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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혁명과 쿠데다의 의미를 재정리해야 한다.혁명과 쿠데타는 [역사의 대세를 거슬렀느냐,아니면 역사의 대세를 따라갔느냐]의 관점과결과론적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했는가]가 판단기준이 되어야 한다.
대부분 60대 이상의 원로들이었지만,
중간중간 박수와 대답을 하며 쎄미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쎄미나 말미에는 참석자들이 토론자들에게 자유롭게 질문을 건네는 시간을 가졌다.
"존경하는 참모총장 각하"각하의 충성스러운 육군은 금16일 3시를 기하여
해(海),공군(空軍)및 해병대(海兵隊)와 더불어국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궐기(蹶起)하였습니다.각하의 사전 승인을 얻지 않고 독단 거사하게 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하옵니다.그러나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인 국가 민족을 구하고 명일(明日) 번영(繁榮)을 약속할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오직 이길 하나밖에 없다는 확고부동한 신념과 민족적인 사명감에 일철(一徹)하여 결사 감행하게 된 것입니다.만약에 우리들이 결한 이 방법이 조국과 겨레에 반역이 되는 결과가 된다면 우리들은 국민들 앞에 사죄하고 전원 자결하기로 맹서(盟誓) 합니다.각하께서는 우국지성을 촌탁하시고 쾌히 승낙하시고 동조하시와 나오셔서 이 역사적인 민족과업을 수행하는 시기에 영도자로서 진두(陳頭)에서 지도해 주시기를 간절이 바라옵니다.저희들은 총장각하를 중심으로 굳건히 단결하여 민족사적 사명완수에 신명을 받칠(바칠) 것을 다시 한 번 맹서(盟誓) 합니다.소관이 직접 각하를 찾아뵈어(워)야 하오나 부대를 지휘 중이므로 부득이 동료들을 특파하게 되었사오니 양해하여주시기 바라옵니다.여불비재배(余不備 再拜) 5 월 16 일 소장 박정희.
"박정희 대통령은 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쿠테타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조국의 앞날을 위해서 구국의 결단으로 5.16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이도형 <한국논단> 발행인
우선 당시 북한의 남침우려로 대한민국을 지켜낼 필요가 있었고,자유당-민주당 등 정계가 너무 부패해 국민이 기댈 곳이 없었다.마지막으로 국민이 기아로 허덕이고 있었다.그런 고민속에 박정희 대통령은 5.16을 결단한 것이다.
사회를 맡은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는,
의미심장한 [모두발언]으로 특별 쎄미나의 막을 열었다.
5.16이후 5 0 여년이 지났다.
국가와 사회는 발전했지만,
대한민국 안에,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북한을 옹호하는 세력도 같이 자랐다.
지금까지는 5.16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려고 하면,
엄청난 사회적 제약이 있었다.그러나 다행히 박근혜대통령이 됐기 때문에,이제 5.16을 정당하게 재평가하는 작업이 시작될 것이다.간단히 될 일은 아니지만,
이 쎄미나가 긍정적 인식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 자리는 우리나라에서,
5·16에 대해 진지하고 긍정적으로 진행하는 최초의 쎄미나라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논단>과 <뉴데일리>에 감사를 드린다.
우리나라가 통일되고 나라가 정상화가 되면,
5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언어의 포로가 돼 있다.5·16을 두고 좌파들이 주장하는 논리에 빠져
그들의 틀 안에서만 논쟁을 하고 있다.
[쿠데타냐, 혁명이냐],
이런 논리에 빠지는 언어의 포로가 되지 않아야 한다.독재자, 혁명, 쿠데타 다 벗어 던지고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혁명은 무조건 좋은 것이고,
쿠데타는 무조건 나쁘다,
이런 것은 잘못된 전제다.혁명이 무조건 좋다면,
<볼세비키 러시아 혁명>도 좋다는 것인가.국리민복에 기여한 쿠데타는 좋은 것이고, 반하는 혁명은 나쁜 것이다.그런 점에서 러시아 혁명은 나쁘고,
5·16 쿠데타는 역사를 발전시켰다.
"4·19 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장준하
첫째는, 어문정책을 잘못해서 한글전용을 하면서 한국어가 파괴됐다는 점이다.모든 국가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어문정책인데,
여기에서 많은 부작용이 생겨났다.
