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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慧明華
無比스님과 함께 하는 유마경 공부(2020.09.22.PM7시)
유마경 방편품
유마힐의 덕행
불자님들 반갑다. 저녁 7시 유마경 공부시간이다.
이 말세 어려운 상황에 인터넷 방송을 통해서 유마경을 공부하고 화엄경을 공부하고, 경전에 담고 있는 뜻을 백퍼센트 다 이해는 못하지만 그래도 알려고 이렇게 모두 동참해서 정진하는 모습이 장한 일이고 희유한 일이다.
살아있는 동안 참 아주 값진 일을 하는 것이다.
‘이 삶을 가지고 어떻게 쓰면 제일 값지게 쓸 것인가?’
유마경을 이야기 하려다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유마거사가 병이 들어서 방편으로 이 육신의 허망함을 이야기 할 것을 생각하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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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불국품 다음에 방편품을 할 차례다.
유마경이 14품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두 번째 품이 방편품이다.
방편이라는 말을 불교에서 아주 잘 쓴다.
굳이 방편을 따로 설명할 것은 없다.
우리가 살다보면 ‘아 그거 방편이야’ 하고 알 수 있다.
二. 방편품(方便品)
유마경은 불국품도 근사했지만 방편품도 훌륭한 내용이다. 처음에 유마거사가 등장을 하는데 ‘유마거사가 어떤 분인가?’ 하는 취지에서 유마거사의 덕행을 밝힌다.
‘그분은 이러이러한 덕을 갖춘 분이다’
법회 청중을 소개할 때도 보살들이 등장을 하면 보살들의 덕행을 밝힌다. 또 비구들이나 아라한들 신장들 같은 분들이 등장을 해도 역시 그들에 대한 특징과 덕행을 밝힌다.
유마경은 두말할 나위 없이 유마힐 거사가 주인공이다.
유마힐 거사를 중심으로 아주 뛰어난 법문이 펼쳐지므로
당연히 유마힐 거사의 덕행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1. 유마힐의 덕행
이시(爾時)에 비야리대성중(毘耶離大城中)에 유장자(有長者)하니 명(名)은 유마힐(維摩詰)이라 이증공양무량제불(已曾供養無量諸佛)하야 심식선본(深植善本)하며 득무생인(得無生忍)하야 변재무애(辯才無礙)하니라
그때에 비야리대성 안에 장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유마힐이었다. 그는 일찍이 한량없이 많은 부처님께 공양하여 선의 근본을 깊이 심었으며, 생멸이 없는 진리를 얻어서 변재도 걸림이 없었다.
뒤에도 여러 가지 내용이 나오지만, 첫 구절이 이렇다.
그는 일찍이 한량없이 많은 부처님께 공양하여 선의 근본을 깊이 심었다.
많은 부처님께 공양하여 선의 근본을 깊이 심었다.
한량없는 부처님께, 무량제불에게 공양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부처님 위하듯이 위하면서 살았다는 뜻일 것이다.
거기에 또 생멸이 없는 진리를 얻어서 변재도 걸림이 없었다. 무생인(無生忍)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생사가 없고 생멸이 없는 진리가 무생법인이다.
현상은 전부 생멸이 있다. 생사가 있다.
그런데 생멸이 있는 가운데 그 본성은 생멸이 없는 도리가 있다.
자주 비유를 들지만 물결은 한없이 출렁거린다. 그러나 그 물은 변함이 없다. 그와 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온갖 변화속에서 변화무쌍 한다. 그런 가운데 그 본성은 변함이 없다. 그것이 무생법인, 무생인이다.
그러한 이치를 우리는 말만 하지 사실은 제대로 터득하고 있지 못하는데 이 유마거사께서는 그러한 이치도 환히 터득하고 있다.
유희신통(遊戲神通)하며 체제총지(逮諸總持)하야 획무소외(獲無所畏)하며
신통을 자유롭게 활용하며 온갖 총지를 다 지니어 두려움이 없는 경지를 얻었다.
유희신통(遊戲神通)이라. 신통도 부리고 싶으면 마음껏 신통을 부리는 분이다. 그리고 모든 총지(總持)를 지녔다.
