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기 93년 9월 16일 화요공부방
□이현도 교우님 강연
□김제원 교무님 설법
이번 추석에 마음들을 어떻게 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경계가 있었겠죠. 그 경계에 나를 비추고 나를 비우고 주위에 은혜가 되도록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상이 나와서 내 마음이 상해서 비교심 느껴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심결을 공부하는 사람은 마음의 실체를 돈오하여, 그 마음을 놓지 않고,
빼앗기지 않고 그 마음을 오롯하게 간직할 줄 알고, 그 마음을 회복할 줄 알고,
그 마음을 찾아서 활용하려고 노력하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과거의 습관, 상식, 과거의 것으로 해결하지 않고 내 본래의 마음을 놓치지 않고 추석을 보내셨다면
수심결을 공부한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한마음을 챙겨서 나를 놓으면 그것이 대덕이요
그것이 부처님의 본래 마음을 쓴 것이다.
23장 참 답게 닦아가는 것.
雖有後修나 已先頓悟妄念이 本空하고 心性이 本淨일새 於惡에 斷호대 斷而無斷하고 於善에 修호대 修而無修하나니 此乃眞修眞斷矣라 故로 云雖備修萬行이나 唯以無念으로 爲宗이라하 시고 圭峰이 總判先悟後修之義云호대 頓悟此性이 元無煩惱하고 無漏智性이 本自具足함이 與 佛無殊하야 依此而修者는 是名最上乘禪이며 亦名如來淸淨禪也라 若能念念修習하면 自然漸得 百千三昧하리니 達摩門下에 展轉相傳者- 是此禪也라하니 則頓悟漸修之義가 如車二輪하야 闕 一不可니라
수유후수나. 비록 닦음이 있으나
已先頓悟妄念이 本空하고 먼저 돈오를 해서 망념이 본공함을 돈오 했다.
心性이 本淨일새 그것을 돈오했다. 망념이 본공이다. 망념이 본래 고요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번뇌 망상이 뿌리가 있어서 나온 것이 아니라, 뿌리가 없게 나온 것입니다.
내 성품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일어난 마음에 따라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인 양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에고요, 집착이요, 상이요, 그것이 보통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이것을 잘하고 못한다는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잘한다거나 못한다는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잘하고 못하고가 어디에 있느냐. 다 길들였을 뿐입니다. 잘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엇을 안 하는 것도 안하려는 것에 길들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心性이 本淨일새, 성품은 본래 깨끗하다.
여기 보시기 보세요 (수표를 꺼내들으시면서)
0이 몇 개인 것 같은가요
이 돈이 나는 싫다라고 하는 사람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이 돈을 갖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보세요. (이 돈을 구기신 후에.. )
그래도 이 돈을 가지고 싶다는 사람은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돈이 아무리 더럽혀지고 오그라지고 발로 밟아도 이 돈의 가치는 변화가 없습니다.
심성이 본정이다 하는 말은 아무리 내가 죄를 지었고,
얼굴이 못났고 주위에서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한다 할지라도 내 본래 가치는 부처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더러워도 내 가치는 변함이 없듯이, 내 심성은 본정이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깨끗하지 않으니까 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공부를 못했으니까, 가난하니까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못나고 죄업을 지었다 할지라도 내 본래의 성품은 본자구족이요 원만구족 지공무사인 것입니다.
그랬을 때 비교 없는, 끝까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가치, 그 믿음를 알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於惡에 斷호대 斷而無斷하고. 악을 끊되 끊었다는 생각이 없고
於善에 修호대 修而無修하나니 선을 닦되 선을 행하였다는 생각이 없으니
此乃眞修眞斷矣라 이것이 바로 참다운 닦음이며 참다운 끊음이로다
복을 지을 때 내가 지었다, 하는 것은 지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라는 말이 나오면 아직 나 아닌 큰 세계에 합일하지 못한 것입니다.
범부의 세계는 끝까지 “내가”가 들어가 있습니다.
나는 중시하는 세계입니다.
“내가”가 있는 사람은 끊으면 끊었다는 생각이 있다. 지혜를 닦아도 자기가 닦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보시를 해도 무상보시를 못합니다. 지혜를 닦아도 내가 닦은바 있는 닦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닦으면 교만해 지고 못 닦은 사람은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실행을 못하면 자기를 학대하며. 그리고 잘한 사람을 존경하게됩니다.
