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8월 20일 밤 11시경 제주도 서귀포 해변에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 이동관과 정창룡이 대한민국 육ㆍ해ㆍ공군, 해병대, 중앙정보부, 경찰 특수부대 등 최고 정예요원 500여 명이 투입된 작전에 의해 사살됐다. 중무장한 두 사람은 죽기 직전까지 아군에게 총격을 가하며 저항했다. 함께 침투한 북한 753부대 소속 무장공작선은 서귀포 남동쪽 30마일 해상까지 도주했으나, 우리 군함의 공격으로 결국 나포됐다.
무장공비의 임무는 통일혁명당(통혁당) 핵심간부인 이문규(李文奎) 구출이었다.
《월간조선》은 2010년 10월호에서 당시 간첩 지령용 방송인 A-3 지령을 이문규나 통혁당 간부가 아닌 중앙정보부 요원이 북한에 보내 무장간첩선을 일망타진한 사건이 유인 역(逆)공작 ‘Z작전’임을 사건 발생 42년 만에 밝혀낸 바 있다.
관련자들은 남한에선 처벌됐지만, 북한에서는 영웅이 됐다. 김일성(金日成)은 사형당한 이문규와 통혁당 총책 김종태(金鍾泰)에게 영웅 칭호를 ‘하사’했고, 김종태의 이름을 딴 공장, 거리, 대학이 생겼다.
◆신영복 인터뷰 본 후 증언록 공개 결정
김종태, 김질락(金瓆洛), 이문규 등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던 통혁당 간부 신영복(申榮福)은 1988년 8ㆍ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해 이듬해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명숙(韓明淑) 전(前) 총리의 남편 박성준(朴聖焌ㆍ前 성공회대 겸임교수)씨는 1967년 6월 신씨에게 포섭돼 당 소조책(小組責ㆍ북한 지하당 최소 조직 ‘세포’ 3개가 모여 결성된 조직을 관리하는 간부급 당원)으로 활동하며 신씨의 지도를 받았다.
박 전 교수는 2006년 부인이 총리에 지명되자 “통혁당 사건의 일부는 사실이나, 나는 통혁당과 관련이 없고,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 좌파 지성’으로 활동해 온 신 교수도 통혁당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솔직하게 밝히지 않았다.
2011년 1월 1일, 《중앙일보》는 “책은 먼 곳에서 찾아온 벗입니다”란 제목으로 신영복 교수의 새해 특별기고를 게재했다. 신문은 신 교수에 대해 “그는 통혁당에 가입한 적이 없었으나, ‘통혁당 지도간부’로 기소됐다고 한다”라고 설명했다. 같은 달 15일, 《중앙일보》는 신영복 교수를 직접 인터뷰했다. 객원기자인 영화배우 이혜영(李慧英)씨가 “통일혁명당 사건이 뭐냐”고 첫 질문을 던졌고, 신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구속된 1968년은 김신조 사건이 나고, 미(美) 정보함 푸에블로호(號)가 북한에 나포되고, 예비군 동원법이 만들어지고, 3선 개헌이 추진되고,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치열하게 벌어지던 해예요. 이런 시기에 간첩단 사건이 터졌는데, 거기에 청년학생운동이 동일 사건으로 엮인 거죠. 그 접점에 제가 있었고요.”
안병직(安秉直) 서울대 명예교수(시대정신 이사장)는 이날 기사를 읽은 후 자신의 비공개 증언록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2010년 9월 3일 명지대 정기학술포럼에서 비(非)보도를 전제로 발표한 내용으로, 그가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던 1960~70년대 좌익(左翼)운동의 실체와 실상을 소상하게 밝힌 자료다. 강연 직후 《월간조선》은 안 교수 측에 수차례 증언록 공개를 요청했지만, 안 교수 측은 “친구, 선후배, 제자 등이 거론돼 곤란하다”며 고사한 바 있다. 그의 증언은 지난 5월 말 출간된 《보수가 이끌다-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란 책에 수록됐다.
