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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새의 밀사 파송
삼하 17:15-20
15 이에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고 나도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으니
16 이제 너희는 빨리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전하기를 오늘밤에 광야 나루터에서 자지 말고 아무쪼록 건너가소서 하라 혹시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몰사할까 하노라 하니라
17 그 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여 감히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 가에 머물고 어떤 여종은 그들에게 나와서 말하고 그들은 가서 다윗 왕에게 알리더니
18 한 청년이 그들을 보고 압살롬에게 알린지라 그 두 사람이 빨리 달려서 바후림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의 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19 그 집 여인이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귀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널매 전혀 알지 못하더라
20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여인에게 묻되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느냐 하니 여인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시내를 건너가더라 하니 그들이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삼하 17:15-20 / [아히도벨의 자살] 후새는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내놓은 조언을 모두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알려주고 이렇게 말하였다. 16) `어서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늘 밤을 요단강 이편에서 보내지 마시고 당장 건너가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부하들과 함께 전멸당할 것이오' 17) 그런데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이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예루살렘 성밖으로 나가 에느로겔 샘터에 숨어 있었다. 이 샘은 기드론 시내와 힌놈 골짜기가 만나는 곳에 있었는데, 사독과 아비아달을 위하여 물 길러 다니는 계집종이 그들과 접선하며 소식을 전해 주었다. 거기서부터는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직접 다윗왕을 찾아가 정보를 제공하였다. 18) 그런데 어떤 젊은이가 그 두 사람을 수상하게 여기고 압살롬에게 밀고하였다. 그러나 그 두 사람도 이것을 눈치 채고 빨리 바후림 마을로 도망쳐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집 마당에는 우물이 하나 있어서 그들은 그 속으로 기어 내려가 숨었다. 그곳에는 우기철에만 물이 고이고 여름의 건조기에는 물이 없어서 사람이 숨을 수가 있었다. 19) 그러자 그 집 아내가 맷방석을 가져다가 우물 위에 올려놓고 그곳에 찧은 보리를 널어놓았다. 그러자 누가 보아도 수상하게 여길 수 없게 되었다. 20)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으로 들어와서 이렇게 물었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에 있느냐?' 그 여인은 태연하고 대담하게 그들을 속였다. `그 두 사람이 방금 저기 미갈 시내를 건너서 갔습니다.' 그들은 여인의 말을 그대로 믿고 즉시 시내를 건너 뒤쫓아갔으나 아무도 찾지 못하자 그냥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압살롬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한 후새는 다윗에게 밀사를 보냅니다. 이러한 사실은 발각되었고 압살롬의 사람들 역시 밀사를 추격하게 됩니다.
후새의 밀사 파송(15-16) 후새는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밀사를 보냅니다. 본문의 독자인 우리는 압살롬이 후새의 계획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본문 속 후새는 아직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잠입해 다윗을 위해 은밀하게 도움의 활동을 하던 사람이 다섯 명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 모두가 활동을 개시합니다. 후새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만일 일이 아히도벨의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압살롬은 곧바로 다윗을 추격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두 제사장은 자기 아들들,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에게 후새가 한 말을 주었습니다. 다윗에게 전갈을 보낼 경우를 대비해 그 두 사람에게 성 밖에 숨어 있도록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후새는 다윗에게 아히도벨의 모략이 시행되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도록 했습니다. 오늘밤 광야 나루턱에서 자지 말고 강을 건너가라고 합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목숨을 걸고 다윗 편에 신실하게 서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로 인해 다윗은 생명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압살롬의 밀사 추격(17-20)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후새가 한 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두려워 성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에느로겔 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름 없는 여종을 통해 후새가 전해준 소식을 다윗에게 알립니다. 두 사람이 떠나자 그 사실이 압살롬에게 보고되었습니다. 조심했는데도 발각되고 만 것입니다. 압살롬의 부하들이 추격하자 두 사람은 숨어야 했습니다. 두 사람은 도망가다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바후림이라는 마을에서 우호적인 어느 협력자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두 사람은 그가 소유한 우물 속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우물 위에 덮개를 덮고 그 위에 곡물을 펴 널어 두 사람이 숨은 곳을 위장해주었습니다. 압살롬의 부하들이 나타나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의 위치를 묻자 그녀는 다른 길을 가르쳐 주고 추적자들을 따돌립니다. 이는 마치 여호수아 2장에서 여리고 성을 정탐할 때 라합이 두 명의 정탐꾼을 숨겨준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바후림에 사는 우물가 여인의 대담한 거짓말은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를 살리려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적 용 : 위기의 때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누군가로부터 그런 도움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그런 도움을 베풀었던 경험이 있습니까?
‘지금이 최악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직은 최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겁쟁이는 죽음에 앞서 여러 차례 죽지만 용기 있는 자는 한 번밖에 죽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우리의 생명 기한은 나에게 주어진 재능과 지혜를 모두 소진할 때까지입니다. 최악의 상황이라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최선을 다해 그 자리를 지켜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호크마 주석
=====17:15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 사독(Zadok)과 아비아달(Abiathar)은 모두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으로서, 앞서 압살롬의 난을 피해 도피하는 다윗 왕과 함께 동행하려 했으나 다윗 왕이 압살롬의 정세를 캐내도록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낸 자들이다(15:24-29). 따라서 후새는 이제 이들을 통하여 중요한 정보를 다윗에게 빼돌리기 위해 이들과 접촉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으니 - 후새는 두 제사장들에게 아히도벧의 모사(1-3절)는 물론 자신이 압살롬에게 베푼 모사의 내용(7-13절)까지도 전달해 준다. 이와 같이 후새가 자신의 모사를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알려준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앞으로 압살롬의 전술에 맞설 적절한 작전을 세우도록 하기위함 이었음이 분명하다(18:1-5).
=====17:16
오늘밤에 ... 건너가소서 - 여기서 '오늘밤'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피신해 나오고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들이닥친 바로 그날밤을 의미한다. 1절 주석참조. 그런데 후새가 여기서 그날 밤 다윗더러 요단 강을 건너라 일러준 것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즉, 후새는 압살롬으로 하여금 아히도벧의 계략을 따르지 못하도록 이미 그럴 듯한 모사를 베풀었고(7-13절) 또한 압살롬과 그 신하들이 자기의 모사에 동의한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14절), 아직 최후 결정이 내려진 상태가 아니었기때문에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다윗에게 빨리 강 건너 요단 동편 땅으로 피신하라고 통보하였던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Keil, Payne).
