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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는 인간의 삶에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소비재가 되었습니다. 1920년대 포디즘을 통해 자동차라는 물건이 특정 계층만을 위한 것이 아닌 대중들을 위한 물건으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자동차는 인간의 삶을 아주 많이...아주....많이 바꿔 놓았죠.
그래서 마치 TV나 냉장고, 혹은 식탁이나 신발처럼 우리의 삶에서 결코 떼어 놓을 수 없는 물건으로 인식되면서 가끔 예술의 소재로도 사용되곤 합니다. 예를 들면..
제프 쿤스의 BMW 아트카처럼 상황을 표현하기 위한 훌륭한 도화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완전히 분해된 후 이렇게 새로운 생명을 얻기도 하죠. 최근에 DDP 4층에서 현대 자동차의 아트 워크가 전시회를 가진 적이 있는데, 지금도 하고 있지 싶습니다만. 기업 광고로 집행했던 자신의 애차를 분해해 작품으로 변모시키는 작업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직접 가서 보니 조금 더 뜻이 이해가 되더군요.
일부에서는 그런 차들을 클래식카로 영원히 보존해주는 방법은 없었나? 꼭 다 분해를 해서 저렇게 만들어야 했나? 라고 비판도 했습니다만, 전 좀 다르게 봤습니다.
오히려 소비재에서 자신만의 추억을 담은 예술 작품으로 변신시키는 것이 원래 차의 주인들에게 더 오래도록 남을 것 같더군요. 소비재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추억과 기억들도 함께 버려지죠.
사진출처: http://brand.hyundai.com
하지만 그런 것들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면 보다 오랫동안 함께하는 셈이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작품이 아닌 쓰레기 폐품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과 함께 시간을 보냈던 사람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의 단편이자, 조금 더 가까이 두고 누릴 수 있는 혜택이기도 하니까요.
클래식카로 영구 보존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걸 어디에 어떻게 보관할 것인지, 그리고 그와 관련된 비용의 문제는 없는지 생각해보면, 아무리 좋은 추억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비재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처분이 되어야 하죠.
그러나 예술은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므로...오히려 그 편이 전 더 좋았다고 봅니다. 단적인 예로, 위 사진처럼 소파로 변신한 그랜져 XG 택시의 경우... 어차피 택시로서 사용 연한이 지나 폐차되어야 하는 신세이지만, 그걸 실용성을 담은 예술 작품으로 탈바꿈시켜 영원히 보관할 수 있게 했으니.. 오히려 그게 추억을 간직하는데 더 나은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진출처: http://brand.hyundai.com
물론 개인마다 의견은 각자 다르니... 제가 맞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단지 의견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요즘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상대를 비꼬는 식으로 응답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제 블로그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커뮤니티 사이트가 마찬가집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혹은 틀린 정보를 게재했다고 비판이 아닌 일방적인 비난을 퍼부으며 온갖 자존심을 건드리는 조롱을 서슴치 않습니다.
그러므로써 자신의 우월함을 강조하려는 모양인데, 하나도 멋있지도 않고, 그냥 철없어 보일 뿐입니다. 그런건 사르카즘도 아니고 뭐도 아닙니다. 아주 저급한 레벨의 커뮤니케이션에 지나지 않죠.
거 어디 무서워서 다음 이야기나 꺼내겠습니까? 한번쯤은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 건지...
상대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다름을 어필하는 것이야 말로 어른스러운 행동이죠. 각설하고... 자동차란 이렇게 다양하게 예술의 소재로 사용되곤 하는데, 오늘 소개할 작가의 작품도 자동차를 이용한 작품입니다.
이렇게 말이죠. 일명 팻카라고 불리는 이 작품은 현대 사회의 소비자들의 게으름? 같은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자동차와 큰 집을 얻으면서 점차 게을러지는 소비자들의 세태를 비꼰 것이죠.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점점 불필요하게 큰 것을 원하고 있는 모습들을 풍자했다고 합니다.
