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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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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회복 스크랩 신라의 동쪽 섬에 사는 식인종 거인들
파워맨 추천 0 조회 442 16.03.14 03: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인 <삼국사기>의 제 34권 지리편에는 한 가지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중국 역사서인 <신당서>를 인용하여 신라가 동쪽으로 키가 세 길(丈)에 톱날 이빨과 갈고리 손톱으로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괴물 종족인 장인(長人)과 대치하고 있어서, 신라가 그들을 막기 위해 항상 노(弩: 석궁)로 무장한 수천 명의 병사들을 (동쪽 국경에) 주둔시켜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가 과연 사실일까요?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바로 그 장인족 운운하는 내용의 뒤에 “이것은 그저 소문일 뿐이지 실제의 기록이 아니다.”라고 부정적인 의견을 달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어느 곳에서도 신당서의 기록을 인용한 단 한 군데를 제외하면, 신라가 동쪽의 거인인 장인족을 두려워하여 수천 명의 병사들을 주둔시켜 국경을 지키게 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만큼, 신라와 장인족 관련 이야기는 실제 사실이 아니라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신당서>는 엄연히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중국의 정식 역사서였습니다. 단순히 소문일 뿐이라면 왜 장인족에 관련된 이야기가 실렸던 것일까요?


사실, 장인족은 당나라 시대 중국에서 매우 인기 있었던 소설의 소재였습니다. 당나라 시대에 유행했던 단편 소설들을 모은 책인 태평광기(太平廣記)에는 당나라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신라로 가려고 했다가 그만 뜻하지 않게 풍랑에 휩쓸려 낮선 섬으로 표류했는데, 그곳이 사람을 잡아먹는 무서운 거인 괴물인 장인족의 소굴이었다는 식의 내용들이 자주 실렸습니다. 이런 괴담들을 중국인들이 하도 좋아하다 보니, 그만 역사서인 <신당서>에도 그런 내용이 들어갔던 것입니다.


태평광기(太平廣記)의 만이(蠻夷)편의 두 번째 단락인 신라(新羅) 부분을 보면, 장인족에 관련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 세 가지가 실려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이야기부터 소개해 보겠습니다.

 

“신라는 동남쪽으로 일본과 가깝고, 동쪽으로는 장인국(長人國)과 마주하고 있다. 장인은 키가 3장(丈)이나 되고, 톱처럼 생긴 이빨과 낫 같은 손톱을 지녔다. 불로 조리한 음식을 안 먹고, 동물이나 사람을 잡아먹는다. (장인은) 알몸으로 옷이 없으며, 검은색 털이 잔뜩 나 있다. 장인국에는 산이 수천 리나 연결되어 있는데, 산에 골짜기가 있고, 단단한 철문이 세워졌다. 그것을 철관(鐵關)이라고 한다. 언제나 궁노수(弓弩數: 활과 노궁 및 쇠뇌를 가진 병사들) 수천 명이 방어하고 있어서 통과할 수 없다.”

 

신당서 신라전에 말한 장인국 관련 내용은 저 태평광기의 내용과 거의 같습니다. 신당서가 당나라 조정이 편찬한 공식 역사서여서 보통 사람들이 보기는 어려웠다는 점과 신당서가 편찬된 연도가 당나라 이후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아무래도 신당서에 소설인 태평광기의 내용이 들어갔다고 보아야 타당합니다. 공식 역사서에 판타지적인 내용이 포함되었다고 의아해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 근대 이전까지 그런 일들은 전 세계적으로 매우 흔했습니다. 13세기의 유명한 탐험가인 마르코 폴로도 자신의 책인 동방견문록에 코끼리를 낚아채 잡아먹는다는 괴물 새인 로크의 이야기를 넣었으니까요.


