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휴 마지막 일요일입니다. 4시경에 <트롯 랭킹 쇼 찐이야> "혜은이(73)" 편을 보는데 이혼한 아내가 훅 치고 들어왔습니다. 혜은이의 얼굴에서 왜 아내가 소환됐을까. 실력에 비해 저평가 된 가수가 혜은이입니다. <박원숙> 예능 프로에 나오는 혜은이는 노래 말고 잘하는 게 하나도 없더이다. 여성 톱스타가 나이 70 넘어서 예능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숙지, 뻔뻔함, 말빨 어느 것 하나 신통치 않은 예능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의 시청률 기여도는 혜은이가 1등이라고 보는데 동의해 주시라! 우리 시대 가요 아이콘은 조용필(77)-이용(70)-김범룡(68)-혜은이(73)-김창환(73)-정수라(64)-민혜경(64) 등등 있을 것입니다. <제3한강교>가 히트할 무렵 필자는 중3이었어요. 그때는 취미가 '음악 감상'이라고 하면 먹어주던 시대인데, 필자는 고삐리가 되면서 가요를 접했으니 아직까지도 음악은 젬병입니다.
-
우리가 아는대로 "3한강교"는 "한남대교"를 일컫는 말입니다. 필자가 한남 대교에 근무할(84') 당시만 해도 강다리 24개 중 가장 차가 많은 핫플레스였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 시대는 팝송-깐쇼네-샹송을 멋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영어 공부하느라고 <오버 앤 오버>에 집중하면서 음악은 곡도 곡이지만 가수가 누구냐가 중요하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
여성 가수에게 나의 성적 판타지를 투영시킨다는 걸 확인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음악을 좋아했어요. 신혼 때 "유리 창엔 비(햇빛촌)"를 양희은 창법으로 담담히 부르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머니 환갑 때 '포기하지 마!(성진우)'를 불러 시댁에 원성을 샀을 것입니다. 내게 있어 혜은이는 나나 무스꾸리입니다. 힘!
-
Over and Over ...Nana Mouskouri
A.
I never dared to reach for the moon
저는 달(천국)을 감히 마음에 두지는 않았는데
I never thought I'd know heaven so soon
이렇게 빨리 천국을 알게 될 줄은 짐작도 못했어요.
I couldn't hope to say how I feel
현재의 내 느낌을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The joy in my heart no words can reveal
내 마음속의 기쁨을 어떤 단어로도 드러낼 수 없네요.
Over and over I whisper your name
당신의 이름을 자꾸자꾸 속삭여 봅니다.
Over and over I kiss you again
당신에게 자꾸자꾸 입 맞추어 봅니다.
I see the light of love in your eyes
당신의 눈 속에 사랑의 빛을 봅니다.
Love is forever no more good byes
사랑은 영원해요, 더 이상의 이별은 없어요.
Now just a memory the tear that I cried
이젠 내가 눈물을 흘렸던 것도 추억일 뿐이고
Now just a memory the sights that I sighed
이젠 내가 한숨을 쉬었던 것도 추억일 뿐이죠.
Dreams that I cherished all have come true
내가 키워왔던 꿈들이 모두 이루어졌어요.
All my tomorrows I give to you
내 앞날을 모두 당신께 드릴게요.
Life's summer leaves may turn to gold
인생 여름철의 푸른 잎은 금색으로 변할 수 있겠지만
The love that we shared will never grow old
우리가 나눈 사랑은 결코 색이 바래지 않을 거예요.
Here in your arms the world's far away
난 모진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당신의 품 안에 있어요.
Here in your arms forever I'll stay
여기 당신의 품 안에 영원히 머무를 거예요.
2.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의 사람인가, 아니면 노래와 얼굴을 매개로 되살아나는 그 사람과 함께했던 ‘나’ 자신인가? 혜은이를 보다가 느닷없이 아내가 훅 들어온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기억은 주민등록등본처럼 사람별로 정리되어 보관되지 않는다. 얼굴, 목소리, 노래, 나이, 몸짓 같은 감각의 조각들이 서로 얽혀 있다가 하나가 건드려지면 다른 기억까지 연쇄적으로 깨어난다. 혜은이가 원인이라기보다 오래 잠들어 있던 기억을 여는 열쇠가 된 셈이다.
-
프로이트의 ‘중층결정’을 가져오면 더욱 재미있다. 혜은이라는 하나의 이미지 위에 젊은 시절의 가요, 나나 무스쿠리, 여성 가수에 대한 성적 판타지, 신혼 시절 아내가 부르던 노래, 어머니 환갑의 우스운 기억까지 여러 시간대가 포개진다. 그러므로 “혜은이=아내”가 아니다. 혜은이라는 기표를 통과하면서 여러 욕망과 기억이 한꺼번에 응축되어 아내라는 이미지가 출현한 것이다. 특히 음악은 기억을 이상하게 보존한다. 사진은 과거의 한순간을 보여주지만 노래는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한다.
-
옛 노래를 듣는 몇 분 동안 우리는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잠시 그 시간 속에서 다시 살아간다. 그래서 나나 무스쿠리의 노래가 불러오는 것은 단순한 멜로디가 아니라 그 노래를 듣던 젊은 나, 사랑했던 여자, 그때 가능하다고 믿었던 미래까지 포함한다. 여기에 라캉을 한 숟가락 넣으면 조금 아파진다. 내가 그리워하는 아내가 실제의 아내와 완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세월이 지나면서 기억 속의 아내는 나의 상실과 욕망에 의해 계속 다시 쓰인다.
-
우리는 사람 그 자체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가능했던 자신의 세계도 사랑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한 사람을 잃는 동시에 ‘그 사람과 함께였던 나’를 잃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에 「Over and Over」가 놓인 것이 절묘하다. 제목부터 ‘거듭해서’다. 기억 역시 반복한다. 같은 노래를 다시 듣고, 같은 얼굴을 다른 얼굴에서 발견하고, 끝났던 사랑을 현재의 감정 속에서 다시 구성한다.
-
프로이트라면 이것을 단순한 추억이라기보다 반복 속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욕망이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읽었을 것이다. 다만 반복은 반드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움과 복귀 욕망은 다르다. 아내가 떠올랐다는 사실만으로 다시 그 관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기억은 현재의 내가 과거와 맺고 있는 관계를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왜 혜은이가 아내를 오버랩시켰을까?”에 대한 답은 어쩌면 이것이다.
-
혜은이가 아내를 닮아서가 아니라, 혜은이가 한때 사랑하고 욕망하고 노래 듣던 ‘그 시절의 나’를 깨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나를 불러냈더니 그곳에는 당연하다는 듯 아내가 함께 서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지나가도 함께 들었던 노래는 남는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노래를 다시 틀면, 떠난 사람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살았던 시간이 잠시 현재가 된다. 그래서 음악 앞에서는 오래된 사랑도 좀처럼 완전한 과거형이 되지 않는가 보다.
2026.9.30.wed.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