닝보 여행11 - 민속 문화거리 난탕라오지에서 절강성과 닝보 역사를 생각하다!
닝보(영파) 에서 서양인 조계지인 라오와이탄 老外滩 (노외탄) 을 보고는 티엔이쾅창
天一广场 (천일광장) 을 구경한 후에 지하철을 타고 구러우역 에 내려 걸어서
월호 에 도착해 水厠碑(수측비) 를 거쳐서 宝奎苗(보규모) 를 찾아 고려사관유지
(高麗使館遺址) 비석을 보며 옛날 이 도시를 방문했던 고려 사신과 상인 을 생각합니다.
호수가 달 처럼 생겨서 월호공원 月湖公園 으로 명명되었다는 인공호수를 구경하고는
명나라때인 1561년 병부우시랑 (兵部右侍郞)을 지낸 범흠(范欽 판친)이 자신이
소장한 책들을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장서각 인 티엔이커 (天一阁 천일각) 를
보고는 택시로 남당 민속문화 거리인 난탕라오지에 南塘老街 (남당노가) 에 도착합니다.
오래된 옛 건물 이 늘어선 먹자 골목 으로 유난히도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남녀 들이
많은데 중간에 정자 며 또 볼거리들이 많은데다가 불을 켜니 야경 이 볼만합니다.
수로를 따라 조성된 명청시대 고건축군이 모여 있는 난탕라오지에 南塘老街 (남당노가)는
옛날에는 닝보 남문 밖에 있었는데, 민속문화 거리로 개발되어 쇼핑가로 변했으니
북한 여종업원 이 집단으로 탈북한 류경식당 이 있는 거리로 지금은 식당이 없어졌습니다.
저장성 닝보 (宁波市 영파)는 용강(甬江) 과 여요강(餘姚江)의 합류 지점으로 7000년전
시작된 벼농사 허무두 문화의 발상지 이고 춘추 시대에는 월나라 의 영토였으나
초나라에 병합되었고 기원전 222년 진나라의 영토로 병합되어 회계군 이 설치되었습니다.
당나라 시절에 명주(明州) 로 불렸는데 시박사 가 설치되어 일본, 신라, 동남아시아의
배가 자주 왕래하고 송・원나라 때에는 일본 승려가 유학 했으나 1523년에 닝보의난
이후 일본 배의 입항이 금지 되면서 왜구나 해적이 약탈하는 횟수도 늘어났다고 합니다.
닝보(영파) 는 송대에 경원부(慶元府), 명청대에 영파부(寧波府) 로 불리며 동남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해양 실크로드 가 닝보에서 출발 하는등
세계적인 항구로 성장해 포르투갈인 들이 1522년에 찾아와 통상을
시작했다는데 명나라로 부터 조정을 거절당한 포르투갈선박이 밀수 를 시작합니다.
영국은 아편전쟁을 계기로 영파를 점령 하였으며 1842년 난징(南京) 조약 으로
국제항 이 되었고 도시 앞에 저우산열도가 있으며 조류(潮流) 가 밀려들 때....
높이가 3~4m 나 되어 파도에 의한 피해가 크므로 '파도가 평안하기를 빈다'
는 뜻에서 붙여진 지명이 寧波(영파, 닝보) 이며....
1인당 GDP 는 2008년에 1만 달러를 돌파해 중국 전국 평균의 3배 이상 입니다.
1978년 8월 닝보의 동문구(東門口) 에서 1300년경(송말 원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소 터와 침몰선 일부가 발견되었으며 현대에 닝보는 무역 이 발달하고
교육 을 매우 중요시하는 도시로 부지런하고 알뜰한 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의 유명한 상인과 과학자 중에 닝보 출신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데 사업이나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빛나는 닝보 사람이 많으니 더 넓은 바깥 세상에
대한 갈망은 닝보문화의 DNA에 녹아있으며 도시에서는 결혼박람회 도 자주 열린다 합니다.
그러고는 난탕라오지에 를 뒤로하고 계단을 올라가서 다리를 건너 대로를 따라 가다가
누구 여행기에서 읽은 헤이다다오고우워우종신 和义大道观物中心 (명품관)
이라는 상점가를 구경할까 하다가 이미 밤이 늦은지라 바로 호텔로 들어가기로 합니다.
손으로 그려온 지도 를 보며 걸어 대로를 따라가다 영파역 이 보이기는 한데 고가도로
때문에 북광장 에 가는 길을 찾기 어려운지라, 어떤 청년에게 길을 물으니 여기서는
먼저 남광장 으로 해서 영파역으로 들어가 지하 통로로 해서 북광장으로 가야 한답니다.
그러고는 돌아서 가다가 어리버리한 외국인이 밤길을 찾다 고생할까 싶은지 되돌아 와서
넓은 길로 가지않고 고가도로 밑 사람도 잘 다니지 않는 으슥한 길로 앞장을 서는지라
겁이 나는데 그렇다고 우리만 되돌아 갈수는 없는지라 내키지않지만 억지로 뒤따라 갑니다.
문득 10여년전에 선배님 부부와 함께 넷이서 보름간 러시아 전국일주 배낭여행을 하는데
모스크바에서 밤기차를 타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역에 내려서 우리가 서울의 여행사를
통해 예약한 호텔을 어렵사리 찾아갔는데 해당 번지에 도착하니 호텔이 없어져 버렸네요?
이 호텔 위치도 여행사에서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는지라 영어로 된 론리 플래닛
러시아판 을 사서는 러시아어 주소 가 아닌 영어주소 를 책에 나오는
지도와 대조해 참 어렵사리 찾아온건데... 정작 호텔은 없으니 기가 막힙니다.