태평광기에서 언급된 장인족은 신당서 신라전에서처럼 3장의 키에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가지고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로 묘사되었습니다. 여기서 장(丈)은 길이의 단위로 곧 1장은 10척입니다. 척(尺)은 고대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 널리 쓰인 길이의 단위인데, 중국의 각 왕조들이 들어선 시기마다 조금씩 그 기준이 달랐습니다. 그 중에서 태평광기에 언급된 당나라 시대에는 당척(唐尺)이 사용되었는데, 1당척은 29.7㎝였습니다. 그러니 3장이라면 30척인데, 당척의 기준으로 계산하면 891㎝가 나옵니다. 약 9미터인데, 그 정도의 체격을 가진 괴물이 나서서 사람을 잡아먹는다면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공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태평광기 내용의 끝 부분에서 궁수를 배치한 주체가 신라인지 아니면 장인족인지는 정확히 주어가 없어서 알기 힘듭니다. 다만 신당서 신라전과 태평광기의 문맥을 비교해 보면, 철관을 설치하고 그곳에 궁노수들을 배치한 주체는 아무래도 신라 같습니다. 철관과 궁노수의 배치는 다분히 방어적인 의미인데, 장인보다는 그들을 두려워하는 입장에 놓인 신라가 그런 조치를 내려 장인들을 외부 세계로 못 나오게 막았다고 해야 이치에 맞습니다. 장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철관과 궁수를 자기들이 배치하면 곧 통행을 막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자유롭게 밖으로 나가기가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태평광기의 장인족 관련 두 번째 이야기는 첫 번째 것보다 더 정황이 상세합니다.

 

“당나라 고종 황제가 즉위했던 영휘(永徽: 서기 650~655년 사이) 무렵, 당나라 사신이 먼저 신라에 가고 나중에 일본으로 가려 했는데, 바다에서 바람과 파도에 밀려 수십일 동안 표류하다가 어느 섬에 배가 닿았다. 날이 어두워지는 터라 배에 탔던 100명의 사람들이 육지로 내렸는데, 집을 발견하고 가보니 집 안에서 장인들이 나왔는데 그들의 체구는 2장(丈)이었다. 장인들은 옷을 입었고, 그들이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장인들은 중국인들을 보고 즐거워하더니, 그들을 집안에 가둬놓고 다른 장인 100여 명을 불러 모았다. 그렇게 모인 장인들은 중국인들 중에서 뚱뚱한 사람 50명을 골라내더니, 끓는 물에 넣고 죽인 후에 먹어버리고는 술을 마시고 취했다. 장인들이 골라내지 않은 사람들은 후원으로 달아났는데, 그곳에서 30명의 여자들과 마주쳤다. 그 여자들도 파도에 떠밀려 장인족의 섬에 왔다가 포로로 잡혔는데, 자신들과 함께 온 남자들은 장인족에게 잡아먹히고 장인족들은 여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입을 옷을 만들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들은 장인족을 두려워하였기에, 마침 장인족들이 술에 취하자 살아남은 사람들과 함께 달아났다. 서둘러 해안으로 달아나 배에 탔을 무렵, 천여 명의 장인족들이 울부짖으며 도망친 사람들을 도로 붙잡아가려고 달려왔다. 하지만 그보다 사신 일행들과 여자들이 탄 배가 먼저 해안을 떠나, 장인족들에게 붙잡히지 않고 무사히 도망쳤다.”


두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장인족들은 키가 2장, 약 6미터로 첫 번째 이야기의 장인족보다는 다소 키가 작습니다. 그리고 옷이 없다던 첫 번째 장인족과는 달리, 여자들을 살려두어 자기들이 입을 옷을 짓게 하며, 먹이(사람)를 끓는 물에 넣어서 요리하고, 발효시킨 음료수인 술까지 마시는 것을 보면 다소 문명화가 된 듯합니다. 하지만 그 잔인성은 첫 번째 이야기의 장인족과 비교해서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태평광기의 장인족 관련 세 번째 이야기를 다뤄보겠습니다.