=====17:18
한 소년이 저희를 보고 압살롬에게 고한지라 - 여기서 '한 소년'은 글자 그대로 '어린 소년'을 의미 한다기 보다는 압살롬이 다윗의 은밀한 첩보 활동(諜報活動)을 차단하기위해 풀어놓은 첩자(諜者)라고 보아야 한다(Pulpit Commentary,Keil). 이같은 사실은 이 소년이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압살롬에게 고했다고 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소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아르'(* )가 성경에서 '부하', 또는 '종자'(從者)라는 의미로도 많이사용된 점이 이를 뒷받침 해준다(18:15; 삿7:10,11; 8:14; 느4:16,22,23; 5:10,15,16; 6:5). 한편 이러한 압살롬의 첩자의 눈에비친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의 행동은 이 첩자의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사장들인데도 불구하고 성막이 있는 예루살렘(6:12-19)을 떠나 성 밖에 느로겔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남달리 긴장된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신분이 다른 하층계급의 계집종과 은밀히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첩자는 이들을 다윗의 연락원 으로 단정하고 압살롬에게 즉각 이 같은 사실알렸던 것이다.
바후림 어떤 사람의...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 바후림(Bahurim)은 예루살렘에서 감람산을 넘어 요단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한 곳이다. 16:5 주석 참조. 일찍이 이곳은 다윗 왕이 압살름으로부터 도피할 때 시므이로부터 혹독한 저주를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같은 장소에서 다윗의 연락원들이 한 여인으로부터 귀중한 도움을 받고 있는것이다. 한편, 바후림의 여인이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를 숨겨 주었던 '우물'은 물을 저장해놓는 수조(水槽)를 의미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물이 귀한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집집마다 수조를 설치해 놓고 거기다 물을 길어 저장하던 것이 보통이었기 패문이다. 추측컨대 아마도 당시는 때마침 건기(乾期)여서 수조가 비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그곳에 안전하게 숨을 수 있었을것이다(Pulpit Commentary,Keil). 아무튼 이들이 수조 속에 숨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위급했었는가 잘 보여준다(Hertzberg).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머물고 - 요나단 (Jonathan)과 아히마아스(Ahimaaz)는 대제사장 아비아달과 사독의 아들들이며 제사장들이었다(15:27). 이들은 현재 사독과 아비아달이 캐낸 예루살렘 성내의 정보를 받아 다윗에게 연락하는 임무롤 부여받고 있었다(15:36). 따라서 이들은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 밖에서 정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들은 '에느로겔 가에 머물렀다'고 기록되었는데 여기서 '머물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마드'( )는 '서있었다'는 뜻이다(창 19:27; 신 4:10; 19:17;삼상:19:3; 왕하 5:11 시106:23; 사61:5; 호 10:9).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연락원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긴장한 가운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녕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이라는 위기 상황을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같이 그늘에서 말없이 그리고 충직하게 봉사한 헌신적인 일꾼들이 있었기 때문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에느로겔 -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대기하고 있던 에느로겔(En-rogel)은 `방랑자의 샘', 또는 `풍성한 샘' 이라는 뜻이다. 이샘은 예루살렘 남동쪽의 기드론 골짜기(15:23)에 위치하였는데, 수맥(水脈)이 골짜기의 지하수층(地下水層)에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강우량이 많은 겨울철에는 지하수가 분출하여 골짜기로 흘러 넘치곤 하였다. 따라서 그 이름과 같이 오고가는 나그네들은 이곳에서 충분한 안식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에느로겔이 '욥의 우물'과 같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Keil,Pulpit Commentary), 오늘날의 `비르 아이읍'(Bir Ayyub)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떤 계집종은 저희에게 나와서 고하고 - 여기서 '계집종'이란 말 앞에는 정관사(定冠詞) '하'(* )가 붙어있다. 히브리 문법에서 정관사는 종종 특별한 임무를 위해 선택된 자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곤 하는데 본절의 경우 역시 바로 이에 해당한다. 즉 본절에 등장하는 계집종은 사독과 아비아달이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에게 중요한정보(15,16절)를 전달하기 위해 임무를 맡겨보낸 특별한 종인 것이다(Wycliffe, lange). 한편,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계집종은 가사(家事)를 돌보거나 물을 길어오는 일 등을 주로 하였다. 따라서 이 계집종은 아무런 의심도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에느로겔에 나올 수가 있었을 것이다. 즉, 이 계집종은 물을 길으러 나오는 척하면서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에게 쉽게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17:19
덮을 것을 가져다가...그 위에 널매 - 여기서 '덮을 것'이란 수조의 뚜껑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위에 널어놓은 '찧은 곡식'이란 아마도 '껍질깐 보리'(잠 27:22)를 의미하는듯하다(Keil, Pulpit Commentary). 아무튼 여인의 이같은 행동은 마치 곡식을 햇볕에 말리기나 하는 듯이 뚜껑 위에 널어놓음으로써, 아무도 수조속에 사람이 숨어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한 기만책(欺瞞策)이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여인의 행동은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곧 가나안 정탐꾼들을 숨겨준 라합의 용기를 연상시킨다(수 2:4-6). 한편. 만일 이 여인의 이와 같은 도움이 없었더라면 요나단과 아히마아스 두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요단 강 나룻터에 있던 다윗과 그 일행 또한 모조리 몰살당하는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21,22절; 15:2).
=====17:20
그들이 시내를 건너 가더라. 여기서 '시내'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칼 하마임'(*) )작은 시내' 또는 '개울'을 뜻하는 말이다.따라서 이는 기드론 시내(15:28)가 아닌 바후림 근처의 작은 시내를 가리키는것 같다(Pulpit Commentary).
