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삼하 17:21-29
21 그들이 간 후에 두 사람이 우물에서 올라와서 다윗 왕에게 가서 다윗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일어나 빨리 물을 건너가소서 아히도벨이 당신들을 해하려고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22 다윗이 일어나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널새 새벽까지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23 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
24 이에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25 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지휘관으로 삼으니라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라 하는 자의 아들이라 이드라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그를 낳았으며 아비갈은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의 동생이더라
26 이에 이스라엘 무리와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 치니라
27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28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29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삼하 17:21-29 / 그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사라지자 우물 속으로 들어갔던 두 사람이 기어올라와 다윗에게 소식을 전하였다. `아히도벨이 오늘 밤 안으로 왕을 기습해야 된다고 조언하였으니 어서 요단강을 건너가십시오!' 22) 다윗은 즉시 부하들과 함께 강을 건넜다. 그들이 모두 그 밤 안으로 강을 건너서 날이 샐 무렵에는 마지막 남은 한 사람까지도 모두 강의 건너편에 있었다. 23) 한편 아히도벨은 자기의 조언이 더 이상 압살롬에게 통하지 않자 이미 사태가 결판난 것으로 예견하고 나귀에 안장을 얹어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서 그는 가사를 정리하고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긴 다음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의 자살 원인은 단순히 자신의 자존심이 상한 데 있지 않고 압살롬이 패배하여 결국 더 비참하게 죽을 것을 예견한 데 있었다. 그의 죽음은 바로 부왕의 배반자 압살롬의 죽음을 미리 알리는 신호였다. 아히도벨은 이렇게 고향에서 죽어 자기 아버지의 무덤에 묻혔다. 24) [마하나임에 이른 다윗] 마침내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온 군대를 거느리고 요단강을 건넜을 때에 다윗은 이미 안전한 요새 도성인 마하나임에 이르러 있었다. 25) 다윗이 요압을 군대 총사령관으로 세운 것과 같이 압살롬도 아마사를 온 이스라엘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세웠다. 아마사의 아버지 이드라는 본래 이스마엘 사람이었으나 이스라엘 여자 아비갈과 결혼하면서 데릴사위가 됨으로써 본인도 귀화하여 이스라엘 사람이 되었고, 그의 자식들도 모두 여자 집안의 족속이 되었다. 이드라는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결혼하여 아마사를 낳았고, 아비갈은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에 아마사는 바로 다윗의 조카뻘이 되었다. 26) 압살롬은 요단강을 건넌 다음 길르앗 지역에 진을 쳤다. 27) 한편 다윗이 마하나임에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암몬 족속의 랍바 왕궁에서는 하눈과 의견을 달리하던 왕자 소비가 찾아와 있었고. 로데발에서는 암미엘의 아들 마길이 와 있었다. 그는 본래 사울의 추종자였으나 므비보셋이 잘 대접받는 것을 보고 감동되어 다윗의 추종자로 돌아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로글림에서는 길르앗의 거부 바르실래가 와 있었다. 로데발과 로글림은 마하나임에서 북쪽으로 갈릴리 호수 사이에 있었다. 28-29) 그들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광야의 먼 길을 걸어오는 동안 굶주리고 목마르고 지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윗왕과 그의 부하들에게 필요한 요와 이불, 접시와 냄비, 밀과 보리, 밀가루와 볶은 곡식, 콩과 팥과, 꿀과 ㄱ) 응유, 몇 마리의 양과 소 등을 대량으로 준비해 가지고 왔다. (ㄱ. 버터)
다윗과 일행은 위기를 모면하고 마하나임으로 도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방인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됩니다.
아히도벨의 자살(21-23) 방해하는 자들이 사라지자마자 두 제사장의 아들들은 가던 길을 계속 갔고, 다윗을 만나 임박한 위험을 알려주었습니다. 다윗은 그와 동행한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게 했습니다. 한 편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략이 채택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서 자살하게 됩니다. 아히도벨의 자살은 그의 공허한 인생을 드러내 줍니다. 그는 다윗의 신임받는 고문으로 백성들 사이에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을 배신하여 본성을 드러냈고 지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윗과 압살롬의 문제를 대단히 잘못 판단했습니다. 그는 왕국의 미래가 압살롬과 함께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잘못된 판단이 그를 자살하게 한 것입니다.
다윗을 추격하는 압살롬(24-26)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모략 대신 후새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정함으로써 압살롬은 다윗에게 충분한 시간을 벌어준 셈이되었습니다. 이제 다윗은 낙심하여 흩어진 부하들을 다시 모아 전투태세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도 군대 조직을 개편하여 새로운 사령관을 임명했습니다. 다윗 군대의 총사령관이었던 요압이 다윗을 따라감으로써 압살롬은 요압의 사촌에게 그의 군대를 지휘하게 했습니다. 양편은 모두 요단 강을 트랜스 요르단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동부 마하나임에 도착했습니다. 마하나임은 다윗이 요단 강을 건넌 지점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도움을 받는 다윗(27-29) 다윗과 그의 일행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세 명의 자산가가 다윗의 군대를 위해 푸짐한 음식을 자져왔습니다. 어려웠던 시절에 다윗에게 은혜를 입었었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 부자들의 이름은 소비, 마길, 바르실래입니다. 다윗은 자기 백성들한테는 배척당했지만, 이들 이방인들한테는 정중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지금 다윗은 마하나임에서 압살롬이라는 떠오르는 위협에 대항하여 왕국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다윗의 통치 초기와 후기에 마하나임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적 용 : 우리 주변에는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주며 격려와 위로를 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옛날 한 청년이 스승을 찾아가 지혜를 구했습니다. “저는 꼭 성공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성공을 할 수 있을까요?”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패를 알아야 해. 성공은 실패의 변형일 뿐이거든.” 스승은 차근차근 세 가지 실패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첫 번째 실패는 하기 싫은 일에서 성공하는 것이야. 성공의 대가는 얻겠지만, 삶의 의미나 즐거움을 얻기는 어렵지. 두 번째는 하고 싶은 일에서 실패하는 것이야. 계속하면 진정한 성공을 얻을 수 있지. 이때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실험일 뿐이란다. 마지막 세 번째 실패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 당연히 실패도 성공도 없지. 그러나 인생을 낭비한 책임을 져야 해. 가장 치명적인 실패지.” 세 가지 실패를 모두 말한 뒤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성공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호크마 주석
=====17:21
빨리 물을 건너가소서 - 여기서 '물'은 요단 강을 가리킨다. 요나단과 아히마하스는 바후림에서 구사 일생하여 요단 나룻터(15:28)에 이른 후, 다윗 왕에게 압살롬의 추격을 피해 빨리 요단 강을 건너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는 후새의 건갈(15, 16절)을 전해 준 것이다.
=====17:22
새벽에 미쳐서...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 이처럼 밤 사이에 다윗과 그의 온일행이 요단 강을 건넜다는 사실은 군사 전략상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는 무엇보다 먼저 아히도벧의 모략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아히도벧의 모략은 다윗이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그를 급습하여 살해하자는 것(1, 2절)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다윗이 요단 강을 건넜다는 것은 일단 압살롬으로부터의 위기를 모면하였을 뿐만아니라 군사력을 재정비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다윗의 요단 강 도하(渡河) 사건은 완전한 성공을 눈앞에 두었던 압살롬의 반역 일정(日程)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것이다.
=====17:23
아히도벧이...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 압살롬의 모사(謨士)인 아히도벧이 이처럼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은. 무엇보다도 앞로의 사태를 예견하는 뛰어난 능력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아히도벧은 자신의 모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 압살롬 정권의 연한이 다하였음을 감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모략이 선택되지 못한 것에 대한 서글픔과, 앞으로 다윗 왕에게 당하게 될 자신의 비참한 처후에 대한 공포심과 수치심에 못이겨 자살의 길을 택하고 말았던 것이다(Lange). 한편, 이러한 아히도벧의 죽음은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큰 사건이었다. 즉 아히도벧의 죽음은 압살롬이 이제부터는 다윗왕을 이길 만한 좋은 계략을 더 이상 얻을 수없게 되었다는 불리한 상황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온갖 지혜를 동원하여야 할 반란군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치명적(致命的)인 손상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아히도벧의 죽음은 곧 압살롬의 죽음(18:9-15)을 예고하는 서막(prelude)이었던 것이다(Hertzberg). 이상과 같은 사실에 의거할 때 결국 아히도벧의 죽음은 다윗의 간절한 기도(15:31)가 최종적으로 응답된 것이며 불의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의를 지닌다(Lange). 이처럼 아히도벧의 자살은 불의한 자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는 좋은 예로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유형을 훗날 가룟 유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마 27:5; 행 1:18).
고향으로 돌아가서 - 아히도벧의 고향은 유다 산지에 위치한 성읍 길로(Goloh)이다. 15:12 주석 참조.
=====17:24
마하나임 - 한때 이스보셋 왕국의 수도였던 마하나임(Mahanaim)은 갓 지파와 므낫세 반(半) 지파의 기업 경계(基業境界)에 위치해 있었다(2:8 주석참조). 따라서 이곳은 군사 모집에 유리한 이점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벽과 성문이 있는 요새화된 성읍이었기 때문에(18:24) 다윗의 임시 정부의 거점(據點)으로서 안성 마춤이었다. 한편, 이곳은 과거 야곱이 천사들을 만나 복을 받았던 유서깊은 성읍인데(창 32장), 이제 다윗도 이곳에서 야곱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세 사람의 도움(27-29)을 받게 된다(C.J Goslinga).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 이는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국민병을 모집하여 인해진술을 사용하자는 후새의 제안(11절)을 따랐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따라서 압살롬이 대군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터인데, 그동안에 다윗은 반격의 태세를 갖추었음이 분명하다(18:1-5). 한편 압살롬이 이처럼 친히 대군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넜다는 것은 이제 그가 두 가지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중 하나는 다윗 진영이 요새화된뒤 마하나임에 안전한 본부를 둔 반면에 압살롬 진영은 무방비 상태의 들에 진을 처야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윗 왕이 마하나임 성읍에서 군사를 지휘한 반면(18:3) 압살롬은 직접 전쟁에 나섬으로써 다윗 왕보다 훨씬 더 죽음의 위험이 컸다는 점이다(Payne).그런데 이는 바로 후새가 의도하딘 바였다. 즉 후새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유도해 내려고 압살롬에게 아히도벧의 것(1-3절)과는 반대되는 모사를 베풀었던 것이다(11절).
=====17:25
아마사 - 다윗의 조카이자 요압의 사촌이다(대상 2:13-17). 따라서 그나 압살롬과는 고종 사촌간이다. 혹자는 아마사(Amasa)가 다윗의 30인 용사의 두목인 아마새(Amasai, 대상 12:17,18)와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하나(Eald, Bertheau, Pulpit Commentary), 확실치는 않다. 한편 아마사는 압살롬 사후에 다윗의 군장(軍長)이 되었으나 기회주의자인 요압에게 살해당하였다(20:10).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 - 아마사의 아버지인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Ethra)는 대상 2 :17에서는 '이스마엘 사람 예델' 이라고 소개되어있다. 여기서 '예델'(Jether)은 '이드라'의 축약형 이라고 볼 수 있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드라가 과연 '이스마엘' 사람인지 아니면 '이스라엘' 사람인지 분명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대상2:17의 기록대로 그는 이스마엘 사람인 것 같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서는 외국인이 아닌 경우에는 결코 그 사람의 국적을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The Interpreter's Bible). 이렇게 볼 때 이드라는 이스마엘 사람인 것이 분명해지는데,그렇다면 그를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한 본절의 기록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대개의 학자들이 이드라가 이스마엘 사람이었으나 이스라엘 여인(아비갈)에게 장가들어 붙여진 명칭이라고 주장한다(Hertzberg). 즉. 이드라는 본래 이방인 이었으나 아내와의 연고(緣故)로 이스라엘인으로 국적을 바꾼 외국인(* ,게르)이었다는 말이다.
