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모르게 탄식이 나오는 곳이 있다. 괜히 옷깃을 매만지고 고개가 저절로 숙어지는 곳, 두 손도 다소곳이 모으게 되는 장소라면, 아마도 절이나 교회나 성당을 떠올리지 싶다. 그곳이라면 어떤 악한 마음을 가진 이라도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사랑과 자비가 강같이 흐르고 용서가 파도처럼 넘치는 곳이니 말이다. 그런데, 정답은 아니다.
지난 토요일 대구수필가 협회에서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두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부산에 있는 유엔묘지였다. 늦봄이라고 하지만 초여름의 강렬한 햇살이 손 그늘을 만들게 했다. 사실은 먹먹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써 내려간 위인의 묘지도 아니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그 명이 다해 삶을 마감한 이들의 묘지도 아니다. 차라리 그런 이들이 묻힌 곳이라면 바람 따라 물 따라 흘러가는 인생의 허무함이나 논했을 터다.
그러나, 유엔묘지는 그런 곳과는 차원이 다르다. 스스로 자유를 지키지 못했던 못난 나라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자 자유의지로 참전했던 이국의 젊은이들의 넋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당신이 아무리 지위가 높고 돈이 많아도, 전쟁을 혐오하고, 좌파이거나 우파이거나, 혹은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살았다고 하더라도 숙연해져야 마땅한 곳이다.
노령의 해설사는 80여 명의 대구수필가 회원을 앞에 두고 22개국 젊은 목숨에 관해 이야기했다. 198만 명의 청춘들이 목숨을 걸고 남의 나라 남의 땅에 와서 전투를 벌였다고 하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당장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났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 자신이 전투복을 입을 것인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내 자식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이 만류할 것이다. 그런데 1950년, 고작 스물을 갓 넘긴 이들이 먼 나라 이국땅에서 목숨을 바쳐 싸웠다고 하니 도대체 그런 일이 가능한가 싶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극명히 드러나는 곳이 묘지라고는 하지만, 재한유엔기념공원 내 화강암 담벼락에 새겨진 전사자의 이름을 읽노라니 억장이 무너진다. 미로처럼 꼬인 길 이쪽저쪽으로 한때 살아있었다는 흔적만 남긴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광장에서 일광욕을 즐겼던 얀 상병, 호주 멜버른 대학교에서 수학 교수를 꿈꾸었던 피터 중위,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브리지 공원을 달렸던 제임스 대위도, 저 멀리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의 브라운 하사도 이곳에 있다. 그들의 아내도 여기에 있다. 전투지원 16개국, 의료지원 6개국, 22개국의 젊은이들이 고향을 떠날 때는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겼으리라. 어머니와 아내와 연인에게 미소를 띠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 위로의 말을 전했을 테다. 푸릇푸릇한 젊음과 ‘자유’를 지키겠다는 신념만이 가득 차 있었을 그들의 마음을 되새긴다. 그러나, 오늘 여기 묻힌 2,311명(1951년 기준)은 돌아가지 못했다.(현재는 2,327명, 부부 합장 포함)
10시 유엔기 게양식이 열렸다. 조곡과 더불어 유엔기가 올라갈 즈음 주변을 산책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유엔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죽음의 숭고함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니 이는 고귀한 죽음에 관한 자세이기도 하다. 그들의 죽음으로 지금 우리가 멀쩡히 살아 이 자리에 서 있다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 가눌 길이 없다.
그중 허머스톤 대위의 사연은 더욱 눈에 밟힌다. 1945년 이후 일본에서 점령군으로 근무하던 호주 출신의 허머스톤(34세)과 간호사 낸시(32세)는 사랑에 푹 빠졌다. 육군이었던 허머스톤 대위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한국으로 파병이 되었고, 1년 후 전사했다. 오로지 남편만 기다리던 아내 낸시에게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 50년이 지난 2010년 4월 낸시가 드디어 남편 곁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의 영문 이름 위에 4월의 겹벚꽃이 휘날린다. 벚꽃의 꽃말 ‘정신적 사랑’처럼 낸시의 세월이 눈앞에 아른거려 괜히 콧등이 시큰해졌다.
모든 소멸이 안타까운 것은 말할 필요가 없으나 젊은 나이에, 생면부지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일이야말로 더 말해 무엇하랴. 어떤 고결함과 순결함도 이것에 비할 바가 못 되니 부산 유엔기념공원 묘지에 안장된 2,327구의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었던 영웅들의 삶이 새삼스럽다.
시신을 찾을 길 없어 이름만 있는 묘지도 있다. 전쟁의 참혹함을 절실히 전해 주는 셈이다. 공중전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조종사의 이름, 격침으로 인해 수몰되어 생사를 알 길이 없는 해군의 이름, 포격으로 인해 산화한 육군의 이름만이 이곳에 있을 뿐이다. 그들의 흔적은 우리나라 산천에 흩어져 있으니 안타까움이 더한다.
가족들이 다녀간 묘비 옆에는 성경 한 줄, 가족사진 한 장, 늙은 엄마의 편지 한 장이 남아있다. 마치 아들인 양 남편인 양 쓸어보았을 네모의 비명 옆에는 주목 나무와 늦게 핀 겹벚꽃잎이 흩날린다. 그러나 그들의 젊음은 영원히 이어져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으니 우리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셈이다. 매년 참전용사의 가족을 초청하는 행사를 한다고 하니 다행이다. 내가 거들 수 있는 것은 명복을 비는 묵념이 다다. 이름을 읽고 생애의 시간을 읽어보니 대부분 서른을 넘지 못한다. 마음 한구석에 그들의 시간을 채워본다. 그리고 제대로 살아야겠다, 다짐한다.
돌아오는 내내 그들을 기억하려 했으나, 명례성지의 해넘이에 정신이 팔렸다. 자연이 만들어 낸 장엄함에 감탄하는 사이 그들을 잃었다. 그곳에서 인생 사진을 찍었다며 SNS의 프로필에 쓰일 사진을 고르다가 삼성라이온즈가 이겼다는 소식에 그들을 가맣게 잊어버렸다.
미안한 마음에 이 글을 쓴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 싶어서다. 유엔군 전몰장병 40,896명과 그 가족들에게.
첫댓글 저도 처음 유엔묘지에 갔을때 정말 가슴 아팠습니다. 그들의 희생으로 지금까지 자유민주국가로이어져 왔는데 나는 나라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슴 뭉클한 글에 다시 한번 감동입니다.
자기멋졋!
유엔묘지 참배의 시간을 독자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습니다.
참배의 시간 참 감사했습니다.
한 편의 수필로 훌륭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이 있어서 감동이 있고
더하여 마지막 단락이 있어서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같이 참배하였지만
기록으로 남김의 차이에 감동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홍정식 선생님~
유엔묘지에 대한 귀한 수필~ 구체적인 수치와 사연까지 언급하여
듣지못한 부분까지 인깨워 주신 글 잘 배독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