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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의 죽음
삼하 18:9-18
9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10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알려 이르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하니
11 요압이 그 알린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하는지라
12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13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의 생명을 해하였더라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하니
14 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15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16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그치게 하니 그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17 그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그를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18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삼하 18:9-18 / [압살롬의 최후] 그때에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그도 다윗의 군대에게 쫓겨 험한 숲 속으로 도주하다가 상수리나무의 빽빽한 가지에 그만 머리채가 휘감기고 말았다. 이렇게 그가 상수리나무에 매달리자 타고 가던 노새가 앞으로 혼자 빠져 나갔다. 10) 다윗의 군인들이 이것을 보고 즉시 요압에게 보고하였다.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매달려 있습니다.' 11) 그러자 요압이 그 군인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무슨 말이냐? 네가 왜 그를 그 자리에서 쳐죽이지 않았느냐? 그랬더라면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금과 은으로 장식한 띠를 하나 보상금으로 주지 않았겠느냐?' 12) 그러나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비록 은 일천 개를 달아서 제 손에 쥐어 주신다고 해도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임금님의 아들에게 손을 댈 수 있겠습니까? 임금님께서 우리 모두가 똑똑히 듣도록 장군님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나의 어린 자식 압살롬의 목숨만은 살려 주시오! 아무도 그의 몸을 해치지 못하게 하시오!' 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까? 13) 제가 만일 왕의 명령을 어기고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대체 우리 임금님 앞에서 숨길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결국 잡혀서 죽게 되면 장군님께서도 저를 모르는 체하지 않으시겠습니까?' 14) 이때에 요압이 벌떡 일어서며 `나는 이렇게 너하고 이야기하며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고 큰소리를 친 다음, 단창 세 자루를 손에 들고 달려가서 아직도 상수리나무에 매달려 있는 압살롬의 가슴에 꽂았다. 15) 그러자 요압의 무기를 들고 다니던 젊은이 10명이 압살롬을 둘러싸고 그를 때려 완전히 죽여 버렸다. 16-17) 압살롬을 따라 전선에 나왔던 이스라엘 군대는 모조리 도주하고 다윗의 군대는 계속 그들을 추격하고 있었으나 이제 요압이 나팔을 불자 일시에 싸움이 중단되었다. 다윗의 군대는 모두 요압에게로 돌아오고 이스라엘 군대는 해체되어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요압의 군인들은 압살롬의 시체를 떼어다가 숲 속의 깊은 구덩이에 던져 넣고 그 위로 수많은 돌을 쌓아 커다란 돌무더기를 만들었다. 18) 그런데 압살롬은 살아 생전에 이미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왕의 골짜기에 자기의 기념비를 세워 둔 게 있었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으나 그들이 거듭 죽자 `이제는 내 이름을 전해 줄 아들이 이 세상에 없다.'고 탄식하다가 자신의 슬프고 외로운 인생을 달래기 위하여 스스로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다. 그는 그 비석이 자기 아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이름을 이 세상에 전해 주도록 자기 이름을 따서 그 돌기둥에 이름 붙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그것을 `압살롬의 돌기둥'이라고 부른다.
압살롬은 전투에서 패하고 노새를 타고 도망하다가 자신의 자랑거리였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려 결국 요압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체는 웅덩이에 던져지고 그곳에 돌을 던져 돌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상수리나무에 달린 압살롬(9) 압살롬의 군대는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에브라임 수풀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군사들을 피해 노새를 타고 도망치다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나던 중 그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렸습니다. 압살롬은 상수리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노새는 그대로 가버렸습니다. 압살롬의 머리는 그의 자랑거리였으나 그것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가 타던 노새는 당시 왕족들이 타던 짐승입니다. 그는 노새를 타고 스스로 왕이라고 하였으나 오히려 그 짐승이 죽음을 재촉했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상수리나무에 달려 죽었습니다.
압살롬의 죽음(10-15) 다윗의 군대 중 요압의 수하에 있는 한 병사가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걸린 것을 보고 요압에게 알렸습니다. 요압은 그에게 압살롬을 죽였다면 상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왜 죽이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다윗 왕이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한 것을 알고 있기에 더 많은 상을 준다고 할지라도 죽일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요압은 세 개의 창으로 나무에 매달려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고 요압의 무기를 들었던 병사 열 명이 압살롬을 쳐서 죽였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창에 찔린 채 맞아 죽었습니다.
압살롬의 기념비(16-18) 압살롬을 죽인 요압은 나팔을 불어 압살롬의 군대를 추격하는 일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리고 요압은 압살롬의 주검을 수풀 가운에 큰 구덩이에 던지고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돌무더기를 쌓은 것은 반역자나 불순종한 자에게 수치를 나타내고자 하는 행위였습니다(참조 수 7:26; 8:29). 또한 압살롬이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기 위하여 생전에 스스로 만들어 놓았던 비석을 그곳에 세웠습니다. 그 비석은 사무엘상이 기록될 때까지 ‘압살롬의 기념비’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적 용 : 압살롬의 최후를 볼 때 자랑스럽던 머리, 권력의 상징인 노새, 스스로 만든 비석도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모습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누군가는 타인을 대적함으로 그를 연단하고 제련시키는데 사용되는가 하면,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높이기 위해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중에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타인을 위한 도구가 아닌, 하나님의 목적물, 그 자체가 되기도 합니다. 그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준비되지만, 그는 타인을 위해 쓰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어집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 하나님의 약속은 선포됩니다. “이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그를 통하여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 설 교 >
압살롬의 죽음
삼하 18:9-18
사람이 교회를 찾게 되면,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것이 예수가 구세주라는 교리적 내용일 것입니다. 교회는 또한 교회를 찾는 사람에게서 그러한 고백적 말을 이끌어 내는 것이 한 사람을 신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여기고 그러한 학습을 중요하게 여길 것입니다.
물론 예수가 누구시며, 인간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대해, 그리고 성경의 중심 사상에 대해 지식적 차원에서의 학습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학습에 의해 지식이 구축되고 그 지식으로 인한 고백을 그가 신자라는 근거로 삼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그가 교회를 다니는 교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수준이고 소양일 수는 있으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의미로서의 신자, 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죽을 때, 교회를 다니는 가족이 있으면 그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여깁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으면 지옥 간다는 것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부모 형제가 죽어서 지옥 간다는데 마음이 무겁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순간에라도 죽어가는 사람의 입에서 ‘예수님을 믿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듣기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기 전에 예수 믿는다’는 말 한마디만 하라고 다그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물론 믿지 않던 가족이 죽어가는 순간에 한 말 한마디로 그도 천국 갔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심적 위안을 삼고자 하는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구원이 입술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한 편 강도가 예수님을 향한 신앙고백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지만 그것은 결코 말 한마디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자신이 예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됨으로서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맡길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 의해 구원을 얻은 것이지 그의 말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정답이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성경에 맞게 말을 하고 신앙고백적인 말을 한다고 해서 쉽게 ‘나는 신자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자신의 말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말은 얼마든지 자신의 마음조차 속이면서 선이든 신앙이든 가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이점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과 전쟁을 하기 위해 군사를 조직 하고 다윗도 함께 나가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저희는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18:3)라고 권합니다.
백성들의 말을 들어 보면 그들이 다윗을 참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또한 온 마음을 다해 다윗을 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윗의 마음을 알고 다윗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지 다윗 앞에서 어떤 말을 했느냐에 있는 것은 아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은 군사들을 전쟁에 보내면서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한 가지 당부를 합니다. 그것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는 것입니다(5절). 다윗의 당부는 자신들 만 명 보다 더 중하다고 여기는 소중한 사람의 당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의 그 말이 백성들의 마음에 기억되어 그대로 시행되었다면 아마 압살롬은 그 전쟁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이 죽었다는 것은 다윗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다윗의 마음과 뜻을 외면해 버린 거짓된 섬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요압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노새를 탄 압살롬의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의 가지에 걸려 그가 공중에 매달리게 되고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 나갔다고 말합니다. 머리털이 나무 가지에 걸려 공중에 매달려 있는 이 상태는 누구에 대해서도 전혀 대항할 수 없는 그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압살롬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압살롬의 이러한 형편을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합니다. 그러자 요압은 그 고한 사람에게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뇨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떡 하나를 주었으리라”(11절)는 말로 책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요압에게 “내가 내 손에 은 천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삼가 누구든지 소년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였나이다”(12절)는 말로서 압살롬을 죽이는 것이 부당함을 고하였으나 요압은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게 되고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들도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 죽임으로서 압살롬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상수리나무에 매달려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의 압살롬을 가운데 두고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두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무 가지에 매달린 압살롬을 발견한 한 사람과 요압입니다. 압살롬을 발견한 그 사람은 자신이 힘이 없어 압살롬을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무 가지에 머리털이 걸려서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압살롬은 다윗을 반역한 자였기 때문에 만약 압살롬을 죽여 다윗에게 바친다면 그 공로가 인정되어 상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오직 한 가지, 다윗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고 지시했던 사실만 기억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즉 압살롬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다윗의 그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오직 거기에 복종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압살롬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황에 있던 상관없이 압살롬을 죽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압은 다윗의 지시를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뜻과 마음이 어떠한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압살롬은 다윗을 대적한 반역자라는 생각과, 지금 그가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있다는 것만 염두에 둔 채 지금이 바로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라는 것만 생각할 뿐입니다.
이들 중 누가 진심으로 다윗을 섬기는 자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압살롬을 발견한 한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전쟁에 함께 나가겠다고 했을 때 왕은 ‘우리 만 명 보다 중하시오니’라는 말을 하면서 다윗의 출전을 만류했던 백성들 속에 요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그처럼 높이 섬기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정작 요압은 다윗의 마음이나 뜻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무엇을 원하는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는 말에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무기력한 상태의 압살롬을 만나자 자기 성깔대로 행동을 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요압을 두고 진심으로 다윗을 높이고 다윗을 섬기는 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가 비록 다윗 앞에서 어떤 듣기 좋은 말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겉만 번지르르한 말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내 속에 굳게 세우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외쳐봐야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맞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싸움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삶이 주님을 향한 나의 고백과 일치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말과 삶은 각기 독립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눈물 흘리며 고백하면서도 죄인의 죄인다움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마치 요압처럼 내 생명을 다해 예수님만 믿을 것을 다짐하면서도 막상 세상에서는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도 잊어버린 채 다만 자신의 뜻과 마음을 따라 행동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에서 요압과 다를 바 없는 신앙의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고 그러므로 누구든 믿음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는 장담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본문의 상황에 처했다면 어떤 사람으로 행동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름 없는 어떤 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요압입니까? 과연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생각하며 행동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볼 때 본문의 내용은 우리는 지금껏 요압식으로 살아왔음을 고발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내 속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신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따라 산다면 그 모습은 모든 삶에서 보이게 될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하나님의 마음은 외면한 채 자기 마음을 앞세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 있다고 여겼던 내가 결국 신앙의 흉내만 내고 있었을 뿐임을 깊이 자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에 예수님의 값없는 은혜가 홍수처럼 밀려들어 오게 될 것이고, 은혜를 담고 있는 마음에서 과연 어떤 열매가 맺어지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스스로의 말에 속지 말기 바랍니다. 아무리 복음에 맞는 말을 한다고 해도 복음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외면한다면 그의 말은 속임수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을 발견한 그 사람에게 있어서 다윗의 말은 은 천개를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러한 모습이 우리가 왜 믿음이 없는 사람인지 자인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은 천개가 아니라 은 열 개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말씀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예수님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의지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진정으로 크신 분으로 다가온다면 자연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무게로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할 것입니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삼하 18장 18절 / 강문호목사
유머부터 하나 드리며 말씀을 열려고 합니다.
어느 사람이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3주전 아버지가 돌아 가시면서 30억원 유산을 주셨어.” “좋겠다.”
“2주전 할아버지가 돌아 가시면서 20억원 유산을 주셨어.” “좋겠다.” “지난주 할머니가 돌아 가시면서 10억원을 유산으로 주셨어.” “좋겠다.” “그런데 불만이야. 이번 주는 한 명도 안 죽었어.”