< 설 교 >
거짓말
사람들에게 거짓말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심어져 있습니다. 물론 거짓말 중에 선의의 거짓말이 있음을 말하면서 그러한 것은 나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거짓말은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거짓말을 어떻게 보실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바로 거짓말에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여러분께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은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는 여러분의 생각을 일단 보류해 두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존재한 채 저의 말을 듣게 되면 결국 저의 말은 하나의 괴변으로 들릴 위험이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아히도벨이 지금 당장 다윗을 쳐서 죽이겠다는 계략을 말하자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략이 좋은지를 거짓으로 투항한 후새에게 묻게 되고 후새는 아히도벨의 계략은 좋은 방법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 후, 많은 군사를 모아 압살롬이 직접 다윗을 치라는 계략을 새롭게 제시하게 됩니다.
아마 후새는 압살롬이 많은 군사를 모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을 예상하고 다윗이 도망할 시간을 주기 위해 이런 계략을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15-16절에서 “이에 후새 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고 나도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으니 이제 너희는 빨리 사람을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기를 오늘밤에 광야 나룻 터에서 자지 마시고 아무쪼록 건너가소서 하라 혹시 왕과 그 좇는 자들이 몰사할까 하노라 하니라”고 말한 것처럼 후새는 사람을 다윗에게 보내어 성의 소식을 다윗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의 “그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여 감히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가에 머물고 어떤 계집종은 저희에게 나와서 고하고 저희는 가서 다윗에게 고하니라”는 내용을 보면 당시 후새와 다윗과의 사이에서 전달 책임을 맡은 사람은 사독과 아비아들의 아들인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직접 후새를 만나 전달 내용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들은 사람들이 볼 것을 두려워하여 성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가에 숨어 있었으며 계집종 하나가 이들에게 후새의 말을 전한 방식으로 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한 소년에게 발각이 된 것입니다. 이 소년은 압살롬에게 가서 모든 사실을 고하게 되고 두 사람은 바후림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 뜰에 있는 우물 속에 숨게 된 것입니다(18절). 그리고 여인은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구를 덮고 찧은 곡식을 위에 널어 위장을 합니다(19절).
그리고 20절을 보면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여인에게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대답하기를 “그들이 시내를 건너가더라”고 하게 되고 결국 압살롬의 종들은 그 두 사람을 찾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분명 여인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거짓말이라는 죄를 범한 것으로 규정지어야 합니까? 아니면 여인의 말이 거짓말은 거짓말이되 사람을 살리고자 한 것이기 때문에 선의의 거짓말로서 죄를 범한 것으로 보면 안 된다는 통속적인 말이 옳은 것입니까?
여호수아서 2장에 보면 라합이 여리고 왕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린 얘기가 있습니다. 라합도 분명히 거짓말을 하였으나 성경이 라합이 거짓말을 하는 죄를 범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라합을 의로운 자로 말하는 것이 성경입니다(약 2:25). 그러면 라합의 거짓말도 사람을 살리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기 때문에 죄가 아니라 의롭다고 여긴 것일까요?
거짓말이 죄라면 아무리 선의가 개입되어 있다 하더라도 죄일 뿐입니다. 즉 선의라는 것으로 죄가 선으로 바뀔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이면 거짓말이고 참말이면 참말이지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왕에게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일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거짓말을 책망하기는커녕 아브라함의 말을 믿고 사라를 아내로 삼으려고 한 아비멜렉을 책망하십니다. 그 후에도 아브라함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를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거짓말을 하는, 어찌 보면 변변치 못한 남편의 모습을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왜 거짓말을 했느냐?’라는 책망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거짓말에 대한 바른 의미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음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선의의 거짓말이란 없습니다. 오직 참말과 거짓말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거짓말은 분명 악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윤리를 기준하여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악함과 선함의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기준이 되어 악함과 선함을 분별하는 것이지 세상이 알고 있는 윤리가 기준이 되어 악과 선이 분별된다면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윤리적인 나라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 악인이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의인이 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윤리를 선하다고 여깁니다. 이처럼 선하다고 여기는 윤리는 결국 인간의 윤리적 행동, 즉 선한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착한 사람이 왜 지옥가야 하느냐?’는 항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말이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거짓말이되 선한 의도로 했다는 것으로서 거짓말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이 옳다고 여겨지십니까? 그러면 그 여인이 도망친 두 사람이 숨어 있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써 두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이 옳은 것이냐? 라는 반발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바른 해답을 오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윤리로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갈 수 있는 것이지 윤리로는 절대로 가지를 못합니다.
천국에 갈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윤리 역시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윤리적으로 산다 해도 천국과는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보면 윤리에 붙들려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외쳐지는 말들이 세상의 윤리와 다를 바 없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외쳐야 하는 기독교가 윤리 종교로 전락돼 버린 것입니다.
여인의 거짓말은 윤리를 떠나서 생각해야 합니다. 윤리를 떠나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인이 두 사람을 숨겨 준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상황은 압살롬이 강자고 다윗은 약자에 불과했습니다. 세상은 힘의 논리를 따라 흐르기 때문에 정권을 잡은 압살롬에게로 사람들이 몰렸을 것입니다. 누구든 다윗 편에 선다면 그것은 자신의 앞일을 보장받을 수 없는 위태로운 길을 가는 어리석음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다윗의 정탐꾼을 도움으로써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약자의 편을 선택한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도외시 한 채 약자의 편에 선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시각에서는 분명 어리석은 일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 의로운 것이었습니다.
거짓말이란 자신의 이득과 유리함을 위해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말의 배후에는 힘있는 자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이 악이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과 다른 말을 했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 현실과 다른 말을 한 것이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세상의 현실은 인간이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아래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힘 아래 있는 것이 세상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하나님만이 힘이 되는 것이지 세상이 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세상을 힘으로 보는 그것이 곧 현실과 다른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약자의 길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이 약자의 길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길을 세상에서 강자가 되는 길로 말한다면 그것은 참말입니까? 거짓말입니까? 하나님이 거짓말로 규정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진리에 위배된 것, 그것이야 말로 천국에 가지 못하는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기준할 때 여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닌 것이 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약자의 편에 선 것이야 말로 진리를 따르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인의 말은 오히려 ‘참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참과 거짓은, 사실과 같은 말을 하느냐 다른 말을 하느냐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 편에 있느냐 세상 편에 있느냐로 규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진리를 말한다고 하나 실상은 거짓말에 열중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세상에서의 성공을 보장한 적도 약속한 적도 없는데 하나님을 믿으면 물질의 복을 받고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이야 말로 진리에 위배된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윤리를 붙들고자 하는 것은, 윤리가 무너지면 세상의 질서가 무너질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윤리 역시 악한 것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 분명 반발할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윤리가 무너지면 세상의 질서가 무너질까요?