내 안의 부처를 발견하지 못하니 자꾸 외부에서 찾는 것입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하면 그곳을 향해서 마구 달려갑니다.
無念而斷, 끊되 무념으로 끊어라!
無念而修, 닦되 무념으로 닦아라!
이것을 진공묘유라고 하며. 공적영지라고 합니다
우리가 수행한다는 것은 공적영지요 진공묘유의 수행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칫 잘못하여 수행을 악을 멀리하고 선을 쌓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진공한데 바탕해서 선도 쌓고 악을 멀리하여야지,
진공은 빠지고 공적을 바탕해서 닦고 쌓는 것은 잘못하면 또 하나의 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은 복대로 죄는 죄대로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오를 했다는 것은 내 참 실체가 본적이요, 진공이요 공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비로소 그 때에 그 사람이 자성반조를 할 수 있게됩니다. 공부하는 길을 이제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성을 반조하여 공부하는 길이 그 때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비로소 선을 닦되 지선의 경지에서 선을 닦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순자는 성악설, 맹자는 성선설을 이야기하셨다고 합니다.
두 분 다 맞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그러하지 아니합니까?
우리도 기분좋을 떄는 본래 마음이 나와서 싹 그러고
기분이 나쁠 때는 뻘거지고 집어 던지고, 앞이 안 보이죠.
그러나 그것이 동할 때는 그러한 것이요, 본래는 무선무악입니다.
그 아이가 꿈 없이 잠들 때는 어떠합니까. 한마음 기분 좋아보세요. 효자효녀입니다.
본래 성품이 정할 때는 무선무악(無善無惡)이요,
동할 때는 능선능악(能善能惡) 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무선무악(無善無惡)만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능선능악만을 바라보는데
우리는 둘 다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심성이 본정이다라는 것은 우리의 성품은 무선무악해서 그것을 지선(至善)이라고 한다.
이 세상 사람들이 복을 쌓아도 결국은 그 쌓으면 쌓은대로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근원을 알지 못하고 쌓는 것은 언젠가는 오히려 그것이 병이 되기도 하고 죄업의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되 행했다는 생각이 없고, 악을 행하되 끊었다는 생각이 없는, 그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선을 행한다, 악을 끊는다라는 분별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이 나오기 전 성품자리로 가서 거기에서 비추어서 그 자리에서 녹여버리는 것입니다.
故로 云雖備修萬行이나
만행은 뭔가요? 선을 닦고, 악을 묵고, 기도를 하고 보시를 하고 혜시를 하고 수행을 한다 고행을 한다 불공을 한다는 것이 만행입니다.
唯以無念으로 爲宗이라하시고 무념으로써 그것을 종지를 삼아야 한다.
아무리 참회를 하고 불공을 하고 희사를 하고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념으로써 종을 삼아야 합니다. 여기서 염(念)자는 망자가 생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만가지 선을 갖추어 닦는다고 하나 오직 이 무념으로 머리를 삼는다” 하셨다.
여기에서 망념된 생각이 없는 그것이 바로 종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망념된 생각은 무엇인가. 선악에 집착된 마음이요 번뇌 망상이다, 때로는 계교심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언제부터 나인가, 나는 어떤 것이 나인가?
그래서 소크라테스께서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하셨잖아요.
너 자신을 모르면 육신이 자기인 줄을 알고 그것에 만족하고 때로는 그것을 미워하고
상대의 세계에서 시소를 타면서 끝없는 갈증과 아픔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중생들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교무님, 기쁨 슬픔이 없다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대상은 끝없는 갈등과 기쁨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념으로써 종을 삼은 가운데 기쁨 슬픔이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속에서 해탈이 나올 수 있고, 조화와 은덕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념으로써 종을 삼지 않으면 항상 나라는 것이 주가 되어서, 잘난 내가 못난 너를 도와준다,
있는 내가 없는 너 불쌍하니깐 도와준다, 아는 내가 모르는 너 가르쳐준다 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상대가 기분 나빠 하는 것입니다.
차별심이 없는 무념, 차별심 없는 평등한 성품 본래 자리에서 만나주어야 상대가 베품도 받을 수 있고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념이 상덕입니다.
여기에서 무념이란 무념무상(無念無想) 을 말합니다.
나라는 상이 없는 가운데 거짓이 없는 가운데, 상대적 세계를 뛰어넘은 그 세계를 바탕한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성리품 9장에 그러셨습니다.