경전의 말씀을 많이 지니고 있고 많이 외우고 있다. 총지는 다라니다. 이것을 많이 지니고 있으니 섭법하는데 조금도 두려움이 없다. 무소외(無所畏)를 얻었다. 두려움이 없음을 얻었다.
항마노원(降魔勞怨))하야
마군과 진로와 원적들을 다 항복 받았으며
진로라고 하는 것은 번뇌다. 마군과 번뇌와 원적들을 다 항복 받았으며
심입법문(入深法門)하며 선어지도(善於智度)에
또한 깊은 법문에 들어가서 지혜에 뛰어났으며
깊은 법문에 들어가서 지혜에 뛰어났다.
법문이 뭔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내용을 부처님이 설법하신 것을 법문이라고 한다. 그것을 잘 알면 지혜가 아주 뛰어날 수밖에 없다.
통달방편(通達方便)하야 대원성취(大願成就)하니라
방편을 통달하여 큰 원력이 성취되었다.
거기다가 법문을 펴는 데 있어서 방편이 또 있어야 한다.
이분은 방편에 통달해서 큰 원력이 성취되었다. 원력이 뭔가?
방편을 통해서 불법의 이치, 진리, 참다운 이치를 많은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자 하는 것이 원력이다.
그런 원력을 가지고 있다.
유마거사는 세속의 거사이신데 잘 아시는 바대로 인도에서 제일가는 거사는 유마거사, 중국에서는 방거사,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 때 부설거사라고 흔히 이야기 한다.
어느 시대든 훌륭한 거사분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중국에는 기록되어 있는 훌륭한 거사들이 많다. 장무진(張無盡)거사라든지 소동파(蘇東坡) 거사라든지 아주 뛰어난 거사분들이 많았다.
그 중에 유마거사는 이렇게 경전이 하나 성립될 정도의 훌륭한 거사다, 이렇게 본다면 이분의 덕행이 얼마나 훌륭한가 하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가 있다.
명료중생(明了衆生)의 심지소취(心之所趣)하며
중생의 마음의 나아갈 바를 분명히 알며,
중생의 마음의 나아갈 바를 분명히 안다. 중생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그저 중생의 업대로, 익혀온 대로, 세세생생 익혀온 대로의 문제에 마음이 끌린다. 유마거사는 중생이 그런 것에 끌리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야 거기에 맞춰서 중생을 제도한다.
우능분별제근이둔(又能分別諸根利鈍)하며
또한 능히 모든 근기의 영리하고 둔함을 잘 분별하며
모든 근기의 영리하고 둔함까지도 잘 분별한다.
유마거사는 거사라고도 하지만 유마보살 이렇게도 이야기 하고 그 법력은 부처님하고 어금버금하다고 까지 이야기 한다. 거의 부처님에 못지 않다 이렇게까지도 표현한다.
모든 근기의 영리하고 둔함을 잘 분멸하며
구어불도(久於佛道)에 심이순숙(心已純淑)하야 결정대승(決定大乘)하며
오랫동안 불도에서 그 마음이 순일하고 맑아져서 대승의 가르침에 결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불교를 접하면서 인연 따라서 이런 불교 저런 불교 각양각색의 불교를 접한다.
참 많고 많은 불교를 접한다.
거기에 우열이 분별이 되지도 않고 ‘이것이 삿된 가르침인지 아닌지’도 분별이 안된다.
그러니까 닥치는 대로 받아들인다.
특히 요즘은 라디오나 TV 같은 데서 선전한다든지 광고를 한다든지 아니면 거기에 등장해서 이야기 하면 ‘아 TV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 ‘TV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현대인들은 거의 텔레비전 신자다.
KBS나 MBC나 SBS 같은 공중파 방송에서 뭐라고 나와서 이야기 했다하면 무조건 그다음날 뭐든지 불티가 나게 팔린다.
그것이 제대로 검증이 된 것인지 안 된 것인지, 방송에서 왜 그런 것을 하는지 그 뒤에 어떤 공작이 있는지 그런 것은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는다.
모두 TV신자들이다.
그래서 불교 TV에도 나왔다 하면 ‘아 불교 TV에 나온 이야기’라고 ‘불교TV에서 어떤 스님이 이야기 하더라’고 분별도 없이 막 받아들인다.