유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고든 맥도널드의 책은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작가입니다. 그 분이 쓴 책 중에 많이 읽히는 책이 있습니다.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가?’ 라는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되어 인기리에 읽혀졌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이 남기는 7가지 유산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 물질의 유산
2. 인정의 유산
3. 도전의 유산
4. 통찰의 유산
5. 표본 된 삶의 유산
6. 추억의 유산
7. 영원의 유산이 있습니다.
물질의 유산이란 선박왕 오나시스와 같이 돈이나 재물을 남기고 죽는 것입니다.
인정의 유산이란 내게 영향을 받고 자신감있게 살아가는 사람을 만드는 유산입니다.
도전의 유산은 내가 갈 길을 제시해 줌으로써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멋지게 살아가게 하는 유산입니다.
통찰의 유산은 내가 통찰한 것을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만드는 유산입니다.
표본 된 삶의 유산은 내 삶의 모습을 표준으로 삼고 따라오는 사람을 만드는 유산입니다.
추억의 유산은 생생한 경험으로부터 추억될 만한 일들을 남기는 유산입니다.
영혼의 유산은 내가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 가도록 인도하는 유산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다가 가면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생각해보며 살아야 합니다. 압살롬은 아들이 없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입니다. 아버지 다윗을 죽이고 왕이 되려고 반란을 일으킨 아들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을 죽이지 않거 자기가 도리어 피란생활을 하였습니다. 피란생활중에 압살롬이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성경에서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죽음입니다.
압살롬을 다윗의 신하들이 죽이려고 쫓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압살롬은 나귀를 타고 맹렬하게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아주 큰 상수리 나무나 길거리에 있었습니다. 그 밑으로 나귀가 달릴 때 상수리 나무에 압살롬의 머리가 걸렸습니다. 나귀만 빠져 나갔습니다. 압살롬이 상수리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습니다. 혼자 몸부림쳤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압 장군이 군사 10명을 데리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창으로 상수리 나무에 매달려 있는 압살롬의 심장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압살롬은 자기가 죽으면 자기 무덤을 만들어 줄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 죽음을 준비하였습니다. 자기 비석을 자기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비석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 겟세마네 동산에서 조금 기드론 골짜기 쪽으로 오면 압살롬 묘가 남아 있습니다.
압살롬은 죽어서 세 가지 유산을 남겼습니다.
1. 비석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2. 아버지를 죽이려고 시도한 못 된 아들상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3. 상수리 나무에 머리가 걸려 이상스럽게 죽었다는 불명예를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압살롬은 좋지 않은 유산을 남겼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박왕 아리스토틀 오나시스가 죽고 나니 5억불 약 6천억원이 남아 있습니다. 미국 타임지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그는 6천억 돈을 남기고 죽었다. 그러나 아무 유산도 남기지 못 하였다. 조그만 기념비가 될 만한 일 하나 한 적이 없다.”
컬럼니스트 제임스 샤논(James Shannon)은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부동산을 남기지 못 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어떤 정신적 유산도 남기지 못 하는 것이야 말로 슬픈 일이다. 가룟 유다가 자살하였을 때 주님은 차라리 나지 않으면 나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믿음의 모델은 예수님이십니다. 유산의 모델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남기신 유산은 무엇일가요?
1. 말씀의 유산.
예수님이 남기신 유산은 역사상 가장 놀라운 유산입니다. 제일 중요한 유산은 생명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마태 복음, 마가 복음, 누가 복음 그리고 요한 복음에 예수님이 남기신 말씀은 아주 단순한 말씀입니다. 불과 500 단어를 가지고 온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다 설명하셨습니다. 영의 세계를 모두 말씀하셨습니다. 대학 강의실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2만 단어라고 합니다.
우리는 역사상 수많은 성인들이 기억될만한 독특한 말들을 남긴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네 자신을 알라” 하면 쏘크라테스가 생각이 납니다.
“뭉치면 살면 헤어지면 죽는다” 라는 말을 들으면 이 승만 대통령이 생각납니다.
“인생은 생각하는 갈대다” 라고 말하면 파스칼이 생각납니다.
“불가능은 내 사전에 없다” 라는 말을 들으면 나포레옹이 생각납니다.
이같이 역사상 명언을 남긴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들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는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이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새 술은 부대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 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도 대라.”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영생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주는 최고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가장 놀라운 말씀을 유산으로 남기셨습니다. 이런 말씀 때문에 역사상 수많은 신앙인들이 철저히 믿음을 지키며 살 수 있었습니다.
순교 이야기는 역사상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이야기입니다.
예수믿으면 사형당할 때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몰래 예수를 믿다가 둘이 같이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5m 간격으로 어머니와 아들을 기둥에 묶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나무를 쌓아 놓았습니다. 집행관이 마지막 물었습니다.
“마지막 기회다. 지금이라도 예수를 안 믿겠다고 하면 살려준다.”
그러나 어머니도 아들도 대답은 같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기에 예수님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사형집행관은 다기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무에 불을 질렀습니다. 연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연기에 가려서 서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머니! 연기 때문에 어머니 얼굴이 안 보여요.” 어머니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 얼굴을 보려고 하지 말고 하늘의 예수님의 얼굴을 보자. 지금은 안 보여도 조금 있으면 천국에서 만나 영원히 보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유산의 말씀입니다.
2. 도전의 유산.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도전의 유산을 남기신 하나님이십니다.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을 의지하고 함으로 인하여 엄청난 도전을 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는 데 40년 동안 앉아서 구걸하는 거지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돈을 주려고 하니까 돈이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돈없이 다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지에게 주는 돈이 그렇게 많은 돈도 아니고 푼돈일 터인데 그 작은 돈마저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았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40년 앉은 뱅이가 일어나서 뛰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도전하여 이룩한 역사의 유산은 곳곳에 엄청나게 깔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전의 유산을 남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도전의 유산을 받아 도저히 인간적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주님의 능력으로 해낸 이들이 역사를 빛내고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할 때 숨겨진 이야기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남한 전체를 이미 점령하고 있는 공산군을 물리치기 위하여는 인천 상륙작전을 통하여 허리를 끊으면 인천 남쪽에 있는 적들은 독안에 든 쥐가 되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면서 참모들과 작전회의를 하면서 이런 구상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참모들은 절대 반대였습니다.
“장군님! 안 됩니다. 인천 상륙작전은 99% 실패하는 길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상륙작전은 500번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성공한 것은 노르만디 상륙작전 한번뿐입니다. 노르만디 상륙작전이 성공한 것은 기상에 전문가 어밍 크리스티 박사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노르만디에는 프랑스군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거센 폭풍이 노르만디에 불어 왔습니다. 프랑스군은 도저히 배가 뜰 수 없는 상황이라 모두 안심하고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티는 1944년 6월 6일 하루만은 바다가 잔잔하여 질 것이라고 예보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연합군 장군 아이젠하워는 그 날을 대비하여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그의 말대로 그 날 갑자기 바다가 조용하여졌습니다. 방심하고 있는 프랑군을 기급공격하여 승리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밍 크리스티는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훈장을 받은 것이 노르만디 적전입니다. 그런데 인천은 다릅니다. 밀물과 썰물의 간차가 9m나 됩니다. 상륙작전을 하다가 만일 지연되어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 상륙작전하던 배는 갯벌에서 꼼짝도 못 하고 지상에 있는 적들은 그 표적을 백발백중 명중시킬 것입니다. 독안에 든 쥐가 됩니다.위험한 작전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런 참모들의 제안을 듣고 맥아더 장군은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운명은 500의 1 성공률에 걸리이까? 500분의 499의 실패율에 걸리이까?”
이 때 그의 마음을 조용히 두드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의 생각이었습니다. 맥아더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결단의 그 순간은 승리가 시작되는 결정적인 시점 이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도전의 유산을 받아 실행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도전의 유산을 남기셨습니다.
3. 제도의 유산
예수님만큼 많은 제도의 유산을 남기신 이는 없습니다. 33년의 짧은 생애를 지상에서 지내시고 엄청난 유산을 남기셨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예식이 있습니다.
성만찬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수십억명이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를 드립니다. 새벽기도의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수 십억명이 주일이면 성경 찬송을 지니고 교회로 와서 예배를 드리는 세계 최대의 조직 교회 제도를 이룩하셨습니다.
찬송의 유산도 예수님이 남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마지막 길을 가시면서도 찬송을 하셨습니다. 그 유산을 받아 수많이 들이 찬송을 작사 작곡하였고,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기까지 찬송을 부르다가 죽어서 천국에 가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찬송의 유산은 영원합니다. 찬송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 있습니다.
우리 찬송가 중에 가장 많은 곡은 쌘키가 작사한 곡입니다. 그는 찬송가 가사를 6천곡이나 지은 영감적인 사람입니다. 그가 여객선을 타고 여행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부탁하였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여 항상 인도하시고 푸른 풀밭 좋은 곳에서 우리 먹여 주소서.”
이 찬송가를 불러 달라고 하였습니다.
샌키는 이들의 부탁을 들어 주면서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혹시 남북전쟁에 참전한 적이 있으신가요?”
“‘네.”
“그 때 나는 적이었습니다. 달밤이었습니다. 내가 총을 겨누고 있는 앞에 선생님이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 찬송을 조용히 부르셨습니다. 나는 찬송하는 선생님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찬송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생명을 주는 노래입니다.
세례 예식을 만드셨습니다.
한국 대통령은 5년 동안 5천만명의 한국 사람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은 4년 동안만 미국 2억 3천명을 다스리며 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임기가 없으십니다. 세상 끝날 까지 세상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남기신 제도의 유산따라 수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섬길 것입니다.
4. 천국가는 길 유산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남기신 유산가운데 가장 중요한 유산은 천국가는 길을 닦아 놓으신 유산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도 빼앗았습니다. 아버지 축복기도도 빼앗았습니다. 형 에서가 죽이려고 하자 야곱은 정처없는 방랑의 길을 떠났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도중에 해가 졌습니다. 그는 돌을 베개하고 땅을 요삼아, 하늘을 이불삼아, 별을 초롱불삼아 누웠습니다. 배도 고팠을 것입니다. 가족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다가 늦게 잠이 들었습니다. 야곱은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자기가 바로 자기가 누운 땅으로부터 하나님까지 사닥다리가 놓여졌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다리 위에는 하나님께서 서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3-15)
이 사닥다리를 예수님은 이렇게 해석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
창세기는 사닥다리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였고 요한복음에서는 인자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였습니다. 사닥다리는 곧 예수입니다. 땅에서부터 하늘 나라로 올라가는 길이 사닥다리입니다. 예수님이 남기신 유산중에 가장 크고 중요한 유산은 천국가는 사닥다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 갈수록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잘 죽으려고 잘 살아야 합니다.
윤동주 시인 이야기를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죽을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 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시는 저항시인 윤 동주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일본에게 우리나라를 빼앗겼을 때 일본인들은 우리 민족을 북간도로 내쫓기 시작화였습니다. 그 때 고국을 등지고 수많은 우리 민족이 만주 북간도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 곳에서 나라를 생각하는 김 약연 선생님은 대성학교를 세웠습니다. 1921년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민족의 얼을 넣어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독립투사들을 길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그 곳에서 태어난 이가 윤 동주입니다. 윤 동주는 대성하교에 다니면서 민족의 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시를 써서 민족을 깨우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그 대표적인 시가 바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이 시입니다.
윤 동주는 일본에 저항한다는 명목으로 1943년 7월 14일 붙잡혀 일본 후꾸오까 감옥에 갇혔습니다. 1945년 2월 16일 감옥에서 주사 한 대를 맞더니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생체 실험을 당한 것입니다. 시체를 찾아 가라는 통보를 받고 가족이 달려가 시신을 가져다가 만주 용정에 묻었습니다. 지금도 용정에는 윤 동주 무덤이 있습니다. 당시 이 시는 온 민족의 가슴에 항일운동에 불을 질렀던 유명한 시입니다.