종교문에서 성리를 밝힌바가 없으면 원만한 도가 아닌, 사도다.
성리는 모든 법의 조종이 되고, 모든 이치의 바탕이 된다. 바로 어디에서 나오는가.
본래의 마음 자리에서 우주가 건설되고, 결국에는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은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通萬法 明一心이라,
만법을 통하여다가 한 마음 밝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원정각을 한다고 한 것입니다.
수많은 시비와 분별세계를 통해서 내 본래 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분별로써 분별을 해결하지 말고, 내 안의 본래 마음 자리를 밝히면 어느새 그 분별은 녹아나고 해결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며 시간과 단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힘든 경계가 오면 세월에 흘러서 잊고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슷한 경계가 나오면 더 크게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경계가 피했고 다른 것이 갔다왔을 뿐입니다.
그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고서 상대를 고치려고 하거나, 아니면 스트레스를 받으니깐 자거나,
한잔하거나, 깊은 산에 들어가서 경계를 피해서 오롯하게 산천과 살아보고자 합니다.
근원을 변화시킬 줄 모르고 외적 환경을 변화시키려고 하니 백날 만행을 하여도 근원적 해결책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성품을 밝혀서 성품을 깨닫고 기르고 성품을 잘 활용해 쓰는 것이 이 세상의 모든 공부의 조합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리는 꾸어서라도 보아야 한다고 대산종사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1. 목적/서원/신심 반조
2. 교법/인과 반조
3. 자성/회광 반조
지금 종교가에서 공부하는 것을 몰아서 말하였습니다. (기독교이든 어디든 관계없이)
1. 목적/서원 (誓願) /신심 반조
세상 사람들은 똑같습니다. 세상사람들은 무엇을 반조하느냐? 나는 반드시 돈을 벌겠다.
나는 반드시 고시를 패스하겠다. 나는 반드시 이러이러한 것을 정하겠다.
이런 꿈을 이루겠다는 어떤 목표나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계속 되새김질을 합니다. 그래서 강력한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을 불교나 원불교에서는 서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맹서할 서, 원할 원입니다.
외서 내원이라고 한다. 밖으로 진리와 스승 전에 맹서하고, 내 안으로 깊이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이 서원을 반조한다. 이것을 성불제중과 제생의세의 서원이라고 합니다.
내가 반드시 부처를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간절한 서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종교가에 힘이 없습니다. 여기에 온 목적이 뭐냐?
그래서 그 서원을 일원상서원, 진리의 서원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신심을 강조합니다.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2. 교법/인과 반조
교법반조다 인과반조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이 믿음에 바탕해서 인과에 대조해 나가는 것입니다.
법문에 이렇게 하라고 했지 하면서 대조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도 상당한 힘이 있습니다.
아까 성문은 교법에서 힘을 얻는 것입니다. 자성에서 힘을 얻지 못합니다.
3, 자성/회광반조
돈오를 한 사람은 자성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성을 정을 세우자라고 한 것입니다. 그냥 정을 세운 것이 아닙니다.
자성의 정혜계를 세우자는 것은 본래의 자리에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자성의 정과 혜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불교는 자성의 정혜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정혜계를 세우는 것입니다.
끊음이 있는 끊음이요 닦음 있는 닦음이다. 그것은 정혜계입니다. 자성 정혜계가 아닙니다.
자성정혜계라는 것은 끊음이 없는 끊음이요 닦음이 없는 닦음이라는 것입니다.
圭峰이 總判先悟後修之義云호대 규봉선사가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것을 총 정리하여 말씀하시기를
頓悟此性이 元無煩惱하고 ‘성품이 본래 번뇌가 없고
無漏智性이 本自具足함이
與佛無殊하야, 어떤 부처님과 더불어 다름이 없음을 깨달아 그에 표준 하여 닦아가는 것은
아무리 찌그러진 돈도 본래 가치를 달하여도 본래 가치는 변함이 없는 것이니다.
누구나 그런 것입니다. 여기에 온 어떤 사람도 사회에 악을 저지른 사람도 상관 없습니다.
누구나 이미 본좌구족이다
과거의 무시습관에 의해서 내 뜻대로 덜 되긴 합니다.
그러나 한 마음 더 먹으면 된 것입니다.
依此而修者는 닦은 뒤에 닦는 자는
是名最上乘禪이며 돈오에 바탕한 닦음입니다.