그런데 유마거사는 오랫동안 불도에서 그 마음이 순일하고 맑아져서 대승의 가르침에 결정(決定)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대승의 가르침, 가장 큰 수레, 가장 바람직한 가르침, 불교의 여러 가지 가르침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바람직한 가르침을 대승이라고 한다.
유마거사는 대승의 가르침에 결정되어 있었다,
결정되어 있었다고 함은 확고부동하다는 말이다.
TV에서 뭐라고 하든지 거기에 미혹하지 않고 끌려가지 않고 또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곳곳에서 영험있는 도량을 얼마나 선전하는가? 거기 가면 뭐든지 다 이루어지게 할 것 같이 선전한다.
그래서 제가 ‘정법불교만을 펴는 공중파 같은 방송국이 하나 있어야 겠다’ 는 말을 평소에 많이 했었다.
이렇게 소규모지만 유튜브 방송, 개인 방송, 내혼자 국장이고 내혼자 피디고 내혼자 아나운서고 내혼자 연출하고 출연하고 기획도 하고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방송, 시대의 발전에 따라서 이러한 것이 간단하게 되니까 참 큰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유마거사는 오랫동안 불도에 그 마음이 순일하고 맑아져서 대승의 가르침에 결정되어 있었다.
우리 유마경 공부하고, 화엄경 공부하는 불자님들도 불법에 대한 자기의 소신이 확고부동한 것이 아주 중요하다.
정법에 결정되는 것이다.
‘아 이것이 정법이다’ 그 나머지는 ‘왜 스님들이 저런 소리를 하는가?’‘왜 불교TV에서 저런 소리를 하는가?’ 이렇게 비판도 하고, 도반들에게 그런 것을 서로 토론도 하고 정법 아닌 것을 걸러내야 된다.
깨끗하게 걸러내는 작업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것이 없고 전부 이 산업사회에서는 경제논리로 돌아간다.
‘TV를 운영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않냐?’ 이렇게 나가면 내가 다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니까 할 말이 없다. 그런 점들이 평소에 제가 생각하던 바이다.
제유소작(諸有所作)에 능선사량(能善思量)하니라
그리고 여러 가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능히 잘 생각하였다.
하는 일에 대해서는 능히 잘 생각하였다. 하는 일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잘 생각해서 대승의 이치에 맞게 한다는 것이다. 저 혼자 방송국 차려놓고 이렇게 떠들다보니까 하고 싶은 소리 다해서 속은 시원하다.
이런 말들이 평소에 마음에 새겨뒀던 말들이다.
제 말이라고 해서 또 무턱대고 신자가 되거나 우리가 TV신자가 되듯이 그렇게 저의 신자가 되어서 ‘아 무비스님이 말했다’고, 그렇게 할 것은 아니다.
스스로 잘 판단해서 확고부동한 소신에 의한 신념을 가지셔야 된다. 그런 주장을 해야 된다.
주불위의(住佛威儀)하야 심여대해(心如大海)라 제불자차(諸佛咨嗟)며
부처님의 위의(威儀)에 머물러 있으며, 그 마음은 큰 바다와 같아서 모든 부처님이 찬탄하는 바가 되었다.
그 행동거지 위의는 부처님의 위의에 머물러 있다.
그 마음은 큰 바다와 같아서 모든 부처님이 찬탄하는 바가 되었다.
위의는 부처님의 위의와 같고, 마음은 큰 바다와 같아서 부처님들이 찬탄하는 정도다.
그러니 유마거사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겠다.
우리 일반 불자님들은 ‘그저 출가한 사람, 그저 부처님’ 그렇게만 맹목적으로 책임을 전가할 것이 아니다.
여기 보면 세속에 있는 거사도 이 정도의 격을 갖춘 분이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누구나 그와 같이 될 수 있다.
제자석범세주(弟子釋梵世主)의 소경(所敬)이니라
또 제자들과 제석천과 범천과 세상의 주인들이 공경하는 바가 되었다.
부처님이 찬탄했으면 다 됐다. 그런데 그 밑에 제자들, 제석천, 범천, 세상의 주인들 이런 이들도 다같이 공경한다고 하였다.
아주 대단한 덕행을 갖추었다. 그렇게 길게 표현은 안했지만 유마거사의 덕행을 이렇게 표현을 했다.