나하스의 딸 아비갈 - 아비갈(Abigal)은 일명 아비가일(Abigail)로도 불리웠는데 곧 다윗이 누이인 스루야와 자매지간이다(대상 2:16). 그러나 나하스 (Nahash)가 누구인가에 대하여서는 분명히 알려진 바가 없다. 따라서 학자들은 여러 주장들을 너세우고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나하스는 아비갈의 첫 남편이었다는 견해이다(Hertzberg, Michaelis, schultz). 그러나 이는 아비갈이 나하스의 딸(daughter)이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는 본절과 상치된다(공동번역). 나하스는 다윗의 아비 이새의 둘째부인이었다는 견해이다(Movers, Thenius). 그러나 히브리 사회에서 `나하스'(* 자마 )란 이름은 어디까지나 남자의 이름일 뿐이었다(Pulpit Commentary). 나하스는 이새의 별명이었다는 견해이다(Kimchi, Pulpit Commentary). 그러나 본서 저자가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새의 별명을 명기(明記)한 까닭이 석연치 않으며. 또한 나하스가 이새의 별명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다(Keil). 이상에서처럼 기금껏 제시되고있는 학자들의 견해 중 어느 정도라도 타당성을 지닌 견해는 아직 없다. 그러면 과연 나하스는 누구일까? 이에 대하여 우리는 본절 자체에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본서저자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을 스루야의 동생으로 소개하고 있는 점이다. 즉, 여기서 저자는 왜 아비갈을 직접적으로 다윗의 누이라고 소개 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분명 아비갈이 다윗의 완전한 동생(full sister)이 아니기 때문이었음을 증거해 준다. 즉, 아비갈은스루야와는 완전한 자매지간이었으나 다윗과는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만 같은 이부동복(異父同服)의 관계였던 것이다. 따라서 본서 저자는 아비갈을 다윗과의 관계에서 보다는 스루야와의 관계에서 소개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본절의 문자 그대로 나하스는 아비갈의 아버지임이 분명한 것이다. 때문에 공동 번역도 나하스를 가리켜 아마사의 외조부(外祖父)로 언급하고 있는것이다.
=====17:26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 치니라 - 여기서 압살롬의 군대 장관 아마사(25절)의 이름이 빠져 있고 대신 압살롬의 이름이 기록된것으로 보아 길르앗 땅에 진친 이스라엘 병력을 압살롬이 직접 진두 지휘하였음을 알 수 있다(Hertzberg). 따라서 이제 압살롬은 그를 위험에 처하게 하려 한 후새의 계략에 말려든 셈이다. 11절 주석참조.
=====17:27
랍바 사람 나히스의 아들 소비 - 소비(Shobi)는 암몬의 전왕(前王) 나하스의 아들이며 하눈의 동생이다(10:1 주석 참조). 그가 이제 다윗에게 와서 도움을 준 것으로 보아, 그는 자기의 형 하눈과는 달리 자기 아버지 나하스와 다윗 왕 간의 친분 관계를 기억하고 다윗과의 교제를 유지하려 한 듯하다(Ewald). 아니면 그는 랍바 성이 정벌당한 후(12:26-31) 다윗에 의해 어느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받았을 가능성이 높다(The Interpreter's Bible).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 - 마길(Machir)은 일찍이 요나단의 아들 절뚝발이 므비보셋을 보호해 준사람이다(9:4). 아마도 그는 지난날 므비보셋에게 큰 사랑을 베풀었던 다윗의 호의를 기억하고 지금 다윗을 도우러 왔을 것이다(Pulpip Commentary, Payne). 즉 그는 다윗의 인격에 감명을 받은 한 사람으로서, 이제 위기에 빠진 다윗을 생각하고 그를 도왔던 것이다.
로글림길르앗 사람 바실래 - 로글림(Rogelim)은 길앗의 한 성읍인 바, 바실래(Barzillai)는 이 성의 거부였다(19:32). 이 사람이 다윗을 도우러 온 이유에 대하여서는 확실히 알 길이 없으나, 아마도 다윗 왕의 훌륭한 통치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을 가능성이 높다(Payne). 즉 길르앗(Gilead)은 요단 강동편의, 북으로는 야르묵 강에서남으로 아르논 강 사이에 있는 광활한 땅인 바아람 사람들의 침략이 용이한 지역이었다. 삿 5:17 주석 참조. 그러나 이제 다윗의 강력한 군사 행동으로 말미암아 이 지역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8장). 따라서 이 지역의 부호들은 다윗 왕의 강력한 통치에 상당히 감사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층분히 상상할 수 있는것이다. 한편 이상과 같이 다윗에게 나아온 사람들은 모두 다윗 왕의 인격이나 통치력에 감복(感服)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다윗이 평소에 얼마나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려 힘썼는지를 충분히 짐작케 해준다(8:15).
=====17:28,29
침상...치스를 가져다가 - 이처럼 소비, 마길, 바실래가 다윗 일행에게 제공한 물건들은 전쟁을 준비하는 병사들에게 아주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필수품(必需品)들이었다. 그중 여기서 침상(* , 미쉐캅)은 담요 등의 침구를 가리킨다. 그리고 '대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폿트'(* )는 본래 대접이란 뜻이나, 여기서는 야외용 가마솥을 의미하는 듯하다(Lange, Keil). 또한 `볶은 곡식'과 `볶은 녹두'는 히브리 원어에서는 모두 같은 단어인`칼리'(* )인 바, 추추컨대 이는 각기 다른곡식들을 복은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Lange, Pulpit Commentary). 아무튼 황급히 피신 길에 나서느라 제대로 행장(行裝)을 갖추지 못했던 다윗 일행(15:13-18)에게 이처럼 풍성한 구호물이 제공된 것은. 다윗을 지켜 보호하리라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의 결과가 아닐수 없다(7:8-16).
< 설 교 >
아히도벨의 죽음
삼하 17:21-29
지난 시간에 거짓말에 대한 말씀을 드렸는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이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상식이 모두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없이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생각하기에 그런 사고방식에서 구축된 상식과 지식은 하나님이 개입되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판을 거둬 버린 채 세상을 보기에 세상이 좋아하는 것이 내게도 동일하게 좋은 것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심판 아래 있는 세상을 보게 되면 참된 것은 진리며, 하나님과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야 말로 거짓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던 한 인생의 마지막을 볼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여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다윗에게 가서 후새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후새의 말대로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너 도망을 칩니다. 결국 이것으로 압살롬은 다윗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고 아히도벨은 자신의 모략의 실패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28절의 내용대로 아히도벨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게 됩니다.
아히도벨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요? 본문에는 아히도벨이 죽음을 택한 이유나, 그의 심적 상태 등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기에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모략이 받아들여지지 아니한 것으로 인한 자존심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16:23절에서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러한 아히도벨의 모략이 아예 시행되지도 않았다는 것은 분명 아히도벨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문제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략이 시행되지 못하고 다윗은 이미 요단강을 건너 도망을 쳐 버린 상황에서 압살롬의 반역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내다보고, 결국 그렇게 되었을 때 자신은 다윗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을 짐작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히도벨이 무슨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느냐가 아니라 그가 자기 실패에서 하나님을 보지 않았던 것,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어쨌든 실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같은 권위가 있던 아히도벨의 모략이 압살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신 후새의 모략을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채택하게 된 것은 아히도벨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아히도벨의 실패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에는 하나님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17:14절에서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라”는 말씀을 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실 아히도벨의 모략이 더 좋은 것이었으나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시기 위해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후새의 모략으로 기울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히도벨의 실패는 하나님이 개입하신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은 자신의 모략을 파하신 하나님을 보기 보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모략이 받아들여지지 아니한 것을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우린 이러한 아히도벨의 죽음을 보면서 과연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히도벨과 같은 실패는 이하도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교회에서 어떤 문제를 의논할 때 내가 말한 의견이 묵살되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가 없습니까?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기에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없습니까?
이처럼 아히도벨의 문제는 우리에게서도 얼마든지 발생하는 것이기에 아히도벨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참된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아히도벨은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의 계획과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 진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기에 아히도벨이 하고자 하는 모략이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것이라면 아히도벨의 모략은 시행될 수 없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략을 파하셨음을 생각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묵살되는 것에서 자존심이 상하게 된 것이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대로 성취해 가시는 분임을 믿는다면 세상의 모든 일은 나의 생각과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며 이루어주시기를 기도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면 나의 계획과 생각은 실패되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계획과 생각이 실패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실패에서 하나님을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 달라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를 실패하게 하셔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심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상할 이유도 자존심이 구겨질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의견을 받지 않은 것은 함께 한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파하시고 하나님의 생각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들이 자존심이라는 거대한 바위에 깔려 묻혀 버리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모든 일이 나의 모략대로 계획대로 성사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분명 나의 생각, 나의 계획이 성사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은 신자라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나의 일을 실패하게 하셨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보기에 자존심 상하는 것만 염두에 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히도벨과 같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 그분이 피조물인 인간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으로 자존심 상해하시고 창피스러워 하셨던가요?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셨습니다.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세상이 볼 때는 예수님 자신에게는 실패와 같은 것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일의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알았기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실패로 여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세상은 우리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이 실패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일하고 계신다는 흔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의식함으로 자신의 실패를 부끄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이 내 말을 들어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것을 교회로 국한 시켜 생각하면, 교회의 형제들이 내 말을 들어주고 내가 말한대로 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든 교회든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뜻을 따라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이 압살롬에게는 좋은 것이었지만 결국 후새의 모략을 듣게 하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생각, 좋은 계획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신을 보게 되면, 결국 남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뿐입니다.
아히도벨이 자기의 모략이 시행되지 않는 것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내 말대로 되고 안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의지대로 되어 진다는 것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가 실패가 아닌 것입니다.
마하나임의 복된 사람들
삼하 17장 27~29절 / 김창인목사
오늘은 사무엘하 17장 27절에서 29절까지 있는 말씀가지고 "마하나임의 복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무대는 마하나임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마하나임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곳인데 옛날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돌아올 때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 보호를 받은 곳입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복지를 점령할 때 요단강을 건너기전 동편 땅을 두지파 반에게 기업으로 나누어줍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가서 아홉지파 반이 기업을 받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동쪽의 세 성읍, 서쪽의 세 성읍 모두 합해 여섯 성읍을 도피성으로 지정해 주십니다. 도피성이란 전혀 고의성 없이 부지중에 살인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살길을 열어 주신 그곳이 바로 도피성입니다. 도피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붙잡히면 꼼짝없이 맞아 죽습니다. 그러나 도피성 안으로 들어가면 누구도 손을 댈 수 없습니다. 그 당시 살아있던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야 자유의 몸으로 가정에 돌아오게 됩니다.
마하나임이라고 하는 곳은 요단 동쪽 도피성 중에 길르앗 라못에 속하였습니다. 즉 길르앗 라못에 속하여 도피성이 된 곳입니다.
또다시 세월이 흘러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당해서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 요단강을 건너가 마하나임에 임시수도를 정했던 곳입니다.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군대를 정비하고 반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했던 중요한 곳입니다. 이 때 다윗이 마하나임에 가보았더니 세 사람의 부자가 있는데 아주 복된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그 복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본문에 의지하여 상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부모의 기쁨이 되는 자녀가 복됩니다. (27-)
갈릴리 가버나움에 세베대라고 하는 총각이 있었는데 결혼을 참 잘했습니다. 결혼상대가 된 아가씨의 이름이 살로메입니다. 살로메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동생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 두고는 이모가 됩니다. 세베대와 살로메 사이에서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태어났습니다. 이 형제가 자라서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어부가 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제자가 되고 가르침과 훈련을 잘 받았습니다.
이 형제 중에 맏아들인 야고보는 열두 제자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순교자는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작은아들 요한은 간악한 로마정부에서도 죽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와석종신하는 중에 모든 사도들이 죽고 전 세계 기독교의 최고 지도자가 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와 요한계시록 등, 총 5권의 성경을 써서 남겨주어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습니까? 이렇게 훌륭한 업적과 좋은 일을 한 이 형제가 이래저래 훌륭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평생동안 어부노릇을 한 세베대에게 이런 두 아들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었겠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세베대의 아들이라고 성경은 밝히곤 합니다. 부모의 이름을 빛낸 기쁨이 되는 자녀들이었습니다. 복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7절을 보면,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실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아주 훌륭하고 복 받을 세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첫째는 소비라고 하는 사람이라고 밝히면서 나하스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꼭 나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렇게 훌륭한 사람의 아버지가 나하스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소비는 아버지의 기쁨이 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마길이라고 하는 사람이 복 받을 사람인데 그의 아버지의 이름 암미엘이 역시 함께 나옵니다. 부모에게 기쁨이 되는 자녀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고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실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뜻과 이유가 있습니다.
마하나임에는 큰 복 받을 세 사람이 있는데 두 사람은 아버지의 이름을 꼭 등장시키면서 아버지의 큰 기쁨이 되는 자녀라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바실래에게서는 부모의 이름이 왜 빠졌습니까? 성경을 조금 더 읽어 내려가면 바실래에게는 아들의 이름과 사위의 이름이 나옵니다. 아들은 김함이라고 하는데 다윗이 마하나임으로 쫓겨왔다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나라를 평정한 다음에 바실래의 아들 김함을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다윗이 도와주며 키워주어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결국 바실래는 자녀 김함에게 기쁨이 되는 아버지였다는 말입니다. 아버지 덕분에 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7장 63절을 보면 마하나임의 제사장 중에 청년이 있었는데 이 청년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실래의 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장인이 얼마나 훌륭한지 제사장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장인어른의 이름을 쓰고싶다고 하였습니다. 이 것은 보통 얘기가 아닙니다. 얼마나 장인어른이 훌륭하고 또 존경했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래서 느헤미야 7장부터는 그 제사장 이름이 바실래로 나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바실래는 사위에게 기쁨이 되는 장인이었다는 말입니다.