작품은 폴리 우레탄으로 만들어졌는데, 타이어와 윈드 쉴드의 크기를 보아 원래는 아주 작은 차였으나 보디워크는 잔뜩 부풀어 올라서 정말 뚱보처럼 뚱뚱하게 변해버렸습니다.
이건 반대로 표현한 작품인데, 좁은 집이라는 작품으로 얼핏 보기에는 좁은 곳에 세워진 집처럼 보이지만
내부를 들어가보면 모든 것이 축소되어 있습니다. 좁은 식탁과 그만큼 줄어든 의자, 그리고 납작해진 냉장고나 세면대 등...모든 것이 좁은 집에 맞춰 납작하게 축소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인간이 소비하는 물건이나 거주하는 공간 그리고 삶 자체가 위축이나 축소되는 것에서 느끼는 공포감을 표현했다고 하는데요. 설치미술이라 그런지 확실히 메시지에 임팩트가 있네요.
이 작품들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어윈 뷔름(Erwin Wurm)이라는 작가의 작품들로 위 좁은 집의 경우 전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그의 유년기에 대한 기억이기도 합니다.
그는 전쟁에서 막 벗어난 폐허가 된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는데요. 그 시절 물자의 부족으로 모든 것이 힘들었고, 또 이데올로기가 변하면서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했던 시기였던 터라 모두가 위축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런 것들에 대한 공포를 표현했다고..
하지만 꼭 이렇게 무겁게 접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작품은 다분히 위트가 가득한 것들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보는 것 그대로 해석해도 충분하죠.
이건 저 위에 소개한 작품과 마찬가지의 사조를 담고 있습니다. 잘 보면 낯익은 로고가 보이는데 바로 포르쉐죠. 포르쉐 컨버터블을 가지고 팻 카로 만들었습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것도 모자라 늘어진 뱃살처럼 흘러내리기 까지 했죠. 해석을 두고 다양한 의견들이 있는데, 작가는 서양 세계의 소비 형태를 비꼬는 것이라고도 했으며, 그건 단지 인간의 신체 뿐만 아니라 주거 공간이나 자동차까지도 마찬가지가 되어가고 있음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과잉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소비자들이 슈퍼 사이즈에 심취해 음식 뿐만 아니라 집, 그리고 자동차까지도 모두 비대해진 것들을 소비하고 있는 것을 비꼬는 것이라 생각되네요.
이 뒷모습을 보니..ㅎㅎㅎ 이것도 병이라고..무슨 모델인지 유추해보게 됩니다. 아마도 964가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하지만 비대해진 보디워크를 보니 정확히 어떤 모델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최초에 팻카를 구상하면서 오펠과 함께 작품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가난했던 시절, 자신이 입던 옷까지 작품을 위해 사용했던 그는 언제나 소재 구입 비용에 힘들어 했다고 해요. 그래서 오펠과 콜라보레이션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무척 기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컴퓨터로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도저히 자신이 의도한 것 대로 작품이 나오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원래대로 돌아가, 조금 더 저렴한 소재로 작품을 구성해보기로 했고, 스티로폼과 폴리 우레탄을 이용해 이와 같은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이 작품은 왠지 인형으로 만들어서 소파위에 던져놔도 괜찮겠다 싶습니다. 나름 귀엽기까지 한데요? 특히 올해 여성들의 가방 트랜드가 메탈릭 실버나 골드인 관계로 은근히 인기를 끌 것 같습니다.
아! 이런 것도 쓸데없이 과잉 소비를 하려는 현대 소비자들의 배부른 욕심인걸까요? 그의 작품 중에는 이렇게 익숙한 것들의 형태를 괴상하게 비틀어 놓은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건 트럭을 이용한 것인데, 멀쩡해 보이지만, 트럭 적재 공간이 완전히 휘어져있죠.
이 각도에서 보면 더 잘 보입니다. 뭘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 재미있는 표현인 것만큼은 사실이네요.