세상은 그렇다 치고 교회를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에 윤리가 무너지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질까요? 오히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윤리는 무너져야 합니다. 윤리가 중심이 된 교회에서 나올 것은 어린 사람은 어른을 공경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식의 도덕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윤리가 말하는 어른 공경은 어른이라는 것을 힘으로 삼고 있는 말입니다. 나는 오래 살았으니 적게 산 너희들은 내 아래 있다는 생각에서 공경하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윤리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 역시, 많이 가진 힘 있는 자가 적게 가진 힘없는 자를 도와주는 차원일 뿐입니다. 이것이 윤리입니다.
그러면 윤리가 아닌 진리가 살아있는 교회에서는 어떤 모습이 보일까요? 윤리가 없으니 어린 사람들이 어른들에게 함부로 하는 모습이 보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가 살아있는 교회에는 어른은 있으되 어른을 힘으로 여기는 어른은 없습니다. 진리 앞에 죄인만 존재할 뿐 어른 자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 사람들이 어른을 무시할까요? 아닙니다. 섬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연로하심으로 힘없는 어른들을 돕는 모습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경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의 질서는 윤리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굳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참된 것은 오직 진리에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따라 사는 삶만이 참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착하고 양심 바르게 살았으니 복 받고 천국가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야 말로 거짓에 속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았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을 착한 자로 만들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착한 자는 자신의 죄를 깊이 들여다보며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신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인의 말이 거짓말이 아닌 이유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여인의 말이 사실과는 다른 말이지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현실을 비춰 볼 때 힘 있는 자를 따르지 않고 약자의 편에 선 것이야 말로 현실에 맞는 참된 말이 된다는 이 이치를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힘있는 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그것이야 말로 거짓말이라는 그 이유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윤리에 붙들려서 진리로 나아가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윤리라는 굴레를 벗어나서 진리 안에서 진리의 자유함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리 안에서 참말을 하며 날마다 힘없이 죽으신 예수 편에 서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세상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진리를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진리의 편에 서서 진리만을 추구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소원하기 바랍니다.
우리를 도우소서
삼하 17장 14절 / 임병익목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하나님에게 네 가지가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에게는 자동응답기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동응답기처럼 자리를 비우지 않고 또 지체하지 않고
언제든지 우리 기도를 받으시고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집에는 주소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장소에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어디에서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예약이 필요 없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이시지만 예약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방문하면, 기다리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은 은행구좌가 없으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요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필요를 따라 구할 때 하나님은 들이시고 응답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를 따라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함께 볼 말씀은 큰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있는 우리에게
필요를 따라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1. 내 기도를 들으소서
다윗은 우리아 살인사건 이후 총체적 위기를 맞았습니다.
장자 암논과 압살롬은 서로를 죽고 죽이면서 싸웠습니다.
나중에 압살롬은 아버지를 멸시하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런 가운데 자신이 믿고 있었던 사람이었던 아히도벨이
자기를 떠나 압살롬의 편을 들자,
그 심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참 뛰어난 지혜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좋은 머리를 악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아히도벨 같은 사람입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반역을 하는데 일조했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악한 성적인 범죄와 계략을 짰습니다.
먼저 압살롬이 이제는 왕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다윗이 성을 관리하도록 남겨둔 후궁 10명을 욕보입니다.
다윗과 자신은 이제는 부자지간도 아니요 죽고 죽이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확한 상황판단으로, 다윗을 완전히 붕괴시킬 방도를 구상해내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에게
‘다윗은 허겁지겁 도망 중이고 단 6백명만의 군인만이 그를 따르고 있으니,
자신이 1만2천명으로 쫓아가면 충분히 다윗을 죽일 수 있다’고 조언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 위기였던지 다윗은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사무엘하 15:31)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길 때 지은 찬송시가 바로 시편 3편입니다.
그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시편 3:1-2)
그런데 다윗은 맨 끝에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시편 3:7-8)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위기의 순간에,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를 구원하소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찾읍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실 것입니다.
2. 사람을 보내주시다
감사에 대한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시골학교 선생님이 음악교육을 위해 피아노 한 대가 필요해서
당시 갑부였던 포드 자동차 회사의 포드 회장 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회장님, 학교에 피아노 한 대가 필요합니다.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얼마 후 답장이 왔는데 열어보니, 단돈 100달러가 들어 있었습니다.
피아노를 살 수 있는 돈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면 화를 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실망치 않고 방법을 달리 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100달러로 땅콩을 사왔습니다.
사온 땅콩을 학교 부지에 심었습니다.
그 해 땅콩작황이 좋아서 많이 수확하여 팔았습니다.
몇 년을 그렇게 했더니 어느새 피아노를 살 수 있는 돈이 모아진 것입니다.
선생님은 포드 회장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습니다.
“회장님의 도움으로 피아노 살 돈이 모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포드회장으로부터 답장과 함께 만 달러가 송금되어 왔습니다.
답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같은 분이 미국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작은 기부금에 대해서도 감사하고 이야기까지 돌려주시니 제가 감격하였습니다.
여기 만 달러를 드리니 피아노를 사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도움을 청하시면 액수와 상관없이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음악 선생님은 구해서 받은 작은 것을 작다고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것으로 알고 지혜롭게 사용하여 목적을 이룬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 모양이 우리가 원하는 모양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응답하십니다.
다윗이 안타까이 기도하자 하나님은 응답하시는데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주십니다.
사무엘하 15장 32절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덮어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다윗이 하나님께 언덕 위에서 기도를 마치자 마자 응답하십니다.
다윗을 도울 사람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 사람이 후새입니다.
옷을 찢는 행동은 슬픔을 뜻합니다.
후새는 다윗의 일을 안타깝게 여기며 도우러 왔습니다.
후새는 아히도벨과 맞먹는 지략가였습니다.