대성 중학교 교정 앞에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윤 동주가 2년 동안 일본 감옥에서 생활한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한국으로부터 성경을 달라고 요청하여 죽기까지 성경만 읽다가 하나님앞으로 갔습니다. 그의 핵심언어는 하나입니다.
죽을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한 마디로 묻습니다. ‘무엇을 남기시렵니까?’
사무엘하 18:9-18
찬송가 32장 ‘만유의 주재’ / 조광묵목사
오늘 본문에서는 압살롬이 전장에서 죽음을 맞으므로, 반역 사건의 종결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죄의 결과로 압살롬이 반역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의 부하들과 압살롬의 이스라엘 군대가 에브라임 수풀에서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전쟁은 동족이 서로를 죽이는 전쟁이었고,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적대시하는 전쟁입니다. 더군다나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나 적장은 죽이지 않고 너그럽게 대해야하는 애매한 전쟁입니다.
다윗의 죄와 압살롬의 죄가 엮여있고, 거기에 무고한 백성들의 생명이 동원되지만, 막상 이 전쟁의 원흉인 압살롬을 미워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의 현실은 나의 연약한 죄와 또 누군가의 연약함으로 엮여있고, 죄를 멀리하고 싸워 이겨야 하지만 / 상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 사랑해야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과 요압과 군사들은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9)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다윗의 부하들은 압살롬과 마주쳤습니다. 그때 압살롬의 머리가 상수리나무 가지에 걸리고, 노새는 압살롬을 매달아 둔 채 빠져 나갔습니다. 마침 압살롬이 무방비 상태로 그들 앞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압살롬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을 살려둔다면 되려 공격을 당할 수도 있고 전쟁도 끝나지 않을 것이지만, 다윗이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라고 한 말을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일은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압살롬이 평소에 자랑하던 머리와 그가 탓 던 노새는 이일이 우연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다윗의 부하들에게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차라리, 압살롬이 전장에서 누가 쏜 지 알 수 없는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면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고 전쟁도 끝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윗의 부하들에게 압살롬을 죽일 수도 없고, 살려줄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 연출됐습니다.
다윗의 명령을 따른다면 살려야 할 것이고, 나라를 생각한다면 동족상잔의 원흉인 역적 압살롬을 죽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곳에서 압살롬을 발견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동족상잔의 원흉인 반역자 압살롬을 그 자리에서 죽이거나, 아니면 그를 살리기 위해 땅에 내리고 요압이 아닌 다윗에게 알렸을 것입니다. 어떤 것이 현명한 선택이겠습니까.
우리도 이런 갈등을 늘 마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일들을 선악 간에 심판하여 바로 처리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그 안에서 갈등하고 분투하도록 마치 우리 인생을 연출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는 지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드러날 것인데, 그때 우리가 바른 선택을 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이을 우리 안에 머물러 있기를 소망합니다.
(10-13)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알려 이르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하니 요압이 그 알린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하는지라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의 생명을 해하였더라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하니
나무에 달린 압살롬을 발견한 한 사람은 그 갈등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요압에게 사실을 알렸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가 다윗이 한 말을 들었기 때문에, 압살롬을 해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압살롬을 해치지 않은 것은 다윗의 뜻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13절에서 말하듯이, 그가 압살롬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죽였더라면 요압이 자기편을 들어 주지 않고 책임을 자기에게 떠넘길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하기에도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대의보다 자신의 안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압살롬을 죽이지 않았지만,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을 나쁘다고 만은 할 수 없겠지만, 이 사람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압살롬을 죽이지 않았다고 다윗에게 보상을 받은 것도 아니며, 요압에게 정보를 주었다고 칭찬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부지했고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이름 없이 등장해서 이름 없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예고 없이 찾아온 선택의 순간에 믿음을 발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아무런 이름이 없던 여리고의 기생 라합은 부지중에 찾아온 정탐꾼들을 믿음으로 숨겨주어 그의 가족과 함께 구원받고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갔습니다. 이방 여인 룻은 집으로 돌아갈지 시어머니를 따라갈지 선택해야하는 순간에 시어머니를 붙좇아 예수님의 족보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사람처럼 아무런 책임도 맡지 않으려고 하고, 자기 안위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이름 없이 등장 했다가 이름 없이 사라질 뿐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선택의 때가 인생에 항상 놓여 지는데, 그때 믿음의 선택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4-16) 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그치게 하니 그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요압은 지체 없이 압살롬에게 달려가 직접 심장을 찔렀습니다. 요압은 부하들을 시켜 압살롬을 찌르게 하지 않고 직접 창으로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요압이 좀 더 비겁했다면 부하를 시켜 압살롬을 죽이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과단성 있게 행동했습니다. 만약 그가 먼저 압살롬을 찌르지 않았다면, 다윗의 말을 안 부하들은 아무도 나설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다윗이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라는 말을 분명히 들었고, 그 마음을 다른 누구보다 더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는 다윗이 승리 소식을 기뻐하지 않을 것을 알고,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아닌 구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승리 소식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압살롬을 서슴없이 죽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압은 탁월한 군사 전략가이자 용사이며, 다윗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일등공신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부터 그를 도왔으며, 다윗이 모반을 당한 이때도 앞장서서 다윗을 돕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다윗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밧세바 사건 때도 다윗의 요청대로 우리아를 전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요압은 이스라엘에 전쟁을 그치게 하고, 반역사건을 종결하여 다윗의 왕권 회복을 위해 압살롬을 죽여야 할 이유가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요압은 압살롬이 죽자마자 나팔을 불어서 전쟁을 그치게 했습니다. 압살롬이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전쟁을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요압이 다윗의 말을 무시하고 압살롬을 죽인 것은, 압살롬이 생존할 경우 앞으로 있을 문제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고, 모반을 일으킨 반역자에 대한 심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압살롬을 살려둔다면, 압살롬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다윗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갈등하고, 그 분열의 씨앗이 잔존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윗이 마음이 약해 아들에 대한 동정으로 마무리를 제대로 짓지 못하는 대신에, 요압이 그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과단성 있는 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현실적인 판단력과 과단성에는 믿음이 결여돼 있었습니다. 그는 현실을 보는 눈은 있었으나, 영적인 상황을 보는 믿음의 눈은 없었습니다.
그와 달리 다윗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의 영적인 전말과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 반역이 자신의 밧세바 사건의 죄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알기에, 사실은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이 전쟁의 의미를 알지 못했고, 다윗의 명령이 아버지의 동정심으로 분별력이 약해진 어리석은 판단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압살롬과의 전쟁은 자신의 죄로 인해서 내려진, 징계임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이 전쟁은 다윗의 입장에서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며, 죄를 직면하고 회개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하는 전쟁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해, 압살롬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차라리 자신이 죽었어야 함을 시인하기도 했습니다.
요압은 현실적인 판단력과 과단성이 있었지만, 믿음의 덕성이 없었기에 늘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충성했으며 제일의 공신이었지만, 말년에는 아도니야와 모의하여 다윗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믿음 없이 현실적인 판단력을 쫓는 사람의 한계입니다.
우리에게 현실을 보는 눈과 더불어 믿음의 눈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현실이 아닌 믿음을 따라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따라 살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셔서 믿음을 쫓아 살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5:4은 우리를 가리켜 이렇게 증거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17-18) 그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그를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요압은 압살롬을 묻고 돌무더기를 매우 크게 쌓았습니다. 압살롬의 시체를 다윗에게 보여주지 않고 자신이 마무리 지으려고 한 것입니다. 압살롬은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한 것이 아니라 어처구니없게 나무에 매달려서 죽었습니다.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머리털은 그가 허무한 죽음을 맞는 매개체가 됐고, 그가 탐한 왕의 신분을 나타내던 노새는 그를 지켜주지 못하고 홀로 빠져나갔습니다. 그가 살았을 때 스스로 자기의 명예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는데,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그의 죽음에서 드러났습니다. 14장 27절에서 압살롬에게 아들이 셋 있었다고 진술하고 있으나, 어떤 사연이었는지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남길 아들을 대신해 기념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가 세운 기념비는 오히려 그의 생전의 탐욕이 얼마나 헛된지 기념하는 비가 됐습니다.
다윗의 바램과 다르게 압살롬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해 아들 압살롬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음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그 말씀 앞에 다시 자신을 굽혀 엎드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압살롬을 죽이지 않기를 바랐지만, 요압과 부하들은 다윗의 깊은 마음까지 헤아리지는 못했습니다. 다윗을 지지하고 충성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는 외로웠을 것입니다. 이처럼 요압과 그 부하는 현실과 자신의 안위를 따라갔지만, 다윗은 믿음의 눈으로 이 상황을 보며 하나님 앞에 죄인인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도 선과 악이 뒤섞인 애매한 현실 속에서, 믿음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 믿음은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이거나 현실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윗에게 믿음은 압살롬의 죽음 앞에 자신의 죄인 됨을 직면하는 것이듯이, 우리에게 믿음은 애매한 현실 속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 현실의 수풀 속에서 믿음을 따라 사는 하루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뿌려놓은 죄의 결과와 또 누군가의 죄의 결과로 인한 현실 속에서 분투하며, 무엇을 따라 살아야 할지 캄캄해서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나의 안위만을 따라 살 수도 있고, 현실적인 판단을 따라 살 수도 있지만, 믿음을 따라 살기를 말씀을 통해 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따라 믿음으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묵상을 돕는 질문>
1. 다윗의 부하들과 압살롬의 이스라엘 군대가 벌이는 전쟁은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묵상해 보고, 다윗에게 이 전쟁은 어떤 의미의 전쟁이었는지 묵상해봅시다.
2. 압살롬의 부하 한 사람은 왜 압살롬을 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요압에게 그 사실을 알렸는지 생각해보고, 나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3. 압살롬은 다윗의 말을 무시하고 압살롬을 죽였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보고 나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는지 묵상해봅시다.
4. 본문의 상황 속에서 현실적 판단과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믿음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것일지 생각해보고 자기에게 적용한다면 어떻게 할지 묵상해봅시다.
명령과 불순종 사이에서
삼하 18:9-18 / Samanju
1. 순종, 하나님 나라의 제1원리
2. 교만의 최후 – 자신의 영광에 목매달린 압살롬
3. 순종의 갈림길 – 이름 없는 병사 vs 총사령관 요압
4. 나의 기념비인가, 하나님의 기념책인가
Q1. 요압처럼, 제 상식과 경험으로 볼 때 리더(목사님, 구역장 등)의 결정이 비합리적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때 ‘순종’과 ‘건강한 의견 제시’의 경계는 어디일까요?
Q2. 압살롬처럼 저도 세상에서 제 이름을 남기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합니다. 이 욕구를 어떻게 거룩하게 다스릴 수 있을까요?
Q3. 이름 없는 병사는 직속 상관(요압)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이것이 정당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기도
사무엘하 18장 9-18절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 나무에 걸림에 그가 공중의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밑으로 빠져나간지라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알려 이르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하니
요압이 그 알린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그리하였더면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하는지라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의 생명을 해하였더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에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그치게 하니 그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그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그를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1. 순종, 하나님 나라의 제1원리
설교는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의 비유로 시작합니다. 군대에서는 때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그러나 그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군대의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개별 병사는 볼 수 없는 전쟁 전체의 그림을 지휘관은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임‘인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며 최고 통수권자이십니다. 때로 그분의 명령이 우리의 이성과 경험, 효율성의 기준에서 볼 때 비상식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상치될 때… 나의 뜻을 꺾고 내 위의 권위에, 내 하나님의 뜻에 내 주인의 뜻에 순종하라’는 것이 성경의 대원칙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순종의 원리가 무너졌을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를, 총사령관 요압의 선택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2. 교만의 최후 – 자신의 영광에 목매달린 압살롬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은 것은 한 아이러니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미남이자, 자신의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힘과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여겼던 압살롬이, 바로 그 교만의 상징 때문에 패망합니다. 그는 상수리나무 가지에 머리카락이 걸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우스꽝스럽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위기에 처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이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거부한 사람의 끝은… 허무하기 그지없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합니다. 세상의 권력, 힘, 아름다움, 명성은 영원할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으며, 오히려 ‘그의 자랑거리가 그를 죽이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성경은 경고합니다.
