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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식을 기대하는 다윗
삼하 18:24-27
24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파수꾼이 성 문 위층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홀로 달려오는지라
25 파수꾼이 외쳐 왕께 아뢰매 왕이 이르되 그가 만일 혼자면 그의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그가 점점 가까이 오니라
26 파수꾼이 본즉 한 사람이 또 달려오는지라 파수꾼이 문지기에게 외쳐 이르되 보라 한 사람이 또 혼자 달려온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27 파수꾼이 이르되 내가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하니라
삼하 18:24-27 / 이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다윗은 마하나임의 바깥 성문과 안 성문 사이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는 성벽 위의 파수꾼을 바라볼 수가 있었는데, 파수꾼은 성문의 지붕 위에 설치한 관망대에서 먼 곳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성문을 향하여 급히 달려오는 것을 보자 25) 곧 왕에게 큰소리로 보고하였다. 다윗은 `꼭 한사람만 달려온다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다.' 하고 말하였다. 적진에게 패하여 달려오는 경우에는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오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성문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 26) 파수꾼은 멀리 뒤따라서 달려오는 또 한 사람을 보고 문지기에게 큰소리로 보고하였다. 왕은 이 보고를 받고서도 똑같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으로 판단하였다. 27) 파수꾼이 이제는 먼저 달려오는 사람을 알아보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달려옵니다! 그는 달음질하는 모양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왕이 안심하고 대답하였다. `그는 좋은 사람이니 틀림없이 좋은 소식을 가져올 것이다.' 흉한 소식이라면 요압이 아히마아스에게 시킬 리가 없기 때문이다.
요압이 두 전령을 보냈을 때 다윗은 두 문 사이에 앉아 있었습니다. 여기서 ‘두 문 사이’는 요새화된 성읍의 외문과 내문 사이를 말합니다. 다윗이 집무실에 있지 않고 두 문 사이에 앉아 있었던 것은 그가 전쟁터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두 전령이 온다는 보고를 받음(24-27) 파수꾼으로부터 전령 한 명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승리의 소식을 가져올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만약 전쟁에서 패했다면 패잔병들이 오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파수꾼은 다윗에게 또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여전히 그도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파수꾼은 먼저 오는 전령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다.’고 보고했습니다. 파수꾼은 달음질하는 모습만 보고도 그가 누구인지를 알았으니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전령이 아히마아스라는 말을 듣고는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아히마아스를 ‘좋은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었으며, 그가 가져온 소식도 ‘좋은 소식’으로 확신했습니다.
중대한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
경건한 아버지가 끊임없이 품고 있는 생각은 비록 아비를 배반한 아들이라도 그의 안녕이었습니다. 그 어떠한 것도 아비의 관계를 끊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그림자입니다. 사람들은 시련, 위기, 절박한 고통 속에서 그 결말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모두가 좋은 소식을 기다리지만 매번 두 사람의 전령이 달려옵니다. 하나는 좋은 소식과 다른 하나는 나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압니다.
적 용 : 다윗은 아히마아스를 ‘좋은 사람’으로 여겼기에 그의 입의 말도 ‘좋은 소식’일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당신이 있는 곳에서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까?
승리의 소식은 항상 고통을 수반합니다. 희생과 어려움이 없는 승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신이 겪는 고통으로 승리가 되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많은 고난을 헛되이 받는 것이 됩니다. 승리의 소식을 듣기 원하는 자.. 그는 고통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 자, 고통을 즐길 각오가 되어 있는 자입니다. 힘내십시오. 당신은 결국 최후승리의 승전고를 듣게 될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18:24
때에 다윗 왕이 두 문 사이에 앉았더라 - 여기서 `두 문 사이'란 성의 외문(The outer gate)과 내문(The inner gate) 사이를 의미한다(Keil, Hertzberg, Lange). 이곳은 파숫꾼의 성문루(城門樓)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다. 따라서 다윗 왕은 하루 종일 이곳에 앉아 초조한 마음 으로 전쟁터에서 기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25,26
저가 만일 혼자면 그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 전쟁에서 아군이 패배할 경우에는 여러 명의 패잔병들이 도망쳐 올 것이지만,그렇지 아니하고 승리하였을 경우에는 한 사람이 승리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달려올 것임은 기정 사실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성으로 달려오고 있었으므로 다윗 왕은 이제 승리의 소식알리는 연락병이 오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18:27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 이로 보아 아히마아스는 평소 그 달음질하는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익을 정도로 분주히 뛰어다니는 습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파숫꾼은 대뜸 그 걸음걸이를 보고서도 달려오는 자가 아히마아스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Lange, Keil).
저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 여기서 `좋은 사람'이란 말은 물론 `다윗 왕과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라는 뜻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책무(責務)를 소흘히 하지 않는 사람'이란 의미일 것이다. 즉 다윗은 아히마아스가 전장(戰場)에서 혼자만 도망쳐 올 정도로 비겁하거나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였기에 아히마아스의 입에는 자신들이 기대하던 `좋은 소식', 곧 승전보(勝戰報)가 담겨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히마아스가 이렇게 평가되기까지에는 평상시 그가 주위 사람들에게 참으로 신뢰받을 만한 삶의 모범을 보여 왔으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향기로운 인품은 갑작스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속에서 꾸준히 그 모습을 갖추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 설 교 >
아히마아스의 오판
사무엘하 18:19-30
니체가 ‘신은 죽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니체가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인간이 ‘신은 죽었다’라고 외친다 할지라도 신은 죽지 않습니다. 신에 대해 인간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이 절대적인 분으로 살아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하나님이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든지 아니면 우상을 섬기든지 그 어느 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분명 잘못된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이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 믿음이 거짓된 것이 아니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말씀을 대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생각과 그 마음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아셔야 합니다.
