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장닭 공화국
- 이 종 수 -
새벽녘 목청을 다듬으며
칠성무당벌레마냥 높은 곳에 오른다
누구나 아침 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까
잠깐 벼슬을 쭈뼛거리다가
길게 한 소리 뽑는다
높은 곳에 올라 보니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가 거느린 암탉들처럼 멍청해 보인다
폐계 천원 폐계 천원 한다는 양계장 바람 소리가 들리는듯
튀김닭으로 팔려 가고 닭도리탕감으로 팔려 가는
저 수백 단으로 쌓인 유통의 나라를 굽어보며
그레꼬레망 선수처럼 발바닥을 닦아본다
아침이 온다고 다 같은 아침이 아닌데
아침만 질러놓고 보면 이 나라 모두
아침 빗자루질 같을 거라는 막연한 몽상을 하며
지난 밤 닭장 횟대에서 자다
쥐들에게 뜯겨 살이 다 드러난 암탉들을
거느리고 한껏 목을 꼿꼿이 세운다
양계장에서 팔려온 암탉들 끌고 운동도 시켜야지
그래야 살이 맛있어지지
자, 이제 휴게소로 나가 볼까
존경하는 주인 아저씨,
벌써 일어나 나를 보러 오는걸 잘 봐
내가 얼마나 신임받는 줄
조금 있다가 보면 알게 될 거야
몸 생각한다고 촌닭, 토종닭 아니면 먹질 않는
사람들의 머리속이나마 꽉 채워주려면
꼭 내 연기가 필요하지 단칼에 쓰러져 죽는 시늉하는
일품 연기를, 연기가 끝나면 양계장 닭으로 바꿔치기 하는
아저씨도 일품이지
어차피 못쓰는 날개죽지 조금 아픈들 대수로냐
휴게소 가든 벼슬살이 이만하면 좀 좋아
휴게소 가든 닭도리탕 정치 하는 맛에 세월 가는 줄 모르는 재미
동아일보
자모의 검
- 여 정 -
혹자가 말하길, 입 속은 자객들의 은신처란다. 그들이 즐겨쓰는 무기는
「영혼을 베는 보검」으로 전해오는 자모의 검이란다. 을씨년스런 날이
면 자객들은 검은 말을 타고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어느 심장을 향해 힘차
게 달려간단다. 천지를 울리는 말 발굽소리 어느 귓가에 닿으면 그들은
어김없이 이성의 칼집을 벗어던지고 자모의 검을 빼어든단다. 바람을 가
르는 소리 한 영혼의 목을 뎅거덩 자르고나면 자객들은 섬뜩한 미소로 조
의금을 전하고 또 다른 심장을 향해 말 달려간단다. 그날에 귀머거리는
복 있을진저, 자객들의 불문율에 있는 「귀머거리의 목은 칠 수 없다」는
조항에 따름이라.
혹자가 말하길, 자모의 검에 찔린 사람들은 귀부터 썩어간단다. 귀가
썩고 뇌가 썩고 심장이 썩고, 썩고 썩어 생긴 가슴의 커다란 구멍으로 혹
한기의 바람이 불어대고 수많은 까마귀 떼의 날갯짓이 장대비처럼 내린단
다. 그 부리에 생살이 뜯기고 새하얀 뼈를 갉히며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
져버린단다. 그날에 수다쟁이는 화 있을진저, 더 많은 까마귀 떼를 불러
들임이라.
자객들의 말 발굽소리 요란한 날이면 너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두손
으로 귀부터 틀어막고 묵직한 바위 뒤에 숨어 최대한 몸을 낮춰라. 그리
하면 자객들이 탄 검은 말들이 너희를 비켜가리니, 자모의 검일망정 결코
너희를 해(害)치 못하리라. 귀 있는 자들은 들어라. 이 말로 더불어 너
희가 그날에 「복 받았다」일컬음을 받을지니, 부디 그날에 너희에게 복
있을진저, 혹자의 말이니라.