돈오에 바탕한다는 것은 마음의 원리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무념으로 종을 삼아서 어떤 일을 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亦名如來淸淨禪也라 若能念念修習하면, 닦아 익힌 습관을 길들여 나갈거 같으면
自然漸得百千三昧하리니 스스로 점득하여 백천삼매라는 것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達摩門下에 展轉相傳者 전전상전자는 누구입니까?
是此禪也라하니 그것이 바로 쭉이어진 성품이다. 선이다라는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마음이다라는 것입니다.
돈오와 점수가 아울러 졌을때 비로소 백천삼매를 얻어지는 것입니다.
선정에 든 것을 돈오다. 지혜에 행하는 것을 점수다라고 한 것입니다.
진리의 원리는 대소유무입니다.
아무리 견성을 해서 대자리를 알았다고 해도 소자리와 유무자리를 모른다면 그것은 다 안 것이 아닙니다.
則頓悟漸修之義가 그래서 돈오와 점수의 뜻,
如車二輪하야 수레와 두 바퀴와 같아서
闕一不可니라
돈오가 없어도 안되고 점수가 없어도 안됩니다.
돈오를 해야지 성품의 근본 이치를 알게 되고 점수를 통해서 습관을 정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알았던 것을 점수를 통해서 활용하는 것입니다.
돈오와 점수 관계는 하나인 관계입니다.
돈오를 바탕해서 점수가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돈오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대종사님은 돈오만 하고 점수를 하지 않는 것을 납도끼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도끼가 이쁩니다. 실지 경계가 와서 도끼를 휘둘러보세요. 어떻게 될까요?
돈오를 하면 마음자리가 이렇구나 하고 압니다. 하지만 습관과 업에 의해서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점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비로소 내가 알았던 성품을 단련할 수 있고 활용할 수 있고 비로소 그 성품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 점수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점수를 할라고해도 성품의 원리를 알지 못하면 점수를 한다는 것이 상이 달린 것이다. 돈오 점수는 어떻게 보면 사람 공부입니다.
24장 번뇌가 성품에서 나왔다.
或者는 不知善惡性空하고 堅坐不動하야 捺伏身心을 如石壓草하야 以爲修心하나니 是大惑矣로다 故로 云하사대 聲聞은 心心斷惑호대 能斷之心이 是賊이라하시니 但諦觀殺盜(음)妄이 從性而起 하면 起卽無起라 當處便寂이니 何須更斷이리오 所以로 云하사대 不(파)念起하고 唯恐覺遲라하며 叉云念起卽覺이라 覺之卽無라하시니 故로 悟人分上에는 雖有客塵煩惱나 俱成醍(호)니 但照惑無 本하면 空華三界가 如風券煙하고 幻化六塵이 如湯消氷하리라
或者는 어떤 사람은
不知善惡性空하고 성품에는 선과 악이 공해 버렸다는 것을 굳이 알지 못하고
堅坐不動하야 捺伏身心을 如石壓草하야 以爲修心하나니 是大惑矣로다
성품에는 본래 없다는 것, 선악이 끊어진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형식만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복신심입니다.
이런 사람은 누가 밥을 몇 번 굶었다거나,
잠을 몇일 안잤다는 사람들을 좋아해서 쫒아다니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밥을 안먹고 산다고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밥그릇이 꽉차있었습니다.
그것이 이치가 아니잖아요.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것에 속아 넘어갑니다.
그 근간의 초는 번뇌망상입니다. 번뇌망상이 일어난 것을 꽉 눌러 놓는 것입니다.
여석압초라는 것은 일어나는 마음을 일어나지마! 하면서 눌러 놓는 것입니다.
사은의 은혜 속에서 놓고 놓고 놓다보면 어느새 망념이 사라진지 모르고 놓는 것입니다.
망념이 망념인줄만 알면되는 것입니다.
망념을 없앨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석압초라는 것은 그래서 마음의 원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본래 마음은 텅비어서 후덕한 것이 우리의 본래 마음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사람이냐? 비지는 비지도 않고 어둡고 이럴 때 사람들은 나를 죄인이다.
그래서 원죄설이 득실대는 것입니다.
일원상 서원문에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이라고 나오는 것은
본래는 부처님이지만 경계를 대하면서 회복하지 못한 중생이라는 것입니다.
원래는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석압초, 선악업보의 차이를 차별이 있는 차별로 대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꾸려고 합니다. 산으로 떠납니다. 그것은 아직 먼 것입니다.