◆“증언록 원본은 훨씬 충격적”
안 교수는 박정희 정권 시대의 ‘민주화 운동’을 ‘야당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운동’과 ‘좌익단체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운동’으로 구분했다. 안 교수에 따르면,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등 지도자와 박한상(朴漢相·변호사) 의원, 서남동(徐南同) 목사는 모두 자유민주주의자들이다. 반면 좌익세력은 표면적으론 민주화를 내걸었지만, 핵심사상은 북한과 같은 인민민주주의나 신민주주의였다. 당시 사회주의 운동은 ‘민주화’란 명분을 내걸고 운동했지만, 그 사상과 내용은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안 교수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통혁당 사건, 제2차 인혁당 사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 김정강(金正剛) 그룹 등 5대(大) 좌익운동 사건에 대해 듣고 경험했던 일들을 김수행(金秀行ㆍ現 성공회대 석좌교수), 신영복, 박성준 등 관련자의 실명과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해 가며 공개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 등 주요 일간지들은 안 교수의 증언을 “충격적이고 용기 있는 고백”이라며 보도했다.
안 교수는 “당시 수사기관에 발각돼 조사ㆍ발표된 보도내용들은 기본적으로 대개 사실”이라며 “한 다섯 번 정도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으며 얻어맞기도 하고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수사기관이 가능하면 법적 테두리를 지키려고 애쓰는 것으로 느껴졌다”고 증언했다.
안 교수의 증언을 글로 정리한 강규형(姜圭炯) 명지대 교수는 “강연 내용을 그대로 기록한 증언록 원본엔 훨씬 충격적이고 깊은 내용이 포함돼 있다”며 “일부 관련 인사의 이름을 익명 처리하는 등 상당히 조절을 했음에도, 사실 그대로의 경험을 공개해 그 파장이 컸다”고 설명했다.
안 교수는 1962년 서울대 대학원 재학 시절 박현채(朴玄埰ㆍ前 조선대 교수)씨를 처음 만났다고 밝혔다. 빨치산 출신인 박 전 교수는 소설가 조정래(趙廷來)의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빨치산 전사 ‘조원제’의 실제 모델로 유명하며,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바 있다.
당시 안병직은 박현채의 가르침을 받고 사회주의자가 됐다.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毛澤東)을 탐독했고, 한용운과 신채호 사상을 배웠다. 박현채는 사회주의자가 된 안병직을 인혁당에 끌어들이려 했다.
안병직은 인혁당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인혁당이 발각될 무렵 후보위원쯤 될 정도로 개입을 했다. 사건 직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당원들을 도운 이유로 박현채와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졌다.
◆실존 인혁당을 ‘짜맞추기’로 규정한 과거사委
안 교수는 인혁당의 2인자인 정도영(鄭道永ㆍ前 합동통신 조사부장)씨와도 가깝게 지냈다. 사건 이후 10년 이상 지속한 두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인혁당의 실체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됐다고 한다.
2005년 12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는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부장 김형욱)가 한일 국교정상화 추진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북한의 지령을 받는’ 인혁당을 만들어 학생운동과 연계됐다고 조작한 것”이라고 밝혔다.
2007년 10월 공개된 과거사위의 최종 보고서는 “대통령이나 중앙정보부장의 발표에서 규정된 인혁당이나 민청학련의 성격은 그대로 수사지침이 되어 짜맞추기가 진행돼 이들 단체를 무리하게 반국가단체로 만들어간 것”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2010년 6월 박범진(朴範珍) 전 의원의 증언으로 “인혁당은 짜맞추기”란 과거사위의 조사결과에 대한 논란이 재점화됐다. 1963년 봄 인혁당에 입당해 활동했던 박 전 의원은 “제1차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 아닌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실존했던 지하당(地下黨)”이라면서 “정부 당국이 (물증을 확보하지 못하는 등) 객관화하는 데 실패해서 조작사건처럼 계속 논란이 됐다”며 과거사위의 조사발표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자생적 조직인 인혁당과 달리 통혁당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결성된 혁명조직이었다. 안 교수는 신영복, 박성준, 김수행 등 통혁당 주요 관련자와의 일화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안 교수에 따르면 신영복이 박성준을 통해 ‘경제복지회’란 기독교 학생단체를 지도했고, 신영복은 통혁당의 2인자인 김질락의 지도를 받았다.
1968년 초여름, 서울대 상과대학 조교였던 김수행이 안병직에게 자신의 연구실에 가득한 북한 서적을 보여줬다. 《마르크스 선집》 《레닌 선집》 《스탈린 선집》 등 이론서와 소설들로, 모두 신영복 쪽에서 받은 책들이었다. 안병직과 김수행은 그날 저녁 몰래 책들을 변소에 처넣었다.