현대 교회가 지극히 엉망이 되버린 모습만을 보여주게 된 것은, 인간이 찾아낸 상대적인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절대적으로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만나지를 못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상대적인 하나님으로부터 탈피하지를 못함으로써 결국 진리를 말하되 진리에서 멀어진 교회로 전락된 모습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과연 우린 어떤 신앙으로 서 있는가를 면밀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압살롬을 죽인 후에 그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9절의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라는 내용을 보면, 후새와 다윗과의 사이에서 연락병의 역할을 하고 있던 아히마아스가 전생에서 승리한 소식을 속히 전하기 위해 요압에게 청을 합니다.
그러나 요압은 아히마아스의 청을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왕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것 때문입니다(20절). 즉 요압은 비록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다윗이 너그럽게 대하라고 당부한 압살롬을 죽인 것으로 인해 승리가 다윗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닐 것임을 미리 짐작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 구스 사람을 소식을 전할 전령으로 다윗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히마아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요압에게 청을 하고 요압은 거듭 이 소식을 인하여는 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며 만류하지만 아히마아스는 기어코 요압의 허락을 얻어 다윗에게 달려갑니다.
아히마아스는 왜 이토록 승리의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고자 했을까요? 그것은 승리의 기쁜 소식을 자신의 입으로 전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겠습니까? 요압이 22절에서 말한 것처럼 다윗에게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함으로 상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압이 아히마아스를 만류한 것은, 압살롬이 죽었기에 승리의 소식이 다윗에게 기쁨이 될 수 없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히마아스는 들길로 달음질 하여 구스 사람보다 먼저 다윗에게 도착하여 승리의 소식을 전합니다. 아히마아스는 다윗에게서 승리의 소식으로 인한 기쁨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승리의 기쁨보다는 압살롬의 안부를 묻습니다.
“왕이 가로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29절)
아히마아스는 압살롬의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숨기고 다만 크게 소동이 있는 것을 보았으나 무슨 일이지 알지 못한다는 말을 합니다. 왜 압살롬의 죽음을 숨겼을까요? 아히마아스는 압살롬이 죽었다는 나쁜 소식을 자신의 입으로 전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즉 아히마아스는 자신에게 유리한 말은 앞서서 하고 유리하지 않은 말은 감추는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히마아스에게는 다윗의 마음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압살롬을 잃은 다윗의 마음이 어떨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다만 승리의 소식을 전하여 다윗을 기쁘게 함으로 상이라도 받아볼까 하는 생각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슬픔이 되고, 분노가 될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은 자신의 입으로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히마아스가 생각지 못한 것은 다윗의 관심은 전쟁의 승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관심은 압살롬의 안위에 있습니다. 압살롬이 죽었다면 전쟁에서 승리했든, 다시 왕위를 찾게 되었든 그것들은 기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히마아스의 생각과 사고는 다윗과 철저히 단절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다윗의 신하라고 하면서, 다윗을 섬긴다고 하면서 다윗과 단절된 생각과 사고를 갖고 있다면 진정한 신하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처럼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단절된 생각과 사고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섬긴다고 큰 소리 치면서도 우리에게서 보여지는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생각과 사고에서 단절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 대한 주님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세상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아니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은 때 우리의 생각과 사고를 가지고 예수님을 기쁘게 해 보겠다고 달음질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부흥되면 예수님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교회 부흥이 예수님께 기쁨이 된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신의 생각을 앞세워 예수님과는 단절된 생각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대한 봉사가 예수님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 역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사도들 또한 그러한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십자가에 앞에 나오는 것이란 사실입니다.
시 40:3-7절을 보면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라는 말씀을 합니다.
여기서 말한 새 노래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경과 하나님을 해석하여 부르는 노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로 인해서 기존의 나의 모든 생각과 사고가 무너지고 새롭게 알게 된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새 노래를 부르는 것에 실패 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변함이 없었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자기 민족을 위한 신으로 해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음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이 고난 받으신 십자가를 보지 못하였음으로 새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에만 관심을 쏟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십자가로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지 못하고, 십자가로 교회를 해석하지 못하고,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해서 결국 아히마아스가 승리를 전하는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은 생각하지도 않고 다만 자기 유익만 꾀하는 수준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말하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생각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말하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생각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우리 역시 아히마아스처럼 예수님을 향해 달려간다고 하면서도 나의 유익을 꾀하는 그런 사람들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함으로써 내게 돌아올 상에만 관심을 두는 그런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예수님이 피흘리신 십자가가 제대로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우리의 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악을 바라보고 십자가에 앞에 나온 신자에게 새 노래는 무엇일까요? 새 노래는 우리 스스로 지어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내가 명상을 하며 성경을 읽다가 새로운 깨우침으로 자진해서 부르게 되는 것이 새 노래가 아닙니다.