무엇을 보아야 하나요?
그 마음이 어디로부터 나왔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주위 환경을 보아서 마음을 쥐어잡고 뜯어서는 안됩니다.
저번에 한번 말씀 드렸습니다.
남악혜향스승님과 그 밑에 마조도일이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마조가 상당한 수행심이 있어서 열심히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악선사가 보니 좌선이라는 것은 그 마음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지,
좌선 그 자체로 본래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냐고 도일에게 묻자, 부처를 이룬다고 하니깐 기왓장을 스승님이 갈았습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냐고 도일이 묻자, 거울을 만든다고 스승님이 대답하였습니다.
남악회향선사가 말을 채찍질을 해야하냐? 수레를 채찍잘해야 하냐? 하고 묻습니다.
말을 채찍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그 마음, 수면을 채찍질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자리인 말을 채찍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본래자리에 돌아가면 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공부를 한다고 해서 일어나는 마음을 가지고 나는 본래부터 업이 많은가보구나하고
이러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죄설이 대단한 것입니다. 무식한 사람 천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게 혹된 짓인 것입니다.
참된 수행이라는 것은 일어나는 마음을 잠재우기 위한 것도 아니고 환경을 바꿔서 조용히 수행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깨침이 없이 닦는 것을 여석압초라고 합니다.
본래의 마음자리에 두지 않고 자성의 정이 아니라 그냥 정혜계에 둘 때 여석압초라고 합니다.
聲聞은 心心斷惑호대성문은 본문에 구속되는 것입니다.
성문은 자성경전까지는 가지 못하고 문자경전 소리경전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이것이 법이다 하는 법상이 남아있습니다.
법상 비법상을 뛰어넘지는 못하였습니다.
能斷之心이 是賊이라하시니 능히 끊는 그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
끊겠다고 챙기는 그 마음이 도둑놈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챙기는 마음을 실현시키기 위해 삼학을 두었다는 말씀은 무슨 소리인가 하는 질문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잡념이 일어나고 탐심 진심 치심이 일어납니다.
그때 어떻게 공부를 하냐?
잡념에 대해서 끊어야지, 없애야지 하는 마음이 납니다.
그 때에 그 탐심 진심 치심을 어떻게 공부하는가, 끊고 없애려고 생각한다.
이것을 보면 공부를 잘 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것을 유위의 공부라고 한다.
잡념을 끊어야지 하는 것이 도둑이라는 것이 분별망상을 놔 버리고 본래 분별망상이 없는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자성의 정입니다.
무위의 공부는 무엇인가?
잡념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근본의 성품자리에 들어가서 회복하는 것입니다.
잡념과 끊어야지 하는 것을 놓아버리고 본래에 없는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그것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끊고 제거하고 닦을 것을 이루는 대상이 아닙니다.
끊을 것도 닦을 것도 없이 원래 본좌구족으로 갖추어진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닦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끊는 것입니다.
본래 닦아놓는 것이 기다. 참 마음이 바로 그 마음입니다.
분별로써 분별심을 대치하는 것이 마음공부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웃겨죽겠습니다.
초등학생들이 하는 짓이고 웃긴 짓입니다. 그러나 공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의 마음자리, 분별이 일어나기 이전 자리로 들어가 주어야 합니다.
이 자리는 첫째 내가 선을 통해서 분별망상이 없는 그 자리를 회복 오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자리에 가기 어렵습니다.
왜 우리가 그 아침에 그렇게 고요하고 적적성성한가.
왜 아침에 우리가 좌선 저녁에 염불을 통해 그 자리에 가는가.
우리가 살다보면 분별세계에 빠져삽니다.
그 분별세계에 이면자리인 성품의 세계에 합일할줄 알고 머무를줄 알고 그 세계가 참 나고,
그 근본이 거기다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성품이 나 인줄 모르고 잡념이 분별망상이 나인줄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위의 세계가 얼마나 좋은데 , 무위의 세계로 돌아갈 시간이 없어요‘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이 하는 소리요, 마군이의 소리입니다. 절대로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번뇌만 부추기고 상만 쌓을 뿐입니다. 단언코 말할 수 있습니다.
但諦觀殺盜(음)妄이 從性而起하면 다만 살도음만이 성품에서 나왔다.
살도음이 최고의 거짓이고, 온갖 죄업과 망상이 다 없는 자리에서 나왔을 뿐이다.
