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타이 부채
민순혜
무더운 여름, 나는 핸드백 속에 항상 옌타이 부채를 갖고 다닌다. 접이식 작은 부채인데 작년 여름 중국 옌타이에서 한족(漢族)인 순(孙)한테서 받은 선물이다. 중국 특유의 붉은색이 알록달록 새겨진 자칫 조잡스럽지만 더운 날 거리를 걸으면서 부치면 너무도 시원하다. 다음 항차에 옌타이에 가면 그녀를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 문득 그녀 생각에 가슴이 시큰했다.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건 작년 1월 소상인 신분으로 중국 산동성 옌타이(烟台)로 선박여행을 갔을 때였다. 배가 인천항을 출항하자마자 나는 심한 뱃멀미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기진맥진해 있었다. 그때 같은 선실 안에 있던 그녀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나의 일행한테 말했다. 선내 2층 안내실에 상비 멀미약이 있으니까 갖다 준다고. 잠시 후 그녀가 가져온 멀미약을 먹고 나는 곧바로 깊은 잠에 빠졌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었을 때는 옌타이항에 거의 하선할 즈음이었다. 몸도 가뿐했다. 나는 얼마나 고맙던지 그녀한테 몇 번이나 인사를 했다. 그녀는 순(孙)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중의추나사(中醫推拿師)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수련 중이며, 휴가차 인천에 살고있는 친척집을 방문하고 돌아가던 참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소상인인 우리 일행은 옌타이항에 입국하자 곧바로 인근 싼잔시장으로 갔다. 그곳은 도·소매시장으로 일찍 철시해서 샘플작업을 한시라도 빨리 해야만 해서였다. 샘플작업을 끝냈을 때는 거의 오후 4시경. 일행과 시장을 빠져나오니 몸은 천근이나 되는 듯 피곤함이 몰려왔다. 온몸이 경직되고 발목도 아팠다. 문득 선상에서 만난 순(孙)이 떠올랐다. 나는 서둘러 택시를 타고 기사한테 그녀 명함주소를 보여줬다. 다행히 안마원은 시내에서 멀지 않았다. 허나 허름한 소형 아파트건물은 금방 철거라도 할 것 같은 험상궂은 분위기여서 선뜻 발을 들여놓기가 뭣했다. 한참을 망설이다 어정쩡하게 들어가니 마침 문 앞에 서 있던 그녀가 반갑게 맞이했다. 그곳은 주로 한족이 드나드는 안마원(按摩院)이었다. 협소한 실내에서 불편한 간이침대에 누웠는데도 그녀의 손이 닿으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지친 몸을 그녀한테 맡겨서일까, 그녀와는 금세 친근해졌다. 그 후도 옌타이에 갈 때마다 그녀를 찾아갔다. 물론 발안마를 받을 때도 있지만 그저 찾아가서 눈인사만 하고 오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그곳 직원들과도 자연 친근해졌다. 그러나 만난다해도 대화는 별로 없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다보니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지난 연말은 옌타이에 도착해서 곧바로 순(孙)을 찾아갔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기 위해서였다. 항상 사업차 급히 가느라 선물 한번 제대로 못했던 터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건가! 안마원이 있는 아파트건물은 온데간데없고 한겨울 텅 빈 공터는 찬바람만 윙윙 댈 뿐 마냥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 전화도 불통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재개발지역으로 철거된 거였다. 불과 한달 전에 왔을 때만 해도 아무 말 없었는데… 그렇더라도 나는 그곳에 있던 며칠간은 혹시라도 그녀를 만날까 해서 그 흉물 같은 공터를 자주 서성거렸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 후 옌타이에 몇 번 더 갔지만 감히 그녀를 찾을 엄두는 못냈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오직 이름 한 글자 순(孙)뿐이었기에.
금년 후반기 소상인 그룹으로 다시금 옌타이 시장조사 일정이 잡혀있다. 이번에 가면 꼭 순(孙)을 찾고 싶다. 행여 그 사이 아파트가 재건축되어 그녀가 떡 하니 버티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본다. 옌타이 부채를 잘 간직해야겠다. 초행으로 중국 옌타이행 선상에서 지독하게 뱃멀미를 하는 나한테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급기야 멀미약을 가져다 주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심사평>
민순혜 님의 글은 일상적인 삶을 평이하고 진솔하게 담아낸다. 「옌타이 부채」는 옌타이(烟台) 여행 중 중의추나사(中醫推拿師, 안마사) 순(孙)에게 받은 부채를 매개로 한 체험담이며, 「그는 오선지에 여행 아이콘을 그린다」는 소아마비 중증 장애인인 작곡가가 여름휴가 차 한 달 간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난 걸 소재 삼아 펼쳐낸 인간미가 스민 글이다.
이중에서 민순혜 님을 선정한 것은 안정된 작가적인 역량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수필문학은 모험에 찬 작가와는 달리 안정된 자신의 삶을 보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보듬어 내는 모습이 글에 스며있기에 흔들림 없이 창작활동에 이바지 할 것으로 기대된다.
심사위원/임헌영(문학평론가)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