다윗은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새 노래는 내 스스로 부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부르게 되는 노래인 것입니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과 사고에 의해 부르게 되는 노래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기존의 그 모든 것이 깨어져야 비로소 부르게 되는 것이 새 노래인 것입니다.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십자가에서 새롭게 해석할 때 새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끝까지 번제와 속죄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 기쁨이 될 새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무엇이 예수님을 기쁘게 할 말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정필도목사 / 삼하 18장 24~27절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의 아들 중에 압살롬은 왕의 자리를 탐내서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려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전쟁에서 다윗의 군대가 승리하고, 압솔롬이 죽게 됩니다. 이때 요압 장군은 전쟁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다윗 왕에게 전하기 위해서 구스 사람을 보내려고 하지만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는 자기가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압은 이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다윗에게는 아들이 죽은 슬픈 소식이니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아히마아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다윗에게 달려갑니다. 아히마아스는 얼마나 달리기를 잘하는지 구스 사람보다 먼저 왕궁에 도착합니다. 이때 성 위에서 망을 보던 파수꾼이 달려오는 사람이 있다고 다윗에게 보고합니다. 두 사람이 달려오는데 다윗은 아히마아스를 금방 알아보고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까? 좋은 사람, 귀한 사람으로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다면 그것은 큰 축복입니다. 모두 그런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많은 일을 하고, 맡기기만 하면 일을 끝내주게 잘하는 사람이 있지만, 심보가 고약하면 좋은 사람이라는 인정은 받지 못합니다. 일은 잘하지만, 인간은 고약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일 잘하는 것, 똑똑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 됨됨이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자기 첩으로 삼으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창 20:7)」라고 아브라함을 선지자요,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는 반드시 죽을 줄 알라고 하시면서 아브라함을 인정해 주십니다. 욥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을 칭찬하시고 인정하십니다. 욥이 신앙이 좋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인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인정하셨습니다.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다윗을 칭찬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 45~47절에 보면,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나아오니,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이렇게 칭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얼마나 진실한 사람인지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을 만나기 전에 그를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진실한지, 거짓된지, 진짜 신자인지 모두 알고 계십니다.
성경에 보면, 다니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총리가 되었는데 그때 느부갓네살 왕은 전 세계를 점령하여 나라가 부강했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잘되고 부강할 때에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교만입니다. 여러분, 돈을 많이 벌 때, 조심하십시오. 출세할 때, 모든 것이 잘될 때, 조심하십시오. 교만하면 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경고를 하셨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서 4장 29~33절을 보면 「29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왕궁 지붕에서 거닐새 30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31이 말이 아직도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이르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32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33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정신병에 걸려서 몸은 사람이지만 정신은 짐승이라 짐승처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을 대신해서 전 세계를 통치하고 있는 다니엘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왕을 잘 돌봐주고, 그 왕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던 것을 깨닫고 회복되었을 때에 다시 통치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가 다시 왕위에 오른 것은 다니엘 덕분인 것입니다. 이런 다니엘 같은 사람이 총리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다니엘은 나라가 바뀌었어도 평생 총리로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니엘과 같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
좋은 사람은 무엇보다도 마음, 성품이 좋은 사람입니다. 다른 것이 모두 좋아도 마음이 고약하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마음입니다. 인물이 좋고, 세상 지위도 있고, 능력이 있어도 마음이 악독하면 악독한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은 평소에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뜻을 품고 살고, 좋은 말을 하고, 좋은 꿈을 꾸고, 좋은 계획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성품이 좋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격과 교양과 신앙은 말을 들어보면 압니다. 그만큼 말이 중요합니다. 말은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 기도 많이 하고, 금식하고, 성경을 많이 보아도, 가만히 보면 쓸데없는 말이 많고, 남의 험담을 하는 사람은 그 경건이 헛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평소에 하는 말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말은 곧 그 사람의 교양, 인격, 신앙을 보여줍니다.
말을 하는 것만 들어보아도 얼마나 타락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남의 허물을 말하기 좋아합니다. 자기는 열 배나 더 허물이 크면서 남의 허물을 들추어 말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때와 장소에 따라 말이 바뀝니다. 어떤 사람은 이간질해서 서로 원수가 되게 합니다. 꼭 마귀를 닮은 사람입니다. 또, 사실을 확인해보지도 않고 말을 그대로 옮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눈으로 보고 분명히 아는 것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의 얘기만 듣고 확인해보지 않고 하는 말은 거짓이 많습니다. 세상의 떠도는 말의 80%는 헛소문입니다. 내가 눈으로 보고 확인하지 않았다면 말을 옮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나쁜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사람의 편에 서서 이해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조건 비난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알지 못하면서 그대로 비난하는 사람은 좋지 못한 사람입니다. 비난받는 사람도 알고 보면 이해가 되고 사정이 있습니다. 한쪽 이야기만 듣고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정말 좋지 못한 버릇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와를 넘어뜨린 뱀 같이 간교한 사람입니다. 말에는 그 사람의 성품이 나타납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좋지 못한 사람인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든 나쁜 소문은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나갑니다. 좋은 사람은 허물을 덮어주고 좋은 소문만 냅니다. 그러나 좋지 못한 사람은 좋은 점은 생각하지 않고 허물만 말해서 나쁜 소문을 퍼뜨립니다.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서 시끄러운 경우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마귀가 혀를 이용해서 교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도구가 혀입니다. 혀를 이용해서 이간질하고 비난과 헛소문이 나게 해서 교회가 시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수영로교회가 36년이 지나는 동안 이렇게 편안한 것은 입을 꼭 다물고 기도만 하기 때문입니다. 입을 꼭 다물고 기도만 하면 마귀가 우리를 사용할 수 없고, 성령께서 모든 것을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닌 지 수십 년이 되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변하지 않습니까?