안병직은 며칠 후 신영복을 찾아가 “상과대학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으니 선배인 우리가 수습하자”고 했지만, 신영복은 “왜 그러한 일을 자기와 상의하느냐”며 항의했다고 한다.
몇 달 후 통혁당 사건이 터지자, 제일 먼저 안병직을 찾아온 사람은 박성준이었다. 안병직은 헐레벌떡 달려온 박성준에게 “자수를 하든지 종적을 끊고 최소한 10년 이상 지방도시에 가서 숨어 지내라”며 “도망갈 땐 모든 연락망을 완전히 단절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안병직, 신영복, 박성준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수사기관에 검거됐다.
안 교수의 증언록은 통혁당 역공작 검거작전에 대해 “김질락과 이문규를 통해 얻은 정보를 토대로 그들의 협조를 받으면서 우리 수사기관이 역공작으로 공작선을 유인해 제주도 서귀포에서 일망타진했다”고 간략히 정리했지만, 실제 증언에선 자세한 정황을 설명했다. 다음은 안 교수의 증언록에 수록되지 않은 비공개 원문 중 일부다.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이문규를 유도하기 위해 ‘네가 그러면 북쪽하고 연락이 되느냐’고 하니까 ‘연락이 된다’고 했고, ‘무엇 가지고 하면 되느냐’고 물으니 ‘난수표를 가지고 조립하면 연락이 된다’고 했던가 봐요. 그래서 이문규가 ‘우리 조직이 다 발각됐다. 대처를 해달라’ 하는 것을 연락하기 위해 중앙정보부 요구에 응한 겁니다.
이문규는 북한과 숫자 하나를 더 넣고 뺌에 따라서 의미가 전혀 거꾸로 읽히도록 서로 이런 약속이 되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난수표를 조직해서 넘겼는데, 그걸 믿을 리 없는 중정이 (이미 전향한) 김질락에게 보여주고 고백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김질락이 난수표를 보고 숫자가 하나 빠졌다면서 보충해 버렸어요. 그렇게 북한에 타전을 하니, 북쪽에서 1968년 8월 20일 무장간첩선을 제주도로 파견해 이쪽 멤버들을 다 싣고 올라가려다 일망타진됐습니다.”
- ▲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와의 인터뷰를 게재한 《중앙일보》. 안병직 교수는 이 기사를 본 후 자신의 비공개 증언록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제2차 인혁당은 정치적으로 이해해야”
안병직 교수는 1974년 제2차 인혁당 사건(인혁당 재건위)에 대해 “형 집행과정에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많다”며 “(관련자들이) 대수롭지 않은 활동으로 중형을 받고 가정이 파탄에 이르게 된 것은 못내 안타까웠다”고 증언했다.
안 교수는 1973년경 인혁당 재건 움직임에 대해 처음 알았다. 제1차 인혁당 사건으로 이미 수사기관에 조직관계가 등록된 박현채와 정도영이 “위험천만한 일”이라며 안병직에게 알려줬다고 한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유신반대 투쟁을 벌였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의 배후ㆍ조정 세력으로 인혁당재건위를 지목해 두 조직 관련자 1024명을 조사해 수십 명에 대해 사형,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했다.
안 교수는 “제2차 인혁당 사건은 사법적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정치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붕괴했다면, 한국 근대화의 성공 여부는 장담할 수 없었다”며 “(제2차)인혁당의 희생은 근대화 과정에서 조성된 정치적 긴장의 희생물”이라고 했다. 그의 증언 중 일부다.
“설사 인혁당이 재건됐다 하더라도 그렇게 큰 희생을 치를 만한 활동은 없었을 겁니다.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사형시킬 명분은 없었습니다.”
1976년 2월에 결성된 남민전은 처음부터 북한과의 연합전선 구축을 시도한 단체다. 중심인물인 이재문(李在汶)과 신향식(申香植)은 각자 인혁당과 통혁당 관련자였다. 안 교수에 따르면, 이재문의 지령을 받고 도일(渡日)한 안용웅(安龍雄)은 북한 공작원과 접선해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신년메시지와 사업보고서를 제출하고 3억원의 자금을 요청했다. 공작원은 남민전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1978년 1월 초 서울시내에 삐라를 살포하라고 지령했고, 남민전은 실행에 옮겼다.
