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관명(李觀命)
[본관] 전주(全州)
[주요관직] 함열현감. 예조참판. 좌의정
[문과] 숙종(肅宗) 24년(1698) 무인(戊寅) 알성시(謁聖試) 을과(乙科) 1[榜眼]위(02/06)
[생원] 숙종(肅宗) 13년(168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生員) 2등(二等) 15위(20/100)
[생졸년] 1661년(현종 2)~1733년(영조 9) / 수(壽) 72歲
[거주지] 한성([京])
조선 후기에, 함열현감, 예조참판,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빈(子賓), 호는 병산(屛山). 이수록(李綏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경여(李敬輿)이다. 아버지는 판서 이민서(李敏敍)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좌의정 원두표(元斗杓)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사마시에 합격, 이듬해에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고, 공조정랑을 거쳐 함열현감이 되었다. 1698년 알성문과에 급제, 전조(銓曹) 낭관(郎官)·사인 등을 역임하고, 이조·병조·예조 등의 참판을 거쳐 양관 대제학을 지냈다.
1721년(경종 1) 모함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며, 이듬해 신임옥사 때 아우 이건명(李健命)이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극형을 받자, 이에 연좌되어 덕천으로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풀려나와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에 이르렀다.
외직에 있을 때 민은(民隱)을 잘 보살폈고, 시폐(時弊)의 시정책을 촉구하는 상소를 많이 올렸다. 또한, 묘당에서는 임금의 융숭한 예우를 받았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응제문(應製文)·반교문(頒敎文)·시책문(諡冊文) 등을 많이 남겼다. 흥덕 동산서원(東山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병산집(屛山集)』 15권 8책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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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의정(左議政) 이관명(李觀命) 묘표(墓表) - 사위 유숙기(兪肅基)
공의 휘(諱)는 관명(觀命)이요, 자(字)는 자빈(子賓)이며, 호(號)는 병산(屛山)이니 일찍이 자나깨나 청풍(淸風) 금병(錦屛)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리워하여 지은 것이다. 세계(世系)는 선원(璿源)에서 나왔으며 세종 장헌 대왕(世宗莊憲大王)에게 별자(別子)가 있었으니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이고 4세를 지나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이극강(李克綱)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 이수록(李綏祿)은 호가 동고(東皐)이며 벼슬은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그쳤으며, 할아버지 이경여(李敬輿)는 영의정(領議政)으로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고 호는 백강(白江)이다. 아버지 이민서(李敏敍)는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양관(兩館)의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고 호는 서하(西河)이며,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좌의정 원평 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元斗杓)의 딸이다.
서하공이 종숙부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 이후여(李厚輿)의 후사로 출계(出系)하였으니, 그의 아버지는 형조 참의 이성록(李成祿)으로 첨정공의 사자(嗣子)이다. 공은 숭정 기원(崇禎紀元) 신축년(辛丑年, 1661, 현종 2) 정월 21일에 출생하였다.
어려서 모습이 우뚝하여 남달랐고, 독서를 좋아하여 약관(弱冠)이 되지 않아 학예(學藝)가 이미 성취되었다. 숙종(肅宗) 정묘년(丁卯年, 1687, 숙종 13)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을해년(乙亥年, 1695, 숙종 21)에 처음 벼슬하여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다.
무인년(戊寅年, 1698, 숙종 24)에 공조 좌랑(工曹佐郞)에서 함열 현감(咸悅縣監)으로 나갔다. 가을에 알성과(謁聖科)에 급제해 춘방(春坊), 삼사(三司), 전조(銓曹)의 낭관(郎官),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등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옥당(玉堂)에 가장 오래 있으면서 충심(忠心)으로 계옥(啓沃)하여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여러 차례 응지(應旨) 진언(進言)하여 매양 성지(聖志)를 세우고, 성학(聖學)을 밝히고, 검덕(儉德)을 숭상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라고 한 말이 간절하였다. 외직으로는 경기 도사(京畿都事)ㆍ무주 부사(茂朱府使)ㆍ영유 현령(永柔縣令)을 지냈는데, 무주는 부모 봉양을 위해서였고, 영유는 임금의 뜻을 거슬려서인데 모두 백성들에게 은혜와 유애(遺愛)가 있었다.