더 나아가, 압살롬은 살았을 때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스스로 ‘압살롬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교만의 극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그에게 남은 것은, 시신조차 제대로 장례 치르지 못한 채 돌무더기에 던져지는 수치와, 후세에 ‘배반자의 기념비’로 불리는 오명이었습니다.
Between command and disobedience 명령과 불순종 사이에서 An epic, tragic painting of Absalom, a handsome prince with long, flowing hair, helplessly entangled by his hair in the branches of a large oak tree. He is suspended in the air as his mule runs off without him. His greatest source of pride has become the instrument of his downfall. The background is a chaotic forest battlefield. The mood is ironic and somber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미남 왕자 압살롬이 커다란 떡갈나무 가지에 힘없이 머리카락이 엉켜 있는 서사적이고 비극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는 노새가 그를 두고 달아나면서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 몰락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배경은 혼란스러운 숲 속 전장입니다. 분위기는 아이러니하고 침울합니다.
3. 순종의 갈림길 – 이름 없는 병사 vs 총사령관 요압
공중에 매달린 압살롬을 발견한 한 병사는 즉시 총사령관 요압에게 보고합니다. 이 보고는 전쟁을 단숨에 끝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여기서 다윗 왕의 명령,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는 말씀 앞에서 두 인물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립니다.
이름 없는 병사의 순종: 요압은 왜 당장 압살롬을 죽이지 않았냐며 한 달치 월급과 훈장에 해당하는 포상을 약속하며 그를 책망하고 회유합니다. 그러나 이 이름 없는 병사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권위에 대한 순종: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는 직속 상관(요압)의 명령보다 최고 통수권자(다윗)의 명령이 더 위에 있음을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정확한 상황 인식: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그는 명령의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지혜와 통찰력: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그는 만약 자신이 압살롬을 죽였다면, 요압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떠넘길 것이라는 사실까지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총사령관 요압의 불순종: 반면, 요압은 왕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무시합니다. 그에게는 그럴듯한 자신만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군사적 효율성: 반역의 수괴를 제거하면 더 이상의 희생 없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합리적 판단.
정치적 계산: 아들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진 다윗 왕의 ‘비합리적인’ 명령이 나라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정치적 우려.
개인적 성향: 과거에도 아브넬과 아마사를 자기 판단에 따라 죽였듯, 왕의 뜻보다 자신의 결정을 앞세우는 자의적인 성향.
요압은 자신의 경험과 이성, 합리적 판단을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의 명령보다 위에 두었습니다. 그는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고 말하며 직접 압살롬을 처단함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합니다.
4. 나의 기념비인가, 하나님의 기념책인가
요압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효율적이었습니다. 압살롬이 죽자 전쟁은 즉시 끝났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하늘나라는 결과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동기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느냐… 그 과정이 더 중요한 것이 천국의 질서입니다.’ 요압의 이 불순종은 씨앗이 되어, 훗날 그가 다윗과 삐그덕거리다 결국 반역에 가담하여 처형당하는 비극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요압과 같은 갈림길에 섭니다. 내 경험, 내 이성, 내 합리적인 판단이 하나님의 말씀과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이때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나의 감각이 아닌 ‘계기판’,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비유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압살롬은 이 땅에 자신의 ‘기념비’를 남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것은 수치뿐이었습니다. 반면, 이름도 빛도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간 사람들의 이름은, 하나님 나라의 ‘기념책’에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남기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경험과 효율성을 앞세워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요압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아니면 보상과 위협 앞에서도 묵묵히 최고 사령관의 명령을 따르는 ‘이름 없는 병사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던 예수님처럼, 오늘도 나의 합리성을 꺾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참된 제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etween command and disobedience 명령과 불순종 사이에서 A highly symbolic and moody close-up shot. An ornate, golden crown, representing Absalom's ambition, is hopelessly entangled in the sharp, thorny branches of a dark oak tree. The crown is scratched and losing its luster. The focus is entirely on the trapped crown, a visual metaphor for how pride and worldly ambition lead to ruin. The background is a dark, misty forest. 매우 상징적이고 분위기 있는 클로즈업 샷입니다. 압살롬의 야망을 상징하는 화려한 황금 왕관이 어두운 참나무의 날카롭고 가시가 많은 가지에 절망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왕관은 긁혀서 광택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교만과 세속적 야망이 어떻게 파멸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시각적 은유로 갇힌 왕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배경은 어둡고 안개가 자욱한 숲입니다.
Q1. 요압처럼, 제 상식과 경험으로 볼 때 리더(목사님, 구역장 등)의 결정이 비합리적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때 ‘순종’과 ‘건강한 의견 제시’의 경계는 어디일까요?
A1.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맹목적인 복종이 아닙니다. 핵심 기준은 그 명령이 ‘하나님의 명백한 뜻(성경)을 거스르는가’입니다. 만약 리더의 결정이 비성경적이거나 죄를 짓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정중하고 지혜롭게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명령처럼 죄가 아니고 단지 ‘나의 판단에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문제일 경우, 먼저는 그 권위를 존중하고 순종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의견을 제시하더라도,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로,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해야 합니다. 요압의 문제는 다윗의 명령이 죄가 아님에도, 자신의 판단을 왕의 권위 위에 둔 교만에 있었습니다.
Q2. 압살롬처럼 저도 세상에서 제 이름을 남기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합니다. 이 욕구를 어떻게 거룩하게 다스릴 수 있을까요?
A2. 인정받고 싶은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누구에게’ 인정받고 ‘무엇으로’ 인정받으려 하느냐에 있습니다. 이 욕구를 거룩하게 다스리는 길은 그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과 기념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념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이 모든 일이 사람들의 눈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있는가?’, ‘나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땅의 기념비에서 하늘의 기념책으로 옮겨갈 때, 우리의 욕구는 세상의 명예가 아닌 거룩한 사명을 향한 열정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Q3. 이름 없는 병사는 직속 상관(요압)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이것이 정당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A3. 그의 불복종이 정당화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그가 더 높은 권위, 즉 최고 통수권자인 ‘왕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권위의 질서’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삶에는 가정, 직장, 교회, 국가 등 다양한 권위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그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인간적인 권위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권위 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인간적인 권위가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과 충돌한다면, 우리는 이름 없는 병사처럼 더 높은 권위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의 행동은 불순종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순종이었습니다.
오늘의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의 왕이시며 최고 사령관이신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저희 안에 숨어있는 요압의 교만함과 압살롬의 허영심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는 너무나 자주 저희의 짧은 경험과 합리적인 판단을 주님의 말씀보다 앞세웠고, 썩어 없어질 세상의 기념비에 저희의 이름을 새기려 애썼던 어리석은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이름 없는 병사와 같은 순종의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달콤한 보상이나 사람들의 위협 앞에서도, 오직 주님의 명령만을 붙드는 견고한 믿음을 주옵소서. 저희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길로 인도하실 때, 조종사가 계기판을 신뢰하듯 주님의 신실하심을 온전히 신뢰하며 따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삶의 목적이 저희 자신의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경외하고 존중히 여김으로 하늘의 기념책에 저희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오늘도 내 뜻을 꺾고 주님의 뜻을 따름으로, 하나님 나라의 질서 안에서 참된 승리를 경험하는 주님의 신실한 군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압살롬의 최후
삼하 18:9-18 / agaape
묵상하기
1, 압살롬의 군대는 어떻게 되었으며, 요압은 압살롬을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2,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왜 한 비석을 마련하였습니까?
1, 압살롬의 최후(9-15)
노새를 타고 가던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쳤습니다. 그가 다급히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때에 그의 머리가 상수리 나무에 걸렸습니다. 그가 공중에 달리고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 나갔습니다. 이를 목격한 군사는 다윗의 말을 기억하고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요압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요합은 지체하지 않고 창 셋을 가지고 달려가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그러자 요압의 군사가 압살롬을 쳐 죽였습니다.
2. 압살롬의 기념비(16-18)
백성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큰 구멍에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온 이스라엘 무리는 각기 장막으로 도망갔습니다.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왜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습니까? 18b절에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컬었습니다.
적용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운 종을 배반한자의 최후가 어떠하며, 하나님 없이 스스로 자기 이름을 남기고자 한 자의 말로가 어떠합니까?
먼저, 하늘 위와 자기 아래를 바라보지 못한 교만한 자의 초라한 말로는 비참한 죽음입니다.
9절에 압살롬은 우연히 마주친 다윗의 부하들을 피해 도주하다가 나무에 머리가 걸리고 맙니다. 삼하 14:26절에 선망의 대상이던 그의 머리가 신21:23절에 수치와 저주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시32:9절에 미련한 노새도 지나간 죽음의 그늘을 피하지 못합니다. 우연으로 보이는 일로 인해 무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고, 왕위에 오르려던 4년간의 치밀한 계획도 한 순간에 무산됩니다. 이것이 하늘 위와 자기 아래를 바라보지 못한 교만한 인생의 초라한 말로입니다. 10-14a 절에 요압은 상수리 나무에 걸린 압살롬을 ‘당장’에 죽이지 않은 병사를 책망합니다. 하지만 머뭇거리고 지체한 것이 왕의 아들을 살렸습니다. 그는 다윗왕의 명령을 기억했고, 만약 압살롬을 해친다면 요압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주의 명령을 생각하는 그 ‘순간’이 우리를 살립니다. 흘려 듣지 않은 말씀이 나를 구원합니다. 성과만을 지향하는 우리 사회에서 ‘멈춤’과 ‘경청’의 가치를 어떻게 실천하고 있습니까? 14b,15절에 요압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는 다윗의 부탁을 의도적으로 무시합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을 짓밟습니다. 요압에게 압살롬은 왕의 아들이기 보다 원수에 불과합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세상에서 은혜가 설 자리는 없어 보입니다. 압살롬을 찌르고 예수님을 찌른 창이 오늘도 누군가를 찌릅니다. 요압의 세상에서 다윗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한 아픔보다 받은 사랑을 더 기억하십시오.
다음,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자기 이름이 아니고 유일한 이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던 압살롬이 땅으로 내려옵니다. 그의 시신이 큰 구덩이 속에 던져지고 그 위에 돌무더기가 쏟아집니다. 그의 기념비를 무색하게 하는 비참한 죽음입니다. 기념비 없이도 기억되는 이름이 있고, 기념비는 남아도 잊혀지는 이름이 있습니다. 잠언 10:7절에 “의인을 기념할 때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되느니라” 나를 몰라준다고 서운한 감정이 드십니까? 우리에게 전해야 할 유일한 이름은 누구일까요? 전해야 할 것은 자기 이름이 아니고 남겨야 할 것도 기념비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전해야 할 유일한 이름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이름입니다.
기도: 주님! 제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자가 되지 않게 도우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만 온 세상에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압살롬의 죽음
삼하 18:9-18 / 은바리라이프
압살롬은 전쟁에서 패하고 도망치다가 상수리나무에 머리채가 걸려 요압과 그 부하들에 의해 비참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압살롬의 운명(9-10) 압살롬의 정권찬탈의 꿈은 올바르지 못한 행동과 환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비참한 죽음입니다. 압살롬은 큰 상수리나무 가지에 자신이 자랑스럽게 아끼던 머리털이(14:26) 걸려 죽을 신세가 된 것이며 왕이나 귀족을 상징하던 노새도 도망갔습니다. 성경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죄를 범하여 나무에 매달아 죽였을 때에는 해가 지기 전에 그 시체를 장사하여 복 주신 땅을 더럽히지 못하게 했습니다(신 21:23). 압살롬의 죽음과는 다른 위대한 죽음을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값으로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셔서 우리를 속량하신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갈 3:13).