부모들에게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자녀가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그리고 자녀들에게 기쁨이 되는 부모 또한 얼마나 복됩니까? 부모님께 기쁨이 되는 자녀가 되고 자녀에게 기쁨이 되는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대만에 일레인 차오(Elain Chao)라고 하는 집안이 있었습니다. 그 집안에는 여덟 살의 딸 하나가 있었고 형편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대만에서는 소망이 없는지라 희망의 땅 미국으로 이민을 하여 뉴욕 차이나타운에 정착을 합니다. 중국사람들만 주로 모여서 사는 곳인데 밑바닥부터 시작을 합니다. 미국이라는 곳은 몸만 건강하면 얼마든지 일해서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는 나라입니다. 아이들을 공부시키는데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두 내외가 벌고 여덟 살 난 일레인 차오는 열심히 공부를 하였습니다. 미국은 고등학교 1학년만 되면 자신의 용돈은 스스로 벌어서 씁니다. 대학교 1학년만 되면 짐을 싸 갖고 기숙사로 들어갑니다. 방학 때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자신의 등록금을 벌어서 공부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일레인 차오가 맨하탄에 있는 큰 법률사무소에 시간제로 일하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그 정문 앞에까지 데려다 주면서 딸에게 간곡히 타이르기를 “첫째, 돈버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둘째로 너는 여기서 일을 하게 되고 사람들을 사귀게 될텐데 일하면서 일을 어떻게 하는지를 배우고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워라. 그리고 셋째는 어른들의 악에 절대로 물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일레인 차오가 마음에 깊이 새겼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정식으로 직장 생활할 때에도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주위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뽑히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미국전역에 있는 구호단체들이 함께 연합할 때 그 구호단체의 총재가 되었습니다. 동양사람으로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케네디가 만든 세계평화봉사단의 첫 번째 총재는 되지 못했지만 나중에 총재가 됩니다. 또 미국 정부에서 동양사람에게 장관을 시켜 줍니까? 그래서 장관은 줄 수 없었기에 교통부차관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동양인으로서는 최고로서 올라갈 데까지 다 올라간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적으로 잘 되었을지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믿는 부모에게는 기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일레인 차오는 예수님을 믿고 봉사하는데 둘째가라 하면 서러울 정도로 열심이어서 부모에게는 이래저래 큰 기쁨이 되었고 대만사람들의 자존심이 되었고 동양인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부모의 자랑거리, 부모의 기쁨이 되는 자녀가 복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리고 여러분들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기쁨이요, 부모의 기쁨이 되는 복된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베풀어주는 부자가 복됩니다. (28-)
돈이 많은 부자들이 돈이 들어오는 대로 움켜쥐고 그 손을 펴지 않거나 또 장롱 속에 쌓아두고 썩힌다면 나라의 경제는 위태로워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굶어 죽게 됩니다. 지금 380조원의 돈이 갈 곳이 없어 공중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 돈이 강남에 뚝 떨어지면 강남의 아파트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릅니다. 김포나 파주에 뚝 떨어지면 땅값이 천정부지로 솟아오릅니다. 그것은 퍼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쓰는 것도 아닙니다. 투기입니다. 쓰는 것과 투기는 다릅니다. 부자들은 돈이 들어오면 장롱을 열어놓고 손을 펴고 주머니를 열고 써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장사하는 물건을 자꾸 사주고 팔아줘야 합니다. 그래야만 가난한 사람도 벌어먹지 않습니까? 내 돈만 내 돈이라고 하면서 움켜쥐고 자기의 돈만 불리려고 투기하면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죽지 않습니까? 그쯤 되면 자기는 온전합니까? 혼자서 잘되는 법이 없습니다. 부자는 자꾸 써야 합니다. 그렇다고 허튼 곳에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벌어먹기 힘든 백성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에는 베풀어야 합니다. 베풀어주는 부자가 참 복된 사람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8절부터 29절 상반절을 보면,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뻐더와 양과 치스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 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27절에 베풀어주는 부자 세 사람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소비와 마길과 바실래입니다. 이 사람들은 부모에게 큰 기쁨도 되었지만 자녀에게도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이 사람들은 베풀어주기를 좋아하는 부자였습니다. 복 받은 사람들이요, 또 복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던 다윗 왕과 쫓겨온 군사들이 마하나임에 밀려왔습니다. 알고 보았더니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죽이고 예루살렘에서 정권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마하나임의 세 사람이 쫓겨온 사람들을 도와주었다가 쿠데타군이 요단강을 건너 쫓아와서 소탕하는 날에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 세 부자는 첫째로, 위험 속에서도 베풀었습니다. 둘째로, 자신들의 가진 것으로 베풀었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얻어다가 베푼 것이 아닙니다. 셋째로, 부자 셋은 각자가 제 멋대로 베푼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힘을 합해서 크게 베풀었습니다. 넷째로,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베풀었습니다. 필요 없는 것을 아무리 베풀면 무엇합니까? 필요로 하는 것으로 베풀었습니다.
이 베풂이 얼마나 복됩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런 사람은 복 받을 사람이요, 또 복 받을만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베푼 것은 하나님께서 또 채워주십니다. 베풀 줄 모르고 썩히는 부자도 망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의 주머니를 채워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베푸는 부자만이 복을 받습니다.
“남태평양”이라고 하는 뮤지컬이 있었습니다. 그 때 주연가수로 나왔던 메리 마틴이라는 여자 가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수가 불렀던 노래 가사가 아주 유명했습니다. 그 가사는 오스카 헤머스타인이라고 하는 시인이 지었는데 이 시를 짓고는 죽었습니다. 이 시인이 메리 마틴이라는 가수를 좋아하는지라 그 가수에게 그 시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 시에 곡을 붙이고 부른 노래가 바로 그 노래입니다. 그 노래 가사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종은 그대가 울릴 때 종이 된다. 노래는 그대가 부를 때 노래가 된다. 사랑은 베풀어 줄 때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베풀지 않고 마음으로만 그치고 말로만 끝내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이 가지지 못해도 좋습니다. 받으며 사는 것보다 베풀며 사는 사람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셋째, 무조건 봉사자가 복됩니다. (29-)
조건이 있고 까닭이 있으면 참 피곤합니다. 시골 동네 앞뒷집에 살면서 수십 년을 살아온 소꿉친구들은 얼마나 사이가 좋습니까? 어렸을 때 벌거벗고 시냇물에 목욕하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뛰어다니며 놀 때에는 이해 관계가 없습니다. 저 앞집의 아들을 사귀어 두어야 어른이 되면 덕을 볼텐데...라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그 친구가 좋으니까 사귀는 것입니다. 계산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오래 가는 것입니다. 정이 깊어집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양상이 달라집니다. 가만히 보니까 저 사람을 사귀어두면 내가 수지 맞겠다 라는 생각을 하며 조건을 들고 사귀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 조건이 이루어지면 재수 좋았다 하고 안 이루어지면 난리가 보통이 아니지 않습니까? 조건이 있는 것은 참 피곤하고 불행합니다. 타인을 섬기고 베풀 때에도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개구쟁이 친구들과 점심을 먹어도 아무런 부담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을 가지고 사귄 사람과는 점심을 먹고 나면 엉뚱한 조건이 있음을 보면서 얼마나 불편하고 피곤하고 불행합니까? 이처럼 봉사에도 섬김에도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9절 하반절을 보면,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고 하였습니다.
부자 셋이서 너를 돕고 섬길 때에 그 까닭이 무엇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저 백성들이 쫓겨오느라 어느 집에 들어가 쉴 수도 없고 들판에서 참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라고 하는 그 이유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 것은 조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세 사람이 다윗 일행을 돕고 섬길 때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좋은 것으로 당신들을 도왔으니 반군을 진압하고 나라를 평정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후에 무엇을 주겠냐는 조건이 있었습니까? 아무 것도 없지 않았습니까? 주는 것은 주는 것으로 끝냈습니다. 이런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이런 복된 사람이 마하나임에 있었다는 것이 다윗에게는 얼마나 큰복이었는지 모릅니다.
존 울드릭이라고 하는 열 살쯤 난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하게 직장 생활하는 사람이요, 어머니는 사회복지사였습니다. 복지기관에서 근무하면서 그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샅샅이 조사해서 복지혜택을 받도록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울드릭의 어머니가 관내를 돌아보니 그 당시만 해도 너무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 울드릭에게는 장난감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너무 가난한 집이 있는데 그 아이들은 장난감을 살 여유가 없으니 돌멩이를 갖고 놀고 망가져서 버려진 장난감을 주어다가 가지고 놀며 겨우 밥 세끼를 먹을까 말까 하는 형편에 있다고 얘기하면서 크리스마스가 되었으니 너의 장난감 중에 가장 큰 것을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놀다가 정신 없이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장 큰 장난감이 비행기인데 비행기 날개가 4피트나 되었습니다. 어린이들이 타고 놀 정도입니다. 보물처럼 닦고 아끼며 좋아하는 장난감이었는데 준다고 약속했으니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미국에서는 아이들에게 약속한 것은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엄마를 따라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가보니까 너무 가난했습니다. 그 집 아버지는 술주정꾼으로 살다가 집을 나가 버렸고 어머니는 병들고 제대로 벌지 못했습니다. 울드릭의 어머니가 그 아이들에게 울드릭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비행기 장난감을 줬습니다. 그 아이들이 너무 좋아서 기뻐 뜁니다.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본 울드릭도 그들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울드릭은 참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는 18년이 지났습니다. 울드릭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된 후에 어느 교회에서 자꾸 청빙을 함으로 부임해 갔는데 예전에 비행기를 줬던 집의 어머니가 그 교회의 열심 있는 교인이었고 딸은 여전도회 회장이었습니다. 아들 형제는 장난감 비행기를 보면서 꿈을 키워서 큰아들은 보잉 747의 기장이 되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공군소령이 되어 있었는데 최신식 전투 폭격기를 조종하는 조종사였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형제 중에 형은 그 교회의 장로였고 동생은 집사였습니다. 조건 없이 주었더니 일이 참 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너를 섬기되 조건 없이, 봉사하되 조건 없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장난감을 통해서 그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시리라고 누가 알았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마하나임의 복된 사람들과 같은 복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부모의 기쁨이 되는 자녀가 복됩니다. 부모에게 수치가 되고 근심거리가 되는 자녀가 복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쁨이요, 자랑이 되는 자녀가 복된 사람입니다. 둘째로 베풀어주는 부자가 복됩니다. 부자가 움켜쥐기만 하고 썩히면서 베풀 줄 모른다면 백해무익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중의 어리석은 부자 농부와 같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소비와 마길과 바실래처럼 베풀어주는 복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조건 없이 봉사하는 자가 복됩니다. 마하나임의 복된 세 사람은 절대로 조건이 없었습니다. 돕고 섬기는 그 자체로 만족했습니다. 실로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도 거울을 삼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란?
삼하 17:15-29 / 더온누리교회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후새의 전략은 아히도벨의 전략을 무력화 시켰다.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후새는 위급함을 감수하고 이 소식을 다윗에게 급히 전한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선택에 좌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마하나임으로 피난한 다윗에게 세 사람이 찾아와 필요들을 채워준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1. 긴박한 후새와 동역자들(15-21절)압살롬의 오판으로 다윗은 피난의 시간을 벌게 된다.
후새는 이 소식을 지체하지 않고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아릴고 빨리 사람을 보내서 “광야 나루터”에서 밤을 보내지 말고 강을 건너라고 전한다. 그렇지 않으면 몰살 당할 거라고 경고한다(15-16절).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과 사독의 아들 아하마아스는 성 밖의 로겔 샘터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다윗왕에게 소식들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만 압살롬에게 밀고를 당한다.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난 줄 알고 기지를 발휘한 한 여인의 도움으로 우물에 숨어 위기를 모면한다(17-20절). 재빨리 다윗에게 달려가 후새의 소식을 전달하고 날이 샐 때까지 다윗을 따르는 모든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넜다(21-22절). 그리고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러서야 압살롬은 요단강을 건너 길르앗 땅에 진을 쳤다(24-25절).
*한 사람 한 사람의 다윗을 위한 충성이 귀하고 귀하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반역의 무리에 동참하기를 거절하고 충실하게 다윗에게 충성하는 이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다윗은 후일을 도모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은 헌신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합을 통해 단단히 세워져 간다.
*우리 공동체도 함께 마음을 모으고, 더욱 주님의 뜻에 가까이 서기 위해 서로 도우며 서 나가기를 기대한다.
