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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덕대왕 신종. ⓒ | 많은 사람들이 새해가 되는 자정에는 보신각의 종소리를 듣는다. 그것을 들으면서 1년 동안 지킬 것들을 다짐하고 새해가 시작되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크고 굵은 소리로 출발해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오랫동안 은은하게 퍼지는 종소리가 우리의 마음 속에까지 번져 들어간다. 이런 종소리는 마음을 고요하고 들뜨지 않게 도와 새해 결심을 하는 데에 한몫을 하는 것 같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종과 그 특유의 소리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단연 손꼽히는 것은 국보 29호인 성덕대왕 신종이다. 사실 성덕대왕 신종은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을 만큼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은 보물이다.
이 종은 신라시대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그 다음 왕인 혜공왕 771년에 완성되었다. 장장 34년간 주조된 종이며 그 무게만도 25톤에 이른다니 종을 주조하는 데에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정성과 노력을 나타내기 위함인지 이 종에는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경덕왕이 대종을 만들기 위한 성금을 모으려고 전국에 시주 중을 내보냈을 때 어느 민가의 아낙네가 어린애를 안고 희롱조로 “우리 집엔 시주할 것이라고는 이 애밖에 없는데요.”라며 스님을 놀렸다. 그 후 종 만드는 일에 계속 실패를 거듭하자 일관이 점을 쳐서 그 이유를 알아보았다. 그 이유인즉 이것은 부정을 탄 것이니 부정을 씻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여러 갈래로 그 부정의 원인을 알아본 결과 그 아낙네 탓으로 단정되었고, 결국 그 애가 희생이 되어 종을 만들 때에 애를 넣음으로써 종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 후 종을 칠 때마다 나는 종소리가 아기의 울음소리 비슷하게 들렸고 사람들은 이 종을 “에미 탓으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여운의 소리와도 비슷한 “에밀레종”으로 부르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덕대왕 신종을 에밀레종이라고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전설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전설일 뿐이다. 이것은 종의 성분조사를 통해 검증되었다. 사람을 태웠다면 들어 있어야 할 인(P) 성분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덕대왕 신종은 그 여운의 소리 때문에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으로 더 널리 불려진다.
성덕대왕 신종의 소리
성덕대왕 신종의 종소리는 흔히 ‘심금을 울리는’ 소리로 표현된다. 전국 사찰에 걸려 있는 주요 종소리 10개를 들려주고 가장 가슴에 와 닿는 소리를 선택하라는 선호도 조사에서 응답자의 97.5%가 이 성덕대왕 신종의 소리를 꼽았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다른 종들에 비해서도 그 소리가 주는 감동은 남다르다.
지금부터 성덕대왕 신종 소리의 비밀을 풀어보자.
종소리의 근원은 종의 몸체의 진동이다. 종을 치면 몸체의 진동으로 공기가 진동하게 되고 이 공기의 진동이 듣는 사람의 고막에 전달되어 청각세포를 자극하게 되고 청각신경이 자극되어 소리로 인식된다.
종소리는 근본적으로 반경 방향, 원주 방향, 길이 방향 등 종 몸체의 탄성 변형에 따른 세 가지 진동에서 비롯된다. 그 중 가장 큰 진폭, 즉 소리가 가장 크게 되는 진동은 반경 방향에서, 가장 작은 것은 길이 방향에서 발생한다. 또한 종체의 위치에 따른 진폭은 하부, 중부, 상부의 순으로 감소된다. 따라서 종을 치는 위치가 종구(鐘口)로 내려올수록 종소리가 커지고 상부로 올라갈수록 작아진다.
다양한 주파수 성분을 가진 타음
타종하는 순간, 소리는 한꺼번에 생겨나 허공으로 퍼진다. 제일 처음 종에서 나는 소리는 타종 직후 1초 이내에 소멸하는 소리로 ‘타음’이라고도 한다. 이 타격 순간음은 종의 많은 부분의 강약음이 혼합되어 굉음으로 나타나는데, 이때에 나는 소리가 장중하고 당차야 하며 잡음은 없어야 한다. 성덕대왕 신종에는 종의 윗부분에 음관이라는 특이한 구조가 존재하는데 여러 학자들은 이 구조가 잡음(고주파 성분이다)은 빨리 빠져 나가게 하고 나머지 주파수대의 진동은 종 안에 있게 함으로써 타음의 잡음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당목(범종을 치는 나무)으로 종을 치는 운동에너지가 종의 몸체로 옮아서 종은 진동을 하게 된다. 성덕대왕 신종의 몸체에서는 한 가지 음파가 아니라 1000Hz(1초에 1000번 떨림) 이내에서만 50여 가지의 낱소리 음파가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세인트폴 성당의 종 ‘그레이트 폴’(17t, 1881년 주조)은 20가지에 못 미치는 음파가 발생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다양한 음파가 발생하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50여 가지의 주파수 성분(음파)이 있다는 이야기는 결국 타종을 하는 순간 50여 가지의 떨림이 종의 몸체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타음이 지나간 후에 타격 후 5~10여 초까지 계속되는 고음과 중음구간(64Hz~345Hz)은 ‘정상음’이라고 부른다. 성덕대왕 신종을 타종한 직후 발생한 낱소리들은 서로 흡수하거나 합병하지 않는다. 각 떨림은 제 몫의 운동에너지를 공기의 진동으로 바꾸어 마찰에너지로 소모한 뒤에 사그라든다. 빠르게 떨리는 고주파(높은 소리)일수록 마찰에너지를 많이 쓰게 되어 빨리 사라진다. 타종 뒤 몇 초 안에 거의 대부분의 낱소리들은 이런 식으로 소멸을 하게 된다.
