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배 파는 집 / 문태준
뭔지는 모르지만 자꾸 가고 싶은 곳이 여러 군데 있게 마련이다. 가을이 되면 내게도 그렇게 마음이 자꾸 끌리는 곳이 네댓 군데 있다. 억새가 핀 제주도 오름이 첫 번째 그곳이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물고기 비늘처럼 햇살이 부서지는 가을 강을 따라 느리게 걷는 일도 좋다. 토란을 베고 있는 시골 밭가에 앉아도 좋고, 도토리가 떨어지는 떡갈나무 아래에 가만히 서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의 살결을 만져보아도 좋다. 그러나 대개 이런 곳은 마음속으로 벼르다 들를 수 있는, 일상으로부터 좀 떨어진 곳이어서 누군가의 소매를 끌어가며 금방 가 닿을 만한 곳은 못 된다. 대신 가을이 오면 내가 자주 찾는 곳은 '햇배 파는 집'이다.
햇배 파는 집은 집에서 걸어가더라도 십 오 분이면 족한 거리에 있다. 소나무가 많은 작은 산책로를 따라 낮은 언덕을 넘어 들길을 조금 걷다 보면 햇배 파는 집이 나온다. 물론 중간에는 막걸리집이 하나 있다. 막걸리집은 막걸리를 팔지만, 박을 따서 팔기도 하고, 오이를 따서 한 동이씩 팔기도 한다. 막걸리집도 나에게 가을을 팔지만, 햇배 파는 집에서 파는 가을만큼은 못하다.
햇배 파는 집은 아주 낡아서 곧 무너질 기세로 앉아 있다. 묵은 살림살이 따위의 잡동사니들이 여기저기 쌓여있다. 오늘 낮에 갔더니 마당가에는 국화가 피었다. 장독대에는 고양이가 졸음에 겨운 듯 반쯤 감긴 눈을 하고 나를 맞아주었다. 하얀 배꽃이 한창일 땐 세 마리의 새끼 고양이가 따라 다니더니 오늘은 온데간데없다.
햇배 파는 집은 꽤 큰 배밭을 소유하고 있다. 노부부가 짓기에는 힘에 부치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큰 농사이다. 앞마당과 뒤란 할 것 없이 가을 풀벌레 소리가 빼곡했다. 널어 둔 빨래를 걷으며 할머니가 먼저 나에게 눈인사를 건넸고, 이내 할아버지가 주섬주섬 헌 옷가지를 걸쳐 입고 나왔다. 창고에는 따놓은 배가 수북했다. 다섯 개를 만원에 판다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써놓았지만, 할아버지는 덤으로 조금 더 얹어 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할아버지의 인심에는 변함이 없다. 오늘은 이만 원 어치를 사서 네 개를 더 얻었다. 올 햇배는 예년에 비해 더 달다며 할아버지는 금세 배를 깎아 배 한 쪽을 나에게 건넸다. 햇배를 한가슴 안고 그 집을 돌아 나올 때 나는 가을이 햇배 파는 집을 꼬옥 껴안는 것을 보았다.
이번 가을에도 나는 햇배 파는 집의 단골손님이 될 것이다. 햇배를 사서 이 집 저 집 나눠줄 것이다. 이 집 저 집 햇배를 나눠주면 사람들은 마치 보석을 선물 받은 것처럼 좋아한다. 그이들 입 안에 괼 달디 단 햇배 맛을 생각하면 나의 오후도 행복해진다. 가까운 곳에 과수원이 있다면 가을에는 그곳에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을을 파는 집, 자연을 파는 집. 그곳에 가면 당신도 너그럽고 큰 자연이 될 테니까.
[문태준] 시인. 1994년 『문예중앙』신인문학상 등단.
*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 산문집 《느림의 미학》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동서문학상 등.
문태준 시인의 문장을 대하면 참 맑다는 느낌이 들어요. 밝고 점잖고 다감하고 깊어요. 오늘 쫌 일찍 출근해 ‘들길’을 좀 걸었네요. 들녘 공기가 하도 좋아 막 벅찼어요. 대봉시가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어요.
문득 오래 전 읽었던 문태준 시인의 이 글 ‘햇배 파는 집’이 생각났네요. 입에 침이 고이는 글이죠. ‘막걸리 파는 집’과 ‘햇배 파는 집’을 ‘가을을 파는 집’이라잖아요. 그 집 앞마당에 뒤란에는 풀벌레 소리가 빼곡하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