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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소감문 2020-11-18
책명: 35년
(박시백 작품: 비아북 출판)
1. 일제 강점기 시대를 돌아보며…
시대적 흐름과 시대정신에 대한 판단이 어떻게 사람들의 선택을 결정했는지 알아보려면 역사를 배우라. 박시백의 책 ‘35년’(전7권)을 읽고 나는 구한말부터 광복까지 이 땅을 지나간 수많은 유력자들과 지성인들의 행적을 간략하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격랑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으려고 온몸으로 싸운 사람들이다. 그 중에 일부는 독립유공자라는 칭송을 받았고 일부는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오명을 받았다. 하지만 무흠하여 좌초를 겪지 않는 이는 한 사람도 없다.
어떤 이는 중국의 힘을 빌어 독립의 길을 찾으려 했고, 어떤 이는 소련(소비에트연합)을 통해, 그리고 다른 이들은 미국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이룩하려고 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일본에 순응하고 천황의 백성이 되는 것이 시대정신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항일운동을 하다가 그 뜻을 돌이켜 일제에 굴복했다. 하지만 그 중에 극소수의 사람만이 광복 후에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뜻을 밝힌 것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시의 상황을 불가항력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100년이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그들의 행적을 이렇게 책으로 낱낱이 읽는다. 이렇게 보면 나의 오늘도 50~60년 후에 누군가의 글에게 철저하게 파헤쳐질 것이다. 이 시대의 격랑과 조수 가운데 나는 어떤 방향과 목적을 잡고 바른 항해를 했는지 그들은 판단할 것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가운데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항해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당대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영욕의 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부끄러운 역사가 있고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 우리는 시대와 역사의 조류에 그저 떠밀려 가는 일엽편주가 아니요, 키를 잡고 돛을 펴서 지도와 나침반과 별자리를 보며 소원의 항구를 향해 항해하는 사람들이다.
때로는 태풍을 만나 배가 흔들리고 항로에서 벗어나고 심지어 좌초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본래의 목적과 뜻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 배를 수리하여 항해를 재개할 수 있다. 적어도 조난신호를 보내면서 우리의 뜻을 계속 밝힐 수도 있을 것이다.
2. 시대적 사명을 찾으려는 선배들의 분투
여기서 우리의 목적지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라면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진리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적 사명을 발견한 것이다.
이제 지나간 시대의 인물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해 보면서 나의 항해를 점검하고자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우선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약산 김원봉, 백범 김구, 그리고 이승만과 박정희, 여운형과 이동휘, 김규식과 주기철 등이다. 그들의 걸어간 길은 정말 다양하고 독특하다.
이 인물들이 살던 시절 우리나라는 일제의 강점과 수탈로 큰 고통 가운데 있었다. 민족적 자존심을 짓밟히고 자유를 빼앗기고 삶에 큰 위기를 느낀 사람들은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다. 그 형태는 힘을 기르자는 자강운동과 계몽운동에서부터 무장독립투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서양문물과 새로운 사상이 밀물처럼 밀려왔고 해외 여러 나라에 가서 유학하며 다른 나라를 체험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이 접한 사상 중에는 기독교 정신을 비롯하여 민주주의, 그리고 공산주의 운동도 있었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선배들은 인생과 세계를 이해하며 그 가운데서 최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일본이 중일전쟁은 물론 러일전쟁마저 승리하고 나자 많은 지성인들은 우리나라가 일본과 하나 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하여 황국신민으로 살기를 다짐하고 민중을 그리로 인도하거나 내몰았다. 심지어 일본에 유학을 간 학생들에게 학도병으로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설 것을 권면하려고 유세단이 일본에 가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일제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 했던 사람들도 있지만 앞장서서 친일부역자가 되어 민족을 위험에 빠뜨린 사람들도 많았다. 심지어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이고 고문하고 죽이는 일에 열성적으로 일어난 사람들과 언론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한 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며 좋아했던가! 그만큼 우리 민족이 일본에게 고통을 겪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듣고 일본인들과 더불어 눈물을 흘린 사람들도 있다. 춘원 이광수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다.
세월이 흘러 독립을 이룬 지 75년이 지났다. 그 이후에 우리민족은 좌우익의 이념갈등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국가적인 기아와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서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독재자들을 몰아내고 정치적 자유와 성숙을 이루고자 선각자들은 치열한 싸움을 했다.