첫째,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반드시 변화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목사, 장로님이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어떤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하는데 그 교회의 장로님은 진화론자입니다. 그러니 그 교회가 시끄러운 것입니다. 어떤 분은 모태신자로 교회에서 자라서 50세가 넘었는데도 예수님의 이야기를 신화라고 합니다. 이런 분이 직분을 맡았으니 교회가 편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분은 예수 안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정말 예수 믿어서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됩니다.
둘째,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모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회개가 없습니다. 양심에 화인 맞아서 죄책감 없이 못된 짓을 계속하면서 회개를 안 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욕심을 따라 살며 이기심에 눈이 어두워 자기를 위해서만 살고 죄를 짓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삽니다. 그러나 거듭나면 반드시 변화합니다.
셋째,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됩니다. 일본 동경 근처에 자마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미하다 요시오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자마 시의 상공회의소 부회장이며 목재상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신체적으로 완전하지 못해서 다른 회사에서 채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여러 명 채용해서 칭송이 높았는데 신문에 기사가 나서 더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과 21범인 사람이 채용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미하다 씨는 가족과 상의를 한 후 일단 형무소로 찾아가서 그 사람을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형무소장을 만났는데, 그는 고개를 흔들면서 저 사람은 나갔다가도 사흘이면 또 들어오는 절도 상습범이니 상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미하다 씨는 그 범인을 만나 출소하면 채용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출소하는 날 형무소장은 뜻은 대단히 귀하지만 그 사람이 보는 곳에는 절대로 현금을 두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전과자는 출소해서 미하다 씨의 전도로 교회에 나갔는데 세상에서 천시와 학대를 받던 그가 성도들의 사랑을 받고 감동하여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하다 씨의 가장 신임을 받는 금전출납 회계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변하지 않을 것 같아도 주님을 만난 사람은 변합니다.
넷째, 큰 은혜를 받지 못해서입니다. 웬만한 것은 변하는데 어떤 것은 죽어도 안 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은 큰 은혜를 받으면 변합니다. 자수성가한 장로님 한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은 훌륭한 의사이기도 했고, 자존심이 강하고 반듯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에게는 교만함이 있었습니다. 교만하면 은혜를 못 받고 병이 듭니다. 그래서 이 분은 교인들을 보면 못마땅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부족해 보이고 형편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름에 휴가를 내어서 산에 기도하러 갔는데 마침 천막을 치고 부흥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 장소에 갔더니 땀 냄새, 발 냄새가 진동하고 모두 땀을 흘리며 울며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미치광이들이라고 생각하고 혼자 기도하러 바위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새카만 것이 점점 가까이 오며 커지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 자기 얼굴인데 죽어서 썩어가는 냄새가 나는 시체였습니다. 그때 그것이 자신의 모습임을 깨달았습니다. 자기만 똑똑하고, 예수 잘 믿고,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썩은 시체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분은 걸어가면서도 울고, 교회에 가서도 울면서 몇 달 동안 회개하였습니다. 그분은 완전히 변하여서 겸손한 장로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변화된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변화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변화된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에게 참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교회가 부흥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불효자
삼하 18장 24~33절 / 엄기호목사
신록이 짙어가는 계절의 여왕 5월에는 부모와 자녀 그리고 스승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시기입니다. 사실 과거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예절을 갖추며, 스승을 존경하는 것이 사람으로서 행해야 하는 당연한 도리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 당연한 도리가 점점 보기 드문 일이 되어가고 있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효자와는 거리가 먼 불효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압살롬이 그 불효자입니다.
본문 33절에서 우리는 자식을 잃고 애통해 하는 한 아버지의 모습을 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을 지극히 사랑했지만 그 아들은 그에게 눈물이 되었고, 원수가 되었습니다. 다윗 왕은 왕위를 탐내 반역을 꾀한 아들 압살롬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과 수치, 모멸과 치욕을 당했습니다.
아버지 다윗 왕에게 저지른 압살롬의 패역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는 부모 앞에서 형제간의 싸움을 일삼고 결국 형을 죽였으며, 반역을 일으켜 아버지를 왕위에서 내몰고, 아버지의 후궁들을 백주 대낮에 범하는 행위를 보였으며, 아버지를 내쫓은 것도 모자라 죽이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도 압살롬은 죽어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다윗은 반역자이기 전에 아들인 압살롬의 죽음에 애통해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압살롬은 아버지를 반역하고 패역을 저지르고 죽음으로써 아버지의 가슴에 근심과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극심한 불효자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신 5:16). 효도는 인간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비롯해서, 세상에는 효자보다는 불효자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압살롬과 같은 극단적인 불효자는 물론, 겉으로는 효자 같으면서 부모의 속을 썩이는 불효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에 오늘 성경에 나타난 불효자와 효자에 대해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는지 알아보며 피차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부모의 허물을 드러낸 불효자가 있습니다.