그래서 그것을 체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자세히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起卽無起라 그러면 일어나고 멸함이 없는 본래 고요함에 이를 것이다.
적이라는 것은 일어나고 멸함이 없는 자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일어나고 멸함이 없는 것입니다.
분별망상이 본래 없다.
何須更斷이리오 그러고 보면 끊을 것이 어디에 있으리요.
참회문에.. 책에도 나왔습니다.
업은 본래 무명인지라 자성의 혜광을 따라서 반드시 없어지나니,
본래의 마음자리는 고와 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품이 공하다고 하는 것, 성품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을 관하는 것,
관(觀) 공부가 중요합니다. 관조(觀照)
이것을 정산종사님께서는 관(觀), 각(覺), 행(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삼학공부입니다.
우리 무시선법에는 집심 관심 무심 능심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마음공부를 할 때 처음에는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관심, 그 마음의 실체를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뿌리가 어디인가를 관하게 되고, 그러면 본래 없다는 무심을 알게 됩니다.
그것에 바탕 하여 마음을 자유자재로 쓰는 공부가 바로 원불교 공부입니다.
원불교 공부는, 돈오와 점수 자성반조를 하지 않은 것은 원리를 모르고 하는 공부가 됩니다.
처음에 모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보통급, 특신급, 상전급.. 등은 어떻게 하라고 다 내놓았습니다.
마음은 어디에 있다고 하였습니까?
마음은 없다. 그러나 능히 작용하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왕이 어디에서 차를 마셨는데 너무나 맛있는 나머지 그 차 맛이 계속 생각이 나서 차를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차를 우려서 가져다 올리는데 자꾸 그 때 차맛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작용이 그 때의 차 맛의 작용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때의 마음은 그 때 그 때마다 다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냐하면,
우리는 어떤 마음이 뿌리가 있어서 실제로 내 마음에 있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삽니다.
분명히 잡으면 있으니깐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놓으면 없는 것이 마음이라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니깐 잡은 마음, 에고가 됐든, 치심이 됐든, 그것이 내 안에 있다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 때의 그 때에 있었을 뿐입니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었는가? 하고 들어가 보면 사실은 뿌리 없는 나무더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뿌리 있는 나무인 줄로 알고 그 마음을 잡으려 하니 그것이 여석압초입니다.
所以로 云하사대 不(파)念起하고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말고
唯恐覺遲라하며 오직 깨달음이 더딤을 두려워하라“ 하셨으며
叉云念起卽覺이라 또 말씀하시기를 “생각이 일어나면 곧 깨달으라 깨달은 즉 없어지나니라”
염기즉각(念起卽覺), 이것이 공부인 것입니다.
이것을 대중이 다 알아듣도록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염기즉각 무슨 소리입니까?
생각이 일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망념이 난 것을 이야기합니다.
망념이 일어나면 어떻게 마음 공부를 해야 하나요?
염기즉각, 망념이 일어나면 그것을 따라가지 말고 성품자리를 바로 반조하라는 것입니다.
성품자리를 반조하면 망념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가 깨달은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면 일어난 그 마음은 없어진 것입니다. 일어난 그 마음은 뿌리가 없이 나왔기 때문에 뿌리가 없는 그 자리로 들어가면 흔적이 없는 것입니다.
故로 悟人分上에는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雖有客塵煩惱나 깨달았지만, 비록 경계따라 번뇌가 있으나
불파념기는 진리의 소자리는 말하는 것입니다.
심지에 요란한 것도 없고, 그름도 없고, 요란한 것도 없는 것입니다.
심지에는 본래 자성의 정혜계가 다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마음 내면, 수많은 탐진치와 좋은 마음 안 좋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있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공부한다고 하면서 밭에 연탄재를 뿌려버린다고 한다면,
밭에 풀이 안날지는 모르지만 과일 곡식이 자랄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탐심 진심 치심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이요, 그
것이 나오는 것이 마음이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공부 잘하는 사람입니다.
과거에는 목석같은 도인을 도인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원래 못 닦는 사람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기 때문에, 당연히 명기가 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이렇습니다.
일어나기는 일어나되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구는 조금 덜 나고, 누구는 팍 성질이 납니다.
그 순간 챙겨서도 그러하지만, 습관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깨달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분별망상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활동한다는 것은 명기입니다.
일어나되 뿌리가 없이 일어나는 것인데 중생은 뿌리가 있이 일어나는 것으로 착각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인데 이해하시겠습니까?