이렇게 완전히 납작해져서 마치 UFO처럼 보이는 작품도 있습니다. 스타워즈의 스피더 같기도 하고... 사실 몇 몇 작품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고 해요. 왜냐하면 지금 사람들은 너무 진지한 것들만 찾다보니 조그마한 것에도 큰 의미를 부여해 괜시리 심각해지곤 한다는데, 그러다 보니 유머 센스가 너무 떨어져 버린 것이 안타까웠다고...
결국은 현대 사회의 사람들의 행태를 비꼰 것이기는 하지만, 꼭 그런 의미를 파악하기 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그런 뜻인 모양입니다. 익숙한 것에서 약간 비틀어진 것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란 거죠.
이것도 마찬가지로 아주 재미있게 표현된 것인데...의미는 같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휘어지면 어떻고, 저렇게 휘어지면 어떻습니까? 꼭 원래 의도대로만 갈 필요는 없죠. 어색한 것을 어색한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도 위트고 즐거움이죠. 너무 바로잡으려고만 하면 사는게 재미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건 조금 더 극적으로 표현된 작품입니다. 르노가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옆으로 바짝 린 위드?? 린 인?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린 위드와 린 인은 모터사이클 라이더들이 코너링을 할 때 자세를 뜻하는 말입니다.
간략하게 이 짤 하나로 정리를 해 봅니다. 망고국 말이 잔뜩 쓰여있군요. 망고 맛있지.ㅠㅠ 츄릅!! 가볍게 생각하면 되는 작품들이기는 하지만, 작가도 그러기를 바라면서 조금 더 알기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표현을 하기는 했으나, 보고 난 후에 왠지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현대미술 중에서는 이렇게 자본주의 시대의 소비 행태를 비판하는 작품들이 꽤 있습니다. 시대적인 메시지를 강렬하게 함축적으로 담아내는 에술의 세계에서 종종 자본주의는 아주 좋은 소재가 되곤 하죠. 특히나 그 속에 얽혀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비판하는 메시지들이 많죠.
어떤 것은 그래피티 형태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음악으로서 그리고 설치 미술 작품으로서 표현되기도 합니다. 사실 비판 정신은 예술의 원동력이고 예술가의 모티베이션으로 많이 활용되었습니다.
제목에도 써 놓았지만, 가끔은 정말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다들 큰 집, 큰 차를 원하는데, 정말 필요에 의해서 그런 것들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허영과 욕심에 의해 큰 집과 큰 차를 원하는 것인지 말이죠.
조금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서 예를 들어, 수백마력의 출력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수많은 최근에는 전자장비들로 인해 마치 자신이 운전을 잘 한다고 착각하게 되는데, 오히려 그럼으로 인해 운전 실력을 더 쌓을 생각보다는 반대로 기계 장치에 의존해 그저 순간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한번쯤은 되돌아보게 됩니다.
단편적으로, 1950~60년대 포르쉐 911은 지금의 911과는 사뭇 다릅니다. 무엇보다 크기가 지금보다 무척 작았죠. 내로우 (Narrow) 포르쉐라고도 하는데, 좌우 폭도 좁았고, 전후 길이도 짧았죠. 출력 역시 지금의 1/3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커졌고, 출력도 300~400마력은 거뜬합니다. 120마력짜리 901과 비교하면 몇 배에 해당되는 것이죠. 거기에 PDK를 비롯해 수많은 첨단 드라이빙 보조 장치들이 생겨나면서 한계는 훨씬 높아졌고, 드라이버들은 그 장치들 덕분에 예전에는 레이싱 드라이버들이나 감당할 수 있었던 출력의 스포츠카를 자유롭게 끌고 다니죠.
그러나 실제 드라이빙의 즐거움은 꼭 출력에만 있지도 않으며, 큰 차체에서 얻어지는 것도 아닌...
한계를 맞이 했을 때 이를 극복하는 것에서 찾아온다고 봅니다. 물론 모든 드라이버가 그런 것은 아니며 이는 지극히 제 개인의 관점에 불과하기는 합니다만.