창세기 9장 21절에 보면,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던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수치를 드러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노아의 세 아들 중 둘째아들인 함이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조소하면서, 잘못된 허물을 노출시키는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잠시잠깐의 잘못으로 인해 잘못을 범한 아버지의 모습을 본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 주고 마땅히 침묵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이야기를 들은 셈과 야벳은 옷을 취하여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허물을 보지 않고 가려줬습니다.
이 사건으로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으나 함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셈과 야벳은 어떤 축복을 받았습니까?
창세기 9장 26절 이하에 보면 셈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영적인 축복을 받았으며, 야벳은 '창대케'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불효자 함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노아는 함의 미래인 아들 가나안을 저주함으로써(창 9:25)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부모의 허물을 드러내는 불효자는 그 자손에게까지 저주가 임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셈과 야벳처럼 부모를 존경하고 소중히 여길 때, 또 효도하고 순종할 때, 땅에서 잘되고 장수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손도 자자손손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엡 6:1-3).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하며, 부모의 허물을 덮어주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임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성도가 됩시다.
형제끼리 싸우고 질투하는 불효자가 있습니다.
창세기 4장 1절 이하에 보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각기 첫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히 11:4).
이때 가인은 자기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자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질투에 사로잡혀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써 인류의 첫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형이 동생을 죽였으니 결국 가인은 부모인 아담과 하와의 가슴에 못을 박는 불효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받은 불효자 가인은 자신뿐 아니라, 후손들에게까지 저주의 삶을 살게 하고 말았으며 끝내는 이 땅에서 아주 멸절되었습니다.
창세기 25장 34절에도 두 형제의 불화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쌍둥이 형제인, 에서와 야곱이 그 주인공입니다. 야곱은 형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샀고 별미로써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이 일로 그들 형제는 끝내 같이 살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며,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과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족속은 역사 이래로 원수가 되어 계속 전쟁을 일으키는 두 민족이 되었습니다.
부모는 모든 자식들이 골고루 잘되기를 원합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부모 앞에서 형제끼리 다투고 싸우며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은 큰 불효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와 화목해야 합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고 협력하고 화목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요일 4:20), 부모에게는 크게 효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을 사랑함으로 부모님께 효도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효도하는 사람이 됩시다.
요한복음 19장 25절 이하에 보면, 모친 마리아에게 효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가장 큰 고통' 중에서 그 모친 마리아에게 효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숨을 거두시기 전까지 어머니를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멸시와 천대와 수치의 십자가의 고통이 극심한 자리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그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심으로(요 19:26 이하) 물과 피와 진액을 다 쏟으시고 가장 기력이 없는 바로 그 순간에도 효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가난하고 병들고 무기력할 때에는 부모님께 효도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이 예수님과 같은 극한 자리로 밀려 내려갈지라도 효도의 뿌리를 마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님을 향한 효도는 물질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보이는 물질로만 효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진정한 효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친 마리아의 건강과 경제적인 형편, 그리고 생활을 자세히 살펴 그의 제자에게 부탁했듯이 우리도 부모님의 형편을 살펴야 합니다. 효도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죄는 무관심의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님의 마음의 상태와 건강, 형편을 살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외로움과 고백을 살펴드려야 합니다.
효도에는 내일이 없습니다. 오직 바로 '지금'이 있을 뿐입니다.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이 점점 어려운 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핵가족 제도가 보편화되고 부부가 중심이 되어 살게 되면서 부모에게 무관심하면서도 아무 양심의 가책마저 느끼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순간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이 어두운 세대를 본받는 불효자가 되지 말고, 예수님과 효도의 삶을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 부모 공경의 모범자가 되어야겠습니다.
부모님의 허물을 드러내는 함 같은 사람, 형제를 살인하는 가인 같은 사람, 형제를 시기 질투하는 야곱과 같은 사람, 아버지 다윗의 명예를 탐낸 압살롬과 같은 불효자가 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 안에서 부모의 허물을 덮어주었던 셈과 야벳처럼,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했던 이삭처럼, 자기를 미워한 형제들을 사랑했던 요셉처럼, 모친 마리아에게 효도하셨던 예수님처럼 효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며 자자손손 축복받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압살롬의 죽음과 다윗의 통곡
삼하 18:24-33 / 최종운
다윗은 그의 부하들에게 다른 건 몰라도 압살롬의 목숨만은 살려주기를 당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다윗왕의 뜻을 알고 있었음에도 압살롬의 생명을 빼앗고 만다.
다윗의 명령에도 이를 지키지않고 자기감정대로 압살롬을 죽인 요압은 훗날 요압은 결국 솔로몬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자. 아직 이 소식을 듣지 못한 다윗은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24절에 보면 다윗은 두 문 사이에 앉아 있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두문은 마하나님성에 설치된 외문과 내문을 의미한다.
당시 마하나님성은 적이 바깥문을 돌파하더라도 안쪽에서 이를 막아 수비할 수 있도록 이중으로 문이 있었다.
그리고 이 바깥문과 안쪽문 사이에 뜰이 있었는데 다윗은 그곳까지 나와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윗이 집무실이나 거실이나 그가 편히 머무룰 수 있는 곳이 아닌 성문까지 나와 서성였다는 것을 볼 때 얼마나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볼 수 있다.