잔인한 요압(11-15) 요압은 다윗이 어려울 때 함께 했던 충성스러운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때로 왕의 생각과 다르게 자기 판단에 따라 행동하여 다윗의 마음을 힘들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압살롬의 사건에도 다윗이 “나를 위하여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5)는 부탁을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처음 압살롬을 발견한 신하를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창으로 압살롬을 찔러 죽이고 자신을 호위하던 부하들로 하여금 압살롬을 쳐 죽이게 묵인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고(롬 6:23),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것입니다(갈 6:7). 어떤 경우일지라도 하나님의 참 뜻을 어기거나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그 정당성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압살롬의 기념비(16-18) 압살롬에게는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14:27). 그러나 아들들의 죽음으로 인해 대를 이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비석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 악함이 기념비를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묵상도우미
노새(9) 왕족이나 귀족들이 이용하던 운송 수단이었음.
띠(11) 허리에 두르는 군장으로서, 화려한 수가 놓인 일종의 장식품.
큰 구멍(17) 자연적으로 형성된 구렁이나 현재는 폐쇄된 과거의 우물.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혹시 자신의 고집이나 혈기대로 일하면서 그 정당성을 의롭게 취급하지는 않습니까?
감사로 받은 선물
쌍둥이 형제가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감사를 즐겼고 다른 아이는 불평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부모는 시험 삼아 아이들에게 선물을 했습니다. 불평하는 아이에게는 게임기를 선물했고, 감사하는 아이에게는 토끼똥을 상자에 담아 선물했습니다. 먼저 불평을 잘 하는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게임기는 벌써 한물 간거라구, 엄마 아빠는 옛날 분이야.” 그런데 감사하는 아이는 토끼똥을 보며 즐거운 듯 중얼거렸습니다. “엄마 아빠가 날 놀리시는구나. 이 토끼똥을 어디서 났겠어? 토끼를 어디에 숨겨놓으셨겠지. 엄마 아빠 감사합니다.” 다음 날 토끼 한 쌍이 그 아이에게 주어졌습니다.
압살롬의 최후
삼하18:9-18 / 종소리
1. 인간의 자랑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합시다(9)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카락으로 인하여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려 공중에 달리고 노새는 빠져나갑니다. 결국 압살롬은 자기의 자랑인 머리카락으로 인하여 죽습니다. 히브리 관습에서 남자들의 긴 머릿결은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특히 압살롬의 머리카락은 매년 자르는 것만 해도 이백 세겔 약 2.3kg나 될 만큼 풍성하였고 매우 아름다웠습니다(삼하14:26). 압살롬은 그 머릿결 때문에 사람들의 칭찬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자랑이요 영광이던 머릿결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자랑거리는 무엇이든지 그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신앙인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교만입니다. 교만이야말로 믿음이 자라지 못하게 하고, 믿음을 병들게 만드는 무서운 독소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자랑거리는 인간을 교만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자랑거리를 자랑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 한 예가 인간이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한 것은 선물이지 행위가 아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인간이 자랑거리로 교만한 것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어 가실 때, 한계를 통하여 만들어 가십니다. 인간의 생명 앞에서는 과학이나 의학, 학위, 명성, 재물 등 어떤 것도 생명에 관여할 수 없도록 하시면서, 절망을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이 소유하지 못한 자랑거리나 은사가 있다면,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주신 자랑거리를 우리의 자랑거리로 만들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하고, 본분을 다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2. 불의한 일에 가담하지 맙시다(10-13)
압살롬이 머리카락으로 인하여 상수리나무에 걸려 몸이 나무에 매달릴 때, 이를 목격한 사람이 요압에게 보고를 하자, 압살롬을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하여 추궁을 합니다. 이때 보고자는 임금님이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고 부탁하셨는데 어찌 죽이겠냐고 반문하면서, 만일 내가 죽였다면 당신은 나를 걸고 넘어져 나를 죽였을 것이다 하면서 요압의 기회주의적인 교활함을 비꼬고 있습니다. 결국 요압은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아직도 상수리나무에 달려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찔러 죽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불의한 일에(임금의 명령에 순종하는 일이 백성의 마땅한 도리이기에) 가담치 않은 보고자와 여론에 편승한 영웅 의식과 기회주의적인 교활함으로 인하여 불순종하여 불의한 일에 감당하는 요압을 발견합니다. 아무리 시류에 편승하여 명예를 얻고 세상의 모든 권세를 다 얻는다 할지라도 세상의 임금의 명령을 불순종한다면 어찌 하나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육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불의한 일에 가담하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3. 심판하시는 하나님(14-15)
요압과 그의 신복들에 의하여 압살롬은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압살롬의 시체는 수풀 속의 구덩이에 던져지고, 그 위에 거대한 돌무더기를 쌓습니다. 죽은 사람의 시체는 정결하게 하여 가족들의 공동묘지에 안치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관습인데, 돌무더기 무덤에 매장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전 역사를 주장하시어, 공의의 법대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율법의 파괴자요 인격의 파탄자인 압살롬을 요압의 손을 빌어서 공의의 심판에 처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믿지 아니하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언제나 존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시련과 핍박과 환난이 와도 의의 길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잠시 동안의 핍박과 고난을 견디고 인내로 승리할 때에 영광과 소망이 있음을 기억하고, 악인의 핍박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항상 존전의식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한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4. 교만하지 맙시다(16-18)
압살롬이 죽자 요압은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전쟁을 그치게 합니다. 그리고 압살롬을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여 세운 비석이 있었는데, 이를 가져다 세웁니다. 자기의 이름을 이을 소망이 없게 되자, 변칙적인 방법으로 비석을 세워 자기의 명예를 후대에 전하려 했던 압살롬은, 결국 자기의 수치를 드러내는 비석이 되고 말았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인양 하나님도 사람도 무시한 교만한 자의 최후의 모습입니다.
교만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보다 형통한 자에게 오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압살롬이 왕자만 아니었다면 이런 교만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이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하는 데서 옵니다. 압살롬이 인간의 본질을 알았다면 이런 범죄를 저지르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을 바로 압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월하다고 생각할 때 교만이 오는 징조이기에, 언제나 자신을 죽이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서, 하나님의 도구로서 귀하게 쓰임 받는 자가 되도록 합시다.
반역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삼하 18:9~15, 삼하 18:24~33 / 산호석목사
다윗 왕, 목숨을 버리는 사랑, 부모의 사랑, 사무엘하, 압살롬, 용서하는 사랑, 찾으시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 회개
가정은 세상에서도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 중요시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공동체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된 것으로서, 하늘 나라의 모형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부모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비슷해서 그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다윗 왕이 그 아들 압살롬을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은 가장 사랑하고 잘 생긴 아들 압살롬의 쿠데타로 궁궐에서 쫓겨나 허둥지둥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밤새도록 피난을 해서 요단을 건너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 압살롬은 많은 군대를 이끌고 자기 부친 다윗 왕과 그 부하들을 진멸하려고 쳐들어 왔습니다. 이 때에 다윗 왕의 부하 요압 장군과 아비새 장군과 잇대 장군 등 몇몇 장수들이 적은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러 나갔습니다.
그때에 다윗 왕은 부하 장군들에게 '꼭 승전하고 돌아오라'는 당부는 하지 않고, 자신을 죽이려 하는 그 아들 압살롬을 위해서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고 신신 부탁을 했습니다. 패역무도한 자식이건만, 그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부디 죽이지 말고 너그럽게 대접하라'고 한 것입니다.
마침내 에브라임 수풀에서 접전이 벌어져 싸우던 중 압살롬이 노새를 타고 숲 속을 달리다가 큰 상수리 나무 가지에 그의 머리털이 걸려서 대롱대롱 매달리고 노새는 빠져나갔습니다. 이때, 한 군사가 요압 장군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더니 '네가 그걸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했었다면 은 열 개와 띠 한 개를 주었으리라' 했더니, 그 군사가 하는 말이 '은 천 개를 준다해도 왕의 아들을 죽일 수 없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요압 장군이 군사를 데리고 가서 작은 창 세 개를 압살롬의 가슴에 꽂고 부하 열명이 달려들어 쳐 죽였습니다.
이때 다윗 왕은 두 문 사이에 앉아서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승전의 소식보다도 그 아들 압살롬의 생사 여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올 때마다 '압살롬이 어찌 되었느냐?'고 물으면서 혹시 그 아들이 죽었을까봐 걱정했습니다.
마침 아히마하스란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을 보고 '내 아들 압살롬이 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왕의 그러한 심중을 헤아린 아히마하스가 엎드려 절하면서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붙여 주셨나이다',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라고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 구스 사람이 달려왔을 때도 '내 아들 압살롬이 잘 있느냐?'고 물었는데, 이에 대해 구스 사람이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보고했더니, 다윗은 그 소식을 듣고 너무 너무 마음이 아파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 내 아들아' 라고 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얼마나 그칠줄 모르고 슬피 울었던지 요압 장군이 들어가서 '왕과 왕의 자녀와 왕의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한 신복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십니까?... 이제 봤더니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 하였나이다. 빨리 일어나서 왕의 신복들을 위로하시지 않으면 왕의 평생에 없었던 큰 화를 당하실 것입니다'라고 위협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제서야 다윗 왕은 성문에 올라 앉아 백성을 위로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부모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과 흡사한 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자신을 반역한 아들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사랑을 통하여 반역하고 대적하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목숨을 버리시키까지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역하는 자들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입니까?
1. 찾으시는 사랑
다윗은 그 불효막심하고 못된 자식이지만, 제발 죽지 않고 돌아오기만 간절히 소원하여 싸움터에 나가는 장군들에게 신신 당부하기를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고 간곡히 말하고, 문에 앉아서 그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자신의 왕위를 빼앗고 자기를 죽이기까지 하려는 그 패역무도한 자식이건만 죽지 않고 살아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찾고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잃은 자,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난 죄인들을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찾고 계시는 모습을 세가지 비유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세상에 찾아오시는 것을 의미하며, 그 다음은, 여인이 잃은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등불을 켜 들고 온 방안을 쓸며 찾는 비유인데 이는 성령께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는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며, 마지막, 탕자의 비유는 성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놀라운 사랑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패역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멀리 떠났으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찾고 계십니다.
2. 용서하는 사랑
다윗은 자기(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으려는 그 패역무도한 아들이지만, 용서하는 사랑으로 그 아들이 죽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두 문 사이에서 안절부절하며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어떤 부잣집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가 얼마 안가서 다 탕진해 버렸습니다. 이제는 더 살 수가 없어서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도무지 아버지가 자기 같은 못된 자식을 용서하고 받아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눈물의 편지를 써서 보내기를 '만일 이 못된 자식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면 아무날 아무시에 기차를 타고 우리 동네 앞을 지날 터인데, 내가 지나면서 볼 수 있도록 마당에 있는 대추나무에 흰 손수건 하나를 걸어 주십시오. 그러면 다음 정거장에 내려서 들어 가겠습니다.' 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마침내 그 날이 돌아와서 기차에 몸을 싣고 무거운 마음으로 고향을 향해갑니다. 점점 자기 집 동네가 가까울수록 이 아들은 초조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목을 길게 내밀고 자기 동네를 바라 보니, 대추나무 뿐만 아니라 앵두나무 할 것 없이 나무마다 가지마다 흰 손수건, 흰 보자기, 흰 홑이불, 이불 호청까지 전부 하얗게 눈과 같이 덮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부모는 혹시나 아들이 잘못 보고 지나칠까봐, 흰것이란 흰 것은 있는 대로 다 내다가 나무에다 걸어 놓았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와 같이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지금도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와 구원받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찬송가 317장의 가사를 되새겨 보십시오.