*빈티지 포르쉐들은 출력이 지금보다 더 떨어짐에도 오히려 몰기는 더 힘들다고 함.
200마력 이상의 빈티지 포르쉐의 경우 위도우 메이커(Widow Maker)라고 부르기도 했으니... 물론 기술에 의해 인간의 한계가 극복되면서 시장은 더 커지고, 기업의 수익은 늘어나며, 그것이 사회로 재투자되면서 모두에게 이익이 발생하는 선순환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정말 '합리'적인가? 라는 것을 따져본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라는 결론을 내려볼 수 있습니다. (뭐 인간이 꼭 합리만을 따지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요.)
비단 출력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것들이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시대가 발전하면서 기술도 발전하고, 인간의 한계를 인간이 창조한 기술로 극복하는 것은 인류가 발전하고 성장하는데 매우 중요한 원동력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아예 부정할 순 없는 일이지만 필요와 쾌락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과연 지금의 자동차 기술이 정말 필요에 의해서 등장하는 것인지 아니면 더 많은 쾌락을 위해 등장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끝으로 사물의 본질적인 즐거움을 인간 자신의 능력 개선과 한계의 극복 내지는 스스로 행함에서부터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 익은 열매만을 따 먹으려는 마음들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는 의문도 던져 봅니다.
그런 것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은 저 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느날 꽤 트렌디하다는 이발소 (바버샵이라 불러야 한다는군요.ㅎㅎㅎ)에 갔더니 우리 아버지가 쓰셨던 것으로 기억되는 형태의 면도날과 면도 전용 비누 그리고 면도 솔이 아주 비싸게 팔리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우리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이런 도구로 면도를 하셨죠. 겨울에는 양동이에 물을 데워서 거기서 따뜻한 물을 받아 거품을 내고, 도루코 면도칼을 끼워서 쓱쓱 밀어내곤 하셨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도 크면 저렇게 면도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각종 전기면도기부터 일회용 면도기들이 등장하면서 편리하다는 이유로 저런 수동 면도기들이 다들 자취를 감추고 말았죠.
하지만 그게 결국 다시 돌아오고 있는 걸 보면, 스스로 행동하면서 얻는 즐거움을 다시금 누리고자 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만...편리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것을 스스로 쓰레기통에 집어 넣어버리다 보니.. 이제는 원래 가치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죠.
비슷한 사례는 자동차에서는 얼마든지 더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수동 기어가 대표적인 예죠. 물론 오토매틱이 훨씬 더 편리하며 자동차 회사 입장에서도 더 많은 소비자를 확보함과 동시에 더 많은 수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수동을 어느날부터 완벽히 밀어 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수동 기어의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찾는 사람들은 자동기어보다 더 비싼 가격에 수동 기어를 사야 하는 날을 맞이하고 말았죠. 물론 여전히 수동 기어 차들이 나오고는 있으나 이제는 그 존재들 조차 서서히 줄어들었습니다. 수요가 떨어지니 공급도 줄이며, 그러는 사이에 가격도 다 뛰어 버린 거죠.
이제는 더 첨단의 더 편리한 것보다 조금 더 불편하고 예전의 것들을 더 비싸게 주고 사야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물론 전 이걸 나쁘다고만 생각하진 않습니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인류는 끊임없이 이전 발명품들을 새로운 발명품으로 대체하면서 옛것을 도태시키며 발전해 왔으니까요.
하지만 너무 편리한 것에 의존한 나머지 행위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 혹은 본질적인 즐거움을 잊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정말 필요에 의해 도태한 것인가? 아니면 만들어진 시장에 끼워맞춰지느라 억지로 버린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점점 더 큰 차, 큰 집을 원하는 것은 어쩌면...실제로는 그다지 필요도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논리에 의해 변경되고 조작된 시장의 흐름에 억지로 맞춰지는 과정에 생겨난 불필요한 욕구는 아닌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