우린 한자와 한글을 같이 써야하는데 이 부분에서 생각이 모자랐다.한글전용의 어문정책이 오늘날 70%이상의 한글파괴를 불러왔다.둘째로, 주체적 역사관 주체적 민주주의관,
즉, 민주주의는 국가안보의 하위개념이고
국리민복이라는 생각을 가진 정치세력을 못 만들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봉건적 가치관 이성적 도덕적 가치관,
민주주의 우상화에 방대한 자주적 사상가였기에이승만과 함께 한국의 2대 건설자가 되었다.결국 삶의 질이 세계 12위의 나라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는 이승만이 만든 농지개혁과 교육개혁, 한미동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성현 <뉴데일리> 주필
내가 21살에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됐고,
22살에 광주사태를 보고 [막시스트]가 되었다.
그 후로 나는 8년간 감옥과 수사기관을 넘나들었다.
사람들이 박정희시대 전체를 두고 독재,독재 하는데,
독재라는 말은 엄청나게 넓은 뜻을 가지고 있다.
민정이양 이후 유신 이전까지 초기 10년은, 자유민주주의 시기이다.
1972년 10월 시작된 유신시대는,
가부장적 권위주의(patriarchic authoritarianism)라고 보아야 한다.
'독재'라고 할 때의 그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시기는, 일반 국민에 관한 한,
1975년 부터 피살될 때까지 4년 동안의 시기라고 보아야 한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안정화 정책]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안정화정책]은 유신의 경제동원체제를 스스로 해체하고,
시장경제-자율경제를 택했던 가장 위대한 선택이었다.
1978년말, 1979년초의 그 선택이,
지금의 번영을 만들어낸 마지막 주춧돌이었다.뭘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주장으로 박정희 시대가 왜곡되고 있다.박정희는 근대문명 속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욕망을 해방시키고,
근대 주춧돌을 놓고,
길을 완성하신분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까지 5.16을 가지고 논쟁을 하고 있는데,
너무나 안쓰럽다.
지금은 사실 이런 것을 논할 때가 아니다.
수많은 대통령들의 행적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옳은지 틀린지 가려진다.내년에는 논쟁을 하는 이런 자리가 아니라,
5.16을 제대로 평가하는 자리,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준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를 연구하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념적으로는 좌우를 넘나들고
삶에서는 천당과 지옥을 오간,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을 보낸 사람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과 지혜로 충만했던 지도자였다.
과거 역사는 우리에게 [통치자가 통치를 잘 못하면
혁명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줬다.그 선택으로 우리나라는 경제강국이 됐다.
당시 한국정치는 너무 옹졸하고 썩었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대만이나 필리핀처럼 망했을 것이다.
망하지 않으려면 갈아야 했다.
그 당시 박정희 권력은 절대권력 이었는데,
이때 한국 국민들에게 단기적인 민주화, 즉 정치교육을 시켰어야 했다.
그때 민주화 교육을 시켰다면,
지금의 한국 정치권이 지금처럼 나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진취적인 국민의식을 많이 심어주었지만 더 필요하다.
시민들의 진취적인 국가관이 없다는 것이 아쉽다.
이동복 사회자는 [마무리 발언]에서,
단기간의 경제성장이 아픈 상처도 함께 가져왔다는 점을 지적했다.
1960년대 북한과 남한을 비교해보면 북한이 훨씬 잘 살았다.
61년 남한과 북한은 각각 [장기 경제개발계획]을 내세우며 경쟁했고,
북한은 7년,
우리는 5개년 계획을 잡았다.북한은 실패했고,
우리는 경제대국을 만들었다.인류사회가 농업사회에서 산업화로 진입하는데 6천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그 산업화를 30년 만에 해낸 것이다.다만, 단기간의 고도성장을 위해서는,
압축성장과같은 비정상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민주적인 방법을 했다면,
산업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부의 계획을 국민 하나하나 납득시킬 수 있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계획에 반대하는 사람을 때리고 고문하다 보니,
국민들과 의사소통이 단절됐다.
이 책임을 우리가 비싸게 질 것이다.
우리 현대사가 가지고 있는 비극이다.
<5.16은 정변인가 혁명인가>라는 주제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정변인가 혁명인가]는 좌익진영의 선전선동 프레임에 끌려든
피해의식의 발로에 다름 아니며,
성공한 혁명의 시비와 갈등 해소는 북한이 존재하는한 불가능합니다.