'어서 돌아 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감당하고 못 받으시리오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또한 사 1:18절에서는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고, 한 강도는 죽는 순간에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께서는 그를 용서하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3. 목숨을 버리는 사랑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고 슬피 울었습니다. 그 패역무도한 아들이건만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좋을 뻔 했다'고 자기 목숨까지 주고라도 아들의 생명을 살리기 원하는 부모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식들이 홍역을 하거나, 몹시 아파서 괴로워할 때는 대신 아파주고 싶은 마음, 생명을 대신해서라도 살리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나의 죄를 위해서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주시고 죽어 주신 것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한 것입니다. 이제는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님만 믿으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인해 다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고 말씀했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님만 믿으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그 죄를 대신 갚아주사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영접하는 자, 곧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약속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기로 결심하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다시금 한없는 부모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동시에 더 크고 넓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 아 멘 -
성령께서 세우신, 가라지와 곡식이 함께 있는 공동체
삼하 18:9-15; 엡 3:14-21; 마 13:24-30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1.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살다 보면, 가족 간에도 원수가 있고, 또 전혀 생면부지지만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이웃도 있습니다. 지난주 말씀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마 12:50), 곧 가족이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혈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공동체가 예수님의 가족이며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러나 비록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사탄의 꾀임에 빼져 교회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리고, 무너뜨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의 위기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옵니다.
지난 3여 년 간의 코로나 위기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이 위기의 시작은 바이러스라는 외부적인 요인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내부적인 위기입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내적 위기입니다. 그 결과 예배를 사모하는 열정이 사라지고, 말씀을 갈구하는 심령이 세상의 욕망과 가치로 무뎌지고, 더불어 사는 삶이 아니라, 각자도생의 삶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위기가 더욱 깊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에는 곡식과 함께 자라는 가라지가 있습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렇게 가라지를 통한 위기를 보여줍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을 통해서 교회공동체 안에는 가라지와 곡식이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위기의 시작입니다. 구약 말씀은 다윗 왕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과 다윗의 군대 총사령관이었던 요압의 교만을 보여줍니다. 이들이 다윗왕에게는 가라지입니다. 위기의 전개입니다. 참 서글픕니다. 아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또 가장 믿었던 신하가 다윗의 뜻을 거스릅니다.
따라서 서신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있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충만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여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위기의 극복입니다. 따라서 비록 가라지와 곡식이 함께 있는 공동체지만, 끝까지 참고 견디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마 13:24-27)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비유입니다. 좋은 씨를 밭에 뿌렸으나 원수가 와서 가라지도 덧뿌렸습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 가라지도 보입니다. 가라지는 볏과에 속한 한해살이풀입니다. 밭에서 자라며 강아지풀과 외형이 비슷합니다. 물론 밀과 비슷해서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는지 묻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가라지, 보리, 밀
가라지, 보리, 밀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8-30)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합니다. 따라서 추수 때까지 함께 두라고 합니다. 그리고 추수 때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묶어 불사르고, 곡식은 모아 곳간에 넣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천국 비유입니다. 천국은 곡식에는 곳간과 같은 안전하고 좋은 곳이지만, 가라지에게는 불지옥과 심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말씀이죠? 마지막 날에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저 사람은 가라지인데, 우리 공동체를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사람이라 뽑아 없애버리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하심입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무너지는데, 공동체가 파괴될 텐데! 그런데도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은 가라지고, 나는 알곡이라고 판단하는 그 사람이 바로 가라지라는 사실입니다. 교만하고, 오만한 자리에 앉는 순간 가라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 말씀에 압살롬이 그랬고, 또한 압살롬을 죽인 요압 장군이 그렇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2. 오만한 다윗의 아들 압살롬과 교만한 요압 장군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알려 이르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하니, 요압이 그 알린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하는지라.”(삼하 18:9-11)
다윗의 자녀
다윗의 자녀
압살롬은 다윗의 셋째아들입니다. 다윗 왕은 여러 아내를 두었고 아들도 많았습니다. 그 아들들 가운데 압살롬은 누구보다 영리했고 잘생긴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고 했습니다. 반역, 곧 쿠데타를 일으킨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으로 왕궁을 떠나 도망가야 했습니다. 압살롬과 그의 군사들이 다윗의 왕궁으로 들어와 궁을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밧세바의 조부인 아히도벨에게 물어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악을 자행했습니다(삼하 16:20-22). 손녀사위인 우리야 장군의 복수를 꿈꾸었던 아히도벨의 계략과 압살롬의 오만이 결합한 아주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다윗 왕은 요압, 아비새, 잇대 장군, 세 사람을 중심으로 군사들을 모아 압살롬의 군대와 싸울 준비를 했습니다. 다윗의 수하에 있던 장수들 대부분이 압살롬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윗 왕의 군사보다 압살롬의 군사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과 세 장군은 두려워하지 않고 압살롬과 맞설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물론 이 전쟁에서 다윗의 세 장군이 압살롬의 군대와 싸워 승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승리한 이후의 일입니다. 전쟁에서 패한 압살롬이 도망가다가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렸습니다. 오만하게 머리를 든 자는 그 오만한 머리 때문에 반드시 죽게 됩니다. 아무튼 그 모습을 보고 다윗의 부하 한 사람이 요압에게 보고를 합니다. 요압은 왜 압살롬을 죽이지 않았느냐고 부하를 닦달합니다. 그러자 그 부하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의 생명을 해하였더라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하니”(삼하 18:12-13)
요압의 형제들
요압의 형제들
그런데 요압이 어떻게 하죠? “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 죽이느라(삼하 18:14-15).” 압살롬을 죽여버립니다. 삼무엘하 18장에 보면,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다윗은 요압 등 부하들에게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삼하 18:5)”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다윗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압살롬을 죽여 버립니다. 오만한 압살롬의 최후입니다만, 동시에 요압의 교만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압살롬의 최후
압살롬의 최후
잘 아시다시피, 요압은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로, 다윗의 조카입니다. 요압은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된 후, 사울의 집안과 다윗의 집안이 싸울 때, 처음 등장합니다(삼하 2:13). 다윗이 사울을 피해 가드를 떠나, 아둘람 동굴로 피신했을 때, 다윗의 형제들과 집안사람들이 다윗을 만나러 갔습니다. 이때 환난 겪고 빚진 자, 원통한 자가 다 모였는데, 400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삼하 22:1-2). 아마도 이때부터 요압은 다윗과 함께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요압과 그의 형제 아사헬과 아비새는 싸움에 능한 용감한 군사들이었습니다. 수많은 전쟁에서 다윗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습니다. 특히 요압은 다윗의 군사령관으로 오랫동안 함께 했으며 가장 측근에서 다윗을 보필하고 다윗이 왕이 되는 데 큰 공을 세운 장군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삼무엘하 23장 8절부터 소개되는 다윗의 용사 37명에 들지 못합니다. 그의 동생인 아비새와 아사헬, 심지어 그의 무기를 들고 다녔던 브에롯 사람 나하래까지 이름이 있는데(삼하 23:37), 정작 요압의 이름은 없습니다. 다윗의 최측근이었지만, 교만한 요압은 결국 다윗을 배반하는 길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늙어 몸이 쇠약해지자,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고, 사람들을 모았을 때, 요압은 아도니야를 도와 ‘반 다윗/솔로몬’ 전선에 서게 됩니다. 요압이 아도니야를 좇은 것은 이해가 됩니다. 요압 입장에서는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아이가 죽고 솔로몬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은 솔로몬을 사랑하셨다고 합니다만(삼하 12:24), 그 자초지종을 알고 있는 요압 입장에서는 솔로몬이 왕이 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다윗은 이런 요압이 버거웠을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과 함께하여,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다윗의 왕국을 강성하게 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왕임에도 불구하고 요압을 함부로 할 수도, 또한 통제할 수도 없었습니다. 칼에 의지하고, 권력을 탐했던 교만한 요압의 힘이 다윗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요압의 백발이 평안히 무덤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합니다(왕상 2:6).
따라서 솔로몬은 왕이 된 후, 요압을 제거합니다. 먼저 아도니야와 함께 반역에 가담했던 제사장 아비아달의 지위를 박탈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며, 이후 제단 뿔을 잡고 버티던 요압을 처단하여 질기고 긴 악연을 끝냅니다(왕상 2:23-34). 그러나 다윗과 솔로몬이 요압을 제거한 것은 단지 그가 아도니야를 좇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모든 행동과 삶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아마사를 죽이는 요압
아마사를 죽이는 요압
조금 더 살펴볼까요? 압살롬의 반란이 제압된 후, 베냐민 지파 출신인 세바가 이스라엘 백성을 충동질하여 또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때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에 동참했으나, 이제 다윗 편에 서게 된 아마사를 군사령관으로 세웁니다. 그러나 요압은 아마사를 죽여버립니다(삼하 20:4, 9-10). 한 번 배신하면 두 번째는 쉽죠? 물론 요압은 반역을 진압했던 자신 대신, 오히려 반역에 동참했던 아마사를 군사령관으로 세우는 다윗을 못마땅해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통합 정치를 요압이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정치도 마찬가지죠?
이것이 바로 교만한 자의 모습입니다. 자기가 왕이죠? 자기 마음대로, 자기 기준대로 판단합니다. 무죄한 사람들을 살해하고, 또 다윗의 부탁에도 무방비 상태의 압살롬을 죽일 때, 아합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나, ‘왕에 대한 존중’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오만하고 교만한 가라지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에는 가라지와 곡식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오만했던 압살롬은 요압의 손에, 또 교만했던 요압은 솔로몬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가라지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다 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세우신, 제대로 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그 비결을 몇 가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3.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4-19)
첫째, 속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어야 합니다. 압살롬처럼 오만하거나 요압처럼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오만한 자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셋째는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가라지가 발붙일 틈이 없을 것입니다. 교만의 싹이 자라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랑에는 끝없는 너비와 한없는 높이와 가름할 수 없는 깊이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가 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조금 어렵습니다. 특히 18절과 19절이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공동번역이 잘 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표준새번역의 ‘충만(πλήρωμα)’을 공동번역은 ‘완성’으로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헬라어 원어 ‘플레로마’는 ‘차고 넘치는 완전한 분량’을 의미합니다. 가령 산모가 아기를 낳기 위해 기다리는 중에, 때가 충만히 차서 출산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산달이 충만해서 이제 아기가 태어났기에 완성이 된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계획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완성하라는 뜻이죠? 새사람으로 거듭 태어나 새로운 세상을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가 성령께서 세우신 제대로 된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비록 가라지와 곡식이 함께 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이렇게 복을 빕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남부산용호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도 이처럼 악랄할 수 있다
삼하 18:9-18; 행 23:12-24; 막 12:1-12:12 / 김창주 목사
사하라 사막의 개미는 방향감각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이들은 사막에서 사냥하다가 먹이를 확보하면 한 치의 오차 없이 집으로 돌아옵니다. 과학자들은 개미들이 걸음걸이를 계산하는 특별한 능력이나 항법장치가 있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능력이 필요할까? 생존본능입니다. 한편 심리적으로 보면 불안에서 기인합니다. 길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은 독특한 셈법을 가져왔고 사막에서 살아남게 된 것입니다. 불안이 가져온 건강한 결과입니다. 세 본문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가정, 직장, 그리고 교회라는 공간에서 불안이 몰고 온 악마적 요인을 성찰할 수 있게 해줍니다.
첫째 가정은 사람이 태어나서 숨을 거둘 때까지 생명의 안전을 지켜주는 곳입니다. 흉악한 범죄자라도 마지막까지 기댈 수 있는 곳입니다. 압살롬의 경우 암논의 살해로 그의 가정은 생명의 위협에 노출되어 불안하였습니다. 다윗은 아들이지만 큰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가까이 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압의 기지로 아버지 곁에 돌아왔으나 아버지의 무관심과 배척에 불안을 느끼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아버지와 목숨을 건 일대 격전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끝까지 아들의 생명을 보존하려 했으나 압살롬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습니다. 생명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가정에서 어떻게 부자가 서로 생명을 겨눌 수 있게 된 것일까? 압살롬의 불안은 아버지를 대항하는 반역을 가져왔고 급기야 아버지의 생명을 겨냥할 만큼 악랄해진 것입니다.