“육군사(六軍使)의 직책을 맡은 서문사공(西門思恭)이 당나라 사신이 되어 신라로 가던 도중에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이리저리 떠돌다가, 남쪽의 땅에 이르렀다. 배에서 내리자 한 ‘큰 사람(大人)’이 다가왔는데, 키가 5장에서 6장이었다. 큰 사람이 입은 옷은 이상했고, 그가 하는 말은 천둥이 치는 소리와 같았다. 큰 사람은 서문사공을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거머쥐고는 1백 여리 밖의 동굴로 데려갔다. 동굴에는 다른 큰 사람들이 있었는데, 서문사공을 보고 희롱하며 즐거워했다. 큰 사람들은 서문사공을 구덩이에 넣었는데, 이틀 후에 서문사공은 구덩이를 벗어나 굴 밖으로 달려가서 배로 돌아갔다. 큰 사람이 서둘러 달려와 손으로 배를 잡자, 서문사공이 칼로 거인의 손가락 3개를 잘랐다. 그 손가락은 망치나 몽둥이 같았다. 고통을 느낀 거인이 도망치니, 서문사공은 재빨리 배를 타고 떠났다. 나중에 당나라로 돌아간 서문사공은 거인의 손가락 3개를 옻칠하여 조정에 바쳤다.”

 

서문사공이란 당나라의 고관이 본 대인족은 태평광기에 실린 장인족보다 더 컸던 모양입니다. 키가 5~6장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그 정도면 거의 15미터에서 18미터에 달합니다. 그가 맞닥뜨린 대인족은 특이하게도 동쪽이 아니라 남쪽의 섬에 살았는데, 서문사공을 딱히 잡아먹으려 하지는 않았다는 구절로 보아서 식인종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서문사공을 희롱하다가 구덩이에 넣어두고, 그가 달아나자 쫓아와서 도로 잡아가려고 했다는 구절로 본다면 결코 서문사공에게 좋은 뜻을 지녔던 것도 아닙니다. 사람보다 훨씬 큰 15미터 이상의 거인이라면 언제든지 손쉽게 서문사공을 죽일 수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태평광기에 실린 장인족(혹은 대인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정말이지 소름이 끼치고 현실에서라면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흉측한 괴물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데, 중국인들은 이 거인 종족을 어떻게 고안하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순전히 창작으로 만들어낸 것일까요, 아니면 외부 문화에서 영향을 받아서 만든 것일까요?


바다를 항해하다가 풍랑에 배가 밀려 낮선 섬에 떠밀려갔는데, 그곳이 사나운 식인 거인족이 살고 있어서 주인공 일행들이 잡아먹히는 등 고생을 하다가 간신히 탈출한다는 구조의 이야기는 태평광기보다 더 오래되었습니다. 기원전 7~8세기에 나온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오딧세이아>를 보면, 주인공인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돌아오던 도중에 배가 풍랑에 밀려 낮선 섬으로 표류했는데, 그곳에 하필 ‘퀴클롭스’와 ‘라피타이고이’ 같은 포악한 식인 거인족들이 살고 있어서, 일행들 중 몇 명이 잡아먹히고 오디세우스도 갇혔다가 겨우 도망친다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또한, 영웅 라마의 이야기를 담은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에 보면,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족인 나찰들이 등장합니다. 나찰(羅刹)은 산스크리트어의 락샤사(Rakshasa)를 한자로 옮긴 말인데, 이 락샤사의 왕인 라바나가 멀리 남쪽 바다의 섬인 랑카(오늘날의 스리랑카)에다 자신을 따르는 다른 락샤사들을 모아서 나라를 세웠으며, 이들이 주기적으로 인간들을 습격해 잡아먹는다는 이야기가 <라마야나>에 언급됩니다. 먼 바다의 섬에 살아가는 장인족의 이미지와 겹치는 대목입니다.


아마도 중국이 다른 세계와 활발하게 교류했던 당나라 시절에 동서무역로를 타고 <오딧세이아>와 <라마야나>의 거인족 관련 설화가 중국으로 흘러 들어왔고, 그래서 중국인 작가들이 두 외국 작품에 영감을 얻어서 장인족 전설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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