어떤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까?
물론 다윗의 군대의 승리소식이기도 하겠지만 사실 압살롬의 안부다.
이런 모습은 아마도 부모라면 당연한 모습일 것이다.
미운자식 떡하나 더 준다고, 아무리 압살롬이 아버지를 반역하고, 왕위를 노리고, 아버지 마음에 대못을 밖아도 아들은 아들이다.
이 상황속에서도 먼저 자녀의 안부에 대해서 노심초사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누가 떠오르나?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과도 같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비유로 말씀하실 때 탕자의 비유를 들며 하나님도 아직 거리가 먼데 저 멀리서 탕자를 발견하고 달려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비유로 드신다.
당신의 자녀를 그렇게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이다.
이제 이 소식을 누가 먼저 전하나?
27절을 보면 파수꾼이 멀리서 오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가 가까이 이르렀을때에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다고 다윗에게 말하였다.
다윗은 그 이야기를 듣고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녀오느니라 하였다.
아히마아스를 향하여 ‘좋은 사람이다;
이건 평소 그의 충직한 태도를 보면서 하는 말이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아히마아스는 왕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자였다.
구스사람은 왕에게 팩트만 전하고 오면 된다.
거기에 왕의 슬픈 마음, 아들을 잃은 아픔, 이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아히마아스는 구스사람보다 더 늦게 출발했지만 앞질러 왕에게 도착하여 왕이 받을 충격을 좀 덜어드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제 아히마아스가 도착하여 전한 소식은 물론 다윗의 군대가 승전하였다는 좋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소식보다도 압살롬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29절 -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아히마아스는 다윗이 슬퍼할까 승전의 소식은 전했지만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은 전하지 못하는데 이어서 곧 구스 사람이 도착하게 되었고 구스 사람은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았다며 승전소식을 전한다.
다윗은 아히마아스에게 물었던 것과 같이 구스 사람에게도 압살롬의 안부를 묻는다.
32절 -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다윗은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여전히 젊은 압살롬이라는 말은 내 아이 압살롬이라는 표현으로 반란자가 아니라, 그져 철없는 아들로 바라보는 아버지의 애정이 담긴 모습이다.
구스 사람은 분위기 파악못하고 한다는 말이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을 전하게 된다.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을 들은 다윗은 통곡하며 슬퍼하였다.
33절 -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다윗은 승전의 소식을 들었지만 압살롬의 소식으로 인해 통곡하였다.
압살롬은 당시의 율법으로 볼 때 죽임을 당하기에 마땅한 죄인이었다.
압살롬은 다윗의 생명을 빼앗기 위해 많은 군대를 이끌고 오기도 했다.
가정을 망치고 아버지의 권위를 무참하게 짓밟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생명까지 빼앗기 위해 칼을 들이대던 자식인데... 자식의 죽음을 오히려 슬퍼하며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나았을텐데 하면서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지금 자기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타락하고 방탕한 아들 압살롬을 사랑하고, 애틋하게 각별히 여기고 있다.
사실 우리가 누구를 진실로 사랑할 때는 ‘대신 죽고 싶어' 한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가 병들어 죽어갈 때는, 그런 마음을 가지죠. 내가 대신 아팠으면...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데 실제로 사랑하는 자식 때문에 죽은 분이 계시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러한 부모의 마음으로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 자기에게 반역하고 자기를 왕으로 섬기지도 않고 오히려 왕의 자리에서 쫓아낸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어떻게든 용서하고,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윗 왕을 통해서, 우리는 보게 된다.
우리가 때로는 악하고 때로는 죄인되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사랑을 베푸시는 것이다.
이성적인 논리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이 죽는 것은 사람이 저지른 모든 죄 때문인데도,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를 대신 죽게 하셔서 사람들을 살리셨다.
한없이 용서하고 한없이 사랑하는 마음,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마음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그림자로 보게 된다.
말씀마무리
하나님이 기다리는 사람들... 그가 어떤 죄와 실수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사람일지라도
이러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의지하며 그분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비록 압살롬과 같이 용서 받기 힘든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성문 앞에서 기다리던 다윗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안위를 염려하고 기다리고 계신다.
삼하 18:24-33
삼하 18:24-33 / 제주서부연동교회
1. 줄거리 요약
압살롬의 전사와 패전 소식을 아히마아스와 구스 출신 군사가 경쟁하듯 다윗에게 전달된다. 눈 빠지게 소식을 기다리던 다윗은 파수꾼이 달음질해서 오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몹시 기대한다. 아히마아스는 전승 소식을 전했지만 압살롬의 안부를 묻는 질문에는 얼버무린다. 그러나 구스 출신 병사는 정확히 대답한다. 다윗은 통곡하며 슬퍼한다. 좋은 소식은 어떻게 주고받아야 할까?
2. 교훈
1) 좋은 소식을 전달하려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24-27)
압살롬이 일으킨 반역이 그가 죽음으로 끝났고 또 그를 따르던 백성들도 모두 흩어졌다는 소식을 누군가는 다윗에게 전해야 했다. 다윗은 지금 마하나임 성문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처음부터 제사장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승전소식을 전하고 싶다고 자청했다. 하지만 요압이 말렸다. 다윗에게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도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족이 다른 구스 출신 병사에게 전달하라고 시켰고 출발했는데 아히마아스가 계속 전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 결국 두 사람은 누가 빨리 가는지 경쟁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아히마아스는 정상적인 길이 아닌 지름길로 달려 결국 먼저 도착했다. 상을 받고 싶은 욕심 때문일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미 성안 내부 소식을 그가 전해 다윗은 속히 도망칠 수 있었다. 좋은 소식을 전하려는 열정 때문이었다.