2.재가인(在家人)으로서의 수행
재가인으로서 수행은 또 어떻게 하는가?
이것도 덕행의 일종이다.
욕도인고(欲度人故)로 이선방편(以善方便)으로 거비야리(居毘耶離)하되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훌륭한 방편을 활용하면서 비야리성에 살았다.
유마거사가 사는 곳이 비야리성이다. 요즘은 바이샬리라고 표현을 하는데 인도에 불교성지순례를 가면 꼭 들르는 곳이다. 이 유마경이 설해진 무대가 되기 때문에 그렇다.
유마거사가 그 도시에 살면서 이 유마경이 설해졌다. 거기에 아쇼카 대왕의 석주도 가장 완벽한 석주로서 거기 남아 있기도 한 곳이다.
만약에 우리 불자분들이 인도성지순례를 가면 대개 거기는 들르게 되지만 꼭 들르시기 바란다.
거기에 가서 우리가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아니면 하루쯤 묵으면서 유마경을 가져가서 같이 읽고 같이 농담도 하고 토론을 하는 시간이 된다면 참 좋을 것 같다.
비야리성에 가서는 유마경을 공부하고, 영축산에 올라가서는 법화경을 이야기 하고, 기원정사에 가서는 금강경을 이야기 하는 그런 성지순례, 많이 다니면서 많이 보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런 곳에서 한 이 삼일씩 푹 마음을 가라앉히고 부처님 당시때 부처님 계시던 분위기에 한 이삼일씩 푹푹 젖어 있다 오는 성지순례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유마거사는 비야리성에 살았다.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훌륭한 방편을 활용하면서 비야리성에 살았다. 그래 어떤 수행을 했는가?
자재무량(資財無量)하야 섭제빈민(攝諸貧民)하며
그는 재물이 한량없이 많아서 수많은 가난한 백성들을 잘 보살핀다.
보시다. 6바라밀을 여기서 소개한다. 이분은 6바라밀을 잘 닦았다.
대승수행은 무조건 6바라밀이다. 우리 불자들의 수행의 제일 가는 덕목이 6바라밀이다. 그런데 이런 6바라밀 이야기가 아함부 경전이나 다른 데는 없다고 하는 사실, 그것만 보더라도 대승경전과 그 외 경전의 차이를 우리가 알 수 있다. 재물이 많아서 수많은 가난한 백성들을 잘 보살핀다.
봉계청정(奉戒淸淨)하야 섭제훼금(攝諸毁禁)하며
계율을 청정하게 받들어 계율을 범하는 이들을 많이 포섭한다.
이분은 계율을 지키는데 모범을 보이면서, 계율을 범하는 이들을 많이 포섭한다. 모범을 보임으로써 포섭하는 것이다.
이인조행(以忍調行)하야 섭제에노(攝諸恚怒)하며
인욕으로써 행동을 다스려 모든 분노를 잠재운다.
인욕, 화가 나는데 분노가 일어나는데 참는다는 것이다.
이 유마거사는 인욕도 아주 뛰어나게 잘 닦았나 보다.
이대정진(以大精進)으로 섭제해태(攝諸懈怠)하며
큰 정진으로써 일체의 게으른 마음을 억누른다.
큰 정진으로써 일체의 게으른 마음을 억누른다.
6바라밀 중에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이 나왔다. 열심히 해야 한다. 쉬지 않고 해야하는 것이 정진이다.
일심선적(一心禪寂)으로 섭제난의(攝諸亂意))하며
일심으로 고요한 선의 경지에 들어가 모든 산란한 마음을 씻는다.
선정은 고요한 선의 경지에 들어가 산란한 마음을 씻는다. 씻어낸다 하는 것이다.
마음이 안정되어야 평상심을 유지하게 되고 평상심을 잘 유지하면 주변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 문제를 제대로 적절하게 이치에 맞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이결정혜(以決定慧)로 섭제무지(攝諸無智)하며
결정된 지혜로써 모든 지혜 없는 이들을 가르친다.
확실한 지혜를 가지고 지혜가 없는 사람들을 잘 가르친다.
재가인으로서의 수행이 대단하다. 처음에 6바라밀을 소개하고 계속해서 다른 수행이 이어진다.