북한이 없어져야,
즉 자유통일이 이뤄진 후에야,
5.16혁명도 본연의 평가를 회복할 것입니다.
이승만-박정희의 남북자유통일 목표를 오늘의 국가목표로 정립하여,자유통일을 앞당기는 쎄미나로 진화시켰으면 합니다."
다음은 조갑제 대표의 [주제발표] 전문
우리나라가 통일되고 나라가 정상화가 되면 5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할텐데... 오늘은 아마도 5·16에 대해서 우리나라에서 진지하고 긍정적으로 시행된 최초의 쎄미나라고 생각됩니다. 한국논단과 뉴데일리에 고마운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발표문의 결론은 이동복 선생이 미리 내렸습니다. 박대통령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나 18년 동안 집권하면서 민주복지 국가의 기틀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쿠데타로 불러도 좋고 혁명으로 불러도 좋습니다. 어차피 성공한 혁명이었으니까요.
이 혁명은 박정희 대통령만의 작품이 아니고 사실은 이승만이 건국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위에 세우면서 혁명이 시작된 것이지요. 아직도 그 혁명은 계속되고 있다고 보고 일단락이 되려면 한반도를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만들 때 끝날 것입니다. 바로 한반도의 평화통일이지요.
5·16평가 때 좌파들이 주장하는데 말려들어서 그들의 틀 안에서만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 쪽이 정한 규칙에 따라서 말하다가 실질적 성과는 없었습니다. 언어의 포로가 되지 않는 것이 한국현대사를 보는 관점이라고 봅니다. 독재자라는 언어의 포로, 혁명이냐 쿠데타냐라는 것을 벗어던지고 있는 그대로 사실에 맞춰서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볼 것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왜 자꾸 부추기냐는 의도는 쿠데타는 정권쟁취에 의한 정변이라고 폄하, 혁명은 다수 국민들의 의지를 받아서 계층 계급 씨스템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보다 좋은 것이라는 말의 포로에 붙들려 한국에서는 혁명은 무조건 좋은 것이고 쿠데타는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것입니다.
혁명이 무조건 좋으면 러시아 혁명도 좋은것 아닙니까? 쿠데타가 나쁘다면 5·16도 나쁘다는 것이지요. 그 기준은 역사발전 흐름에 거슬렀느냐 아니면 역사의 대세에 탔느냐 거슬렀느냐는 관점과 결과론적으로 국리민복을 이뤘느냐 못 이뤘느냐가 판단의 기준이 돼어야지요.
그 다음에 또 이런 부정주장은 5·16혁명은 4·19를 부정했다, 당시 학생들이 지지성명을 냈다던지 하는것도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4·19와 5·16을 어떤 관점으로 봤느냐는 것은 책의 명제로 던졌고 역사의 민족적 총궐기 즉 5·16이라고 했지요.
4·19로 민주주의 열망을 싹틔웠고 이뤄냈지만 민주주의 가지고는 기아 안보 부패 등이 해결 안되더란 것을 알았습니다.
부국강병을 이뤄야겠다고 삶의 문제에 치중하는 놀랍게도 당시 지식인 사회를 주도하던 사상계의 발행인이었던 장준하 선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4·19 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라고 했습니다.
전 5·16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에 박대통령과 정적이 됩니다만 최근에 장준하가 추락사가 아니고 의문사로 주장하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그러나 장준하의 5·16에 대한 정의는 박대통령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미 당대에 당위성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한국인들이 5·16을 어떻게 평가했느냐는 것은 별도의 자료가 있습니다. 면접조사를 했는데 그 자료를 보면 10명중 4명은 찬성 2명은 찬성이나 빨랐다, 2명은 반대, 2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서진규라는 분은 석사논문에서 당시 5·16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60%가 지지했다고 미군의 조사와 일치한다. 5·16에 대한 찬반을 물으면 거의 예외없이 70%가 찬성합니다.
유신에 대해서도 경제발전에 기여했다고 찬성합니다. 지지를 보입니다. 당시의 여론조사나 민심이나 또는 역사적 발전과정에 의한 사회적 평가에 의해서 정당성이 확보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어떤점에서 5·16혁명이 성공으로 분류됐느냐? 5·16에 대해서 여러번 썼습니다. 50돌을 맞아서 정리하다보니 700페이지의 책이 나왔어요.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됐습니다. 5·16의 가장 위대한 점은 무혈혁명이라는 점입니다.