2) 좋은 소식을 지혜롭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28-29)
다윗은 한 병사가 달려온다는 소식만 듣고도 좋은 소식이라 기대했다. 그가 아히마아스라는 얘기를 듣고는 보고도 듣지 않고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전할 것이라 예측한다. 다윗은 그만큼 소식을 간절히 기다려다는 뜻이다. 아히마아스는 다윗에 인사를 한 후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려는 자들을 넘기셨다고 전한다. 나중에 도착한 구스 출신 병사도 동일하게 대답했다. 반란의 주모자가 왕자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세운 왕을 대적한 원수였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을 대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한 셈이다. 그래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다. 하지만 아들의 소식이 궁금해 묻는 다윗에게 크게 소동이 일어났으나 결과는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린다. 다윗의 충격과 상심을 알기 때문이다.
3) 좋은 소식이 항상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니다. (30-33)
요압이 굳이 구스 출신 병사에게 전승 소식과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 다윗에게 전달하라 시킨 것은 좀 더 자유롭기 때문이다. 구스 출신 병사는 이런 저런 고려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한다. 하나님께서 세운 왕을 대적한 모든 원수를 갚았다고 전승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압살롬의 생사를 묻는 질문에 왕을 대적하는 자가 다 그 청년처럼 되길 원한다고 대답했다. 이 말은 죽었다는 뜻이다. 다윗은 너무도 마음이 아파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했다. 분명 반역은 진압 돼야 한다. 아니면 자신의 병사들은 물론 자신도 죽어야 한다. 그러나 죽여야 하는 상대가 자신의 아들이다. 다윗에게 분명 좋은 소식이지만 동시에 슬픈 소식이기도 하다. 항상 좋은 소식이 기쁜 소식은 아니다. 때론 좋은 소식이 아프고 슬픈 소식이기도 하다. 받아들여야 한다.
3. 레마 말씀 – 28절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주셨나이다.”
아히마아스는 이 전쟁을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을 보지 않았다.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 세운 왕을 대적하려는 반란이자 반역으로 보았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이 아닌 하나님을 상대로 반역을 일으켰고 싸운 셈이다. 그러니 그 결과는 명백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셨다. 모든 면에서 다윗이 열세였으나 하나님께는 문제가 되질 않는다. 하나님은 이미 압살롬을 죽이기로 작정하셨다. 교만의 상징인 머리가 나무에 달려 죽게 하셨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다.
4. 기도 (나의 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저희도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속히 전달하려는 열정이 있게 하소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은 아름답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라도 상대방을 배려하며 지혜롭게 전하게 하소서. 동시에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차원에서 문제를 보게 하소서. 좋은 소식이라도 항상 기쁜 것은 아니며 힘들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과 순종
삼하 18:24~33 / js9191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33)"
샬롬! 오늘도 말씀의 은혜로 하루를 여는 모든분들의 삶에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압살롬의 반란이 끝나고, 그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지는 장면입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반란은 실패로 끝나고, 압살롬은 전쟁 중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본문은 그 소식이 성문에 앉아 있던 다윗에게 전해지는 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승리의 소식이면서 동시에 아들을 잃은 비극의 소식이기도 한 이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 앞에 선 한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본문을 통하여 전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자합니다.
첫번째로, 죄는 아주 적고 미미할 때부터 경계하고 바로 잡아야합니다. 다윗은 성문 곁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4절 말씀입니다.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파수꾼이 성 문 위층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홀로 달려오는지라" 다윗은 전쟁의 결과보다 아들의 안부를 더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신하들에게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라고 부탁한 상태였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반란을 일으킨 아들 앞에서도 여전히 아버지였습니다. 파수꾼이 달려오는 사람을 바라보는 이 장면에는, 아들의 생사를 알 수 없어 애타는 다윗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마침내 압살롬의 죽음을 전해 들은 다윗은 깊은 슬픔에 무너집니다.