다윗 옆에 있으면 좋을 사람이지만, 다윗은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합니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
그러나 네가 만일 성읍(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 (사무엘하 15:33-34)
다윗 옆에서 전략을 짜는 것도 좋지만
더 급한 일은 아히도벨의 전략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후새를 압살롬에게 투항하는 것처럼 해서, 그 옆에 있도록 부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우리가 물질이 필요하면 물질을 주시고
우리에게 건강이 필요하면 건강을 주십니다.
다윗처럼 사람이 필요하면 사람을 보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떤 필요가 있으십니까? 어려움이 있으십니까? 사랑 많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아시고
우리의 필요를 따라 사람을 보내주시고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3. 승리할 말을 주시다
지혜라는 것은 참 소중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세기 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한 젊은 학생이 종교학 과목시험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 날 시험문제는 “물로 포도주를 바꾼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에 담긴
종교적 영적 의미를 서술하라”였습니다.
많은 학생들은 자기가 이해한 대로 긴 답안을 써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한 학생은 우두커니 2시간을 그냥 앉아있었습니다.
한 글자도 쓰지 않고 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시험감독이 보기가 답답해서인지 다가와 무슨 내용이든 쓰라고 재촉했습니다.
학생은 마침내 연필을 들어 단 한 줄의 답이었지만
최고의 점수를 받은 답안을 제출했습니다.
이렇게 썼습니다. “물이 그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도다.”
물이 예수님을 만나 빨간 포도주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학생이 바로 영국 최고의 시인이었던 바이런이었습니다.
지혜로운 말 한마디는 감동을 주고, 생각을 바꿉니다.
하나님은 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했을 때 주신 것이
바로 지혜와 지혜로운 말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을 죽일 전략을 내세웠을 때,
모두들 아히도벨의 전략이 맞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하나님이 준비하신 한 수인 ‘후새’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입술에 지혜로운 말을 주셨는데
신의 전략과 동일하다고 여겨지던 아히도벨의 전략이 무색하도록
그럴듯한 말로 설명합니다.
먼저 8절을 보면, “후새가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라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사무엘하 17:8)
다윗과 부하들은 모두 전쟁에 유능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 급하게 싸우면 패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반란으로 이들은 곰이 새끼 곰을 빼앗긴 것 같은 분노 가운데 있을 텐데
지금 가면 백전백패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한편 후새는 압살롬의 교만함을 자극합니다.
“만일 그(다윗)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작은 돌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게 할 것이니이다” (사무엘하 17:13)
압살롬 당신은 이제 강력한 왕이니, 다윗이 성으로 도망하면
온 이스라엘을 시켜서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묶어서
끌어서 물속에 가라앉혀서 하나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럴듯한 말들과 자만하게 하는 말들 때문에
결국 압살롬은 아히도벨이 아닌 후새의 전략을 따르게 됩니다.
세상은 악에 지혜롭습니다. 죄에 빠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지혜를 주십니다.
악이 승리할 것 같지만 악을 이길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구하십시오. 나에게 후새 같은 사람을 주십시오.
하나님 나에게 후새에게 주신 그런 지혜와 입술을 주십시오.
결론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도우셨습니다.
필요할 때 사람을 보내셨고,
필요할 때 악보다 더 지혜로운 말과 계획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악을 이기게 됩니다.
자신의 계획대로 진행하지 못하고
결국 다윗을 완전히 이길 기회를 놓친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는 이제는 기회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는 낙향해서 자살하고 맙니다.
우리 삶 가운데 우리가 감당 못할 일들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를 따라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히도벨과 후새
삼하 17장 14~16절 / 이규왕목사
우리가 살다보면 내 생각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 전문가나 나보다 지혜가 더 뛰어난 사람에게 찾아가서 조언을 구하고 상담을 하고 지혜를 구하여 신중하게 일을 결정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을 거느린 지도자나 왕은 여기에 대해서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는 중대사를 결정할 때 역시 더 많은 전문가들과 지혜로운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떤 도움을 받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좌우되기도 합니다.
(잠 11:14) 도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왕이나 대통령의 주변에는 항상 머리가 뛰어나고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다가 무슨 중대사를 결정하려고 할 때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는 보좌관이나 참모나 비서관과 같은 사람을 가리켜 모사(謀士)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성공과 실패는 그 자신보다 그 주변에 사람들이 누군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인사가 만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서로 좋은 인재를 스카웃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아히도벨의 모략(謀略)
다윗 왕의 주변에도 역시 머리가 뛰어난 모사들이 많이 있었으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오늘성경에 나오는 아히도벨과 후새라는 사람입니다.
그 중에 아히도벨은 (삼하 16:23) 그 때에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 고 한 말씀처럼 하나님이 아히도벨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판단이 명석한 사람이었습니다.
적을 이기려면 무엇보다 먼저 적을 잘 알아야 한다면 다윗의 일급 비밀을 다 취급해온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편이 되었다면 다윗은 압살롬에게 모든 것이 다 노출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 쫓겨 도피중에 있는 다윗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다윗을 더욱 곤궁에 빠뜨려 이길 수 있는 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아히도벨에게 압살롬이 어떻게 행하는 것이 좋은가를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윗을 궁지에 빠뜨릴 음흉한 계책을 제안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다윗이 거느리던 후궁을 압살롬이 동침하게 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삼하 16:21)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머물러 두어 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부친의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그렇게 함으로써 압살롬과 다윗의 부자지간의 정을 단절시키고, 압살롬을 추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윗과 원수가 되게 하여 배신하지 못하게 하고, 그의 손녀 밧세바를 범한 다윗의 죄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보복하려는 심산에서 나온 야비한 방법이었습니다(삼하 11:3).