수위백의(雖爲白衣)나 봉지사문청정율행(奉持沙門淸淨律行)하며
비록 세속의 옷을 입었으나 사문이 지키는 청정한 계율을 받들며
비록 세속의 옷을 입었으나, 사문 출가사문, 스님들을 말하는 것이다. 스님들이 지키는 청정한 계율을 받든다. 세속에 있는 거사로서 스님들하고 똑같이 계율을 잘 지킨다.
수처거가(雖處居家)나 불착삼계(不着三界)하며
비록 가정집에 살지만 삼계에 집착하지 아니하며
전부 중도원리가 포함되어 있다. 세속에 있지만 출가한 사람의 계율을 받들고, 비록 가정집에 살지만 삼계에 집착하지 않는다. 가정집에 살면서 가정집에 집착하지 않는다.
시유처자(示有妻子)나 상수범행(常修梵行)하며
처자가 있으나 항상 범행을 닦으며
청정한 행을 닦는다. 처자권속이 다 있지만 항상 범행을 닦는다.
현유권속(現有眷屬)하되 상락원리(常樂遠離)하며
권속이 있으나 항상 멀리하기를 좋아하며
사돈네 8촌까지, 손자들 자식들 수많은 권속이 따르지만 늘 손자를 안고 얼르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탁 멀리 하고 각자 수행에 열중하도록 하는 모범을 보인다.
수복보식이이상호엄신(雖服寶飾而以相好嚴身)하고
비록 보배로 장식하였으나 타고난 상호로써 몸을 장엄하고
워낙 부자다 보니 보배로써 장식은 할 만치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타고난 상호로써 몸을 장엄했다. 본래 타고난 모습이 근사했다는 것이다.
제가 스님들에게 남 앞에 서서 불공을 하거나 설법을 하거나 아니면 포교를 하거나 할 때 반드시 가사장삼을 잘 챙겨입으라는 말을 자주 한다.
저는 소참법문시간이라고 해서 소참법문을 하는 초기에 ‘소참법문은 어떤 것이다’ 하면서, 모든 격식을 초월한 것이 소참법문이다. 자유롭게 하는 것이 소참법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사실 유마경을 공부하고 화엄경을 공부하고 하려면 제가 조금 힘들더라도 가사장삼을 입고 하는 것이 훨씬 위의가 있고 좋은 일이기는 한데 너무 또 그렇게 부담을 갖다 보면 제가 너무 힘이 들어서 얼마 못하고 그만두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그냥 가벼운 차림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도 그렇고 스님들도 여러 사람들 앞에 섰을 때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중요하다.
생긴 모습, 자기가 타고난 얼굴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은 타고 났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러나 스님으로서 위의는 갖춰야 한다. 머리도 깨끗하게 깎고, 옷도 제대로 차려입고 가사 장삼도 반드시 차려입고 그것이 신(身)이다.
그다음에 언(言) 말을 유창하게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말을 점잖게 하고 상스러운 소리는 하지 말고, 농담 같은 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힘들게 강의해놓고 그 강의 한 내용을 그만 농담으로 희석시키는 예도 있다. 웃기는 법문을 평생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 누가 한마디 해주지도 않는지 평생을 그저 웃기는 법문만 전문으로 하다가 가는 사람들이다. 별별 스님들이 다 있다.
서(書)는 판서. 저는 몸이 많이 불편해서 일어서지도 못하니까 판서도 못하는데 불교TV에 보면 판서를 하면서 강의 하는 스님들이 또 많다. 그런데 그 글씨를 이왕 썼다 하면 마음을 담아서 또박또박 좀 잘 써야지 자기가 글씨체가 안 좋은 것은 어쩔수 없다고 해도 마음을 담아서 정성을 다해서 정자로 또박또박 써야 된다.
그런데 글씨를 막 휘갈겨 쓰는 사람들이 있다. 형편없이 휘갈긴다. 글씨체도 안좋은데다가 휘갈겨 쓰는 것을 불교 TV에 그대로 방영한다.
스님이 하는 일이니까 촬영하는 거사분들이 일일이 잔소리를 못하지 않는가?
그런 것들도 바로 잡아줬으면 좋겠다.
그다음에 판(判)이라고 하는 것은 판단력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사상이다. 대승불교적인 올바른 신심과 사상을 가지고 불법을 설하는가 마는가?