기축년(己丑年, 1709, 숙종 35)에 통정 대부(通政大夫)가 되었고, 갑오년(甲午年, 1714, 숙종 40)에는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무술년(戊戌年, 1718, 숙종 44)에는 자헌 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 삼사(三司)ㆍ국자(國子)의 장(長), 은대(銀臺)ㆍ경조(京兆)의 장(長)과 아(亞), 이조ㆍ병조ㆍ예조 세 조(曹)의 좌이(佐貳), 사구(司寇)ㆍ종백(宗伯)이 모두 그가 지낸 벼슬이다.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에 이르고, 재차 전형(銓衡)을 관장하여 임금의 지우(知遇)가 날로 융숭해졌는데, 공은 더욱 악인을 제거하고 선한 자를 등용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병조 참지(兵曹參知)를 거쳐 잠시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나갔다가 소사도(小司徒)로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경자년(庚子年, 1720, 경종 즉위년) 국상(國喪) 때의 노고로 한 자급이 올랐으며, 이듬해 경종(景宗)이 즉위한 겨울에 간흉(奸兇)이 권병(權柄)을 도둑질하여 선한 사람들을 모함하여 공도 삭출(削黜)되었다. 임인년(壬寅年, 1722, 경종 2)에 화(禍)가 일어나자 계씨(季氏) 한포공(寒圃公)이 극형을 당하고, 공은 연좌되어 덕천(德川)으로 유배되었다가 금상(今上, 영조) 원년(元年) 을사년(乙巳年, 1725, 영조 원년)에 사유(赦宥)를 입어 돌아와 지돈녕(知敦寧)을 제배하였는데, 임금이 별유(別諭)로 불러보았다.
얼마 후 사공(司空)으로부터 대배(大拜)하여 시민당(時敏堂)에 들어가 뵈면서 힘껏 대의(大義)를 토복(討復)하기를 청하였는데 수천 마디 말이 격절 강개(激切慷慨)하니, 임금이 경청(傾聽)하고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이에 백관을 이끌고 궁궐 뜰에 모여 여러 흉인(兇人)의 죄를 주벌하라고 청하였는데, 이렇게 하기를 한 달 남짓이나 하였으나 임금이 이미 탕평책(蕩平策)의 설(說)이 들어간 뒤여서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공 역시 나온 것을 후회하여 떠나려고 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병을 이끌어 들어갔다가 얼마 후 강외(江外)로 나가 모두 스무 번이나 글을 올려 체직되었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새로 정승을 두면서 공을 좌의정으로 올렸는데 해직하기에 미쳐서 예에 따라 서추(西樞)에 두었다.
이때부터 8년간 세도(世道)가 날로 무너지고 변고(變故)가 첩첩이 생겼다. 그러나 공은 일심으로 순국(殉國)하려는 마음이 붉게 빛나 물러났다고 하여 차이를 두지 않고 매양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문득 제일 먼저 달려가 물었으며 비록 병이 중할 때에도 마음에 잊지 못하고 오직 나라의 안위(安危)만 생각하였다. 계축년(癸丑年, 1733, 영조 9) 10월에 병이 나 서울로 실려와 11월 초10일 북곡(北谷) 집에서 고종(考終)하니, 춘추 73세였다.
이듬해인 갑인년(甲寅年, 1734, 영조 10) 정월 29일에 교하(交河) 법흥리(法興里) 경좌(庚坐)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전부인(前夫人)과 합봉(合封)하였다. 부인은 바로 덕수 장씨(德水張氏)로 판서 장선징(張善徵)의 딸이요 문충공(文忠公) 장유(張維)의 손녀이다.
겸공(謙恭) 정숙(貞淑)하여 공의 배덕(配德)에 어긋남이 없었는데 공보다 1년 뒤에 출생하여 공보다 31년 앞서 죽었다. 2남 1녀를 길렀으니, 장남 이망지(李望之)는 일찍 죽고, 다음 이익지(李翊之)는 교관(敎官)이요, 딸은 참봉 유숙기(兪肅基)에게 시집갔다.
후부인(後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학생(學生) 권중만(權重萬)의 딸로 2남 7녀를 길렀다. 맏이는 이휘지(李徽之)이고, 다음은 이홍지(李弘之)이며, 딸은 심정현(沈廷賢)ㆍ조중회(趙重晦)ㆍ진사(進士) 김치량(金致良)ㆍ신최령(辛最寧)ㆍ김치인(金致仁)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측실(側室)에서 난 아들 이헌지(李憲之)는 일찍 죽고, 딸은 김익겸(金益謙)에게 시집갔다. 이망지는 아들은 없고 딸 하나는 서명화(徐命華)의 아내가 되었다. 이익지는 2남 1녀인데, 장남 이정상(李貞祥)은 백씨(伯氏)의 후사가 되었으나 요절하고 단지 딸 하나만 두었으며, 다음 이석팽(李石彭)과 딸은 어리다. 외손 남녀는 모두 7명이다. 이헌지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역시 어리다.