바로 역사의 대세를 타고 국민의 지지를 받았고 지지에 의해서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올 것이 왔다는 것은 그 때의 시대상, 주체세력이 말한 구국의 결단은 역사의 대세를 타고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었습니다.
봉건적 신분질서와 가치관을 부수고, 국가를 근대적, 자유민주적, 국제적, 개방적 씨스템으로 바꿨다, 오랫동안 문민정치세력으로부터 소외되었던 군인, 기업인, 상인, 과학 기술자 집단이 처음으로 역사 발전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하였습니다.
군인으로선 약 800년 만에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62년간 교사-군인-혁명가-CEO 역할을 했는데 Revolutionary & Visionary였으며, 거기에 기초하고 있던 가치관을 바꾼 사람들입니다.
한 민족이 국가의 가치관을 바꾸는 것은 몇십년 단위로 안됩니다. 국가를 부국강병하는 국가로 만들었다, 근대적 자유민주적 국제적 개방적 효율적적 씨스템으로 바꿨다는 점이 혁명의 본질입니다..
두번째는 신분질서를 바꿨다, 사농공상 체제가 역사를 주도하는 주인공이 군인들이됐습니다.
권력적으로 주도한 것은 군인이 791년 만에 집권했습니다. 고려 무신난 이후 군인집단이 정권을 잡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나머지 기간은 과거시험에 통과한 문민집단이 잡았습니다. 유럽은 군인이 집권세력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군인이 집권했던 곳이 민주주의를 꽃피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민집권이 역사의 대세였습니다. 그러나 군인이 기업인을 밀어주고 과학자를 알아주고 상공농사로 바꿨습니다. 사에 속하는 계층이 푸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박대통령에게 도전했던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교사였고 군인이었고 혁명가 위대한 CEO였습니다. 혁명가는 모택동처럼 행정가로는 실패한 경우가 많았지만 박대통령은 두 가지를 겸했습니다.
박대통령은 5·16에 대해 항상 부담이었다,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 경제개발에 주력했다, 죄의식이 있었다는 말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건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립니다. 글이나 연설을 읽지 않고 폄하 목적으로 얘기합니다. 백년선생들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박대통령은 5·16에 확신이 있었습니다. 유신도 확신이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 지금 한국은 민주주의를 우상화해서 민주냐 반민주냐로만 몰고 갑니다. 민주주의 불가피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서구의 성숙된 민주주의 제도를 그대로 도입해서 이런 어린나이에 출범한지 20년도 안된 민주주의란 나무를 심으면 말라죽는다는 것을, 그런 민주주의는 나라가 망한다고 한국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습니다. 민족적 민주주의를, 교도적 민주주의를 우리 현실로 바꾸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박정희의 위대한 주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이후에 지금까지 국민들 중에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말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이분이야말로 위대한 주체사상의 선구자입니다. 아주 고독했지요.
박대통령은 국적 있는 민주주의, 전쟁 중인 나라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하면 안된다, 우리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그런 점에서 반민주세력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제대로 작동시킨 경제적 기반을 만들었고 한국 민주주의의 2대 건설자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박대통령은 자신의 두 차례 쿠데타 5·16과 10월 유신 쿠데타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지도 않았고 후회하지도 않았습니다.
유신과 5·16의 관계는 5·16의 완성이 10월 유신이었습니다. 둘은 하나의 쎗트지요. 역사적 상황으로 평가할 때 박근혜 씨로 하여금 사과하게 만든 논리는 헌정질서를 깨뜨렸다는거지요. 그 사과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작년 총선과 대선에 표를 던진 사람이 52,538,257명입니다. 그래서 새누리당과 박근혜씨한데 국정운영의 권한을 줬습니다. 여기에 담긴 뜻은 지난 두차례의 선거는 역사관 전쟁이었고 그것은 이제 끝내라는 뜻이었습니다.
결론은 한국현대사를 긍정하는 세력에게 정권을 주겠다, 역사관 논쟁은 작년선거로 결론이 났습니다. 한국현대사를 긍정해라. 독재자라 욕하던 사람의 딸을 대통령으로 뽑았으니 총체적으로 현대사를 긍정한 것이 된 것입니다.
