스페인 아카데미에서 강사도 했던 경력이 있다. 당연히 자신만의 시스템이 많을 거로 생각했다. 경험만 쌓이면 무조건 잘 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하고 있다.
8강과 4강 중 더 힘든 경기는 어떤 경기였나? 똑같이 힘들었다. 8강전은 지난해 이 대회에서 8강에서 졌기 때문에 지기 싫었고, 4강에선 흐름이 너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경기 중간에 중계방송 채팅창에 떠 있는 욕이 떠오르더라. 그래서 끝까지 최선 다하는 모습 보여주자, ‘한 세트만 잡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면 오히려 리드하고 있는 상대가 불편하겠다 싶었다.
3:3 상황에서 7세트 역시 내가 초구부터 잘 치고 나갔는데, 실수 하나에 동점 등 마지막까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 기회를 몬테스 선수가 옆돌리기를 실패했는데, 보면서 ‘저거는 잘하면 빠질 수 있겠다’ 싶었다. ‘이건 우승하라는 징조다’ 싶었다. 돌이켜보면 두 경기 모두 가장 중요했던 점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수상 소감에서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언급했는데? 지난 11월 12일 ‘NH농협카드 챔피언십’ 32강전서 응우옌프엉린(하이원리조트) 선수에 패했다. 곧바로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더라. 발인이 언제냐 물으니 내일 새벽이라고 하더라. 시합하고 있으니, 이모들과 어머님이 일부러 연락을 안 하셨던 거다. 곧바로 달려가서 발인까지 마치고 잘 보내드렸다.
사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이 일을 하셔서 할머니 손에 컸다. 엄마 같은 할머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TV에서 내 경기만 찾아서 보시고, 경기도 의정부에 계셨기 때문에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뵀다. 이번 대회 오기 전에 할머니 생각하면서 다음 시합 때는 정말 열심히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께 우승을 선물 드리자는 마음으로 왔는데,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져 너무 기쁘다.
통산 상금랭킹도 3위로 올라섰는데? 맞다. 돈도 중요하다. (하하) 올해 벌써 7차전이 끝났다. 지난 시즌에는 잘했는데, 올해 성적을 못 내서 아쉬웠다. 일각에서는 ‘좋은 선수 몇 명 들어오니 조재호도 안 되네’라는 얘기도 들었다. 1년에 한 번씩 우승해야겠다는 목표를 잡았는데 시즌이 끝나기 전에 우승을 이루어서 다행이다.
결승에서 팬들이 ‘원래 알던’ 조재호로 돌아왔다는 얘기도 나오던데? 한층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된 대회였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마음이 중요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다 보니 역전이라는 것이 나왔다. 그래서 이 트로피까지 든 거다. 한순간도 포기하지 말자는 생각이 가장 중요했던 것 같다.
상대하기에 잘 알지 못하는 선수가 어렵나, 라이벌 등 유명한 선수가 어렵나? 라이벌과 경기하는 게 가장 편하다. 졌을 때 ‘질 수 있지’ 싶고, 부담이 없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는 선수와 경기가 잡히면 ‘그 경기는 이겼네요’ 할 때가 가장 부담스럽다. 이기는 게 어딨나. 세계 최강도 어디서 질지 모르는 것이 PBA다. 이름값이 떨어진다고 그 선수는 이겼다고 하면 나에게도 역시 상처가 된다.
그래서 부담스럽다. 만약 세미 사이그너나 다니엘 산체스와 경기하면 오히려 신난다. 그런 경기를 앞두고 있으면 ‘또 어떤 명승부가 나올까’, ‘관심이 집중이 됐으면 좋겠다’ 싶다. PBA가 잘 돼야 선수들도 좋은 환경에서 칠 수 있으니까. 좋은 선수들이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올해 큰 짐을 덜었는데, 더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이제 무조건 팀리그다. 개인 목표를 이루었으니, 우리 팀(NH농협카드)을 우승 시키는 게 가장 큰 목표다. 이제 4라운드가 시작하는데, 팀원들을 잘 다독여서 포스트시즌 정상까지 가겠다. 우선 우승했으니 우승턱 한번 쏘겠다 하하. 그리고 좋은 성적으로 팀리그 포스트시즌 마무리를 잘하겠다.
(사진=PBA 제공)
출처 : 더빌리어즈 https://www.thebilliards.kr/news/articleView.html?idxno=237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