아! 공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 인효(仁孝)하고 정직(正直)한 행실이나 강의(剛毅) 준결(峻潔)한 지조에서, 언론(言論) 풍채(風采)의 아름다움, 경술(經術) 문장(文章)의 성대함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입언(立言)하는 군자(君子)가 발휘하여 천만년까지 전해야 하는데, 소자(小子)가 표석(表石)의 뒤 빈곳에 감히 그 세계(世系)와 이력(履歷)ㆍ생졸(生卒)ㆍ자손(子孫)과 사행(事行)의 대강을 이상과 같이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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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左議政李觀命墓表[兪肅基]
公諱觀命, 字子賓, 號屛山, 以嘗寤寐淸風錦屛之勝也。 系出璿源, 世宗莊憲大王有別子曰密城君諱琛。 四世至奉常僉正諱克綱, 寔公之高祖也。 曾祖諱綏祿, 號東皐, 官止驪州牧使: 祖諱敬輿, 領議政, 諡文貞, 號白江: 考諱敏叙, 吏曹判書、兩館大提學, 諡文簡, 號西河。 妣貞夫人原州元氏, 左議政原平府院君諱斗杓之女。 西河公出後于從叔父訓鍊院都正諱厚輿, 其考刑曹參議諱成祿, 僉正公之嗣子也。
公生於崇禎紀元辛丑正月二十一日。 幼岐嶷不群, 好讀書, 未弱冠藝業已成。 肅宗丁卯, 中司馬。 乙亥, 筮仕, 爲翊衛司洗馬。 戊寅, 自工曹佐郞, 出監咸悅。 秋, 闡謁聖科, 歷春坊、三司、銓曹郞、政府舍人, 而在玉堂最久, 悉心啓沃, 所補衮闕甚多。 累應旨進言, 輒以“立聖志, 明聖學, 崇儉德, 恤民隱”拳拳焉。 外則京畿都事、茂朱府使、永柔縣令, 茂因爲養, 永以忤旨, 而俱有惠愛在民。
己丑, 通政。 甲午, 嘉善。 戊戌, 資憲。 若三司・國子之長、銀臺・京兆之長・亞、吏・兵・禮三曹佐貳、司寇、宗伯, 皆其所歷, 而及以兩館大提學, 再掌銓衡, 則主知日隆, 而公益以激揚淸濁自任焉。
常由兵曹參知, 暫出爲安東府使, 而以小司徒奉使燕京。 庚子, 國恤, 以勞陞一資。 翌年辛丑, 景廟初服也。 冬, 奸兇竊柄構, 陷善類, 公被削黜。 壬寅, 禍作, 季氏寒圃公罹極刑, 公坐流德川。 今上元年乙巳, 蒙宥還, 道拜知敦寧, 別諭趣召。 尋自司空大拜, 入見時敏堂, 力陳討復大義, 首尾數千言激切慷慨, 上傾聽而稱善。 於是率百僚會大庭, 請誅群兇罪, 如是者月餘, 上已入蕩平之說, 終靳允。 公亦自悔其來, 而求去不得。 始移疾引入, 居無何, 陳疏徑退, 出寓江外, 章凡二十上, 得遞乃已。
先是, 上新置相, 公陞爲左議政, 及解職, 例還西樞。 自是八年之間, 世道日壞, 變故層生, 而公之一心殉國, 炳然如丹, 不以退處而有間, 每國有大事, 奔問輒先, 雖於疾病沈頓之際, 而所耿耿惟在宗社安危。
癸丑十月, 舁醫京師。 十一月初十日, 考終于北谷第, 春秋七十三。 越明年甲寅正月二十九日, 禮葬于交河法興里庚坐原, 與前夫人合封焉。 夫人卽德水張氏, 判書善澂之女, 文忠公維之孫。 謙恭貞淑, 配德無違。 生後公一年, 歿先公三十一年。 育二男一女: 男長望之, 早歿: 次翊之, 敎官。 女適參奉兪肅基。 後夫人安東權氏, 學生重萬之女。 育二男七女: 男長徽之, 次弘之。 女適沈廷賢、趙重晦、進士金致良、辛最寧、金致仁, 餘幼。 側室男憲之, 夭; 女適金益謙。 望之無子, 一女爲徐命華妻。 翊之二男一女: 男長貞祥, 爲伯房後, 又夭, 只有一女。 次石彭及女, 幼。 外孫男女竝七人。 憲之一男一女, 亦幼。
嗚呼! 公偉人也。 其仁孝正直之行, 剛毅峻潔之操, 以至言論風采之懿, 經術文章之盛, 宜有立言君子發揮, 以詔千億, 而小子以表石背虛, 敢記其世系、履歷、生卒、子孫及事行之槪如右云。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