안 교수는 “통혁당, 청와대 습격, 울진 삼척 무장공비 등 연속된 무장투쟁 실패에 북한은 남민전의 애걸에 가까운 충성맹세와 연합전선 구축 제의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며 “그러한 상황 때문에 남민전은 심각한 자금난을 극복하기 위해 강도행각을 벌인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에 구성돼 ‘좌파의 범죄경력 세탁소’로 비판받은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민주화보상위)는 2006년 “남민전의 총기 취득과 강도행위는 유신 탄압에 대한 항거”라며 관련자 38명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명예회복’시켜 줬다.
김정강 그룹 사건은 같은 시기 다른 공안 사건에 비해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단체의 이름과 강령을 따로 만들지 않고 기록도 남기지 않아 20여 년 동안 발각되지 않았다. 남민전 사건 수사 여파로 1979년 12월 발각됐으나, 물증이 없어 경찰에서 검찰로 수사가 이관되는 과정에서 조직이 완전히 부정돼 대부분 석방되거나 감형됐다.
안 교수의 책 출간 이후 《월간조선》을 비롯한 다수 매체가 김씨를 인터뷰하려고 했으나, 2011년 초 세상을 떠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성사되지 못했다. 1980년경 전향한 김씨는 《월간조선》 1994년 9월호 인터뷰에서 “20년간 사회주의 실험 후 마르크스주의의 인간관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교훈을 깨달았다”며 “사회주의를 버리니 인생이 그렇게 풍요롭게 보일 수가 없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한국 민주주의는 보수가 이끌었다”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가 쓴 《박정희》에 따르면, 김씨는 1964년 초 한국 최초의 대학 내(內) 자생(自生) 친북조직인 ‘불꽃회’를 만들 당시를 “세상을 마르크스 이론에 맞춰 도식화하는 데만 골몰한 나머지 현실감을 잃었던 시절”이라고 회고하면서 “그래도 박 정권 때 법치주의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나의 법정투쟁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5월 26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 안 교수는 건강상 이유로 불참했다. 관계자들은 “본인 책 출판기념회에 못 올 정도로 건강이 많이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지난 6월 5일 안 교수를 서울대병원에서 만났다. 기자가 병실에 들어설 때 그는 《이수병 평전》을 읽고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으로 힘겹게 병상에 앉았지만, 그의 말투는 단호하고 명료했다. 안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건강은 어떤가. 수술하고 운동하면 해결되나.
“외과적 수술은 끝났지만, ‘다발성 골수종양’ 검사를 하고 있다. 일종의 암이다. 퇴원 후에 검사결과를 보고 치료 방향을 정할 예정이다.”
―증언록을 출간하게 된 계기는.
“강규형 교수의 권유로 명지대에서 강연을 했고, 정리한 후 수정ㆍ보완 작업을 거쳤다. 현재 ‘진보진영’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들은 보수진영이 정권을 잡으면 무조건 민주주의가 아니라며 ‘민주 대 반민주’ 구도로 몰고 간다. 진보진영은 스스로 민주주의 모델이 없다는 것을 통렬히 반성해야 한다.
―책에는 1987년 민주화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썼다.
“민주화 운동에 의해서만 한국 민주화가 실현됐다고 보는 것은 잘못됐다. 한국 민주주의의 기반은 이미 제헌헌법에 기록돼 있다. 경제발전 덕분에 두꺼운 중산층이 형성됐고, 이들의 요구로 대통령 직선제 등이 실현된 것이다. 책 제목 그대로 한국 민주주의는 보수가 이끌어왔고 지금도 이끌고 있다.”
―제1차 인혁당은 북한과 관련 없는 자생적 조직이었나.
“해방 직후 혁신계열이 남한에 많았다. 인혁당을 순수하게 보면 그들의 사상을 물려받아 남한에 발생한 자생적 공산주의자들로 볼 수 있다.”
◆“한국엔 혁명이 없었다”
―김정강씨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여태까지 몰랐는데, 최근에서야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들었다. 2006년 이후론 그를 만나지 못했다.”
―《월간조선》과 《신동아》 등 매체에 그의 증언이 나왔는데, 모두 사실이라고 보는가.
“내가 읽어본 것 중엔 거짓이 없었다. 그는 1980년 사상 전향한 후 그의 평생 이력을 정리하기 위해 증언했다.”
―4ㆍ19 직후 남한 남로당 출신 인사와 북한 김일성 등이 ‘남한의 그런 움직임을 몰랐던 점을 반성했을 것’이란 추정이 흥미롭다.