2. 마하나임의 귀인들, 반전의 은혜(27-29절)한편 요단강을 건너 들어간 마하나임에서 암몬 족속의 도성 랍바에서 소비(나하스의 아들), 로데발에서 마길(암미엘의 아들), 로글림에서 바르실래(길르앗 사람)가 찾아왔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배신 당한 다윗과 그 무리들을 위해 “침대, 이부자리, 대야, 질그릇, 밀과 보리, 밀가루, 볶은 곡식, 콩과 팥과 볶은 씨(28절), 꿀과 버터, 양고기와 치즈(29절)를 가져와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었다.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그들은, 그 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굶주리고 지치고 목말랐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꿀과 버터와 양고기와 치즈도 가져다가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었다.”(새번역_29절)”그들이 광야에서 굶주리고 지치고 목말랐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자발적으로 챙겨 온 것이다. 전쟁통에 고통 받는 이들의 심정을 헤아린 것이다.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의 애환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단지 먹을 것, 마실 것 뿐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용품도 챙겨왔다. 즉, 전쟁물자를 챙겨 온 것이다.
*온 이스라엘은 압살롬의 편에 서서 다윗을 배신 했지만, 이방인 암몬 족속은 다윗을 배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서 도리어 충성한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도움을 역시, 서로 연대하여 힘을 합해 준비해 왔다.
*이스라엘은 다윗을 배신 했는데, 이방인은 충성한다! 이 기막힌 반전의 은혜가 다윗을 충분히 위로하고 격려 했을 것이다.그런데 이들은 왜 다윗을 도왔을까? 먼저 소비는 암몬 족속의 나하스의 둘째 아들이다. 일전에 나하스의 장례때 다윗이 보낸 조문 사절단을 하눈이 조문단의 수염을 깍고 의복을 잘라 조롱하고 내쫓은 사건으로 인해 다윗이 공격하여 정복할 때 소비가 암몬의 왕이 되도록 돠와 주었다. 이 은혜를 기억하고 다윗이 어려운 때 직접 나와 영접한 것이다.또한 마길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도왔던 사람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울 왕가의 사람이기에 다윗의 대적일 수 있는데, 다윗이 므비보셋을 찾고 극진히 대우하고 돌보자, 다윗에게 위기가 닥치자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이같이 찾아 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바르실래는 다윗이 머무는 마하나임 주변의 성인 로글림의 큰 부자였고 당시 나이로 약 80세의 지역 원로였다. 그는 다윗과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다윗의 통치 기간동안 훌륭하게 나라를 통치하여 자신이 사는 지역에 평안을 누리고 있었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찾아온 것이다.이들이 챙겨서 가져온 물자들은 앞으로 압살롬과의 전쟁을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될수 있는 군량미과 필수품들이었다. 이 물품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형식적으로 다윗을 영접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며 앞으로의 상황을 대비할 수 있는 충분한 물품들로 채워서 찾아왔다. 다윗의 군대가 충분히 싸울 수 있는 병참이 채워진 것이다.
*다윗의 피난길은 급히 떠나왔기에 모든 부분에서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소비와 마길, 바르실래가 찾아와 그 부족한 부분을 충분히 채워 주었다. 그들의 방문은 다윗과 그의 군대들에게 충분한 재정비의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휴식을 충분히 취하고 새 힘을 얻어 전쟁 준비에 돌입할 수 있었다. 이들은 다윗에게 은인들이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세 사람을 통해 필요를 채움 받은 듯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보내셨음을 우리는 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날 때 감람산을 맨발로 오르며 통곡하며 간구한 기도를 기억하고 계셨다. 시편 3편의 간구들에 응답하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후새와 사독, 아비아달, 요나단, 아하마아스, 한 귀한 여인, 소비, 마길, 바르실래를 연이어 보내시며 다윗과 함께 하여 주심을 보여 주셨다. 다윗의 간구를 기억하셨고, 다윗의 필요를 채울 이들을 그저 황량한 마하나임의 광야에서 채움 받는 경험을 하게 하셨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시고, 아침마다 내리는 만나로 배를 채우며, 낮의 뜨거운 열기를 구름 기둥으로, 밤의 추운 한기를 불 기둥으로 도와 주신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윗을 채우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3. 아히도벨…(23절)본문에서 간략히 그의 최후를 기술하지만, 꼭 되짚어 봐야 할 인물이 아히도벨이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결과적인지만, 다윗에게도 인정 받았던 모사인 그가 압살롬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당연한 이치다. 장남은 이미 죽었고 존재감 없는 둘째는 이미 논외가 되었다. 그리고 출중한 외모에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있는 셋째 압살롬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이치일 터이다.그렇지만, 방법이 잘못됐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정당한 절차와 방법으로 지도자 경쟁에 서도록 도와 주었어야 했다. 그에게 왕에게 어울리는 성품과 인품을 가르쳐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생략하고 압살롬의 모사로 서는 것을 선택했다. 왜 그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그렇게 선 압살롬은 가까이서 보니 더 형편없는 지도자임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헤브론에서 봉기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예루살렘에서 다윗에 대한 그의 계략을 너무도 가볍게 무시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지도자로서 상호아을 읽고 판단하는 안목이 형편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후새라는 인물이 내놓은 자신이 보기에 너무도 형편없는 전략을 선택하는 것에 절망을 느꼈다. 자신이 선택한 왕이 통치철학도 없고 정세를 바라보는 안목도 없으니 좌절했다. 압살롬이 자신의 계략을 외면하자 그도 미련없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자기 고향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여정서 절망스런 마음과 고뇌를 되새기며 갔는지, 집에 도착하여 집안 일을 정리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다. 사무엘서 저자는 아히도벨이 이렇게 한 이유를 “자기의 모략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자”라고 진단했다. 압살롬의 말로가 어떻게 될 지 그의 지혜로운 안목으로 뻔히 보인 것이다.
*사람들이 감동하는 그 지혜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올바로 가르치는대 활용했더라면….이라는 아쉬움이 가시질 않는다. 자신이 인정하고 추대한 압살롬의 한계를 보았을 때 그가 느꼈을 절망감이 자신의 선택에 대한 미련없는 책임을 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압살롬을 겪어보니 희망이 아니라 절망속에 사는 삶이라면 차라리 죽음이 낫다고 여긴 것이다.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했더라도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지혜에 자신이 발목을 잡혀서 너무도 기본적인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또 생각했더라도 그 긍휼을 기댈 용기가 없었다.
*나의 선택과 결정이 때로 절망과 한숨에 휩싸이게 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다시”라는 기회를 기꺼이 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주님께로 나아가면 언제든지 “다시”라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그러니 주님께 나아감을 스스로 포기하면 안 된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쉽사리 포기하지 말자.나는?-다윗이 피난길의 여정을 요단 동편의 마하나임으로 잡은 이유가 무엇일까? 묵상을 하다 왜 요단강을 건넜을까? 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천혜의 자연적인 방어선을 기댄다는 전략적인 이유일 수 있겠지만 왜 “요단 동편 마하나임”이었을까?-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자리잡은 지리를 잘 이해하고 당시 정치적인 역학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일단 요단 서편, 특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헤브론이 위치한 유다 지파, 그리고 사울 왕가의 지파 베냐민, 가장 규모가 큰 지파이지만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에 밀려 지도자를 배출하고 있지 못하는 에브라임 등이 자리 잡은 유다 중앙 산지 지역은 압살롬의 반역세력의 근거지이기 때문에 어디로 피신해도 다윗을 별로 달가워 하지 않을 것이 뻔하다.-하지만 요단 동편의 길르앗과 암몬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지역이었다. 실제로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가 기다렸다는 듯이 구호물품을 가지고 방문했다는 것도 이 지역의 다윗에 대한 정서가 매우 우호적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마하나임이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상대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물론 요압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이곳에 머물러 있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흐름들을 주관하고 계셨기에 다윗의 마음에 요단 강을 건널 생각과, 마하나임에 거할 계획을 주신 것이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이 반란 가운데 함께 계심을 다윗에게 확신시켜 주셨다. 후새와 사독, 아비아달를 통해, 그들의 아들 요나단과 아하마아스, 한 귀한 여인의 목숨을 건 충성을 통해서 보여 주셨다. 또, 소비와 마길, 바르실래를 통한 위로로 확인시켜 주셨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 기도제목
* 주님, 다윗을 위해 충성하는 사람들을 통해 내가 바라보아야 할 공동체를 봅니다. 서로의 안위를 위해 “마음을 모으고”, 구체적으로 돕기를 “넘치도록 돕는” 하나님 나라 가치에 충성된 삶을 살아내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 주님, 자기 지혜에 빠져 스스로 절망을 불러들이는 삶이 아니라 실패하더라도 주님의 긍휼을 더 의지하는 겸손함으로 “다시”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주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는 결국 “충성과 헌신, 위로와 격려의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때로 배신하는 이들도 찾아오겠지만, 여전히 함께 있어주는 이와 같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는 증거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헤세드를 베푼 자를 향한 하나님의 위로
삼하 17:24-29 / Samanju
God's Comfort for the Giver of Hesed 헤세드를 베푼 자를 향한 하나님의 위로 A dramatic and hopeful scene in the style of a classical painting. A weary and grief-stricken King David sits exhausted at the edge of his camp in a desolate wilderness (Mahanaim). His head is bowed. Suddenly, a caravan led by three figures (Shobi, Makir, Barzillai) appears over a dune, laden with food, bedding, and supplies. A warm, divine light from above breaks through the clouds and illuminates the caravan, presenting them as a miraculous answer to prayer. The image captures a moment of profound relief and divine provision at the point of utter desperation.
고전 회화 스타일의 드라마틱하고 희망적인 장면. 지치고 슬픔에 잠긴 다윗 왕이 황량한 광야(마하나임)의 진영 가장자리에 지친 모습으로 앉아 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갑자기 세 인물(쇼비, 마키르, 바르질라이)이 이끄는 캐러밴이 음식과 침구, 보급품을 가득 싣고 모래 언덕 너머로 나타납니다. 위에서부터 따뜻하고 신성한 빛이 구름을 뚫고 캐러밴을 비추며 기도에 대한 기적적인 응답으로 다가옵니다. 이 이미지는 절망의 순간에 깊은 안도감과 신성한 공급의 순간을 포착합니다.
목차 (헤세드를 베푼 자를 향한 하나님의 위로)
사무엘하 17:24-29
1. 벼랑 끝, 마하나임: 하나님의 완벽한 타이밍
2. 위로의 통로: 헤세드의 세 얼굴
(1) 소비: 원수에게 베푼 헤세드를 기억한 자
(2) 마길: 언약을 지키는 헤세드를 목격한 자
(3) 바르실래: 하나님 때문에 헤세드를 베푸는 자
3. 하나님 나라의 원리: 뿌린 대로 거두리라
Q1. 성경이 말하는 ‘헤세드’는 단순한 ‘친절’이나 ‘동정’과 어떻게 다릅니까?
Q2. 다윗의 삶에서 ‘마하나임’은 어떤 의미를 가지며,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고난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Q3. 다윗을 도왔던 소비, 마길, 바르실래 세 사람의 동기는 어떻게 다르며,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Q4. “헤세드를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이 헤세드를 베푸신다”는 원리는 ‘착한 일을 하면 복 받는다’는 식의 인과응보와 어떻게 다릅니까?
오늘의 기도
사무엘하 17:24-29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인생의 광야는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다윗은 지금 그의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광야를 지나고 있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 백성의 배신, 맨발로 울며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던 치욕. 그의 도망 길 끝자락에 위치한 ‘마하나임’은 그의 절망이 최고조에 달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위로를 펼치십니다.
1. 벼랑 끝, 마하나임: 하나님의 완벽한 타이밍
본문은 다윗과 압살롬의 행보를 긴박하게 대조하며 시작합니다.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 압살롬은… 요단을 건너니라”. 후새의 기지로 시간을 벌었지만, 압살롬의 추격군은 불과 3일 거리까지 따라붙었습니다. 노약자가 섞인 피난민 행렬을 이끌고, 전쟁 준비는커녕 당장 먹을 보급품조차 없는 다윗에게 이 상황은 그야말로 벼랑 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마하나임은 ‘벼랑 끝’이 아니라 ‘위로의 시작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완벽한 타이밍에 임합니다. 다윗의 육체적, 영적 피로가 극에 달하고, 백성들이 굶주림에 지쳐 더 이상 나아갈 힘이 없던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예비하신 위로자들을 등장시키십니다.
흥미롭게도 ‘마하나임’은 과거 야곱이 형 에서의 군대를 피해 도망치다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고, 얍복강 나루터에서 씨름하며 하나님의 헤세드를 간구했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야곱은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헤세드)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창세기 32:10)라고 기도하며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붙들었습니다.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 똑같이 가족에게 쫓기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그의 후손 다윗에게, 하나님은 다시 마하나임을 ‘헤세드의 공간’으로 만들어주십니다.
2. 위로의 통로: 헤세드의 세 얼굴
하나님의 위로는 사람을 통해, 특히 다윗이 과거에 뿌렸던 ‘헤세드’의 씨앗과 연결된 사람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임했습니다.