아히도벨은 그것이 인간으로써 얼마나 비윤리적이며, 근친상간을 금한 하나님의 율법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라는 신앙적인 문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아니한 금수와 같은 행동을 압살롬에게 제안할 만큼 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압살롬은 그 같은 아히도벨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다윗이 죄를 범했던 왕궁의 지붕에 장막을 치고 공공연하게 다윗의 후궁을 범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미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셨던 징계를 이루는 일에 아히도벨이 악하게 사용되어지고 있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하 12:11)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이 일로 말미암아 압살롬과 다윗, 아히도벨과 다윗은 서로 다시 화합이 불가능한 극한 상황에까지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히도벨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윗이 약해진 기회를 틈타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압살롬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도피하는 동안 지금쯤은 모든 보급도 끊어지고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 있는 최악의 상태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히도벨은 그 기회를 틈타 자기가 직접 일만 이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지금 당장 가서 다윗을 기습을 한다면 다윗을 능히 죽일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다윗의 일행은 저절로 압살롬에게 투항할 것이라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삼하 17:2) 저가 곤하고 약할 때에 엄습하여 저를 무섭게 한즉 저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죽이고 (삼하 17:3) 모든 백성으로 왕께 돌아오게 하리니 무리의 돌아오기는 왕의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그 같은 제안에 대해서 압살롬은 물론 주변사람들이 그것을 좋은 아이디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히도벨만이 아니라 압살롬과 그를 따르는 지도자들이 얼마나 사악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삼하 17:4)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
그러나 알고 보면 압살롬은 다윗이 낳은 아들이며, 아히도벨도 다윗의 오른 팔 노릇을 하던 모사요, 그에 동조하는 이스라엘 장로들도 얼마전까지 다윗을 충성스럽게 받들던 신하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그들은 모두 신앙적으로는 물론 인간적으로도 다윗을 배신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그렇게 극악한 방법으로 다윗을 궁지에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패한 인간의 실체이며, 믿을 수 없는 세상의 인심입니다. 그렇다면 위기에 몰린 다윗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2. 후새의 모략
압살롬은 그의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면서 제일 먼저 포섭한 사람이 바로 모사 아히도벨이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등지고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삼하 15:12) 제사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다윗은 아히도벨이 자기를 배신하고 압살롬의 편에 붙었다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그 문제를 놓고 무슨 보복을 계획하기 전에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삼하 15:31)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히도벨 버금가는 모사 후새를 붙여 주셨습니다. 다윗은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지혜롭게 그 일을 대처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아히도벨 못지 않은 모사 후새를 압살롬의 진영에 심은 일입니다.
다윗을 충성스럽게 받드는 후새가 아히도벨의 배신을 보고 동조하는 대신 끝까지 다윗을 따르자 다윗은 후새를 압살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곳에 남아 다윗을 위해 일해줄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삼하 15:34) 그러나 네가 만일 성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이왕에는 왕의 부친의 종이었더니 내가 이제는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
만일 그것이 드러나게 되면 후새는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것이 다윗을 돕는 일이라면 사양치 않고 다윗의 뜻을 따라 압살롬에게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거짓 맹세를 하여 압살롬의 모사가 되었습니다.
아히도벨이 군사 일만 이천을 거느리고 가서 다윗을 기습하자는 제안을 압살롬이 좋게 받아드리고 행동에 옮기기 전 후새에게 아히도벨의 전략을 말하면서 후새에게 또 다른 새로운 전략을 물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였습니다. 후새는 명예심을 좋아하는 압살롬의 영웅심을 부추기면서 신중론을 제안하였습니다.
비록 지금 다윗이 쫓기고 있지만 다윗의 주변에는 전과가 화려한 용장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기습을 했다가는 도리어 역습을 당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백성들의 사기가 저하되고 압살롬의 명예가 실추될 우려가 있으니 전군을 동원하고 압살롬이 선두에 서서 총 진두 지휘를 하여 일망타진을 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압살롬과 그 측근은 기습작전을 주장하는 아히도벨의 안과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여 총공격을 하자는 신중론을 주장하는 후새의 상반된 의견을 놓고 고심하다가 예상했던 대로 후새의 신중론을 채택하였습니다.
(삼하 17:14)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다윗에게는 이처럼 압살롬이 아히도벨 대신 후새의 제안을 더 좋게 여기고 채택한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였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아히도벨의 제안대로 기습을 했다면 다윗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후새는 즉시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들을 통해 다윗에게 두 사람을 몰래 보내어 그 계획을 미리 알려주어 피신하도록 조치함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군사를 재정비할 기회를 벌게 되었습니다.
(삼하 17:22) 다윗이 일어나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널새 새벽에 미쳐서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반면에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자기의 제안을 받아드리지 않고 후새의 제안을 따르는 것이 압살롬이 패배를 자초하는 것이며 그 결과 압살롬만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다윗에게 당할 비참한 미래를 예견하고 보따리를 싸들고 귀향하여 목매어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배신자의 최후인 것입니다.
(삼하 17:23)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 아비 묘에 장사되니라
우리는 그와 같은 아히도벨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배신을 하였던 가룟 유다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은 삼십을 던져 버리고 목매어 죽은 사건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인의 최후입니다.
3. 진정한 모사
오늘 성경에서 아히도벨이나 후새 모두가 두뇌가 명석한 사람들로 최고 지도자 인 왕을 보필하던 지혜자들입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1) 아히도벨은 그 지혜를 이기적인 목적으로 악한데 사용하였습니다. 압살롬으로 하여금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부모에게 불효하고, 하나님을 불신앙하고 그를 따르는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악한 왕이 되게 하는 일에 일조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히도벨은 끝내 목매어 자결하는 비참한 최후를 자초함으로 그 자신이 진정한 모사나 지혜자가 아니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후새는 압살롬이 득세를 할지라도 변함 없이 한 주인만을 섬기며 다윗에게 생명를 걸고 충성을 다하여 다윗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고 백성들을 살리는 선한 일에 큰 기여를 함으로 위기에 처한 왕과 이스라엘 왕국을 건지는 일을 하였습니다.
과연 두 사람 중에서 누가 진정한 모사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머리가 좋고 판단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좋은 조건일 수 있으나 반드시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만 말할 수 없음은 과연 그것을 어디에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 있으며, 성공이 될 수 도 있고 실패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모략은 하나님의 영광과 정의를 위해 선용되어질 때만이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혜를 가지고 악한 일에 사용을 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미련한 것만도 못한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도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도전합니다. 이단자들을 보면 얼마나 성경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논리로 해석을 하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그 결과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어느 특정인을 신격화시키는데 사용함으로 교회를 분열시키고 교인들을 노략해 가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군들도 누구 못지 않게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초대 교회가 지도자들을 뽑을 때 보면 여러 조건 중에 하나가 바로 성령만 충만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도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행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찾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지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일과 세상을 일을 보다 더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으며, 그 지혜를 무엇에 사용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잠 4:6)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잠 4:7)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
1) 하나님께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2) 진정한 모사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사 9:6)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3) 지혜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요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그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주야로 성경을 묵상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모든 분야에 모사가 되어 영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에 후새처럼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결 론
우리의 현실은 제한된 기회를 서로 자기가 차지하려는 무한 경쟁 시대입니다. 그 가운데서 그 기회를 내 것으로 삼고 앞서가려면 다른 사람보다 머리가 뛰어나고 실력도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나간 역사나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님을 알 것입니다.