“4ㆍ19가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6ㆍ25전쟁 이후 상대적으로 취약한 남한이 국가로서 존립하기 위해선 반공과 한미동맹이 필수였고, 반공권위주의가 지배할 수밖에 없었다. 4ㆍ19를 기점으로 한국의 모든 사상이 해방돼 사회가 다양화됐다. 현실적 가능성 여부를 떠나 시대 분위기가 바뀐 것이 핵심이다.”
―“한국엔 혁명이 없었다”고 했는데, 4ㆍ19 정도면 혁명 아닌가.
“제1세계의 산업혁명이나 시민혁명과 같은 게 혁명이다. 한국에선 사회의 질적 변화를 한꺼번에 가져온 정치ㆍ경제적 사건이 없었다. 건국 때 이미 선진국의 제도를 다 들여왔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변칙적으로 권위주의를 활용했을 뿐이다. 우리 민주화 역사는 건국 때 도입한 이념들이 하나씩 실현돼 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면 건국 자체가 혁명이었나.
“혁명이란 게 반드시 있어야 하나. 한국인은 ‘혁명’이라 하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는데, 프랑스 등 많은 나라가 혁명이라 하면 무책임한 극단주의자를 떠올릴 정도로 그렇게 좋아하지만은 않는다. 혁명이 반드시 발전을 불러오진 않는다. 오히려 진화ㆍ개선하고, 조금 과격하면 개혁 정도가 더 발전한다. 혁명은 기존 질서를 완전히 파괴한다.”
―박범진 전 의원이 지난해 인혁당 당원이었음을 고백했다. 이처럼 ‘지성(知性)의 고해’가 이어지는 것을 어떻게 보나.
“과거에 주장했던 이념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면, 계속 믿고 주장하면 된다. 하지만 경제적 종속과 착취로 미래가 없다던 나라가 산업화에 성공한 역사적 경험을 우리는 갖고 있다. 과거 반체제운동가들은 ‘대한민국은 희망이 없다. 정치ㆍ경제적으로 끌어 엎어야 한다. 그러면 통일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한국을 희망 없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나.”
―이번 증언록에 언급된 상당수 인사는 여전히 자신의 사상을 고집하고 있다.
“과거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 모두의 사상적 전환은 할 수도 없고, 필요도 없다. 마르크스 이론의 1인자가 마르크스가 틀렸다고 하려면 인생 전체를 부정해야 한다. 현재 그런 진보적인 사상이 존재하는 것은 나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바람직하다. 단, 과거 인식에서 틀렸던 부분을 솔직히 인정하고, 우리 현실에 맞는 새로운 이념을 창출하자는 의미다. 즉 반성할 것을 반성하자는 뜻이다.”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 이들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사람이 사상을 바꾸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자신을 만드는, 피눈물나고 기나긴 고통이 필요하다. 그러한 아픔 없이 말로만 변했다고 하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 온몸으로 변해야 하고,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고통을 감수하기 쉽겠나.
그들은 이념으로 축적된 여러 형태의 ‘자산’이 있다. 바꾸면 포기해야 한다. 형제 같던 사람이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하고, 가졌던 사회적 권위도 잃어버린다. 모든 사회적 관계도 포기해야 하는데, 그 부담이 크다. 말은 쉽지만, 굉장히 어렵다.”
◆“내년에 좌파정권 들어서기 어렵다”
―“수사기관은 법적 테두리를 지키려고 애썼다”고 했는데, 제2차 인혁당의 경우 “사법적으로보단 정치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평상시엔 자유민주주의 법체계를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시기에 따라선 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제일 큰 예가 제2차 인혁당과 민청학련 사건이다. 당시 박정희 정치 체제는 보기보단 취약했다. 민청학련에 밀리느냐 의지를 관철하느냐 기로에서 결국 정치적 판단을 한 셈이다. 학생 대중의 반항이 구조화되자 일벌백계, 공포정치를 한 것이다.
―지난 정권 여러 과거사위원회와 보상위원회에서 실체가 분명한 사건을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라며 조작으로 판단 내리려 했다.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 검증하는 데 당사자의 진술에 의해서만 판단해선 안 된다. 과거사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기록을 면밀하게 검토하면 사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란 주장은 한국 좌익운동이 과거부터 해온 입에 발린 소리다.”
―제2차 인혁당을 주도한 이수병의 평전을 병원에서 읽는 이유가 있나.
“얼마나 사실대로 기술했는지 보고 있다. 상당 부분 사실을 그대로 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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