(1) 소비: 원수에게 베푼 헤세드를 기억한 자
다윗에게 찾아온 첫 번째 인물은 “암몬 족속… 나하스의 아들 소비”입니다. 나하스는 과거 이스라엘을 모욕했던 적국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나하스가 죽었을 때, 그가 과거 자신에게 베풀었던 작은 은총을 기억하고 그의 아들 하눈에게 헤세드(은총)를 베풀고자 조문단을 보냈습니다(사무엘하 10:2). 하눈은 이 헤세드를 모욕으로 갚았고, 결국 전쟁으로 이어져 암몬은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눈의 가문을 멸하지 않고, 그의 형제인 소비를 다시 왕으로 세워주는 헤세드를 베풀었습니다. 소비는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던 다윗이 보여준 진심 어린 헤세드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압살롬의 분노를 각오하고 목숨을 건 헤세드로 다윗에게 보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마길: 언약을 지키는 헤세드를 목격한 자
두 번째 인물은 “로데발 사람… 마길”입니다. 그는 다윗이 찾기 전까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돌봐주었던 인물입니다 (사무엘하 9:4). 그는 다윗이 친구 요나단과 맺었던 “여호와의 인자하심(헤세드)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버리지 말라” (사무엘상 20:14-15)는 언약을 기억하고, 사울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므비보셋을 찾아내 자신의 아들처럼 대하는 ‘헤세드의 현장’을 바로 곁에서 목격한 사람입니다. 그는 다윗의 언약적 신실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제 그 존경심을 담아 다윗에게 헤세드를 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3) 바르실래: 하나님 때문에 헤세드를 베푸는 자
세 번째 인물 바르실래는 앞선 두 사람과 다릅니다. 그는 다윗에게 직접적인 헤세드를 받은 적이 없는, 길르앗의 나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그의 동기는 과거에 대한 보답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헤세드는 가장 순수하고 하나님을 닮은 헤세드였습니다. 성경은 그가 다윗을 도운 이유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사무엘하 17:29).
설교자는 이 구절의 히브리어 어감이 단순한 동정 이상이라고 강조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상태를 헤아리고, 그 피로를 미리 상상했다’는 의미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그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하여 기다리는 사랑,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헤세드입니다. 바르실래는 보상을 바라고 섬긴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임을 알았기에 행동했던 진정한 ‘헤세드의 사람’이었습니다.
God's Comfort for the Giver of Hesed 헤세드를 베푼 자를 향한 하나님의 위로 An elderly, wealthy man (Barzillai) with a kind and compassionate face is overseeing servants loading a caravan with supplies. In a semi-transparent thought bubble above his head, he is vividly imagining the suffering of David's people: a thirsty child, a weary soldier, a hungry woman. His expression is not one of pity, but of deep, active empathy, compelling him to act. The scene visualizes the proactive and imaginative nature of true Hesed.
친절하고 자비로운 얼굴의 한 부유한 노인(바르질라이)이 하인들이 짐마차에 보급품을 싣는 것을 감독하고 있습니다. 머리 위의 반투명한 생각 거품 속에서 그는 목마른 아이, 지친 병사, 굶주린 여인 등 다윗의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생생하게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의 표정은 동정심이 아니라 깊고 적극적인 공감으로 가득 차 있어 행동에 나서게 합니다. 이 장면은 진정한 헤세드의 적극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성격을 시각화합니다.
3. 하나님 나라의 원리: 뿌린 대로 거두리라
다윗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나라에 흐르는 분명한 원리를 보여줍니다. 바로 헤세드를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헤세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다윗 자신도 이 원리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원수에게서 구원받은 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자비한(헤세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헤세드)을 나타내시며…” (사무엘하 22:26).
우리 주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동일한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7).
이것은 선행 점수를 쌓으면 복을 받는다는 식의 기계적인 인과율이 아닙니다. 이것은 창조 목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값을 헤아릴 수 없는 헤세드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헤세드의 수원지이신 하나님께 연결된 우리는, 이 땅에서 그 헤세드를 흘려보내는 통로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창조 목적에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하심으로 우리의 삶을 지키시고, 가장 필요한 순간에 당신의 위로와 공급하심(헤세드)을 반드시 돌려주십니다.
결국,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미가 선지자의 외침과 같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헤세드)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God's Comfort for the Giver of Hesed 헤세드를 베푼 자를 향한 하나님의 위로 A symbolic image. On the left side of the frame, a hand is planting a single, small, glowing seed labeled "HESED" into dark soil during a stormy day. On the right side of the frame, years later, a weary traveler is resting under the shade of a massive, luminous, fruit-bearing tree that has grown from that single seed. The storm has passed, and the sun is shining. The image represents the principle that an act of Hesed, sown in a difficult time, grows to become a source of shelter and provision in a future time of need.
프레임 왼쪽에는 한 손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어두운 흙 속에 'HESED'라고 적힌 작고 빛나는 씨앗 하나를 심고 있습니다. 프레임의 오른쪽에는 몇 년 후, 지친 여행자가 그 씨앗 하나에서 자라난 거대하고 빛나는 열매를 맺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습니다. 폭풍은 지나가고 햇살이 비치고 있습니다. 이 이미지는 어려운 시기에 뿌려진 헤세드의 행위가 성장하여 미래의 어려운 시기에 쉼터와 공급의 원천이 된다는 원칙을 나타냅니다.
Q1. 성경이 말하는 ‘헤세드’는 단순한 ‘친절’이나 ‘동정’과 어떻게 다릅니까?
A1. 헤세드는 단순한 감정이나 일시적인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뿌리를 둔 ‘관계적 신실함’이며 삶의 방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받은 조건 없는 사랑과 긍휼에 대한 반응이며 , 바르실래의 모습처럼 상대방의 필요를 미리 헤아리고 상상하여, 대가를 바라지 않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도움으로 나타나는 적극적인 사랑입니다.
Q2. 다윗의 삶에서 ‘마하나임’은 어떤 의미를 가지며,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고난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A2. 다윗에게 마하나임은 인생의 가장 낮은 곳, 모든 희망이 끊어진 ‘벼랑 끝’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은 하나님께서 완벽한 타이밍에 위로자들을 보내셔서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시는 ‘회복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고난이 아무리 깊고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절정의 순간을 당신의 위로와 헤세드가 가장 빛나는 무대로 바꾸실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Q3. 다윗을 도왔던 소비, 마길, 바르실래 세 사람의 동기는 어떻게 다르며,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A3. 소비와 마길은 다윗이 과거에 자신들 또는 자신들의 가문에 베풀었던 헤세드를 기억하고 그것을 ‘갚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이는 우리가 베푼 헤세드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반면 바르실래는 다윗에게 갚을 빚이 없었음에도, 오직 고통받는 이웃을 향한 긍휼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무감으로 헤세드를 베풀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받은 것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대가 없이 헤세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Q4. “헤세드를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이 헤세드를 베푸신다”는 원리는 ‘착한 일을 하면 복 받는다’는 식의 인과응보와 어떻게 다릅니까?
A4. 인과응보는 나의 선행을 공로로 삼아 보상을 요구하는 거래적인 개념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는 언약적인 관계에 기초합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이라는 값을 치를 수 없는 헤세드를 ‘선물’로 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헤세드를 베푸는 것은 보상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자 창조 목적의 성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헤세드를 돌려주시는 것은 우리의 공로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당신의 자녀를 돌보시는 당신의 신실하심의 표현입니다.
오늘의 기도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
아들의 칼날을 피해 광야로 내몰린 다윗의 절망 속에서, 가장 완벽한 때에 위로의 사람들을 보내시어 당신의 헤세드를 보여주심에 감사합니다. 저희가 먼저 주님께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헤세드를 받은 자임을 늘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 크신 사랑과 긍휼이 저희 삶의 수원지가 되어, 저희 또한 이웃에게 헤세드를 베풀며 살아가는 은혜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저희가 소비와 마길처럼 받은 헤세드를 잊지 않고 갚을 줄 아는 신실한 자가 되게 하시고, 더 나아가 바르실래처럼 아무런 대가 없이 고통받는 이웃의 필요를 미리 헤아리고 섬기는, 주님의 마음을 품은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저희 삶의 가장 어두운 마하나임의 순간에, 주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위로와 회복의 헤세드를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오늘 하루도 헤세드를 사랑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영원한 헤세드로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의를 떠난 자의 최후
삼하 17:21-23 / skd1
의를 떠난 자의 마지막 길: 아히도벨의 비극에서 배우는 교훈 (사무엘하 17:21-23)
들어가며: 인생의 갈림길, 당신의 선택은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우리 앞에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놓여 있습니다. 어떤 선택은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지만, 어떤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어둠으로 끌고 가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사무엘하 17장 21절에서 23절의 이야기는, 한때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로 불렸으나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아히도벨의 삶을 통해 '의를 떠난 자의 말로'가 어떠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을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성찰과 교훈을 던져줍니다. 성경을 통해 인생의 지혜를 찾는 모든 분들에게 이 글이 의미 있는 이정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그림자: 하나님 없는 지혜, 모래 위의 성과 같을까? - 신뢰가 부재했던 그의 내면
아히도벨은 당대 최고의 지략가였습니다. 그의 조언은 마치 하나님께 직접 여쭈어 받은 응답처럼 여겨질 정도로 정확하고 예리했습니다(사무엘하 16:23). 다윗 왕도, 그리고 그를 배신하고 왕위를 찬탈한 압살롬도 그의 지혜를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지혜 속에는 결정적인 한 가지가 빠져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혜와 판단력을 그 무엇보다 우선시했습니다. 상황을 분석하고 최적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거나 그분의 인도하심을 의지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의 지혜는 철저히 인간적인 계산과 경험에 기반한 것이었죠. 마치 완벽하게 설계된 배와 같았지만,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방향을 잡아줄 나침반,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의 지혜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사무엘하 17:14), 그는 절망하고 다른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의 신뢰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과 세상적인 성공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단면입니다.
두 번째 그림자: 현실만 좇던 책략가의 한계, 그 끝은 어디였을까? -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그의 판단
아히도벨은 "지극히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의 계략은 언제나 현실적인 상황 판단에 근거하여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결과를 목표로 했습니다. 압살롬에게 다윗을 제거할 계략을 제시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사무엘하 17:1-3). 소수의 정예병으로 지쳐있는 다윗을 기습 공격하자는 그의 계획은 군사 전략적으로 매우 타당하고 성공 확률이 높아 보였습니다. 그에게는 이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최선의 방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현실주의는 눈에 보이는 상황과 인간적인 계산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후새의 계략이 채택되고 자신의 계략이 거부당하자(사무엘하 17:14), 그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판단했습니다. 자신의 분석과 예측이 빗나간 현실 앞에서, 그는 다른 가능성이나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현실적인' 계획의 실패만을 받아들였고, 이는 곧 자신의 완전한 실패로 귀결되었습니다. 냉철한 현실주의는 때로 유용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될 때 인간은 더 넓은 시야와 깊은 통찰을 잃어버릴 수 있음을 그의 모습은 경고합니다.
세 번째 그림자: 은혜를 저버린 마음, 결국 자신을 삼키다 - 배은망덕으로 얼룩진 그의 선택
아히도벨은 다윗 왕의 신임받는 모사였습니다. 그는 다윗으로부터 많은 은혜와 신뢰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의 편에 섰습니다. 이는 명백한 "배은망덕한" 행위였습니다. 자신을 믿고 중용했던 주군을 저버린 그의 선택은 이미 의의 길에서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행동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자신의 계략이 시행되지 않을 것을 알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집안일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사무엘하 17:23). 이는 단순히 계획 실패에 대한 실망을 넘어선, 자신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했다고 느낀 깊은 절망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다윗에게 베풀었던 배신은 결국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와,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은혜를 저버리고 의를 떠난 삶의 종착역이 얼마나 허무하고 비참한지를 그의 마지막은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에게 인간관계에서의 신의와 감사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마무리하며: 아히도벨의 그림자에서 발견하는 삶의 지혜
아히도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뛰어난 재능과 지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부재, 극단적인 현실주의, 그리고 배은망덕한 선택은 그를 결국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할지라도, 올바른 가치관과 신앙 위에 서 있지 않으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성경을 읽는 우리가 아히도벨의 비극을 통해 얻어야 할 교훈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눈앞의 현실 너머에 있는 그분의 뜻을 신뢰하며,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아히도벨의 마지막 길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의 삶이 의와 진리 안에서 더욱 견고하게 세워져 가기를 소망합니다. 당신의 선택이 언제나 생명과 축복의 길이 되기를 응원합니다.