문화일보
대 숲이 있는 작은 마을
- 김 명 국 -
시리도록 투명한 햇살이다 눈길 닿는 곳마다 깨진 사금파리들이 은빛의
언어가 되고 아침 해가 떠서 저녁 해가 질 때까지 강물은 잔잔하다 아침
마당에 빨래줄처럼 늘어진 햇살을 칭칭 감아 올리던 나팔꽃눈들이 보랏
빛 물방울을 터뜨려 놓았다 풀끝에 이슬을 손톱으로 톡톡 건드려 밤새 오
므렸던 채송화꽃송이를 부끄럽게 벌리면서 고요한 하루가 시작된다 봉숭
아꽃들이 줄을 지어 늘어진 마당 한 귀퉁이 민들레가 피었던 산밑 방죽에
서부터 들판 안개가 살며시 밀려나간다 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
쉬곤 한다 울창한 수목들로 빽빽하게 들어찬 숲 오솔길 잎이 푸른 한그루
상수리나무가 되고픈 시절이 있었다 가지를 떠난 새들이 어디론가 휙 날
아갔다 날아오기도 하면서 풍성한 아침 햇살을 풀어 놓은 채 개울물이 낮
은 돌그림자를 건드려 작은 여울을 이루는 것을 보았다 물흐름 소리가 좋
아, 조용히 지느러미를 너울거리며 고기떼가 납작한 돌틈 나뭇잎새 사이
로 날래게 몸을 감춰 숨어드는 것을 보았다 나는 고요한 강 언덕까지 나
가본다 나무등짐 하나 가득히 지고 노루목께를 내려오는 산나무꾼처럼
털 끝에 이슬이 묻은, 검은 까마귀떼 깃털이 떨어져 있는 외길목 당산나무
그림자에 탑처럼 선다 줍지 않은 논바닥 진흙땅에 박힌 이삭과도 같이
하늘 우물에 빠뜨린 눈썹 몇 개쯤 아득히 잊고 갈수록 빛이 나는 저 억새
풀밭에 억새꽃이라든가 갈대가 바람에 몸을 꺾는 들판 후두두 잎턴 싸리
나무가 기러기 울음에 젖을 때 마음의 장작에 불씨 몇줌 꺼내 노을을 지피
고 감나무, 그 붉디 붉은 전설이 까치밥으로 영근 대숲 마을에서 나는 동
면하는 산짐승마냥 긴 겨울을 나고 이른 봄의 햇살로 다시 태어나리라.
경향신문
나무에는 꽃이 피고
- 송 주 성 -
언젠가 아주 잠깐 살았던 봉천 몇 동이더라 집 보러 아니 방 보러 가던
길에서 나는 얼마나 주저앉았는지 모른다 택시기사는 여기라 하고 가겟집
주인은 돌아서 두 정거장 더 내려가라 하고 하교길 아이한테 물어보면 자기
도 이사온 지 얼마 안돼 모른다고 하던
봉천동 같은
봉천동 같은
여기저기 시장만 해도 닷새장 구포장보담 몇 배나 크던 그 어디어디에
주인집 여자는 암호 같은 단어들로 정약국 돌아 쌀집 옆으로 어떻게 어떻게
오라고 하고
고무줄 뛰던 계집애들은 이쪽인가 저쪽인가 하고 이리갔다 저리갔다 어
디가 어딘지도 모를 골목 지나 공터에 섰을 때 그 막막한 한가운데
봉천동 같은
봉천동 같은
나는 생각했다 그때 마치 숨겨져오던 진실을 발견하듯 어쩌면 봉천동 사
람들은 제 사는 곳이 어디인지 정말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소스라치게
생각했었던 봉천동 같은
여기
고장난 우주 정거장 미르호의 창 밖 같은
문과대학 2층 복도의 창 밖을 내다보면
누구에게 길을 물어서 집을 찾아왔는지
나무에는 꽃이 대문을 열고 쑥 들어온다
중앙일보
3월
-조윤희-
벚나무 검은 껍질을 뚫고
갓 태어난 젖빛 꽃망울들 따뜻하다 햇살에 안겨 배냇잠 자는 모습 보면
나는 문득 대중 목욕탕이 그리워진다 뽀오얀 수증기 속에 스스럼없이 발
가벗은 여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서로서로 등도 밀어주고 요구르트도 나누
어 마시며 볼록하거나 이미 홀쭉해진 젖가슴이거나 엉덩이거나 검은 음모
(陰毛)에 덮여 있는 그 위대한 생산의 집들을 보고 싶다 그리고 해가 완
전히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마을 시장 구석 자리에서 날마다 생선을파는
생선 비린내보다 니코틴 내가 더 지독한 늙은 여자의 물간 생선을 떨이해
주고 싶다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툭툭 좌판을 털면 울컥 일어나는 젖비
린내 아 - 어머니 어두운 마루에 허겁지겁 행상 보따리를 내려놓고 퉁퉁
불어 푸릇푸릇 핏줄이 불거진 젖을 물리시던 어머니 3월 구석구석마다
젖내가…… 어머니 그립다
한국일보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 손 택 수 -
연탄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보, 고, 싶, 다, 보, 고, 싶, 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싶었다 불의 뿌리에 닿고 싶은
하루 하루 햇빛이 묻어 놓고 간 온기라도 여직 남아 있다는 듯
눈사람이 되어, 눈사람이 되어 만질 수 있는 희망이란 벽돌 속에
꿈을 수혈하는 일
만져도 녹지 않는, 꺼지지 않는 불을
새벽이 오도록 빈 벽돌 속에 시를 점화하며, 수신자 불명의
편지만 켜켜이 쌓여가던 세월, 그 아이는 떠나고 벽돌집도 이내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가슴 속 노을 한 채 지워지지 않는다 내
구워 낸 불들 싸늘히 잠들고 비록 힘없이 깨어지곤 하였지만
눈 내리는 황금빛 둥지 속으로, 새 한 마리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