50대 시골풍 러시아 아주머니 가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묻기에 손짓 발짓으로 하소연을
하며 전화번호를 보여주니 자기는 휴대폰이 없으니 지나가는 사람의 휴대폰을 빌려
호텔 직원과 통화를 하고 호텔이 이사를 갔다며 이사간 곳을 아니 가자고 앞장을 섭니다.
도중에 지름길 로 갈 생각인지 큰 길을 버리고 골목길 로 들어가는데 두어번 구부러지니
대로변의 현대적인 빌딩과는 전혀 다른 수백년 되어 쓰러질 것 같은 집들이 이어지며
음산한 분위기 를 자아내니 선배님은 겁에질려 그만 뒤로돌아 뛰자고 말하던게 생각납니다.
이윽고 영파역 남광장 에 도착해 역으로 들어가는데 어제 올때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
대부분이 북광장이 아닌 남광장으로 나가던게 떠오르니, 북쪽은 공공 및
상업 시설이 많고 남쪽은 아파트등 주택가가 밀집했기 때문이었구나....
하고 비로소 이해가 되는데 지하로 내려가 통로를 따라 가서 올라가니 북광장 입니다.
대로변을 따라 10분을 걸어서 海曙区 南站西路 199号에 호텔 锦江之星 宁波 火车站 酒店
에 도착하는데 슈퍼인 超市(초시) 에서 맥주 2캔을 10元에 구입해 방으로 들어가
마시며 텔레비전을 트니 중국 인민대회 모습인데 내일은 사오싱 绍兴(소흥) 으로 갑니다.
닝보(영파) 여행이 끝났는데 한가지 아쉬운건 이틀을 묵었지만 실제 관광은 하루뿐 이라
못본 곳이 많으니 지하철로 자오바오산역 에서 가서 해양실크로드 출발지 기념비 를
보고는 1281년 명주(닝보, 영파) 에서 출발한 원나라의 일본정벌군의 함대 를 떠올려
보고 싶었는데.... 시간도 모자라는데다가 지하철 연장공사가 끝나지 않아 못간 것입니다.
몽고는 고려를 채찍질해 함선 을 만들게 하고는 다시 고려군을 길잡이 로 세워 1274년
10월 3일에 마산을 출항해 북규슈 다자이부(太宰府) 를 공략하기 위해 하카타 와
하코사키(箱崎) 등지에 상륙해 야전에서 기습을 당한 일본군을 격파했으나... 밤에
태풍이 불어 연합군은 30~40% 에 달하는 많은 함선과 1만 3천의 병사를 잃고 철수합니다.
하지만 원나라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탐라(제주도) 에 목마장을 두고는 정동행중서성
이란 관부를 설치해 고려를 다그쳐 함선 900척 을 건조한후 2차 정벌전에 나서니
고려 충렬왕 은 일본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 개성에서 멀리 마산 까지 내려와
함선건조를 독려 하는등 적극적이었으니 왕의 행차는 고려-조선 1천년간 없던 일입니다?
충렬왕 이 이처럼 일본 침략전쟁에 앞장 선 것은 공을 세워 홍다구등 부원배 들을
몰아내고 왕권을 강화할 속셈 이었는데, 원나라가 3만명에 고려가 1만명 도합
4만 병력은 홀돈과 김방경 의 지휘하에 하카타만 을 공격했으나 이번에는
일본군의 수비태세가 완벽 한지라 육지에는 상륙조차 못하고 인근 섬만 유린합니다.
한편 정복한 송나라의 강남군 은 10만명에 함선 3,500척 이었으니 범문호의 지휘 하에
1281년 이 도시 명주(닝보, 영파)에서 출발 했으나 규슈에 늦게 도착해 오도(應島)
에서 동로군과 합세했지만 또다시 태풍을 만나 막대한 손실을 입고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원나라는 상당한 병력을 소모했지만 원나라 군의 규모를 생각하면 큰 타격은 아니었으니
여기 강남의 남송군을 동원해 소진케 함으로써 중국 내에서 원나라에 저항 할수 있는
씨앗을 제거 한 것이니 쿠빌라이로서는 체면은 구겼지만 밑지는 사업은 아니었던듯 합니다.
함선을 건조하고 식량을 마련해서 뱃길을 인도해 몽고와 함께 일본을 침공한
고려 는 두 차례의 전쟁 준비를 위한 가혹한 재산 착취와 수탈 및
강제 노동과 원정군 징집 및 전쟁에서 전사상자등 엄청난 인명 손실 외에도....
전쟁 준비를 위해 설치한 정동행성 은 고려 내정 간섭과 수탈 을 자행한 식민기구 였고
"왜구가 대규모로 일어나는 빌미" 를 제공했으니, 그들은 고려 가 "몽고의 앞잡이로
일본을 침략" 한데 대해 원수를 갚는다나요? 고려가 몽고의 길잡이로 일본을
침략한 댓가는 혹독했으니 왜구는 고려 해안을 노략질해 공민왕 시기에 100회 에 달합니다.
우왕 (1374~1388) 14년간 왜구의 침략 횟수는 370회 나 달해 예성강이 침탈
당하자 고려는 수도를 철원이나 한양 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는데...
조선초 까지 700회 이상 을 침략해 한반도를 쑥대밭 으로 만드니, 섬과 해안
지방은 사람이 살수 없는 땅으로 무인지경으로 변하는등... 혹독한 댓가를 치릅니다.