물론 일제 시대나 해방 이후 그리고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으로 출범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상을 소시민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간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하지만 태풍이 불면 온 마을이 들썩이는 것처럼 시대의 조류와 사상적 유행이 휩쓸고 지나갈 때 거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공동체 안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멀리 다녀온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고, 더 중요한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각 부분의 지도자들이다. 그들이 어떤 정신과 마음가짐으로 공동체를 이끌어가느냐에 따라 공동체의 운명은 매우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이나 공동체를 이끌어야 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시대정신과 시대적 사명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오늘 우리 시대의 요청은 무엇인가? 동서냉전으로 세계 모든 나라들을 편가르기하며 줄세우던 시절이 있었다. 또한 민족주의가 발흥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공동의 협력이 필요한 시절을 맞이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국가들은 서로 경쟁적인 위치에 있다. 가장 치열한 경쟁은 산업을 일으켜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과학기술의 연구와 개발, 그리고 경제에 있어서 우위를 차지하려고 혈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지구촌 전체의 협력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환경오염과 기후변화가 공동대처를 필요로 하는 영역이다. 그 외에도 경제협력과 정치적 갈등의 해소, 그리고 종교갈등의 해소와 인종갈등을 극복하고 등의 영역에서 지구촌의 문제는 더 이상 한 나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지구 전체의 범주에서 대처하고 협력해야 할 강력한 필요를 느끼는 시절이 되었다.
이런 시대적 요청 앞에 우리들은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인가? 먼저 우리는 선배들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구한말(대략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1863년 ~ 대한제국이 패망한 1910년)과 일제 강점기를 살던 시절에 우리 선배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한편으로 반성하고 한편으로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우려고 했으며, 또한 서방세계의 문물을 탐구하며 견문을 넓히고 민족의 역량을 증진하고 강화하려고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는 우리를 돌아보고 우리가 호흡하던 시대정신에 대한 반성과 다양한 사상적 조류와 비교하면서 갈 길과 할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3. 새로운 나침반과 지도: 은혜의 복음과 하나님의 경륜
나는 그 동안 개인적인 차원에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것은 나에게 고통을 안겨준 시절을 지나오면서 갖게 된 일종의 상처흔적(트라우마)을 치료하는 과정이며 세상살이를 지나오면서 내면의 옷에 묻은 오염을 세척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 상흔과 오염은 나에게 편견과 공포 또는 집착으로 나타나 삶의 항로를 흐릿하게 하고 비틀거리게 한다. 나는 신앙생활의 바른 항로를 찾고자 애를 썼다. 그렇게 해서 내가 발견한 새로운 나침반과 지도가 ‘은혜의 복음’과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은혜의 복음은 강압과 두려움 속에 신앙생활하던 나에게 은혜의 하나님에 대하여 새롭게 이해하게 한 복음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불안과 걱정 속에 끊임없이 자아비판을 하면서 스스로 정해 놓은 굴레와 타인이 가르쳐준 표준 속에 자신을 가두며 지내던 나에게 한없는 자유와 기쁨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마치 일제치하에서 해방을 맞이한 것과 같은 감격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나는 확신했다.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그 기쁨의 소식이 복음의 전부라고 당시에는 생각했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이 가라앉으면 당장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다가와 어떻게 그것을 헤쳐나가야 하는지 고심을 하게 되는 것처럼 나도 신앙생활과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나에게 주어진 과업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고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친 복음이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는 내가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한번 나에게 충격이었고 격변이었다. 내 신앙 여정의 항로에 큰 변침(變針)을 필요로 했다.
죽어서 하늘 위로 올라가 비로소 시작되는 천상의 세계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실현되는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 나라라는 점을 깨닫고 나의 신앙체계를 바로잡으려고 할 때 그것은 나의 영혼을 뒤흔드는 지각변동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톰 라이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지속적으로 나의 생각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한 끝에 나는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뜻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것이 내가 설교하는 바 ‘하나님의 경륜’이다.
이처럼 새롭게 발견한 나침반과 지도를 펼쳐 놓고 새로운 항해를 하려고 하니 세상과 신앙에 대한 새로운 항로가 보였다.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그것이 바로 축복이며 그런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며, 그렇게 하나님이 계획하시며 일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은 처음부터 이 세상에 대하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충만의 축복이었다.
하나님이 만물을 충만하게 하실 때 무엇으로 충만하게 하시겠는가?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은 세상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것이 창조의 아침에 선언하신 하나님의 축복 선언이었고 요한계시록은 그것을 다시 반복하여 그려준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 21:1~2
생명수의 강, 생명나무, 열두 가지 열매, 나무 잎사귀 등은 모두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 이미지의 반복이자 확장이다. 율법의 근본정신도 결국 생명으로 충만한 세상을 목적으로 한다.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나님 사랑은 진실된 삶이며 이웃 사랑은 따뜻한 삶이다. 이는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황금률로 요약된다. 또한 구약의 예언자 미가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는 종교적인 헌물보다 참되고 따뜻하고 겸손한 삶이라고 힘주어 말했다(미가 6:8).
