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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선물을 사러 카스텔라 빵집에 들어갔는데 마침 1m짜리 카스텔라를 쇠 자로 자르고 있더이다. 와우, 핸드메이드 카스텔라는 머리털 나고 처음 봅니다. 오늘 운수 대통할 모양입니다. 성찬식 용으로 딱인데 예전에 왜 몰랐을까요? 크게 부풀어 올라 푹신푹신한 카스텔라는 우유나 커피와 잘 어울립니다. 요새 강남 빵집에 웨이팅이 100m 씩 선다는 데, 개인적으로 제과점의 스테디셀러는 카스텔라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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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에서도 카스텔라를 "Japanese Sponge Cake"라고 하는 걸 보면 원조가 일본으로 보입니다. 카스텔라 2개를 들고 태국 식당에 찾아갔더니 감동을 합니다. 선물 주고받은 지 한참 된 것 같습니다. 선물은 이 맛이지! "컴플레인 있으면 연락하시라!" 공주가 보내준 용돈을 가지고 갈빗집에 들어와 갈비-냉면-맥주를 시켜 쓸쓸하지 않을 만큼 배를 채웠습니다. 사람이 바글바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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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숍 상가 1층에 있는 '공인인증소(Cow)'가 안되는 이유는 에피 타이즈와 갈비 퀄리티에서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출발할 땐 여우비였는데 굵은 비가 후루룩후루룩 들이칩니다. 카카오 이 개색들은 이제 일반 콜은 아예 받지도 않아요. 콜비 3.000원을 추가 해놓고도 15분 만에 왔는데 땡큐 하고서 고 홈 했다는 것 아닙니까? 회를 테이크 아웃 하려고 했는데 비가 와서 펑크가 났고 오늘 영업은 5시 스타트합니다.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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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의 사각지대인 '다양성'과 '상대성'을 '보편적 개별성'으로 해결하려는 알랭 바디우(1937~현존) 리스펙트. 바디우에 의하면 진리는 '사건'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고 그것(사건)를 충실하게 따르고 지속되는 주체들을 계속 포섭함으로써 유지되고 나타납니다. 다만 진리는 진리 그 자체로 인식되지 못하며 그것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나중에, 후 역사적으로 증명될 뿐입니다. 결국 진리는 그 자체로 상황 속에서 평가되지 못하니까 미래적으로 밝혀질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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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들은 도래하는 주체, 출현하는 주체가 아닌가 싶네요. 근대 철학에 대한 비판은 진리와 주체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일자의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니체는 근대를 겨눈 최초의 저격수였고, 하이데거는 대상성을 비판한 시인들을 사유의 전면에 다시 등장시킨 장본인이었습니다. 합리주의 전통에 대한 이런 날카로운 비판들은 전후 프랑스에서 더욱 구체적인 형태의 비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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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1926-1984)는 근대 철학이 주체로 삼은 ‘인간’이 그저 특정한 에피스테메의 맥락에서 구성된 지적인 생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하였고, 라캉(1901-1981)은 사유하는 합리적 인간과는 거리가 먼 무의식의 주체를 그의 분야인 정신분석학을 통해 잘 드러내었어요. 또한 리오타르(1924-1998)는 보편이라는 관념을 그저 타자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폭력적인 관념으로 간주하였지요. 보편적 진리는 자신을 보편으로 삼는 동시에 보편의 타자를 비-진리로 억압하고 배제하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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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진리는 폭력으로 점철된 자기 전개 과정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더 나아가 데리다는 진리 개념을 비판하면서 철학사 전체를 곤경에 빠뜨립니다. 철학은 진리를 기준으로 삼아 텍스트의 의미를 고정시킴으로써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였고, 결국 진리의 전제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는 대단히 폭력적인 과정이었고, 그 와중에 텍스트의 풍요로움은 진리의 폭력을 통해 축소되고 말았다는 것이 데리다의 탁월한 담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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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사도바울'이란 책에서 언급된 바디우의 통찰이 흥미롭습니다. 그에 의하면 바울은 '우연(사건)'에 의해 부름받은 자(다메섹 사건)로 유대주의(전통)나 헬라 주의(이성)에 얽매이지 않았고, 심지어 예루살렘(중심주의)까지 배격했다고 해요. 아들(예수) 담론으로 역사를 찢고 들어온 부활(진리는 명명되지 않아야)이야말로 '우연'과 '보편적 개별적' 진리를 충족했다는 것 아닙니까? 보편은 어떻게 폭력이 되지 않고 진리가 되는가?