33절 말씀입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다윗은 왕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들을 잃은 한 아버지였습니다. 그의 통곡에는 아들을 향한 사랑과 함께, 이 모든 비극의 뿌리를 돌아보는 회한이 담겨 있었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은 다윗 자신의 죄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징계이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은 죄를 바로 잡아야 시기를 놓친 결과 압살롬의 죽음과 가족의 파멸로 나타났습니다. 죄는 아주 적고 미미할 때부터 경계하고 바로 잡아야 함을 잊지 마시기바랍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동시에 붙드시는 손길이 있음을 기억하시기바랍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앞살롬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나온 길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손이 그 역사 가운데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덮어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윗을 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징계를 내리시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자기 백성의 왕으로 붙들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동시에 붙드시는 손길입니다. 다윗은 그 손길 아래에서 무너지되, 무너져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아픔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 아픔 가운데 어떤 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원망하며 등을 돌릴 수도 있고, 아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앞에 엎드릴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후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혹시 지금 감당하기 힘든 무게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우십니까.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왕이시며,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아픔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신뢰가 우리를 무너짐에서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오늘 하루도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앞에 순종함으로 서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을 통해 아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다윗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에 이해되지 않는 고통이 찾아올 때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손길이 그 가운데 있음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징계 속에서도 우리를 붙드시는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순종함으로 엎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체성, 우리는 나는 나의 삶에 이해되지 않는 고통이 찾아올 때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님의 손길이 그 가운데 있음을 신뢰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자식을 향한 사랑
삼하 18장 24~33절 / 강용규목사
실존주의 철학자 죄렌 키에르케고르는 “사람은 고슴도치와 비슷한 존재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먼저 보호하고, 위하는 행동을 취합니다. 이러한 자신을 위하는 이기적인 행동은 고슴도치의 털처럼 날카로운 가시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붙어 있으면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므로 추워도 붙지 못하고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것이 고슴도치입니다. 이러한 고슴도치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을 희생하며 피를 흘린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십니다.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니며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은 못 들은 척 여인의 말을 무시합니다. 여인이 다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치자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곳에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이방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계속해서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주인의 자녀들에게 줄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말하며 여인의 간청을 거절합니다.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무시를 당하면서도 계속 간청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 귀신들린 자신의 딸을 고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희생당하고, 자존심이 무너지고, 감정이 상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예수님께 매달린 것은 귀신 들린 딸을 고치실 분이 예수님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애절한 사랑을 읽을 수 있습니다.
본문 사무엘하 18장에는 압살롬이 나옵니다. 압살롬은 자기 형 암논을 죽입니다. 압살롬은 화가 난 아버지의 낯을 피해 그술이라는 곳으로 도망을 칩니다. 몇 년이 지난 후 아버지의 마음이 누그러지자 압살롬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재판관이 됩니다. 압살롬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버지 다윗에게 향해 있는 마음을 빼앗기 위해서 앞장서서 아버지를 비난하는 말과 행동을 할 뿐만 아니라 악한 자들에게 형벌을 낮추는 방법으로 마음을 삽니다. 그래서 성경은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 했다.”고 말씀합니다. 압살롬을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고 힘이 커지자 그는 아버지를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압살롬이 아버지를 쫓아 맨발로 왕궁을 나와 기드론 골짜기와 감람산을 올라갔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쫓는 패역한 아들을 다윗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본문은 말씀합니다. 다윗은 전쟁에 나가기 전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 장군을 불러 “장군들이여, 오늘 전쟁에 나가 싸울 때 내 아들 압살롬을 만나거든 너그럽게 대하시오.” 모든 사람들이 들릴 정도로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집에 있지 못하고 성문 앞에 나가 패역한 아들이지만 압살롬이 건강하게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그 모습은 흡사 누가복음 15장에 집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그러나 패역한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을 자신의 후궁으로 거느리는 행태를 부립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무서운 죄는 첫째는 우상숭배요. 둘째는 살인하는 것이요, 셋째는 부모를 해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죄는 모두 죽이라고 말할 정도로 엄한 죄입니다. 이러한 법에 따르면 압살롬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용서한 아버지를 대적하고, 아버지의 후궁들을 거느리고,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이겠다는 아들은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다윗은 이런 아들 압살롬을 용서해 줍니다. 다윗이 패역한 아들 압살롬을 용서하는 사랑의 모습에서 우리도 부모님으로부터 이러한 용서와 사랑을 받으며 오늘 이 자리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 압살롬이 죽자 다윗은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죽지 네가 죽냐” 며 통곡합니다. 패역한 아들이 죽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주님께로부터 은혜를 받고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칠 때 주님은 그러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죽이면서까지 죽을 목숨인 우리를 살리는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듯, 다윗은 아들 압살롬을 사랑합니다.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어느 아들이 어머니를 버렸습니다. 어머니는 보따리 하나를 남긴 채 양로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보따리 안에는 봉투가 들어있었는데, 그 봉투 안에는 5백만원과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종이에는 “이 돈을 내 아들에게 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자신을 버린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어머니의 사랑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듯, 우리가 부모님의 은혜를 알고 효도하면 자식도 그대로 따라 배웁니다. 반대로 우리가 효도하지 않으면서 자식에게 효도하라고 말하면 자식은 속으로 코웃음을 칩니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들이 어머니를 고려장시키기 위해 지게에 어머니를 태우고 갑니다. 그 뒤를 아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깊은 산속에 어머니를 두고 가는데 아들이 지게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야 이놈아 지게는 왜 지고 가냐?”고 묻자 아들이 하는 말이 “이 다음에 아버지 여기에 모시려고.” 했다고 합니다.
홀어머니가 혼자 온갖 험한 일을 하면서 아들을 대학에 입학시켰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아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며 열심히 공부해 대학 4년 내내 1등을 했고,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졸업식 날 총장은 아들의 목에 금메달을 달아주었습니다. 금메달을 목에 건 아들은 귀퉁이에 허름한 옷을 입은 어머니에게 걸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목에 걸려있는 금메달을 어머니 목에 걸어 드리며 “이 금메달을 받을 분은 바로 어머니입니다.” 라고 말했고, 어머니는 아무 말도 안하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려 내렸습니다. 이 아들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는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 이러한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