1)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별 보잘 것이 없어 보여도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인간 관계에서 신의를 지키고 남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어떤 위기를 만나든지 반드시 건지시고 축복하심을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2) 또 어떤 사람은 보다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으나 그 기회를 잘못된 목적과 방법으로 사용하다가 조건을 갖추지 못한 다른 사람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회가 아니라 가치관이며, 그 것을 가지고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게되면 자기만이 아니라 남을 살리는 사람이 되지만 그렇지 않고 그 기회를 가지고 남을 해하고 자기 배만 불리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결국 패망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기회와 지혜와 재능들을 어떻게 사용하며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인가 하는 것을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윗 시대에만 배신자가 있고 아히도벨과 같은 간악한 모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예수님도 그러한 무리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세계는 어떻습니까? 정치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원수까지 용서해야 한다는 사랑을 부르짖는 교계 안에도 압살롬과 아히도벨과 같은 배신과 음모와 죽이기를 마다하지 않는 몰인정하고 야비한 수단과 방법이 판을 치고 있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까요? 얼마나 똑똑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선한가가 참 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계를 기록한 성경과 지나간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공통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을 간악한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궤계에서 건지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의 위기를 보시고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당신의 백성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지혜를 폐하심으로 그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자기가 빠지게 하시는 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욥5:12) 하나님은 궤휼한 자의 계교를 파하사 그 손으로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며 (사8:10) 너희는 함께 도모하라 필경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내어라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불합리한 현실만 보고 불평하거나 아히도벨처럼 기회주의적인 삶을 살지 말고 아히도벨처럼 남의 약점을 공격하여 분열시키고, 남을 이간하여 배신하게 하는 일에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남보다 더 유리하도록 내게 주신 좋은 지혜와 능력과 재물을 가지고 오늘 성경에 후새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을 살리며, 공동체를 하나가 되게 하고 평화롭게 하는 일에 후새처럼 쓰임을 받도록 기도하고, 하나 하나 실생활에서 실천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위기를 극복하는 비결
>성경본문|
삼하17장 15절 ~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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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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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성우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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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이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있는 남북한의 모든 교회들이 민족의 평화적인 통일과 남북 공동의 번영을 위해서 다함께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이 시대, 한반도라는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남과 북의 평화적인 통일이라고 하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 전체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지 못한 채로 앞으로 더 시간이 흘러간다고 하면 우리 민족의 불행은 그만큼 더 심각하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이 땅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어떤 기도제목보다 더 무게 있고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시급하게 기도해야 할 문제가 바로 남북의 평화적인 통일과 남북의 공동의 번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 문제를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이 일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우리가 치러야 할 어떤 희생이 필요하다면 마땅히 그것을 감수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환경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여러 가지 면에서 위기 상황인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생태 환경은 심각하게 훼손되어 가고 있어서 급격한 지구환경의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데 우리들이 느낄 수 있을 만큼 빠른 속도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지구환경은 우리에게 큰 불안감과 함께 위기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를 위기 가운데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정치상황, 경제 환경,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역시 우리로 하여금 위기의식을 갖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우리들의 신앙생활 환경이 위기로 치달아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향한 적대 세력의 증가와 그들의 활동이 무서울 만큼이며, 더군다나 세계적으로 이슬람문화와 그들의 종교는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어 가고 있어서 이제는 우리 국내의 상황도 무시하지 못할 상황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이것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 환경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또 하나를 덧붙인다고 하면, 물질적인 가치관에 깊이 물들어 있는 현대인들의 극에 달한 욕심스러워진 모습과 통제력을 잃어버린 듯 한 개인주의화 현상, 그리고 이기주의적인 생활태도는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이 우리들의 사회 생활환경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또 하나의 위기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아도 어느 것 하나 희망적이지 않아 보이는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그냥 그대로 방치한 채로 두고 보면서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답답한 현실입니다. 사방이 온통 높고 두꺼운 벽으로 막혀져 가고 있는 듯 한 상황에 처해있는 오늘 우리에게 오늘 본문 말씀인 사무엘하 17장 15-23절까지의 말씀은 한 줄기의 희망의 빛을 던져 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 왕이 자기의 아들인 압살롬이 일으킨 반란군을 피해서 왕궁을 빠져나와 피난길에 오른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자기에게 닥친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고 승리해 나가는 과정을 증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의 위기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는 그저 얼마든지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언덕에 불과하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하는 점에서 여러 가지 면에서 위기에 직면해 있는 오늘 우리에게 커다란 믿음과 용기, 그리고 위기 극복의 분명한 방법과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소망을 주기에 충분한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나라의 두 번째 왕의 자리에 앉게 되었던 다윗 왕은 방심하고 교만해진 틈을 타서 침투한 사단의 계락에 넘어가서 자기의 충신이었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것이 하나님 앞에 큰 범죄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범죄를 다스리심으로 다윗 왕이 더 큰 위기에 빠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혹독한 징벌을 내리셨던 것인데, 그것이 바로 어린 아들의 죽음과 자기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이 앞장을 서서 일으킨 반란도 다윗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문제였는데 거기에다가 다윗보다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을 따르는 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고 하는 사실도 다윗 왕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희망을 품어볼 수 없는 그런 위기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을 따르는 군대가 다윗을 따르는 군대보다 숫자적인 면에서 볼 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하는 점도 다윗에게는 위기였지만 또 다른 악조건은 당대의 최고 정치 자문위원으로써 모략가이면서 밧세바의 조부이었던 아히도벨이라는 사람이 압살롬의 반란에 처음부터 가담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의 위기에 처해있었던 다윗 왕이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극적으로 그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고 역전승을 거두어 가고 있는 전조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위기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더 없는 은혜와 축복의 말씀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위기에 처해있던 다윗 왕이 어떻게 그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고 역전의 승리를 거두어 갈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 그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에게 닥친 하나님의 징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과 긍휼히 여기심, 그리고 절대적인 도우심을 통해 역전의 승리를 만들어 내실 것을 굳게 믿는 절대적인 하나님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다윗의 믿음이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사무엘하 15장 31절 말씀을 보면, 다윗은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진영에 가담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즉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더 중요한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아무리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큰 실망감을 안겨 주었던 다윗 왕이지만 그가 그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자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는 응답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신 증거가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인 14절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이 압살롬의 반란이 성공할 것처럼 보였으며 그 분위기에서는 누구도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되어서 실패로 끝나게 될 것이라고, 다윗이 다시 환궁하게 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며 그것을 위해서 섭리해 가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는 이스라엘 역사의 무대에 개입해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었던 악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던 압살롬의 반란을 파하시고 비록 징계 가운데 있지만 끝까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다윗의 발걸음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반란의 성공직전에 아히도벨의 모략을 꺾으시고 여러 방편으로 다윗의 역전승을 위한 작전을 시작하셨습니다.