도움의 손길 위기를 이기게 하십니다
삼하 17:24-29 / 아름다운 사역자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혼자서 일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또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 한마디에 빛이 생겨났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생기라는 말한마디에 해와 달과 별이 생겨 났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친히 손수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혼자서 일하시기 보다 사람과 동역하기를 원하십니다. 곧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위기를 맞이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위기를 맞이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수많은 인생의 위기를 맞이하면서 지내 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 믿기 전보다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주셔서 잘 되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그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슬람국가나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나라에서 예수님을 믿기란 너무나 힘든 고난의 삶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의 삶가운데는 고난과 위기가 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위기 때문에 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돕는 사람들을 부쳐주시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대부분은 하나님께서는 아는 사람들을 부치셔서 도와주시지만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찾아와서 물질의 도움을 주기도 하구요. 문제를 해결해주기 합니다. 여러분이 살아오셨던 삶을 가만히 돌아 보시면 여러분이 위기가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부치셔서 도와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아름다운교회 가운데 인도하셨지만요. 하나님께서는 공대현 목사님을 통해서 저를 아름다운교회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공목사님을 잘 아시겠지만 대쪽 같으신 분이십니다. 옳고 그름이 분명하신 분이시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발버둥 치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노회에서 공목사님을 모시고 2년을 동안자립위원회일을 같이 했습니다. 실제로 자립위원회 기초를 공목사님이란 지난 번에 남선교회 헌신예배때 오신 김동욱목사님이랑 저랑 세명이서 다 세워놓았습니다. 고생을 좀 많이 했었습니다. 그 때 공목사님께서는 저와 같이 일하시면서 저를 신뢰해 주셨고 많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런 신뢰에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공목사님께서는 저를 아름다운교회에 추천을 해주셨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아름다운교회에 부임하는 그 시기가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는 사임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래서 저는 3년동안 파트 타임을 하면서 공부를 하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공목사님을 통해서 저를 아름다운교회로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 가운데 있는 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부치고 그 위기를 이겨나가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통해 후새가 전해준 전갈을 전해 받고서는 빨리 요단강을 건너 왔습니다. 그리고 압살롬도 이제 모든 군대를 정비하고 요단강을 건너왔습니다. 이제 곧 전쟁이 벌어질 그런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하나임에 진을 치고 있는 다윗을 돕기 위해 나타난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암몬의 전왕인 나하스의 아들이며 현 암몬왕인 하눈의 동생 소비입니다. 소비는 곧 암몬의 왕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형 하눈과는 달리 자기 아버지 나하스와 다윗 왕 간의 친분관계를 기억하고 다윗과의 교제를 계속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비는 다윗의 소식을 듣고 다윗을 돕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암미엘의 아들 마길입니다. 마길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보호해 준 사람입니다. 다윗왕은 요나단과 언약을 기억하고 마길의 집에 있는 지체장애인인 므비보셋을 데려와 큰 호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아마 마길은 친구와의 언약을 지키고 장애인인 므비보셋을 자기의 아들을 대하듯이 사랑을 베풀어 준 다윗왕의 인격에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길은 다윗왕을 돕기 위해서 마하나임까지 온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입니다. 그는 평소 다윗왕의 성실한 지도력에 감사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르실래가 살고 있던 길르앗땅은 아람인들의 외침이 작은 격전지였는데 수차례 걸친 다윗왕의 정벌로 말미암아 이 지역은 평화를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그 지역의 거대한 부호 바르실래는 다윗왕의 탁월한 통치에 크게 감사하고 있었고 다윗이 위기를 당하자 돕고자 온 것입니다.
이들이 다윗일행에게 제공한 물건들은 전쟁을 준비하는 병사들에게 아주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필수품들이었습니다. 황급히 피신을 나온 다윗왕과 일행들은 제대로된 행장을 갖추지도 못하였습니다. 이런 사정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이 세사람을 보내셔서 다윗을 돕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범죄한 대가로 압살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게 하셨으나 그 와중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다윗왕의 생명을 지켜 주시며 그 앞길을 인도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윗을 돕는 이 손길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위기가 와서 좌절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면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돕는 손길을 보내셔서 그 위기를 이겨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위기를 당할 때 먼저 사람을 찾아 갈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움을 구하며 나가면 하나님께서 돕는 손길을 부쳐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억지로 하면 안되지만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 가 하면요. 하나님께서는 아무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푸는 분이 아니십니다. 먼저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 준 사람에게 사람을 부쳐주는 것입니다. 곧 벽에 공을 던지면 되돌아 오는 것처럼 내가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면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나를 돕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을 도와주러 온 사람들을 보십시오. 다윗에게 도움을 입었든지 다윗과의 좋은 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특별한 경우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통해서 그렇게 하실 때도 있지만 대부분이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도로에 서 있는 할머니를 발견했습니다. 그 남자는 할머니의 차 앞에 자신의 차를 세운 후 할머니에게 다가갔습니다. 그 남자는 친절한 웃음을 띄고 있었지만, 할머니는 걱정스러워졌습니다. 왜냐하면 한 시간 동안 아무도 차를 세우지 않았는데 이 남자가 차를 세웠고 겉으로 보기에 넉넉해 보이지도 않고 좋은 느낌이 들지 않아서 혹 이 남자가 나를 해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할머니가 추위에 떨면서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따뜻한 차 안에 들어가 계시는 게 어떨까요? 제 이름은 브라이언 앤더슨입니다.’
그리고 앤더슨이 차를 살펴보니, 타이어 하나가 펑크나 있을 뿐 다른 이상은 없었습니다. 브라이언은 장비를 가지고 차 아래로 기어들어갔습니다. 그는 타이어를 쉽게 교체했지만, 손은 더러워 지고 추운 날씨 탓에 몇 군대 상처가 남았습니다. 그가 새 타이어의 나사를 조이고 있을 때, 차 안에 있던 할머니는 차창을 내리고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세인트 루이스에 살고 있고, 이 마을을 통과하는 중이었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고 그에게 얼마를 주면 될지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그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액수라도 줄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돈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타이어를 교체하는 것은 그에게 너무 쉬운 일이었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우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과거에 그 역시 수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정 갚고 싶다면 다음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이 저라고 생각하고 도와주세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할머니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왔고 할머니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갔습니다. 몇 킬로 미터 지났을 때 할머니는 길가에 있는 작은 카페를 보았습니다. 할머니는 아직 한기가 남아 있는 몸을 녹이고 집에 도착하기 전 간단히 요기라도 할 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할머니의 머리가 젖어있는 것을 본 웨이트리스가 그녀의 테이블로 다가와 깨끗한 수건을 건네주었습니다. 웨이트리스는 하루 종일 서 있었던 탓인지 매우 피곤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웨이트리스가 족히 임신 8개월은 넘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런데도 그녀가 여전히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자연스럽게 브라이언을 떠올렸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할머니는 웨이트리스에게 10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웨이트리스가 거스름돈을 가지러 간 사이, 할머니는 식당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웨이트리스는 할머니가 어디로 간 걸까 생각하다가, 할머니가 식사를 마친 테이블 위에 무언가 적힌 냅킨 한 장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냅킨에 적힌 글을 읽으면서 그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냅킨에는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당신은 내게 빚진 게 하나도 없어요. 나 역시 그 입장에 있었거든요. 누군가 나를 도와주었고, 나 역시 그대로 당신을 돕는 것 뿐이에요. 만약에 내게 되갚고 싶다면 다른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세요. 이 사랑의 연결 고리가 끝나지 않게만 해줘요.’
냅킨 아래에는 100달러짜리 지폐가 네 장 더 있었습니다. 여전히 치워야 할 테이블과 채워 넣어야 할 설탕 그릇과, 서빙 해야 할 손님들이 많았지만 그녀는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 일을 잘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히면서 그녀는 할머니의 메모와 그녀가 받은 돈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나와 남편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걸 알았을까? 다음 달이 출산 예정일이라서, 돈이 매우 필요했는데..” 남편 역시 걱정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녀는 옆에 잠들어 있는 남편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다 괜찮을 거야. 사랑해, 브라이언 앤드슨...’ 이 웨이트리스의 남편이 바로 할머니를 도와준 앤드슨이었습니다.
위기가운데 도움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위기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음 가운데 누구 누구를 돕고 싶다는 감동주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감동을 무시하지 마시고 그대로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다윗에게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한 두사람이겠습니까? 다윗과 같은 성품에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을 것입니까? 그런데 그 모든 사람들이 다 다윗의 도우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다윗이 위기가운데 있는 것을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돕고 싶어도 형편이 되지 않아서 못 돕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도와겠다는 마음이 있음에도 불과하고 도우러 오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해서 일하실까요? 다윗을 도우러 온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압살롬이 아마사로 군지휘관을 삼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아마사는 요압의 사촌형이며 다윗의 조카가 되는 사람입니다. 물론 압살롬과는 고종 사촌지간입니다. 그렇다면 아마사는 당연히 위기 가운데 있는 삼촌을 돕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마사는 압살롬을 돕게 되고 결국 요압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바울은 원래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가두고 심지어 죽기기 까지 한 사람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바로 바울 앞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런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이제는 예수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서 사도들에게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다고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누가 나섭니까? 바나바가 나섭니다. 바나바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일입니다. 바울의 변화를 어느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데 자신이 바울을 변호하게 되면 어떤 어려움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바울을 변호하게 되고 결국 안디옥교회까지 함께 불러 사역을 하고 1차전도여행도 함께 떠나게 됩니다. 바울이 위기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나바를 감동시키셔서 바울을 돕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가운데 위기를 만날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럴 때 마다 하나님께 먼저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셔서 그 위기를 이겨 나가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남에게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감동주실 때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야 할 사람을 도울 때 결국 그것에 나에게 돌아와 내가 힘들 때 도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음으로 위기를 잘 이겨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요단을 건널새
삼하 17:20~29 / 직장맘 매일아침큐티
쫒기는 신세의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암몬족속에 속한 소비, 마길,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 버터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그들에게 먹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유는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를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자산 양극화가 극심하게 나타난다 한동안 부동산이었다가 이제는 주식으로 양극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집이 없을때 나도 극심한 포모가 있어서 어디든 집만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기도했고 주님이 경기도 광주에 집을 주셨고 또 은혜로 더 나은 곳으로 이사도 하게 하셨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하다고 생각할때 그때 주님이 나의 탄식을 들어주셨고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채워주셨다. 그럼 나는 주님께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떤 삶으로 보답해야 할까?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을 섬기고 주신 시간, 물질, 건강, 에너지를 주님을 위해 내어드리고 힘써야 함을 깨닫는다. 이제 중년의 나이 힘이 있을때 더 주님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내어드리고 헌신해야겠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날 주님의 얼굴을 뵈올때 작은 것에도 충성하였다고 칭찬 받지 않을까? 언제까지 나의 삶이 유지될지 모르지만 매일 매일 주님이 주신 날들을 주님과 아름답게 섬기면서 채워가야겠다.
기도
아버지 제가 참으로 부족하고 온전하지 못하고 늘 흔들리며 세상의 것을 놓지 못하는 죄인입니다. 주님! 그래도 매일 말씀으로 가르쳐주시고 행할 바를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령님 저를 세심하게 가르쳐주시고 제가 순종할 마음도 믿음도 주옵소서. 6월 마지막 날입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다시 시작하는 7월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저를 사용해주옵소서!
함께 요단을 건널새
삼하 17:20~29/ 이성은F 목사님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 주시는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요단을 건너가는 다윗 공동체를 보면서 우리에게 이 믿음 공동체 말씀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기 원합니다.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러분 우리는 지금 AI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혁명이라고 부를 만큼 이 인공지능이 이 세상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AI를 통해서 편리한 세상을 얻은 만큼 또 잃어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겠어요? 바로 사람입니다. 우리는 점점 사람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길을 모르면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요리하다가 모르겠으면 엄마에게 전화를 했어요. 고민이 있으면 어떡해요?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길은 네비게이션이 다 알려주고 요리는 핸드폰만 열어보면 다 나옵니다. 요즘은 고민 상담을 쳇GPT가 제일 잘해준다고 합니다. 왜 우리는 사람을 찾지 않고 이렇게 기계를 찾는 것일까요? 판단받을 일도 없고 귀찮게 할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보다 기계에게 묻는 것이 훨씬 편하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점점 더 혼자가 되어 갑니다. 혼밥, 혼술, 혼행. 이게 뭔지 아세요? 혼자 여행 가는 거. 또 혼영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혼자 영화 보는 거. 요즘에 이런 게 유행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것이 바람직한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는 우리는 이렇게 혼자가 되어가는 세상을 보면서 통탄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이 혼자인 것을 좋지 않다고 했기 때문이에요.
창세기 2장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 좋고 다 아름답다고 하셨는데 유일하게 좋지 않다라고 하신 것이 바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 개인주의만큼 성경을 반하는 죄가 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오늘 큐티인의 제목이 뭐예요? <함께 요단을 건널새>입니다. 그래서 제가 서론에 이렇게 장황하게 혼자에 대해서 얘기한 것은 오늘 큐티의 키워드를 함께로 잡아봤어요. 듣기만 해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단어가 함께 아니겠어요. 그런데 요즘은 듣기만 해도 부담스러운 단어가 함께인 것 같아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오늘 다윗은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밤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에서 쫓겨났습니다. 맨발로 울면서 머리를 가리고 도망가는 중이에요. 그런데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다윗을 살린 것은 그의 군사력도 아니고 그의 지략도 아니고 바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어제 QT했지만, 그에게 살 길을 알려준 누가 있었습니까? 후새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와 함께 끝까지 강을 건넌 사람들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런 사람들 우리에게 이런 공동체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좀 깊이 묵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1. 함께 도망하는 다윗 공동체가 있습니다.