2.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를 말하는 순간 누군가는 그 진리 밖으로 추방된다. 그렇다면 바디우가 바울에게서 발견한 ‘보편적 개별성’은 어떻게 차이를 지우지 않으면서 모두에게 열릴 수 있는가? 1미터짜리 카스테라를 자르는 장면에서 시작해 바디우와 바울까지 가는 오늘의 글에는 의외로 하나의 줄기가 있다. 선물이 그렇다. 카스테라는 특정한 사람에게 건네지만, 선물의 기쁨에는 국적도 혈통도 자격증도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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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한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사건이 다른 사람에게 열릴 때 작은 보편성이 발생한다. 근대가 보편적 이성과 주체를 세웠다면, 니체 이후 현대철학은 그 보편의 뒤편을 의심했다. 푸코는 ‘인간’조차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다고 했고, 라캉은 주체의 중심에 이성이 아니라 분열과 무의식을 놓았다. 리오타르는 거대서사를 의심했고, 데리다는 하나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확정하려는 욕망을 해체했다.
보편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자주 차이를 침묵시키는 권력이 되었는지를 폭로한 것이다. 그런데 바디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것이 차이고 해석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함께 진리라고 부를 수 있는가? 차이를 존중하기 위해 보편을 폐기했더니 역설적으로 각자가 자기 세계에 갇히게 된다. 바디우는 이 막다른 골목에서 다시 ‘진리’를 꺼낸다. 다만 그의 보편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완성된 총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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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기존 질서가 계산하지 못했던 균열로 출현하고, 주체는 그 사건에 충실하면서 비로소 만들어진다. 그런 점에서 말씀하신 ‘도래하는 주체’보다는 ‘사건에 대한 충실성 속에서 출현하는 주체’라고 표현하면 바디우에게 조금 더 가까울 것 같다. 주체가 먼저 존재해서 진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절차에 참여하면서 주체가 되어가기 때문이다. 바울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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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가 관심을 갖는 것은 바울의 기독교 교리 자체라기보다 부활이라는 특수한 사건이 어떻게 유대인/헬라인, 율법/철학 같은 기존의 신분표를 가로질러 누구에게나 열리는 보편적 선언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다. 보편은 차이를 없애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차이도 진리에 참여할 자격을 독점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생겨난다. 그래서 ‘보편적 개별성’의 역설이 아름답다. 진리는 처음부터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어서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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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수한 사건에서 태어나지만 그 사건을 어느 민족, 계급, 성별, 지식인 집단도 독점할 수 없기 때문에 보편적이다. 다만 바디우에게도 위험은 남는다. 내가 충실한 ‘사건’이 정말 진리의 사건인지, 아니면 내 욕망을 사건이라고 명명한 것인지 누가 판별하는가? 보편의 폭력을 피하려던 사건의 철학이 자칫 새로운 확신의 폭력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이다. 바디우의 힘과 약점이 동시에 여기 있다. 그래서 질문에 대한 답은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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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은 모든 사람을 하나로 만들 때 폭력이 되고,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게 할 때 비로소 보편이 된다. 어쩌면 오늘 건넨 카스테라 두 개가 거창한 철학보다 이것을 쉽게 보여준다. 선물은 “너도 나와 같아져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가진 것을 내어놓고 상대가 받아들일 자리를 남겨둔다. 진리 역시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모두를 내 안으로 끌어들이는 보편이 아니라,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는 보편 말이다.
2026.9.26.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