둘째 복음서는 직장에서 경험할 수 있는 불안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직장은 가족의 생명을 위해 필요한 식량의 안정적 공급처입니다. 하지만 이익공동체이기 때문에 노와 사의 이해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현장입니다. 비유 속의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들의 의사를 드러냅니다. 즉 그들은 주인의 착취로 자신들의 몫이 줄어든다는 불안 때문에 극단적인 폭력을 행사하게 된 것입니다. 회사가 우선인지 노동자가 우선인지 싸우기 시작하면 양쪽이 공멸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양보와 상생이 재물의 안정적인 확보를 가져옵니다. 비유는 내 몫이 적다는 손해감과 불안감이 커지면 직장이 전쟁터로 변하고 마침내 서로 악랄해질 수밖에 없다는 교훈입니다.
셋째는 교회에서 생겨난 불안과 그로 인한 인간의 악마성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바울은 헬라교인과 함께 성전에 갔다가 유대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합니다. 바울 체포 건으로 예루살렘이 시끄러워지자 천부장이 나서 사태를 수습하려합니다. 이 과정에서 과격한 유대인 40명이 암살단을 결성하여 바울 암살에 나섭니다. 다행히 바울의 생질이 비밀을 알게 되었고 결국 천부장의 기지로 바울은 죽음을 모면합니다. 교회는 신앙공동체로서 영혼의 만족과 평화를 추구합니다. 바울의 출현으로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릴까 불안한 유대인들은 어떻게든 바울을 제거하려고 하였습니다. 교회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 생명과 영혼을 해치려는 악마적인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납니다.
우리도 압살롬처럼, 농부들처럼, 유대인들처럼 악랄해질 수 있습니다! 세 본문이 왜 성령강림절 마지막 주일에 온 것일까? 창조절이 시작되기 전에 낭독하도록 배치된 이유가 있습니다. 이처럼 악랄해질 수 있는 우리에게 최고선이자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께 매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며 새롭게 창조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성결케 하시는 성령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이 야수적 본성을 자극하게 되고 어느 순간 가족, 직장, 교회에 칼을 들이댈 수도 있습니다. 성령강림절 마지막 주일에 성결케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원합니다.
압살롬의 죽음
사무엘하 18:9-15
사람이 교회를 찾게 되면,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것이 예수가 구세주라는 교리적 내용일 것입니다. 교회는 또한 교회를 찾는 사람에게서 그러한 고백적 말을 이끌어 내는 것이 한 사람을 신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여기고 그러한 학습을 중요하게 여길 것입니다.
물론 예수가 누구시며, 인간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대해, 그리고 성경의 중심 사상에 대해 지식적 차원에서의 학습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학습에 의해 지식이 구축되고 그 지식으로 인한 고백을 그가 신자라는 근거로 삼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그가 교회를 다니는 교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수준이고 소양일 수는 있으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의미로서의 신자, 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죽을 때, 교회를 다니는 가족이 있으면 그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여깁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으면 지옥 간다는 것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부모 형제가 죽어서 지옥 간다는데 마음이 무겁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순간에라도 죽어가는 사람의 입에서 ‘예수님을 믿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듣기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기 전에 예수 믿는다’는 말 한마디만 하라고 다그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물론 믿지 않던 가족이 죽어가는 순간에 한 말 한마디로 그도 천국 갔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심적 위안을 삼고자 하는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구원이 입술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한 편 강도가 예수님을 향한 신앙고백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지만 그것은 결코 말 한마디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자신이 예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됨으로서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맡길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 의해 구원을 얻은 것이지 그의 말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정답이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성경에 맞게 말을 하고 신앙고백적인 말을 한다고 해서 쉽게 ‘나는 신자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자신의 말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말은 얼마든지 자신의 마음조차 속이면서 선이든 신앙이든 가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이점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과 전쟁을 하기 위해 군사를 조직 하고 다윗도 함께 나가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저희는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18:3)라고 권합니다.
백성들의 말을 들어 보면 그들이 다윗을 참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또한 온 마음을 다해 다윗을 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윗의 마음을 알고 다윗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지 다윗 앞에서 어떤 말을 했느냐에 있는 것은 아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은 군사들을 전쟁에 보내면서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한 가지 당부를 합니다. 그것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는 것입니다(5절). 다윗의 당부는 자신들 만 명 보다 더 중하다고 여기는 소중한 사람의 당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의 그 말이 백성들의 마음에 기억되어 그대로 시행되었다면 아마 압살롬은 그 전쟁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이 죽었다는 것은 다윗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다윗의 마음과 뜻을 외면해 버린 거짓된 섬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요압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노새를 탄 압살롬의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의 가지에 걸려 그가 공중에 매달리게 되고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 나갔다고 말합니다. 머리털이 나무 가지에 걸려 공중에 매달려 있는 이 상태는 누구에 대해서도 전혀 대항할 수 없는 그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압살롬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압살롬의 이러한 형편을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합니다. 그러자 요압은 그 고한 사람에게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뇨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떡 하나를 주었으리라”(11절)는 말로 책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요압에게 “내가 내 손에 은 천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삼가 누구든지 소년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였나이다”(12절)는 말로서 압살롬을 죽이는 것이 부당함을 고하였으나 요압은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게 되고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들도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 죽임으로서 압살롬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상수리나무에 매달려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의 압살롬을 가운데 두고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두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무 가지에 매달린 압살롬을 발견한 한 사람과 요압입니다. 압살롬을 발견한 그 사람은 자신이 힘이 없어 압살롬을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무 가지에 머리털이 걸려서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압살롬은 다윗을 반역한 자였기 때문에 만약 압살롬을 죽여 다윗에게 바친다면 그 공로가 인정되어 상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오직 한 가지, 다윗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고 지시했던 사실만 기억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즉 압살롬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다윗의 그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오직 거기에 복종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압살롬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황에 있던 상관없이 압살롬을 죽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압은 다윗의 지시를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뜻과 마음이 어떠한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압살롬은 다윗을 대적한 반역자라는 생각과, 지금 그가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있다는 것만 염두에 둔 채 지금이 바로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라는 것만 생각할 뿐입니다.
이들 중 누가 진심으로 다윗을 섬기는 자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압살롬을 발견한 한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전쟁에 함께 나가겠다고 했을 때 왕은 ‘우리 만 명 보다 중하시오니’라는 말을 하면서 다윗의 출전을 만류했던 백성들 속에 요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그처럼 높이 섬기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정작 요압은 다윗의 마음이나 뜻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무엇을 원하는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는 말에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무기력한 상태의 압살롬을 만나자 자기 성깔대로 행동을 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요압을 두고 진심으로 다윗을 높이고 다윗을 섬기는 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가 비록 다윗 앞에서 어떤 듣기 좋은 말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겉만 번지르한 말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내 속에 굳게 세우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외쳐봐야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맞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싸움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삶이 주님을 향한 나의 고백과 일치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말과 삶은 각기 독립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눈물 흘리며 고백하면서도 죄인의 죄인다움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마치 요압처럼 내 생명을 다해 예수님만 믿을 것을 다짐하면서도 막상 세상에서는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도 잊어버린 채 다만 자신의 뜻과 마음을 따라 행동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에서 요압과 다를 바 없는 신앙의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고 그러므로 누구든 믿음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는 장담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본문의 상황에 처했다면 어떤 사람으로 행동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름 없는 어떤 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요압입니까? 과연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생각하며 행동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볼 때 본문의 내용은 우리는 지금껏 요압식으로 살아왔음을 고발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내 속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신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따라 산다면 그 모습은 모든 삶에서 보이게 될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하나님의 마음은 외면한 채 자기 마음을 앞세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 있다고 여겼던 내가 결국 신앙의 흉내만 내고 있었을 뿐임을 깊이 자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에 예수님의 값없는 은혜가 홍수처럼 밀려들어 오게 될 것이고, 은혜를 담고 있는 마음에서 과연 어떤 열매가 맺어지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스스로의 말에 속지 말기 바랍니다. 아무리 복음에 맞는 말을 한다고 해도 복음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외면한다면 그의 말은 속임수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을 발견한 그 사람에게 있어서 다윗의 말은 은 천개를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러한 모습이 우리가 왜 믿음이 없는 사람인지 자인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은 천개가 아니라 은 열 개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말씀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예수님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의지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진정으로 크신 분으로 다가온다면 자연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무게로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할 것입니다.
감정이 아니라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삼하 18:9-18 / 아름다운 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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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와 포용’이라는 좀 어려운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정치 신학에 관한 책인데요. 저에게 이상 깊은 부분은 작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외치는 정의가 다 똑같은 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사람들이 외치는 정의가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배자가 외치는 정의와 비지배자가 외치는 정의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외치는 정의와 군인들이 외치는 정의를 다를 수 있습니다. 불교인들이 외치는 정의와 기독교인들이 외치는 정의가 다를 수 있습니다. 다르기 때문에 충돌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진정한 정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포용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제시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중적보기입니다. 이중적보기라는 쉽게 말하자면 내입장도 생각하지만 상대의 입장도 생각해 한다는 것입니다. 곧 정의에 관해 합의하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타자의 관점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야 하며, 공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타자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정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이 바로 정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땅에 정의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가치가 우리의 기준이 되어서도 안되고 우리의 감정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군대와 압살롬의 군대가 결국 결전을 벌여서 압살롬의 군대가 패하게 됩니다. 압살롬이 전쟁에 패하고 도망가다가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압살롬이 얼마나 놀랐는 지 압살롬은 길이 아니 곳으로 도망을 쳤던 것 같습니다. 길이 잘 나 있는 곳이라면 큰 상수리 나무에 머리가 걸릴 리가 없습니다. 압살롬은 다급한 나머지 노새를 타고 길이 아닌 곳으로 도망을 쳤고 그 곳에는 가지 무성한 큰 상수리나무는 있었습니다. 압살롬은 그 상수리 나뭇가지에 여지껏 자랑을 해왔던 긴 머리카락이 걸려서 꼼짝 달싹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의 머리카락은 자기를 교수형에 처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압살롬이 상수리 나무에 걸려 있는 모습을 본 어떤 병사는 곧바로 요압장군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결국 요압은 자기손으로 직접 압살롬의 심장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던져서 큰 돌무더기로 쌓아 버립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왕의 명령에 앞에 반응하는 두 사람이 모습이 대조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다윗왕은 분명히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아합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압살롬이 상수리나무 가지 걸려 있는 모습을 발견한 병사는 자신의 손으로 압살롬을 죽이지 않고 요압에게 보고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이 병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요압이 하는 말이 어찌 당장 압살롬을 쳐죽이지 않았느냐 것입니다. 만일 압살롬을 죽였어면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너에게 주었을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들은 병사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내가 내 손에 은 천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아무 일도 왕앞에는 숨길 수 없나나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의 생명을 해하였더라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라”
이 병사의 말은 왕이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고 명령을 했기 때문에 은 천개를 받는다고 해도 압살롬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관인 요압에게 당신도 당연히 왕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지휘관이기에 내가 압살롬을 죽였으면 나를 대적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병사는 왕의 명령을 감히 여겨서는 안된다고 여기는 충성스러운 병사였습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 요압은 어떻습니까? 압살롬을 죽이지 않고 온 병사에게 나는 너처럼 지체할 수 없다고 하면서 압살롬에 있는 곳으로 가서 창으로 심장을 찔러 죽이게 됩니다. 누가 보다도 왕의 명령을 수행해야 할 장군이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압살롬을 죽였습니다. 요압이 왕의 명령을 몰라서 압살롬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압살롬이 왕의 명령인줄 알면서도 압살롬을 죽였을 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압살롬이 미웠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자신의 밭을 불살랐던 사람이 바로 압살롬이었습니다. 그리고 반역을 일으켜 자신의 자리를 위태롭게 만든 장본인이 압살롬이었기에 요압은 압살롬이 미운 것입니다. 요압에게는 한마디로 왕의 명령 보다 자신의 감정이 앞섰던 것입니다.