함께 도망하는 다윗 공동체입니다.
20절인데요. 우리 같이 한 목소리로 읽어보시죠.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여인에게 묻되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느냐 하니 여인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시내를 건너가더라 하니 그들이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어제 본문이 어떻게 끝났습니까? 후새가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서 이 압살롬의 계략을 미리 알려주려고 합니다. 이 전보가 빨리 다윗에게 전달되어야 다윗이 살 수 있는 아주 중대한 사안입니다. 그래서 발 빠른 두 명의 청년을 속히 보냅니다. 그들이 우리 방금 읽었듯이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에요.
그런데 이들이 다윗에게 가는 길이 순탄치가 않습니다. 이들을 쫓아오는 압살롬의 추격병이 있기 때문이죠. 만약에 이들이 붙잡히면 다윗도 압살롬에게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때 누가 나타납니까? 한 여인이 나타납니다. 이 여인이 이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우물에 숨겨주었어요. 그 덕분에 이 아히마아스 요나단이 압살롬의 추격병을 따돌릴 수 있었다는 거예요.
이어서 21절도 같이 읽어봅니다.
그들이 간 후에 두 사람이 우물에서 올라와서 다윗 왕에게 가서 다윗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일어나 빨리 물을 건너가소서 아히도벨이 당신들을 해하려고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이 바후림의 한 여인 덕분에 다행히도 늦지 않게 이 두 청년이 압살롬의 계략을 다윗에게 전달했습니다. 정말 이 여인이 없었더라면 다윗은 어떻게 될지 모를 운명이었습니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이 여인은 정말 대단한 일을 한 것이에요. 다윗 왕조를 지켰고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길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이 대단한 일을 한 이 여인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냥 한 여인이에요. 어떻습니까?
왕궁에서 다윗 옆에서 있었던 그 유명하고 높은 신하들은 다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의 편에 섰습니다. 그런데 정작 다윗을 살린 사람은 다윗과 일면식도 없는 이름 모를 시골의 한 여인이었어요. 여러분 하나님은요, 이렇게 일하시는 것 같아요. 세상이 알아주는 어떤 대단한 능력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보잘것 없는 정말 보잘것 없어 보이는 이 작은 순종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의 여인이 한 적용이 어떤 거창한 적용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늘 하던 대로 우물 뚜껑 위에 곡식을 펴서 덮은 거 그거 하나였어요. 그런데 그래서 여러분 큰 구원은 작은 순종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목장 식구에게 힘들지 않냐고 말 한마디 물어봐 주는 거죠. 목장에 잘 안 나오는 지체에게 잘 지내시냐고 문자 한 통 하는 것입니다. 새 가족으로 온 지체의 이름을 기억했다가 다음 주에 한번 불러주는 것이에요. 이런 작은 순종이 이런 작은 조경이 구원의 우물 뚜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다윗과 모든 백성이 함께 요단을 건너 도망을 하게 됩니다.
22절입니다.
다윗이 일어나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널새 새벽까지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다윗 공동체가 압살롬의 추격을 피해서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새벽까지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대요. 이 구절을 읽는데 눈물이 이렇게 좀 핑 돌더라고요. 모든 백성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요단을 건넜다는 거예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어떻습니까? 지금 막 정신없이 도망가는 행렬입니다. 노인도 있고 연약한 여인들도 있고 아이도 있고 병든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충분히 낙오자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빠짐이 없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다윗은 자기만 살겠다고 먼저 강을 건너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건너는 것을 보고 다윗이 마지막에 건넜다는 뜻입니다.
이게 목자의 마음이죠. 이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선한 목자는 99마리의 양을 두고 잃은 1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한 마리라도 잃지 않으려는 그 마음이 99마리를 살리는 것이에요. 우리가 목장이 끝나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죠. 저 사람만 없으면 나눔이 더 재미있을 텐데 저 사람이 항상 우리 목장 분위기를 깨뜨려 이런 생각이 드세요? 안 드세요? 목자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계속 자기 얘기만 하는 저 박 집사님 적용은 안 하고 말만 많은 김 집사님 자꾸 연락이 안 되는 이 집사를 데리고 이렇게 가다 보면 저 사람만 떼어놓고 가면 너무 편할 텐데 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끝까지 함께 가야 합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요단을 건너야 하는 것이에요.
돌아오는 주일에 하반기 목장 개편이 발표되죠. 저 사람은 이번에 다른 목장 갔으면 좋겠는데 라고 조금이라도 기대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고 회개하고 말씀 앞에서 좀 이렇게 회개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짜 식구가 되고 진정한 공동체가 되는 것은 하하호호 웃으며 술판이 벌어지는 잔칫집이 아닙니다. 함께 도망하는 밤, 함께 강을 건너는 이 새벽에 진짜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생의 자랑으로 모인 사람들은 바람 한 번 불면 흩어집니다. 압살롬이 잘 나갈 때 몰려든 사람들 압살롬이 망하니까 또 흩어졌어요. 하지만 같이 우물에 숨고 같이 강을 건넌 사람들은 평생을 갑니다. 고난이 우리를 진짜 공동체로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지난주 금요일에 저희 마을의 한 부목자님 가정에 장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가슴이 아팠던 것은 이 망자가 그 부목자님의 10살배기 아들이었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너무 잘 뛰어놀던 이 아이가 하루 아침에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얼마나 황망했겠어요. 저도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이 소식을 듣고 가슴이 너무 먹먹했습니다. 저희 목장 단톡방에 장례 공지가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장례식장에 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장례식장에 도착했는데 정말 수많은 분들이 와 계셨습니다.
복도까지 자리가 없어서 서서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이 오셨어요. 그리고 함께 울었습니다. 모두가 내 아들을 떠나보낸 마음으로 정말 대부분의 분들이 우리 남자 집사님들도 함께 우는 거예요. 유가족이 목놓아 울부짖으면서 회개의 나눔을 하시는데 모인 모든 분들이 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듯이 함께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유가족께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이렇게 나눔을 하시는 거예요. "저는 이 아이를 통해서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오늘 와주신 분들을 보면서 제가 정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혼자가 아니에요. 저는 공동체가 있어요.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이 말씀을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몰라요. 계속 그 말씀만 반복하시더라고요. 여러분 이런 감당이 안 되는 사건을 만났을 때 혼자서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함께 강을 건너주는 그 한 사람만 있으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기다려주는 그 한 사람, 손잡아주는 그 한 사람만 있으면 우리가 감당할 수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주신다는 것이 혼자 감당할 수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공동체가 있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다고 사도발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 이곳에 모인 우리가 함께 피하고 함께 도망할 우리 다윗 공동체가 될 줄 믿습니다.
적용 질문 드립니다.
- 여러분은 함께 피하고 함께 도망하는 다윗 공동체가 있습니까?
- 함께 요단을 건너기에 너무 힘든 한 영혼은 누구입니까?
- 오늘 바후림의 여인처럼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순종의 이 우물 뚜껑은 무엇입니까?
이제 첫 번째로, 함께 도망가는 공동체가 있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2. 홀로 죽음을 선택하는 아히도벨이 있습니다.
다 공동체가 있었고, 지금 이제 아히도벨을 좀 보겠어요. 23절입니다. 같이 한번 읽습니다.
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
자, 함께 요단을 건너는 다윗 공동체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살았는데 이제 정반대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아히도벨이에요.
여러분 아히도벨이 누구입니까? 당대 최고의 지략가였습니다. 성경은 그의 조언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았다라고 표현할 정도예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인데 하나님의 말씀처럼 정확했다는 겁니다. 그만큼 너무 똑똑하고 통찰력이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 아히도벨이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 편에 섰습니다. 그리고 자기 계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까 어떻게 해요? 오늘 말씀처럼 스스로 목을 매어 죽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라고 아주 문자적으로 기록된 사람은 딱 두 사람입니다. 구약에서는 아히도벨이고 신약에서는 누구예요? 가룟 유다예요. 아히도벨은 다윗이 가장 신뢰했던 신하였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가장 신뢰했던 제자였습니다.
가룟 유다가 이제 돈궤를 맡았잖아요. 얼마나 신뢰를 했으면 돈궤를 맡겼겠어요. 그런데 그 아히도벨과 이 가룟 유다가 배신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또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 우리 주변에 실수가 없고 완벽하게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직에서 늘 칭찬을 받고 무한 신뢰를 받는 사람들이 있어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 그런 분이 계시다면 오늘 이 아히도벨을 잘 추적해 봐야 합니다. 지금 이 아히도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어제 우리가 큐티한 대로 아히도벨의 계략이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후새의 계략이 채택되었어요. 그 똑똑하고 뭐든 잘하는 이 아히도벨에게 처음으로 실패 사건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이 이걸 인정하지 못하는 거예요.
아히도벨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가 옳다는 이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자기 객관화가 전혀 안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사실 어떻습니까? 자기 계획이 무너지는 사건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우리들 교회 성도님들은 할렐루야를 외치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지 않다. 내가 죄인이다를 깨달을 수 있는 회개의 기회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홀로 혼자서 이런 일을 겪으면 절대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나는 옳았는데 운이 안 좋았을 뿐이라고 해요.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저 사람 때문에 이런 실패가 찾아왔다고 끝까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누가 옆에서 말을 해줘야 아는 거예요?
그것도 한 사람만 말하면 싸움이 됩니다. 그런데 여러 명이 말해주면 귀가 좀 열리는 게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늘 공동체의 피드백을 듣고 스스로 모니터링을 하는 것이 우리가 죽지 않고 살 길이에요. 그래야 치우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2절을 다시 보니까 홀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홀로 자기 집에 이르렀다고 해요. 혼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혼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혼자 집을 정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혼자가 이렇게 위험한 것입니다. AI 혁명이. 그래서 무서운 거예요. 혼자 결정하고 혼자 해결하라고 하다가 스스로 목을 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히도벨이 자살한 이유가 뭐예요? 함께 요단을 건너준 이 공동체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제 나눔을 살짝 하나 하면은 제가 미국에서 유학을 하던 시절에 이제 가서 얼마 안 돼서는 제가 이제 한인 교회를 간 것도 아니고 이제 제가 미국의 교회 신학 공부하러 왔으니까 미국 교회를 탐방한다는 명분 하에 어디 교회를 정하지 않고 주일마다 그냥 이곳저곳 미국 교회들을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예배를 드리는 떠돌이 예배를 꽤나 오래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냥 주일이 되면 아무 교회를 정해서 그냥 가서 딱 예배만 드리고 오는 거예요. 새 가족이라고 붙잡으려고 하면 도망쳐서 나오고 그 교회는 다시 안 가고 이런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주일 아침이 되면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쉴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주일 성수를 지키지 못한 날이 조금씩 늘어갔습니다. 이게 다 왜 그래요? 익명성이 보장되니까 그래요. 그 타지 땅에서 저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죠. 제가 주일에 교회를 가던지 안 가던지 눈치를 줄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딱 죄가 시작되더라고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공동체를 벗어나면 바로 죄가 시작됩니다. 제가 목사의 아들로 자라면서 주일 성수를 단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미국에 가서 저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익명성이 보장되니까 주일 성수부터가 금이 가더라는 거예요.
그러던 중에 이제 한 번은 큰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제가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정말 폐차를 했죠. 폐차를 할 정도로 큰 사고였어요. 그런데 기적같이 저는 하나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거예요. 이때 제가 말씀 공동체가 있었다면 돌이키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텐데 그때까지만 해도 한창 이 익명성을 즐기고 있을 때라 저에게 그냥 바로 든 생각은 빨리 또 돈 모아 가지고 새로운 차를 사야겠다. 이 정도 생각밖에 못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 이제 제가 당시에 피자 배달 알바를 하면서 이렇게 공부를 했었는데 사장님께서 솔깃한 제안을 하시는 겁니다. 미국은 보통 피자 배달을 차로 하거든요. 제가 차가 없어서 알바도 못할 상황이었는데 사장님이 본인의 차를 빌려주시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대신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너도 돈을 빨리 모아야 되니까. 알바 시간을 좀 늘려라.
그리고 특별히 일요일이 바쁜데 일요일에 일을 니가 좀 해주면 알바비를 시간당 좀 더 주겠다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제안을 받으면 우리는 어떡합니까? 목장에 가서 물어봤겠죠. 그런데 그때 저에게 물어볼 목장이 없었습니다. 아니죠. 물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 기억에 그냥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하겠다고 수락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두어 달을 주일 성수를 지키지 않고 알바를 했습니다. 그렇게 약 3천 불 가량을 한 두어 달 동안 모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3천 부를 가지고 중고 자동차를 사려고 인터넷 중고 사이트를 매일같이 뒤졌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좋은 매물의 차를 찾은 거예요.