4.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른 항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나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된 시대적 사명과 요청에 대한 생각은 어느덧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그 보편적 가치를 진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산상수훈에 특히 집중되어 있는데 그것은 결국 팔복에 요약된다. 나는 팔복선언이 하나님 나라의 마그나카르타라고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번호 | 팔복 선언 | 핵심가치 | 공동체 정신 | 대안과 대항 |
1 | 심령이 가난한 자 | 빈심(貧心) | 구도(求道) | 속물주의 |
2 | 애통하는 자 | 애통(哀痛) | 연대(連帶) | 이기주의 |
3 | 온유한 자 | 온유(溫柔) | 포용(包容) | 배타주의 |
4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의갈(義渴) | 진실(眞實) | 위선과장 |
5 | 긍휼히 여기는 자 | 긍휼(矜恤) | 협력(協力) | 고집독선 |
6 | 마음이 청결한 자 | 청심(淸心) | 양심(良心) | 세속주의 |
7 | 화평하게 하는 자 | 화평(和平) | 상생(相生) | 독점편파 |
8 |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 | 의행(義行) | 실천(實踐) | 탁상공론 |
하나님 나라의 마그나카르타
http://cafe.daum.net/Wellspring/VmL7/2
이렇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정리하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결국 인류의 공생과 공존, 그리고 공영의 길이다. 그것은 지역주의나 민족우월주의를 극복하고 종교적 배타주의와 근본주의적 편협성을 극복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특히 신앙과 종교의 영역에서 이런 정신을 추구할 때 종교다원주의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초기교회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영광의 이름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수치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도 어떤 사람에게는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며 바른 방향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극히 위험한 사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나는 종교다원주의가 모든 종교를 통합하여 그 특색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각 종교의 근본정신을 바르게 파악하여 그것에 충실한다면 다양한 종교가 어우러져 화평상생의 세계를 위해 기여하고 협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극단적인 과격성을 보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동일하게 위험한 사람들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다. 그 양자 간의 대화와 상호이해의 가능성을 제시한 사람이 한스 큉이다(참고: 그의 책, 그리스도교).
하나님의 경륜이 지향하는 목적지를 인류의 공영과 생명으로 충만한 세계로 이해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전도와 예배의 목적과 활동 방향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즉, 신앙생활에서 중점을 두어야 할 영역을 재고해 보자는 말이다. 먼저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경배를 통해서 영적인 통찰과 위로를 받으며 참된 삶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세상과 인생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그것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이다. 이것을 톰 라이트는 ‘예배와 선교’로 요약하였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예배와 찬양을 통한 영적 충만함을 추구하는 것과 아울러 진리에 대한 구도자적 열심과 소양을 배양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예배와 교회생활 중심에서 진리탐구라는 구도자의 삶으로 발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 진지한 탐구의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기독교 신앙은 스스로 확신과 각성 속에서 시대를 바르게 분별하며 시대적 사명을 발견하고 거기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기독교 신앙은 공동체 정신과 민주적 시민의식과 소양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하고 스스로 적극적으로 참여애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주요한 목표를 교회성장과 선교라는 외형적 확장 그 자체에 두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모습을 지역사회에 보여주고 그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협력하거나 선도하는데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신앙의 궤도를 바꾸려면 가장 먼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을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즉, 이 땅을 떠나 영혼이 내세에 들어갈 천상의 세계가 천국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실현하여 이루어지는 화평상생의 세상이 하나님 나라 곧 천국임을 명확하게 깨닫고 정리하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노력해야 할 일이 비단 교회를 세우고 직접적인 선교활동만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모든 노력이 선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각성과 의식의 전환과 성숙을 통해서 교회는 비로소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그리고 동반자와 협력자로 나아가 선구자로 그 소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신학과 교리의 틀에 갇혀 세계사적 문명의 발전 앞에서 인식의 지체현상을 보일 때마다 인권을 유린하고 갈등을 촉발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점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 우리나라 개신교회는 화평상생의 길을 걷기보다는 교리적 우월주의라는 배타성과 율법주의라는 경직된 사고의 껍질을 벗어버리지 못한 것 아닌가 심히 우려된다. 개신교회가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구호가 차별금지법의 입법반대와 낙태금지법 폐지의 반대, 그리고 반이슬람에 있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의 우려와 같이 지금 우리는 이런 문제를 넘어 기후위기와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와 종의 멸종 문제 앞에 서 있으며, 빈부의 격차가 급격하게 퍼져 국내는 물론 국제간에도 병든 민주주의와 병든 자본주의를 어떻게 치료하느냐에 인류의 생존과 공영이 달려 있다는 시대적 인식 앞에 있지 않은가? 이것은 한 나라나 한 종교의 노력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세계적 문제요 모든 인류가 합심할 때 해결할 수 있는 난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지 않으셨을까? 애굽에 요셉을 미리 보내서 7년 흉년을 대비하게 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