대소유무
대 : 심지는 원래 요란하고 어리석고 그름이 없는 공(空)이다.
소 : 그런데 염기가 있어진다.
유무 : 그런데 그 있어진 것이 영원히 있어지는 것이 아니라 변한다.
심지는 원래 공입니다.
그런데 염기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 있어진 것이 뿌리가 없이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소의 유무입니다.
그러므로 마음공부를 할 때 마음의 원리를 알고 하여야 좌선을 하나 하면서도 인상을 쓸 것도 없고
이것이 바로 마음이구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화가 난 뿌리는 잠시 경계따라 있어졌을 뿐, 본래부터 화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화가 나도 홧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또 하나, 내가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미혹인지 모릅니다.
故로 悟人分上에는 雖有客塵煩惱나 깨달은 사람에게는 깨달았으나 객진번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객진번뇌를 통해서
俱成醍(호)니 사람은 오히려 제호를 이룬다..
객진번뇌가 염기죠. 객진번뇌가 일어나면 즉각하는 그것이 제호이다.
경계를 따라 내 마음자리를 다시 확인해 볼 수 있는 공부의 찬스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처음 맞닥뜨린 경계는 헤매기 쉬운데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깨침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경계를 피할려고만 하고, 힘들면 난 공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깨침을 맛 볼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본래 자리를 단련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며, 최소한 경계에 속지 않는 것입니다.
뿌리가 있다는 것, 본래가 비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자리를 회복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견지, 지식, 주관적 생각에 속습니다.
어떤 것도 작용하는 그 때에 있어진 것은 변하는 것이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는 그것이 영원한 것인양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있을 때 본 것에 집착한다. 그것이 미혹인 것입니다.
사실은 무근이다. 내 상식, 내지식, 내분별, 주관적인 것은 뿌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그 미혹함이, 미혹함은 온갖 분별들. 그 실상을 보지 못한 주관적인 생각이 없는 것을 비추어보면
如風券煙하고 삼계가 연기 흩어지듯이 하고,
幻化六塵이 如湯消氷하리라 육진경계가 다 근원이 녹아나버리는 것이다.
왜 녹아나는가?
본무이기 때문이다. 무본이기 때문입니다.
무본이 아니면 흩어질수도 녹아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자칫 도인을 이야기하며 인지능력, 지각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도인으로 아는 경우도 있습니다. 목석도인, 감각이 둔한 것을 도인으로 알면 그런 도인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사람이 어찌 살아있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까.
대종사님은 마음이 지극히 묘하여 잡으면 있어지고 놓으면 없어지는데,
그 챙김은 챙기되, 챙김이 없는 가운데 챙김입니다. 이것이 진공묘유의 수행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챙김이 있는 자리에서의 챙김이 아닙니다.
법위표준
- 돈오점수가 상당히 말은 좋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마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
제가 오늘 그것을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불교에서 52기가 있는데, 대종사님께서는 그것을 공부의 단계로 간단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 보통급
초심입문, 원불교에 들어온 것입니다.
내가 수도한번 하리라, 참 영혼을 찾으리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내가 난 사람이 아니라 된 사람 한번 되어보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지출발이요 큰집 발견입니다.
나만 잘살려고 하다가 나 아닌 다른 나를 위해서도 살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때 삼난을 돌파하는 것의 시작입니다.
여기에 앉아계신 분들은 원불교를 만났든 만나지 않았든 불법을 들으신 것입니다.
보통급은 들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교도의 사종의무를 하는 것입니다.
조석심고, 법회출석, 보은헌공, 입교연원을 하면서 복과 지혜의 문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때 내 마음이 세속에 벗어나는 그 마음이라서 상당히 기쁜 것입니다.
입교하는 그 자체도 마음속에서 이렇게 살아보겠다라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2) 특신급
보통급에 들어와서 공부하다 보면, 참으로 좋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이렇게 좋구나. 이런것도 모르고 살뻔 했구나하고 느끼게 됩니다. 이때가 무섭습니다.
이때 발심입지입니다.
이 때는 내가 이렇게 살겠다, 성불제중의 길로 가보아야겠다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 때 대서원 대신심이 나서, 직장도 그만두고 출가하겠다 하는 마음을 내게 됩니다.
아직도 내가 중심이 된 사람은 아직 특신급이 아닙니다.