그것이 신언서판(身言書判)이다.
옛날에 중국에서부터 공무원을 뽑을 때도 그 네 가지로써 평가해서 공무원을 뽑았다고 한다. 요즘은 시험을 치지만 그때는 그것이 시험이었다.
태도, 모습, 옷 같은 것을 제대로 차려입었는가, 그다음에 말은 점잖게 잘하는가? 조리있게 하는가? 글씨는 남앞에 내놓을 만한 글씨를 쓰는가? 사상은 어떤가?
그다음에 정신, 불교적인 입장에서는 신심있게 구축이 되어 있는가? 하는 그런 네가지로써 사람을 평가한다.
보통 사람들도 척 보면 무조건 그 네 가지로 사람을 판단을 한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제목을 기억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한다.
저 사람은 왜 저런 소리를 하나? 저 사람 신심이 없구만? 사상이 형편없구만, 생긴 모습을 보고, 글씨를 보고 저절로 그렇게 네 가지로 판단하게 되어 있다.
제발 좀 불교방송 운영하는 분들 피디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그런 것들도 고치고 바로잡아서 괜찮은 방송이 되도록 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다. 여기 타고난 상호로써 몸을 장엄하고 하는 대목에서 말이 길어졌다.
수부음식이이선열위미(雖復飮食而以禪悅爲味)하며
비록 음식을 먹지만 선열로써 그 맛을 삼는다.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음식을 안먹을 수 있는가? 잠을 안 잘 수 있는가? 쉬어 주지 않을 수가 있는가? 다 먹을 것 먹고 잠잘 것 잠자고, 쉬어줄 것 쉬어주고 배변할 것 배변하고 당연히 그렇게 육신이 가진 생리현상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그 생리는 순리대로 따라가야 된다.
그러나 이 유마거사는 그런 것은 일반적으로 다 잘 하지만 선열로써 그 맛을 삼는다.
법희선열, 구체적으로 하면 법희선열이라고 한다.
법의 기쁨과 선정의 즐거움으로써 그 맛을 삼는다.
우리도 ‘유마경 아 좋다 좋다’ 하면서 여기에 심취하면 그것이 법희선열이다.
‘아 화엄경,세상에 이런 가르침이 있는가’ 하고 거기에 심취하고 좋아하면 그것이 바로 법희선열이다.
이것을 우리가 늘 좋아하는 맛으로 삼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약지박혁희처(若至博奕戲處)라도 첩이도인(輒以度人)하고
만약 바둑이나 장기 두는 곳에 이르면 문득 그것으로써
사람들을 제도한다.
바둑두고 장기를 둔다면 그걸 방편으로 이용해서 사람을 제도하는 것이다.
수제이도(受諸異道)하대 불훼정신(不毁正信)하며
여러 가지 이교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되 바른 신심을 해치지 아니한다.
기독교도 있고, 카톨릭도 있고, 힌두교도 있고 이슬람교도 있고 별별 종교가 다 있지 않은가? 그런 것을 다 수용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바른 신심을 해치지 아니한다.
자기 소신, 자기가 깨달은 바의 참다운 이치, 진리를 바른 신심을 가지고 견지한다.
수명세전(雖明世典)이나 상락불법(常樂佛法)하며
비록 세속의 학문에 밝지만 항상 불법을 좋아한다.
바로 이것이다. 세속의 학문도 유마거사쯤 되면 알 것은 다 안다.
그렇지만 궁극에는 불법만한 것이 없지 않은가?
불법이 좋은 줄 알려면 다양하게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 서양철학도 공부하고 동양철학도 공부하고,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등등 소크라테스니 요즘은 그런 정보가 너무 넘쳐나기 때문에 공부하려면 다 할 수가 있다.
저도 어릴 때 하도 알고잽이가 되어서 별별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래도 결국은 부처님 가르침 만한 것이 없다.
왜 그런고 하면 다른 세속의 학문은 다 머리를 짜내고 짜내고 그 사람이 타고난 교양이라든지 이런 것에 더해서 아주 좋은 머리를 가지고 짜내서 정리된 글들이고 가르침들이다.