연식과 마일리지 대비 가격이 너무 저렴했습니다. 야 드디어 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또 이런 선물을 주시는구나. 제가 그때 이제 20대니까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를 때니까 의심도 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이 주신 거다 생각하고 구입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 판매자의 집에 찾아갔어요. 후덕하게 배가 나온 중년의 흑인 아저씨였습니다. 집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집에 들어갔는데 입구에 God bless you라고 써 있더라고요. 또 테이블에 보니까 성경책이 있었어요. 제가 혹시 크리스찬이냐고 물으니까 크리스찬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얼마나 반갑던지 사실은 내가 한국 사람인데 이렇게 미국에 신학 공부를 하러 왔다 이러면서 막 반갑게 대화를 또 한참 하다가 제가 또 빈틈을 노리고 이렇게 어렵게 공부하는데 좀 더 네고를 해줄 수 없겠냐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분이 또 쿨하게 한 100불 정도를 깎아줬던 것 같아요. 제가 너무 기분 좋게 차를 끌고 왔습니다. 이건 정말 하나님께서 예배해 주신 차다. 그 당시 제가 조그만 차를 탔었거든요. 그런데 그 차는 V6의 그런 차였어요. 제가 정말 이 차를 하나님이 주신 차라고 찰떡같이 믿고 기분 좋게 타는데 느낌이 좀 오시죠. 정말 한 달도 안 돼서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차가 멈춰 섰습니다.
그래서 카센터로 갔어요. 그런데 그 매케닉이 하는 말이 어떻게 이런 차를 샀냐고 이 차는 못 고친다는 거예요. 엔진부터 그냥 싹 다 바꿔야 된다는 겁니다. 결국 제가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또 제가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죠. 1달도 안 됐으니까 그 흑인 아저씨를 찾아갔습니다. 또 안 되는 영어로 막 따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친절했던 아저씨가 막 화를 내면서 빨리 가라고 하는 거예요. 환불은 절대 해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때 제가 정말 인생의 쓴맛을 처음으로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이게 다 뭐예요?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말해줄 그 한 사람, 그 공동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윗과 아히도벨은 똑같은 위기인데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습니다.
후새의 권면을 들었던 다윗은 살았고 자기 모략을 믿었던 아히도벨은 죽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항상 두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끝까지 자기를 의지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무릎 꿇고 공동체를 붙드느냐입니다. 이제는 자기 모략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만 붙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적용 질문 드립니다.
- 여러분은 다윗입니까? 아히도벨입니까?
- 내가 철석같이 의지하고 있는 나의 모략은 무엇입니까?
- 또 나의 모략이 무너졌을 때 나는 무릎을 꿇습니까? 아니면 모든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타십니까?
- 내 주변에 이렇게 아히도벨처럼 홀로 죽어가는 지체는 또 누구입니까?
첫 번째는 함께 도망가는 다윗 공동체가 있었고, 두 번째는 홀로 죽음을 선택하는 아히도벨이 있었습니다.
3. 공동체를 살리시는 우리 하나님이 있습니다.
24절 함께 읽습니다.
이에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다윗이 요단을 건너서 마하나임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 마하나임이 어떤 곳입니까? 창세기 32장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 직전에 너무 두렵고 무서워 벌벌 떨고 있을 때 기억나시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야곱을 안심시켰던 그 장소가 바로 마하나임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그때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으로 마하나임이라고 야곱이 이름을 지은 곳이죠. 여러분 하나님은 다윗을 이 하필 마하나임으로 인도하셨을까요? 우연이 아닌 것이죠.
천 년 전에 야곱이 가장 두려웠을 때 하나님이 만나주셨던 그 장소로 지금 또 가장 두려운 다윗을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다윗아 지금 니 눈에는 압살롬의 군대만 보이지. 이제는 너를 지키고 있는 나의 군대를 보거라" 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게 마하나임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에요. 다윗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믿음의 본을 보여주신 우리 담임 목사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에요. 먼저 말씀으로 살아내신 우리 초원님, 마을님, 목자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결국 마하나임 공동체의 본질이에요. 여러분 그 마하나임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27절부터 이제 마지막 절까지 쭉 나오는데 너무 길어서 읽지는 않겠습니다.
마하나임에 하나님께서 예배해 주신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라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다윗 공동체를 얼마나 극진히 섬기는지 모릅니다. 이들이 무엇을 가져옵니까? 침상, 대야, 질그릇 이런 거 같은 생필품부터 밀, 보리, 밀가루, 콩팥, 꿀, 버터, 치즈까지 풍성한 식료품들까지 다 가져왔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는데 무슨 음식 이름을 이렇게 시시콜콜 성경에서 다 나열을 하나 싶었어요. 그냥 누울 것, 먹을 것, 입을 것 이렇게만 해도 의미가 다 전달이 될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기록할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하지만 29절 마지막에 보니까요. 그 이유가 명확하게 나옵니다.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여러분 그들이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일행이 요단을 건너서 이 마하나임까지 오는데 얼마나 시장하고 얼마나 목마르고 얼마나 지쳤을지 다윗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하고 또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섬김은 이렇게 하는 것이죠. 이 진짜 사랑은 막연하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추상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 마음 알지?" 하고 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과 섬김은 이렇게 아주 세심하고 구체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힘내세요." 한마디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침상을 가져오고 대야를 가져오고 밥을 차리고 이게 또 입맛에 맞는지 안 맞는지 식자재를 다 꺼내놓고 무조건 그 사람에게 맞추는 것이 진짜 섬김이고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세심하게 공급해 주시는 또 이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은요, 우리의 처한 상황을 아주 세밀하게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족함을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돼요. 아닌데요. 저는 여전히 너무 가난한데요. 하는 사업마다 다 망하는데요. 내가 산 부동산, 내가 산 주식만 떨어지는데요. 라고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마하나임에서 다윗을 배불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럼 뭐가 목적이에요? 다윗을 구원하시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돼요. 구원이 뭡니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영원히 지치지 않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배고프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 마하나임 밥상을 차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공급을 끊으셨다면 그것 자체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기 위한 이 마하나임 밥상이라는 것을 믿으셔야 돼요. 이제 진정한 영적인 공급을 시작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사실 제가 사회복지 사역을 감당하면서 이런 딜레마에 좀 봉착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희가 이제 위기의 임산부, 미혼모, 한부모 가정을 이렇게 돕습니다. 모두가 누울 곳을 달라, 먹을 것을 달라, 입을 것을 달라 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 저희가 마하나임 밥상을 차려요. 기저귀, 분유, 유모차, 옷, 신발 이런 육아용 생필품부터 심리상담, 병원 치료, 취업 교육 같은 이런 자립 지원까지 이 위기 한부모 가정을 살리기 위해서 저희 나름대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지원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질적인 지원만 한다고 이들이 정말 본질적인 목마름이 채워질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항상 하게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결국은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을 믿어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수요 설교를 통해서 또 저희 복지재단에서 이렇게 케어하는 한 자매를 소개해 드렸잖아요. 여러분들 기도 덕분에 이 자매가 교회에 진짜 왔어요. 그리고 잘 등록하고 지금까지 잘 다니고 있습니다. 첫날은 좀 늦게 일어나 가지고 3부 예배를 못 왔어요. 그런데도 4부 예배에 왔더라고요. 그런데 그냥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 한여름에 애기를 안고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이렇게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목사님 저 다시는 못 올 것 같아요. 진짜 너무 힘들었어요." 막 그 소리를 계속하고 제가 그 소리를 듣는데 마음이 막 약해지더라고요. 좀 미안한 마음도 들면서 "안 돼. 다음 주도 와야 돼" 라는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그래 힘들지. 그런데 우리가 너를 도와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 너가 예수님을 믿어야 영원히 힘을 얻고 살 수가 있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고 집으로 보내고 제 느낌상으로는 '이제 안 오겠구나'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그래도 "하나님 우리 자매를 만나주세요." 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에 또 왔다는 거 아니겠어요? 지난 주일에는 일찍 왔어요. 9시에 왔어요. 정말 믿음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저 씨만 뿌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기억나실 때마다 이 자매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우리 복지재단에서 케어하는 이 이 구제사역이 정말 이들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예수님을 좀 믿게 해달라고 이렇게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적용 질문 드릴게요.
- 여러분은 지금 내 눈에 압살롬의 군대가 크게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군대가 크게 보이십니까?
- 내가 세심한 사랑으로 섬겨야 할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른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차려줘야 할 마하나임 밥상은 무엇입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요즘 AI 시대에 점점 혼자가 되어 가는 저희들에게 오늘 함께 요단을 건너는 이 다윗 공동체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효율과 편리라는 이름으로 기계를 의지하고 사람을 잃어가는 이 시대 가운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죽음으로 치닫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혼자 요단을 건너려는 이 자기 도취와 교만을 내려놓게 하시고 함께 도망하고 함께 강을 건너는 믿음의 공동체를 붙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요단을 건넜던 그 새벽처럼 우리도 마지막 한 영혼까지 다 데리고 건너는 다윗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시고 해석되지 않는 고난 앞에서 아히도벨처럼 홀로 절망해 앉아있는 이분들의 이분들이 정말 공동체의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 곁에 마하나임 밥상을 차려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여 주시고 이제는 우리가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른 누군가의 밥상을 차려서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내는 저희가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광야 끝에서 만난 따스한 손길
삼하 17:24-29 / skd1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보호 (사무엘하 17:24-29)
들어가며: 혹시 지금, 인생의 광야를 헤매고 있나요?
숨 막히는 절망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막막함. 때로 우리 인생은 거친 광야와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쫓기는 신세가 된 다윗 왕처럼 말이죠.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에서 쫓겨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도망쳐야 했던 다윗. 그의 마음이 얼마나 처절했을까요? 하지만 바로 그 절망의 끝자락에서, 다윗은 자신을 결코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보호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하 17장 24절에서 29절 말씀을 통해,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하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시며, 가장 적절한 때에 도우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함께 발견하고자 합니다. 지금 광야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모든 분들에게 이 말씀이 큰 위로와 소망이 되기를 기대합니다!신학 및 종교학 온라인 강좌 수강하기
첫 번째 발걸음: "괜찮아, 내가 예비한 안식처란다!" - 언제나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다윗은 요단강을 건너 마하나임이라는 곳에 이릅니다 (사무엘하 17:24). 마하나임은 과거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를 만났던 의미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창세기 32:1-2). 쫓기는 자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안전한 피난처입니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다윗이 마하나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자녀를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얘기치 못한 폭풍우가 몰아칠 때가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한 안전한 피난처, 새로운 시작을 위한 마하나임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그 길이 험난하고 멀어 보일지라도, 주님의 손을 붙잡고 나아갈 때 우리는 결국 그분이 마련하신 평안의 자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다윗을 마하나임으로 이끄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도 가장 선한 길, 가장 안전한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채우심: "네게 필요한 모든 것, 내가 다 알고 있단다!" - 있어야 할 것은 언제나 채워주시는 하나님
광야와 같은 도피 생활에서 다윗과 그를 따르는 백성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먹고, 자고, 쉴 수 있는 기본적인 필요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암몬 족속의 나하스의 아들 소비, 로데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다윗과 백성들을 위해 엄청난 양의 물품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들이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씨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사무엘하 17:28-29)
이것은 단순한 구호품이 아니었습니다. 지치고 굶주린 그들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있어야 할 것을 언제나 가장 정확하게 아시고, 가장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마치 세심한 부모가 자녀를 돌보듯 다윗과 그의 백성들의 필요를 공급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계십니다.
세 번째 타이밍: "조금만 더 힘을 내, 바로 지금이야!" - 하나님의 도우심은 가장 적절한 때에 나타나신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언제 나타날까요? 바로 가장 절실한 순간, 가장 필요한 그때입니다. 다윗과 그의 백성들이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바로 그 순간에,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의 도움의 손길이 도착했습니다. 만약 이들의 도움이 너무 늦었거나, 혹은 너무 일렀다면 어땠을까요? 그 효과는 반감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언제나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나타나십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다고 느껴 조급해하거나 낙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왜 지금입니까?" 또는 "하나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가장 좋은 때를 알고 계십니다. 그분의 시간표는 우리의 시간표와 다를 수 있지만, 결코 틀리지 않습니다. 다윗에게 가장 필요했던 순간에 나타난 도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도 가장 적절한 때에 당신의 구원과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나가며: 당신의 마하나임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세요!
사무엘하 17장 뒷부분에 기록된 다윗의 이야기는 절망 속에서도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보호하심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분은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며, 가장 완벽한 때에 도우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혹시 지금 삶의 광야에서 지치고 목마르신가요? 다윗을 마하나임으로 인도하시고 그곳에서 모든 필요를 채우셨던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 하나님께서 오늘 당신의 삶에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당신을 위한 마하나임이 예비되어 있으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채우심과 도우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들어 당신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의 손길이 당신의 모든 길 위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