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19일 수요일 묵상
<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12: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12: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12: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12:5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12:55>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12: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12: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12:58>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12:59>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본문 해석)
3월 19일 수요일 누가복음 12:49~59
49~53절
49절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을 던지기 위해 오셨다. 불은 맥락상 강력한 심판의 이미지다. 예수님의 종말론적 사역이 심판을 통해 정결을 가져온다는 것을 불의 이미지가 잘 담아내고 있다. 예수님은 이 불이 이미 붙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다.
50절 예수님은 자신이 받을 세례가 따로 있다고 말씀하신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요한에게 이미 세례를 받으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장차 받으실 세례는 어떤 세례인가? 물에 잠겼다 물 위로 올라오는 세례에서 전자는 예수님이 당할 고난을, 후자는 부활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그 세례가 완성되기까지 바라시는 간절함과 답답함을 강조하신다. 사망(물)이 그를 삼킬 테지만, 부활의 때에 불이 그 사망을 삼켜, 영원히 심판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 순간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계신다.
51절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쟁을 주러 오셨다. 예수님이 화평이 아닌 분쟁을 주려고 오셨다는 말은, 심판의 정황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바알세불로 치부하며 심판을 자초했다. 그들은 샬롬을 거부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운명과 궤를 같이 한다. 예수님의 샬롬을 거부한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님을 받아들인 제자들이 샬롬을 이룰 수 없고 분쟁할 것이다. 52절 결과적으로 세상과 제자 공동체는 서로 분쟁할 것이다. 그 분쟁은 안타깝게도 가장 친밀한 공동체인 가정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식이나 형제와 분쟁할 것이다. 한 집안에 다섯 사람이 서로 갈라져 맞서게 될 것이라 하신다.
53절 둘과 셋 또는 셋과 둘이 나뉠 수밖에 없다. 분쟁으로 분리되고, 그 분리는 심판을 초래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과, 어머니가 딸과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분쟁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가족관계의 파괴는 예수님의 종말론적 사역이 필연적으로 야기할 구분과 분리로 이해해야 한다.
54~59절
54절 예수님의 교훈은 무리를 향한다. 11:14부터 시작되는 바알세불 논쟁에서 등장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표적을 구했다. 기상 예측 방식을 가지고 무리의 무지를 지적하신다. 구름이 서쪽에서 일면 소나기가 온다. 서쪽 구름은 지중해에서 일어 수분을 많이 머금기에 소나기를 유발한 가능성이 높다.
55절 남풍이 불면 기온이 올라 덥다. 남쪽의 바람은 네게브 사막의 뜨거운 공기를 끌고 올라오기 때문에 기온을 순식간에 높인다. 가르침의 초점은 현상을 바탕으로 가까운 미래를 예측하고 분별할 수 있는 지혜다.
56절 예수님은 그런 기상은 쉽게 해석하면서 시대는 해석하지 못하는 무리를, 외식하는 자라고 부르시며 그들의 무지를 꼬집으신다. 시대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져오신 새 시대, 곧 구원과 심판이 펼쳐지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다.
57절 옳은 것을 판단할 지혜가 없음을 말씀하신다.
58절 고발하는 자와 법정에 서기 전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신다. 무리로 지칭된 ‘너희’는 가해자로서 고발자에게 상당한 금전적 피해를 입혔다. 고발자의 고발은 정당하고 재판 결과는 뻔하다. ‘너희’는 재판장의 판결로 옥졸에 넘겨지고 옥에 갇힐 것이다. 그 피해를 다 갚기까지 옥살이를 면치 못할 것이다.
59절 빚의 한 푼까지 다 갚아야 나올 수 있다. 한 푼으로 번역된 렙돈은,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통용된 화폐 중 가치가 가장 낮은 단위로, 재판의 엄중함을 더해준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그 뻔함을 안다면, 법정에 들어가기 전 길에서 합의에 힘쓰라는 것이다. 무리가 이 시대를 올바로 분별할 지혜가 있었다면, 심판의 심각성과 그 결과의 비참함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예수님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표적을 구할 것이 아니라 표적이신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비방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 예수님의 예루살렘 대열에 동참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