맥놀이 현상이 일어나는 여음
타격 후 1분 이상, 최장 3분 정도까지 지속되는 음을 ‘여음’이라고 한다. 정상음 구간에서 많은 센소리들이 소멸하고 나면 약 9초 이후부터는 숨소리와 비슷한 64Hz와 어린아이 곡소리와 비슷한 168Hz의 음파만이 남게 된다. 학자들은 여음을 내는 데에 도움을 주는 구조는 ‘명동’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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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관과 명동. ⓒ | 성덕대왕 신종을 비롯한 신라종은 종각에 높이 매달고 치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조금 위에 종을 달고 친다. 이때에 종구 바로 밑의 바닥이 우묵히 패어 있는 명동(鳴洞)이라는 구조가 공명현상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여 좋은 종소리를 내게 할 뿐만 아니라 은은한 여음을 내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성덕대왕 신종의 명동은 파괴되어 실제로 종을 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없었다. 대신에 학자들은 모형 실험을 통해 명동이 공명동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내었다.
우리나라의 종, 특히 성덕대왕 신종의 여음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현상은 ‘맥놀이 현상’이다. 맥놀이 현상이란 울림에서 원래 소리와 되돌아오는 소리가 마주치게 되어 서로 더해지거나(보강간섭) 덜해지게(상쇄간섭) 되는 현상을 말한다. 보강간섭이 일어나면 소리가 커지고, 상쇄간섭이 일어나면 소리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김석현 강원대 교수와 이장무(서울대)·이치욱(미국 퍼시픽대) 교수는 2005년 3월, 이라는 국제학술지에 성덕대왕 신종의 맥놀이 현상을 연구하여 만든 ‘맥놀이 지도’를 발표했다.
맥놀이 현상은 168Hz와 64Hz 모두에서 일어난다. 168㎐의 음파는 타종하고 9초 뒤 아이의 곡 울음 소리처럼 ‘어~엉...’하고 울고는 사라지듯 하다가, 다시 한 번 9초 뒤에 약하게 울음을 토해낸다. 168㎐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168.52㎐, 168.63㎐의 두 가닥 음파가 한쌍을 이룬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차이(0.11㎐, 1초에 0.11번 떨림) 때문에 맥놀이 주기는 9초가 된다.
최후까지 남는 에밀레종 소리는 64㎐의 음파이다. 이 주파수의 음파도 실은 64.07Hz, 64.42Hz의 두 가닥 음파가 한 쌍을 이룬다. 이 차이(0.37Hz, 1초에 0.37번 떨림) 때문에 3초마다 한 번씩 등장하는 맥놀이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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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놀이 지도(왼쪽)와 맥놀이가 일어나는 진동모드쌍(오른쪽). 오른쪽 위는 64.07Hz, 64.42Hz, 아래는 168.52㎐, 168.63㎐의 맥놀이 현상을 나타낸다. ⓒ | 이런 맥놀이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성덕대왕 신종의 비대칭성 때문이다. 타종 순간 50여 가지가 넘는 주파수의 낱소리 음파가 발생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겉보기에 성덕대왕 신종은 엄격한 대칭이지만 종 표면의 문양·조각이 비대칭을 이룬다.
또한 몸체 곳곳의 물질 밀도나 두께도 모두 미세하게 다르고 심지어 쇳물을 부어 범종을 주조하는 순간에 우연히 섞이는 공기량도 약간씩 달라 어쩔 수 없이 종은 비대칭을 이루게 된다. 그렇다고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마치 우리 조상들의 기술적 한계라고 생각하면 잘못된 논리.
도리어 이러한 미세한 비대칭성이 범종 몸체에 다양한 떨림을 만들고 그것들이 조금씩 주파수 차이가 나는 음파를 내면서 어우러져 그토록 아름답고 은은한 종소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나라 종만의 특징인 음관과 명동, 그리고 미세한 비대칭성에 따른 맥놀이 현상까지. 이러한 특징을 잘 살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성덕대왕 신종 하나에도 이렇게 다양한 과학적인 소리와 진동의 원리가 숨어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랍다. 우리가 종소리를 듣는 것은 종 속에 담긴 다양한 원리를 몸으로 듣고 있는 것이니, 종소리를 들었을 때 가슴에 깊이 와 닿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 참고문헌 >
http://www.hani.co.kr/section-010100007/2005/03/010100007200503011737138.html 신라 과학기술의 비밀, 함인영 저, 삶과 꿈. 범종-생명의 소리를 담은 장엄, 곽동해 저, 한길아트. 성덕대왕신종, 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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