그런데 불교는 부처님이 처음부터 글로 남기기 위해서 글쓰는 연습을 했거나 머리를 짜내서 사상을 정리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대로 6년간 고행을 하고 마지막 바른 선정에 일주일간 들어 있다가 큰 깨달음을 성취하고 나서 그 깨달음에 의해서 모든 것이 펼쳐진 것이다.
불교는 그것이 전통이고 기본이다.
그 뒤에 어떤 보살들이나 어떤 조사나 어떤 선지식들이 어떤 논서를 쓰거나 어떤 소초를 쓰거나 하더라도 전부 깨달음에 근거를 두고 가르친 것이고 펼쳐보인 내용이고 논서들이다. 깨달음에 근거하지 아니한 글은 하나도 없다.
깨달음에 근거하지 아니한 글은 전혀 알아주지 않고 불교가 아니다.
불교 하면 무엇인가? 깨달음의 가르침이 아닌가?
누가 이야기를 해도 깨달음에 근거를 두고 논리를 펼쳐야 된다.
그런 깨달음이 없다면 먼저 깨달은 분들, 부처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일단 깨달은 분들의 가르침에 푹 젖어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비록 세속의 학문에 밝지만 항상 불법을 좋아한다.
유마거사는 이런 분이다.
일체견경(一切見敬)하야 위공양중최(爲供養中最)며
모든 사람에게 공경을 받아서 공양을 받는 사람 중에 최상이 된다.
집지정법(執持正法)하야 섭제장유(攝諸長幼)하며
정법을 지켜서 어른과 아이를 다 포섭하며,
정법을 지켰다.
일체치생(一切治生)에 해우(諧偶)하며 수획속리(雖獲俗利)나 불이희열(不以喜悅)하며
모든 생활의 방도를 마련하는데 잘 어울려 조화한다. 비록 세속적인 이익을 얻으나 기뻐하지 아니하며,
세속적인 이익을 얻으나 크게 기뻐하지 아니하며
유제사구(遊諸四衢)하야 요익중생(饒益衆生)하며
시내에 노닐어서 중생을 이익 되게 한다.
시내에 들어가서 사람들하고 이야기 하되 전부 중생들을 어떻게 하면 이익하게 할까 거기에 마음을 썼다.
입치정법(入治政法)하야 구호일체(救護一切)하며
소송하고 재판하고 정치하는데 들어가서 모든 사람을 구호한다.
세속에 사니까 그렇다. 유마거사는 세속의 아주 유능한 어른으로서 여기저기 다 참여할 것 참여하고 간섭할 것 간섭한다. 소송하고 재판하고 정치하는 데까지 들어가서 모든 사람을 구호한다.
입강론처(入講論處)하야 도이대승(導以大乘)하며
강론하는 곳에 들어가서는 대승법(大乘法)으로써 인도하며
강론하고 어떤 사상이나 철학을 가지고 토론한다 하면 거기에 들어가서 대승법으로써 인도했다.
다른 부파불교의 이론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쉽게 말해서 소승 불교의 주의주장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 유마거사는 대승법으로써 인도했다는 말이다.
입제학당(入諸學堂)하야 유개동몽(誘開童蒙)하며
여러 학당에 들어가서는 어린 아이들을 가르친다.
학당에 들어가서는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입제음사(入諸婬舍)하야 시욕지과(示欲之過)하며
기생집에 들어가서는 욕심의 잘못을 보이며
세속에 사니까 세속인들이 하는 일은 다 하고 산다. 다 하고 살지만 결론은 무엇인가? 욕심의 잘못을 보이고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대승법으로 인도하고
입제주사(入諸酒肆)하야 능입기지(能立其志)하니라
술집에 들어가서는 능히 그 뜻을 세운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결코 취하지 아니하고 설사 취했다 하더라도 그 마음에 어떤 동요가 없고 그 뜻을 세운다.
옛날에 사람을 알아보는데 여러 가지 시험무대가 있었다.
술을 잔뜩 마시게 해서 다음날 술 마시면서 한 약속을 이행하는가 못하는가를 보는 방법도 있었다.
그 약속을 이행 못하면 그 사람은 자격이 없다. 같이 더불어 일할 사람이 아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 유마거사는 기생집에 가고 술집에 들어가고 토론하고 강론하는 데 가고 학당에도 가고 등등 세상사람들이 하는 일을 다 한다.