다윗 진영과 압살롬 진영 사이에 이제껏 유지되어왔던 힘의 월등한 격차는 비로소 하나님에 의해서 역전되어가는 상황으로 바뀌어져 가고 있었으며, 결국에는 다윗의 역전승이요 하나님의 역전승으로 압살롬의 반란은 진압되게 되었고, 다윗은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두게 된 사실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압살롬과 그를 따르는 신하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셔서 아히도벨의 모략이 채택되지 않게 하셨으며, 도리어 압살롬의 마음을 허영심으로 채워서 다윗의 지시로 궁에 남아서 거짓으로 압살롬의 편을 드는 것처럼 행동했던 다윗 진영의 모략가이었던 후새의 모략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곤경과 위기에 처한 다윗을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는 여러 사람들을 다윗에게 붙여주셔서 그들의 직접적인 도움을 통해서 다윗이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배후에서 역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본문 이후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다윗을 도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동원된 사람들의 명단과 그들의 헌신적이고 감동적인 활약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과 위기에 처했지만 끝까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의 모략가인 후새는 왕궁에 남아있으면서 다윗을 위한 모략을 짜내어서 제사장이었던 사독과 아비아달 두 사람을 통해서 다윗에게 전달되도록 하는데 그 과정이 아주 긴장감 넘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당시 왕궁의 분위기는 아주 살벌하고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을 것이며, 감시도 아주 철저했을 텐데 후새의 모략이 두 제사장에게 전달되고 그것이 다시 한 여종을 통해서 왕궁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제사장의 아들들이었던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에게 전달되어서 다윗에게 전달되어야 할 상황에 두 사람의 행동이 압살롬 진영의 사람에 의해서 발각되게 되는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목숨을 건 도주를 하다가 바후림에 있는 어떤 사람의 집으로 숨어들어가서 우물 속에 숨게 되었는데, 마침 그 집의 여주인이 그 두 사람을 위해서 우물 입구를 물건으로 덮고 그 위에 곡식을 널어놓아서 위장을 시켜 그들을 숨겨 줌으로써 뒤 쫒아오던 압살롬의 군인들에 의해서 발견되지 않도록 도와 준 사실이 긴장감 넘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은 다윗 진영에 후새의 모략을 전하게 되었고 그들이 전달한 후새의 모략을 따라서 다윗과 그를 따르는 모든 군대가 그 밤에 요단을 건너서 압살롬이 추격해 올 수 없을 만큼의 먼 거리로 피신할 수 있게 되어서 비록 압살롬을 따르는 군대의 숫자가 많은 지라도, 그들의 사기가 아무리 충천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시도가 아무런 효과가 없게 될 것이며, 다윗은 위기를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본문 마지막절인 23절을 보면, 압살롬의 모략가인 아히도벨이 자기의 계략이 압살롬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 사실 때문에 낙심한 나머지 압살롬의 진영을 벗어나서 고향으로 가서는 스스로 목매어 죽게 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압살롬 진영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그의 반란이 성공하기 위해서 필수적이었던 모략가의 죽음으로 인해서 결국은 반란이 성공하지 못하고 다윗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될 것임을 누구라도 예견할 수 있도록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나섰던 사람들은 이 사람들뿐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24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힘든 도피생활로 지쳐있었던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위해서 이방 사람들이었던 소비와 마길, 그리고 바르실래라는 사람들이 음식물을 가지고 와서 그들로 하여금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게 함으로써 곧 있을 반란군과의 전쟁을 대비하여 새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먼저, 당대 최고의 모략가인 아히도벨의 인간적인 지혜를 앞세우고 그것을 의지했던 압살롬과 위기 중에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했던 다윗과의 대결에서 결국은 다윗이 역전승을 거두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보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중요한 비결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앞에 겸손히 기도의 무릎을 꿇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압살롬의 반란과 그 진압 과정을 통해서 다윗의 범죄를 징계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을 제거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를 다윗이 새롭게 체험하게 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깊이, 그리고 새롭게 만나게 하셨던 것이며, 그래서 결국 다윗을 더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셨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다윗은 이제 분명한 믿음의 고백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기에 하나님을 더욱 철저하게 의지하도록 만들어 주었으며,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이 아니면 내가 살아갈 수 없다는 참된 고백을 가능하게 했던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결국, 다윗의 위기는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되게 되었으며, 그는 그 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은혜의 손길을 더 깊이 체험하며 하나님의 더 깊은 사랑의 품에 안기게 되는 기회가 되었으니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위기가 새로운 축복의 세계로 나아가는 기회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기 가운데 있다고 느끼십니까? 인간의 지혜나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역사를 바꾸어 가시고 새로운 일을 행하시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서 우리를 믿음의 사람, 은혜의 사람, 능력의 사람으로 새롭게 빚어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 개입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고 다윗처럼 겸손히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기도의 무릎을 꿇으심으로 다윗처럼 역전승의 기쁨을 맛보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더 크게 드러내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