사람은 이성적이며 동시에 감정적인 동물입니다. 이성이 우리를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 감정이 우리를 움직입니다. 이성은 이렇게 하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 감정이 이끌려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건 사고들을 보면 계획적인 것들도 있지만 우발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발적인 사고라는 말은 다르게 말하자면 순간 감정을 참지 못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은 수시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금방 불같이 화를 내면서 다시 보시 않을 사람처럼 대하다가도 그 감정이 가라앉으면 언제 그랬냐 듯이 또 잘지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감정이 이렇게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기준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압살롬을 원래 먼저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고자 작전을 짠 것은 요압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요압은 압살롬에게 나쁜 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밭을 불태우고 반역까지 일으켜서 위험에 처하게 하니 미워하는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은 변하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변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우리의 기준도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강산도 10년이면 변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 사랑할 때는 영원히 사랑할 것처럼 이야기 하는데 상대에서 감정이 상하고 상처를 받으면 한 순간에 깨져 버립니다. 그런데 성경은 영원토록 변함없는 것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40: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예수님도 마5: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천지가 다 변하고 없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은 말씀은 변하지 않고 영원히 서 있을 것이고 다 이룰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현실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우리의 감정을 따라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 아름다운교회 성도들은 안그런데요. 예전에 다른 교회에 있을 때 보면 기분이 나빠서 교회에 못나겠다고 말씀하시는 성도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지금은 내가 너무 화가나서 나는 도저히 참을 수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본적도 있습니다. 물론 교회라는 공동체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이 상할때가 있습니다. 화가 날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감정을 기준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1600여년 동안 40명 내외의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고 오늘 우리손에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장식품으로 성경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일 날 예배드릴 때만 펼쳐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지식으로 알고 있으라고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삶고 이 말씀대로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라고 하신 말씀은 행하여 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가끔씩 경고문을 붙어 있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제가 인터넷으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경고문이 무엇인가? 검색을 해봤는데요. 그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바닥이 있는 지 확인하신 후 탑승하십시요.” “훔치다 걸리면 똥침 100회”세상에는 분명 다양한 경고문들이 있지만 경고문을 내건 이유는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경고를 듣지 않으면 그만한 댓가지불을 할 수 밖에 없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경고문을 보고도 사람들의 반응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경고문을 정말 경고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경고문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감정대로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행동을 취했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말씀에 대로 사느냐 살지 않느냐는 우리의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것에 대한 결과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리베스 존스 쓴 "청바지를 입은 예수"에 보면 이런 이야기 나옵니다. 존스는 "헤리엇"이라는 오리를 애완동물로 키웠습니다. 존스는 헤리엇을 많이 사랑하고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주인에게서 행복한 생활을 하던 "헤리엇"이 어느날 물에 빠져 죽어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오리가 물에 빠져죽을 수 있는가? 의아해 하던 존스는 수의사에게 가서 "헤리엇"의 죽음의 원인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수의사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오리는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아서 죽었습니다"
원래 오리는 날개 밑에 방수기름이 나오는 샘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가할 때 그 샘에서 나오는 기름을 자기 날개와 털에다 열심히 바른답니다. 그래서 물속에 들어가도 털이 물을 흡수하지 않아서 물에 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헤리엇"은 너무 좋은 주인을 만나서 자기자신이 오리인 것을 망각하고 자신의 날개와 털에다 방수기름 바르는 것을 게을리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서 본능적으로 물속에 들어갔는데 털이 물을 흡수하게 되고 몸이 돌과 같이 무거워 져서 물에 빠져 죽게 된 것입니다. 방수기름을 바르는 것은 주인이 되신 해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오리가 오리의 기본을 지켜야 하듯이 성도들은 기본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인식을 바로 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기름을 날마다 발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이라는 물에 빠져 죽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힘들게 하시려고 우리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잘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바른 길 가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행하는 것이 자체 참 힘들고 어려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확신한다면 그 말씀앞에 우리가 순종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경험과 상식으로 의지하지 않고 말씀의 의지하여 깊은 물에 그물을 내린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귀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이 말씀이 우리의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가까이 하는 것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것처럼 나쁜 사람과 가까이 하면 나쁜 버릇에 물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세상을 가까이 하고 세상의 소리, 사람의 소리만 듣게 되면 그것에 영향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 그 말씀이 우리의 기준에 되어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읽어야 하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로 나오셔야 하구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것입니다. '인문학습관'이라는 책을 쓴 윤소정 작가가 '써먹지 못하는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는 것을 들어 보았습니다. 이분은 인문학을 알고 싶어서 하루에 5권씩 인문학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돌아보니까 자기는 머리로 만 아는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제 꼽씹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인문학이 사람에 관한 학문인데 자기는 책을 통해서 사람을 알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윤소정작가는 이제는 만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처럼 실천하며 사는 진짜 공부를 하고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써먹지 못하는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어서 행하지 않으면 나와는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감정이 따라 살아가는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이 사는 백성들이 되어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화 해
삼하 19:9-15 / 작성자 하늘기쁨
오늘 본문은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1. 이스라엘의 화해
다윗의 군대가 압살롬의 군대를 무찌른 이후 다윗은 그 기세를 몰아 예루살렘으로 들어갈만 한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마하나임에 남아 화해를 모색하였습니다. 이전에 그가 기브온에 있고 이스보셋이 마하나임에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전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대화로써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화해는 늘 싸움보다 더 낫습니다. 특히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더욱더 그러합니다.
압살롬을 왕으로 세운 사람들은 압살롬이 죽은 이후 왕에 대한 논의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 (삼하 19:9)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유다를 뺀 나머지 11지파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다윗이 그들을 압제자로부터 구원하여 낸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지금 잘 살게 된 것은 다윗이 왕으로서 압제자들을 무찔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 (삼하 19:10)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압살롬을 좋아하여 그를 왕으로 세웠지만 그가 싸움에서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다윗 왕을 그들의 왕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라고 말합니다. 다윗 왕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마하나임에 있으니 다시금 왕을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다윗이 자신들의 왕임을 선포하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일에 압장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이 진행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화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압살롬 편에 섰던 사람들이 다윗과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같은 하나님의 백성끼리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해가 쉽지 않습니다. 화해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화해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주저함으로 화해의 시기를 놓칠 수 있습니다.
사실 과거를 생각해보면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단지 압살롬의 꼬임에 넘어가 그들이 압살롬을 따라갔을 뿐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마땅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잘못한 것이 있으니 다윗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잘못하였기 때문에 먼저 나서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합니다. 잘못하였기에 나서지 못하고 망설이는 상황에서 다른 움직임이 필요하였습니다.
2. 다윗의 화해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이 논의한 내용을 첩보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가 움직일 차례가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왕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삼하 19:11) '유다 장로들에게 이르기를...이스라엘이 왕을 왕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뜻을 안 다윗은 자신의 편에 서 있던 대제사장들을 통해 유다 장로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렸습니다.
유다 장로들에게 특별히 자신의 뜻을 전한 것은 유다 사람들이 더 망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압살롬이 기브온에서 반란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유다 사람들은 압살롬 반란의 최선봉에 섰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과 화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지은 죄를 생각하여 쉽게 나서지 않고 있었기에 다윗은 그들에게 더욱더 적극적으로 다가갔던 것입니다.
문제가 생긴 경우 보통은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못이 있는 사람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당한 다윗이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좋습니다. 손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가 내밀 수 있습니다. 내밀어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화해를 원한다는 것에 대한 진정성을 보이기 위한 실제적 제안을 하였습니다.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삼하 19:13) '아마사에게 이르기를...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아마사에게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장관이 되어줄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아주 파격적인 제안입니다. 믿기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하면서 확신을 주었습니다. 일시적으로 군대장관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항상' 군대 장관이 되는 것입니다. 변수가 생기기 전에는 아마사가 다윗의 군대장관으로 계속 있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진정성 있는 제안에 유다 지파 사람들은 의견일치를 이루었습니다. “모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같이 기울게 하매 그들이 왕께 전갈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께서는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삼하 19:14)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같이 기울에 하매'라고 말합니다. 이전에는 다윗 지지파와 다윗 반대파가 나뉘어 있었는데 다윗의 제안을 듣고 이제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다윗을 왕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진정성 있는 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이전에는 분명히 반대파가 있었으나 다윗의 말에 의해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 화해가 어렵지만 진정성 있는 말로 다가갈 때 한 마음이 되고 화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렵다고 말만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자세로 나가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해를 하면 참 좋습니다.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길갈로 오니라” (삼하 19:15)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너하게 하려고 길갈로 오니라'라고 말합니다. 이전에는 서로 칼을 겨누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화해를 하니 멀리 요단강까지 나와서 맞이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싸우려면 싸울 이유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화해하려면 화해할 이유 또한 수없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화해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신앙인 사이의 문제라면 더욱더 화해해야 합니다.
신앙인 사이의 싸움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이겨도 무너진 상대방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상함이요 내가 져도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니 하나님의 백성이 상함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신앙인의 피터지는 싸움을 좋아하시겠습니까? 싸움이 아니라 늘 화해를 도모해야 합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따르던 사람들과 화해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공격하지 않고 화해정책을 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머뭇거렸습니다. 유다 지파는 더욱더 많이 머뭇거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먼저 화해를 위해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다윗이 정직한 마음으로 화해를 시도하자 화해가 되었습니다. 화해는 쓸데 없는 힘을 낭비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얼굴을 웃게 합니다. 싸워서 내가 이기려 하지 말고 화해하여 모두가 이기는 세상을 만들어야 가야 합니다.
큐티 삼하 8:9-18
로보스
오늘 본문은 어제 본문과 나눠서 볼 성격이 아닌 것 같은데... 오늘 본문 역시 어제와 마찬가지로 다윗의 승승장구를 그리고 있다. 하맛 왕 도이는 다윗에게 선물을 가지고 와 화친을 청하였고(9-12절), 에돔은 다윗의 발 앞에 굴복한다(13-14절). 다윗의 왕국은 든든히 서고(15절), 그 내각은 짜임새 있게 조직되었다(16-18절).9-14절은 어제 본문과 연속적인 내용이므로 나는 15절에 집중하여 묵상하기로 했다. 거듭된 승리로 외치를 성공적으로 이룩한 다윗은 내치에도 눈을 돌린다. 특히 그는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다. 구약 성경을 잘 읽어보면 이 두 단어는 많은 경우에 같이 붙어나온다. 유명한 아모스 5: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에서 정의와 공의가 함께 나오고, 욥 8:3, 시 99:4, 시 106:3, 잠 21:3, 전 5:8, 겔 45:9 등에서도 정의와 공의는 세트로 붙어다닌다. 그런데 도대체 두 단어는 어떻게 다른 걸까?정의(히브리어 מִשְׁפָּט)는 본디 "재판"이라는 단어이다. 즉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공명정대함을 이야기한다. 이 개념은 출 23:1-3에 잘 드러나 있다. 흥미롭게도 출 23:3에서는 가난한 자라고 해서 무조건 편을 들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정의"의 개념이다. 한편, 공의(히브리어 צְדָקָה)는 "올바름", "의로움"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이 경우에는 윤리적인 올바름, 예를 들어 약한 자에 대한 신원을 포함한다. 두 단어가 잘 사용된 용례로 시 72:2를 들 수 있다.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백성은 불편부당하게 공의로 재판하되, 가난한 자들에게는 정의를 베풀어야 한다.그렇다면 이렇게 다윗이 베푼 정의와 공의는 온전한 것이었던가? 이후 성경에서 다윗이 행한 행동을 보면 그렇지 않다. 그는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음모를 꾸며 충성스런 장군이었던 우리아를 죽인다(삼하 11장). 이는 정의도, 공의도 아니다. 이렇게 불완전하게 등장했던 정의와 공의는,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서 "그 나라"의 가치로 등장하게 된다(렘 33:15, 사 32:1). 그렇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사 당신의 나라를 회복시킬 그 날, 정의와 공의는 온전한 형태로 우리 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나는 주님께서 베푸실 정의와 공의를 사모하는가? 불의와 죄악이 넘실대고 있는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와 그 의가 임할 것을 놓고 간절히 구하고 있는가? 불의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통 받으며 오직 정의와 공의가 선포될 그 날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주님, 이 참담한 세상 속에 당신의 의를 속히 보이소서."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계 1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