정법정신 (正法 正信) 마음이 표준이 바로 서지는 것입니다.
이 때 수도인의 일생사가 결정됩니다.
이 때 서원과 믿음이 얼마나 탄탄한가 아닌가에 따라서 내가 큰 도인이 되느냐 아니냐가 결정이 됩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 큰 서원이 없는 사람, 불신이 많은 사람은 특신급에 올라가지 못합니다.
일생 범부의 세계며 자기한테 평생 속는 것입니다. 일생을 자기 잘났다고 살기 쉽습니다.
특신급에서는 심신귀의, 내 몸과 마음을 진리와 법과 스승과 회상에 맡기는 것입니다.
진리에 내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입니다. 참 스승님께 내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입니다.
회상, 교단에 내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원에 재산을 다 바친 사람도 있고, 학교에 재산을 다 바친 사람이 있습니다.
특신급이 제대로 되면 병원과 학교에 내지 않고 회상에 내게 되어있습니다.
무념이 종이라고 하였으므로, 그 무념을 공부하는 곳에 돈을 내게 되어있습니다.
비로소 이 세상의 근간이 되는 것은 무념으로써 종을 삼는다는 것,
이 세상이 비로소 평화가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때 특신급이 되면 내가 원불교를 다닌다고 소문을 내고 다닙니다.
내 주위 사람들이 내가 원불교를 다니는 줄을 모르고 있으면 아직 먼 것입니다.
김성곤의원이 있습니다. 그분은 원불교 다닌다는 것을 꼭 밝힌 국회의원입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드러난 후에 원불교 좀 도와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세계를 향해서 가면 되는 것입니다.
내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3) 법마상전급
고전입니다. 육근이 고전입니다.
괜히 원불교를 만났네. 원불교가 나 죽이네, 신앙생활이 나 죽이네 하고 몸과 마음이 싸우고 있으니 그렇습니다.
정과 사, 법과 마가 싸우니 내 마음에서 싸우는 것이고 심리공부(心裏工夫) 라고 합니다.
아까 보여주기 위해 공부한 사람은 절대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귀신도 모르는 공부가 이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무
념으로, 이것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 때 때로는 진경에 들어 부처님 마음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적적성성함을 다 알기도 합니다. 그
러나 경계가 닥치면 팍팍 무너집니다. 이 때 점수공부가 이루어집니다.
한편으로는 재미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기한테 실망도 합니다.
법마상전 때 속 깊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항마위 출가위에 올라갔을때 교화의 천만방편을 이룰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비추어서 다른 사람도 기가 막히게 알 수가 있습니다.
중근조심할 때입니다, 여우새끼 같은 마음이 이때 나옵니다.
법문을 들으면서 교무님, 법문이 그 소리가 그 소리입니다합니다.
특신이 확신한 믿음과 서원이 생기면 확실이 올라갑니다.
하지만,이 때 서원이 어영부영 세워진 사람은 백발백중 실패합니다.
그래서 특신급이 정말 무섭습니다. 서원이 세워진 사람은 무섭습니다.
(4) 법강항마위
초견성, 중견성, 상견성을 통해서 비로소 항마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심신조복, 이 때는 경계에 속지는 않습니다.
어지간한 것은 이겨먹습니다.
(5) 출가위
출가위는 합덕입니다.
내 집이 내 집이 아니고 시방이 내 집입니다. 이 때는 순공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고,
심신출가라 몸과 마음을 다 내놓습니다.
(6) 대각여래위
심신을 자유하고 삼계의 대도사를 이룹니다.
보통급은 보통급대로 원불교 만난 재미가 있고요
특신급은 특신급대로 기가막힌 재미가 있습니다.
상전급은 상전급대로 자기 혼자 재밌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보여주기 위해서 공부한 사람은 법마상전급때 속깊은 공부를 못하고
반드시 중근에 걸려듭니다.
아까 보조국사가 끊어도 끊임이 없고 닦아도 닦임이 없다라고 설명한 거 하고
이렇게 단계를 주고 설명하면 훨씬 좋습니다.
내가 그 다음에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수심결 이후 초청강연하면 다시 정전을 시작할 것입니다.
정전 들으셨던 분이 수심결 들으면 다 연결될 것입니다.
반야심경 들으셨던 분도 지금 다 연결 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합장)
|
첫댓글 이연님 고마워요, 바쁠 때인데도 이렇게 정성스럽게 올려주어서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