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을 앞두고
설날을 이틀 앞둔 목요일이다. 전날 창녕으로 고적 답사를 다녀온 후기로 시조 두 수를 남겨 지기들에게 아침 안부로 전했다. “화왕산 지자기가 비화벌 뻗친 언덕 / 커다란 바위벽에 천 년 전 장인 솜씨 / 민머리 가부좌를 튼 부처님을 새겼다 // 눈비를 가려주는 마애불 찾는 불자 / 문고리 끌어당겨 촛불 켜 두 손 모아 / 소원을 빌고 또 빌어 심지까지 닳았다” ‘송현리 마애불상’
창녕 군립 박물관과 인접한 교동리에는 가야시대 고분군이 있었다. 지난해 가을 유네스코에서 선정한 세계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였다. “화왕산 지기 뻗친 교동리 구릉으로 /주인공 알 수 없는 봉긋한 무덤들이 / 천 년에 천 년을 더해 옛 모습을 살렸다 // 생시는 지엄했던 부족장 신분이라 / 쇠칼은 녹이 슬고 토기가 금이 가도 / 그때는 흙을 퍼 날라 푯대라도 남겼다” ‘교동 고분군’
어제 설을 앞두고 부곡으로 목욕하러 가던 길 들렀던 창녕 읍내 고적지였다. 목요일은 연휴에 들기 전이라 달력에는 빨간색이 아닌 까만색이었다. 같은 생활권에 사는 작은형님과 고향을 지키는 큰형님을 찾아뵙기로 한 날이다. 지나간 연말연시에 한 번 찾아뵈려다 가족 행사와 겹쳐 설날 전후로 미뤄둔 일정이다. 내가 5형제 막내여서 네 분 형님 가운데 큰형님은 띠동갑이 넘는다.
우리 집안에서는 연전 코로나와 무관하게 윗대 조상 산소를 옮겨오고 기제를 시제로 전환했다. 주자가례를 지키려는 보수성 강한 큰형님이 고심 끝에 내린 용단이었다. 다음 세대를 잇는 조카와 손자들에게 벌초 성묘와 제례에서 번거로움을 줄여주기 위해서였다. 기제를 시제로 전환했으니 조상께 설날에 해가 바뀜을 아뢰거나 추석에 햇곡식을 올리는 차례를 지내지 않아도 되었다.
명절 차례는 줄여도 아우로서 고향을 지키는 큰형님을 찾아 뵙는 도리를 다함은 당연하다. 아침 식후 느긋하게 길을 나서 작은형님이 운전대를 잡은 차에 동승 남해고속도로를 달렸다. 함안 군북 월촌에서 정암교를 건너 의령읍으로 향했다. 읍내 장터는 설 앞둔 대목 오일장을 맞아 사람들이 붐볐다. 장을 보러온 형수님과 동네 아주머니와 문화원 서실로 나와 머문 큰형님도 뵈었다.
큰형님 내외와 동구로 돌아와 삽짝으로 드니 은행나무에 둥지를 튼 까치는 낡은 집을 고쳐 쓰려는지 삭을 가지를 떨어트려 놓았다. 큰형님은 지병으로 대학병원으로 통원진료를 다니면서도 농사를 꽤 짓는 편이다. 대봉감은 가지치기를 마치고 두엄을 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을회관 앞들의 논에 심은 마늘은 겨울이 따뜻해서인지 잎맥이 파릇했고 비닐하우스엔 고추 모종을 길렀다.
위채 안방으로 들어 큰형님과 마주 앉아 근황 안부를 나누는 사이 큰형수님은 부엌에서 점심상을 차려냈다. 큰형수님이 손수 빚은 두부와 메밀묵은 명절 분위기를 살려 먹음직했다. 콩과 메밀을 방앗간으로 가져가 갈아서 끓여 굳힘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 설날에 찾아올 조카네를 위한 노부모의 정성이기도 했다. 시골 밥상 재료는 자급자족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점심 식후는 작은형님과 성묘를 나섰다. 작년 추석에 벌초와 성묘 걸음을 한 이후 다시 찾았다. 마을을 굽어보는 벽화산 중턱에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모신 산소가 있다. 돌너덜 곁 노송은 수령이 백 년을 더 헤아릴 듯했다. 멧돼지가 봉분을 파헤치지 말라고 설치해둔 감응 장치는 벨이 울렸다. 조부모님과 부모님께 자손이 다녀감을 아뢰고 윗대 고조 증조와 숙부님께도 절을 올렸다.
집으로 돌아와 창원으로 가려고 자동차 시동을 켜는데 큰형수님은 불룩한 종이가방을 건네왔는데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아까 점심상에 오른 두부와 메밀묵을 챙겨 보내면서 콩비지까지 들었다고 했다.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 매장에서는 웃돈을 얹어주고라도 구할 수 없는 소중한 먹을거리였다. 동구를 벗어나면서 근력이 남았을 때 고향을 찾을 날이 몇 번 더 될까 생각해 봤다. 24.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