이러한 것을 통해 유마거사의 여러 가지 수행법과 그리고 재가인으로서의 수행법, 교화방편 이런 것들을 잘 소개하고 있다.
제 마음 같아서는 밤새도록 하고 싶은데 한 단락만 더 하겠다.
3. 유마힐의 교화방편
이것은 내용이 단순하기 때문에 읽기만 해도 될 것 같다.
약재장자(若在長者)하면 장자중(長者中)에 존(尊)하야 위설승법(爲說勝法)하며 약재거사(若在居士)하면 거사중(居士中에 존(尊)하야 단기식착(斷其貪着)하며
약재찰리(若在刹利)하면 찰리중(刹利中)에 존(尊)하야 교이인욕(敎以忍辱)하며 약재바라문(若在婆羅門)하면 바라문중(婆羅門中)에 존(尊)하야 제기아만(除其我慢)하며 약재대신(若在大臣)하면 대신중(大臣中)에 존(尊)하야 교이정법(敎以正法)하며
약재왕자(若在王子)하면 왕자중(王子中)에 존(尊)하야 시이충효(示以忠孝)하며
약재내관(若在內官)하면 내관중(內官中)에 존(尊)하야 화정궁녀(化正宮女)하며
약재서민(若在庶民)하면 서민중(庶民中)에 존(尊)하야 영흥복력(令興福力)하며
약재범천(若在梵天)하면 범천중(梵天中)에 존(尊)하야 회이승혜(誨以勝慧)하며
약재제석(若在帝釋)하면 제석중(帝釋中)에 존(尊)하야 시현무상(示現無常)하며
약재호세(若在護世)하면 호세중(護世中)에 존(尊)하야 호제중생(護諸衆生)하나니
장자유마힐(長者維摩詰)이 이여시등무량방편(以如是等無量方便)으로 요익중생(饒益衆生)이러라
만약 장자들에게 있으면 장자 중에 가장 높아서 그들을 위하여 뛰어난 법을 설한다.
만약 거사(居士)중에 있으면 거사 중에 가장 높아서 그들의 탐착을 끊어준다.
만약 찰제리들에게 있으면 찰제리 중에 가장 높아서 인욕으로써 가르친다.
만약 바라문들에게 있으면 바라문 중에 가장 높아서 그들의 아만을 제거해 준다.
만약 대신들에게 있으면 대신 중에 가장 높아서 정법(正法)으로써 가르친다.
만약 왕자들에게 있으면 왕자 중에 가장 높아서 충성과 효도로써 보여준다.
만약 내관(內官)들에게 있으면 내관 중에 가장 높아서 올바른 궁녀로 교화한다.
만약 서민들에게 있으면 서민 중에 가장 높아서 복력을 일으키게 한다.
만약 범천에 있으면 범천 중에 가장 높아서 뛰어난 지혜로써 가르친다.
만약 제석천들에게 있으면 제석천 중에 가장 높아서 무상(無常)함을 나타내 보인다.
만약 호세천(護世天)들에게 있으면 호세천 중에 가장 높아서모든 중생을 교화한다.
장자 유마힐이 이와 같은 한량없는 방편으로 중생을 유익하게 한다.
장자 유마힐이 이와 같은 한량없는 방편으로 중생을 이익하게 한다. 유마힐이 참 훌륭한 분이다.
이 시대 동시대에 우리가 같이 산다면 가까이 가서 보고 설법도 듣고 모시고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마음이 문득 들 정도다.
왜냐하면 이분은 장자나 거사나 찰제리나 바라문이나 대신들이나 왕자나 내관들이나 서민들이나 어떤 사람들 하고도 더불어 함께 하는 아량이 태평양 바다와 같이 넓은 분이기 때문이다. 그 푸근한 모습이 눈에 아주 선하게 다가오는 인격자이다.
오늘 유마경 공부 여기까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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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자리에서 공부하는 분들이 85명까지 왔다가 지금 76명이다. 많은 분들이 동참해서 훌륭한 법석을 만들었다. 다 여러분들의 덕분이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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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부처님의 태양은 날로 더 밝아지고 날로 더 빛나고
진리의 수레바퀴는 항상 굴러가서
모든 미몽에 허덕이는 중생들의 지혜를 열어주는 데
크게 힘을 써야 할 줄 믿습니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