국민적 결단, 주권적 결단, 헌법적 결단입니다. 가장 중요한 정당성의 근거입니다.
법률학자들이 헌정질서를 무너뜨렸다고 얘기하지만 헌정질서를 무너뜨렸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만 역사를 법률로만 판단할는 수 없습니다.
이 것은 마치 물건의 무게를 측정하는데 저울을 가지고 오지 않고 자를 가지고 측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역사를 법률이라는 자로 측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참고만 되는것이지요. 역사의 평가기준은 역사적 국제적 비교로 가능합니다.
5·16이나 유신의 전과 후를 비교할 때 나라의 형편과 국민들의 삶이 나빠졌느냐 좋아졌느냐? 좋아졌습니다.
인명피해의 규모는 어느정도였나? 아무리 뜻이 좋아도 시리아처럼 하는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5·16은 무혈혁명이었습니다.
한국은 변화의 규모등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대만과 비교하면 유신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은 동남아권 나라들을 앞섰습니다. 북한과 비교해도 박정희시대는 천당과 지옥수준으로 갈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역사적 평가에서 절대기준이 못됩니다. 민주주의에 앞서는 것이 국가안보입니다. 민주주의는 우선하는 가치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안보를 위해 얼마든지 제한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기준이 유일한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민주주의를 논한다면 역사적 관점에서 써먹어야지요.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에서 어느정도의 민주주의가 가능했을지 검증해야합니다. 시간성을 빼면 안됩니다.
예를들면 영국은 1215년 마그나카르타 대장전인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암살이 일어나고 여러 정변이 일어나고 나중엔 단두대에서 목을치고 시체를 창에 꽂아 20년 동안 전시하는 피비린내 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권교체를 하다가 피 흘리지 않고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세우는데 471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선 1987년부터니까 39년밖에 안걸렸습니다. 차별없는 보통선거를 하는데 영국은 700년만에 여자가 투표권을 가졌고, 프랑스는 45년부터, 우리는 시작부터 모두에게 선거권을 주는 투표를 했습니다.
이렇다면 과연 한국의 민주주의가 그 수많은 세월과 피를 마시고 큰 서구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건 불가능합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1950~70년대의 한국에서는 링컨이라도 이승만 박정희처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 민주주의를 같이 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그는 경제건설이 먼저라고 선 경제건설 후 민주건설이 옳았느냐 틀렸느냐는 경제 먼저하고 민주로 간 나라는 오래갑니다. 먼저 민주주의 하다가 망한 나라는 파키스탄, 필리핀 등입니다. 박정희는 확고하게 선경제 후민주건설이었습니다.
우리만 잘먹고 잘살수 있느냐가 아니고 우리의 개발모델이 인류공영에 이바지한바 있느냐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박정희모델은 등소평의 모델이었고 많은 개도국이 가져가서 써먹었고 있습니다. 이런걸 다 종합하면 아무리 부정적으로 봐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박정희는 잘한것만 있느냐. 그렇진 않습니다.
그 문제는 다 아시지만 부패 인권제약 언론탄압.. 저도 박정희때 해직된적 있지만 역사적 평가에선 참고사항이지 절대적 기준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박정희의 잘못한 점 두 가지만 짚어보겠습니다.
첫째는 어문정책을 잘못해서 한글전용을 하면서 한국어가 파괴됐다는 점입니다.
모든 국가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어문정책입니다. 여기서 많은 부작용이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한자와 한글을 같이 써야하는데 이 부분에서 생각이 모자랐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한글만을 사용하라고 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한글전용의 어문정책이 오늘날 70%이상의 한글파괴를 불러왔습니다.
둘째 주체적 역사관 주체적 민주주의관, 그러니까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 국가안보의 하위개념이고 국리민복이라는 생각을 가진 정치세력을 못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사후에 박정희 사상에 대한 방어가 제대로 안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대통령은 봉건적 가치관 이성적 도덕적 가치관과 민주주의 우상화에 방대한 자주적 사상가였고 그리하여 이승만과 함께 한국의 2대 건설자가 되므로 삶의 질 랭킹이 세계 12위의 나라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물론 이승만이 만든 농지개혁 교육개혁 한미동맹이라는 레일을 깔고 갔으니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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