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의 발원지 황지
태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黃池가 <신증동국여지승람> ‘삼척도호부편’. ’산천 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 부 서쪽 1백 10리에 있다. 그 물이 남쪽으로 30리를 흘러, 작은 산을 뚫고 남쪽으로 나가는데, 천천穿川이라 한다. 곧 경상도 낙동강의 원류이다. 관에서 제전祭田을 두어서 날씨가 가물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낸다.”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에 대한 유래가 <한글학회>에서 나온 <한국지명총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옛날에 이곳에 황씨라는 인색하기로 소문난 부자가 살았다. 어느 날이었다. 마굿간을 쳐내고 있는 황씨 집에 중이 와서 시주를 청하자 황부자가 곡식은 주지 않고 쇠똥을 던져 주었다. 그러한 처사를 민망하게 여긴 황씨의 며느리가 시아버지 모르게 쌀 한 되를 중에게 주면서 사과를 하자 그 중이 시아버지 모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집이 곧 망할 ㄱ서이니 그대는 나를 따라 오라.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뒤를 돌아보자 마라.”
그 말을 들은 며느리가 아이를 업은 채 중을 따라서 구사리 산 정상 무렵까지 왔는데 벼락 치는 소리가 나면서 천지가 진동하였다. 놀란 며느리가 중의 당부를 잊은 채 뒤를 돌아보니 그가 살았던 집이 못으로 변해 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던 중의 당부를 어긴 며느리는 그 자리에서 아기를 업은 채 돌부처가 되고 말았다.
“그 여인은 슬픔에 젖어 돌이 되었다.” 오비디우스의 글이 사실로 화한 것이다.
조선 왕조 때의 기록에는 황지를 성역으로 모셨다고 한다. 가뭄이 닥치면 관가의 제관이 나와 기우제를 지냈고, 못 물의 빛깔로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수색점을 보았다. 그 물빛이 맑은 쪽빛에 희뿌연 우유 색을 띠면 풍년이 들 것이며, 시뻘건 빛이면 흉년이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예로부터 이 샘의 물길이 끊어지면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71년 12월 18일 진시에 경상감사가 낙동강 상류의 물이 끊겼다는 장계를 보냈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황지의 물은 한국의 명수(名水) 100선에 들어 있고 양이 풍부하며 맛이 좋아 1989년까지만 해도 태백시 상수도의 수원(水源)으로 이용되었지만, 지금은 삼척시 하장면에 위치한 광동댐의 물을 끌어다 쓰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이나 택리지, 삼척의 향토역사지 척주지(陟州誌)에도 황지라는 이름이 빠지지 않고 나오는데, 원래의 못은 지금의 2배쯤 되었고 주변에는 나무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높고 낮은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는 작은 못일 뿐이다.
황지는 수온이 영하 30도로 떨어져도 얼지 않으며 아무리 큰 홍수나 가뭄이 와도 줄거나 넘쳐나는 일이 없다고 한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최대의 석탄 생산지 황지․도계․장성․철암을 연결하는 태백산 지구의 지하수가 황지로 솟아 오른 것이다.
1,300리 길을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은 삼국시대에는 황산강(黃山江)․황산하(黃山河)․황산진(黃山津)으로 불렸다. 경상북도지명유래집을 보면 낙양리(洛陽里)는 중국의 낙양성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상주의 옛 이름이 낙양이었기에 낙양의 동쪽에 있으므로 낙동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가락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낙동강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이긍익이 편찬한『연려실기술』지리전고에는 낙동강이 이렇게 실려있다.
경상도(慶尙道)의 낙동강(洛東江)은 근원이 태백산(太白山)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서 한 도(一道)의 중간을 그었으며, 또 동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태백산 동쪽 줄기는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흐르고 서쪽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으로 꺾어지며, 남쪽은 지리산(智異山)에 이르고 다시 동쪽으로 가서 김해(金海)에 이른다. 경상도(慶尙道)의 한 도는 모두 한 수구(水口)를 이루니, 낙동강은 상주(尙州) 동쪽을 말함이다. 낙동강의 상류(上流)와 하류(下流)는 비록 지역에 따라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통틀어 낙동강이라 부르며, 이 강은「가야진(伽倻津)」이라고도 한다. 강 동쪽은 좌도(左道)가 되고, 강 서쪽은 우도(右道)가 된다. 고려 때에는 이 강과 호남(湖南)의 섬진강(蟾津江)․영산강(榮山江) 두 강을 배류(背流)한 삼대강(三大江)이라고 하였다.
이중환보다 후세의 사람인 정약용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낙동강을 이렇게 설명한다.
“황수(黃水)는 태백산 황지에서 시작한다. 서남으로 흘러 300리쯤에 있는 함창에 닿고 동으로 굽이쳐 남으로 또 3백 리를 흘러서 함안에 이른다. 북향으로 꺾어 동류(東流) 100리 김해의 동북 황산포구에 이른다. 여기서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낙동이라 함은 가락의 동쪽이라는 말이다.”
조선시대 초기의 학자 김종직이 당시 민중들의 절절했던 삶의 현장을 보고서 「낙동요洛東謠」를 남겼다.
황지의 근원 물은 겨우 잔에 넘치는데 黃池之源纔濫觴
냅다 흘러 예 와서는 넓기도 한지고 奔流到此何湯湯
한 줄기에 예순 고을이 갈리고 一水中分六十州
나루 곳곳엔 돛대가 너울너울 津渡幾處聯帆檣
바다까지 곧바로 내려가길 400리 海門直下四百里
관풍에 왕래하는 장사꾼 배들. 便風分送往來商
아침에 월파정(月波亭)을 떠나 朝發月波亭
저녁에 관수루에 묵네. 暮宿觀水樓
누각 아래 배에서는 천만 량을 실었으니 樓下綱船千萬緡
남민들이 혹독한 조세를 어찌 견디리. 南民何以堪誅求
쌀독은 비고 도토리 밥도 없는데 缾罌已磬橡栗空
강가에선 노래와 풍류 살찐 소를 잡는구나. 江干歌吹椎肥牛
나라의 사신들은 유성과 같건마는 皇華使者如流星
강가의 해골들은 누가 허물이나 묻겠는가? 道傍臅髏誰問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